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수 (참석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참석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림.)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국어 순화’라는 주제에 대해 터놓고 얘기해 보기 위해섭니다. 이제 우리는 현재의 국어 문화를 대치할 문화적 대안으로서 ‘국어 순화’를 얘기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어 순화를 한때는 국어학자들의 여기·여흥으로만 본 적이 있었는데 , 그런 접근으로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이번 좌담회에는 ‘순화’에 대한 접근에서 맘이 넓고 통이 큰 분들을 모시려고 했습니다. 기존 순화 작업은 정화 , 민족 문화 등 감성적, 전체주의적이라고나 할까, 약간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지상주의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든가 다양한 문화의 존재를 인정한다든가 방언과 통속어에 대한 고려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70년대 중반 국어 순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 ‘순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회 한편에서는 ‘국어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표어와 함께 바른말, 고운 말을 쓰자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동안에 다른 한편에서는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등과 같은 과격한 표현이 마구 쓰이던 모순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국어 순화를 왜 해야 하는지 문제 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국어 순화에 대한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평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평가 후에는 국어 순화에 대한 전략을 재조정하여야 합니다. 지금 국어 순화는 이 모든 단계가 지리멸렬한 상태이고 오로지 ‘수행’만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일부 네티즌들은 서양 말을 한자어로 바꾸는 것조차 불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어 순화’의 개념 정립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국어 순화’의 허깨비를 갖고 싸우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국어 순화가 정말 필요한지, 국어 순화를 왜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어준 ‘순화’에는 도덕주의의 냄새가 있습니다. 욕을 쓰지 말라는 태도가 국어 순화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 아니라 욕을 언제 쓸지 알고 쓴다면 그게 국어 순화의 정신에 더 합치되는 게 아닐까요? 비속어에 대한 변호를 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합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 시에는 시적 허용이 있듯이, 일상 언어 사용에도 이런 것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없다’를 ‘엄따’, ‘아주, 몹시’를 ‘졸라’라고 하는 것도 언어 유행이라고 봐야 합니다. 충분히 성숙한 문화에서는 이런 표현들도 얼마든지 수용할 여건이 된다고 봅니다. 인터넷 통신 용어 중에는 길게 쓸 것을 줄여서 쓰는 것도 있고 더 나아가 이모티콘처럼 재미있게 쓴 것, 조폭 은어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축약 , 노력 경제’라는 실용적 목적도 있고 그룹 간 내부 결속이라는 심리적 동기도 있습니다. 인터넷 통신 용어 중에는 점차 변형들이 생기고 분화가 되어서 눈 깜짝할 새에 그룹 내부 간의 의사소통도 잘 안되는 일이 생기게 되더군요. 그런데 제가 젊은 네티즌층의 인터넷 언어 중에서 문제점을 느끼게 된 것이 이런 겁니다. 다르게 쓴 것이었는데 그 자체가 표준어인 줄 알고 (어문 규범이나 문법에) 틀리게 쓰는 데에도 영향을 줄 때 문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르게 쓰는 집단이 규범대로 쓰는 집단보다 상회하거나 그 그룹 내에서도 소통 장애가 생깁니다. 변화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6개월이나 1년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용어가 생겨납니다. ‘Kin’ 이나 ‘즐’50)
‘Kin’, ‘즐’: 다른 사람을 따돌릴 때 내는 소리. “너나 즐겁게 하던 일 해라” 또는 “너 혼자 즐겨라”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대화방에서) 어서 떠나라.”라는 뜻으로 쓰는 말. ‘즐’은 ‘즐겁다’ 또는 ‘즐기다’에서 ‘즐’만 따와서 쓰는 말이고, ‘Kin’은 ‘즐’을 옆으로 뉜 글씨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즐’과 같은 뜻으로 쓰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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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그런 예죠. 그 모임의 구성원 간에는 너무나 당연한 표현인데 그 모임에서 조금만 벗어난 다른 사람은 완전히 모르는 표현이 되는 거죠. 사회 변화 속도가 정말 빠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자기가 배운 시점의 언어를 정상적인 언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치 ‘관성’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쓰는 말도 사회 변화를 수용하고 따라가야 할 거라고 봅니다.
