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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文化를 찿아서-건축가협회 전통 건축답사
최 상 대 <대구건축가협회 부회장/ 영남대 겸임교수>
새봄의 계절에 회색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묻혀있는 전통건축문화 유산을 보고 느끼고자 향하는 발걸음인 <건축가협회 전통건축답사>는 건축가협회가 연중 처음 시작하는 오프닝 문화행사이다.
여느 행사들은 공식적인 분위기에서 경직성과 참여에 대한 의무감을 가질 수 있어나 전통건축 답사는 주말 봄나들이 떠나는 가벼움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데에서 해를 거듭할수록 참여회원이 증가하고 있다.
올해의 답사코스는 충남 예산지역의 수덕사, 추사 고택, 한국 고건축박물관을 중심으로 기획하였고 대구에서 하루일정으로는 다소 먼 길이다.
그동안 건축가협회 행사로 진행해오다가 5년 전부터 건축학회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기획, 준비는 ‘건축역사분과’와 ‘구조기술분과’에서 전담하고 있다.
대구에서 하루 동안 답사할 수 있는 코스는 거의 섭렵한 터라 해를 거듭할수록 답사지 선정에 고심을 거듭, 여행거리가 점점 멀어져서 출발 시간을 당겨야하고 도착시간은 점점 늦어져서 언젠가는 1박2일을 고려해야하고 대절버스를 늘려야하는 발전적 현상은 집행부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토요일 이른 아침 어린이회관 입구광장에 모여드는 회원들의 모습은 모두가 가볍다. 등산복에 렌즈카메라, 스케치북으로 지참한 모습들은 사무실 연구실 강의실의 일상에서 탈출하여 하루라도 신선한 자유를 누리고픈 생활인의 모습이 전해진다.
여행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떠남과 만남이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성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며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대상을 대면하는 것이다.
떠나지 못한다면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곳의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든 그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은 그 땅의 최선이었고 그 세월의 최선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신영복의 <더불어 숲>에서-
8시 조금 지나 출발- 45인승 리무진 버스 정원에 42명이 참가했으니 수지분석으로는 알찬 운영인 셈, 평소 승용차 운전석에서만 보아오던 신천의 풍경과 도시의 모습도 리무진의 높은 좌석에서 내려다보는 오늘은 새롭다. 조금 다른 시선의 높이에서도 세상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마음의 눈을 조금만 달리하면 세상의 모습 사람의 모습이 새롭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여행의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는 마르셀 푸르스트가 말이 생각난다.
대전 근처서 부터 고속도로는 정체되기 시작, 천안에서 서해안으로 향하면서 더더욱 느려지는 차량속도는 오히려 주변의 생경한 풍광을 감상하고 카메라에 담기 적절했고 경상도와 다른 충청도 산하(山河)를 스케치해보는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서해에 가까워질수록 산의 굴곡은 점점 낮아지고 어느 듯 아스라한 지평선으로 바뀐다, 지평선은 곧 수평선이 되고 잔잔한 바다의 화선지 위로 드디어 힘찬 구조물이 나타난다.
평택 신항(新港)과 서해대교(西海大橋)- 인간이 만든 위대한 mega structure도 지평선과 수평선의 자연을 배경으로 보면 작은 점, 가냘픈 선에 지나지 않는다.
동북아 시대, 서해안 시대 서막을 여는 서해고속도로와 서해대교, 평택 신항을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잔잔한 서해안 화폭에 새롭게 힘찬 획을 그은 장관(壯觀)-
서해대교를 지나며 새로운 경관을 감상하는 짧고도 아쉬운 여운을 뒤로하고 나니 곧바로 휴게소- 콘크리트 인공 대지위에 조성된 거대한 주차장도 빈자리없이 꽉 찬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서해안 레져 관광시대를 먼저 실감-. 커피마시며 서해대교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고 휴게소 곁에 기념박물관도 있었으나 시간부족으로 여유 가지지 못함,
주차장을 빠져 나오니 휴게소주변의 북새통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도로를 지나자 놀이동산에 있을법한 건물모양과 주변의 환경보며 옆자리 이교수님 한탄 -이런 건물을 누가 설계 했노, 박물관은 와 또 저렇노-. 어디 가나 우리 건축가들의 눈살, 등살에 온전하게 배겨날 건물이 한국 땅에서 몇이나 될까?.
