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약속 장소인 서울 합정동 소재의 한 스튜디오를 갔을 때는 전 국민을 떠들썩하게 했던 WBC 한국 대 일본 2차전이 한창 진행 중인 시간이었다. 도착하기 전 장헤진도 분명 경기를 시청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현장에 가보니 역시 그는 숨죽이며 텔레비전 앞에서 경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터뷰는 잠시 뒤에 하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종범이 2점짜리 결승타를 날리던 순간, 텔레비전 앞은 일제히 환성과 함께 기쁨의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유쾌함이 지고(至高)라 할 인터뷰는 저절로 확보되었다. 한일전 승리의 기쁨을 안고 하는 음악 얘기는 신이 났다. 인터뷰가 주는 긴장과 경계감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장혜진도 신보와 자신의 음악지향, 제작자인 남편 등 전반에 대한 입장을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2002년에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나 2004년 후반에 돌아온 그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라는 부담 때문에 전체적인 방향은 물론이고 선곡 등 신보 작업에 굉장히 고심했다고 말했다. '과연 한국 음악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었나? 지금의 그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장혜진이라는 정체성과 색깔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지독한 산고(産苦) 끝에 통산 일곱 번째인 앨범 [4 Season Story]가 만들어져 얼마 전 출시되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낸 2001년의 [It's My Life] 이후 4년 반만의 컴백 출사표. 현재 타이틀곡 '마주치지 말자'는 '다른 가수들한테서는 얻을 수 없는 안정된 음색'이란 찬사와 함께 심지어 중학생들로부터도 호응을 얻고 있는 상황.
사계(四季)의 감수성을 담은 장장 73분의 러닝타임의 이 앨범은 그 한곡을 넘어 장혜진의 다양한 음악적 욕구를 실현한 근래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신보에 대한 자평은 뒤로 미룬 채 “다시 앨범을 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며 기뻐했다.
대화의 순간순간 신보의 반응을 기다리는 본연의 압박감, 음악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나긴 했지만 장혜진은 가능한 한 상대를 편하게 하려는 너그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가지러한 자세는 여성답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오래간만에 깊숙한 음악 얘기를 나눠보는 것 같습니다. 기분 좋아요. (음악 얘기를) 더 하고 싶네요. 일본도 이겼고요.”
현재의 유행패턴을 놓치지 않으면서 장혜진다움을 보여주는 것은 조금은 모순 아닐까요. 아무래도 두 스타일은 다르잖아요.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
그래요. 그 모순을 줄이는 게 이번 신보작업 기획단계에서부터의 목표였지요. 사실 유학에 의한 공백기 동안에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여러 장르를 가능한 한 담아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작업에 부담이 컸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요. 가장 싫었던 것은 '공부하고 오더니 변했네!'라는 소리였어요. 또한 '옛날 가수라서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구요. 여기서 접점을 찾아야 했지요. 타이틀곡으로 제 곡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템포도 있고 느낌이 사뭇 다른 '마주치지 말자'를 정한 데는 장혜진이 옛 가수인지 신인가수인지 그 정체를 대중들한테 모르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지요.
타이틀곡 '마주치지 말자'에 신보에 구현하고 싶은 음악적 방향을 새겼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트렌드와 장혜진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곡이라고 판단한 거죠. 사실 전 이전부터 슬로 발라드에서부터 펑키 리듬 계열의 곡까지 비교적 포괄적으로 수용해왔어요. 매 앨범의 첫 곡은 특히 펑키하게 갔죠. 이번 신보의 '미운 오리'도 그렇구요. 꾸준하게 이런 방법론을 구사했는데도 현실적으로 리듬 계열의 곡은 별 반응이 없었어요. '마주치지 말자'는 바로 그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곡이죠. 분명 장혜진 노래지만 새롭다고 봅니다. '뉴 장혜진 송'인 셈이지요.
