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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세계
절망 속에서 피어내는 희망의 꽃
―― 곽연화 시집<희망의 새를 기다리며>
임 노 순 (시인, 문학평론가)
【1】
시를 쓰는 일도 다른 예술의 세계처럼 '기술과' 천부적 능
력' 의 문제가 대립한다. 전자는 일정기간 수련을 통해 얻을수
있는 숙련을 의미하고 후자는 타고난 감성적 재능을 일컫는 말
일 것이다. 그래서 사는 아무나 쓸 수 있어도 시인은 아무나 되
는 것이 아니란 말이 있다.
기술적 연마만으로는 깊이에 한꼐가 있어 물이 솟구치듯 서
가 솟아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곽연화 시인이 처음 필자가 운영하던 '인천문예아카데미'에
찾아 왔을 때는 -1991년으로 기억한다. -기술도, 천부적 재능
도 없어 보였다. 단지 해보겠다는 의욕만 있어 보였다. 그렇지
만 그런 생각은 의례적인 관찰에 의한 통상적인 선입관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숙련을 통한 성장보다는 천부적 재능이 솟아
나는 걸 보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천부적 재능이 잘 솟
아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는 일뿐이었다. 그는 분명 내면에 고
여 있는 문학의, 시의 물을 뿜어내는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번 흐르는 물길이 트이자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모습의 시를
보여주며 지금에 이르렀다. 삶이 평탄할 때는 안정된 소리가,
시련울 겪을 땐 뼛속을 울리는 아픔의 소리가, 그것을 극복했을
때는 넓고 깊은 관조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가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준 것만 아니라 새로운 소리들을
모아 이번에 첫 시집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아프고 처연한 시절의 詩이기는 해도 단순한 절망으로 끝
나지 않는 시편들이 예사롭지 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우선 그가 초기에 천착하던 '시의 틀 잡기'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詩的 대상을 변용하고 있어 읽는 이
를 진지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아무나 쓸 수 있는 시를 쓰는 사
람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자신과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
는 것이다. 그의 시 <우리동네 · 4>에서처럼 요즘 우리 시의 한
흐름인 이야기 시-서사구조 혹은 사실주의 혼재 시-와 맥을 같
이 하면서도 그들의 해체의도나 장황한 사설과 다르게 단단한
이미지로 시적 완성도를 높여 가는 건간한 자세가 독자를 진지
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둥지 없는 새들은
바람의 가지에
둥지를 틀고
모래 기둥처럼 흘러내릴 듯
가로등이 서 있다
희미한 불빛 속으로
꽃잎처럼 날아든
날벌레마저도
기억을 잃고 쓰러진다
별이 고요한 하늘에
이제 애증도 식어
얼음 덩어리 같이 찬 달이
떠올라
꽃대궁마다
하얀 붕대를 간고
젖몸살 앓는 산모처럼
허리가 자록한 나무들은
비릿비릿한 달빛을 마신다
ㅡ시 <우리동네 · 4>부분
【 2 】
이번에 펴내는 시집의 시들은 그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개인
역사이자 시대상이 담겨 있다. 어느 누구의 시에서든 개인과 당
대의 삶이 투영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적당히 감추고 미화되
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절망을 절망으로, 희망을 희망으
로, 기쁨을 기쁨으로, 슬픔을 슬픔으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언
제나 그 반대상황을 복선으로 담고 있다. 시의 길이 바로 '보이
지 않는 길 찾기' 라면 대상인식에서 한 단계 넘어, 복선 인식을
통해 가능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은 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
한 문제이다.
