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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어 |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국가명 |
국가수 |
영 어 |
필리핀,싱가폴,인도,스리랑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파푸아뉴기니 구암,사이판,피지,영국,에리트리아,케냐,우간다,탄자니아,말라위,짐바브웨,브츠와나,남아프리카 공화국,나미비아,나이지리아,가나,라이베리아,감비아,가이아나,미국 |
26개국 |
독일어 |
독일, 오스트리아 |
2개국 |
화란어 |
남아프리카 공화국,수리남,나미비아,네덜란드 |
5개국 |
불 어 |
니제르,토고,부루키나파소,세네갈,말리,차드,튀니지,프랑스 |
8개국 |
포루투갈 |
기니비사우,브라질,포루투갈 |
3개국 |
아랍어 |
차드,튀니지,요르단,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이집트,수단 |
8개국 |
스페인 |
아르헨티나,파라과이,우루과이,볼리비아,페루,에쿠아돌,과테말라, 코스타리카,스페인 |
9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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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언어들이 선교지에서 그 국가의 자국어 사용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필수적으로 배워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를 감당하기가 힘들거나 거의 할 수 없는 지역들이 많고 또한 선교사역에 동참한다고해도 깊숙히 동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국제적인 언어는 아니지만 한 국가안에 엄청난 인구로 인하여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 예를 들면 중국어가 그렇고 인도의 힌디어 같은 경우가 그렇다. 국제적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으나 이들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인구의 숫자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가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이들 국가들을 선교지로 정한다면 언어적인 부담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거대 인구국가에서 소수 언어부족을 선교하려고 한다면 그 국가의 표준어, 공용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선교사역이 원활해진다고 할 것이다.
2) 국제적 언어를 배워야 한다.
특별히 선교사가 자국어와 선교지의 언어 한두개를 배워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좀더 넓고 국제적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현시대의 범세계적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영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필자가 선교지(인도)를 정탐하면서 현지 언어를 배우는데 있어 느낀점이 있다. 그것은 선교지의 현실마다 조금씩 다르겠으나 현지에 오기전에 국제적 언어를 능숙할 정도로 배워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지의 선교사들이 언어때문에 겪는 고충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한 예를 들어보자.
인도 같은 경우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엄청난 기간동안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같은 경우 영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 진출의 길이요, 심지어는 사회적 신분까지 좌우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사용한 모국어를 무시하고 영어만을 사용할 정도로 영어사용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런데 그들은 외국인들이 자국에 와서 영어사용을 잘하지 못하면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며 자신들의 영어 잘함을 뽐내는 경우도 흔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선교사가 영어를 잘 말하지 못하면 그 선교사의 사역은 매우 힘들어진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 선교사들이 기본적인 국제적 언어인 영어를 온전히 배우지 못하고 선교현장에 임할 경우 겪는 이중적인 언어의 고통을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가지고 온다. 즉 문화충격, 언어충격이 엄청난 것이다. 그러므로 국제적 언어가 원활히 사용되는 지역일 수록 그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국제적 언어의 원활한 사용이 준비된 상황에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그 지역의 언어들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미리 국제적 언어를 배울 수 있겠는가? 몇가지 길이 있다.
