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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序
해남군의 민속유산과 놀이 가운데 지역적 특성이 두드러진 풍물로서 傳,서산대사 진법군고와 남해안에서 널리 행해지는 아름답고 흥겨운 춤과 노래 그리고 놀이가 있는 강강술래 그리고 마을 지킴이인 짐대와 장승 신앙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알아보고, 주민들의 정신적 구심체 노릇을 하는 마을의 당산제와 산신제를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2. 해남군의 풍물
농악의 기원은 勞動說과 祭儀說등 두 가지로 집약된다. 노동설은 농악이 농경의례 즉 생산과 풍요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고, 제의설은 농악이 제천의식인 소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정병호는 『농악』이라는 책에서 농악의 예능적 특징을 ‘오케스트라 연주의 무용‘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농악의 예능적 특징을 신을 위해 농악을 치는 경우에는 종교적 예능이고, 적을 물리치기 위해 행하는 것은 군법예능이라고 할 수 있으며, 피로나 고충을 극복하기 위해 행하는 경우는 재생의 예능이라고 하였다.
농악의 유래는 크게 安宅祝願說과 軍樂說 그리고 佛敎關係說 등 세가지 학설이 있다. 현존 농악의 당굿․샘굿․지신밟기 등이 농경 의례와 안택축원적 요소이고, 진풀이와 軍旗인 영기와 전립 등이 군악적 요소이며, 사물이나 고깔 삼색띠 무동들의 나비춤 등은 불교관계설과 연결시킬 수 있다.
전남 지방의 농악은 지리적 여건으로 좌⋅우도 농악으로 구분한다. 대표적 좌도농악으로 곡성 죽동과 화순 한천 농악을 든다. 이 가운데 화순 한천 농악은, 전원이 벙치를 쓰고 빠른 가락과 동작이 주가 되고 단체 놀이에 치중함을 볼 수 있다. 한천 농악의 구성은 ①들당산 ②문굿(짝드름→다드래기→새트기) ③샘굿 ④마당밟기 ⑤판굿 ⑥질굿 ⑦날당산으로 가락과 진법이 구성되며 총 소요시간은 8~9시간이 소요된다. 특히 다섯 번째의 판굿은 일채굿은 영산다드래기, 이채굿은 풍년굿, 삼채굿은 호호굿, 사채굿은 구정놀이, 오채굿은 노래굿, 육채굿은 도둑잽이, 칠채굿은 등밀이의 순으로 이어진다. 그 가락이 다른 지방과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특히 도둑잽이 굿은 일품이다.
우도 농악은 상쇠와 부쇠를 제외한 전원이 고깔을 쓰고 개인 놀이에 비중을 둔다. 이 가운데 영광 농악은 우도 농악 가운데 나무탈로 만든 잡색들이 다양하고 상쇠와 부쇠가 받아치는 ‘짝드름’은 영광 농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해남군의 미황사에 전해 오는 진법군고 설화 ( 渾虛和尙은 미황사의 중건 기금을 마련코자 光武 一年 (1897년) 2월 4일 미황사의 군고를 데리고, 송지면 당하리에서 출발하여 청산도로 향하던 중 해상에서 조난 당하여 전원 몰사함 )와 傳, 西山大師 陣法軍鼓는 불교와 군악 관계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특히 해남의 진법군고는 박정규의 기록인 <농악대 상식서>를 근간으로 聽令의 조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처음 출발시 2) 군총의 제주의 사항 3) 출발시 당산청령법 4) 타리로 들어가며 청령 5) 굿치다 쉴 때 청령 6) 저녁밥 때 청령 7) 밥 먹고 시작할 때 청령 8) 날 당산시 청령법 9) 도적잡이 할 때 청령 10) 정문굿 11) 도적을 잡은 후 청령 12) 아공자 표창 청령 13) 승전고 울리자 청령 14) 저녁 먹고 판굿 치다 잠잘시에 하는 청령 15) 기타 사실을 차차 잘 습득하라
농악대의 출입이나 대형, 동작에 따른 군고의 명칭을 살펴보면 ① 五方陣(중앙황제진, 동방청룡진, 남방주작진, 서방백호진, 북방현무진) ②一字長蛇 ③八門金鎖? ④원앙진 ⑤九宮八卦陣 ⑥玉行陣 ⑦六花陣 ⑧둔갑진 ⑨聚屯陣 ⑩英呼陣 ⑪嚴下陣 ⑫環陣 ⑬交替陣 ⑭舞回陣 ⑮개선진 ⑯退陣 ⑰送陣 ⑱長陣 ⑲黃華陣 ⑳고등진 가새진 방울진 두루마리진 돌림진 마지기진 등맞이진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규식을 참조하여 짜여진 新陣法軍鼓 規式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설 - 길굿 - 지신밟기- 禮祠 (당주, 관아, 놀이 마당의 主格에게 올리는 고신, 문안) - 진매기굿 - (長陣놀이, 圓陣놀이, 乙字진놀이, 之字진놀이, 太極진놀이) - 捕賊놀이 - (出戰굿, 一陣몰이, 二陣몰이) - 三陣몰이1, 2, - 상여놀이 - 軍丁놀이 - 終演賀禮굿
3. 강강술래
<강강술래 >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음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이동주 -
<강강술래의 민속적인 미(美)와 한(恨)을 노래한 시다.>
「강강술래」 시인 이동주(李東柱)의 제3시집. 1955년 전남일보 출판국에서 간행됨.
<강강술래> <목련> <꽃> <기우제(祈雨祭)> <초상> <못> 등 《혼야(婚夜)》 이후 작품 20편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시인 <강강술래>는 음악성과 회화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강강술래는 춤․노래․놀이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놀이이다. 그동안 강강술래의 기원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의견들은 고대기원설과 근대기원설로 나눌 수 있다. 고대기원설은 강강술래를 고대 수확감사제의 자취로 보는 경우, 마한시대 이전의 상고수렵인의 무용으로 보는 경우, 그리고 마한시대의 노래나 마한시대의 유회로 보는 경우이다. 그리고 근대기원설은 강강술래를 임진왜란 당시 동원된 해안지대의 부녀자들의 가무로 보는 경우이다.
