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선비 아버지와 인고로 사신 어머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 아버지께서는 4남 2녀 중 막내로 1899년에 당시는 고부군(古阜郡)인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창동(倉洞 : 속칭 창꼴)에서 태어나셨다. 자는 여안(汝安), 호는 척재(拓齋)며 초호는 연강(蓮崗)이라 했다. 부안으로 이거한 후에도 당신의 어머니를 못 잊어서 어머니의 묘소를 정읍 덕천면 다내(達川) 선영으로부터 부안의 옹정 뒤 연곡리(蓮谷里) 동편 기슭으로 밤에 손수 면례를 하여 이장을 하시고(당시 일제의 공동묘지법을 피하기 위하여) 자호를 연곡리의 연(蓮) 자를 따서 연강(蓮崗)이라 했었으나 후에 백부님이 척재명(拓齋銘)과 함께 척재로 지어준 것이다.
막내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엄부형의 슬하에서 예법과 글을 배웠는데 낙요당의 또래 중에서 항시 그 문재가 우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0여세가 되도록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젖을 빨았다고 하며 할머니 또한 막내아들에게 쏟은 사랑이 깊었던 것 같다. 선친께서 11세 때인 1909년에 조부님이 돌아가시고 중부님 송은공(松隱公)과 숙부님 영은공(瀛隱公)은 이미 분가하였으므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이때부터 큰형 후창을 모시고 집안의 큰살림을 스스로 요량하며 머슴들을 지휘하여 이끌었다고 하는데 어른 몫을 충분히 해냈다고 한다. 이때 후창께서는 간재 선생이 나라가 망함을 보고 옛 중국 제(齊)나라 노중연(魯仲連)의 도해지의(蹈海之義)를 좇아 선유도(仙遊島), 왕등도(旺嶝島) 등을 거쳐 마침내 부안의 계화도(界火島)에 은거할 때까지 모시고 다니며 그 뒷바라지를 하며 공부에 전력하였으므로 집안 살림 꾸림에 돌볼 겨를이 없었기도 하지만 어린 동생이 할머니와 어머니 형수를 모시고 집안과 살림을 잘 이끌었으므로 학문에만 전력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어려서부터 낮에는 농군으로 일을 하고 밤이면 낙요당에서 조카들을 데리고 집안의 젊은이들과 지악스럽게 공부를 하였으며 백형이 집에 돌아온 날 밤이면 아무리 고되어도 어김없이 형님 앞에 나아가 책을 펴고 앉아 막혔던 글의 뜻을 묻고 익히니 백부님이때때로 귀찮게 여기며 마지못해 가르쳐 주곤 하였다고 한다. 선친의 나이 16세가 되매 할머니께서는 장가가 늦었다고 걱정을 하며 서두르니 부안의 옹정(瓮井)마을 조양임씨(兆陽林氏) 가문의 봉초(蓬樵) 임기문(林基汶)의 큰따님 예문(禮文)을 배필로 맞아 1914년에 혼인을 하였다. 이때 신부의 나이는 15세였다.
옹정마을의 내 외가 조양임씨 집안은 별시공(別侍公) 한손(漢孫)의 자손들인데 별시공이 전주로부터 부안으로 옮겨온 지 500여 년이 되도록 자손은 비록 번연하지 못했지만 문한(文翰)이 끊이지 않은 집안인데 외조부 봉초공이 아들 6형제를 두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그 큰아들 정헌공(靜軒公) 임종원(林鍾元)은 간재의 제자로 학행이 있고 특히 의술이 높아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노망기가 있는 92세의 시할머니를 비롯하여 병약하신 시어머니와 성품이 까다로운 큰 동서며 그 모습을 감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근엄했던 큰 학자인 시숙 등 층층시하에서 받들어 모셨고 7대에 걸친 사손(嗣孫) 집안이라 철철이 올리는 사당의 천신(薦新)과 그 많은 제사며 빨래에 길쌈까지도 얌전하다는 칭찬을 들으며 용하게도 해냈으니 그 시집살이가 오죽 하였겠는가.
한 번은 집안에 노망난 시할머니 외에 아무도 없는 무더운 여름 낮인데 시숙 후창께서 외출했다가 들어오시면서 안에 대고 “물 한 그릇 떠오라”고 하여 물 한 대접을 정하게 떠받혀 후창 앞에 내밀었더니 “거기 땅에 놓으시오”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 순간 15세의 어린 신부가 어찌나 무안하던지 몸 둘 바를 모르고 간신히 떨리는 손으로 물그릇을 땅에 내려놓고 쫓기듯이 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제수와 시숙은 물건도 서로 마주 주고받지 못 할 만큼 엄격한 내외 상피(相避)의 예법도 모르느냐고 나무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내 어머니께서는 시집 온 후 짧은 3년 동안이지만 시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술회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어린 막내며느리의 시집살이가 안쓰럽고 가여웠던지 돌아가실 때까지 온화한 사랑의 말씀과 위로와 격려를 하여 주었으나 큰동서인 백모님 오리다리댁(星州李氏)으로부터는 분가하기까지 5년 동안을 혹독한 시집살이 속에서 힘겹게 살았다고 뒷날 술회하였다. 이른바 ‘서릿발 같은 큰동서 시집살이’를 인고로 사신 것이다. 신혼의 재미가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였고 밤 열두 시 이내에 잠자리에 든 일이 없고 먼동이 튼 이후에 일어나본 일이 없었다고 하며 자신의 의견이나 말참견은 생각도 못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살았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노예만도 못한 삶인데, 옛 여인들은 그와 같은 인고의 세월을 어찌 참고 견디면서 무엇을 위하여 한 번 뿐인 인생을 그렇게 참담하게 살았던 것일까. 참으로 억울한 삶이요 시집살이였다.