잠깐 얘기를 돌려서 버클리 음대에서는 무엇을 전공했고 본인이 판단하기에 유학의 최대 수확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거의 3년간이었는데요, 프로페셔널 뮤직을 전공했어요. 제가 가장 합당한 전공이라고 봤습니다. 배운 것은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됐고, 작곡할 수 있는 바탕을 갖추었다는 점이죠. 음악기초이론, 작곡법 그리고 편곡법 등 전반에 걸쳐 어느 정도는 배웠습니다.
<화성학을 배운 셈인데요, 그럼 써둔 곡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신보에 자작곡을 수록하지 않은 건가요?
글쎄 아직은... 사무실 식구들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고 하고. 공부한 결과와 대중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편차가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내 작품을 넣지 않기로 했죠. 아쉽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음악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것은 수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앨범 제목이 말해주듯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네 세그먼트를 삽입하면서 사계의 이야기로 꾸몄는데.
신보는 작업이 2005년 초반부터 시작했어요. 1년이란 기간이 걸렸죠. 그러다보니 계절이 바뀌더라구요. 여름에 맞춘 곡을 마치면 어느덧 가을이 되어있고. 그래서 봄에도 듣고 여름에도 들어서 좋은 곡을 하자고 했죠.
현재 팬들의 반응이 좋게 나타나는 곡은 어떤 것들인가요?
'비온 뒤' '이연'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리고 '불어다오'가 괜찮아요. '비온 뒤'는 록과 팝이 잘 섞인 곡이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는 멜로디의 중독성이 있다고들 합니다. 참, 한 음원사이트에서는 '왜 나만 아프죠'라는 곡도 호응을 얻고 있던데요. 그래도 가장 팬들로부터 많은 추천을 받고 있는 곡은 '마주치지 말자'입니다.
세 번째 트랙인 '이연(異緣)'의 경우는 매우 한국적으로 들립니다. 이수영 노래라는 느낌마저 들던데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국가요가 너무 그리웠어요. 아니 한국이 그리웠습니다. 홈씩에 걸릴 정도였으니까요. 음악만하더라도 재즈가 너무 지겨워 한국 음악과 국악 악기들이 가슴에 절절하더라구요. 이런 쪽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와보니 이수영이 이미 오리엔탈 발라드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렇다고 안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요. '두 번 뜨는 달'이라는 곡도 마찬가지예요. 국악스러운 느낌의 곡이죠.
이번 신보를 이전에 낸 앨범들과 비교했을 때, 뭐랄까 작업에 임하는 자세부터 달랐을 것 같아요. 뭔가 마음가짐이 다르지 않았나요. 나이도 더 든 만큼 가령 곡을 보는 입장도 달라졌을 것 같고.
돌아온 뒤 옛 앨범을 다시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렇게 어려운 곡을 해왔구나' 나부터 대중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누구나 쉬운 곡을 하자, 음악성을 따지지 말자고 했죠. 모든 곡이 대중들이 낯설지 않게 느끼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노래연습도 따로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곡이 가장 맘에 들던가요.
전 '장미의 기도'입니다. 록과 펑키 계열의 곡이죠. 미국에서 록그룹 머룬 파이브(Maroon 5)의 노래를 듣고 감동이 있어서 그런 분위기를 (작곡자에게) 권했는데 곡이 잘 나왔죠. 사무실 식구들도 일치를 본 곡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은 저와 사무실 입장이고 대중적으로는 다르죠.
시원한 고음이 트레이드마크인 장혜진은 재능을 높이 평가받으면서도 대중적으로는 그에 걸맞은 광채를 누려보지 못한 다소 불운한 여가수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숨은 광맥', '아직 손가락에 끼워지지 않은 순금반지'라는 안타까움이 섞인 말도 듣는다. '68년생으로 상명여대 체육학과를 중퇴한 뒤 MBC 합창단을 거쳐 세션 코러스로 활동하다(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등 다수 앨범에 참여했다) '91년 솔로 앨범과 함께 공식 데뷔했다. 첫 앨범을 제작한 '캔 기획'의 강승호씨와 '92년에 결혼, 제작자와 가수 커플을 이뤘다.