강강술래는 노래가사의 후렴구로,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고창지방에서는 ‘감감술네’, 임자도에서는 ‘광광술래’, 해남․진도․무안․함평․강진지방에서는 ‘강강술래’, 동남해 근방인 거문도․초도․나로도․고흥지방에서는 ‘광광광수월래’, 또는 ‘요광광광수월래’로 불리우며, 그외에 강강수월래, 술래, 수월래, 수래소리, 술래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강술래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라는 뜻의 强羌水越來․江江水越來․ 羌羌水越來 强羌水越來遊라 표기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모두 日人에 의한 조사보고서(조선총독부와 村山智順)에 기재된 표기이기에 얼마나 정확한 내용을 담고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정만조의 『恩波濡筆』에 ‘힘내어 빨리 오라’는 뜻의 표현으로 强强順來라고 표기하였다.
강강술래 놀이들은 이미 하나하나 독립된 놀이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지역에 따라, 성별에 따라 단독놀이 형태로 아이들놀이, 부녀자들 놀이로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의 강강술래는 원무 형태의 진강강술래, 중강강술래, 잦은 강강술래를 하다가 지치면 앞소리꾼의 주도에 의해 남생아놀아라, 고사리꺾자, 청어엮기․풀기, 기와밟기, 덕석말기․풀기, 쥔쥐새끼놀이, 문열어라, 가마타기 등의 오락적이고 경쟁적인 여흥놀이 등이 연희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흥놀이가 끝나면 다시 원무 형태의 잦은강강술래, 중강강술래, 긴강강술래를 하면서 강강술래의 전체 놀이는 끝마치게 된다.
원무놀이인 강강술래에 이어서 나오는 여흥놀이들은 단순한 내용의 사설들은 단순한 가락으로 재창하면서 반복하는데 그 내용은 직설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남생아 놀아라 놀이는 남생이의 몸짓을 흉내낸 놀이로, 놀이꾼 중에서 한 사람이 나와 곱사춤․엉덩이춤 등의 우스운 몸짓 춤을 추면서 돌아다니면 주위 놀이꾼들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원무를 한다.
지와밟기는 ‘볿자 볿자 지와를 볿자’를 선창하며 일제히 허리를 굽혀 뒷사람이 앞사람의 어깨를 밟고 건너간다.
도굿대 당기기는 중앙에 도굿대(절구공이)를 옆으로 놓고 양편으로 힘센 사람이 나와 양끝을 잡고 뒤에 놀이꾼들이 늘어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는다. 그리고 서로 손이 잡히면 끌어당기기를 한다.
문열어라 놀이는 ‘문지기 문지기 문열어주소’를 선창하며 맨 앞사람 둘이 마주보며 손을 맞잡는다. 이 문을 놀이꾼들이 허리를 잡은 채 노래하며 꿰어간다.
가마등 놀이는 두 사람이 마주서서 서로 손목을 잡아 정자형을 만들고 위에 한 사람을 태우고 마당을 돌아다닌다.
강강술래의 여흥놀이들 가운데 남생아 놀아라. 지와밟기. 도굿대 당기기, 문열어라, 가마등타기 등은 대체적으로 서로 손목을 잡거나 허리를 잡으면서 또는 우스운 몸짓을 하면서 서로 어울려서 노는 놀이들이다.
남생아 놀아라 놀이는 집단무와 개인무가 뒤섞여 있으며 원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방아찧듯 엉덩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성행위적 동작을 취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기와밟기는 놀이꾼들이 등을 구부리고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마치 기와가 일렬로 놓여진 것처럼 이어 다리를 만들면 그 위를 한 사람이 양쪽에 부축을 받으면서 밟고 지나가는 놀이이다. 이 때 만들어진 일렬형의 다리는 남성 또는 남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밟고 지나가는 행위는 성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문열기․대문놀이라 하여 주로 아이들 놀이로 알려진 문열어라 놀이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성기를 상징하는 사물로서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성행위의 상징이며 남녀의 결합으로 풍요로운 생산을 기대하는 풍요기원의 유감주술적인 성행위굿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행위적 모방놀이는 도굿대 당기기, 가마등 타기 놀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까지 나열한 남생아 놀아라․지와밟기․도굿대 당기기․문열어라․가마타기 등의 여흥놀이는 성행위들을 모방한 주술모의적인 놀이로서, 원무놀이에서 맞이한 곡신․지신․농신을 생산과 풍요를 목적으로 결합하는 굿놀이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여성은 그 자체로서 풍요다산을 상징하지만 혼자서는 생산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남성이 있어야 여성으로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듯이 대지는 파종을 해야 생산이 가능하듯 여성은 일년 생산신과 결합해야 생산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생산신과 결합하는 행위들은 부녀자들의 강강술래 놀이를 통해 잠재적으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놀이요소로 갖는 흥미성과 겨루기 형식의 경쟁성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전승되고 있다. (서해숙의 「강강술래의 연구」에서 인용)
강강술래는 우리나라 민속놀이 가운데 대표적인 여성놀이(?)이다. 이 놀이는 전남의 남해안 일대와 도서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전승되고 있는 집단놀이로 주로 8월 한가위에 세시풍속의 하나로 놀아 왔다. 그러나 때로는 정월 대보름 밤을 비롯하여 봄, 여름, 가을 어느 때든지 달 밝은 밤에 자주 놀아 왔으며 놀이꾼들도 반드시 여인네에 국한하지 않고 남자들도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였다.
정서적이며 율동적인 놀이로 한가위 달 밝은 밤, 바닷가 모래밭이나 산기슭 넓은 언덕 또는 들판에서 여성들이 펼치는 강강술래는 약동하는 젊음과 건강한 생명력의 상징이라 하겠다. 현재는 이 놀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구태여 전남의 민속놀이라기 보다 전국에서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전에는 전남 가운데에서도 해남, 완도, 무안, 진도 등지에서 주로 놀아졌다.
