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학명예박사 이국노회장의 「명품 골프장으로 가는 길」-1
영친왕에 의해 조성된 경성골프구락부
1941년 연덕춘 전일본오픈골프대회서 우승
서울컨트리클럽에 김종필총리의 휘호 ‘소복문’
서울컨트리클럽의 뿌리와 자랑스러운 역사-Noblesse Oblige
영친왕(이은)은 1927년「이왕직」장관에게 지금의 서울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군자리 일대의 땅 30만 평과 건설 하사금 2만 엔 그리고 3년간 5000엔의 보조금을 주고 국제대회를 할 수 있는 골프장을 만들도록 한다. 1929년 드디어 한반도에 18홀 정규 코스(6,200야드)가 완성되고 1930년 6월 22일 정식으로 개장된다. 그 당시 이름은 ‘경성골프구락부’라고 했으며 이것이 한국 골프계의 총 본산인 ‘서울컨트리클럽’이 태동하게 된 시초이다.
1933년 군자리 골프장 근처에 살던 17세의 ‘연덕춘’은 ‘캐디’로 일을 하며 골프를 접하는데, 2년뒤 경성골프구락부는 골프에 재능을 보인 그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다. 연덕춘은 경성골프구락부 소속 프로선수로 1941년 제4회 전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대회에서의 우승이다.
군자리 골프장은 1943년 2차 세계 대전으로 농경지로 변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 되던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현장방문 및 복구 명령에 따라 총무처를 중심으로 복구공사가 진행된다. 그러나 1950년 5월 복구공사를 완료하였으나, 불과 개장 1개월 만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침략에 다시 폐허가 된다. 6·25가 끝날 무렵인 1953년,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이순용 외자청장 등의 주도로 골프장 코스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고, 마침내 1954년 7월 파란만장한 군자리 골프장 6750 야드가 재탄생되게 된다.
이때 군자리 골프장의 복구와 더불어 골프장의 운영 주체인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를 창설하기 위한 ‘創設 同意會’가 만들어지게 된다. 당시 창설 동의회의 회원은 모두 18명인데, 4·19 당시 사망한 이기붕 선생을 포함하여 이순용, 백두진, 장기영, 김진형 등 당대의 정관계의 거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1953년 11월 11일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Seoul Country Club)가 창설되었고, 이사장으로 이순용씨가 취임한다.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사단법인의 설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같은 곳의 군자리 골프장 운영주체이던 종전의 경성골프구락부의 사업과 오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예: 경성대→서울대, 경성시→서울시)
이후 서울컨트리클럽은 1965년 9월 23일 한국골프협회(Korea Golf Association, 약칭 KGA)가 창립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골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해외 선수파견, 출전경비, 국제기구업무, 프로선수자격, 국내외 골프의 모든 인가와 승인을 서울컨트리클럽 이사회에서 결정 승인하였다. 국내외 골프대회의 경기위원회 및 규칙위원회의 업무를 서울컨트리클럽의 경기위원회 및 규칙위원회가 맡아서 수행하였다. 심지어 월드컵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들고 입장하는 국기를 서울컨트리클럽의 깃발로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서울컨트리클럽은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를 창설하였으며, 1957년 8월 한국 최초로 서울컨트리클럽 부인회(婦人會)를 발족시킴으로써, 우리나라 여성 골프의 문을 열게 하였다.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앞서 본 대한골프협회(KGA)와 더불어 우리나라 골프의 양대 산맥의 하나인 한국프로골프협회(Korea Professional Golf Association, 약칭 KPGA) 역시 서울컨트리클럽 프로샵에서 탄생되었고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orea Ladies Professional Golf Association, 약칭 KLPGA) 또한 같은 곳에서 태동하였으며, 유명한 ‘구옥희’ 프로 역시 서울컨트리클럽의 캐디로 골프와 인연을 맺고 있다.
