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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봉 구(1944):
나의 젊음을 불태운 줄리어드학교 그리고
뉴욕 에밀레페라오페라단
전봉구(全奉求)는 일제에서 해방되기 전 해에 대전에서 태어났다. 1950년 초등학교에 입학, 첫 학기가 막 시작되었는데 6월 25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괴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폭격에 생활터전은 폐허로 변하고 가족은 처참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몰락한 가정형편으로 어렵게 학교생활하며 일찍이 대학 진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국가 장학금으로 교육시키고 졸업 후 교사로 취직이 보장되는 국립대전사범학교로 진학하였고 관악부에 들어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며 밴드부장으로 활약, 관악곡 편곡과 지휘도 했는데 이것이 후에 음악을 전공하게 된 동기가 됐다. 1962년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18세의 젊은(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5.16 군사혁명 직후인 그때 병역미필이라는 이유로 교직에서 해임 됐고, 가능성도 없이 무모하게 대학교 진학을 결심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천우신조로 1964년 서울음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장학금, 등록금 면제 등의 혜택과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로 대학을 마치게 됐다. 재학 중 학교 오페라 주역, 제7회 동아음악콩쿨 입상, 68년 서울음대졸업생을 대표하여 제18회 조선일보 신인음악회, TBS 신인음악회에 출연하였다. 이후 교수님들을 모시고 국립오페라 출연, 서울음대 오케스트라와 협연,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국립교향악단 협연, 합동메시야공연 독창자로 출연하는 등 나름 연주활동을 활발히 했다. 대학 졸업 후 상명여사대부속여고의 교사로 근무하며 대학원에 진학 했으며, 졸업 후 당시 상명여자사범대학 신설 음악교육과에 교수생활을 시작했고, 재직 중 학장(배상명)님의 따뜻한 배려로 미국의 줄리어드학교 수학을 위해 1975년 말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올랐다. 학기 관계로 맨하탄음대 대학원을 한 학기 마치고 1976년 가을학기에 줄리어드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Professional Study 과정을 마쳤으며 몇 년 후 DMA(음악박사) 과정이 처음 생긴 뉴욕시립대학교(CUNY)에 입학하여 과정을 이수하였는데 ‘겨울나그네’ 전곡으로 독창회를 갖는 등 연주활동을 했다. 뉴욕 유학 중에도 한인교회 성가대를 지휘하였고, 성악공부와 함께 지휘코스를 수강하며 특별 개인지도를 받았다. 독창회와 Concert Singer로 활약하는 한편 특히 뉴욕한인동포사회에서 처음 시도한 수차례의 ‘메시야’ 전곡 연주와 박인수씨를 단장으로 당시 한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뉴욕 에밀레오페라단의 링컨센터를 비롯한 뉴욕의 여러 연주홀에서 Opera 공연, Gala- Concert, Chorus Festival등 많은 연주회에서 지휘자, 음악감독 및 오페라단장으로 활약했다. Queens College (Aaron Copland School of Music)와 Brooklyn Conservatory of Music에서 성악실기 지도하고 오페라단 활동하다가 1994년 경원대학교음악대학의 후진양성을 위해 20년의 뉴욕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 학생들과 열심히 학교 생활하다가 2009년 정년퇴임, 지금은 태재 골짜기에서 교회 찬양대 봉사하며 조용히 수도생활(?) 하고 있다. |
하루가 무섭게 변화무쌍한 이 초 스피드시대에 시설, 환경, 학제, 커리큘럼, 교수진 등 모든 상황이 시시각각 많이 변하고 발전하는 상황을 함께 호흡하지 못 하며 40여 년 지난 긴 세월의 사라져가는 희미한 기억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퍽 망설여지고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저자의 요청에 따라 몇 가지 내용을 회상하며 그저 나의 옛날이야기나 지난 시절의 흐릿한 옛 추억을 더듬는 넋두리쯤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내가 처음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이 1975년 11월 초. 서울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북악산 기슭의 상명여자사범대학(현 상명대학교 전신) 교수로 몇 해 재직 중 미국의 줄리어드학교에 유학을 다녀오라는 학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갖 결혼하여 첫 아들을 얻고, 교수직을 유지한 채 서른두 살의 늦은 나이에 뉴욕을 향해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올랐다. 김포공항 발 대한항공편으로 하와이, L.A.를 거쳐 그 다음엔 미 국내선을 이용(그때는 뉴욕까지 가는 국적기가 없었음) 뉴욕으로 갔다.
실은 서울대학교대학원 재학 중(1969년?) 시민회관(지금의 세종회관)에서 개최 된 바리톤 헤르베르트 브라우어(Dr. Herbert Brauer, 베를린 음악학교교수)의 슈베르트 예술가곡 독창회를 관람하고 깊이 감명을 받아, 당시 그분이 체류하던 대연각호텔(화재 전)에서 고 조상현 교수님의 통역과 도움으로 여러 차례 개인지도를 받았다. 지도받은 곡은 Brahms의 마지막 작품 으로 성경에서 가사를 취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ange)”였다. (이 작품은 나의 대학원 졸업 시 김성태 학장님의 지도로 논문제목이 되기도 하였다.) 머리가 하얀 노 교수님께서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지도해주신 수차의 개인지도 때 교수님의 젊을 때와 내가 많이 비슷하여 La Traviata의 제르몽 역이나 Don Carlo의 Marquis di Posa (Rodrigo) 역이 아주 잘 맞는 음성이라며, 브람스 가곡 외에도 제르몽의 아리아 등을 렛슨 해주셨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좋은 소리 내는 발성방법, 호흡방법, 정확한 딕션, 곡 표현방법 등 창법을 친절히 잘 지도해주시어 짧은 기간 동안 대여섯 번의 개인지도를 받고 그동안 어둡고 답답했던 눈과 귀가 열리는 듯 발전하는 내 모습에 새삼 놀랐고 진짜 성악공부의 눈이 떠지는 것 같아 외국유학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다. 렛슨 후 황공하게도 분에 넘치는 많은 칭찬과 함께 바로 초청을 할 테니 베를린에 가서 함께 공부하자는 대단히 호의적인 귀한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러나 당시 나는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겨우 학업을 지속해온 처지에 여의치 않은 개인사정, 특히 홀어머니를 모셔야 되는 입장으로 그 분을 따라 독일 유학을 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초청의 호의를 사양하고 유학의 기회를 놓진 이 일은 그 후에 내게 생긴 불행한 사건으로 내 인생에서 두고두고 매우 큰 후회스런 일이 되었고 내 연주생활에 활기를 펴지 못하고 일찍 주저앉는 어이없는 사태로 빠져버리는 가슴 아픈 운명으로 바뀌어져버렸다. 대학원 졸업 직후 나의 음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성악을 계속하기가 어려운 사태가 발생했다. 원인인즉 당시 근무하던 여학교의 무리한 수업과 나의 대학원 학업, 오페라 연주를 포함한 여러 연주회 출연과 그것들을 위한 준비 등 겹쳐진 과로로 인한 감기와 기관지염 등 호흡기 질환의 후유증과 그로 인한 중이염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게다가 거주하던 청운동 옛 시민아파트의 부실공사로 인한 연탄가스 중독으로 생명에 위협을 초래할 심각한 고비를 두어 번 넘겼다. 천운으로 생명은 유지가 됐으나 뇌세포가 많이 손상을 입었는지 많은 기억을 잊어버렸고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암기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무리한 연습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성대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 내 딴엔 상태가 좋았을 때의 감각으로 돌아가고자 무리하게 연습을 하여 성대를 더 혹사한 결과 소리 내기가 매우 힘들뿐더러, 감각이 없어 잘 들리질 않고 목이 불편하여 더 이상 노래를 부르기 어려웠다.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은 억지로 힘들여 내는 소리는 내가 목적한 음높이(Pitch)와 맞질 않았다. 한창 활발히 연주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연주가 불가능하게 되어 말할 수 없는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사람의 성대는 다른 악기와 달라 무리하면 쉬 망가질 수 있다는 극히 초보적인 성대 건강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열심히 연습하면 더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바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쳐 열심히 연습한 결과였다.
나는 대학 때 지도교수이신 이인영교수님과 의논 후, 내가 입상했던 동아콩쿠르 심사위원 이셨고 몇 개의 오페라 공연을 함께 모시고 연주 한 연세대학교 황영금 교수님께 부탁드려 그분의 안내로 당시 성대치료의 최고 권위자이신 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과장 김기령 박사님(직접 성악도 하시며 연세대음대 음성학 강의)께 가서 그분의 집도로 성대 결석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 옛날 의료장비와 시설이 낙후되었던 시절이라 의사의 시력과 손기술로 작은 가위하나만으로 수술을 마쳤다. 수술 결과가 좋았고 음성은 잘 회복되었다는 주치의와 지도교수님의 판정이었으나 나는 계속 소리를 내기 어렵고 힘들었는데... 얼마 후 감기, 기관지염으로 인한 중이염으로 악화된 난청이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구씨관(Eustachian tube) 협착증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병명의 진단을 받고 당시 난청치료가 불가능해, 작곡가도 아니고 오로지 본인 귀의 감각으로 음성을 조절해야 되는 성악가로써 음성을 제대로 사용치 못하여 연주가로서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여 내 짧은 생의 최후를 맞은 듯 비통함에 빠졌다. 온 정성을 다 바쳐 배우고자 노력했던 음악의 길을 포기 할 수밖에 없어 많은 방황을 했고, 그 절망감이란 온 세상을 다 잃은 것과 같았다. 첫 내한 2년 후 브라우어교수의 두 번째 학생선발을 위한 내한이 있어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개인 오디션에 참가했으나 이미 나빠진 음성으로 단번에 불가 판정을 받았다. 더구나 내가 부르는 노래는 항상 목적한 소리보다 음이 낮은데 소리를 내는 동안 내 자신 인지가 안 되고 녹음하여 재생하면 내가 낸 음이 아닌 이상한 사람의 소리가 들리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후 나름 부끄러운 음성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연주를 계속하면서 애를 쓰다가 연주가로는 이미 실패했지만 공부를 더 많이 하여 좋은 지도자의 길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훌륭한 연주가만이 성악가로 인정받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렵겠지만 그래도 좋은 성악지도자가 되어보자고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그 때부터 고난 속의 연구와 음악생활을 계속했다.