김하수 김어준 총수께서는 언어의 이상성보다 언어의 기능적 면을 주로 언급하셨습니다. 소위 비속어나 인터넷 언어가 우리 사회 주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어준 일본어 투와 관련된 얘긴데요. 왜 ‘쓰레빠’라고 하면 안 되는지요? ‘쓰레빠’는 갈색 플라스틱으로 된 것으로 화장실에서나 동네 슈퍼 갈 때 질질 끌며 신고 다니는 것이 떠오르는데, ‘슬리퍼’라고 하면 흰색이고 헝겊으로 된 호텔 양탄자 위에서 사용하는 것이 떠오릅니다. 중국 조어(造語)는 되고 일본 조어는 안 된다는 것은 이해는 되나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어 투를 쓰면 반민족적이라고 보면 곤란한 것 아닐까요?
지영서 지금 말씀하신 일본어 투는 때와 장소를 가려 쓰면 문제가 안 되지만 그렇게 때와 장소를 가려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 주위를 둘러보면 평상시에 ‘왔다리 갔다리 한다’와 같은 일본어 투를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불쑥 그런 일본어 투를 쓰고 마는 난처한 일을 겪더라고요.
박영률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쓰레빠’와 ‘슬리퍼’를 사물의 차이로 언급했습니다. 전 영어에서 쓴 ‘슬리퍼’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 호텔 양탄자 위에서 신는 뒤 굽 없고 신 끈 없이 발을 꿰어 신는 것을 ‘슬리퍼’라 하고 주로 갈색으로 된 플라스틱 재질의 신발류로 동네 슈퍼 갈 때 질질 끌고 다니기도 하는 뒤 굽 있고 발끝만 꿰게 되어 있는 것을 ‘쓰레빠’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나라에서만 자체적으로 의미가 부여되어 새롭게 지어진 말이라면 ‘쓰레빠’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하수 국어 대사전에서도 ‘보이’를 ①소년, ②사환51)
사환 (使喚): 식당이나 호텔 따위에서 접대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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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사52)
급사(給仕): 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리는 사람. ‘사환 (使喚), 사동(使童)’으로 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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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풀이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이(뽀이)’라고 할 때는 1번 뜻이 아니라 2번 뜻으로 쓴 건데 그게 오히려 더 뒤에 나오더라고요.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 쓰던 말인 ‘사루마다’하고 우리 세대가 쓰는 ‘빤쓰’하고는 모양도 다르고 천도 다른 것으로 이해가 돼요. 요즘에는 ‘빤쓰’도 아니고 ‘팬티’라고 해야 통하더라고요. ‘사루마다’, ‘빤쓰’, ‘팬티’는 단지 순화 대상어와 순화어의 차이가 아니라 물건의 차이라고 봐야 할 거 같아요.
유재원 ‘타입’하고 ‘타이프’도 그래요.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야.”할 때의 ‘타입’하고 “이 타이프는 내가 30년 동안 쓰던 거야.”할 때의 ‘타이프’하고는 대상이 아예 달라요. 앞의 표현을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타이프의 사람이야.”라고 하면 어색한 거죠.