강원도 춘천 철공소 골목의 방
하루종일 무지개를 피우며
쇠 잘려 나가는 소리에
삶이 잘리고
발목이 잘려
웅크리고 앉아 늘 춥고
어둡던
유년 시절의 집
그러나 희망은
결국
밑바닥에서
뜨거운 정신을 마시고
솟아나는 것일까
햇살이 물빛 같던
어느 날
젖은 쓰레기 속에서
파란 싹 하나 돋아나더니
벽을 타고 앙금앙금
기어 올라와
벌겋게 녹슨 햇살을 감고
아하, 나팔꽃
꽃망울을 터뜨렸다
ㅡ시 <유년의 집 · 1>부분
세상 어두운 곳에 박혀 살면서도
절망이 자신을 찾아낼까
두려워서였을까
이른 아침
예언자처럼 일어난 아버지는
낮은 담장에
날이 선 햇살을 꽂아놓으시곤 했다
담장 너머엔
좁은 골목이 있었고
그 길은
교회로 올라가는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
ㅡ시 <유년의 집 · 2>부분
가로등 불빛 아득한
골목
깊게 내린 어둠 밟고
걸어오는
아버지 발자국 소리 들리면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희망들
오늘따라 창밖엔
눈처럼
하얀 꽃잎이 날리고 있다
노을진 언덕에서
어린 가슴
발갛게 물들이던
아버지 하모니카 소리가
하얗게 하얗게 쌓이고 있다.
ㅡ시 <세월>부분
그의 시는 대체로 슬프다. 그러나 단순한 슬픔의 진술이 아니
란 걸 금방 알게 된다. 좌절과 상실감이 곽연화 시의 기본 정서
이긴 해도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늘 마련해 놓는
다. 출구가 없는 절망의 진술이 우리의 리얼리즘 시라면 곽연화
의 시는 그것과는 아주 다른다.
시 <유년의 집>도 슬픈 시이다. 암울했던 그의 유년은 그러
나 단순한 슬픔의 진술이 아니다. 온 가족의 희망이어야 하는
아버지는 「공설운동장 정문 앞에서 / 때론 극장 통로에서 / 무
슨 장사를 하는지 늘 / 시커먼 신발을 신고 나가던 / 아버지」는
「늦은 밤 어디선가 / 사이렌소리가 들리고 / 일상을 어지럽히던
/ 발자국 소리도 멎으면 / 바다 속 같이 조용한 골목을 / 술취한
아버지가 / 비통한 추억의 노래를 부르며」걸어오셨다. 가진 것
다 잃고, 「버릴 것 다 버리고 / 희망까지 버린 아버지」는 식솔들
을 데리고 자주 거주지를 옮겨다니셨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화자는 그러한 시절
을 어둠으로, 아픔으로만 간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팔꽃을
발견하곤 그 작고 하잘 것 없는 것에 희망을 찾았고, 꽃에게 희
망이라는 이름을 달아 준다. 아버지는 실패와 좌절감을 안고
「바람 많은 / 인천까지 흘러」왔고, 마침내 눈 내리는 어느 날 돌
아가셨다. 아버지는 그러나 언제나 희망이었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꽃잎으로, 하모니카 소리로 변용할 수 있는 힘은 절망 속
에서 희망도 함께 찾아내는 복선적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
다.
【 3 】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부모님과 남편, 슬
하의 남매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평생을 함께 의지하며 서로에
게 희망이 되리라던 남편을 잃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 남편은
하늘이었고, 왕자였다. 절망일 때 발견했던 나팔꽃은 더욱 아니
었다. 그런 그가 이름도 모르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명도 모
른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일까, 그를 아끼는 많은 지인들이
자신을 버릴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한동안 앎을 만큼 알았는지
못하던 소주도 한 잔씩 하며 나타났다. 시조차 버릴까 봐 두려
워했던 것도 기우였다.