강강술래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고 다만 이 놀이가 꽤 오래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 농경시대의 파종과 수확 때 공동 축제에서 노래부르며 춤을 추던 놀이 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면서 점차 오늘날의 강강술래놀이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이 이 놀이를 의병술로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친 다음 세상에 널리 알려져 당시의 격전지였던 전남 남해안 일대에서 성행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많은 여인네들이 서로 손을 잡고 둥그렇게 원을 지어 돌아가며 노랫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 노래는 목청이 빼어난 사람이 선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뒷소리로 받는다. 처음에는 느린 가락의 진양조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점점 빠른 가락인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으로 변해 가며 춤추는 동작이 빨라진다. 춤이 빨라지면 자연 뛰게 되므로 이를 ‘뛴다’고 한다. 놀다 지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놀고 노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여러 패를 지어 놀기도 한다. 놀이를 하는 여인네들은 대개 젊은 처녀들로 달 밝은 밤에 여성이 모여 한때를 즐기는 것이다.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돌면서 춤을 추는데 옛날에는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한다. 손은 저마다 편한 대로 잡으면 된다. 오른발부터 먼저 앞으로 디디고 뛰게 될 때에는 아무 제한 없이 마구 뛴다. 발을 디딜 때는 보통 걷는 동작으로 한다.
춤이 빨라지면 앞소리꾼이 ‘꺾자. 꺾자. 고사리 꺾자. 제주도, 한라산 고사리 꺾자.’라고 말머리를 돌리면 앞줄에서 뛰는 사람은 잡았던 손을 뒷줄의 적당한 곳은 손 밑으로 빠져 나간다. 이 때는 그곳의 사람이 손을 높이 들어 준다. 이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면서 춤을 춘다.
강강술래 하면 그저 손을 잡고 둥글게 둥글게 도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여러 형태의 놀이가 다양하게 놀아진다.
8월 한가위 밤 둥근 달이 동쪽 하늘에 높이 떠오르면 마을의 꽃다운 처녀들과 아낙네들이 마을 앞 백사장이나 뜰이 넓은 집으로 모여든다. 그리고는 손과 손을 마주잡고 달무리처럼 원무(둥글게 춤을 춤)하면서 목청이 좋은 사람이 느린 가락의 진양조를 하면 다른 아낙네들이 이를 받아 ‘강강술래’ 하면서 외씨 같은 발길을 사뿐히 옮기는 놀이가 바로 늦은 강강술래이다. 이 늦은 강강술래는 강강술래놀이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여성놀이다운 멋스러움이 깃들여 있다.
중 강강술래는 늦은 강강술래를 한참 하다가 선소리꾼이 흥겨운 중중모리가락으로 메기면 다른 놀이꾼들이 이에 맞추어 동작이 좀 빨라지고 어깨 놀림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가락이 빨라지기 때문에 손발이 유연해지며 또 원이 벌어진다. 이 중강강술래는 해남 우수영과 진도 지방에만 전해 오는 것이 특징이다.
잦은 강강술래는 중 강강술래를 하다가 선소리꾼이 자진모리 가락으로 메기면 다른 놀이꾼들도 이에 맞추어 양손을 쭉 뻗치고 뛰며 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원무의 형태는 같으나 원이 커지고 발놀림이 빨라지며 흥이 절정에 이른다.
‘남생아 놀아라’는 잦은 강강술래를 하다가 지치면 선소리꾼이 가쁜 숨결을 돌며 중중모리 가락의 ‘남생아 놀아라’를 부르면 다른 사람도 이를 되받으면서 발길을 늦춘다. 이때 놀이꾼 가운데에서 춤을 잘 추고 남을 잘 웃기며 동작을 잘하는 사람 두셋이 원 속으로 뛰어들어 ‘절래절래 잘논다.’를 부르면서 갖가지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주로 곱사춤과 궁둥이 춤을 추는데 이를 본 놀이꾼들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원무를 계속한다.
고사리 꺾자는 선소리꾼이 ‘고사리. 대사리 껑자. 나무 대사리 껑자.’를 부르면 다른 놀이꾼들이 ‘유자 콩콩 재마나 넘자. 아장아장 벌이어’로 받아 부르면서 원무 형태 그대로 어깨만을 들썩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서두가 일어서서 노랫가락에 맞추어 왼쪽으로 돌면서 다음 사람과 맞잡은 팔 위를 넘는다. 팔을 넘어간 사람은 일어서서 선두를 따라 전원이 꺾여 간다.
청어엮기는 고사리 꺾자가 끝나면 다시 둥근 원이 된다. 이때 선소리꾼이 ( 청청 청어엮자 / 위도군산 청어엮자 / 영자영자 청어 영자 / 위도군산 청어영자.) 를 부르면 다른 놀이꾼들은 이 소리를 되받으면서 그대로 멈추어 선 채 어깨만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것이 청어엮기이다. 그러면 선두가 둘째 사람과 셋째사람의 맞잡은 팔 밑으로 꿰어 간다. ‘고사리 꺾자’와 같이 차례차례 꿰어 가는데 이때에 오른손은 왼쪽 어깨 위에 감기게 되어 마치 청어를 엮은 모양과 흡사하게 된다.
청어엮기 끝나면 서두가 엮을 때와 반대 방향으로 꿰어 간다. 그러면 어깨가 풀려 원 대형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을 청어풀기 (청청 청어풀자 / 위도군산 청어풀자 / 풀자풀자 청어 풀자 / 위도군산 청어풀자.) 라 한다.
청어풀이가 끝나면 모두 둥근 원 상태로 빙빙 돌다가 선소리꾼이 ‘어느 골 지완가’ 하고 부르면 다른 놀이꾼들은 ‘장자골 지와세’를 부르면서 일렬로 늘어선다. 지와는 기와의 전라도 방언이다. 대형이 갖추어지면 선소리꾼이 늦은 가락으로 ‘볿자. 볿자. 지와를 볿자.’를 선창한다. 그러면 다른 소리꾼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앞사람이 앞사람의 어깨를 밟고 건너가는데 양쪽의 두 사람이 손을 잡아 준다. 놀이꾼들을 다 밝고 건너가면 그 사람은 제일 앞에 엎드리고 뒤에서부터 차례로 한 번씩 밟아 오는데 이것을 지와밟기라 한다.
선소리꾼이 ‘몰자. 몰자. 덕석을 몰자.’를 중중모리 가락으로 선창하면 모든 놀이꾼들이 이를 따라 부르면서 일어서서 또다시 손을 잡고 선두를 따른다. 그러면 선두는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돌면서 중심을 잡고 다른 놀이꾼들은 차례로 멍석을 말 듯 돌돌 말아 가는데, 이것을 덕석몰이 < 몰자몰자 덕석몰자 (선소리) / 몰자몰자 덕석몰자 (받는 소리) >라 한다.