첫째, 자기가 소명받았다고 느끼는 선교현장으로 가기전에 그 현장에서 사용되는 국제적 언어를 사용하는 본국에 가서 언어 연수를 일정기간 받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국제적인 선교단체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시스템을 가동중이다. 영어가 국제적 언어로 사용되는 선교현장인 경우 영어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가거나 영국, 호주, 뉴질랜드등으로 들어가서 일정기간 언어연수를 받고 현장으로 투입되어 현지언어를 배우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길은 장점과 더불어 약점도 있는 것이다. 그 약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약점은 우선 비용이 엄청나게 든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인 경우 생활비나 언어 연수비가 선교현장에 곧바로 투입되어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엄청나게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장에 곧바로 투입되는 것보다 더 현장을 아는데 오랜 시간이 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국제적 언어를 원활히 배웠을 경우에는 그러한 댓가를 지불할 충분한 사유가 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선교현장에서의 적응과 사역의 적응에 빠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이외에도 선교사가 선교현장과 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약할 때 언어연수를 받은 국가에서 머물러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현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선교현장은 언어연수를 받는 국가들보다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교육적으로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들에서 충분히 언어연수를 받고 선교현장을 둘러보면 선교현장으로 가기 싫은 생각이 들고 어려운 선교현장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이 기꺼이 댓가를 지불하기가 싫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 선교현장에 대한 선교 소명의식이 약한 사람에게는 언어연수를 받은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외에도 후원하는 교회의 양해를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대부분의 후원하는 교회는 선교현장과 선교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인 고충에서오는 어려움들을 알고 배려하는데 이해가 상당히 부족하다. 게다가 선교사의 언어적인 고충에 가중되는 스트레스는 선교사가 충분히 선교현장을 익히고 언어를 원활히 배우기 전에 선교의 열매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선교사는 더욱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하여튼 본국의 주후원교회의 동의와 양해만 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선교 소명의식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다면 국제적 언어의 연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현지에서 국제적 언어를 배우고자 한다면 국제적 언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인턴과정을 거치는 것도 좋은 언어연수의 길이 될 것이다. 선교현지(특히 인도에서는) 중에는 신학교에서 국제적인 언어만을 사용하여 강의가 이루어지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 상당수가 된다. 이러한 곳에서는 강의가 기본적으로 국제적 언어를 사용하여 이루어지고 일상생활의 언어가 국제적 언어가 사용된다. 그리고 예배등도 국제적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한 경우 그곳의 사역에서 조그마한 부분을 감당하면서 국제적 언어습득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힘쓰면 국제적 언어의 진보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3) 자신이 선교하려는 지역에 선교의 목표를 정해둔다.
위와 같이 선교현장에서 통용되는 국제적인 언어를 배워두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선적으로 선교하려는 지역의 선교 타겟을 구체적으로 정한다. 즉 그 지역의 어떤 언어군과 종족을 선교할 것인가를 정해야 할 것이다.
정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선교현장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함으로 오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그 시행착오로서 오는 시간과 선교비의 낭비를 줄여서 효율적이고 빠른 시간안에 현지의 언어에 적응을 하고 사역을 펼치기 위함이다.[2]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선교현장의 현지답사가 필요하다. 우리 속담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즉 백번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인데 선교현장의 답사한번 하는 것이 백번 듣거나 책을 보는 것보다 낫다는 뜻으로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장을 답사하는 것도 생각없이 답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현장을 생각없이 답사하는 것은 단순히 관광하는 차원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관광적인 사고방식으로 앞날에 선교할 전략을 세우거나 어떤 연구가 이루어져서 선교에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현지답사할때 어떤 준비를 하고 답사를 할 것인가?
첫째, 선교지의 언어를 파악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선교지의 언어들이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는가? 즉 시골지역에서는 어떤 언어들이 존재하며 통용되는가? 도시 지역에서는 어떤 언어들이 존재하며 통용되는가? 그리고 시골지역이든 도시지역이든 각기 다른 방언끼리는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하는 점등이 조사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조사는 내가 선교할 지역에 어떤 대상을 상대로 선교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두번째는 어떤 종족을 대상으로 선교할 것인가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종족이 정해졌으면 그 종족에 대한 종교적인 상황,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상황등이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하고 그 종족에서의 계급적
경향, 그리고 종족내에서나 종족끼리 맺어진 인간관계등도 구체적으로 조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근거로 그들이 삶의 총체를 나타내는 세계관 또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파악이 되려면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구체적인 선교의 타겟이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각 언어나 종족의 특성을 연구함이 없이 한꺼번에 선교의 대상을 취급하고 선교하려고 든다면 거기서 오는 시행착오, 그리고 비용가 시간이 한꺼번에 낭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선교의 열매를 맺는 시간도 한층 더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교의 타겟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선교의 열매를 맺는데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4)자신이 배운 현지어와 국제적 언어 외에 선교현지에 존재하는 또 다른 현지어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선교현장에는 단일언어권에 속한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언어적인 양상이 전개되는 일이 흔하다.그것을 ‘총회선교사행전 Ⅱ’에서 살펴보자.