출장간 남편에게서
몸살로 속소에 누워 이싸는
전화가 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습관처럼 한번식
온몸에 열꽃이 피면서
며칠씩 앎고 일어나는
남편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생일날
아침
남편은 나에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뜨거운 꽃다발을
보내주다니
ㅡ 시 <생일날>전문
그때에게 가는 길도 모르면서
힘껏 페말을 밟습니다
노란 꽃밭처럼
쓰러질 듯 서 있는 가로등 불빛 속
이대로
하늘 향해 팔 벌리고
눈감으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때의 땅에 달을 수 있을까요
ㅡ <그리움의 질주> 부분
풀장간 남편이 몸이 아파 숙소에 누워 있으면서도 생일날 아
침 축하꽃다발을 보내주었다.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선물
이었음을 시 <생일날>마지막 부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한동안의 좌절과 방황의 가슴앎이를 다른 시 <그리움의 질주>
로 보여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다음 이웃들로부터의 무시와
냉소감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수구가 막혀 위층에서 쏟
아지는 물이 모두 내 집 욕실로 흘러와 웅덩이를 만든다.「희망
의 등불을 밝히고 / 밑바닥에 가라앉은 / 동그란 일상 건져내는
동안만 / 마음의 빗장 닫지 말아 달라고 / 부탁했는데 / 위층에
서는 또 배수관이 터질 듯 물이 쏟아져 내려온다 // 물소리에
놀라 / 욕실로 뛰어들어간 나는 / 물컹한 달덩이라도 토해낼 듯
/ 울컥거리는 하수 구멍을 걸레로 틀어막고 앉아 / 미끈미끈한
어둠을 퍼 올리는데 / 물 속에서 건져 올린 내 모습이 / 마치 비
바람 속을 걸어나온 한 마리 새 같다」(시 <절망의 하수구 · 1>
부분), 막힌 하수구를 고쳐 달라고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도 듣
는 등 마는 둥이다. 결국 「살얼음 같은 이웃과 / 타협을 포기하
고 / 봄이 오기전에 / 희망의 출구를 찾아 공사를 / 시작했다」.
「그리고 희망의 동그라미 만들며 / 흘러갈 수 있는 새로운 수맥
을 찾아 / 욕실을 파고 방바닥을 파고 / 내 가슴을 파 내려가는
동안 / 나는 민감한 촉각을 세우고 / 세간살이 옮겨놓은 / 작은
방에 끼어 앉아 / 햇살 하얗게 쏟아지는 / 저쪽 세상을 향해 길
을 터 간다」고 진술한다. 시인 곽연화가 아닌 생활인 곽연화가
겪는 삶이 얼마나 막히고 또 답답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는 일찍부터 막힌 세상을 뚫고 '햇살 환하게 쏟아지는 / 저쪽
세상을 향해 길을 터' 가는 방법을 체득했다. 그는 현실의 아픔
을 털어 내고 환한 세상을 찾아 얼마동안 일본에 가 머문다.
【 4 】
그는 정말 마법에 걸린 줄도 모르고 하늘 높이 뛰어올라 무
지개 한 바기지 퍼 올리려고 햇던 것일까? 그 순간에 예고도 없
이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간 것일까? 그래서 그 모든 걸 마침내
새로운 떵에서 잊을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그의 시를 읽는 동
안 절망이란 단어에는 항상 희망이란 단어가 뒤따랐기 때문이
다. 그가 진정 찾으려고 하는 '햇살 환하게 쏟아지는 저쪽 세
상' 으로 가는 길을 튼다면 독자들에겟도 희망의 이정표가 될 터
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절벅절벅 비 내리는
동경 고이와 거리에서
밤이면
하늘 바다로 간 당신을
잊기 위해
극약을 마시듯
술을 마신다
이름도 분명치 않은 칵테일 한 모금
쓴 세상을 마시듯 꿀꺽 삼키니
목 줄기로 아프게 타 들어가는
모래알 같은 그리움
온몸에 짜르르한 줄기를 뻗으며
영산홍 붉은 꽃들이 사무치게 피어난다
뜯겨져 펄럭이는 허전한 마음에
의지의 못 하나 스스로 박지 못하는
검불 같은 나는
쓰잘 데 없이 피는 또 왜 이리도 뜨거운지
어둔 이파리 훑어 내리며
철푸덕 주저앉아
아무렇게나 피어도 좋은
이 부끄러운 자유
ㅡ시 <미망 · 1>부분
온몸에 눈발이 박혀 막막한 가운데
전철을 탔다
어둔 강물이 흘러가는 철교를 지나고
생의 마지막 역처럼
작은 역에
등 굽은 사람들을 떨구어 높은 전철은
어느 사이 내 마음 아프게 박음질하며