김문오 제가 생각하는 일본어 투의 문제라면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왔다 갔다 한다’라고 해도 될 것을 ‘왔다리 갔다리 한다’53)
이에 대한 일본 말은 다음과 같다. ‘行ったり 來たり する , いったり きたり する.(ittari kitari suru, [직역]: 갔다 왔다 한다.)’ ‘-하기도 하고 -하기도 한다’라는 뜻으로 일본어에서는 ‘~たり ~たり する’를 쓴다. 여기에서 일본어 접속 조사 ‘~たり(tari)’가 겹쳐 쓰이는데, 이 반복되는 접속 조사 ‘ ~たり(tari) ~たり(tari)’ 부분만을 빌려 와서 ‘왔다리 갔다리’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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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한다든가, ‘막무가내로’라고 해도 될 것을 ‘무뎃뽀 /무뎃포[無鐵砲]로’라고 한다든가 하면서 우리말이 있는데도 일본 말을 마치 우리말 고유어나 사투리인 것처럼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화전 사용법’에서 “불난 곳까지 호스를 끌고 가서”라고 하면 될 것을 “불난 곳까지 호스를 전개하여”라고 한다든가, ‘장애인용 휠체어 리프트 사용 안내문’에서 “안전 고리를 채우십시오.”나 “~ 연결하십시오.”라고 표현해도 될 것을 “안전 고리를 체결하십시오.”라고 표현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제품 설명서나 안전 설명문을 보면 불필요하게 어렵고 이상하게 쓴 문구가 많은데 그런 것들은 대개 일본어를 직역한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법령문에 쓰인 일본식 한자어들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어 공동체가 협동과 상호 작용을 잘 하도록 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라면 앞에서 말한 일본어 투나 ‘생각되어집니다’와 같은 영어 투가 우리말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재원 ‘국어 순화’라고 하면 대단히 계몽주의적, 권위주의적 냄새가 나요. 언어학자만 모인 순화 회의는 현실에 안 맞는 순화가 되기 십상이에요. 아마 ‘순화’보다는 ‘표준화’라는 용어가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끓어오르는 중심이 하나이지만 시간이 지나 완전히 부글부글 물 전체가 끓어올라 카오스 상태가 되면 끓어오르는 중심이 여럿인 다중심 상태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언어 환경도 중심이 주변이 되고 주변이 중심이 되어 버린 상황과 비슷합니다. 지금 고교생들은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문자 보내기가 바로 그것이지요. 옛날에는 기자, 학자 등이 글 쓰는 주체로서 활동했으나 지금은 국민 모두가 다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제대로 된 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들의 글은 하나같이 한없는 글다듬기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사색하고 또 사색하여 군더더기 없는 명문을 쓰기 위해 애를 쓴 거죠. 오늘 우리 사회에도 글의 홍수 속에서 어휘 몇 개 다듬는 것보다 바른 문장, 명문을 쓰도록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문 용어의 표준화도 필요한 일이지요. 그러면 일상용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역시 고민이 됩니다.
이영규 현대 사회에서는 ‘국제 표준 선점이 곧 시장 확보’라는 기치 아래 각국이 표준화 활동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정보 통신 기술 분야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곤 합니다. 우리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는 국제 사회의 선두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문인들을 대상으로 전문 용어의 발굴과 표준화 지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츰 전문 용어도 전문가와 일반인의 구별이 없어짐에 따라, ‘표준 표제어’라는 명칭 아래 정보 통신 용어를 순화하는 일도 병행하는데, 현재 약 4100여 개 정도 선정했고, ‘표준 표제어’들을 선정할 때에는 주로 언론이나 관련 단체들이 노력한 결과를 적극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용어보다 미래에 쓰일 용어의 선점이 더 중요한데 우리말은 미래에 쓰일 용어에 대한 창조력이 좀 부족합니다. 그동안 우리말 순화의 노력을 보면 대부분 이미 굳어지거나 한창 사용 중인 용어를 대상으로 하여 반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어의 출현 이전부터 적용할 수 있는 틀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첫째는 원어를 그냥 쓰거나 최소한 한글로 음(音)이라도 달아서 표준으로 삼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구촌표준이동통신(GSM)’보다 ‘지에스엠(GSM)’을 쓴다든가 ‘동영상전문가그룹(MPEG)’보다는 ‘엠페그(MPEG)’를 쓴다든가 하면 더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둘째는 ‘몸짱, 얼짱’ 등을 비롯하여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말의 출처를 따지는 것보다는 이들에게 고유한 우리말을 잘 창조했다는 관점에서 격려를 하면 안 되나요? 셋째로, 이보다 더 전향적인 방법은, 우리의 살 길이 세계화에 있으므로 중국, 동남아 나아가 유럽, 남미 등 전 세계에 있는 각 나라들의 좋은 글과 말 중에서 필요한 것들은 차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빵’이나 ‘아파트’ 등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순 우리말 못지않게 좋은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영어, 일본어의 편중을 벗어나 중국, 인도, 핀란드, 스페인, 뭐든지 우리에게 적당한 말을 찾는 것이 훈민정음 시절로 거꾸로 가는 것보다 더 낫지 않겠습니까?
