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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대전시의 1960년부터 1970년대 추억 이야기
崔文輝 (최문휘)
6·25전쟁 후 10년이 되는 1960년 대전인구는 228,987명으로 늘어났다. 그중에는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배회하는 시민이 많았다. 20만 명이 가쁘게 살면서 공론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민주화다.
시민의식이 그만큼 발달하는 데에는 원인이 있었다. 자유당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는 데도 원인이 있었다. 균형발전을 이루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부패를 자초하는 데 불만은 더욱 컸다.
옛말 권불십년이란 말이 자주 입에 올랐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민심을 수습하기는 소홀히 하고 권력의 남용만 심해졌다. 거리에서 소변을 보았다고 하여 야당인사를 경범죄로 연행해 가기도 했다. 시민은 야당탄압이라고 수군댔다.
국민과 권력과의 대결 같기도 했다. 점점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즈음에 제5대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공포되었다.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선거구호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시민의 반응도 민감해졌다.
여당과 야당 사이의 치열한 선거전이 중반전에 들어선 3월 8일에 야당에서 부통령으로 입후보한 장면박사가 공설 운동장에서 유세가 있다고 했다.
이 기회에 민심이 한 번쯤 폭발할 것이라는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자유당에 대한 불만을 심도 있게 노출하며 반항한 시위는 일반 시민이 아니라 학생들이 먼저 했다.
3·8 데모. 대전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
그동안 대구에서 시작한 학생시위에 자극을 받은 대전 학생들도 결집하기 시작하여 대전고등학교, 보문고등학교, 대전공업고등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은밀히 모임을 갖고 D데이를 장면박사가 유세하는 날로 정하고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가 새어 각 학교마다 적극 만류하여 무산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대전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은 의기를 모아 교문을 박차고 대흥동 사거리까지 나와서 구호를 외치며 길을 꺾어 대열을 정비하여 유세장인 공설운동장을 목표로 달려갔다.
그러나 보문천(지금은 복개하고 없어짐)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유세장에 들어가지 못한 대고학생들은 흩어지기 시작하여 일부는 인동시장 쪽으로 달려가고 일부는 방향을 돌려 스크럼을 짜고 시내 쪽으로 나오면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그러던 중 선화동 사거리에 경찰이 방어선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중교다리를 넘어 대전역 앞까지 진출하여 인동 쪽에서 달려오는 학생들과 합류하여 역전광장에서 큰 시위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달려오면서 여러 차례 경찰의 제지를 받아 합류하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경찰의 검색이 심해져 학생들은 골목으로 피했다. 도중에서 분산된 학생들이 다시 모이게 되어 힘을 결집한 그들은 큰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고 그 함성은 엄청 났다. 대전에서 잊을 수 없는 3·8시위다.
3월 10일에도 학생시위가 있었다. 공설운동장에서 자유당 부통령후보 이기붕의 유세가 있던 그날, 대전상고 학생들은 아침 10시에 교문을 뛰쳐나와 대동사거리를 거쳐 신안동 굴다리까지 나오며 학원자유, 일당독재 철회 등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를 받고는 두 갈래로 나누어 일부는 대전역 앞을 통해 목척교를 지나 도청 쪽으로 향하고 일부는 원동 사거리를 지나 대흥교를 넘고 대고 앞에서 모여 대고생과 합류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고 진출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됐다.
민주주의 시위
4·19 서울 시위에 이어 4월 26일 대학생과 고교생 500여 명이 대전역 앞에 모여 도청까지 가며 시위했다. 그들의 일부는 유성으로 진출하여 시위에 따르는 일부 시민과 함께 계엄해제를 외치며 자유당 당원 집을 습격하기도 하고 곤봉을 들고 경찰관, 파출소를 부수며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날 같은 시간 대전공고 학생 300명과 보문고 학생 300명, 대성고 학생 300명과 대전상고생 등 1,000명이 충청남도 도청 앞 광장에서 시위를 하는 등 산발적인 시위도 있었다.
자유당이 무너지고 이승만 대통령은 망명길에 올랐다.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득세한 가운데 6월 15일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며 민주화의 길로 들어 설 징조가 보여 시민들도 처음엔 많은 기대를 걸었으며 참여도 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를수록 민주당이 신파와 구파로 나뉘고 그들 사이의 정쟁으로 갈등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시민들은 잿밥정치라고 비웃으며 정치와 차츰 거리가 멀어져 갔다.