덕석이 다 말아지면 선소리꾼이 이제 < 풀자풀자 덕석풀자 (선소리) / 풀자풀자 덕석풀자 (받는소리) > 를 선창한다. 그러면 다른 놀이꾼이 이를 되받으면서 말 때와는 반대로 외곽 사람들이 돌면서 풀어 가는데, 이것을 덕석풀기라 한다.
쥔쥐새끼 놀이에서 쥔쥐는 들쥐의 전라도 방언으로 쥐가 노구멍을 통과할 때 반드시 어미 쥐가 앞에 서고 새끼들이 뒤에서 꼬리를 문 듯 일렬로 뒤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 놀이를 ‘꼬리따기’ 또는 ‘닭살이’라고도 하는데 덕석을 풀어 일렬이 되면 선소리꾼이 ‘쥔쥐 새끼, 찔룩 짤룩 가사리 고부야.’를 노래하면 다른 놀이꾼들이 이를 되받으면서 일렬로 정렬한다. 이어서 선소리꾼이 ‘쥔쥐 새끼 잡세’를 소리지르면 일제히 허리를 잡는다. 그러면 선두는 재빨리 되돌아 맨 끝의 사람을 잡으려 쫓는다. 그러나 모두가 허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빨리 움직이지 못한다. < 잡았네 잡았네 / 쥔쥐새끼를 잡았네 / 콩한나 퐅한나 땡겼더니 / 콩차두 퐅차두 되었네 >
쥔쥐새끼 놀이가 끝나고 허리를 잡은 채 일렬이 되면 선소리꾼이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 주소.’를 선창한다. 그러면 맨 앞사람 둘이 일어서서 마주본 채 손을 들어 맞잡는다. 이 문 속을 다른 놀이꾼들이 허리를 잡은 채 노래하며 꿰어 간다. 만약 놀이의 대형이 끊어지면 그 끊어진 사람이 문지기가 되는 것으로 이것을 문열어라 라고 한다.
가마등은 가마타기놀이로 두 사람이 마주서서 저마다 자기의 왼쪽 손으로 오른쪽 팔목을 잡고 이어서 상대방의 왼쪽 손목을 잡아 우물정 자형을 만든다. 이 위에 다른 한 사람이 타고 마당을 돌아다닌다. 이 놀이는 편을 갈라 일정한 거리까지 갔다 오는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이때 임금이나 양분이 가마나 말을 타고 행차할 때 그의 위세를 더하기 위해 행렬 앞에서 사복이나 역졸들이 목청을 길게 빼며 부르는 권마성을 흉내낸 노래를 부른다.
도굿대는 절구공이의 전라도 방언으로 이 절구공이를 잡아당기는 놀이를 도굿대 당기기라 한다. 놀이꾼을 두 편으로 갈라 먼저 중앙에 정구공이를 갖다 옆으로 놓고 양편에서 힘센 사람이 나와 양끝을 잡는다. 그러면 양편이 놀이꾼들은 이 절구공이를 중심으로 종대로 늘어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맨 앞사람은 절구공이에다 발을 버티고 양손을 맞잡는다. 서로 손이 잡히면 끌어당기기를 시작하는데 양편에서 절구공이에다 버티고 있기 때문에 승부가 잘 나지 않는다. 또한 앞사람의 손이 빠지게 되면 모두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넘어진다. 그러면 박장대소를 하면서 놀이를 계속한다.
이상의 열 네 가지 놀이 이외에도 수건찾기, 품고동, 봉사놀이 등 많이 추가될 수 있으며 또 새롭게 꾸며질 수도 있다.
강강술래는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강강술래보존회가 전승과 보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唱을 하는 박용순(朴龍順, 1938년생)과 2000년 7월에 박양애(1935년생), 차영순(1953년생)이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우수영 강강술래팀은 제 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1976년 제17회 대회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해남문화원에서는 1982년 한가위 때부터 ‘강강술래 향토축제’를 열어오고 있다.
4. 우수영 부녀농요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0호 ; 1987년지정)
우수영은 옛부터 전라좌수영과 함께 수군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다. 이 지역의 남자들은 주로 바닷일에 종사했고, 논이 적기 때문에 농사일은 주로 여자들이 맡아왔다. 따라서 다른 지역의 부녀자에 비해 개방적이고 활동적이며 향토애와 생활력이 강한 곳이다. 남도지방은 농경 생활이 발달된 곳으로 농사에 관련된 많은 민속과 일을 해왔다. 우수영 부녀농요는, 노동의 피로를 풀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창출해낸 생활의 노래로, 삶의 희로애락이 스며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우수영 부녀농요는, 부녀자들이 농사일을 하면서 부르는 민요다. 다른 지역의 부녀농요가 일반적으로 “음영요”로 되어 있는데 비해, 우수영 부녀농요는 “가창요”라는 것이 특이하다. 밭을 맬 때 부르는 “밭메기노래”,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하면서 부르는 “보리타작노래”,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방아타령”, 일을 하다 쉴 때 부르는 “둥덩이타령”,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길꼬냉이”, 하루의 일은 끝내고 마을에 돌아와 놀면서 부르는 “뒷풀이”등이 있다.
노래가락은 중모리, 중중모리로 불리어지나, 매우 흥겹고 노래말 또한 순수한 마음의 노래이다. 농요는, 남이 부르는 것을 듣기만 하고 감상만 하는 노래가 아니라, 모두가 노래에 팔려서 함께 부르고, 그래서 힘든 줄 모르게 일한다. 소리를 할 때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같은 소리를 주고받기 때문에 일이 끝나 가는 해가 저물고 집에 시간이 임박하면 절정을 이룬다. 일은 마칠 때가 되면 잦은 소리로 몰아서 들판을 온통 소리의 소용돌이로 휩싸인다.