김하수 이영규 선생님은 국어 순화의 태도가 너무 교조적이면 안 되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린 태도가 기존의 순화 노선이나 기준과 어느 정도 부합하고 합리적인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박영률 오늘 국어 순화에 대한 얘기는 현실 중심으로 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얘기하던 ‘국어 순화’하고는 좀 다릅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이 급격히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윤리적이거나 가치론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생활 때문에, 우리의 존재론적 이유 때문에 변화가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말과 글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말과 글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관계가 ‘일치’에서 ‘분열’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커뮤니케이션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쇄 매체’에서 ‘전자 매체’로 미디어 자체가 많이 변화했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압축하여 다른 시공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인터넷에서의 언어는 글이라도 말에 더 가깝습니다. 이제는 ‘글로 말을 잡는 시대’에서 ‘말로 글을 키우는 시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국립국어원’은 ‘국립국어순화원’이나 ‘국립국어개발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을 글로부터 독립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윤리적 선택에서 ‘순화’를 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그렇게 하기 힘든 환경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훨씬 자유로운 말과 글의 환경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과 글이 자유롭게 쓰이는 환경에서 ‘국어 순화’의 태도는 개방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김어준 저는 그래도 ‘표준화’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소통을 위해서도 ‘부표 (浮標)’54)
부표(浮標): ① 물 위에 띄워 어떤 표적으로 삼는 물건. ② 배의 안전 항행을 위하여 설치하는 항로 표지의 하나. 암초나 여울 또는 침선(沈船) 따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해저에 정치(定置)하여 해면까지 사슬로 연결하여 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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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하수 의사소통의 접점 확대, 즉 공동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국어 순화’ 또는 ‘말 다듬기’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대체적인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김어준 저는 ‘왔다리 갔다리 한다’ 같은 말은 어원을 알려 주고, 우리말 ‘왔다 갔다 한다’와의 차이점을 알고 쓰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왔다 갔다 한다’보다 ‘왔다리 갔다리 한다’고 하면 더 말맛이 있습니다.
김하수 지금 하신 말씀은 어떤 점은 언어 사용자의 자주적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며, 특수한 가치와 감성을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이런 대상까지 모두 다 ‘순화’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좀 피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지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박영률 일본어 투 순화는 일본 식민 지배에 대한 기억, 일본의 잔재에 대한 반발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35년간을 괄호를 쳐서 빼 버리고 싶은 강박 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하네요.
지영서 그래도 ‘벤또’ 같은 일본 말은 ‘도시락’이라고 잘 순화되었잖아요. 진한 남색을 흔히 ‘곤색’이라고 하는 일이 많은데 , 이 말의 순화어는 ‘감색(紺色)’입니다. 그런데 그냥 ‘곤색’이라고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김어준 아니 ‘감색’이라고 하면 먹는 감의 색인 줄로 알지 어떻게 ‘곤색’이 그 색이라고 알 수 있겠어요? ‘감색(紺色)’은 우리말이라기보다는 중국 말이라고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감색(紺色)’이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곤색’이 더 나은 것 같군요.
여규병 ‘곤색’을 검푸른 색이라고 풀어서 순화하기도 합니다. 그게 ‘감색’보다는 더 쉬운 말이지요. ‘곤색’은 ‘감색(紺色)’을 일본음으로 읽은 거예요. 흔히 작고 동글동글한 물방울의 모양을 본떠서 늘어놓은 무늬를 ‘뗑뗑 가라’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점점(點點)’을 ‘뗀뗀, 뗑뗑’이라는 일본음으로 읽은 것에다가 ‘무늬’라는 뜻의 일본 말 ‘가라’가 붙은 거죠. ‘뗑뗑가라’는 다듬어서 ‘물방울 무늬’라고 합니다.
지영서 한번은 방송 중에 어떤 진행자가 ‘잣꾸(잣쿠)’라는 말을 쓰자 옆에 있던 연예인이 ‘지퍼’라고 말을 고쳐 준 일이 있었어요. 요즘은 연예인들도 자기의 말에서 자기의 수준을 평가받는다는 의식을 갖고 있어서 바른 표현을 골라 쓰려는 의식이 강한 것 같아요.