또한 지금 되돌아보면 다소 놀라운 일이기도 한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관저인 청와대에서 직접 서울컨트리클럽이 주최하는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의 우승자에 대한 시상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은 서울컨트리클럽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며, 그 위상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편, 군자리 골프장은 1970년 12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나라의 새싹인 어린이들의 공원으로 자리를 내주고, 그 역사적 소명을 다한다. 어린이대공원에 가보면 그 정문을 들어서면서 길옆을 따라 언덕 끝까지 나있는 잔디밭을 볼 수 있다. 골프장에 익숙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과거 군자리 골프장 시설의 페어웨이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잔디밭 맨 끝에는 어린이들 씨름장이 있는데, 바로 벙커가 있던 자리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 군자리 골프장의 페어웨이와 벙커는 오늘날 어린이들의 잔디밭 놀이터와 씨름장으로 씩씩하게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군자리 골프장 시절의 석물들은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구나 보존 등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어린이 대공원 구석 구석에 사실상 방치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를 회수하여 골프 코스의 적절한 장소에 설치하고 보존하는 일 또한 서울컨트리클럽의 앞으로의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멤버십 클럽인 한양컨트리클럽은 1970년 9월 기존 골프 코스(18홀) 옆에 신규 골프 코스(18홀)를 증설하여 국내 최초로 36홀 규모의 골프장을 완성한다. 군자리 골프장을 폐쇄하게 된 서울컨트리클럽은 1972년 한양컨트리클럽 운영회사인 한양관광(주)의 주식 전부(100%)를 인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사하게 된다. 한양컨트리클럽 골프장 신‧증설 당시 그 설계는 모두 ‘연덕춘’과 ‘야기’라는 일본인이 보조하였으며, 현재의 서울컨트리클럽 골프 코스는 현존하는 골프장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곳으로서 가히 국보급 보물로 문화재 등록이 그리 멀지 않았다 하겠다.
2000년대 초까지도 서울컨트리클럽의 역사가 바로 대한민국 골프의 역사이고, 서울컨트리클럽이 대한민국 골프를 대표한다는 사실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지금 남서울 골프장에서 열리는 매경오픈골프선수권대회나 천안 우정힐스 골프장에서 열리는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 모두 서울컨트리클럽이 낳고 키웠던 대회이다. 대한민국 골프 역사에서 서울컨트리클럽이 차지하는 위상과 기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의 과정 바로 그것이다. 사소한 형식에 얽매여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와 자산을 잊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웠지만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였지만 우울하기도 한 그리하여 다양한 색깔을 가진 서울컨트리클럽을 보기 위해서 세계 각국의 골퍼들이 한국 골프의 성지(聖地)로 모여드는 미래를 상상하게된다. 영친왕, 이승만, 연덕춘 동상은 물론 김종필의 휘호가 적절하게 보전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로 영면에 드셨다는 부고를 접하고, 그분 생전에 불민한 본인을 살뜰히 아껴주신 정을 생각하여 한걸음에 고인의 영전에 달려가 조문을 하였다.
조문을 마치고 귀가하는 동안, 그분과의 이런 저런 추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회장, 나는 말이야 자네도 아다시피 골프를 참 좋아하지……. 그래서 한 가지의 흔적을 남겼네. 뭐냐 하면 서울CC 9번 홀과 10번 홀 사이에 문이 하나 있지 않나? 그곳에 내가‘소복문(笑福門/눈물)’이라고 써서 붙였는데, 그 뜻이 뭔 줄 아나?
전반 9홀에서 공이 잘 안 맞았다고 화내지 말고, 후반 9홀을 웃으면서 즐기라고 쓴 거야.”
연덕춘 : 1916년생으로 1933년 경성골프구락부의 캐디로 출발하여 2년 뒤인 1935년 구락부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골프유학을 갔으며, 1941년 제4회 전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 경성골프구락부 소속 프로 선수로 출전하여 우승(290타)하였다. 한양, 제주 오라 등 골프장을 설계하였고, 서울컨트리클럽 골프장의 복구 책임자로 일하기도 하였으며, 대한프로골프협회(KPGA)를 창설하는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골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