“이 논배미는 얼른심고 장두배미로 건너가세 여허허 - 여 - 루 상사뒤요
나도 한목 찡개서 여그도 심고 저그도 심고 보기 좋게도 심어주세
혀 - 여 - 여어 - 여루 - 상 - 사아 - 뒤 - 이요“
기능보유자인 박양애씨는 우수영에서 낳고 자란 소리꾼으로 목청이 좋은데다가 기억력이 뛰어나고, 가락이 정확하며, 사설을 많이 알고있어 해남과 진도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는 모두 부를 수 있는, 천부적인 소리꾼이다. 우수영 부녀농요는, 1972년 제 1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바 있고, 1987년 8월 25일 전라남도 지방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보유자 : 박양애 / 이인자 : 문내면 동외리 1102
5. 짐대
해남군내의 솟대(짐대)는, 화산면 석호리 대지마을과 화산면 관동리 관동 마을, 황산면 원호리 당개마을, 송지면 금강리 금강 마을, 송지면 서정리 치소마을, 황산면 송호리 원송호 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국립민속박물관의 조사자료를 참고하여 화산면 석호리 대지 마을의 진대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석호리(石湖里) 대지(大只) 마을은 군의 중남부 해안가에 있다. 본래 月湖川을 경계로 북부를 화인면, 남부를 파일면이라 하여 오다가 1914년 군면 폐합시 화일면과 화이면을 통합하고 진도군에 속하여 있던 삼마리를 병합하여 화산면이라 하였다. 동쪽에는 산지가, 서남북부는 구릉성 산지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쪽 해안선 길이는 약 10㎞에 달하며 간석지가 발달하여 있다. 연안 지역에서는 소금 외에도 김․굴의 양식과 함께 새우․뱀장어 등이 산출되고 있다.
위치와 형태 :
진대(또는 짐대)는 마을회관에서 동북쪽으로 약 40m 지점의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6m 높이의 소나무 장대였으나 최근 3년전(1991년) 높이 8m여, 둘레 1m 가량의 전봇대로 바뀌였다. 상단에는 나무로 만든 새 한 마리가 올려져 있고, 이 새는 ‘오리’라고 한다. 진대 밑에는 장방형의 판석(웟변 160cm, 밑변110cm, 세로 50cm)으로 도니 제단이 넣여져 있다. 전엔 이 진대가 놓인 삼거리 바로 앞길에 ‘鎭東方逐鬼大將軍’과 ‘鎭西方逐大將軍’이라 쓰인 벅수 1쌍이 양쪽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 더 이상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
* 건립 연대 및 유래 :
본래 나무로 만들어 세우던 진대는 비바람에 넘어지면 다시 세우곤 하였다. 그러다가 주민이 빠져나감에 따라 매번 세우기 어려워 3년전 마을회의에서 전봇대로 바꿔 세우기로 결정하여 교체된 것이라 한다. 이때 오리만 새로 만들어 전봇대에 올려놓았으며, 오리는 부리가 마을 앞산을 바라보게 올려져 있다.
진대는 마을 앞산이 뒷산보다 높아 “마을이 피지 못하고 인물이 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氣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하며, 진대의 의미를 누를 鎭자로 풀이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로는 마을에 한 500년 된 고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대의 역사도 그 정도 되지 않겠느냐고 보고 있다.
* 관련 의례로는 ‘당산제’ 또는 ‘짐대제’라 불리는 대지 마을의 공동체 제의는 음력 2월 3일에 지내오던 것이었는데 근래 정월 초하루나 초이튿날로 바뀌었다. 시간은 해뜨기 전인 새벽 5시경에 지낸다. 또한 제일은 바뀌었지만 한해도 제사를 거른 적은 없다고 한다.
제관은 음력 섣달 20일 경 동계에서 선정되며 유고없는 깨끗한 자 중에서 생기복덕에 닿는 자 2인(제관 1인, 유사 1인)으로 정한다. 선정된 제관은 그날로부터 외출을 삼가고 근신하며 찬물로 하루 3~4회 목욕재계한다. 제 4일전에는 집 앞과 진대에 금줄을 치고 禁土를 뿌린다.
제의 비용은 일정한 마을 재산이 있어 현재 이 돈을 농협에 장기 저축하여 그 이자로 충당하고 있다. 제물은 유사가 해남장이나 화산정, 송지장 등에서 그해 방향을 보아 구입해 오며 눈이 노란숭어를 반드시 올린다. 만약 숭어를 구하지 못하면 제일을 연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제일 전에 마을에 불상사가 발생해도 달을 걸러 제사를 모시기도 한다. 제물 준비는 제관 부인이 맡아 준비하며, 이 경우 부인도 생기가 맞아야 한다. 예전에는 마을의 공동 우물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금줄을 쳐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한 후에 이 물로 제물을 준비해 왔다고 하나 현재는 제관집에서 바로 준비한다.
제물을 진대의 제단에 진설한 후 바로 제사로 들어가는데 분향 - 재배 - 소지의 순으로 지낸다. 소지는 진대소지 - 화주소지 - 부화주소지 - 각 가호소지 - 우마소지 - 들소지 등 모두 6종을 올린다. 소지시 잘 타 오르는 것이 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식으로 당산제를 마치고 다음날 주민들이 제관집에 모여 음복하는 것으로 모든 과정을 마친다.
6. 장승
해남군내의 장승은 사찰 장승으로 대둔사 입구와 일지암에, 그리고 마을 장승으로는 원송호 마을과 관동마을의 두 곳이 있다. 이 가운데 대둔사 입구의 벅수는 속칭 ‘거령신’으로 부르며 사찰 입구에서 잡귀를 쫒고 천연두를 예방하는 역할을 하며 명문 또한 ‘禁鬼大將’ 과 ‘受詔大將’으로 독특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시 세우면서 이러한 취지를 모르고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으로 바뀌게 되었다. 마을 장승 가운데 관동 마을과 송호 마을의 장승은 호남 지역에 흔치 않은 五方神將系 장승으로 주목된다. 명칭 또한 관동 마을에서는 장승의 토박이 말인 ‘벅수’라 부르고 있어서 그 뿌리가 남아있다. 네 곳의 사례 가운데 당제와 짐대제 그리고 장승이 남아있는 관동 마을의 사례를 국립민속박물관의 조사 자료를 참고로 하여 살펴보자.
