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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계획 회장단과 임원회의를 통과하여 결정 되었아오니
이병길 총무님께 참가 신청을 하여 주십시오.>
제 316회 ( 2008년 7월 27일)
♣광주알프스산악회 산행 계획 ♣
◈산명 :적자봉(赤紫峰) 또는 격자봉 (格紫峰):430.3m)
==== 섬산과 해수욕 산행 ====
◈위치 : 전남 완도군 보길면.
산행예정 시간 : 2시간 30분>
출발 일시와 장소: 7월 27일(일) 07시 00분 대인광장
월드컵 경기장 앞(06:30)-대인광장(07:00)-동광주홈플러스앞(07시10분)
▣ 등산 예정 코-스 ▣
♣ 보길도(세연정-격자봉-예송리해수욕장 및 주차장♣
산행시간(총산행시간 : 2시간30분)
오르는 시간 : 1시간
점심식사 시간 : 30분
내려가는 시간: 1시간
시정표
07:00 - 09:40 광주(대인광장) 출발-땅끝 도착
10:00 - 10:40 땅끝 출발-노화(산양진)도착
10:40 - 11:00 산양지 출발-세연정 도착 후 관광
11:00 - 12:00 세연정 출발-격자봉 도착
12:00 - 12:30 점심식사
12:30 - 13:30 격자봉 출발-예송리해수욕장 도착
13:30 - 17:00 해수욕 및 자유시간
17:30 - 17:40 예송리 출발-산양진 도착
17:50 - 18:30 산양진 출발-땅끝 도착
18:30 - 19:30 친교 및 뒤풀이, 그리고 정리
19:30 - 22:30 땅끝 출발-광주 도착
▣ 특별 준비물 ▣
해수욕 할 제반 개인준비물 <해수욕하는데 지장 없도록 하실것>
槪觀 (개관)
섬 하나가 면을 이루는 보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바다에 에워싸인 그림같은 섬으로 섬 풍광이 뛰어나며. 이 섬은 일부 낚시꾼과 이곳의 은밀함을 즐겨온 소수 단골 탐방객을 제외하고는 찾는이가 드문 편으로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지켜오고 있다.
보길도의 분지 남쪽에 솟아있는 격자봉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 -1671)의 유적지를 산자락에 품고 있는 산이다. 고산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큰집에 양자로 가게 되어 해남 윤씨 집안에 대종을 잇는다. 51세 되던 해(1637년) 왕(인조)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등지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정착하기로 하고 부용동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고 한다.
격자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산세가 마치 황소가 드러누운 듯 부드럽고 완만하다. 그러나 산속으로 들어서면 황소 머리에 뿔이 돋은 듯이 고만고만한 거리를 두고 기암이 나타나고 그 기암마다 독특한 모양을
뽐내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정상에서 북으로는 분지를 이룬 부용리와 동천석실, 승룡대, 석전대 등이 샅샅이 내려다보이고 바다 건너 멀리로는 해남 땅끝과 달마산이 가물거린다. 북에서 오른쪽으로는 노화도 뒤로 완도 상황봉이 하늘금을 이룬다.
임진왜란 때 윤선도는 6 살이였네요.
아래는 네이버 백과사전에 있는 윤선도에 관한 것 입니다.
윤선도 [尹善道, 1587~1671] (요약: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본관 해남(海南)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별칭 자 약이(約而), 시호 충헌(忠憲)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고산유고(孤山遺稿)》
본문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의견 쓰기>
윤선도와 보길도 k4092g 답변채택률 93.7% 2005.01.26 09:34
질문자인사 : 성의껏 답변해 주셨는데 채택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임진왜란이 아니라 병자호란입니다. 명분은 왕의 항복과 적과 화의했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제주로 향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도망갔다고 보일 수 있죠.
적과 화의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강경책을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숙청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나라가 강경파인 척화파에 대해 가만히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뻔한 이치죠. 전쟁이 끝나고 청은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본국에 데려가서 죽입니다.
윤선도도 아마 그런 것쯤은 내다보았겠죠. 어쨋든 제주도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자연에 이끌려 정착하게 됩니다. 보길도에는 윤선도과 관련된 사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질문자님이 아시는 것처럼 윤선도의 재산이 어마어마해서 보길도에서 호화생활을 합니다.
님이 제시한 세부적인 방탕한 생활에 대해서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안했다고 할수도 없고 했다고 할수도 없군요. 윤선도는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많이들 존경하고 있죠. 님이 들은 그런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당시는 조선시대이고 양반사회였습니다. 뒷조사해서 뒤 안구린 사람 없겠죠.
그리고 하나 알아두셔야 할 것이 사극을 보면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는 고관대작들이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고 합니다. 그 죄인이 언제 사면되서 정계에 복귀할지 몰라 지방 수령들이 알아서 음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바치는 일이 많았다 합니다. 귀양살이에서도 이름있고 명망 있는 죄인들은 대접을 받고 생활을 했다합니다. *****************************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게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견회요 (遣懷謠)〉5수와〈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여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 되었다. 이 무렵〈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 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생활을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으로 선택하기도 한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된 가첩(歌帖)으로〈산중신곡〉,〈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http://www.bogildo.com/
♣ [이병길 총무님께 참가 신청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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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에 관한 문의 연락처>
회장(안기수) : 011-624-0329 =(총괄)
총무(이병길) : 010-4616-1460 = 062-267-5307 =(총무)
산행이사(류춘열):016-9601-1066=(산행)
2008. 7. 15
광주알프스산악회장 안 기 수
첫댓글 안회장님 참석하도 되는지 여쭤봅니다.
이웃분들 권하시어 많이 참석토록해주시고 이병길 총무님께 신청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