작성일 : 2010. 03. 15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을 보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라는 최고 훈장을 받은 안중근을 비롯해 동생 정근·공근 등 안 의사 가문의 인물 11명이 명단에 올라있다.
특정가문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례는 없지 않으나 10명이 넘는 유공자를 배출한 것은 안 의사 가문이 유일하다.
안 의사 가문은 모두 합하면 40여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순국 뒤 이산과 유랑을 거듭했던 가족들의 행적을 보면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안 의사의 아들 준생 처럼 민족반역자로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 남동생인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정근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회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정근의 차녀 미생은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백범의 아들(김인)과 결혼했다.
안 의사보다 열 살 아래인 공근은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를 계획한 한인 애국단이 백범의 주도로 결성되자 단장을 맡는 등 1930년대 백범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백범과 불화를 빚은 뒤, 1940년 행방불명돼 묘를 찾을 수 없다.
정근은 49년 상하이 만국묘지에 묻혔다고 하나 중국 혁명 와중에서 묘의 행방은 찾을 수 없게 됐다.
안 의사의 유해뿐만 아니라 동생 2명의 유해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안 의사의 직계인 아들(준생)과 딸(현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친일 행각으로 민족반역자란 손가락질을 받았다.
상하이에서 성장한 준생은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1939년 10월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지금 서울 신라호텔 근처)을 찾아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 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 드린다」고도 말했다.
격분한 백범이 광복 뒤 귀국을 기다리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안 의사 가문이 독립운동 최고의 명가가 된 데에는 역설적으로 일본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며 “안 의사 가문의 사람들에겐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준생의 경우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파가 된 경우와는 구분해서 봐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사학)는 2009년 안 의사 의거 100돌을 기념해 발표한「안중근 가문의 백세유방과 망각지대」라는 논문에서「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며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 의사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 잠시 머물다 가는곳 ㅣ 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