도미 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은 성대수술 직후여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많은 가책을 느끼며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처음엔 학비가 안 들고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독일 유학을 꿈꾸고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e)에 등록하여 아내(이인선, Soprano)와 함께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뉴욕의 맨하탄한인교회(미국에 한국인이 처음 개척한 교회, 이승만 박사가 그 교회에서 숙식을 하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함)에서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공연하게 되어 바리톤 독창자가 필요하니 교회 독창자 겸 뉴욕에 공부하러 올 의향이 있으면 서둘러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독일로 가려 마음먹고 있었고 생활비나 학비가 무척 많이 든다는 미국으로 가기가 매우 꺼려졌지만 여비와 체재비를 제공해준다는 초청을 받고 고마운 배려에 꼭 가겠노라고 응답하고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더욱이 당시 해외에 나가는 것이 너무 너무 어려운 때였는데 초청장과 재정보증서 까지 보내주어 천신만고 끝에 여권을 발급받고 미국 비자를 받아 공식적으로 미화 400달라를 환전하여 떠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어려운 나의 미국유학 시작이었다.
제분 공장의 아들 – 유복한 유년기
나는 일제 강점기, 해방되기 전 해(1944년)에 대전에서 제법 규모 있는 제분공장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 때 부친은 일제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고 내가 태어난 3개월 후 출감되자 바로 운명을 달리하셨다. 생후 백일이 채 되기 전이었다. 유복자는 아니지만 나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이 자랐다. 그래도 25세 청상이 된 어머니께서 아버지대신 사업경영을 잘하시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고, 우리 집엔 그 시대에 매우 귀한 Victor 쌍 태엽 유성기(Record Player)와 Zenith 라디오도 있어 어린 시절이었지만 유성기판(SP)을 틀어 음악을 들은 적도 있고, 라디오를 틀어 방송을 들은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아마 아버지께서 어떤 종류인지는 잘 모르나 음악을 즐겨 들으신 것 같다. 또 어머니가 노래 듣기를 좋아하시어 대전극장에서 임춘앵, 김소희, 박초월, 김진진(위 배우들 이름은 어릴 적 기억에 의존함) 등 당시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여성국극단(창극단) 공연이 열리는 때면 나를 데리고 구경을 자주 가시곤 했다. 어린 나는 따라다니기 힘들고 졸리고 참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예쁜 주역배우(여자배우로만 구성)의 아름다운 분장과 멋있는 옛날 의상과 연기, 부르는 노래(창)가 매우 재미있어 잘 따라다녔고 연기와 노래를 따라 곧잘 흉내도 내곤했다. 말하자면 창으로 노래 부르는 여성 국악오페라로 내용은 모두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애국적 시대극이었다. 옛 삼국시대의 의상에 칼 차고 활 쏘는 남자 주역을 맡은 여배우들의 늠름한 모습과 씩씩한 연기는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시대에도 엄마의 교육열은 높아 세 살부터 ‘우리유치원’이라는 당시 최첨단 어린이 교육기관에서 노래와 율동을 배웠다. 그 시대 대전(충남)에 오로지 하나뿐인 KBS 대전방송국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생방송으로 노래도 불렀고(그 시대에는 녹음시설이 없었음) 시공관에서 “말 탄 대장” 등 어린이 무용도 출연했다. 1950년 만 여섯 살 되어 유치원을 졸업하고 대전신흥국민학교라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국어책과 산수책을 받고 막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6월 25일 북괴의 불법남침으로 살던 집과 공장과 모든 재산이 전쟁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살 집도 먹을 양식도 없이 엄마와 누나와 함께 돌연 알거지로 처참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게다가 남편 잃은 지 몇 년 안 된 서른한 살의 젊은 엄마는 집과 생활터전 등 온 재산을 한꺼번에 모두 잃은 상실감에 깊은 병을 얻었고 어린 남매(다섯 살 위 누나와 함께)를 먹여 살리느라 온갖 시련을 겪으며 병명도 알 수 없는 깊은 병으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평생 환자로 고생을 하셨고, 누나와 함께 우리는 가난에 쪼들려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전쟁 중, 그리고 휴전 후에도 다니던 학교시설은 군병원으로 제공 돼, 폭격으로 파괴되어 허물어진 벽만 남은 제사(누에고추 실)공장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노천 교실에서 교과서도 없이 땡볕 아래에서 공부를 하며 비오면 휴업을 하는 등 제대로 과정을 배우지 못했고, 더구나 음악수업은 악기 구경도 못하고 내 귀에 음치(?) 비슷한 담임 선생님의 무반주 선창으로 교가와 응원가를 배운 것이 초등학교 음악수업의 전부였다. 그래도 언젠가 교육실습 나온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교생선생님(사범학교 학생)께서 가르쳐주신 “보리수” 라는 노래가 그 어린 나이에 처음 듣고 배워본 가곡이었다.
대전사범학교 진학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는 이미 대학 진학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중학교 진학은 사범학교 쪽으로 정했다. 당시 한 도에 두 개만 있는 사범학교(국립학교로 교육대학의 전신)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 입학 할 수 있는 남녀공학의 학교로(당시 대전시 내 중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 없었음) 전 학생이 국비 장학금으로 교육받았고 고교 3년 졸업 후엔 초등학교 정교사 자격과 함께 교사로 발령을 내주는 특혜를 주는, 취직이 보장되는 고마운 교육제도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덕에 대전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모든 과목을 정상적으로 수업 받았다. 영어시간에 처음 배운 Alphabet과 I.P.A.(국제음표문자-발음기호)는 내 일생을 통하여 성악에서 가장 중요한 외국어 발음의 정확한 지침이 되었고, 특히 음악실에서 아름다운 여선생님(정민영선생)께서 구경하기도 어려운 피아노 반주로 노래를 가르쳐주는 음악시간은 유치원 이후 오래도록 갈증을 느꼈던 나의 정서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이어서 사범학교 본과(고교)에 진학 한 후에는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준비를 철저히 교육 받았다. 예를 들자면 약간의 일반과목 이외에 음악, 미술, 체육, 무용, 서예와 교직과목(교육원리, 교육심리, 교육사, 교육통계 등)들이었다. 특히 음악 과목은 당시 엄격하기로 손꼽히는 안일승선생님(서울음대작곡과출신)께 가창은 물론 오르간 연주, 음악사를 포함한 음악이론, 부삼화음을 포함한 화성학 등을 철저하게 배웠다. 게다가 특별활동 시간이 있어 매일 방과 후에는 본인이 원하는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함께 공부하던 학우들은 각 분야에 거의 전문가 수준의 깊이 있는 연구와 취미 활동을 했다.
나는 중학교 때는 정구(Soft Tennis, 연식정구) 대표선수, 고등학교엔 관악부가 있어 여러 악기를 다루며 밴드부장으로 활약 했고 간단한 관악곡 편곡과 지휘도 했는데 이것이 후에 음악을 전공하게 된 동기가 됐다. 밴드부장을 하던 고3학년 때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시내 각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두 모이는 궐기대회가 자주 열렸는데 대회 후의 시가행진에는 국립학교인 우리 사범학교 관악대가 선두에 섰고, 지휘자(Drum Major)인 내가 제일 앞에서 큰 지휘봉을 흔들며 행진을 지휘하던 그 때의 자세가 후에 성악가로서의 바른 자세에 큰 도움이 됐음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1962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18세의 젊은(어린) 나이로 충남 보령군 오천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교사로 부임하여 근무했다. 전기도 없던 시골, 밤에는 호롱불을 켜며, 교통기관이라야 저녁 늦게 버스가 한 번 들어와 새벽 일찍 나가면 끝이어서 그 외에는 비포장 시골길을 수 십리 길도 걸어 다녀야 되는 가난한 바닷가 농촌지역이었다. 그래도 사범학교 재학 중 음악을 특별히 많이 공부했다고 인정받아 음악선생님이라는 직함을 받고 우리 교실에는 풍금 한 대를 상시 배치하여 (피아노는 구경 할 수도 없었음) 아무 시간에나 어린 학생들과 즐거이 노래 부르고 음악공부를 할 수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길지 못했다. 5.16 군사혁명 직후여서 군사정권의 정책으로 병역 미필자는 모두 현직에서 해임처분을 받았는데 아직 입대할 나이가 안 된 우리(남자동창)는 모두 해임되어 혹은 군 입대로 혹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서울음대 진학
교직에서 해임당한 나는 마지막 남은 사범학교 후배들(63년 졸업을 마지막으로 나의 모교는 문을 닫고 교육대학으로 학제가 바뀌었다.) 관악지도를 하고, 사범부속초등학교(전 전국동요음악협회장 이문주 선생님 지도)의 리듬밴드와 합창연습을 돕는 등 시간을 보내다가 경제여건상 아무 가능성도 없이 무작정 대학교 시험을 보기로 내심 작정했다. 받은 교육이 대학 입시과목과는 거리가 먼 초등학교 교사준비교육 뿐이어서 마땅한 학과를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민 끝에 그나마 악보는 잘 읽을 수 있으니 음악대학 시험을 보기로 방향을 정했다. 처음엔 작곡과를 생각했으나 피아노 연습이나 배울 곳이 없었고, 기악과 관악전공을 생각했으나 악기 구입을 엄두도 못내 그저 가지고 있는 목소리로 노래나 부를까 하여 나의 음성이 어떤지는 생각도 못하고 성악을 택하기로 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마침 같은 중, 고교 동기동창인 조길자(성신여대음대학장, 대학원장 역임)씨가 고교 시절부터 오페라 주역을 맡아 연주하는 등 활약하다가 사범학교 졸업하던 62년 서울음대 성악과에 수석 입학하여 재학(이관옥교수 사사) 중이었고, 한 해 아래 이근택(창원대음대학장 역임)후배가 역시 서울음대 작곡과에 63학번으로 재학(김성태교수 사사) 중이어서 여러 가지 상황을 편지로 의논 해가며 준비를 했다. 입시과목은 음악, 국어, 국사, 영어, 체력장 등이었다. 음악과목만 해도 전공실기(독일-이태리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 Concone 50번), 시창, 청음, 악전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했다. 악전이나 시창, 청음은 평소에 잘 준비되어 있어 별 문제가 없었으나, 제일 중요한 전공실기(성악)가 문제였다. 당시 내가 살던 대전에서는 성악을 지도받을 선생님을 찾을 길이 없었는데 수소문 끝에 처음 창단 된 대전방송국 합창단에 들어가 마침 지휘하시던 이근호 선생님(서울음대 성악과를 마치고 후에 호수돈여고, 대전여고 음악교사)을 만나 몇 달 간 렛슨을 받았다. 그분도 음대입시생 렛슨을 처음 하시는지라 내 노래와 Concone 부르는 것을 보시고는 아주 좋다고 성악공부 초년병을 처음부터 <La Traviata>의 ‘제르몽 아리아’와 슈만가곡 ‘두 척탄병’ 부터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곡들은 대개 음대 고학년 때나 공부하는 수준의 곡이었다.) 신앙심이 깊으셨던 선생님께서 교회예배당을 빌려 정성껏 열심히 가르쳐주시었다. 입시 때는 라디오 방송에서 오현명 교수님의 연주를 한번 들은 적이 있는 Verdi의 오페라 Simon Boccanegra 중 Bass 아리아 “Il lacerato spirito” (슬픈 아버지의 마음)를 노래했다. 이렇게 서울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시골뜨기가 아무 경제적 지원 없이 무작정 준비하여 응시했으나 천우신조로 64년 서울음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당시 성악과장이셨던 이상춘교수(테너, 후에 학장)님 문하에 들어가 장학금, 등록금 면제,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로 겨우 대학을 마치게 됐다.