표 5. 총회(합동) 선교대상국 중 다언어 국가의 언어 상황[3]
일본 |
15 |
요르단 |
6 |
체코 |
5 |
에리트리아 |
3 |
부루키나파소 |
9 |
에쿠아돌 |
8 |
대만 |
5 |
쿠웨이트 |
1 |
러시아 |
29 |
케냐 |
13 |
라미베리아 |
10 |
수리남 |
5 |
몽골리아 |
3 |
사우디 아라비아 |
1 |
카자흐스탄 |
5 |
우간다 |
16 |
감비아 |
4 |
가이아나 |
5 |
필리핀 |
168 |
이스라엘 |
7 |
우즈벡키스탄 |
2 |
탄자니아 |
18 |
세네갈 |
6 |
과테말라 |
19 |
태국 |
81 |
이집트 |
3 |
키르기즈스탄 |
1 |
말라위 |
8 |
말리 |
9 |
코스타리카 |
6 |
싱가폴 |
2 |
수단 |
17 |
우크라이나 |
5 |
짐바브웨 |
12 |
기니비사우 |
5 |
중국 |
142 |
인도네시아 |
56 |
오스트레일리아 |
26 |
불가리아 |
5 |
보츠와나 |
3 |
차드 |
17 |
라오스 |
10 |
인도 |
1652 |
뉴질랜드 |
2 |
그리스 |
6 |
남아프리카공화국 |
18 |
브라질 |
37 |
미얀마 |
16 |
네팔 |
16 |
파푸아뉴기니 |
116 |
루마니아 |
8 |
나미비아 |
6 |
아르헨티나 |
7 |
베트남 |
20 |
방글라데시 |
14 |
구암 |
2 |
알바니아 |
6 |
나이지리아 |
57 |
파라과이 |
9 |
캄보디아 |
3 |
파키스탄 |
13 |
사이판 |
2 |
오스트리아 |
1 |
니제르 |
5 |
우루과이 |
1 |
터어키 |
13 |
스리랑카 |
3 |
피지 |
9 |
영국 |
7 |
토고 |
5 |
볼리비아 |
16 |
튀니지 |
11 |
바레인 |
1 |
독일 |
6 |
이디오피아 |
11 |
가나 |
17 |
페루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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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에서와 같이 세계의 언어적인 상황은 어느 나라건 간에 우리나라와 같이 단일언어로만 의사소통되는 사회는 흔하지 않고 드물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한 나라나 한 지역을 선택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는 앞서도 제기하였듯이 무리하고 힘든 일이다. 더우기 인도의 방갈로르시와 같은 상황은 더욱 힘들다고 할 것이다. 실제적인 한예를 들어보자.
필자의 1998년 2월에서 3월까지의 선교정탐훈련 중 방갈로르 시를 방문하였을 때에 그 현지 교회와 주일학교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예배에서 현지인들에게 설교하는 목사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 목사는 그 지역의 3개 언어를 번갈아 돌아가면서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일학교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전도사가 영어로 설교하고 두 아이들은 그 지역의 언어로 통역을 하는 광경이 목격되었다.[4]
이러한 광경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서도 제기되었듯이 한 나라와 한지역과 한 도시에서 많은 언어들이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있는 곳에서는 적절한 복음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는 어떻게 복음을 그들에게 커뮤니케이션 할 것인가?
몇가지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선교사 자신이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를 배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러한 언어적 능력을 가진 선교사는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선교사에게는 모든 언어를 배우는데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윌리엄 캐리와 같이 언어의 능력이 있어서 많은 언어를 배우고 또 성경번역까지 시도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모든 선교사들이 윌리엄 캐리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수 밖에 없다.