이 무렵 일제(日帝)는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은 후 항일·반일성(抗日·反日性)이 강한 가문 등을 골라 회유책으로 일본 천황이 하사한다는 이른바 ‘은사금(恩賜金)’과 ‘은사배(恩賜杯)’를 명망 높은 집안의 노인들에게 돌렸는데, 90세가 넘은 증조할머니에게 이것을 받으라는 통지가 고부(古阜)의 헌병대로부터 여러 번 왔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니 헌병들이 와서 후창 백부님 대신 선친을 체포하여 갔다. 백부님께서는 이미 계화도 간재 선생 우거지(寓居地)로 피하였었다. 잡혀간 선친께서도 이를 끝내 거절하니 저들이 혹독한 매질과 구두발길로 가슴을 차는 등 심한 고문을 가하여 수 개월을 고생하였다고 하니 1915년의 일로 선친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1916년 3월에 증조할머니께서 94세의 장수를 누리고 서거하시고 미처 출상 전에 할머니 전주최씨께서 돌아가시어 쌍 초상이 났다. 할머니께서는 병약하시어 항시 시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불효가 될까 염려하였다고 하는데 불효를 면하게 되었다면서 지극히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후 백부님은 다내(達川)의 선영 두 분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지어 시묘살이(侍墓 : 돌아가신 분의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거기에 3년간 거주하면서 모시는 일)를 하고 선친께서는 집에서 궤연(廓筵 :영위를 모신 제청)을 모시고 문상객을 맞으면서 농사일 등 살림을 총괄하였으니 그 때의 정황이 <척재문집(拓齋文集)>의 상중일기(喪中日記)에 자세하다.
아버지 척재(拓齋)선생
어머니 임예문(林禮文)여사
집안의 가세가 이때부터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여 전답은 줄어들고 빚은 늘어나 마침내 7대를 이어 내려오던 가옥과 전답의 일부가 7촌 숙(叔) 되시는 분으로부터 강제 차압되어 한동안은 부안 하서(下西) 월포(月浦)마을로 옮겨 살기도 하였다. 그 7촌 아저씨는 고조부 유죽헌(幽竹軒)의 막내동생인 석팔공(錫八公)의 손자다. 이 사단으로 그 분이 큰집 가옥까지를 빼앗아 버리니 창동의 우리 집안에 한동안 큰 집과 작은 집 간 갈등의 골이 깊었으며 그 자손들이 집안의 제사는 물론이요 문중 일이나 시제에도 참여하지 않았었다. 이와 같은 갈등과 앙금은 6·25 이후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선친께서 본가로부터 분가하여 비로소 독립된 가정을 이룬 것은 1918년 탈복을 한 이후로 종형들이 장성하여 입장(入丈 :장가를 듬) 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1918년 여름에 간문(艮門)에 나아가 관선록(觀善錄)에 이름을 올렸다. 백형과 함께 계화도(界火島)에 들어가 간재 선생을 찾아뵈옵고 폐백을 드리고 정식으로 사제가 되는 집지(執贄)의 예를 올린 후 관선록에 이름을 올리니 비로소 정식으로 사제의 의가 맺어진 것이다.
선친께서는 어린시절부터 창동에 가끔 오시는 간재 선생으로부터 훈사와 함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제자이긴 하지만 이 무렵 선생의 나이 이미 희수(稀壽)를 넘기고 80을 바라보는 노령이라 서둘러 스승과 제자의 의례를 정식으로 갖추고자 한 것이다. 간재 선생은 특히 집지의 의례를 중하게 여겨 이를 행함으로써 사제의 의가 맺어진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 다음 해 논밭 한 마지기 나누어 받지 못한 채 남의 집 협실을 얻어 분가를 하였는데 큰어머니께서 마음 씀이 넉넉지 못하시어 그 많은 세간살이 중에서 솥단지 하나에 귀 떨어진 소반 한 잎, 헌 자리 한 잎, 물동이 하나, 밥사발 두어 개를 나누어 주었다며 뒷날 어머니께서는 그 때의 일을 섭섭해 하셨다. 그러나 말이 분가지 농사할 땅 한 평도 없기 때문에 드난살이처럼 낮에는 큰집에 가서 일을 하고 잠만 와서 자는 신접 살림살이였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주로 일꾼들을 지휘하며 오랫동안 직접 농사일을 하셨기 때문에 못하는 일이 없었다. 논밭 갈고 씨뿌리기와 모찌기 모내기며 김매기, 벼베기, 타조하기, 풍석질하기, 나래엮기와 울타리하기, 새끼꼬기나 짚, 망태, 덕석 만들기는 물론이요 짚신이나 미투리 삼기 등에 이르기까지 농사꾼이 하는 모든 일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며, 뒷날 옹정과 모산에 살 때 마을의 일꾼들이 일을 할 줄 모르는 선비로만 알고 있다가 그 일솜씨를 보고 놀랐었다.