서울음대 입학으로 상경하여 있을 곳이 마땅치 않은 나는 숙식은 동숭동 바위산 꼭대기 판자촌에서 손바닥만 한 방 한간 빌려 근근이 생활하는 이근택 후배의 자취방에서 함께 굶기를 밥 먹듯 했고, 때로는 가정교사로 초등학생 집에 입주하여 학생 가르치고 먹고 자고 했으며, 그것도 못 할 때는 여기저기 친구 집 신세를 자주 지기도 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흥부도 안 죽고 살았는데...’를 늘 마음에 품고 그래도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한다는 큰 기쁨으로 열심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했다. 앞에 언급한 조길자, 이근택교수를 비롯, 사범학교 한해 후배인 이태성(바이얼린, 국향단원), 전인평(Ph.D. 작곡, 중앙대국악대학장), 두해 후배인 이경숙(피아노, 서울음대 및 서울예고 강의) 등 우리는 모두 대전사범학교 동문들로 같은 선생님(안일승)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동시대에 같은 서울음대에서 수학하여, 순박한 충청도 시골뜨기들이 눈감으면 코 베어 먹는다는 서울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서로 나누고 의지하며 서로 도왔고, 지금껏 평생의 친구요, 형제요 자매이다.
나는 입학 때부터 이상춘 교수님께 사사하다가 3학년 때 이인영교수님(베이스)께 지도교수를 옮겨 공부했고 대학원에서는 다시 이상춘교수님의 지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중 학교 오페라(마적, 쟌니스키키) 주역과 국립오페라 “마탄의 사수” 출연, 제7회 동아음악콩쿨에 입상하였고, 68년에는 서울음대 졸업생을 대표하여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제18회), TBS TV신인음악회에 출연하였으며, 이후 대학원 재학 중에도 교수님들을 모시고 국립오페라에 출연, 서울음대 오케스트라와 협연,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협연, 대학생을 위한 대음악회 독창, 합동메시아공연 독창자로 출연하는 등 나름 연주활동을 활발히 했다.
상명사대 교수 임용 그리고 미국 유학
1968년 대학 졸업 후 세검정의 상명여사대부속여고 교사로 부임하여(당시 김신조 등의 1.21사태 직후여서 자하문을 넘는 출퇴근길에 헌병, 경찰들의 검문이 심했음) 학생 지도하였고, 교장선생님(이재기학원장)의 특별 배려와 추천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원 수업과 외부 연주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엔 당시 학교 설립자 배상명학장님(후에 종합대학총장)의 지극한 사랑으로 대학 신설 음악교육과에 전임강사(만28세)로 교수생활을 시작하며 신설 음악과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미 전 대학에서 재직하던 시절은 성대수술 직후로 음성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매우 미안하고 불안하고, 양심에 가책을 받는 답답한 맘으로, 그러나 성심성의를 다하여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줄리어드학교 생활
75년 11월에 연주차 여행비자로 미국에 입국한 나는 학생비자로 변경을 위해 학교에 입학하려 줄리어드학교(The Juilliard School) Admissions Office에 접촉했으나 이 학교는 제도상 9월 학기에만 입학이 가능하다 하여 우선 봄 학기 입학이 가능한 맨하탄음악학교(Manhattan School of Music) 대학원에 입학하여 76년 봄 학기를 수강하고(성악지도교수 : Gabor Carelli -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주역가수), 같은 해 가을학기(9월)에 줄리어드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당시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성악교수로 인기가 높았던 Daniel E. Ferro 교수에게 실기 지도를 받으며 그 어려운 줄리어드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음악예술학교로 설립 된 뉴욕의 줄리어드음악원(The Juilliard School of Music)은 1962년 뉴욕의 맨하탄 브로드웨이 64-66가에 세계 무대예술의 종합공간인 Lincoln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무대예술을 위한 링컨센터)라는 엄청난 규모의 종합예술센터(Metropolitan Opera House, Avery Fisher Hall –New York Philhamonic Orchestra Hall, New York City Opera House, New York City Ballet, Drama Theatre, Alice Tully Hall –Concert Hall, 도서관, 박물관 등 포함)를 만들며 거기에 걸맞게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무대예술학교로 확대, 개편(1968년 개명)된 것이 줄리어드무대예술학교(The Juilliard School of Performing Arts)이다. 그곳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클래식 음악만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우리가 보통 부르는 줄리어드음악원 (맨하탄 브로드웨이 120가, 지금의 맨하탄음악학교 - Manhattan School of Music 자리)이었으나 링컨센터로 이전하면서 클래식음악 뿐만 아니라 재즈, 무용, 연극, 오페라 등 모든 무대예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큰 규모의 종합무대예술학교로 확대 개편됐다. 훌륭한 시설과 최고의 교수진, 훌륭한 장학제도, 빼어난 예술성과 연주능력을 가진 뛰어난 학생들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예술계를 주도해 나가는 훌륭한 연주가를 배출하고 교육시키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예술종합학교로 우뚝 선 것이다. (흔히 부르는 ‘줄리어드음대’는 음악만 가르치던 옛 학교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지만 링컨센터로 개편 후 실제 이름은 ‘줄리어드학교’라 불러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나는 언어소통도 불편하고 학교과정을 이수하기에도 힘에 벅차 내가 이수하는 음악과목 이외의 그 큰 규모의 학교 전반적인 여러 가지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Class Work 준비에 바쁘고 숙제에 급급해 정신없이 헤매고 뛰어다닌 기억, 늘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여기선 일부 내가 경험하고 느낀 부분만 서술 할까 한다.
당시 이 학교의 과정은 학사, 석사 등 학위과정과 대학, 대학원 Diploma 과정, 대학원 이후의 전문교육 과정(Professional Study Course), 대학 이전의 예비학교(Pre College)와 일반음악인들의 교육을 위한 Extension Division이 있었다. 또 정규과정 외에 American Opera Center가 있었는데 프로급의 오페라 가수들이 프로무대 데뷔 전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공연도 많이 하는 오페라 훈련 기관이었다.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이미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몸담고 있던 학교에서 유학 허락받은 기간이 짧았으며(2년) 게다가 언어의 문제가 심각했으므로 미국문화사 등 아카데믹 과목을 이수해야 되는 학위과정을 피하고 Post-Graduate Diploma(대학원디플로마) 과정을 택했는데 졸업 후에는 계속해서 Professional Study Course(전문연주자과정)를 이수했다. (후에 음악박사학위 과정이 생겼다)
입시과목은 전공실기, 피아노, 시창청음, 화성학, 음악사 등 여러 과목인데 전공실기 점수와 다른 과목 시험성적, 이전 학교의 성적증명서 심사로 합격이 결정되고, 각 과목시험은 학년 배치고사(Placement Test)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두 패스하면 그 과목은 수강을 할 필요가 없이 직접 대학원 과정만 수강하면 된다. 우리나라 대학교육 과정이 미국의 학교제도를 기본으로 한 이유인지 줄리어드의 교육과정은 내가 공부했던 서울음대의 과정과 많이 비슷했다. 다만 우리는 학년이 정확히 구분되어 학년 진급을 했지만 그곳은 처음 입학오디션에서 배정받은 과목별로 진급을 하는 것이 좀 생소했다. 예를 들어 대학원에 합격했어도 과목마다 오디션에 인정받은 수준에 맞는 대학과정을 다시 이수해야만 한다.
성악과에는 전공실기, 부전공실기, 시창청음, 4개국어 딕션, 화성학, 언어별 성악문헌, 오페라, 합창, 세분화된 음악사, 가곡과 오페라 개인코칭 등과 학위를 위한 아카데믹 코스가 더 있고 지휘법(합창 및 오케스트라) 외 수 많은 음악이론 과목들을 선택하여 수강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배웠던 과목과 비슷했지만 한국에서 배웠던 내용이 바탕 교육이었다면 그곳에서의 과정은 훨씬 깊고 넓고 심화된 과정이었다.
학교 시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렛슨실 크기가 일반학과 강의실과 같았고 항상 전문 반주자가 있어 전공교수와 함께 공부를 도왔다. 수없이 많은 개인연습실(그래도 수가 모자라 새벽부터 연습실 쟁탈전이 벌어짐)에는 모두 시민회관 무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슈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비치되어있어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해도 벌써 장래가 좍 열리는 듯한 환상에 빠지곤 했다. 강의시간 사이 휴식시간에는 2층 카페테리아에서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마시며 동료학생들과 담소도 즐겼다. 음악 감상실과 도서실에는 필요한 모든 자료들이 구비되어있어 언제나 악보를 보고 음악을 듣는 등 이용이 가능하고 간단한 악보의 복사 혹은 대여까지 할 수 있었다. 아담한 리사이틀 홀이 있어 졸업연주, 개인연주, 실기시험을 비롯한 많은 연주회가 개최되었고, 오페라나 드라마, 무용발표를 할 수 있는 Theatre엔 제법 큰 규모의 극장 무대와 부대시설이 완벽히 갖춰져 무대장치나 소품을 만드는 목공소 시설과 무대의상을 만들고 맞추고 보관하는 의상실이 각각 한 층을 이룬다. 좀 더 규모가 큰 합창이나 오케스트라 연주는 같은 건물의 브로드웨이 쪽에 있는 앨리스털리홀에서 연주한다.
수업은 매우 엄격했고 수준이 높았다. 나는 그래도 나름 꽤나 열심히 한다고 많이 노력했었는데 워낙에 기초 없는 언어 때문에 받은 어려움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도 다행히 수강하는 과목이 모두 한국에서 공부 한 실기과목 위주로 선택을 하여 흉내 내고, 연습하고, 밤잠 제대로 못자고 준비하면서 따라다녔지, 아니었으면 그 심한 스트레스로 한 학기도 못 버티고 하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악전공실기, 가곡과 오페라 코칭, 언어별 가곡문헌 시간에는 시인과 작곡가와 곡과 가사의 해석과 설명을 하고 정확한 딕션으로 노래 부르는 시간이어서 부지런히 준비하고 따라갈 수 있었다.