좋은 기회였으나 민주화의 길을 상실한 것을 정치의 무능에 돌리는 것이 시민의 공통된 울분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 대신 ‘갈아봤자 별 수 없다.’라고 빗대는 구호도 나돌았다.
대전거리에는 다방이 더욱 늘어났다. 그 많은 다방이 항시 담배연기가 자우룩한 가운데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그해 국회가 참의원·민의원 2원제로 나뉘고, 참의원·민의원 선거와 4대 대통령 선거 그리고 개정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이에 따른 선거분위기가 이런 다방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전시민이 모두 정치인이 된 듯했다. 대전 민의원 선거에서 유진령과 진형아가 당선되고 대덕군에서는 박병배가 당선되었다. 박병배는 무소속으로 43세에 출마하여 패기가 넘쳤다. 서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지리산에서 공비토벌작전에 공을 세운 그는 열의에 따른 선거전을 펼쳐나갔다.
대전신흥초등학교 출신으로 대전에 연고한 것을 기회로 유세 때마다 타고난 달변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척도도 남달랐다. 연단도 마련하지 않고 유세 때마다 청중 속으로 유세차를 몰고 들어와서는 지프차 위로 올라서서 시민들에게 정견을 토해내는 그는 대전시민에게 상당히 어필했다. 대전시장에는 신기훈이 당선됐다.
그는 1960년 12월 30일에 부임했으나 지난 자유당시절의 정치활동으로 정치정화법에 걸려 2개월 만에 낙마하고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 김정우가 당선되어 1961년 4월 6일에 취임하였다.
그도 군사 쿠데타로 인해 2개월이 못 되어 사임했다. 역대 대전시장 중 소신껏 행정을 펼쳐보지도 못한 불운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전 발전에 기여한 바는 남달랐다.
신기훈은 고향인 경상도에서 여러 고을 군수를 역임하면서 행정력을 키운 인물로 대전에 이주하면서 적산관리청 청장을 지내며 시민과의 유대가 돈독했다.
그 힘으로 대전시장에 당선되어 기대를 걸었으나 부득이 낙마해야 했다. 그 후는 농경신문사를 창설하고 사장으로서 농촌계발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시조시인으로 시조집이 3권이 있으며, 신문사에 병설로 농경출판사를 창설하고. 대전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도 컸다. 한때 대전문단의 특별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김정우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동아연필공장을 창설하고 대전 산업발전에 기여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계에 투신하여 대전동중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 대전농업전문학교, 서대전고등학교 등 학교를 신설하고 나아가서는 대전실업대학까지 창설하여 대전교육계에 상당한 공을 들인 인물이나, 정치면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한 셈이다.
제1공화국의 수명은 너무나 짧았다. 선거만 치르다가 끝장을 본 정권 같기도 하다. 혹간 사람들은 민주당 정권이 군사 쿠데타를 자초하였다는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시민들이 처음에는 환영한 정권이었으나 아쉬움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사실 우리나라 같은 1960년대의 현실에선 정치적인 균합을 하기엔 어지간한 키포인트 없이는 그 정권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나라는 반쪽이고 북쪽에선 호시탐탐 침공을 노리는 상황에서 그래도 자유라는 것을 만끽하게 된 남쪽에선 국가관보다 나은 정치의 이념에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그 균형을 맞추기도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일부 국민 사이에선 당분간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그 여론은 미래의 자유를 위해 통제도 필요한 시기가 지금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1959년 공설운동장 기공식
1960년 정치적인 혼돈 속에서 그래도 대전시민의 숙원인 공설운동장이 처음 문을 열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대전공설운동장이 언제 개장하였는가.’라고 물으면 그날을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제41회 전국체전이 열린 1960년 10월 3일, 그 첫날을 대전공설운동장을 개장한 날로 지목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할 때가 있다. 공사 자체가 처음부터 애로를 동반했다.
대전에 큰 운동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공설운동장 시설의 첫 삽을 들은 장소는 지금의 공설운동장 부근이 아닌 문화동 넓은 공터다. 오늘의 서대전 네거리 시민광장이 그 일부가 된다. 일제 강점기에 대전 주둔 일본군 군영이 있었으며 대사동 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일본군사격장이 자리했던 공터와 대부분 전답 그리고 초지로 넓은 들이었다.