내가 열두세 살 때 메깥(솔밭)에 나는 쒸깃대를 약간 꺾어다 놓은 것이 있었는데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선친께서 댓가지 약간을 깎아 보태어 모시 노끈을 꼬아서 잠깐 사이에 쒸기(물이 내리는 곳에 거꾸로 놓고 오르는 물고기를 잡는 통발) 하나를 엮어주시며 논두렁의 물꼬에 놓아 물고기를 잡아보라 하셨다. 나는 옆에서 날렵하게 엮어 만드시는 선친의 솜씨를 보면서 내심 감탄하였었다. 이로보아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일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해 왔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친의 글공부는 철저한 주경야독이었기 때문에 평생을 공부하는 선비라 해서 일을 안 하거나 일을 한다고 해서 공부를 소홀히 하거나 하지 않았으니 이는 선친의 일관된 생활의 철학이다.
1918년 거상을 마친 선친께서 비로소 계화도 간제선생의 문하에 자주 나아가 1922년 7월 선생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셨는데 네 살 아래인 큰처남 정헌공(靜軒公) 임종원(林鍾元)과 같이 하였다. 이때 선친께서는 오랫동안 공부에 목마른 한풀이라도 하듯이 남보다 백천기공(百千其工)으로 열심이 공부하니 간재 선생께서 감복하시고 귀여워하며 여러 차례 말씀과 글로 격려하였던 일들이 <척재문집(拓齋文集)> 중의 화도록(華島錄) 조에 자세하다.
선친께서는 꿈과 이상이 높았던 청소년의 귀중한 시기의 대부분을 백형 후창을 대신하여 집안의 살림과 농사일에 빼앗기어 마음 놓고 배우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다고 술회하셨다. 그래서 계화도
간재 전우 선생의 영모
간재 선생을 제향하는 계화도 계양사
에 드나드는 4~5년 동안이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하였다고도 하셨다. 이때 계화도에 출입하는 많은 홍유(鴻儒)와 숙사(宿士)들을 뵈올 수 있었고 담론도 나누었으며 제제다사(濟濟多士)들과 사귀기도 하였는데 병암(炳菴) 김준영(金駿榮), 열재(說齋) 소학규(蘇學奎),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 덕천(德泉) 성기운(成機運), 정재(靜齋) 전화구(田華九), 가석(可石) 박상구(朴爽九),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등이요 벽산(碧山) 김홍재(金弘梓), 봉산(蓬山) 김현술(金賢述), 종양(宗陽) 최민열(崔敏烈), 실재(實齋) 김형익(金炯翼), 현광(玄狂) 전일중(田鎰中), 행해(杏海) 김노동(金魯東), 백졸(百拙) 최태일(崔泰鎰), 후송(后松) 손주탁(孫周卓) 등과는 동문이며 문우로 우정이 돈독 하였다. 이중 김노동(金魯東)은 충청도 홍성(洪城)의 한말 의병장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아들인데 우리 집안과는 세교가 깊었으며 선친과는 동갑으로 친했었다.
1922년 7월 4일에 간재 전우(艮齋 田愚)선생께서 82세로 영면하시었다. 하루 전날 위중하다는 급보를 받고 백부님과 같이 계화도에 들어가 임종하심을 지켜보고 “하늘이 사문(斯文 :유학(儒學)을 하는 분의 경칭)을 버리는구나. 이제 우리 도(道)가 어디로부터 전해질 것이며 후진들이 어디에 기댈 것인가!”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옛날 중국의 공자(孔子)로부터 시작된 유학이 이때에 이르러 한국의 간재(艮齋)로 끝난 것이다. 유월장(踰月葬 :사망한 달을 넘겨 출상하는 유교식 장례법)의 예법에 따라 9월 13일 익산 삼기면의 현동(玄洞)에 장례를 모실 때까지 선친께서는 최복(衰服 : 초상 때 복인들이 입는 상복) 짓는 일을 맡았었다. 계화도에서 실지로 출상을 한 날은 9월 11일이다. 부안에서 익산군 삼기의 현동 묘지까지 상여가 지나가는 길가에는 10만 여명 이상의 인파가 전국의 각지로부터 모여들어 성리학의 대학자요 철저한 항일지사였던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심상(心喪 :상복은 입지 않지만 상인과 같은 마음으로 행하는 일)으로 기년복(朞年服 :1년 복)을 스스로 정하여 입으셨는데 심상기간 중 한 번은 어머니께서 고기반찬이 생겨 무심히 밥상에 올렸더니 크게 꾸중을 하시며 밥상을 물리치시어 혼쭐이 났었다고 한다. 선생의 거상중인데 고기반찬을 올렸다고 크게 나무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