<관동 마을의 석장승>
해남군 花山面 關東里 關東 마을의 생업은 반농 반어이다. 어민 대부분은 1톤 정도의 어선 1척씩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마을의 경제 사정은 좋은 편이다. 수입면에서 볼 때에도 “바다 수입 반, 농사 수입 반” 이라 할 정도이고, 어업은 굵은 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주로 자잘한 것들로 새우․게․오징어 등을 주로 어획하고 있다. 농사의 경우 간척지를 불하 받아 개인 소유하고 있으나 대부분 외지인들 것이라 하여, 농사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다. 또한 농토는 많아도 일 할 사람이 없어 경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 위치와 형태
마을 앞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길 우측 편에 동북쪽을 향해 화강석으로 된 장승 ‘東方大將軍’ 1기가 있다. 그리고 ‘西方大將軍’은 마을을 가로 지르는 큰길을 따라 간척지로 향하는 고개의 우측면에 동남향을 바라보고 세워져 있다.
2기 모두 동일한 石工이 제작한 것이므로 형태와 거의 같다. 사각형 石柱에 조각되어 있으며, 오량관두를 쓰고 양손이 가슴 부위에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문인석형이다. 눈은 작게 표현되어 있으나 위로 날카롭게 치켜 떴고, 코 역시 작고 볼록하게 새겨 평평한 느낌을 준다. 벌어진 입은 얼굴 하반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으며 입술 사이로 이빨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턱 밑으로는 댕기 모양의 한 가닥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양순 위에 걸쳐져 있다. 그 아래 허리춤부터는 上衣를 곡선으로 표시해 下衣와 구분하고 있다. 높이 200cm, 둘레 115cm, 안면 길이 50cm이다.
짐대는 노인회관 바로 맞은편 당산나무 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근래 소멸된 뒤로 다시 세우지 않고 있다. 예전의 것은 높이 7m 가량의 장대 상부에 부리가 동쪽을 향하도록 하여 오리 한 마리가 올려져 있었다. 이 오리는 부리에 신호대 2~3 가닥을 물고 있었으며, 오리 털을 붓으로 표현하였다.
이외에 신당으로 산신을 모신 제각이 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한다. 슬레이트 지붕에 사방 벽은 시멘트로 처리하였고 전면 입구 출입문만 함석을 덧 대었다. 이 신당은 7~8년 전 초기에서 지금의 슬레이트로 바뀐 것이다. 현재 이 신당은 동네 토지를 벌어먹고 사는 ‘제각이’라 불리는 자가 관리하고 있다. 신당의 크기는 495×293×213cm이다.
* 건립 연대 및 유래
본래 관동 마을의 장승은 나무로 만들어 해마다 제사 지내기 전에 동․서․남․북에 짐대와 함께 세워 왔다고 한다. 그러나 잦은 풍우로 훼손이 심하고 다시 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1984년 주민들이 의논하여 석장승 2기를 석공에게 제작 의뢰하여 현 위치에 세우고 이때 크게 한 번 모셨다고 한다. 장승은 모두 마을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재앙을 장승이 막아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관련 의례
이 마을에서 위하는 공동제의는 ‘당제’ 또는 ‘제사 모신다’고 한다. 제일은 전엔 정월 초사흘 날이었지만 지금은 초 하룻날 새벽 첫닭 울기 전에 모신다. 제사는 제관 3인과 ‘금구패(농악대)’가 함께 참여하여 지낸다. 이외에도 주민 중 부정없는 사람이면 제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제관을 축관․유사 등으로도 부르지만 보통 ‘제 모시는 자’라 칭한다. 이들 제관은 섣달 20일경 마을회의에서 정한다. 선정된 직후부터는 일체 잡일들을 멀리 해야하며 술과 담배도 일절 할 수 없고, 정초 차례도 올릴 수 없다. 제관들은 이 기간 중에 자기집에서 왼새끼 금줄을 꼬아 놓으며, 이 금줄은 제일 3~4일 전 제관 집과 장승 및 당산나무 등에 걸어 놓는다.
제사는 금구패의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하여 시작되는데 먼저 제관 일행은 제물을 갖고 마을뒷산의 신당으로 올라가 대기한다. 마을에 남아 있던 금구패의 꽹꽈리 신호와 함께 제물을 신당앞에 진설하고 분향 - 재배 - 헌작 - 독축의 순으로 진행된다. ( 維 歲次 甲戌一月丁卯 初朔 一日 丁卯 關東里民代表 幼學( 0 0 0 ) 敢昭告于 主山之神 伏以敢告 關東居住 男女老少 送舊迎新 甲戌之年 心無悲恐 身無疾病 子孫興旺 六畜繁殖 家無禍害 隣保相助 能守盜難 能防火災 里無難事 國無變亂 時和年豊 ( 중략 ) 謹以淸酌 祗薦于神 歲事 尙 饗 )
제물은 소족발이나 돼지머리를 사정에 따라 사용하며 그 외와 채소․편․떡 등을 올린다. 그리고 祭費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신당에서의 제사가 끝나면 바로 서방장승이 놓여진 길 건너편 당산나무로 가 역시 앞의 방식과 동일하게 제사를 올리고 난 후 다시 서방장승이 있는 곳으로 와서 간단하게 축원을 한다. 그런 후 장승 앞에 지푸라기를 깔고 그 위에 제물 약간을 놓아둔다. 이어 다시 마을회관의 당나무와 동편 장승으로 이동하여 제사를 지내고 주민이 모여 음복 겸 음식을 나눠먹는 것으로 한 해의 당제가 모두 끝나게 된다.
7. 堂山祭
해남 군내의 당산제는 맨 뒤의 도표를 참고해 보기 바란다 이 가운데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 자료를 참고하여 산이면 예정리 예동마을의 당제를 소개한다.