두번째 통역자를 세워서 선교사 자신이 배운 현지어외의 다른 현지어들에 대한 배려를 한다. 즉 선교사가 영어와 현지어 하나를 배워 두었다면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교지에서는 특히 인도의 남부지역같은 경우에는 영어실력이 좋은 현지인들이 많다. 그들은 영어를 잘할 뿐만 아니라 현지어가 모어(mother tongue) 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선교사가 영어로 설교를 한다면 현지어로서 통역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는 현지인을 교육시켜서 현지인들에게 선교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선교방법에 대하여 장점이 크기에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뜻있는 선교관계자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선교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에는 어려움도 있다.
우선 현지인 선발문제이다. 현지에서 어떤 사람을 선발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신앙이 올바르고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건전한 영성과 아울러 선교하려는 지역민들에게 적절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선발하는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리고 더욱 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현지인들에게서 이 선발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기 쉬운 갈등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현지교회의 교인들 중에서는 외국 선교사에게 뽑혀서 좀더 나은 위치에 있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자신이 뽑히지 않는다면 실망하고 현지교회를 어지럽게 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지인을 선발하여 선교하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현지인 선발 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문제점을 가질 수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현지인을 선발하여 그곳에서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데리고 와서 교육을 시켰다. 그 한예가 아세아 연합신학교의 외국인 선교사 코스과정의 신학교육프로그램이다. 이 과정에 현지인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에는 장점과 아울러 약점도 있었다. 그 약점은 현지에서 데려온 신학생들이 현지에서는 받을 수 없는 대우를 우리나라에서 받게 해주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약간의 용돈을 대어주고 그리고 간혹 그들이 와서 선교간증이나 보고를 하면 한국교회는 관습대로 강사에 대한 사례를 그들이 엄청나게 느낄 만큼 해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대우를 받고 보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사라졌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신학생들이었기에 한국에서 이러한 대접을 받다가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
가서 다시금 고생스러운 복음사역을 하려고 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또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원래 살았던 밀림이나 농촌으로 돌아가기에는 도시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있기에 돌아가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현지에서 선교사 후보생을 선발하여 다시금 선교지로 재배치하는 문제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다 언어 사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실 이 논문의 촛점은 한국 선교사가 다 언어적 상황에 놓여 있는 선교현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선교 현지인을 선발하여 교육하고 선교하는 점에 대한 논의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논지의 핵심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한국 선교사로서 다 언어 상황에 있는 현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은 영어라는 매개체와 현지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또다른 현지어에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앞서 전제하기를 통역자를 세워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물론 이러한 선교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현지에 도착하여 어느 정도 현지어가 되는 상황 속에서 사역을 전개하였을 시에 선택하는 일반적인 방법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통역자를 세울 것인가하는 점과 그 통역자에 대한 급료문제, 그리고 통역을 통하여 복음을 전달할 때에 생겨지는 문제점들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수 있고 올바르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어떤 통역자를 세울 것인가? 이것은 통역자의 선정하는 기준 즉 통역자의 자질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①우선 신앙의 유무를 살펴야 할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통역을 해도 바르게 할 수 없을 것이며 한다고 해도 의미가 왜곡되기 쉬울 것이다.②학력의 정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학력을 보는 것은 단지 어떤 학교를 어느 정도 다녔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통역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것이다. 충분한 지적수준이 되지 않으면 올바른 통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③ 어떤 신학적 경향을 가졌는가를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개신교가 개신교되는 가장 큰 모토는 오직 성경이지만 그 틀안에서의 신학적 경향은 크게 나누어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그리고 반(半,semi) 알미니안 주의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물론 오늘날 범세계적으로 가장 부흥하는 교파는 오순절 계통의 교파이지만 오순절 계통의 신학적 경향은 엄밀히 따져서 반(半-semi) 알미니안 주의라고 분류할 수 있다. 