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고장 축산면의 유래
축산리(丑山里)
축산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地形)이 소가 누워 잇는 형국(形局)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8세기 중기인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나,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시조 유래로 더 유명하다. 즉, 경덕왕 14년(755년) 당(唐)나라 현종(玄宗) 연간에 김충(金忠)이란 안렴사(按廉使)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漂着)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되었다고 한다.
축산2리인 염장(鹽場) 마을은 약 2백여년전 해일(海溢)로 인하여 염수(鹽水)가 스며들어 붙여진 이름이며, 양장(羊腸)은 약 5백년전에 영해박씨(寧海朴氏)가 입주하여 양을 사육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양장(良庄)은 약 3백년전에 김복용(金福龍)이라는 분이 현 구평들을 개척하여 좋은 농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축산3리는 죽도산(竹島山) 밑으로 약 3백년전 오씨(吳氏)가 개척하여 추씨(鄒氏)라는 분과 함께 대나무를 심고 죽산동(竹山洞)이라 했다 하며, 일명 신기(新基)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南面) 지역으로서 축산포영(丑山浦營)을 두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장동, 차유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축산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축산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축산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1924년 3월 축산항을 개발하여 어항으로 발전되고 있으며, 축산, 축산항, 축산포, 축산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축산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도곡리, 상원리, 남은 경정리, 북은 영해면 사진리가 있다.
골 마 : 웃염장 북쪽에 있는 마을임. 신기동(新基洞) : 축산 북쪽에 새로된 마을임. 아릿염장 : 염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염장(양장동) : 축산 남쪽에 있는 마을임. 웃염장 : 염장 윗쪽에 있는 마을임. 장방등 : 장방등 밑에 있는 마을로 6.25한국전쟁 때 폐동되었음. 재궁마 : 염장 남쪽에 있는 마을임. 주막거리 : 웃염장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임. 중간마 : 골마와 주막거리 사이에 있는 마을임.
경정리(景汀里)
경정리 동명의 유래는 긴 모래불이 있으므로 뱃불 또는 경정이라 하였다.
경정1리인 뱃불 마을은 15세기 중기(1449년경)인 세종(世宗) 연간에 영해박씨라는 분이 월부현(月浮峴)에 올라 지형을 살펴 본 다음 김해김씨라는 분과 함께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경정 2리인 수구너미 마을은 11세기 중기(1060년경)에 영해 부사(寧海府使)가 마을을 순시하던 중 말을 타고 재를 넘으면서 이 마을의 형국을 보고 우마차(牛馬車) 길마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차의 차(車)와 넘을 유(踰)자를 따서 차유(車踰)라 명명하였다 하며, 마을의 형성은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 되었는지 미상이다.
경정3리인 오매 마을은 16세기경 안동권씨라는 분이 들어 왔고, 그 뒤 김해김씨가 입주하여 살던 중 어느 날 지관(地官)이 와서 보고 남족에 오두산(烏頭山)이 있고, 마을 앞에는 매화산(梅花山)이 있으므로 오(烏)자와 매(梅) 자를 따서 오매라 칭했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까마귀가 열매를 물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하여 오매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 까마귀가 춤을 추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하여 오무(烏舞)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지방 관제 개정을 할 때 영해부가 영해군(寧海郡)이 되었는데, 이때 경정리는 영해군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로 행정구역을 자의로 폐합할 때 오매동·차유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경정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경정동은 경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경정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경정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고곡리, 남은 영덕읍 석리, 북은 축산리가 있다.
마 쪽 : 뱃불 남쪽에 있는 마을임. 수구너미(車踰洞) : 달부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임. 오매(烏梅) : 뱃불 남쪽에 있는 마을임.
고곡리(古谷里)
고곡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후기(1480년경)인 성종(成宗) 연간에 장철죽(張喆竹)이라는 분이 지형을 살핀 다음 선비들에게 입주를 권장하면서 자신이 먼저 입주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고실이라 명명했다 한다.
고곡1리는 장철죽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으며, 2리는 15세기 후기에 윤립(尹立)이란 분이 세조(世組) 당시 반정(反政)으로 유배되어 이곳을 찾아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에는 영해군(寧海郡)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반동(下反洞) 일부를 병합하여 고곡동이라 해서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고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고곡 1,2리로 분동되어 있다. 고곡리의 위치는 동은 경정리, 서는 기암리, 남은 영덕읍, 북은 상원리, 도곡리가 있다.
도곡리(陶谷里)
도곡리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독을 구웠으므로 독골, 짓골 또는 도곡이라 하였다. 도곡 1리는 옛날 해주오씨(吳氏)와 선산김씨가 입주 개척하였다고 하며, 17세기경 무의공(武毅公, 朴毅長)의 4자인 도와 박선(陶窩, 朴璿, 166∼1707) 공이 원구리에서 이 마을에 입주, 정착하였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은 축산항의 포구(浦口)가 이곳까지 이어져 배가 다녔다고 하여 반포(攀浦)라 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포구가 메워져 내(溪)가 되자 마을 이름을 번계(攀溪)라 했다고 한다.
