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 목은 이색 유적지
영해면 괴시마을 古宅들을
괴시리 동명의 유래는 고려 말엽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이
중국 사신으로 다녀와서, 자기 고향인 호지촌(濠池村)의 지형이
중국의 괴시와 흡사하다 하여 괴시라 하였다고 한다.
괴시1리인 호지촌 마을은 13세기말인 고려 말년에(1260년경)
함창김씨(咸昌金氏)가 입주하여 세거(世居) 했다고 하며,
그 뒤 16세기인 명종(明宗) 연간에 수안김씨(遂安金氏)와
영해신씨(寧海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하며, 17세기경(1630년경)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괴시2리인 관어대(觀魚臺)는 16세기초인 중종(中宗) 연간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입주하였으며 만취(晩翠) 권의철(權宜喆),
취옹(醉翁) 권의협(權宜) 형제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관어대란 이름은 목은 이색이 명명했다 한다.
괴시3리인 교동(校洞) 마을은 17세기경 윤태남(尹泰南)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영해군(寧海郡) 읍내면(邑內面) 지역이 되어 호지마 또는 호지촌,
괴시, 입천곡(卄川谷) 등으로 불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어대동(魚臺洞), 교동(校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괴시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괴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괴시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괴시리의 위치는 동은 망월봉(望月峰)과 대진리와 연해 있고,
남·서는 성내리·벌영리와 접해 있고, 북은 연평리가 있다.
(자료출처:영해면 지명유래)





마을 보호수


영양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
이 건물은 소유자의 12대조인 남붕익이 17세기 말에 건립했다고 전하는
영양남씨 괴시파의 종택으로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영은고택(瀛隱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9호
영은고택은 1871에 현 소유자의 5대조인 남공수(南公壽,1793~1875)가
건립하였다 한다. 건물은 정면4칸, 측면4칸반 규모의 口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대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엔 사랑방, 좌측에는 광과 방이 연결되고,
사랑방과 연결된 우익사는 2칸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감실을 두었다.

물소와 고택(勿小窩 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8호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 선생이
분가한 후 증소 남유진이 건립하였다.
정면 5칸, 측면 6칸 반의 규모로
정침, 고방, 중문, 사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소와 서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4호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 오른쪽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이고, 큰마루 앞면에는 4짝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으로 꾸몄다. 서당 주위에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담장을 둘렀다.
또한 앞면 담장 사이에는 4개의 기둥문을 세워 출입구로 삼았다.
주곡댁(注谷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3호
이 집은 1700년 대 말~1800년 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남경괄(1772~1835년)의 처가인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를 따서 주곡댁이라고 했다.

천전댁(川前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8호
남유용 공이 1876년에 건립하였으며
안채와 서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곡댁(沙谷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5호
남용(南鎔)이 1900년(고종 37년)에 건립한 것을
1942년에 남응호가 매입하였다. ‘사곡댁’이라는 이름은
현 소유자 남명순의 할아버지인 남조영의 처가 동네 이름인
경주 사곡을 딴 것이라고 한다.

구계댁(邱溪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6호
졸헌 남경악(1763~1821)선생이 1805년(순조 5년) 경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호지마을의 집들은 산을 등지고 있으면서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계댁 역시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서향이면서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건물은 크게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대남댁(臺南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7호
남준형이 1766년(영조 42년)에 건립한 가옥
정면 4칸 반, 측면 6칸 반 규모의 ㅁ자형으로 1900년대 초에 중건하였다.

영감댁(令監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4호
호은 남흥수(1813∼1899)가 1847년경 건립하였으며,
1950년대까지 대문채, 방앗간, 마굿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정면 4칸·측면 6칸의 ㅁ자형 건물로 자연석 기단위에 각주를 세웠다.
대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1칸의 방과 우측에 아랫방과 사랑대청이 있다.

경주댁(慶州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5호
수안김씨가 살던 집으로 순조 30년(1830)에 지은 것이라 전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 정침이 자리잡고 있다.

괴정(槐亭)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이 지은 정자로,
‘경목재(景牧齋)’라 하며 지내던 곳이다. 남준형 선생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전과 역사 연구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키우는데 여생을 보냈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힘써 칭송을 받았다.

목은선생 유허비각

목은기념관






연화산홍련암(連華山紅連庵)






경북 영덕의 목은 이색 선생 생가터(이색은 외가인 이곳 영덕의 괴시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稼亭) 이곡(李穀) :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역동(易東) 우탁(禹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다.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다. 원의 벼슬은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에 오르고, 고려에서의
벼슬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가정(稼亭) 목은(牧隱) 양(兩)선생 유허비












이색초상 (李穡 肖像.보물 제1215호.서울 종로구 종로5길 76 (수송동))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
(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목은영정 (牧隱影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
고려 후기의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 1년(1352) 세금제도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장려
, 불교억제 등 여러 정책에 대해 건의문을 올렸다. 공양왕
1년(1389) 이성계 일파가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자 장단
지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여강지역으로 가던
도중 생을 마치었다.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조선 태종 4년(140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은거한 뒤 야인 차림의 초상화가 따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분실
되었다가 일본에 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목은이색선생영정 (牧隱李穡先生影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2호.경남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고려 후기의 충신이자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60㎝, 세로 120㎝ 크기의 엷은 채색화이다. 이색은
삼은(三隱) 중 한 사람으로,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학문과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정치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화폭 왼쪽 윗부분에 조선
태종 4년(1404)에 제작된 이래 영조 42년(1766)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을 적어 두고, 오른쪽 위쪽으로는 선생을 찬양한 글을
기록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 기법이 잘 나타난 있는
작품으로, 강원도 원주 용화산 고자암에 보존하고 있던 것을,
광무 10년(1906) 중이리 소재의 경모당으로 옮겼다가 그곳이
하동댐 건설로 수몰됨에 따라 이곳 금남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괴사리 전통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