'92년 2집의 '키 작은 하늘', 이듬해 3집의 '내게로' 'Before The Party' 그리고 지금도 라디오 전파를 타는 '1994년 어느 늦은 밤' 등은 장혜진이라는 이름을 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저장시킨 가요의 수작으로 남아있다. 이후에도 그를 좋아하는 팬들은 '위기의 여자' '완전한 사랑' '꿈의 대화' '아름다운 날들'을 애청했다.
고음으로 솟구쳐 오르는 빼어난 가창력과 발군의 곡 해석력을 특장(特長)으로 했지만 결코 비주얼이란 측면도 멀리하지 않았다. 2집에서 보여준 파격적 의상, 충격적인 4집 때의 폭탄머리와 초록 아이섀도, 분홍입술 그리고 5집의 가슴을 열어젖힌 도발적 포즈 등 거듭된 외적 변신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장혜진이 여느 발라드 여가수와 달리 답답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확장된 음악세계에 대한 갈구를 참지 못한 그는 2002년 미련 없이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나이, 건강 그리고 대중가수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는 조금은 무모하다할 행보였지만 '음악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의지는 누구도 막지 못했다.
MBC 합창단과 세션 활동을 하다가 어떤 경위로 독집 앨범을 내게 된 거죠?
그땐 남편이 자기 회사를 아직 만들지 못한 시점이었는데 하루는 제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랬죠. '내 판 만들면 망하지는 않을 텐데..' 그랬더니 바로 연락 와서 하자고 그러더라구요. 강(승호)사장이 백업 보컬 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면서 이 친구는 솔로를 해도 될 것 같다고 내심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남편 강승호사장이 음악계의 유명한 제작자인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습니까?
반반이에요.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나이 많은 가수의 음반을 만들어준다고 했을 때는 힘이 되고요. 어떤 경우에는 하기 싫은 일이 있는데 제작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는 불편하죠. 방송국에 갔을 때 남편의 위치로 인해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어서 부담이 되기도 하구요. 일 할 때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죠. 오늘도 안 왔잖아요.
장혜진이 꼽는 장혜진의 곡은 뭐죠?
글쎄요. 팬들이 가장 꾸준하게 좋아하는 곡은 2집의 '키 작은 하늘'이에요. 저도 맘에 들구요. '1994년 어느 늦은 밤'과 '내게로'보다 더 애청하는 것 같습니다. 앨범은 3집 이후로는 이번 게 가장 흡족합니다. 처음으로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전곡을 내가 해보고 싶은 스타일을 구현하려는 욕심을 담은 앨범이기 때문이지요.
2002년 미국유학을 떠나고 4년 넘게 앨범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보가 뜻밖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요. 솔직히 저도 6집 앨범으로 끝일 줄 알았어요. 유학 떠나기 전인 2001년 7월 서울 힐튼호텔 때는 정말 비가 많이 내렸거든요. '이 공연이 마지막이구나!' 했어요.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부를 때는 저도 관객들도 다 울었습니다. 그 때문에도 다시 앨범을 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가수를 꿈꾸게 한 결정적인 음악은.
제가 2남4녀 중 막내딸이에요. 언니들 영향으로 라디오를 참 많이 들었고 거기서 아바(Abba) 비틀스(Beatles)를 무지 좋아하게 됐죠. 고교 때는 저니(Journey) 토토(Toto) 같은 소프트 록으로 이동했어요. 필생의 앨범은 '99'가 수록된 토토의 2집 [Hydra]입니다. 전 이상하게 남자그룹 음악이 맞더라구요. 묘하게도 지금까지 제 음반의 타이틀곡은 전부 남자가 만든 것들이죠. 하지만 결정타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이었죠. 이전 음악들은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는데 휘트니의 음악은 처음으로 감정을 울리더라구요. 가수가 되고 휘트니처럼 고음이 시원한 느낌을 주기 위해 연습한 적도 있습니다.
신보와 관련해서 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나이 많은 가수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대중들이 음악을 '편식'하는 것 같아요. 그러한 편식을 고려해서 이번 앨범을 여러 장르로 꾸미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