1949년 대전시장 손영도가 공설운동장 시설을 위한 첫 삽을 여기에서 들었다. 그러나 대전도시 확장이 서대전 쪽으로 급물살을 타면서 주변에 가옥이 들어섰다. 그래서 위치를 변경하여 보문산 아래 대사동, 부사동 일대의 넓은 들, 일제 때 종방방직회사의 땅으로 해방과 함께 국유지가 된 5만 4천 평의 지역으로 옮기고 추진하여 자리를 잡게 된 것이 대전공설운동장이다.
처음 개장 당시는 41회 전국체전을 개최할 만한 시설로 출발해서 1964년에 이르러 육상경기장과 야구·배구·농구·정구장이 완비되고 수영장이 들어서고, 1971년에 충무체육관이 완공되어 대전체육의 요람지로 등장했다.
충무체육관은 서울 장충단체육관보다 큰, 전국에서 제일 큰 체육관이었다.
대전의 체육은 1927년 3월 7일 충남체육회가 발족하면서 활동의 규모가 커갔다.
그 이전 1920년 6월 6일 대전심상소학교(원동초등학교)에서 열린 남선정구대회나 1932년 대전제일보통학교(삼성초등학교)와 대전중학교의 야구팀 활동, 1935년 절정기를 이루던 대전철도청 야구팀의 활동과 1920년대부터 대전체육의 주류를 이루던 정구·축구·야구의 저력이 대전에 종합운동장을 조성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대전 야구장도 현재의 야구장이 그 처음이 아니다. 대전 야구장의 처음은 1920년대 이미 등장한 대전철도국 뒤쪽에 있던 야구장이었다. 관람석을 계단식으로 조성한 흔적이 남아있다.
1960년 5월 16일에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육군 소장 박정희를 주축으로 하는 군사 쿠데타는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구국의 일념으로 혁명을 하였다.’라는 뜻을 밝혔으며 ‘반공을 국시로 하고.’라는 쿠데타 공약은 6·25전쟁 같은 불행을 다시없게 한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대전에서는 5·16 군사 쿠데타에서 그 주도적 역할을 한 육군 중령 김종필과 인쇄업을 하던 김용태가 단연 화제에 올랐다. 김종필은 대전사범학교 출신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미술반 학생이었다는 것과 부여출신으로 부친이 부여 규암면장을 오래 지내며 덕을 쌓은 공무원이었다는 이야기까지 화제에 올랐다.
김용태는 대덕군 기성면 출신으로서 쿠데타 전 서울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며 쿠데타 주체가 된 장교들과 친목을 유지하고 그 장교들이 인쇄소를 찾아오면 술값이 부족해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쿠데타에 가담하여 공약을 미리 인쇄할 때는 목숨을 내놓고 인쇄하였다는 이야기까지, 어디에서 흘러오는 이야기인지 단연 화제였다.
참조 : 대전 원도심 아카이빙 기사
첫댓글 좋은 글 되세요/
매우 유익했습니다. 좋은 정보 덕분에 잘 봤답니다. 옛날 생각과 추억에 잠기게 하네요....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매우 유익한 포스팅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정보가 되었습니다. 대전에서 무려 60여년을 살다보니 옛날 6,70년대 대전 거주 시절이 불현듯 추억처럼 다시 떠오르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 대전이 그립습니다.
관저동부동산사랑07:08 새글
귀중한 사진 자료 너무 감사합니다. 60..70년대 대전 지역 사진이네요.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때가 좋았었는데..
지금처럼 처량한 구도심으로 쇄락하지 않고 진짜 중심가로서 번화가였죠...유성과 둔산지역 등 서부개발 시작 전까지는 이 지역이 대전에서 단연 1980년대 중반까지 대전극장과 중앙극장통이 중심번화가였고 대도악기점(지금은 구제상점으로 쇄락)으로 대전지역 젊은 청춘남녀들이 모여 최신 음악을 듣곤 했죠...중앙동 시민관과 목척교 신도극장..그리고 아카데미 극장(1970년초반까지는 동양극장이었음)도 았었고..지금은 죽어가는 옛날 극장터..가 되었고..옛날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