내 전공실기 지도교수였던 Daniel E. Ferro 교수는 맨하탄음대 성악과장에서 줄리어드학교로 옮겨 지도했던 당시 최고의 성악교수로 인정받는 분이었다. 줄리어드학교와 Columbia University에서 수학한 유대계의 음악가로 빼어난 용모와 체격(영화배우 Gregory Peck과 매우 흡사하나 내가보기엔 훨씬 더 미남이었음)의 소유자로 한 때는 Birgit Nilsson 등 최고수준의 성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등 좋은 연주가였다고 들었으나 연주가로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고, 60 중반의 연세로 마음이 다정하고 따뜻한 성정을 가진 분으로 성악지도 전문가였다. 아름다운 발성지도와 모든 언어의 예술가곡, 오페라 등 수 많은 레퍼토리, 깊이 있는 곡 해석, 훌륭한 피아노 연주 실력을 바탕으로 한 그분의 렛슨은 정말로 훌륭했다. 그분께 사사한 많은 훌륭한 성악가들이 창 너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 많이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다. 독, 불, 이, 영, 히브리어 등 중요한 언어는 모두 자국어 하듯 능통하여 특히 딕션 지도에 엄격했고, 따뜻한 감성으로 아름다운 가사의 내적 감정을 매우 중요시 했다. 마침 사랑하는 사모님과 사별한 후여서 렛슨 때 노래를 지도해주시다가 자주 감정이 북 바쳐 나를 꼭 껴안고 ‘너 같은 학생 다섯 명만 지도하면 더 바랄게 없겠다’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기억이 아직도 내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때마다 나름 만족스런 소리를 마음껏 내지 못하고 살짝살짝 부리던 나의 잔재주에 선생님이 속고 계시는구나 생각되어 죄송하기도 하고, 내 자신 불만과 속상함에 많이 자책하기도 했다. 렛슨곡으로 오페라 아리아를 준비해 갈 때면 “너는 예술가곡에 천분을 타고나 아름다운 예술성을 가지고 있으니 되도록 오페라 보다 예술가곡을 위주로 공부하라”며 특히 독일, 프랑스 낭만파 음악가들의 많은 예술가곡과 영미 가곡을 과제로 내주시었다. 성대를 다친 후에 마음껏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하로 입문하여 지도받는 것만으로도 황공하여 되도록 오페라곡 보다는 예술가곡에 치중하여 렛슨을 받았다. Ferro 교수님은 여름휴가 때면 파리음악원, Salzburg의 모차르테움, 이태리 Siena의 Chigiana 음악원에 여름학교 지도 차 여행을 다니셨고 출타중인 여름방학동안에는 줄리어드학교 입학을 목적으로 유학 온 입시준비 학생들을 나에게 보내어 오디션 준비를 시키시기도 했다. 한국 성악도들을 매우 좋아하여 Juilliard에서 우리가 잘 아는 박인수, 김성길, 정광, 곽신형, 홍혜경, 신영옥, 신경희, 신애령, 김만규, 김인혜 등과 Manhattan School에서 강화자, 윤현주 외 많은 한국학생들이 그분의 지도를 받았다. 특별히 나는 유학 전 대학에서 지도했고 또 공부를 마치면 귀국하여 학생들을 지도해야 된다는 것을 아시고 시간 허락될 때마다 선생님의 렛슨을 참관하도록 배려해주시어 여러 학생들의 지도모습을 많이 보았고, 또 직접 설명과 시범을 보이시며 음악의 표현방법과 좋은 발성의 기법, 잘못된 음성의 교정 등 많은 지도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몇 년 전 서울에서 독일 Brauer교수에게 렛슨 받던 그 감동과 기쁨을 Ferro교수를 만나 다시 찾게 되었고, 모든 음악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악은 다른 전공보다 교수의 지도방법에 따라 발전과 향상이 크게 좌우되는 중요한 원칙을 깊이 실감했고 나름 좋은 방법들을 많이 배우고 익혔다. (비록 나는 귀와 성대를 다쳐 훌륭한 연주가로 발전하는데 한계를 느꼈지만...)
발성과 레퍼토리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한국에서 성대를 다친 원인인 한쪽 귀 난청과 성대를 치료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로 방법을 모색했다. 성대치료에 권위자라는 Dr. Gould(줄리어드학교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하고 난청치료 전문병원과 의사를 소개받아 여러 가지 복잡한 검사를 통하여 치료방법을 상담했으나 매우 실망스런 결론만 확인했다. 유스타키오관(Eustachian tube) 수술치료 방법이 있긴 하나 성공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고 실패할 경우 남아있는 청력마저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의료장비와 의술이 발전해 좋은 치료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45년 전 의술은 세계최고인 뉴욕에서도 그리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의사의 추천으로 보청기를 맞추어 사용해보았으나 보청기의 청력주파수가 대화에는 도움이 되나 성악에 필요한 (특히 내 귀에 필요한) 고음역주파수는 별 도움이 안 되어 특별 제작하느라 가난한 유학생활에 비싼 값만 축내고 결국 사용을 못하고 말았다. 나의 발성 공부는 꼭 장님이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찾는 듯 한 느낌이었고 이 느낌은 평생 지속되어 한 번도 만족스런 마음의 연주를 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전공실기 렛슨 외에 매주 세분의 코취에게 한 시간씩 세 시간의 레퍼터리 지도를 받았는데 세분의 코칭 받을 곡(Opera aria, Opera scene, Full opera role, Sacred music, 예술가곡 등) 준비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줄리어드에서 독, 불, 이, 영 4개국어 Diction(무대 위에서의 정확한 발음)은 대학원과정이 아닌 대학필수 과정이었는데 1년(매주 두 시간씩 두 학기)에 1개국어 씩 4년 과정으로 되어있었다. 나는 도미 전 서울음대 재학 때부터 성악가로서 매우 중요한 딕션을 많이 배우리라 작정을 하고 특히 노력을 많이했다. 나는 한국에서 딕션 과목을 모두 이수했기 때문에 학점취득이 필요치 않은 과목이었지만 내게는 그 과목들이 매우 중요하여 주어진 2년의 기간에 맞추어 다시 배우느라 첫 해 이태리어와 독일어를, 둘째 해에 불어와 영어 클래스를 선택 이수하였다. 모자란 영어로 제3국어를 공부 하자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같은 기간에 두 가지 다른 언어를... 첫해 이태리어 클래스에는 고교를 마치고 갖 입학한 귀여운 소프라노 홍혜경이 클래스메이트로 함께 공부했다. 음성도 아름답고 노래도 잘 했지만 성격이 매우 밝고 활발하며 키가 커서 꼭 미국학생을 보는 듯하였다. 줄리어드의 모든 과정이 다 엄격하지만 딕션과 시창청음은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특히 딕션은 자국어를 사용하는 까다로운 할머니 선생님들이 손수 출판한 딕션 책을 교재로 매우 엄격하게 가르친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나의 연주는 물론 학생지도에 크게 도움을 받아 줄리어드에서 배운 것 중 내게 가장 가치 있는 과목으로 생각한다. 물론 중학교 1학년 영어시간에 엄격하게 배운 I.P.A.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지금도 그 때 영어선생님(김영성)께서 엄하게 가르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큰 고마운 마음을 평생 가지고 있다.
시창청음도 놀랄 만 했다. 그것도 대학과정이지만 그곳 대학을 마치지 않고 외부에서 직접 대학원에 입학하는 경우엔 거의 4년 혹은 3년의 과정을 이수하는 게 보통이란다. 웃지 못할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시창청음을 여러 해 강의하다 갔는데 우리의 수준과 실력이 너무 낮고 부끄러웠다. 시창은 절대음감을 가진 학생이나 잘 부를 수 있는 무조성의 현대음악을 비교음정으로 정확히 불러야 하고 청음도 한국에선 해보지 못한 화성청음을 해야 했다. 맨하탄학교 대학원에서도 한 학기 배치를 받아 겨우 끝내고 왔는데 여기와선 마지막 학년 과정(두 학기) 배치를 받았다. 그래도 Miss Cox(시창청음교수)께서 이렇게 빠르고 정확한 시창을 하는 입학생을 처음 본다고 칭찬을 하며 외부에서 입학하는 학생의 마지막 1년 배치도 내가 처음이란다. 그 전 3년간의 과정을 안 배워 잘 모르는 처지에 4학년 과정은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마지막 학기엔 Clef가 다른 4성의 바하 코랄(세 개의 다른 C Clef-가온음자리표와 F Clef 악보)을 양손으로 두 파트를 피아노로 치면서 한 파트는 계명으로 노래를 부른다. C clef에 생소한 나는 꼭 돌아버릴 것 같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마지막에는 그 방법으로 몇 도 위 혹은 아래로 이조해서 연주시킨다. 성악과와 지휘과는 그걸 통과해야 시창청음이 끝이 나고 대개 그 과정이 졸업시기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고생을 무척 했지만 그래도 좋은 점수로 두 학기를 마쳤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클래스는 성악문헌 시간이었는데 첫해에는 Martin Isepp 교수가 지도하는 독일가곡문헌 시간이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유난히 배가 많이 나온 그 선생님은 부드럽고 친절한 성품의 소유자로 성악코칭과 오페라 지휘도 하는 영국출신의 유명한 피아노 반주자이며 슈바르츠코프, 자넷 베이커, 셜리-컥 등 유명한 성악가의 독창회 반주와 음반 레코딩도 많이 한 분으로 많은 예술가곡을 재미있게 잘 가르쳐주셨고, 나는 대학시절 독일가곡을 많이 공부했던 까닭에 친절한 선생님과 함께 재미있게 공부했다. Isepp 선생님은 내 재학 중 영국의 Glyndebourne Opera의 음악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줄리어드는 사직을 했는데 학생들이 무척 따르고 좋아하는 교수님이어서 다들 많이 서운해 했다.