김하수 언어 사용 대중들의 감각이 상당히 다른 것 같아도 결코 모두 다 다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권재일 이제 겨우 처음으로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오늘 토론이 열띠다고 봅니다. 저는 국어 순화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먼저 국어 순화의 목표를 확인해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국어 순화의 목표로서는 ‘언어의 기능’과 ‘언어의 정신’, 둘을 들 수 있는데 둘 다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언어의 정신’이라는 목표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었다고 봅니다. 우리의 정신을 이어온 우리말, 우리 토박이말만 가려 쓰자는 정신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쉽게 호응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국어 순화의 목표를 이제 ‘언어의 기능’인 의사소통의 원활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된 일본어 투 표현도 ‘언어의 정신’을 강조하면 매우 엄격해질 것이며, ‘언어의 기능’을 강조하면 좀 더 느슷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국민 대다수가 순화된 말을 잘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민 모두가 쓰고 있는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순화하여 쓰라고 하는 것은 국어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말의 의사소통의 효과를 높이는 데에 순화의 초점을 두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국어 순화의 주체는 ‘국어연구기관’이나 ‘국어학자’였습니다. 그간 수천 단어를 순화했지만 성공한 단어는 얼마 안 됩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도입된 것이 일반인들의 의견을 들어 순화하는 국어원의 ‘말터’55)
국립국어원과 동아일보, 동아닷컴, 케이티(KT)문화재단 등이 협력하여 운영하는 ‘모두가 함께 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말터 사이트(www.malteo.net)]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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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형식으로 1년간 운영된 ‘말터’를 지켜볼 때 외래어 순화 결과가 그렇게 성공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모든 외국어,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꿔 보려는 경직된 접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모두가 ‘웰빙’을 쓰고 그리고 그걸로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다면 ‘ 참살이’로 순화하기보다는 ‘웰빙’을 수용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국어가 사회성을 획득하기 전에 우리말로 순화하는 것입니다.
여규병 실패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현재 참여자의 수가 적은 편인 데다 들쭉날쭉한 것이 문제입니다. 다만 좀 더 치밀하게 운영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누리꾼(네티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말들부터 순화 대상어로 선정하고 최소한 한 달 전에는 예고해 줄 수 있는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또 순화 대상어가 주로 쓰이는 관련 업계 등에 사전·사후에 지속적으로 홍보해야 할 것입니다. 주로 사용하게 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죠. 예를 들어 ‘네티즌’을 순화할 때 인터넷 등 정보 기술 관련 업체들에 미리 알려 그쪽 관계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자는 얘깁니다. 또 ‘누리꾼’으로 결정된 뒤에도 관계자들에게 이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권하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재원 우리가 언어 현실을 잘 모릅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사고의 도구로서의 언어라는 면도 있으나 감정 표현 도구로서의 언어라는 면도 있습니다. 감정 표현 도구로서의 언어라는 면에서 볼 때는 순화어가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때가 있어요. ‘쓰레빠’나 ‘왔다리 갔다리’ 같은 말도 그렇게 볼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혼동이 없을 때까지 끊임없이 대화하여야 합니다. ‘순화’는 저러저러한 말 대신 이러이러한 말을 써야 된다고 죽 목록을 열거하면서 그 모두를 다 강요하는 방식은 효과가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순화 대상을 대폭 좁혀서 도저히 써서는 안 되는 말의 목록을 뽑아 그런 말들은 가지치기를 해 나가는 방식을 도입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국어 순화’의 전반적 홍보 방법도 그렇습니다. 언중이 와서 보지도 않는데 뭘 순화하라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어떻게든 관심을 가지고 보도록 홍보 방법부터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지영서 저희 KBS 한국어연구회가 제공하는 ‘바른 말 고운 말’ 포스터에서도 “이런 쪽으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을 많이 게시하는데, 직원들의 호응이 좋은 편입니다. 대개 몰라서 틀리게 쓰지, 알고 나면 바른 표현을 쓰려고들 합니다.