무덤 속 같이 노랗고 몽롱한 터널을
달리고 있다
ㅡ시 <미망 · 2>부분
오늘은 그대가
젖은 안개 옷 걸치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날
멀리 떠나와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마음은
바람만 스쳐도 눈물이 난다
<중 략>
오늘따라
동경 우에노 여름밤은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하고
달빛은 호수를 건너가듯
물소리를 내며 천천히 흘러간다
ㅡ시 <미망 · 3>부분
그가 찾아 간 일본 땅이 안식이 되고, 위로가 되고, 아픔을 지
워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그의 일본 체류 중에 쓴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지워내려 해도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것이
사람의 기억이다. 더구나 사랑의 기억은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온
대도 털어내기 쉽지 않다.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은 환경의 변화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거리 때문에 생긴다. 밤마다 화자는 하늘
바다로 떠난 사람을 잊으려 '극약처럼 술을 마시'고 '쓴 세상'
을 마시듯 목 마시던 술을 억지로 마시며 털어내려고 해도 그리
움은 '사무치도록 피어나는 영산홍' 꽃잎처럼 돋아나고 만다.
'생의 마지막 역'을 꿈꾸던 '천국' 같은 동경의 우에노 역시
'도무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만 가득한 외로운 곳일 뿐
이다. 떠난 사람의 기일을 동경에서 맞게 되는 그 슬픔을 쉽게
털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슬프다고 울 수만은 없는
일. 그래서 '달빛은 호수를 건너가듯 / 물소리를 내며 천천히
흘러간다' 고 그리움을 달빛에 전이시킨다. 그의 일본행은 그리
움만 키웠고,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라는 위안 그 이상은 못 되
었던 듯하다. 술 한 잔으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된 그는 「하
늘 까지 기울여 마셨으니 / 그대 있는 곳 / 아무리 멀다 해도 /
건들건들 걸어서라도 / 갈 수 있을 것 같다」(시 <귀향 · 1>)고
믿으며 그는 이 땅에 다시 돌아왔고 이 땅의 현실과 정면으로
섞이고자 한다.
그가 이 땅에 돌아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게 아마 인천
문인산악회 회원들일 것이다. 산을 오르며 조금씩 세상을 멀리
보고, 넓게 느끼고자 해서 였을 것이다. 이제 갇혀 있지 않고 닫
혀 있지 않기 위한 노력의 증거가 나타난다. TV에서 뜨거운 정
사 장면이 나와도 채널을 돌리거나 끄지 않는다. 감자가 없는
감자탕을 먹으면서 주인아주머니의 시퍼런 일상과 무거운 그림
자르 읽어낸다. 세상과의 조화가 그의 슬픔을 덜어내는 큰 작용
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하상 후 집에 돌아가는 일이 힘겹거나
지겹게 느끼지 않는다.
선반 위에서
혼자 떠들어대던 TV는
언제 화면이 넘어갔는지
분륜의 정사장면이
얼굴을 뜨겁게 한다
슬며시 일어나
스위치를 눌러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냥 쉽게 눌러 죽이기엔
숨가쁘게 날아오른
그들의 슬픈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의 불꽃 속으로
추락할 것만 같아
ㅡ시 <하산 · 1>부분
도대체 감자는
뜨거운 욕망의 입술을 깨물며
어디로 갔을까
아까부터 어둠을 등지고
커다란 나무도마에
자신의 시퍼런 일상을 잘라내고 있는
아주머니를 불러
감자의 행방을 묻자
어둔 강을 건너오듯
뒤뚱뒤뚱 걸어와
다 먹은 냄비에
감자 몇 알을 더 넣어준다
<중 략>
결국 우리가
설익은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소리 없이 웃고 있을 때
아주머니의 무거운 그림자 발엔
시퍼런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지마다
하얀 감자꽃이
피어나고 있다.
