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감화원 설치, 5백여명 소년들 입소 억압과 강제노역, 배고픔에 탈출하다 대부분 희생
아직도 시신 발굴 안된 채 관계당국 '나몰라라'
역사적인 세심한 고증 통해 진상규명이 '시급'
최근 관광지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안산시 선감도에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설치된 청소년 감화시설인 '선감학원'의 청소년들이 수없이 희생돼 매장됐다는 주장이 최근 불거져 발굴작업을 비롯, 역사적인 세심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시민들은 안산시와 경기도 등 관계기관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해야 하지만 아직도 실체파악을 외면하고 있다며 태도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향토사가 및 지역주민들에 따르면 선감도의 '선감학원'은 일제시대인 1942년, 일제가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을 발표하면서 건설하기 시작했고 조선총독부는 선감도에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의 대부분인 4백여명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16가구의 70여명을 남겨놓았으며 이때 '선감학원'에는 5백여명의 10세~18세 소년들이 입소했는데 당시 수용대상자가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지와 격리시켜 소년들을 중범자 취급을 해 강제노역과 사망에 이르는 폭행, 고문과 같은 인권유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중에는 어린나이에 독립을 꿈꾸는 소년들도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혀 선감학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향토사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1943년 당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2년여년 동안 선감도에서 생활했던 일본인 이하라씨는 최근 회고담에서 "당시 눈으로 보이는 육지는 불과 300m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소년들이 선감학원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했지만 물살이 빨라 대부분 익사하거나 육지에 닿았다 하더라고 곧 잡혀왔다. 물론 잡혀 와서는 지하실에 감금되어 잔혹한 벌을 받았다. 이에 학원에서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작업복을 입히고 저녁에는 탈출할 수 없도록 벌거벗긴 채로 재웠다"고 전했다. 선감학원이 부랑소년들은 감화, 교육하겠다는 목적은 거짓이었고 실제적인 목적은 어린 소년들의 독립의지를 말살시키고 나아가 일제의 전쟁 총알받이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 향토사가들의 주장이다. 무수히 많은 소년들은 탈출을 기도하다 죽거나. 구타와 영양실조로 죽고, 또한 굶주림에 초근목피를 씹다가 독버섯류를 먹어 죽는 경우, 학대와 고문 등 수많은 이유로 희생되었고 그 시신은 인근 야산에 아무렇게나 매장돼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감학원은 해방이후 1946년 2월1일 경기도로 이관됐고 1954년 새 건물을 지어 부랑아 수용시설로 1970년대 말까지 존속됐다. 안산시는 1999년 선감도 소년들의 시신을 수습하기로 계획하고 위령탑까지 설계했지만 착수 단계에서 위령탑을 설계하기로 한 모대학 교수와의 의견이 엇갈려 모든 계획이 무산된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안산향토사연구소 관계자는 "현재 선감학원은 비참했던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 역사전문가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며 "이는 분명 가슴아픈 역사로 인정받아야 하며 시신도 빠른 시일내에 수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감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 주민도 "괴담까지 돌고 있어 주민들은 시의 빠른 수습을 원하고 있으며, 소년들의 안타까운 넋도 위로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안산 시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