통역자가 충분한 신학의 기반이 있어서 이러한 신학적 경향으로 확연히 구분할 수도 있겠으나 신학이 충분치 못하면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신학에 있어서는 자유주의라고 불리워지는 신학적 경향과 신정통주의인 바르트주의 또한 널리 퍼져있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서는 기독교 신학을 모호하게 만드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신학적 경향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상황이며 인도 같은 경우 종교다원주의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현장이기에 이러한 분명한 입장을 살피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면 통역자가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졌다면 어떤 입장이 바람직 할 것인가?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의 전통을 잇는 칼빈주의 신학적 경향을 가졌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즉 베자 이후에 낙스,아브라함 카이퍼, 죠지 월필드,바빙크,메이첸,루이스 뻘콮등의 계보를 잇는 개혁주의적 칼빈주의 신학을 소유하였다면 말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현장에 그러한 신학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거나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복음주의 계통에 서있는 사람이라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그러한 사람이 없을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경우 선교초기에 우선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영어와 현지어를 이용하여 현지인들을 복음으로 길러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적절한 시간이 지나서 신학이 형성되고 선교사의 선교사역에 동참할 때쯤되면 그러한 어려움들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④ 어떤 훈련을 받았는가하는 점도 중요시된다. 현지에 믿는 사람이 없을 경우 이러한 통역자에 대한 문제는 생기지도 않을 것이지만 선교현지의 교회가 한 언어군에서 부흥하여 성장하였을 경우 통역자가 받은 훈련이 중요할 것이다. 성경적훈련, 신학적 훈련,선교사들이 실시한 훈련을 받은 자들을 중심으로 그 훈련의 내용과 입장들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점들을 고려하여 통역자를 선정하였을 경우 그 통역자에 대한 급료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급료문제에 대해서는 선교의 기본적인 자세가 먼저 점검되어야 한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즉 선교사가 현지의 언어와 국제적 언어를 배우지 않은 상황에서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월급을 주고 교회를 개척하고 경영해 나가면서 그 돈으로서 현지인 목회자들을 조종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든 나라에서 선교할 경우 선교사가 현지인들을 월급을 주고 고용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하지만 현지인 가운데 선교사의 돈을 바라고 접근하여 일하려는 현지인 목회자도 있는 것이다. 또한 목회자가 아니고 현지인 평신도 사역자인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방책이 준비된 상황에서 일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선은 통역자가 자신의 직업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직업이 있는 자로 자격이 있는 자를 통역자로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현지에서 체감되는 적절한 급료를 통역자에게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역자에게는 돈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양무리를 먹이는 거룩한 일을 한다고 하는 사명의식을 고취함으로 일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사소통을 하는 일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런 의식구조를 갖게 하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 급료의 문제는 항상 선교사가 유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므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처가 현지의 상황에 따라서 필요할 것이다.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통역자에게 미리 설교나 강의에 대한 사전 숙지가 필요 할 것이다. 앞서 의사소통과정의 문제점에 대하여 제기했던 것과 같이 언어에서 언어로 통역이 될때에는 의미상실과 의미왜곡문제를 주의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왜곡과 의미상실문제는 복음을 전하는 자와 통역하는 자 사이에도 일어날 수 있다. 즉 전하는 자와 통역하는 자의 영적, 지적, 신학적 입장이 다를 수 있기에 통역하는 과정에서 의미왜곡, 의미상실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왜곡과 상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전하기에 앞서 통역자에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통역자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즉 설교할 시에는 자신이 전할 메시지의 핵심과 목표, 그리고 목적등을 분명히 밝혀서 통역자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통역자는 설교자의 의도를 알게되어 커뮤니케이션상의 오류를 최대한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5) 성령께서 친히 청중들에게 커뮤니케이션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고 맡겨 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청중들을 친히 가르치시도록 기도하고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을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은 단순히 복음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5]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성령의 두가지 역할이 있음을 알게된다.
첫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둘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청중들과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기도하고 맡겨야 한다. 이렇게 성령께서 말씀, 즉 복음을 커뮤니케이션 함에 있어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설교자들이 동감하는 것이다.