山二半島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로변 송천 삼거리에서 남으로 2㎞에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대부분은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부업으로 石花 채취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총 57戶에 人口 204名(男 95, 女 109)이 거주하는 마을로 제보자에 의하면 마을이름이 처음에는 ‘유호’였다 한다. 현재 漢字名인 禮丁도 처음에는 禮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井”字를 “丁”字로 고친 것이다 입향조의 姓氏는 裵氏(달성인), 양씨였으나 현재는 광산 김씨와 김해 김씨가 대부분이라 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堂祭모신다”하여 마을 뒷산(옥수봉) 중턱에 자리한 옥령당과 상당인 산신령에게 제를 모시는데 上堂이라는 곳은 자연제단이나 下堂인 玉靈堂은 지난 1965년에 改築한 블록 瓦家이다. 玉靈堂 內部는 시멘트 제단과 “옥靈”이란 글씨가 먹필로 쓰여진 位牌가 모셔져 있으며 상량문에는 “應天上之流備人間之五福玉梳奉上玉靈神堂正奠祭數千萬年年檀紀四千二百九十八乙巳四月初二日丙辰立柱同日巳時上樑”이라 쓰여있다. 개축되기 전에는 草家였다 한다. 바로 앞에 옥령당과 인접해 있는 眞守堂은 祭官의 유숙이나 제찬 장만시 사용되고 있다.
이제까지 한해도 거르지(빠뜨리지)않고 祭를 모셔왔던 이마을 당제는 그 대상인 옥령당신의 할머니神과 上堂의 산신령님께 마을의 안녕과 질병 재액을 물리쳐 달라고 기원을 한다.
이러한 제사는 정월 초하룻날 밤에 지내게 되는데 祭官선출은 전날인 금날(그믐날)이나 바로 몇일 전에 두분을 선정하게 된다. 이가운데 한분이 祭主가 되며 나머지 한분은 祭官의 일을 돕게 된다.
祭官선정에 있어서도 그해에 부정이 없는자를 우선 선정하여 태기를 가린다. 즉 생기복덕이 맞아야 한다고 한다. 선정된 제관은 祭당일 아침부터 祭堂인 眞守堂에 올라가 祭饌을 마련하는데 이들 제관들은 목욕재계의 정성을 보이며 담배를 피운 후에도 반드시 양치질하거나 대소변시 손발을 씻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제관댁에 한해서는 금날(그믐날)부터 금줄을 치고 부정한자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祭에 필요한 경비는 祭畓(600평)에서 충당하는데 가을에 나락(벼) 2섬을 내놓아 이것으로 모든 비용을 삼는다.
진설된 제물의 종류로는 돼지머리(20여년 전부터)와 祭酒, 메, 떡 그리고 약간의 과일 등인데 上堂인 산신령에게 모시는 제사에는 돼지머리가 진설되지 않는 것이 下堂인 옥령당과 다르다. 이렇게 하여 준비가 완료되면 본격적인 祭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밤10시경이면 제가 시작되는데 맨처음에는 玉靈堂神인 堂할머니께 먼저 제를 올린다. 祭儀과정도 그 다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여 진설 후 손빔으로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이는 제관이 생각대로 하기에 祝文은 없다. 다음으로 소지를 올리는데 그 順에 있어서는 마을 최고령자인 洞長, 里長 그리고 각 戶의 戶主순으로 진행된다. 下堂인 옥령당에서 祭를 마치면 곧 바로 上堂으로 올라가 옥수봉 산신령께 제를 모신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재앙을 없애달라는 기원만을 하게 된다. 즉 風災․地災․雨災이다. 上堂에서의 제의 과정도 下堂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上․下堂의 祭가 끝나면 祭가 끝남을 알리기 위해 불을 피워 신호를 보내는데 마을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청년층에 의해 당굿이 시작된다. 당굿은 그간에 고생했던 제관을 맞으려 온다. 이상과 같은 제의절차로서 예동마을의 堂祭는 끝이 나게 된다. 제보자에 따르면 祭에 대한 洞民의 의식은 부정적인 견해이나 마을의 村老들과 몇 몇 분들에 의해 계속되어야 한다는 論議로 일축된 것 같다며 제보자 또한 후자의 생각과 같이 하고 있다.
8. 山神祭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 자료를 참고하여 송지면 어란리 어란 마을 산신제를 소개한다.
어란 마을은 총 홋수 199호에 1055명이 거주하며 어업이 주업이다. 이 가운데 농업이 23호, 상업이 10호, 나머지가 어업이다. 김 양식으로 부촌이 되었는데 동쪽에 동현리가 서남북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다.
이 마을에서 ‘황혼제’ ‘산신제’라 부르는 제를 어란진 국민학교 앞 300m 지점에 있는 당산에서 지내는데 블럭으로 지은 당집이 있다. 왼쪽으로는 堂主神位(당할머니, 당할아버지)를 모신 방과 오른쪽에는 제물을 장만하는 부엌이 있고 당집에서 1.5㎞ 떨어진 곳에 당샘이 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 밤12시에서 3시 사이에 지내는 마을제사는 마을의 풍어와 평안, 질병방지, 우마 무병 등을 기원한다. 제관은 제사일 보름 전 마을 대동 공회에서 사주를 보아 운에 맞는 사람으로 ‘제주 1명’을 선출한다. 음식을 장만하는 ‘종사원’도 이때 뽑는다. 제주와 종사원집은 그날로 문밖에 황토흙을 뿌리고 금줄을 쳐 외부인의 출입을 금할 뿐만 아니라 엄격한 금기사항이 있다. 즉 싸움하는데 보지 않고, 개고기를 먹지 않으며 喪․産故者집에도 가지 않고 海物도 먹지 않는다.
제주는 장보기 전날 당샘에 가서 목욕하고 청소를 하여 금줄을 띠고 황토흙을 뿌려놓는다. 당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제물장만을 위해 2~3일 전인 26~28일경에 장에 가서 제물을 사오는데 마을민들을 보지 않기 위해 남보다 일찍 장에 가서 일찍 돌아오며 절대로 차를 타지 않는다. 물건을 살 때 깎으면 공이 없다고 해서 절대로 깎지 않으며, 돌아올 때 외부인과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쓴다. 마을에서 제주가 돌아올 때 쯤 되면 이장이 회관에서 스피커로 아무도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장에 가서 제물을 사오면 그날 바로 산으로 올라가 장본 날부터 당에 불을 켜놓고 당집에다 금줄을 치고 저녁마다 제주와 종사원이 목욕을 하고 제각으로 올라간다.