다음해 성악문헌은 불어와 영어가곡 이었는데 강의하신 Samuel Sanders 교수는 이차크 펄만, 정경화 외 유명한 기악가들의 독주회 반주나 레코딩도 많이 한 콜럼비아아티스트매니지먼트 소속으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가냘픈 체격과 섬세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그 선생님은 퍽 젊어 보였다. 피아노 음색이 유난히 명쾌하며 곡 해석과 피아노 연주가 매우 뛰어났고, 클래스에서도 특히 나와는 곡 해석이나 호흡이 잘 맞아 손수 반주 해줄 테니 함께 Recital을 갖자고 여러 번 권유를 받았으나 소리에 자신이 없어 끝내 못 이루고 말았다. 자기가 속해있는 매니지먼트에 추천을 해주겠노라 친절을 베풀기도 했고, 1977년인가 정경화의 카네기홀 독주회 반주를 하며 초청을 해주시어 두 연주가의 훌륭한 연주를 보며 가슴 벅찬 큰 감동을 받기도 했고 연주 후 무대 뒤 준비실에서 선생님의 소개로 천사 같은 바이얼린의 귀재 정경화와 처음 대면하여 악수를 나누는 귀한 시간도 가졌다. (나는 결혼 후 늦게 유학하여 늙은 학생이어서 오래 전 줄리어드 수학 후 벌써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는 그의 언니 첼리스트 정명화씨와 나이는 동년배이지만 그 세 자매를 보면 나는 꼭 한참 높은 웃어른들 앞의 유치원 어린이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졸업 얼마 후 맨하탄 그분의 아파트 로비에서 초췌한 Sanders 선생님의 모습을 뵈었는데 심장수술을 받고 건강이 안 좋다고... 몇 년 후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귀한 인재를 잃은 슬픔에 가슴 아팠다.
음악사 클래스 중 바하 연구 클래스에는 피아니스트 김영호(연세대교수)와 함께 수강하며 함께 클래스연주도 했다.
또 그 시기는 합창지휘 전공이 없던 때여서 대학원 졸업 후 Professional Study(전문연주자) 과정에서는 Richard Westenberg 교수가 지도하는 Choral Conducting과 또 다른 선생님 지도하에 Orchestra Conducting을 수강했다.
나는 뉴욕 유학 중에도 한인교회 성가대를 지휘하였고, 따라서 지휘에도 관심을 가져 학교 Conducting Class를 수강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외부에서 Amy Kaiser(Mannes College 지휘교소)에게 지휘 개인지도를 받았다. 이 공부는 평생의 성가대 지휘를 하며 특히 뉴욕한인동포사회에서 처음 시도한 수차례의 ‘메시야’ 전곡 연주(이인선, 이영애, 박인수, 김은대 독창과 Orchestra-악장 : 강효 줄리어드교수)를 지휘했고, 박인수씨를 단장으로 당시 한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에밀레오페라단’의 링컨센터(Avery Fisher Hall, Alice Tully Hall)를 비롯한 뉴욕의 여러 연주홀에서 연주한 Opera, Opera-Gala Concert, 대합창제 등 많은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이때 줄리어드 강효교수와 예술종합학교 이성주교수, 미국에 있는 김진교수, 임원빈교수, Manhattan School of Music의 Dale Stuckenbruck 교수가 악장을 맡는 등 함께 활동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오디션으로 수강신청 자격을 얻는 Opera Class에서는 연기의 기본과 성악가의 기본자세를 훈련받았다. Juilliard Theater에서 Martin Isepp 교수 지휘로 줄리어드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Cavalli의 오페라 “La Calisto”(미국초연)에 Pane역, Richard Westenberg 교수 지휘로 Alice Tully Hall에서 개최된 Stravinsky의 오페라-오라토리오 “OEdipus Rex”에서 Creon역을 맡아 줄리어드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또 대학원에 함께 재학한 정명훈이 지휘한 American Opera Center의 “Madama Butterfly”에 Prince Yamadori역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글을 마무리하며
결론적으로 (편집자의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하여)
1. 한국에서 공부했던 것과 줄리아드학교 교육의 차이점이라면 그 모양은 비슷했으나 수준과 질의 차이가 많았다고 생각된다.
2. 이제는 한국에도 외국에서 수학하고 활동하던 훌륭한 교수들이 각 분야에 많이 있어 한국에서 학구열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외국에 나가서도 우수한 연주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도록 철저히 준비해야한다. 근래 국내에서 공부한 학생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한 연주가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3.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의 음대교육과정은 미국교육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듯 커리큘럼의 모양새는 비슷하다. 시간이 갈수록 국내 대학의 교육내용은 부실해지는 느낌이 많이 든다.
4. 한국에서 배우지 못한 특별한 내용이란, 그 옛날 우리 시절에는, 시대감각의 후진성, 악보와 음반을 포함한 자료와 연습실 등 시설의 미비, 우수한 지도자 수의 부족과 배우는 학생들의 학구열 부족으로 깊이 있는 내용을 충분히 배울 수 없었다고 본다. 특히 음악용어의 원어사용을 체질화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은 전연 상황이 달라져 우리 때와는 시설과 환경이 천지차이다.)
5. 미국의 다른 대학과 줄리어드학교를 비교한다면 환경의 차이를 들 수밖에 없겠다. 교육과정이나 방법은 대동소이 하겠으나 뉴욕에서는 링컨센터와 카네기홀과 같은 여러 세계적 연주장에서 세계최고의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항상 볼 수 있어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점과, 최고의 훌륭한 교수들이 항상 지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렛슨 받던 즐리어드 렛슨실 창밖 바로 앞에 Metropolitan Opera House가 보여 늘 Met 출연 준비과정으로 착각하며 노래를 부르고 공부했다. 또 Herbert von Karajan 이나 Jubin Mehta, Maria Callas, Leontine Price, Luciano Pavarotti, Tito Gobbi 같은 뛰어난 대가들의 Master Class가 교내에서 자주 있어 그들의 가르침이나 경험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기회가 많이 있었다.
6. 미국에서 공부하고 크게 성공한 한국 음악가는 내가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선 눈에 띄는 음악가들은 한동일, 신수정, 이경숙, 백건우, 백혜선, 김영욱, 정경화, 강동석, 김지연, 장영주, 정명화, 임정신, 조영창, 장한나, 곽승, 정명훈, 홍혜경, 신영옥, 최나경 등 외 에도 매우 많이 있다.
미국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다. 200여년의 짧은 역사로 자체 문화는 길지 못하나 그 넉넉한 부를 이용하여 해외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수입하여 세계 최고의 문화국가로 발전시켰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법률, 의학, 특히 음악, 무용, 건축, 미술, 의상 등 모든 예술 수준이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음악학교 교육제도는 유럽의 Meister교육(장인교육)과 다른 전인교육제도이다. 물론 유럽 스타일의 Conservatory도 많이 있지만 규모가 훨씬 크고, 대부분 전공실기 외의 많은 이론이나 여러 과목을 공부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으나 더 폭넓고 깊이 있는 이론적 지식과 교양, 전인적인 인간성을 기르는 교육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사료된다. 음악학교를 살펴보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빼어난 훌륭한 학교들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치 많다. 세계최고의 부로 최고의 건물, 시설, 자료에 세계최고의 교수들을 초빙해 많은 장학금 혜택을 주면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최고의 교육을 시킨다.
많이 알려진 음악학교만 해도 줄리어드학교를 비롯하여 맨하탄음악학교, 매니스음대, 커티스음악원, 뉴잉글랜드콘서바토리, 인디애나주립대학교, 이스트만스쿨, 피바디음악학교, 웨스터민스터콰이어칼리지, 오벌린음악원, 신시나티음악원, 샌프란시스코음악원, 버클리음대 외에도 각 주립 및 시립, 사립대학교 내의 음악대학, 각종신학교 내의 종교음악과 등 훌륭한 음악학교들이 온갖 혜택과 정성을 다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있어 전 세계의 상위 연주가 중 가장 많은 수의 좋은 연주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줄리어드에서 수학한 한국 음악가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빼어난 연주가 외에도 내가 미국 가기 오래전에 지휘자 고 임원식(국향지휘자, 서울예고교장)과 성악가 고 김자경(이대음대교수, 오페라단장), 고 이정희(서울음대교수, 본인이 직접 수강했음), 김영자(연세대교수) 등이 있었고, 피아노에는 한동일, 백건우, 이대욱, 바이올린에 김원모, 정경화, 강효, 김남윤, 첼로에 정명화, 클라리넷에 고 박종혁, 내가 입학하기 전에 이미 다녀간 선배 성악가들 중 이규도(이대교수), 김성길(서울대교수), 최인달(메릴랜드음대교수), 박인수(서울대교수)씨가 있고, 나의 재학시절 함께 공부한 학생으로는 성악에 곽신형(한양대교수), 임옥자(재미), 정광(영남대교수), 홍혜경(Met.주역) 등이 있었고 바이올린에 구진경, 배익환, 배은환, 김진, 임원빈, 이성주, 최한원, 피아노에 김영호, 황은영, 서혜경, 김영숙, 첼로에 홍성은 그 외 여러 방면에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많은 한국 학생들이 있었다. 내가 졸업한 후에도 성악에는 강미자(경남대교수), 신영옥(Met.주역), 박미혜(Met 출연, 서울대교수), 박정원(한양대교수), 김인혜(음악박사, 서울대교수), 이인선(뉴욕찬양신학교교수), 신애령, 여현구, 정승필, 김동순(창원대 교수), 김만규(목사) , 윤종일(동덕여대교수) 등 많은 우수한 학생들이 수학했고 졸업 후 많은 연주 활동과 함께 굴지의 대학교에서 후진들을 지도하며 또 정년을 마치기도 했다.
나의 줄리어드 재학 당시 피아노에 정순빈교수, 바이올린에 강효교수가 Teaching Staff로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학원 지휘전공에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쿨 피아노부분에 입상하여 유명스타였던 정명훈이 있었는데 아메리칸오페라센터의 ‘나비부인’을 지휘하여 극찬을 받았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Prince Yamadori라는 역을 맡겨 함께 연주했다. 그 후 그는 승승장구 많은 활약으로 세계적인 지휘자로 우뚝 서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훌륭한 지휘자로 전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활약하고 있다. 음악이론전공에 지휘자 임헌정이 대학원을 마치고 지휘자로 활약하다가 모교인 서울음대 지휘교수로 재직했고 부천심포니오케스트라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줄리어드학교 이외에도 수많은 미국 내 훌륭한 음악대학에서 수학한 저명한 음악인 중 Manhattan School of Music에 최혜영(Sop. 세종대교수, 뮤지컬 ‘King and I’ 최초 동양인 주역), 강화자(M.Sop. 연세대교수, 오페라단장), 윤현주(음악박사, 서울대교수), 안희복(Sop. 한세음대학장) 등이 함께 공부했고, 내 이전에 Mannes College of Music에서 수학한 곽승(Austin Sym.상임지휘자), 김신자(M.Sop. Met정단원, N.Y. City Opera 주역, 이화여대교수)씨가 있었고, 박수길(Bar.한양대교수, 국립오페라단장), 유충렬(Ten. 계명대교수), 국영순(Sop. 뉴욕), 김철호(Cello, 서울시향수석), 박영근(작곡, 한양대교수) 등이 같은 시대에 공부했다. 그 외 전교생을 전 장학금으로 교육하여 수재를 기르는 Curtis Institute of Music을 졸업한 현해은(서울음대교수), 이경숙(연세음대교수), 김영욱(Violin, Mannes 음대, 서울음대교수), 강동석(Violin), 조영창(Cello), 조영미(Violin), 서정학(Baritone), 서주희(Piano), 김원미(Piano), 최나경(Flute), 또 Indiana University의 백의현(음악박사, 연출가, 이화음대학장), 임정신(Cello, Indiana교수), 이상혁(Ten. 이대교수), Peabody School of Music에 신수정(Piano, 서울음대학장, 서울대총동창회장), 김준차(Piano, 서울Chamber Ensemble 지휘자), Oberlin Conservatory of Music에 이경숙(Sop. 서울음대교수), 김영애(Sop. 경원대교수), Catholic University에 이정애(Sop. 한서대교수), New England Conservatory에 고 옥인걸(Lowell Univ.교수), 변화경(Piano, N.E.C.교수), 백혜선(Piano, 서울대교수), San Francisco Conservatory, Eastman School of Music에 한영혜(Piano, 박사, 경원대학교교수), 박정선(작곡, 단국대학장), New York Brooklyn College에 이병천(Ten. 합창지휘), New York City University 박사과정에 나와 함께 재학했던 차인홍(Violin, 지휘, 미국음대교수), Combs College에 양경자(박사, 재미, Alto), 김명지(Bass, 상명대교수, 재미) 그 외에도 여기 다 열거 할 수 없는 많은 훌륭한 연주가들이 한국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 음악계를 누비며 활약했고 또 활약하고 있다.