도곡2리인 복두미(福坪) 마을은 약 4백년전 영해박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여 복두산(福頭山)의 복(福)자를 따서 복평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번계 복두미와 효촌(孝村), 하반동(下反洞)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도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도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도곡 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도곡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리, 서는 상원리, 남은 고곡리, 북은 봉화산이 둘러 있다.
망곡(望谷) : 도곡 서쪽에 있는 마을임. 번 개 : 도곡 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임. 복두(福頭, 孝村, 복두미, 복더미) : 망곡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이 거북이처럼 생겼음. 아릿모치 : 복두미 아래에 있는 마을임. 탄광모치 : 망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약 60년 전부터 유연탄을 캐냈음. 하반(下反) : 번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상원리(上元里)
상원리 동명의 유래는 상반리(上反里)의 상(上)자와 원포리(元浦里)의 원(元)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 후기(158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마을을 개척하고 정씨(鄭氏)가 다시 입주하였으며, 그 뒤 안동김씨(安東金氏), 울진장씨(蔚珍張氏), 진성이씨(眞城李氏)가 들어와 마을 주위를 다시 개척하고 동명을 와구(瓦丘)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가 행중구역을 폐합할 때 상반동(上反洞)과 하반동(下反洞), 원포동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상원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상원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상원리의 위치는 동은 도곡1리, 서는 부곡리, 남은 고래산(鯨山, 해발 301m)이 솟아 있고, 북은 도곡2리가 있다.
번개(攀浦) : 상원리와 도곡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축산천(丑山川)이 둘러흐르고 있음.
수일정(守一亭) : 상원리와 부곡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인조(仁祖) 말년(1649)에 수일정(守一亭) 백사언(白士彦)이 마을을 개척하고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일정이라 하였음. 왯두들(와고 瓦邱) : 상원리 남쪽에 있는 마을임. 웃번개(上及) : 번개 윗쪽에 있는 마을임. 황토모기(黃土項 : 수일정 남동쪽에 있는 마을임
부곡리(釜谷里)
부곡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地形)이 가마솥과 같다 하여 가마실, 가매실, 또는 부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6세기 후기(159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포동(元浦洞) 일부를 병합하여 부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부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부곡리의 위치는 동은 상원리, 서는 칠성리, 남은 기암리, 북은 영해면 묘곡리와 면계(面界)를 이룬다.
대밭마(竹村) : 가마실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대나무가 많음. 바깥가마실(방이바깥, 갈모봉, 갈미봉) : 가마실 바깥쪽에 있는 마을임. 수일정(守一亭 元浦, 쉬일정) : 부곡리와 상원리에 걸쳐 있는 마을임. 안가마실(불개미골, 불개집골) : 가마실 안쪽에 있는 마을임.
칠성리(七星里)
칠성리 동명의 유래는 칠성사(七星寺)가 있으므로 칠성 또는 성호(星湖)라 하였다. 일설에는 칠봉산(七峰山) 아래 별이 달려 있다고 하여 칠성이라 했다고 한다.
칠성1리는 15세기 중기(1447년경)인 세종(世宗) 연간에 안씨(安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인 현종(顯宗) 연간에 영양남씨와 무안박씨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칠성2리는 17세기 전기(1623년경)인 광해군(光海君) 연간에 전씨(全氏)가 입주하여 니전(泥田)이라 하다가 한씨(韓氏), 정씨(鄭氏)가 입주하여 꽃밭(花田), 진밭(陳田)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묘곡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전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칠성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칠성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칠성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부곡리, 서는 조항리, 남은 기암리, 대곡리, 북은 영해면 묘곡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꽃밭-재궁마 : 꽃밭 북쪽에 재궁(재실 齋室)이 있는 마을임. 양지마 : 진밭 북서쪽에 있는 마을임. 진 밭 : 칠성 서쪽에 흙이 진 밭이 있는 마을임. 그밖에 진밭 남쪽에 있는 진밭, 재궁마와 칠성 동남쪽에 칠성리 내와 대곡리 냇물이 합해지는 합승나들이가 있다.
조항리(鳥項里)
조항리 동명의 유래는 새의 목처럼 된 고개가 있으므로 새목산, 새목, 또는 조항산, 조항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새가 날개를 펴고 산정(山頂)을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15세기(1431년경)인 세종(世宗) 연간에 절강(折江) 편석규(片錫圭)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조항이라 했다 하며, 그 뒤 17세기인 효종(孝宗) 연간(1650년경)에 안동권씨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묘곡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일부지역을 대곡동(大谷洞)에 떼어주고 그 나머지를 조항이라 해서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조항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항리의 위치는 동은 칠성리, 서는 지품면 옥류리, 남은 대곡리, 북은 영해면 묘곡리, 대리와 면계(面界)를 이룬다. 해발 400m나 되는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자연용수(自然用水)가 많아 1960년대에는 70여호 가까이 살았다.