제물은 堂舍 내에서 장만하며 제물로는 백시루, 조기, 병어, 숭어, 삼치, 메밥 2그릇, 멧국 2그릇, 산채, 해물, 나물, 과일 등이다. 제물 구입에 소요되는 경비는 예전 경우 洞中자금이나 각 戶에서 거출하여 지냈으며 지금은 祭?(300평)의 소출 양으로 충당한다. 올해는 쌀 한가마니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堂집에는 제물 구입한 때부터 불을 밝혀두며 이는 제사 때까지 계속해 둔다. 그러나 이기간에 산고․상고가 나면 불도 꺼버리고 제주도 올라가지 않는다. 제주는 옷을 3~4벌 가지고 올라가 30일 저녁 6시경에 목욕을 하고 12시경에 젯상을 차린다. 음식을 진설한 후 옷을 갈아입는다. 예전에는 제를 진행할 때 흰옷을 입어야 했으나 지금은 깨끗한 옷이면 된다고 한다. 젯상을 차린 후 시첩(숟․젓가락)→잔드리고 재배→첨작(술을 붓는다.)→재배→15분간 엎드려서 소원을 빈다.→소지를 올린다.(①이장→②부락대표자→③제주)→음복 順으로 제는 진행되고 이때 당집에서 제주가 지내는 것을 ‘황혼제’라하며 종사원이 당집 밖에서 지내는 것을 ‘산신제’라 한다. 산신제에서 마련된 음식은 땅에 묻는데 이를 사신이라 한다. 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주민은 집안에 불을 켜놓고 깨끗이 목욕한 후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당이 있는 곳을 향해 엎드려 집안의 안녕을 축원한다.
제후 음식은 초이튿날 아침 제사의 진행 여부를 보고한 후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다. 이때 제물 장만에 쓰인 경비를 보고한다. 예전에는 초이튿날 가가호호 군불(이마을에서는 걸구라고도 함)을 쳤으며 군불을 치러 들어가면 집주인은 상을 펴서 쌀을 댓박에 가득 담아 놓고 그 옆에는 정화수를 떠 놓는다. 가끔씩 돈을 내놓기도 하는데 쌀과 돈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옛날 어란진에 수군 만호가 있었을 때는 동․서․남쪽의 城에 상을 차리고 주민들이 기원을 하며 농악을 치고 “삼문제”를 지냈다 한다. “삼문제”를 지낼 때 무당이 기원을 하여준다. 마을에서는 평소에 당집에 들어가면 “지(골)걸진다”라고 하여 못들어 가게 하며, 배들이 출항시 당집 쪽을 행해 술을 따라 붓고 인사를 하고 출발한다. 이제껏 계속해 온 마을제사에 대해 마을 젊은 층의 호응도 좋은 편이어서 지난해(1985)는 당집 보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야 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짐대제>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 자료를 참고하여 황산면 원호리의 짐대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황산면 院湖里는 큰마을, 당개, 산정물, 새터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짐대제를 지내는 당개마을은 총 45戶에 약 80명이 거주하며 務安 朴氏 40戶, 金氏 4戶 등이다. 마을의 50세 이상은 남녀 각각 약 20여명으로 40人에 이르며 마을의 주업은 농업이다. 마을 입구 東南쪽에는 20년 전까지 팽나무 2주와 짐대돌(선돌) 2개, 장성(또는 대장군)이 서 있었으나 현재는 폐허된 공터만이 남아 있다.
마을의 북쪽에는 약 450년생 추정의 높이는 약 15m, 둘레 2.5m인 팽나무가 있는데 郡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提報者 朴基鳳氏는 이 마을에 7代째 居住했다 하며 이 마을은 300년 되었다 하였다.
짐대는 1基가 논가운데 세워져 있으며 장대의 높이는 약 7m, 둘레는 아랫부분이 29㎝이다. 장대의 정상부에는 나무로 깎은 오리 한 마리가 입에 짚을 물고 있는듯한 형상으로 가느다란 대나무(철사?)를 물고 있으며 머리는 正北向을 하고 있다. 짐대의 오리는 마을을 방어하고 厄運방지를 하여 준다고 전하여 진다.
마을의 짐대제는 음력 2월 초하루(전에는 정월보름)저녁 7시에 제관 1人, 따라가는 사람 2人이(부락민 참석 불가) 짐대터에서 제를 올린다. 제관은 부정이 없고 생기복덕에 맞는 사람을 7일 전에 선정한다. 제관은 이날부터 짐대터를 청소하고 황토를 祭場 入口와 짐대 사방에 세워두고 여기에 백지를 메단 왼새끼 금줄을 걸어둔다. 제관은 사흘동안 찬물로 목욕하고 개고기나 다른 고기 안먹고 産․喪家에 가지 않으며 사람 만나는 것도 꺼린다.
제수(祭需)는 채소(나물), 해물, 밥, 과일(사과, 배, 귤), 술 차려놓고 소지(?)를 올리고 빈다. 현장에는 돼지 아가리뼈가 짐대 밑에 묻혀 있었다. 제후 제물은 백지에 싸서 땅에 묻는다 하였다.
祭費는 마을 공동 경비에서 충당하나 부족한 경우 짐대제비라 하여 쌀, 돈을 거둔다. 제후에 동네 회의는 없고 메구(농악)도 치지 않는다. 짐대는 썩으면 불에 태우고 좋은 산에서 깨끗한 나무를 골라 동네 청년들이 새로 만든다.
짐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마을 입구에 20여 년 전에는 장성이 세워져 있어 장성터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전에는 이곳에 당산나무 두 그루와 짐대돌(선돌) 2개가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빈 공터가 되었다. 마을 동서쪽에는 國師峰이라는 산이 있어 이곳에 鐵馬를 모셔서 50년 전까지 이곳에서 祈雨祭를 지냈었다고 전한다.
9. 參考 文獻
정병호『전통문화』진도도깨비굿, 198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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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하 『벅수와 장승』, 집문당, 1990
이종철 『남녘의 벅수』, 김향문화재단,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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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훈『전,서산대사진법군고』해남문화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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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방 장승․솟대 신앙』 국립민속박물관, 1996.
서해숙「강강술래의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중요무형문화재 2』 연극과 놀이, 대원사, 1999.
10. 해남 지방의 동제 신앙 현황 (1)
10. 해남 지방의 동제 신앙 현황 (2)
11. 해남 지방의 장승․솟대 신앙 현황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