ㅡ 시 <하산 · 2>
【 5 】
그는 이제 울지 않으려고 한다. 세상과의 조화, 세상과의
해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연작시와 <사추기>를 통
해 삶의 새로운 맛을 보여준다. 「세월의 녹슨 칼이 / 스쳐 지나
간 자리마다 / 하얀 꽃 뭉게뭉게 피어 잇는 산 속에 / 아프게
베어질 누군가의 / 한 시절을 예언하듯 / 뻐꾸기 / 비단실로 제
운명의 발목을 촘촘히 / 감으며 울어대고 / 입술에 날이 선 잡
풀이 무성하게 자란 초막지붕 / 호박꽃이 피어 있어 / 등불이
켜져 있는 닭장 같다」(시 <우리동네 · 2>)고 자신의 동네에 따
뜻한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
들꽃같이 수줍은
내 사랑이
이루어지던 날
기울어진 우정의 텃밭에
활짝 피어 있던
독오른 꽃 한 송이
하얀 치아를 반짝이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늙은 여우라고
그것도 내 뜨거운 사람 앞에서
원 세상에
이제 막 다시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나이 사십에
원 세상에
이제 막 다시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나이 사십에
인생을 끝내라니
그러면
이미 열어놓은 내 가슴은
부끄러워 어떡하지
밤마다 꿈속에서
하얀 치아가
삶을 물어뜯어
사랑이 식어버리면 난 정말
어떡하지
ㅡ시 <사추기>전문
이번 시집에 선보이는 시들은 대부분 서른 행 가까운 긴 시들
이다. 짧은 시라고 해도 스무 행이 넘는다. 언어의 함축성이 시
의 특질이라면 이 시들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한 시와 산문
이 다른 점은 전자는 표현의 장르이고 후자는 설명의 장르이다.
설명적 진술이 많은 이 시들 또한 문제를 보인다. 그러나 서사
적 시와 리얼리즘 시에서는 얼마간의 설명적 구조가 허용된다.
호흡이 길다는 것과 장황하다는 것도 구분되어야 한다. 곽연화
시인은 분명 시와 산문을 구별할 줄 않다. 삶의 이야기이기 때
문에 서사 구조로 시를 쓰고 있으며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길
어질 수밖에 없다.곽연화 시인은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시
적 대상을 인식할 때 주관화하지 않고 객관화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그의 시를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가 없게 된다. 29행으
로 길게 간시 <희망의 새를 기다리며>가 이를 증명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 마음의 초경을 치르고 / 단숨에 / 애늙은
이가 되어버린 / 아들녀석이 // 세상 어둔 줄기를 / 타고 올라
가 / 내 눈물의 가슴에 / 희망의 둥지를 얹어놓아 / 나는 그 믿
음으로 / 살고 있는데 // 희망의 둥지를 얹어놓아 / 나는 그 믿
음으로 / 살고 잇는데 // 요즘 녀석은 / 푸르게 돋아난 / 사랑니
를 물고 / 어둔 벽에 기대어 / 말문을 닫더니 // 오늘은 결국 /
내 마음에 상처를 내고 / 뛰쳐나가 / 늦도록 / 돌아오지 않는 것
은 / 아마도 절망의 가지엔 / 별보다 눈물이 더 많이 / 매달려
있기 때문일 거야 // 하지만 / 이 슬픈 기다림은 / 절벽 같은 /
내 / 마지막 힘이다」(시 <희망의 새를 기다리며> 전문)에서 아
들 '희망의 새'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긴 호흡으로 그러
나 단단한 이미지의 구조를 흐트리지 않고 담담하게 진술했다.
현대시의 한 흐름이기도 한 산문적 진술이라도 표현의 장치를
소홀하지 않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며 시를 읽는 맛도 함께 얻을
수 있다. 이번 시집의 시편들이 절망과 희망의 복선적 인식에서
쓰여졌다면 머지않아 그가 마침내 찾아낼 희망의 시편도 기대
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