나는 줄리어드학교 재학 시부터 New York을 중심으로 New Jersey, Philadelphia, Washington DC, Los Angeles, Hartford, Seattle, Detroit, Atlanta, Dallas, Houston, Santa Barbara, Toronto, Montreal등 미국, 캐나다 여러 도시에서 Solo Recital, Joint Recital을 비롯하여 베토벤 9th Symphony와 헨델의 Messiah, 하이든의 천지창조 등 오라토리오와, 레퀴엠, 미사곡, 칸타타 등 종교음악과 많은 Concert에 베이스 독창자로 활약하였고, Pasadena Orchestra, Waterberry Orchestra, Toronto Symphony, Detroit Symphony Orchestra, Philadelphia Orchestra, Emille Opera Orchestra, Juilliard Symphony Orchestra 등과 협연하였다. 또 국내와 미국에서 국립오페라, 대한오페라, 김자경오페라, 서울오페라, 아메리칸오페라센터, 줄리어드오페라, 브루클린오페라, 에밀레오페라 등에서 <라보엠>, <나비부인>, <쟌니스킥키>, <휘델리오>, <마탄의 사수>, <카르멘>, <돈죠반니>, <코지환툿테>, <휘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세빌리아의 이발사>, Cavalli의 <La Calisto>-미국초연, Stravinsky의 <OEdipus Rex>, 박재훈의 <에스더>-초연, 장일남의 <원효대사>-초연, 장일남의 <춘향전>-한국공연 및 미국초연 등 다수의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으며, 특히 Alice Tully Hall에서 Concert form으로 공연한 <Cosi fan tutte>-김정수지휘- 의 Don Alfonso역은 New York Times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대로 Avery Fisher Hall과 Alice Tully Hall등 Lincoln Center와 Carnegie Hall, Colden Center, Lehman Center, Borden Auditorium, Merkin Concert Hall등 New York의 유수한 연주회장에서 Opera, Chorus Festival, Opera-Gala Concert, Oratorio, Sacred Music Concert 등을 지휘하는 등 주로 지휘자로 많은 활동을 했다.
나는 도미 전 상명여자사범대학음악과교수, 총회신학교종교음악과강사를 역임했고 줄리어드학교를 마치고 뉴욕의 Queens College (Aaron Copland School of Music) Faculty와 Brooklyn Conservatory of Music에서 성악교수 겸 Director of Foreign Students로 재직하며, 또 음악이론 박사학위 과정만 있었던 New York City University에 D.M.A.(Doctor of Musical Arts, 음악박사) 과정이 신설되어 처음으로 입학하여 성악전공을 Jean Hakes, Richard Barrett 교수와 공부했다. 오래 공부했던 슈베르트의 <Die Winterreise, 겨울나그네> 전곡 독창회를 처음 가졌던 것도 그 때 일이다. 모두 까마득히 오래 전 일이다.
“뉴욕 에밀레오페라단” 활동
1977년에 박인수교수의 수년에 걸친 헌신적 노력과 한인 성악가 유학생들의 협력으로 장일남의 “춘향전”을 Borden Auditorium (Manhattan School of Music)에서 창단공연으로 연주하며 뉴욕에서 창단 된 에밀레오페라단은 이후 <나비부인>, <Chorus & Opera Gala Concert> in Avery Fischer Hall(New York Philharmonc Orchestra Hall), <마술피리>, <대춘향전>, <세빌리아의 이발사>, <Cosi fan tutte>, <카르멘>, <리골렛토>, 등의 오페라와 <창단10주년기념 Opera-Gala Concert>, <Sacred Music Concert>, <Opera Scenes & Korean Art Songs> 등을 비롯한 많은 컨서트를 Full Orchestra와 함께 개최하였다.
뉴욕에서 외국의 음악가들이 오페라단을 만들어 오케스트라 반주로 정기적으로 링컨센터 등 큰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한국 성악가들이 유일무이했다. 가난한 한인 유학생들이 힘을 합쳐 오페라단 만들 때의 창단목적은
1. 우리들의 노력으로 오페라무대를 만들어 연구하고 공부하여 실력을 향상시키고,
2. 그 어려운 이민생활에 고생하는 우리 동포들을 우리의 연주로 따뜻이 위로하고,
3. 미국 음악계에 한국음악과 한국 성악가들의 우수성을 소개하여 알리며,
4. 세계 제일의 뉴욕음악계에 한인성악가들의 진출하는 기회를 만들자는 것 등이었다.
박인수(초대 단장)씨의 피나는 노력과 헌신, 70년대 뉴욕에 유학 온 한인 성악가들의 절대적인 협력과 뭉쳐진 마음으로 창단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첫 작품으로 우리 것을 소개하고자 장일남작곡 “춘향전”을 백의현 연출, 백경환 지휘(본인은 변사또역)로 공연했다. 대관료, 무대장치, 오케스트라 경비들이 막대했다. 70년대 후반 이민 초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도 박인수씨의 대단한 인맥과 사업수완으로 후원회를 조직하며 뉴욕에 자리 잡기 시작한 한인 의사들을 중심으로 변호사, 회계사, 여러 분야의 사업가 등 여러 한인인사들을 설득하여 정신신경과 노대식 박사를 이사장으로 재단을 만들고 비영리단체(Non Profit Organization) 등록을 하며 기금 마련에 노력하였다. 재단이사와 회원들의 후원금과 기금모금 음악회를 비롯하여 Home Concert, 교회 연주회, 방문 상담 등 온갖 방법을 다 하여 겨우 겨우 기금을 마련하였고, 광고는 주로 뉴욕 한국일보가 무료로 전면광고를 맡아 해 주었으며(후에는 뉴욕중앙일보 합력), 출연자(연출가, 지휘자, 성악가, 합창단, 무용단 등) 모두는 연주료 없이 무료로 출연하며 티켓을 나누어 판매하기도 하였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연한 창단연주 “춘향전”은 뉴욕 음악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고 여러 음악평론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으며 한인 동포사회의 큰 갈채를 받는 성공적인 연주였다. 한국의 고유 스토리를 한국 작곡가가 오페라로 작곡하여 조선시대의 관리나 백성들의 의상과 분장, 광한루나 변사또의 동헌 등 무대장치, 연기, 특히 한복을 입은 여인들의 조선 춤과 국악 리듬을 사용한 무용음악, 징과 꽹과리, 장고를 사용한 몇 부분의 효과음악 등은 서양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더 없이 좋은 선곡이었고, 수준 높은 한국 유학생들의 훌륭한 연주 실력은 뉴욕 음악계에 호평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한 당시 평론가들의 언급 중 우리들이 숙고해야 될 중요한 점은 한국인이 작곡한 음악이 서양 사람들에게 곡 전체가 한국의 민속적인 것 보다 서양음악으로 들렸다는 점이다. 서양 음계와 화성으로 작곡 된 음악, 서양악기로 구성 된 오케스트라와 아리아, 중창, 합창 등 전곡이 전통 한국음계나 선율, 전통악기의 오케스트라 같은 모습이 없었다는 점이다. 작곡자 장일남선생은 한국적 분위기를 많이 표현하느라 노력했지만 이미 양악 음계와 선율, 화성에 익숙한 우리의 작품은 서양음악 그대로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과 전통적인 우리 국악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관객 중 그곳 음악인들은 더 한국적인 것을 기대했겠지만 서양음악을 배우고 익혀온 우리 연주가와 작품은 국악 오페라는 아니었던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협의를 거쳐 몇 개 안되는 한국 오페라 작품 중 그 중 완성도가 높고 한국적 스토리로 내용이 많이 알려진 작품을 선곡한 작품이 <춘향전>이었다.
또 어려웠던 문제는 기본적인 악보의 문제였다. 서둘러 일찍 스코어를 부탁했으나 차일피일 기일이 한참 지나 연주 며칠 전에 늦게 도착한 지휘용 스코어는 오케스트라 편곡의 미완성, 성악가 악보(Piano Score)와 오케스트라 악보의 통일되지 않은 문제 등으로 백경환, 임헌정, 박영근 당시 유학 중인 작곡가 학도들이 며칠 밤을 꼬박 새며 편곡을 하고 사보를 하여 겨우 연주 날에 맞추어 악보를 준비하게 됐고 리허설에 오케스트라 악보 수정하는 일로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어려웠던 일 중 또 하나는 ‘에밀레’라는 오페라단 명칭이었다. 한인 이민자들이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관계로 티켓 판매의 많은 부분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데 몇 몇 교세가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에밀레’는 불교 색채가 짙다고 오페라단 이름을 바꾸라고 하며 협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출연자 거의 모두 기독교인(지휘자, 독창자, 반주자) 이었고, 처음 단체명 의논 할 때 그 이야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종교를 떠나 우리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을 찾자는 취지에서 (에밀레종 만들 때 어린아이 집어넣은 일화는 밝히지 않기로 하고) ‘에밀레 오페라단’으로 정했던 것이다. 어쨌던 많은 어려움 가운데도 <춘향전> 공연은 한인 성악도들이 하나로 뭉치는 획기적 계기가 됐다.
