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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 감각 바른 언론 원문보기 글쓴이: 100년 전통
발행부수 780,000 부 판수 20판 (서울,수도권) 자회사 (주)스포츠서울21, (주)매거진플러스, 코리아카본뱅크 (주)서울신문NTN, (주)서울신문STV 수익사업 택시버스광고사업부, 무안태양광발전소 미디어 나우뉴스TV, 스포츠서울TV(SSTV) ,서울신문STV 소유구조 우리사주조합(39%), 기획재정부(30.49%), (주)포스코(19.4%) KBS(8.08%), 기타분산소유(3.03%) [정부주 61%,사원주 39%]
정치성향 중도
1904. 7. 18. '대한매일신보' (서울신문의 전신) 창간
1907. 2. 국채보상운동
1910. 8. 28. 대한매일신보 종간호 발행
1910. 8. 30. 조선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로 전락
1945. 11. 22. '서울신문' 으로 속간. 재탄생
1962. 8. 조석간제 폐지, 석간으로 발행
1968. 9. 22. '선데이서울' 창간
1980. 12. 조간으로 발행 체제 변경
1982. 4. 태평로 신사옥, 한국프레스센터 기공식
1985. 1. 신사옥 준공 입주 및 신문 제작 전면 CTS화
1985. 6. 22. 스포츠 연예 전문 일간지 '스포츠서울' 창간
1990. 2. 서울가요대상 개최 시작
1990. 6. 22. 여성월간지 "QUEEN" 창간
1992. 1. 12. 시사 인물평론 주간지 '뉴스피플' 창간
1992. 10. 1. 버스,택시 광고사업부 설립 (최다대수 보유)
1995. 11. 22. 인터넷 신문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
1996. 10. 1. 서울신문 제호.서체 변경 및 전면 가로쓰기 전환
1997. 11. 20. 타워형 샤프트리스 윤전기 및 제 5세대 CTS가동
1998. 5. 26. 행정뉴스면 Back 面에 신설
1998. 11. 11. '대한매일' 로 제호 변경
1999. 2. 10 패션전문 월간지 "FARBE" 창간
1999.12.30 스포츠서울21 분사
2000.11. 1. 편집국장 직선제 실시
2002. 1.15. 민영화 1단계 완료
2003. 9. 9. 지령 20000호 기록
2004. 1. 1. '서울신문'으로 제호 환원
2004. 3. 2. '굿모닝서울' 창간
2007. 국내 최대 무안 태양광발전소준공
2008. 나우뉴스, 나우뉴스TV 창설, 서울신문NTN 설립
2009. 10. 서울신문STV 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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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 7. 18 ~ 1910. 8. 28
구한말 민족구국지였던 대한매일신보가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항일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주요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신채호 등이 있다.
양기탁이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주요 논설의 대부분은 그가 집필했다. 박은식, 신채호등 애국지사들의 논설도 많이 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을 주도했으며, 1904년 4월에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했다. 이 신문은 항일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항일논조를 견지했다. 조선민중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자임하였으며 간교한 통감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 1910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락하기까지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부당성,그리고 일제의 야만적 행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면으로 저항하자, 일제는 창간주 베델을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다. 실질적 책임자인 양기탁 또한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베델이 일제의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가 영국인 만함으로 바뀌었다. 1909년 5월 1일 베델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변경됐고, 국권피탈(1910년 8월 29일)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락했다.
♣ 대한매일신보 제호
♣ 대한매일신보와 창간주 베델
♣ 대한매일신보 종사자들
♣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운동
♣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한국프레스센터
1층 로비에 있는 대한매일신보 기념 판형
제2기. 매일신보[每日申報.ㅡ新報]
1910. 8. 29 ~ 1945. 11. 10
《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04년 7월 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를 일제가 강제매입하여 국권피탈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大韓)’ 두 자를 떼고 개제된 것이다. 일제의 조선통치를 합리화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했으며‘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를 띠었다.
1920년, 민족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매일신보》는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다. 이인직·이해조 등이 쓴 신소설들이 이 신문에 개제되었다. 이광수의 처녀작인 《무정》도 이 신문을 통해 발표됐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이후로는, 이 신문들과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 편집국이 《경성일보》 에서 분리됐으며, 193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부사장이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16일 《경성일보》에서 완전히 독립되었다. 동시에,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고 최린(崔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주요 자매지로는, 《월간매신》(1934.2) 《매일신보사진특보》(1938.11) 《국민신보》(1939.4) 등이 있다. 《매일신보》는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광복까지 중단됨없이 발행되었던 유일한 한국어신문이었다는 점에서 언론사적 의의가 크다. 당시 사옥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現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있었고, 8·15광복 뒤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 매일신보 제호
♣ 매일신보 당시 사옥
제3기 서울신문 (1945.11.22~ 현재)
1904년 창간된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국권피탈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탈되어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로 발행되기도 했다. 1938년에는 《경성일보》에서 분리되어 완전히 독립된 주식회사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한국어로 발행되었고, 한동안은 사원자치위원회가 운영하다가 1945년 11월 10일 미군정에 의해 정간처분을 당했다.