조용기목사는
“오늘날 우리들은 사실 너무나 바빠서 동분서주 하다보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다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오래 기다리며 주의 기름부음을 받고 주의 이슬을 머리 위에 듬뿍 입고서 나와야 합니다. 이와같은 기다림의 긴 시간이 우리 설교자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이슬처럼 마음 속에 맺혀지며, 모든 성경 구절이 황금빛 나는 메시지가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는 설교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가 떠나가 버리면 성경전체를 들춰봐도 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말을 해 봤자 말의 능력이나 효과도 없습니다. 이러므로 목회생활에 중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이 메시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6] ”
라고 했다. 또한 이 주영목사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연구가 전달되는 언어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지는 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이 조명해주시고 역사하실 때에만 설교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성경적 원리를 명심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구하여 설교자는 전달자일 뿐이며 역사자(役事者)는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7]
박희천목사는
“그런데 전파자의 준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는 왜 말씀과 성령의 권능을 조건으로 삼으셨는가? 모처럼 임하신 말씀이 효과있게 전파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이 뒷받침을 해주셔야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권능이 뒷받침 안 해주면 모처럼 임하신 말씀을 공기나 진동시키고 말 뿐이지 아무런 영적 열매도 맺지 못한다. 성령의 권능이 뒷받침해 줄 때 비로소 전파되는 말씀이 양떼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8]
메릴 엉거는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술하고자 하는 그 누구나 반드시 성령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은혜를 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두 가지 이유가 계시되어 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성령만이 하나님의 일들을 안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령만이 하나님의 일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만이 하나님의 일들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가르쳐지고 있다.”[9]
존 스토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의 성령에 의해 장님된 눈을 뜨게하고 귀먹은 귀를 열며,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며, 양심을 따끔하게 찔러주고, 마음을 현명하게, 가슴을 불타게 하며, 의지를 감동시키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며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노예들을 자유케 할 수 있다.”[10]
後藤光三 역시
“하나님의 예언자인 자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성령의 힘은 골방의 성서와 기도를 통하여 비가 오듯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다. 성령은 말씀으로 그리고 기도로 설교자를 격려하고 힘을 주신다. 성령의 힘이 없다면 어떤 능변도 죄인을 설득할 수 없으며, 복음을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는 없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 보아도 사람들을 주께 인도할 수는 없다.”[11]
로이드 죤스도
“내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의 설교에 임하는 성령의 이 능력이 오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유익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참된 설교를 만듭니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것 중에서 최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이것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능력을 받으면 가르침을 받을 용의를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 깊이 인도함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있게되는 것입니다.”[12]
이와 같이 복음을 설교하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였고 그 역사 가운데 성령께서 친히 청중들을 가르치실 것을 기대한 것을 보게된다. 이러한 점은 다언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께서는 다언어 사회에서도 자신의 역사(役事)와 가르치심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과 복음을 커뮤니케이션 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사도행전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가 각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 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13]
즉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 각 나라의 방언을 하게 하셨고 그것을 오순절을 지키려고 각 국에서 온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각국의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커뮤니케이션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이 사건을 통하여 볼때에 성령께서는 자신의 역사로 언어와 국경을 초월하여 자신의 말씀을 전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의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서 오늘날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과 이 사건은 비상한 사건이기
에 한시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14] 여하튼 그러한 주장들을 떠나서 이 본문을 통해서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의 백성들에게 커뮤니케이션하시며 또한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게된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다언어 사회에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여러 전략과 제수단을 동원하면서도 성령의 역사가 그 전략과 수단을 사용하셔서 최대한의 커뮤니케이션이 되도록 기도하고 맡기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Ⅵ. 결론과 제안
이 연구에 대한 제안과 결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부분에 있어서 살펴본다.