유재원 ‘졸라’를 ‘아주’로 바꿀 게 아니라 이럴 때에는 쓰면 안 된다는 걸 알려 줘야 합니다.
김하수 지금까지 여러 의견이 나왔습니다만, ‘국어 순화’도 언어 구성원들에게 ‘소통’의 기능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소통 채널 (통로)’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국어 순화나 말 다듬기는 ‘어휘 창조’라는 면이 있습니다. 외래어가 들어오는 것도 어휘 창조가 잘 안 되는 불가피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언어로 창조하는 것도 잘 못하면서 외래어를 쓰지 말라고 하면 곤란한 것 같습니다.
이영규 우리글은 약어와 이미지화 기능이 약한 것이 흠입니다. KT, LG, KBS 등은 약어이면서도 이미지화 된 것으로 KT는 더 이상 한국통신이 아니고, LG는 럭키 골드스타가 아닌 글자 그 자체 이미지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하하하’를 ‘ㅎㅎㅎ’로, ‘축하 축하’를 ‘ㅊㅋ ㅊㅋ’ 등 비속어적 의사 전달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말 파괴라는 부정적 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글자나 이미지에 의한 약어 내지는 이미지화의 한 시도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스컴의 올바른 우리말 프로그램이나 국립국어원이 펼치는 ‘우리말 바로 쓰기 사업’, 참 좋은 취지의 사업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린다면 표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젊은 세대가 외면하는 장음, 단음, 띄어쓰기, 사이시옷 등 이제는 다시 봐야 하지 않나요? 시대는 바야흐로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주도권이 바뀌고 있습니다. 사회의 가치가 달라지면 어쩔 수 없이, 국민들의 일상 말이 곧 표준어라 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중국도 복잡한 번자체를 버리고 이보다 간략화된 간자체를 채택했습니다. 한글과 우리말도 국제 사회에서 뻗어나기 위해서는 타 언어와의 교류와 말과 글의 개조를 통해 국제 언어로서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말도 그대로 표현하고 발음할 수 있는 우리말, 우리 글자. 그러기 위해서는 글자의 표현이나 발음 기호, 심지어는 중국의 사성 같은 것들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방면의 전문가도 아닌데 너무 과격하게 또 쉬운 것처럼 말한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박영률 국어 순화의 원칙에 ‘자주성 , 기능성, 정확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중 ‘자주성’은 다른 것들과 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연 과학 , 사회 과학, 생명 공학 등 다양한 전문 분야의 용어가 전 세계에서 만들어집니다.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합니다. 한국어로 언어 자주성을 지키는 것은 국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선 우리말의 원심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단계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국어 순화, 우리말 지키기 등으로 구심력으로 충분했으나 2000년대에는 한국어가 원심력으로 작용하여야 합니다.
유재원 지금 그 말씀은 사고의 도구로서 한국어가 적절한가,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와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퇴계, 율곡 등의 사상을 우리말로 기술해 놓았더라면 오늘날 더 잘 이해될 수 있었을 겁니다. 요즘 대학에서는 교수 업적 평가를 할 때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 200점을 주고, 국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 100점을 줍니다. 이런 편향된 평가 체제는 참 문제가 많습니다. 박영률 사장이 표현한 ‘원심력’이란 바로 우리말로 심오한 사상과 학문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통하리라고 봅니다.
여규병 우리나라 정보 통신 기술이 비약적인 발달을 하여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최고, 휴대 전화 보급률 세계 최고라고 하는데, 그 외에도 세계 최초, 아시아 최초로 개발한 것들이 많은 편인데 그런 첨단 기술과 관련된 주요 개념들이 왜 우리말로는 표현되지 못하는지 아쉽습니다. 의학 쪽에서 ‘한탄 바이러스’처럼 우리말로써 학술 용어로 삼은 경우를 참고할 필요도 있습니다. 경제부총리까지 지낸 어떤 분이 자신이 쓰는 글에서는 ‘경제 기초 여건’이라고 쓰면서도 정작 말을 할 때는 ‘펀더멘털’이라고 해요. 지도층 인사가 ‘펀더멘털’이라고 하는 말을 쓰면 그런 걸 본떠서 일반인들 중에는 또 ‘펀더멘털’이 어떻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니 지식인의 자기 과시욕이 문제가 됩니다.