미군정의 정간처분과 함께 《매일신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경영진을 새로 꾸려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11월 23일자부터 석간으로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때부터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13,738호부터 시작하였다.
초대 임원진은 사장 오세창, 주필 이관구, 편집국장 홍기문이었다. 1949년, 반공사건의 기사시비로 발행정지처분을 당했다가 6월 20일에 속간하면서 공보처의 지시·감독을 받게 되었다. 한국전쟁때는 《진중신문(陣中新聞)》을 발행하기도 했다.
1959년 3월 23일부터는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부터 계승해 온 지령을 버리고 《서울신문》제호로 창간된 1945년 11월 23일 이후부터의 지령으로 다시 환산하여 새 지령으로 발간되었다. 1950년대, 자유당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데모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불태워 일시 정간했기도 했다. 1960년 6월 27일, 제9대 사장 오종식이 재건에 주력했지만 재정난으로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가 5·16군사정변 후 12월 22일에 다시 속간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 때부터 서울신문은 명실상부한 정부기관지로 자리잡게된다. 정부행사주최 및 국민계도에 앞장서는 등의 언론활동을 주로 하였다. 일각에서는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한글전용신문 제작에 있어 다른 신문보다 앞장서 노력을 기울였음은 특기할만 하다. 1968년 11월 22일 창간 23주년을 맞아 한글전용판으로 개혁하였으나 몇년후 다시 국한문혼용판으로 환원하였다.
본지 외에 1946년 1월 15일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하였고,이후 연예오락주간지 《선데이 서울》(1968.9.22), 《소년서울》(1970.4.22), 《서울평론》(1973.11.4) ,《주간스포츠》(1975.3.30), 등의 잡지들을 발행하다가 모두 폐간했다. 연예 주간지 《TV가이드》(1981.7.18), 여성월간지 《퀸(Queen)》(1990.7.22), 시사주간지 《뉴스피플(NewsPeople)》(1992.1.12), 스포츠연예전문지《스포츠서울》(1985.6.22)을 창간했다. 1999년 12월 29일, 스포츠서울은 분사조치됐다.
1998년 11월 11일 제호를 《대한매일》로, 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변경했다가 2004년 1월 1일, 《서울신문》으로 환원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25번지에 있으며, 1985년 4월에 한국프레스센터와 함께 준공된 것이다. 현재 대표이사는 이동화다.
서울신문사는 가을밤음악회,사이버서울갤러리(www.seoulgallery.co.kr),신춘문예,하프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다. 주요 수익사업으로, 택시버스광고와 태양광발전소 사업이 대표적이다. 2007년, 전라남도 무안군에 태양광발전소인 서울신문 솔라토피아를 건설하고, 이어 탄소배출권거래회사(코리아카본뱅크)를 설립하였으며,그린에너지포럼을 발족하는 등 공익을 위한 녹색성장사업들에도 진출했다. 2009년 10월, 서울신문STV 개국으로 첫 방송사업을 시작하였다.
♣ 서울신문 제호변천
♣ 서울신문의 다짐(사시)
♣ 서울신문
서울신문사 역대 간행물
서울신문사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25
서울신문 각종 공익행사
1월
-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
반세기 이상 한국문단에 기라성같은 문인들을 배출해온 신인작가 등용문
- 우수기업 우수상품
21세기 글로벌 경쟁시대에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업종별 최고기업을 선정
5월
- 서울신문 하프마라톤 대회
국민스포츠인 마라톤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 시민과 공직자 등이 함께하는 마라톤 축제
- 교정대상
재소자의 교정교화와 업무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교정공무원 및 사회 일 반인을 발굴, 표창함해 그들의 노고를 위로, 격려하는 행사
- 반부패 캠페인
고강도 반부패 정책을 예고하고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행사
6월
- 공초문학상
한국 현대시의 거목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앙양하는 문학상
- 국군모범용사 초대
국토의 전후방에서 조국수호 임무를 수행하는 육ㆍ해ㆍ공군중 선발된 모범용사와 그 배우자를 초청해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행사
8월
- 베스트 브랜드 경영대상
공신력있는 협회의 소비자선호도 조사를 바탕으로 소비자 신뢰도와 브랜드 파워, 브랜드 경영의 선진화를 도모하는 행사
10월
- 가을밤 콘서트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온 가족이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가족음악회
- 서울신문 광고대상
광고의 질적 향상과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우수광고를 선정, 시상해 수상작 홍보 및 마케팅 활동을 지원하는 행사
11월
- 서울현대도예공모전
한국 현대도예의 모색과 탐구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최고 권위의 도예 단일공모전
- 농어촌 청소년 대상
우리 농어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역군을 발굴, 농어촌 후계자로서의 긍지와 사명감을 북돋워주고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는 행사
12월
- 교통봉사상
교통관련 각 분야에서 맡은 바 역할을 헌신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올바른 교통문화정착에 기여한 인물을 발굴, 포상하는 행사
연중
- 소비자만족 히트상품
소비자 만족도가 높은 상품을 선정해 소비자에게 우수한 상품정보와 건전한 소비문화를 조성
첫댓글 퍽 유익한 자료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신문의 핵심 내용을 잘올려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