1.연구방법론에 대한 비평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사례와 지역연구, 그리고 상관성과 인과비교, 서술적인 방식등을 사용했다. 사례와 지역연구는 인도와 인도의 방갈로르 시를 중심으로 언어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분석하였으며 상관성과 인과비교는 전세계의 선교현장에 나타나는 언어적인 문제점과 해결방안의 상관성과 서로간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서로의 장단점등을 비교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5W 1H 방식에 의거하여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비평할 것은 그렇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부족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례와 지역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는 선교현장이 멀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에 연구비가 많이드는 단점이 있고 또한 속속들이 자료를 입체적으로 수집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상관성과 인과비교의 부분에 있어서는 인도의 도시인구 유입부분에 있어서 도시민들의 성향은 타국에서의 성향과 다른 점이 있다. 물론 공통적인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차이점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을 잡아내어서 비교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기에 충분한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부분과 선교현장의 다양성으로 인한 특징들을 충분히 잡아내어야 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 같다.
2.연구의 중요 발견에 대한 결론
이 연구에 있어서 중요 발견은 우선 선교현장에 대한 수많은 논문이 있으나 언어적인 관심을 가지고 기록한 것은 드물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별도의 선교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선교사 후보생들은 현장에 가서 자신 언어를 배울 생각만 하였지 실제적으로 이러한 부분을 전략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별로 없었다. 물론 각 선교사들은 주어진 선교현장에서 각자 나름대로의 언어대처방법을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통합되고 체계화되도록 하여 선교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선교사가 언어의 한계상황 속에서 통역을 통한 복음전파의 가능성을 여러모로 모색해 보았다는 점이다. 특히 다언어 사회에서 여러 언어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면 복음을 모든 언어집단들에게 전할 수 있는가하는 방법론을 모색할 수 있었다는 부분은 이 연구 논문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복음이 타언어로 넘어가는 과정을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근거하여 살펴보고 다언어 사회에 효율적인 복음전파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는데 이 논문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3.연구에 대한 제안
이 논문을 쓰면서 아쉬웠던 점은 논문의 연구가 인도라는 한지역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인 상황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즉 다언어로 인한 어려움들은 모든 나라들 중에 특히 인도가 더욱 심하지만 다른 나라들 중에도 많고 또 다언어적인 상황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복음전파에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들도 많다. 이러한 논문이 선교지의 각지역마다 연구되고 그것이 통합되어 범세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모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러한 상황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계속나와서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범세계적인 조사와 연구로 해결책이 제시되어 보다 복음을 언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시되어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4.결론
이 논문은 선교현장(인도)을 방문하면서 발견했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즉 인도의 언어적인 상황이 1,652개라는 다언어 상황이었고 그러한 다언어 상황에서 복음을 의사소통하는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현장의 선교사들이 언어때문에 겪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바라보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을 해결하기 위해 논문해결의 3단계를 모색해 보았다.
첫째 다언어적인 선교지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제시한다.
둘째 현장상황을 분석한다. 즉 다언어 사회는 왜 생겨났으며 인도는 왜 다언어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셋째 이러한 문제의식과 현장상황분석을 통하여 문제 해결의 방안을 모색해보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그리고 나서 해결방안을 제시하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다시 논문의 형식으로 옮겨서 해결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우선 인도와 타 선교지의 다언어적인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러한 문제점에는 일반적인 문제점과 복음전파시 생겨지는 문제점, 그리고 한국 선교사들의 특수성에서 오는 언어 적응의 문제점들로 구분했다. 일반적인 문제점으로서는 의사소통의 문제점,언어차이에서 오는 인식의 문제점, 그리고 의사소통과 인식의 차이로서 생겨나는 국제적인 갈등의 문제등을 제시하였다. 타문화권 복음 전파시 생기는 문제점으로서는 언어가 다양함으로 복음전파에 어려움이 있고 또 그 언어때문에 선교사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다는 사실들을 제시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의 언어 적응의 어려움은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이 단일언어,문화권에서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의 연구목적은 한 언어와 한 문화 속에서 성장한 한국 선교사들의 언어습득과 적응의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 것인가하는 점이다. 