김어준 우리는 세계와 우리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진출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세계의 문화나 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막으려는 자세가 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부로 진출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려는 것을 막거나 하는 데에 너무 강하게 강박 관념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박영률 언어에 대한 태도로 구분할 때, 국립국어원이나 국어학자들은 ‘언어 전문 주의자’로 본다면 일반 대중은 ‘언어 기능주의자’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반 대중은 자기들이 쓰는 말에 난도질을 하거나 가치 부여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어 전문 주의자의 관점에서는 이 말은 옳고 바르고 품위 있고 저 말은 잘못되었고 틀리고 상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일반 대중은 뜻이 통하는 기능만 완수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김어준 언어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란 일종의 ‘죄책감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반 대중은 흔히 쓰는 말 중에 불필요한 외래어나 외국어를 남용했다거나 규범에 맞지 않는 틀린 말 같은 걸 쓰고 있지나 않나 스스로 마음을 졸이고 우리말을 바르게 쓰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김문오 우리말에 외국어가 많이 쓰이게 되는 것은 우리말 조어법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권재일 선생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권재일 초등학교 국어 교육에서는 현재 쓰고 있는 어휘에 대한 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조어법에 따라 새말을 만드는 일은 ‘어휘의 확충’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국어 교육학이나 언어학에서 어휘의 확충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관련 학계의 학자들은 새말 만들기와 그 방법 연구를 소홀히 한 것이 문제입니다. 조어법 연구에서 새말 만들기 연구를 경시해 왔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이제는 국어 정책 분야를 관련 학자들이 학문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어 정책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국어 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국어 순화 방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중요한 것이 바로 ‘연구’입니다. ‘국어순화론’, ‘국어정책학’ 같은 학문이 수립되고 여기서 훌륭한 업적이 많이 나와야 일반 대중이 잘 수용할 수 있는 순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국어 순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현재까지를 반성해서 앞으로 어떻게 잘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통해서 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것에는 ‘정신, 문화의 힘’, ‘정치, 경제의 힘’도 중요합니다. 교육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것이 언론의 구실입니다. 근래에 각 방송국마다 ‘바른말 고운말 관련 프로그램’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어 순화를 위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봅니다. 그런데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것까지 규제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것까지 바른 표현은 이런이런 것이라고 일러 주면서도, 그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이어지는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우리말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표현들이 난무합니다. 이는 큰 모순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차라리 ‘바른 말 고운 말 관련 프로그램’을 안 만들어도 좋으니 오락 프로그램에서 우리말을 제대로 좀 써 주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방송과 관련해 덧붙인다면, 아무리 훌륭한 순화안을 부지런히 제시해도 방송을 비롯한 언론 기관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방송 제작자들이 제대로 판단하여 이런 말은 이렇게 쓰자고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방송 출연자들도 잘 따라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국어 순화의 단계를 이렇게 봅니다. 첫째, 국어 교육 전문가를 통해 방향을 제시하는 단계, 둘째, 언론 매체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단계, 셋째, 국력이 신장되고 우리의 정치, 경제적인 영향력이 커지는 단계, 넷째, 국민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자긍심이 향상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누가 외국어를 쓰라고 강요해도 아마도 모두가 우리말을 창조적으로 즐겨 쓰는 상황이 일어날 겁니다.
지영서 KBS에는 1TV, 2TV가 있는데 시청자의 요구 사항도 있기 때문에 오락 프로그램에 공익성을 너무 강조할 수도 없는 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지적을 못해 주는 수도 있으나 일단 바른말, 쉬운 말을 알려 주면 방송 출연자들이 호응하게 되더군요. 가령 우리나라를 ‘저희 나라’로 표현하는 것이 잘못 되었으니 ‘우리나라’라고 고치라고 하면 거의 다 잘 따라 줍니다.
김어준 아무리 순화어를 만들어 봐야 촌스러우면 안 됩니다. 심리적으로 맞아야 쓰입니다.