배끝말 : 조항 바깥쪽에 있는 마을임. 안 말 : 조항 안쪽에 있는 마을임. 샛모치 : 조항 북쪽에 있는 마을임.
대곡리(大谷里)
대곡리 동명의 유래는 큰 골짜기이므로 한실 또는 대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6세기 중기인(1547년경) 명종(明宗) 연간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마을을 개척했으며, 곧 이어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정착하였고 그 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로동(陶魯洞)과 묘곡면(畝谷面)의 조항산(鳥項山)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곡리의 위치는 동은 기암리, 서는 국사봉(國祠峯)이 있으며, 남은 화천리, 북은 칠성리가 있다.
베게미 : 독냇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임.
기암리(奇岩里)
기암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기이한 바위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밑으로 보(洑)를 막았으므로 보터바우, 변하여 보텅바우, 버텅바우 또는 복기암(伏奇岩)이라 하였다.
기암1리는 입구에 거북이, 개구리 모양의 바위가 엎드려서 버티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는 버텅바우 마을로 16세기 중기인(1545년경) 명종(明宗) 연간에 김해김씨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기암2리는 16세기말(1592년경)인 임진왜란 때 안씨라는 분이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입구가 세갈래 큰 골로 되어 있어 삼남문(三南門)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어 평산신씨와 박씨가 들어와 3성이 살게 되어 아삼(我三)이라 했다고도 하나 건너편에 어금니 같이 생긴 바위가 세개 있어 아삼(牙三)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을의 상징물이 되며 지명과 인명에도 널리 사용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아삼동과 묘곡면의 칠성동 일부를 병합하여 기암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기암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기암 1,2리로 분동되어 있다.
기암리의 위치는 동은 고곡리, 서는 대곡리, 남은 화천리, 북은 부곡리, 상원리가 있다.
구석모태 : 복기암(伏奇岩) 북쪽 구석에 있는 마을임. 아릿모태 : 복기암 아래에 있는 마을임. 아삼(牙三, 애삼) : 속고실 북쪽에 있는 마을임. 웃모태(웃말) : 복기암 위쪽에 있는 마을임.
◈ 우리 고장 축산면의 전설
목골재(혹은 望峴)
고려시대에 상원(上元) 마을은 큰 마을이었으며, 마을 중앙에 제일 가는 부자집이 있었는데 집이 크고 재물이 많아 손님이 끊어질 때가 없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손님이 너무 많아 견뎌내기 힘들자 하루는 탁발을 다니는 중에게 손님들이 덜 오게 하는 방법을 물으니 영해(寧海)로 들어가는 언덕 목을 끊으면 된다고 하였다. 새며느리는 틈나는 대로 언덕 목을 끊어나가 마침내 목을 완전히 끊었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손님도 줄고 더불어 재물도 줄어 드디어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망하였다. 지금 동네어귀에 있는 큰 바위가 그 집의 뜰 안에 있었고 그릇을 씻어 얹어 놓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뒤 한때 마을이 없어지고 이곳에 인가가 없다가 삼백년쯤 전에 다시 마을이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上元)마을 풍수설(風水說)
축산면 상원리의 형국(形局)은 배가 가는 행주(行舟) 형국이므로 우물을 파면 물이 새어 배가 가라앉아 가지 못하는 형국이므로 마을이 잘 되지 않는다 하여 우물을 파지 말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얼마 전 까지도 마을엔 우물이 거의 없고 도곡(陶谷) 가까운 큰 길가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한다.
정신방(貞信坊)
옛날 고려 때, 축산면 고실(古室, 谷)에 한 여인이 초년에 남편을 잃어 버렸다. 친정 어버이가 개가(改嫁)하기를 여러 번 권했으나 듣지 않고 절개(節介)를 굳게 지켰으며, 시부모 모시기를 극진히 하였다. 본부(本府, 당시 예주부사:禮州府使) 사또가 이 말을 듣고 그 집에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고 이름을 정신방이라 하였다. 안노생의 `정신방`이란 시가 있다.
버텀바위 마을
축산면에 있는 마을로 옛날 홍길동이 화천동에서 받은 짜개돌이 이 마을에 날아와서 버티어 서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버텀바위 마을이라 했다 한다.
죽산(竹山)과 영양남씨(英陽南氏)
죽산은 축산면 축산항에 있는데 옛날 일본의 한 중(僧)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명당산(明堂山)이라는 산은 모조리 사기 말뚝(쇠말뚝은 썩기 때문에)을 박아 인재나는 것을 막았다. 한번은 지도에 있는 죽산에 대고 말뚝을 박으니 그 산으로 장군이 올라오다가 죽었다고 한다. 영양 남씨의 시조인 영의공(英毅公)이 명당인 죽산에 처음 정박했기 때문에 영양 남씨는 지금도 못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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