이후 1979년 풋치니의 <나비부인>을 백경환 지휘로(국영순, 이인선, 윤현주 주역) Abraham Goodman House에서 공연했고, 그 다음 해인 1980년 Lincoln Center의 Avery Fisher Hall(뉴욕필하모니오케스트라홀)에서 개최한 “Emille Opera-Gala Concert”의 지휘를 본인이 담당했다. 당시 뉴욕에는 백경환, 박영근, 임헌정 등 유학 온 훌륭한 지휘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번 연주회가 합창곡 위주의 연주라는 이유로 박인수 단장의 특별 압력(?)으로 여러 번 사양 끝에 내가 지휘하게 됐다. 그 전 해에 교회 건축기금 모금 행사의 일원으로 메시아 대공연의 합창지도와 연주지휘를 내가 했는데 독창자로 이인선, 이영애, 박인수, 김은대 제 씨가 함께 출연하며 (악장 : 강효 줄리어드 교수) 연주 결과가 좋아 이번 오페라 Gala Concert도 내가 맡아 지휘하는 게 좋겠다고 압력을 강하게 가하여 백오십 여 명의 합창과 십 여 명의 독창자, full 오케스트라를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의 Home인 그곳에서 지휘하는 행운을 안았다. 물론 비전문 성악인들의 합창지도와 성악가들의 독창, 중창 연습, 오케스트라 준비에 혼신의 노력을 했다. Leonard Bernstein 이나 Jubin Mehta 같은 Great Conductor가 서는 Podium에 서서 오케스트라와 합창과 함께 한국 성악가들의 수준 높은 연주를 지휘한 감격과, back-stage에서도 그분들이 사용하던 상임지휘자의 개인 준비실에서 아름다운 전담 여비서의 친절한 안내로 의상이나 음료 등 연주준비를 하고 연주 중 무대 출입과 Intermission 시 휴식 등 진행 상 도움을 받으며 연주한 그 일은 4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록이 없어 모르긴 해도 아마 한국인이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무대에서 큰 규모의 연주를 지휘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 아닌가 하고 가끔 겁 없던 그때를 회상하며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연주는 처음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만장의 관객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잘 진행이 되었다.
1983년 박인수단장의 서울음대교수 취임으로 귀국한 후 작곡가 백의현 박사가 제2대 단장에 취임하여 그의 예술감독으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Concert Form으로 임헌정이 지휘하며(홍혜경, 이인선, 강영린, 신영옥, 최덕식, 김명지, 김영석, 전봉구 등 출연) 1984년 링컨센터 Alice Tully Hall에서 연주했다. 1987년 2월 세계평화의 해 기념으로 서울오페라단(김봉임단장, 본인도 창단 시 부터 정단원 이었음)과 합동으로 Queens College의 Colden Center에서 장일남(한양대교수) 작곡자의 직접 지휘, 백의현(단장) 연출로 “대춘향전”이 연주됐다. 무대장치와 소품, 의상 등을 서울에서 직접 공수해오는 큰 작업이었는데 출연은 이규도(이대교수), 박인수(서울대교수), 김성길(서울대교수), 김신자(이대교수), 진기화(연합신학교교수), 진용섭(뉴욕), 전봉구(뉴욕) 등으로 뉴욕한인교향악단과 한인합창단이 함께 공연했다.
1987년 백의현 박사의 귀국(이대교수취임)으로 나는 박인수, 백의현 단장에 이어 제3대 에밀레오페라단 단장과 음악감독 일을 맡게 됐다. 모든 일이 힘에 부치고 쉽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음악회를 계획하고, 주관하고, 열심히 준비하는 등 온 힘을 바쳐 노력을 기울여 부족한 능력으로나마 나름 여러 해 좋은 연주를 위하여 헌신했다.
박인수 초대단장의 선구자적 희생과 백의현 2대 단장의 섬세한 연출, 장일남, 백경환, 임헌정, 김정수와 본인의 지휘로 이규도, 안희복, 강미자, 곽신형, 국영순, 이정애, 진귀화, 한혜영, 이인선, 박미애, 김초영, 김민혜, 김순희, 박미혜, 박정원, 임지현, 박나연, 신애령, 김명희, 홍혜경, 신영옥, 김인혜, 박수정, 이종미(이상 Sop.), 김신자, 강화자, 윤현주, 박영수, 이원희, 조공자, 황경희, 이국자, 지종옥 (M.Sop), 박인수, 유충렬, 서병선, 김재국, 강영린, 최화진, 김영석, 이상혁, 옥상훈, 이정진, 김동순(Ten.), 최인달, 김성길, 박수길, 주염돈, 전봉구, 최명용, 송진태, 김명지, 이한섭, 최덕식, 김병기, 임은호, 임영호, 이영기, 최현수, 정승필, 김희권, (Bar.,Bass), 피아노에 김준차, 김혜원, 한영혜, 임종선 외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출연하여 우리의 성가를 높였다.
에밀레오페라단의 많은 연주가운데 눈에 띄는 중요한 연주를 회상하면 다음과 같다.
<춘향전> 장일남작곡 (창단공연, Borden Auditorium, 1977/11/11-14)
총감독 : 박인수 단장
연출 : 백의현 예술감독
지휘 : 백경환
출연 : 국영순, 곽신형, 강화자, 김민혜, 고혜순
박인수, 서병선, 박수길, 전봉구,
박영근, 박윤조, 이규진, 이희상
무용 : 아이리스 박
에밀레오페라합창단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김복수)
오케스트라 편곡 및 사보 : 박영근, 임헌정, 백경환
피아노 : 김혜원
<나비부인> (Abraham Goodman House, 1979/9/15-16)
연출 : Ronald C. Luchsinger
지휘 : 백경환
의상 : Keico Nakamura
출연 : 국영순, 이인선, 윤현주, 전봉구, 이한섭, 임영화
James Jeffrey, Allan Glassman, Sam Eveleno, Glenn Martin
Violin : 최남숙
피아노 : Alla Davidovich
<Emille Opera Chorus & Opera Gala Concert>
(Avery Fischer Hall, Lincoln Center, 1980/9/20>
음악감독 : 박인수
지휘 : 전봉구
출연 : 박인수, 최인달, 안희복, 강미자, 김명지, 이인선, 김초영, 김민혜, 홍선호, 이숙자
에밀레오페라 합창단 (150명)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이성주)
피아노 : 김준차, 조정숙
<마술피리> –Concert Form (Alice Tully Hall, Lincoln Center, 1984/6/16)
예술감독 : 백의현박사
지휘 : 임헌정
출연 : 홍혜경, 이인선, 신영옥, 한혜영, 박미애, 차승희, 조공자, 황경희, 이숙자
강영린, 최덕식, 김명지, 김영석, 전봉구, 장재명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김진)
에밀레오페라 합창단 (합창지휘 : 전봉구)
피아노 : 김준차, 김혜원
<대춘향전> -서울오페라단합작 (Colden Center in Queens College, 1987/2/6)
연출 : 백의현
지휘 : 장일남
출연 : 이규도, 박인수, 김성길, 김신자, 진귀화, 전봉구
진용섭, 이재웅, 김영문, 유희문, 박영희, 강성수
무대감독 : 유경환
무용 : 전명숙무용연구소
뉴욕한인교향악단 (단장 : 심경흠)
뉴욕한인합창단 (합창지휘 : 송진태)
피아노 : 김혜원, 한영혜
<창단10주년기념 Opera-Gala Concert>
(Alice Tully Hall, Lincoln Center, 1987/9/9)
지휘 : 전봉구(단장)
출연 : 홍혜경, 신영옥, 신애령, 박미혜, 박정원,
강미자, 이정애, 박미애, 한혜영, 이인선, 윤현주, 박영수,
강영린, 이상혁, 주염돈, 최명용, 송진태,
최덕식, 이영기, 정승필, 김병기, 김희권
에밀레오페라합창단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강효)
피아노 : 김혜원, 한영혜
<Sacred Music Concert> (Lehman Center, 1988/5/1)
지휘 : 전봉구
출연 : 이인선, 이종미, 김순희, 임지현, 차승희,
신애령, 박수정, 박나연, 박미혜, 김인혜, 진재숙
윤현주, 박영수, 이원희
강영린, 최화진, 이정진, 이상현
김명지, 이영기, 김병기, 김희권, 정승필
피아노 : 김혜원, 한영혜
<세빌리아의 이발사> (Lehman Center, 1988/9/9-10)
연출 : Alejandro Madero
지휘 : 전봉구
출연 : 김명희, 박나연, 이원희, 이정진, 김재국,
김희권, 최덕식, 정승필, 임은호, 임영호
에밀레오페라합창단 (합창지휘 : 이영기)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Dale Stuckenbruck)
피아노, 김혜원, 한영혜
<Cosi fan tutte> (Alice Tully Hall, Lincoln Center, 1989/7/17)
지휘 : 김정수
출연 : 국영순, 윤현주, 김순희
김동순, 최명용, 전봉구
에밀레오페라합창단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Dale Stuckenbrook)
하프시코드 : 김혜원
피아노 : 한영혜, 임종선
<Opera Highlights> (Alice Tully Hall, Lincoln Center, 1990/9/13)
“Rigoletto” :
지휘 : 김정수
출연 : 최현수, 강영린, 신영옥, 이원희
“Carmen” :
지휘 : 전봉구
출연 : 윤현주, 김동순, 국영순, 정승필, 김경희, 이미경, 김희석, 김희권
에밀레오페라오케스트라 (악장 : 임원빈)
피아노 : 한영혜, 김혜원
<Gala Concert, Merkin Concert Hall, 1993/12/9>
감독 : 전봉구
출연 : 국영순, 곽현주, 박영수, 김동순, 옥상훈, 김만규
피아노 : 한영혜, 김혜원
* 위 공연 외에 많은 연주행사가 있었으나 자료보관 미숙으로 다 싣지 못한 것을 죄송 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에밀레오페라단을 맡아 활동하는 기간 얼마 후엔 이태리에서 수학하고 뉴욕에서 오래 활약하던 우태호(테너)씨가 “한미오페라단”을 만들어 열심히 노력했고, 덕분에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뉴욕에 한인 오페라단이 두 개가 되었었다. 몇 년 후 그의 귀국으로 뉴욕 활동은 문을 닫았지만... 또 고 심경흠(바이얼린)씨는 “한인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활약하기도 했고, 성악가 이병천(테너)씨는 “브니엘 콘서트콰이어”를 창단하여 매년 “메시야” 공연을 비롯해 많은 종교음악을 연주, 지휘했다.