그리고 연구의 중요성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 다언어 상황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점과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언어에 좀더 쉽게 적응하고 또 모든 언어를 다 배울 수 없는 선교사들에게 효과적인 복음 커뮤니케이션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여러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데 답하는 형식을 통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인도의 대도시의 (혹은 방갈로르시) 언어적인 상황은 어떤가에 대하여 다언어 상황이다. 인도의 대도시에서 존재하는 다언어의 존재양식과 형태는 어떤가하는 점에 대하여는 인도의 대도시에서의 인구이동은 농촌인구의 대도시 유입이 많으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종족과 언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정착한다. 이러한 면에서 인도의 대도시에는 언어군과 종족군으로 마치 모자이크를 보는 것과 같이 된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복음전달을 방해하는 한국 선교사의 언어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한국 선교사는 대부분 단일 언어와 단일 문화권에서 자라나서 다언어, 다문화 사회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복음전달 과정상의 언어적 문제점은 무엇인가하는 점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각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점과 더불어 선교지라는 특수성이 첨가된 어려움이 있음을 제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문화권 복음전달에 있어 언어적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세가지 해결책을 모색했다. 첫째 선교사가 우선 국제적인 언어를 충분히 배워야 한다는 점과 그리고 선교현장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하여 선교할 언어군에 대하여 선교현장에 가기전에 선교목표를 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지에 도착하여 그 언어를 적극적으로 배우라는 점이었다. 또한 다언어 사회이기에 선교사 자신이 배운 현지어외의 현지어는 통역을 두어 의사소통을 하고 그 통역자에게 미리 선교사가 전할 내용들을 주지 시켜 의사소통의 오해를 최대한 줄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같은 교회내에서 여러 언어들에 대한 의사소통의 배려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점에 대하여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연구에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계속되어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 결과 주의 나라가 이 땅위에 확장되며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기를 소망하며 이 논문을 마친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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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승삼편집(1997). 총회선교사행전Ⅱ.서울:총회출판국 이러한 정보들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선교부와 해외선교위원회에서 발간한 총회선교사행전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정리해본 것이다. 기밀상 모든 국가의 언어적 상황을 실을 수 없으므로 빠진 내용이 상당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만을 가지고도 국제적 언어의 면모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2].필자가 이렇게 말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필자의 1998년 9월달에 실시한 선교정탐중에 체험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장에서 만난 한 선교사가 있었는데 현재 선교사역 5년차 가량 되었다. 그 선교사는 현장 파악이 충분치 못하여 이 언어, 저 언어 배우다가 시간을 낭비하였고 지금도 언어를 배우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만약 그가 선교현장에 대한 충분한 조사 연구가 되었다면 그러한 시간과 물질과 정력의 낭비는 줄일 수 있었고 지금은 원활한 선교사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3].총회선교사행전 Ⅱ. op.cit.
[4].이것은 필자가 인도 정탐 여행중 실제적으로 목격한 것을 기술한 것이다. 장소는 카르나타카 주에 있는 방갈로르 시로서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정윤진 선교사를 방문하면서 본 장면이다. 날짜는 1998년 3월 8일이다.
[5].요한복음 14장 26절
[6].조용기저.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서울: 서울서적,10판. pp.181-182.
[7].이주영저. 현대설교학. 서울: 성광문화사, 4판. p.258.
[8].박희천저. 나의설교론.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5판. p.23.
[9].메릴 엉거저.이갑만 역. 주해설교의 원리. 서울: 생명의말씀사,1985,pp.61-62.
[10].존스토트저. 정성구역. 현대교회와 설교. 서울: 반석문화사,1992,초판. p.354.
[11].後藤光三저. 곽철영역.설교학. 서울: 혜문사,1979,5판. pp.116-117.
[12].로이드 죤스저. 서문강역. 목사와 설교.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1993,14판.p.426.
[13].사도행전 2장 1-11절
[14].이에 대한 해석은 오순절적 교파에서 보편적으로 시도하는 해석(즉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이러한 오순절적 역사는 오순절 사건의 특수성으로 보아 한시적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필자는 그러한 신학적 논쟁에 관심을 보이기 보다는 이 오순절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인류와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려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