박영률 일반 대중은 먼저 배운 말을 쓰게 됩니다. ‘펀더멘털’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은 ‘펀더멘털’이라는 용어를 일반 대중이 먼저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요? ‘경제 기초 여건’ 같은 말은 나중에 접하는 말이니까 낯설게 되지요. 국립국어원에서 ‘멋울림’이라는 다듬은 말을 내놓더라도 ‘컬러링’이란 말을 계속 쓰는 것은 ‘컬러링’이라는 말이 먼저 우리에게 익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어 순화를 할 때도 뒷북치면 곤란합니다. 이미 퍼진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기가 어렵습니다.
김문오 지금 예를 드신 것들과 반대되는 사례로 ‘줄기 세포’라는 용어가 있잖습니까? 최초 명명자가 주체 의식을 지니고 전문성을 갖고 잘 만들어야 합니다.
박영률 ‘줄기 세포’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린 황우석 박사도 이 개념은 영어로 된 책에서 받아들였을 겁니다. 한국에 이제까지 없었던 개념이라면 외국을 통해서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김문오 어떤 전문가가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가장 적확한 말로 명명을 해 준다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나 그 학문의 초심자들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개념에 대한 용어든지 최초로 쓰는 사람이 잘 선택해서 써야 합니다.
권재일 국어 순화의 두 영역 중 비속어 순화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래어는 외래 문물의 유입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니 외래어 순화 문제가 더 어렵습니다. 가령 앞서 언급된 ‘줄기 세포’라는 그 말 아닌 원어가 무엇인지 일반 대중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올 때 최초로 이름짓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의식, 식견과 전문성을 가지고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놓쳐 버리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제 사회가 도와줘야 합니다. 첫째 교육이 도와줘야 하고, 둘째 언론 매체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일반 대중들이 즐겨 보거나 관심을 가지는 프로그램일수록 이 같은 올바른 국어 사용에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외국어, 외래어의 순화에는 이러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박영률 우리가 과학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외래 문물을 ‘도입’해야 하는 면이 분명히 있고 또 주체적이고 건전한 문화를 형성하려면 외래 문물에 대한 ‘검증’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입’과 ‘검증’ 중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권 교수님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권재일 외래 문물 수용이 우리 힘을 키우는 데 꼭 필요하다면 저는 ‘도입’과 ‘검증’ 중 ‘도입’을 택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도입은 불가피한데 너무 급격히 많이 들어와서 검증이 못 따라간다면 우선 도입하고 나중에 힘닿는 대로 검증해야 할 것입니다.
여규병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가 연상되네요. 의사 단체에서 어려운 의학 용어를 쉽게 풀어서 새로이 정한 바 있습니다. ‘골다공증’을 ‘뼈엉성증’으로, ‘갑상선(甲狀腺)’을 ‘목밑샘’으로, ‘전립선(前立腺)’을 ‘전립샘’이라고 고친 것이죠. 그래서 신문에 쉬운 용어를 써 왔습니다. 그런데 의학 관련 단체와 공동 기획으로 쓴, 전립샘 질환에 대한 기사에는 모두 ‘전립선’으로 돼 있었습니다. ‘전립선’은 써도 ‘전립샘’은 못 쓰겠다는 의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최근에는 기사에서 ‘전립샘(전립선)’이라는 형식으로 약간 후퇴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처럼 언론에서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영서 예, 맞아요.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여규병 ‘로드맵’이나 ‘태스크 포스’ 같은 외국 말을 대단한 무엇이나 되는 것인 양 정부의 정책 용어로 즐겨 쓰는 것도 문제입니다. 순화하는 곳 따로 외국어 남용하는 곳 따로인 것도 문제입니다. 심지어 ‘선착장’은 일본식 한자어이니 ‘나루, 나루터’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관공서에서 정작 보도 자료를 낼 때에는 ‘나루터’를 외면하고 ‘선착장’을 쓰는 걸 보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김하수 정부 안은 물론이고 언론계와 학계의 유기적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유기적 관계가 잘 맺어져야 국어 순화가 국민의 호응을 더 널리 받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오랜 시간 열띤 토론을 벌이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