나는 에밀레오페라단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함께 연주 준비하고 무대에서 연주하고 하는 일들이 너무 행복하고 기대되고, 긴장되는 큰 즐거움이었다. 꼭 천국에서나 있을 법한 삶이었으리라. 그러나 한편 full time으로 하기 에도 힘든 오페라단 일을 개인적으로 학교 출근하여 근무하면서 가족 부양을 하고, 아이 둘을 교육시키고, CUNY의 박사과정을 수강하고, 교회 성가대 찬양활동을 하며, 동시에 오페라단 경영을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본래 타고난 성격이 활동적이지 못하고 사교성이 없고 다른 사람들과 친교가 서툴고 수줍어,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며 저변을 확대 해나가야 되는 경영인의 위치에서 그렇질 못했고, 사업가적 수완이 전연 없어 경영에 문제가 많고 매우 무거운 짐이 됐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유학생 처지에서 완전 무보수로 때때로 내가 경비를 들여야 되는 입장이기에...
높은 대관료와 오케스트라 비용이 막대하여 항상 적자에 허덕였고 매 연주회 후에는 그 적자를 메꾸기 위하여 후원금을 모금하러 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녀야 했다. 정기적인 연주회를 년 2회로 정해놓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또 다음 연주회를 계획하고, 연주장소와 오케스트라 계약하고 오케스트라 악보 준비하고, 출연자 교섭하고 연습을 시키고, 광고주 물색하고 포스터 및 프로그램 자료 준비하여 제공하고, 티켓 판매하고 하는 모든 일이 사업적인 재주도 없고 대인관계도 넓지 못한 나에겐 너무 어려웠고 힘들어 몇 년을 계속하다가 거의 기진맥진하였다. 필요한 경비는 점점 불어나고, 게다가 출연하는 성악가들도 처음 창단시의 가난한 마음, 순수한 연구발표 정신으로 무장했던, 희생적으로 마음 합쳐 출연했던 많은 성악가들이 음대교수 등 후학들을 위하여 귀국했고, 뉴욕으로 유학 오는 새로운 세대의 성악학도들은 경쟁이 점점 심해지는 음악계의 변화에 각자 학업에 몰두할 시간이 필요한 관계로, 희생하는 마음으로 출연하는 무료출연을 불사, 단에서는 얼마 안 되는 연주료라도 성의껏 사례를 하느라 노력했으나 출연자들 중에는 자연히 불만을 갖는 자들이 있었고, 단을 유지하고 지탱하고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무대의 갈망으로 오페라단을 창단했다가 집도 날리고 재산 탕진하여 결국 문을 닫은 초창기 한국 오페라계의 선구자 경우를 여러 번 보았는데 내 모습이 꼭 그런 지경이었다. 선배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좋은 일이었지만 힘이 많이 들어 탈진상태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졌다. 함께 일하고 힘이 돼 줄 일꾼들을 물색했으나 역시 시간이 재산인 유학생활에 마냥 시간과 발품을 바치며 체면을 잊어야하는 여러 가지 작업을 돕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얻은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함인지 이상혈압과 협심증, 부정맥, 척추이상, 좌골신경통, 족저근막염, 아킬레스건염, 불면증 등 들어보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건강 이상으로 나는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편 속에 계속 치료중이다.
바로 돌아가 계속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나의 잘못 선택되어진 귀국으로 에밀레오페라단 활동은 멈춰져서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동포들과 후원인, 훌륭한 음악인, 후배 성악가들에게 매우 죄송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그 어려웠던 유학생활에 어려운 무대를 갈망하던 그때와는 사정이 사뭇 달라졌다. 초창기 우리 유학시절에는 한국에서 학비를 보내주거나 생활비를 보태준 학생(특히 성악)은 내 주위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 시대엔 국가 경제가 어려워 해외 송금이 안 되는 때이기도 했다. 모두 막 노동으로 생활을 하고 학비를 벌어야했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쉬거나 옮겨야 했다. 남편이 공부를 하면 부인이 음식점에 나가 밤늦은 시간 까지 부엌일이나 테이블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름방학이면 남자들은 야채가게에 나가 그 무거운 짐을 옮기며 코피를 쏟는 힘든 일로 생계를 도왔고 학비를 모았다. 그런 혹심한 고생 중에도 우리의 무대와 실력향상을 위하여 몸부림쳤던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와 한국이 경제적으로 점점 윤택하게 되어 새로 유학 오는 후배들은 점점 상황이 달라졌다. 학비와 생활비를 고국으로부터 도움(송금)을 받을 수 있는 등 여건이 많이 좋아진 것이다. 또 한인 이민자 수가 많이 늘어나고 한인 사업체와 한인교회도 많이 생겨 음악학도들의 고급 아르바이트(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독창자)도 많이 늘어났다. 한국 학생들의 연주 수준도 많이 향상되어 유명한 콩쿠르나 오디션에 두각을 나타내며 입상자들이 점점 많아졌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나 그 외의 많은 국제무대에 주역으로 빛나게 활약하는 한국 성악가들이 점점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 그 큰 어려움을 참고 희생하며 힘든 오페라단을 지속할 처음 창단 목적의 의미가 희석되어 그 필요성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연주 기회나 무대 활동이 어렵던 70년대 초창기 유학시절 그래도 우리끼리 힘을 모아 연구하고 노력하고 발표하여 문화의 도시, 세계의 중심 뉴욕에서 미국 기성 음악계와 힘을 겨뤄가며 오페라단을 만들어 17년의 긴 시간 동안 많은 훌륭한 연주활동을 했다는 것은 우리 한국인의 인내와 끈기가 아니었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사과하며 죄송한 마음으로 에밀레오페라단 이야기는 이만 그치려 한다. 창단에 온 정성을 다 바친 선배님들, 함께 노력하고 출연한 모든 출연자들과 어려운 환경에도 애써 도와주신 후원인들 에게 깊은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바친다.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는 단장으로, 성악가로의 연주와 또 지휘 활동을 통하여 많은 연구와 경험이 되어 음악적으로 큰 소득이었다고 고맙게 생각한다.
미국! 특히 뉴욕!
공부하고 연구하기에 너무도 좋은 시설과 자료, 훌륭한 교수, 최고의 연주를 항상 접할 수 있는 연주회와 연주홀 등 등... 여름휴가 Season만 빼고 1년 내내 원작 무대, 의상과 연출로 화려하게 연주하는 Lincoln Center의 Metropolitan Opera와 Avery Fisher Hall에서 연주되는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연주, New York Citi Opera 공연, Alice Tully Hall에서 연주되는 많은 Concert, Carnegie Hall에서 열리는 각종 Recital과 미국과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 연주 등... 너무 황홀한 음악세계에 빠져 마음을 빼앗겼고, 많은 성악악보와 오케스트라 Score를 비롯하여 LP, CD, LD, DVD를 비롯한 연주 Tape, 성악기법이나 발성이론, 음악이론 도서, 음악사전, 음악해설집 등 좋은 자료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연구하며 배우는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있어 나를 필요로 하는 모국에 제때 돌아오지 못하고 처음 허락받은 2년은커녕 20년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아직도 배울게 많고 부족한 게 너무 많았지만 진정하고 나름 이제 고국에 돌아가면 후진들을 많이 도울 수 있겠다 싶어 정신을 차려보니 때가 너무 늦어 나이는 50이 되었고,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던, 혹은 나를 필요하다고 초빙하던 한국내의 여러 학교들도 이미 내가 젊음을 불태워 갈고 닦은 나의 배움을 펼칠 곳이 마땅치 않게 되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이다. 그래도 막연히 그동안 배우고 연구한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으로 고국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마음 한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던 나는 1994년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 음악대학의 부름을 받았고 늦은 시간 막차에 겨우 한발을 올린 이것이 나의 20년 뉴욕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임시였지만 1994년 가족을 뉴욕에 남겨둔 채 혼자 무작정 귀국해보니 모든 게 낯설고 부족하고 불편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천만다행으로 유학 중 음악으로 맺은 가까운 친구부부의 고마운 큰 도움으로 맨 주먹, 빈 몸으로 서울에 와서 생활 할 수 있었고,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경원대학교에서 좋은 학생들과 함께 즐겁게 공부했고, 대학 때 지도교수이셨던 이인영교수님 배려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오페라 연구소에도 출강했다. 처음 합창지도를 위해 경원대학교에 발을 들였으나 성악지도를 주로 하게 되어 합창지휘는 얼마 후 그만두게 되었고,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협연 등 몇 가지 연주회에 출연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음성으로 정년을 맞을 때까지 매년 독창회를 개최하느라 진땀을 흘리었다. 젊은 시절 연탄개스 중독 후유증으로 인한 암기불능, 난청으로 인한 불안정한 음성, 지옥 같은 발성의 고통을 끊임없이 인내하며...
그동안 부족한 나의 답답한 모양을 인내심으로 참고 용납해주신 동료교수들과 신수정학장님, 그리고 경원대학교에 크게 감사를 드린다. 또 믿고 따르며 열심히 공부한 여러 제자들이 국내에서 혹은 해외에 나가 수학하며 뛰어난 실력으로 국제콩쿠르에 우승, 입상하고, 오디션에 선발되어 국내외에서 교수로, 혹은 훌륭한 연주가로, 여러 오페라단, 합창단에서, 또 개인 연주가로 활발히 활약하는 모습들이 내겐 큰 보람이고 감사한 일이다.
처음 귀국 시에는 한국음악계에 헌신적으로 해야 할, 꼭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많은 자료와 계획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려웠고, 혼자 힘에 부치고, 그동안 심신의 과로로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어 아무 일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래도 오랫동안 학생들과 즐겁게 노래하며 학교생활 하다가 2009년 정년퇴임하여 불편한대로 이 태재 골짜기에 묻혀 책보고 음악 듣는 것을 낙으로 소일하다 보니 어느덧 백발의 칠십 후반에 접어들었다. 한때 임마누엘교회와 명성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었으나 학교퇴임 후 지금은 조용히 개인 취미생활을 하며, 그동안 게을러 못 읽었던 스코어 보며, 평소 나의 악필을 교정 해보고자 서예도 배우러 다니고 있다. 가끔 마음이 울적하고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연전에 영면하시어 이곳 시안공원에 편히 누우신 스승님(이인영 교수님) 찾아가 나의 대학시절 어려울 때 힘을 주시던 옛날을 회상하며 한참 정담을 나누다 내려오곤 한다. 또 가까운 동네 언덕 위 작은 교회(선한이웃교회)에서 매 주일 기쁨 충만하여 찬양대지휘로 헌신하는 것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가장 귀하고 값지게 사용하며, 주신 분께 감사하는 보람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희미한 기억으로 fact와 다른 기록은 양해 해주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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