개발만능의 시대에 개발논리로 얼렁뚱땅 세워지고 지워진 건물들은 두고두고 사람의 입방아에 무척 피곤할 것도 같다.
<匠人의 정신 - 고건축박물관>
충청남도 덕산면 산기슭에 터를 잡은 <한국고건축박물관>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1960년대부터 전국을 돌며 유명사찰 문화재 고건축 공사로 잔뼈가 굵은 이 지역 출신 대목장(大木匠, 중요무형문화재 74호)인 전흥수 관장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박물관이다.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건축의 역사와 체취를 느낄수 있는 <한국고건축박물관>98년 사재 100억원을 들여서 2002년에 완성하여서 일반인들에게 문화재 사랑정신을 고양시키며 전통건축 기능인 양성교육과 연구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외부에 실물크기의 전통양식 건물 3개동과 실내에는 우리나라 주요문화재 목조건축 양식의 축소 모형(10%-20%)을 제작하여 시대별, 양식별로 분류전시하고 있어 명실 공히 전통목조건축의 박물관이요 산교육장이라 하겠다.
전문적 해설이 필요한 전시관이라 여성 학예연구관이 열심히 설명하다가 심상찮은(?) 질문 공세에 건축전문가 관람객인줄 눈치 채고 나서부터는 해설이 어눌해지고 말았다.
평소에 전통 절집에서 처마와 외부에 드러나 있는 형태만 쳐다보는 간접적 체험에만 머물다가 목조건축 내부구조의 형태와 구성미를 눈앞에서 만져보고 확인 할 수 있는 새로운 체험의 기회였다.
박물관 마당을 벗어나오며 안타까운 생각들- 개인의 일생을 바쳐서 전 재산을 투자하여 피땀으로 조성한 시설들을 많은 사람들이 견학하고 활용했으면-, 적자운영에 대해서는 정부가 충분하게 지원하고 발전시켜야 제2, 제3의 문화시설과 공간이 생겨날 것인데.....
<愛憐의 뒤안길 - 수덕여관>
사하촌(寺下村) 토속 산채한정식 식당에서의 동동주 한잔 없으면 분위기가 맹숭맹숭하고 여정이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본게임 답사시간을 조금씩 줄이더라도 화기애애한 주안상 분위기가 답사행사의 추억을 뚜렷하게 한다는 것을 집행부는 잘 알기에 결국 점심시간도 예정을 한참 넘기고 말았다.
수덕사 입구 일주문 바로 왼쪽에 수덕여관의 자리이다.
현대 미술계의 거장 古巖 이응로(1904~89년) 畵伯이 한때 작품 활동을 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여류 화가인 나혜석(1896~1946년)이 5년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한 '근대 미술의 현장'이다.
여류시인이었던 일엽 스님이 실연 후 이곳 수덕여관에 머물다 만공스님을 만나 수덕사로 출가를 했으며 이응로 화백이 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뒤 이곳에 머물며 뒤뜰 너럭바위에 추상문자로 세긴 암각화 2점은 변함없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화백의 부인 박귀희 여사가 2002년 세상을 떠난 뒤 방치돼 있다가 지난해 수덕사가 매입, 전시 공간과 템플스테이 장소로 만드는 공사 중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해 12월 수덕여관을 '보존해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집과 장소를 되살려 복원하는 역할은 당연히 지역자치단체에서 해야 하고 대구에서도 최근 이상화 고택(李尙和 古宅)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지상에 논란이 되기도 했음을 기억한다. 문화 예술의 흔적들은 당연히 역사적 유산으로 보전되어야 하고 문화상품으로 개발 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대학시설 이곳 수덕여관 초가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고암선생의 작품바위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새벽안개 어스럼녘에 새벽 예불 보러 절에 올랐던 먼 추억이 있었다.
나중에 靑馬 先生의 시를 읽으며 문득 수덕여관 마당의 바위를 연상하였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
아예 愛憐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億年 非情의 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 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 -
<木造建築의 美學- 수덕사 >
봄날의 사찰은 아무래도 산만하여 운치가 없다.
흐트러지게 만개한 벚꽃은 고즈녁 해야 할 절간 분위기에는 맞지 않는 것 같고-,
일주문에 이르는 구도적, 과정적이어야 할 길은 꽃구경 상춘객으로 호젓함이 사라져 버리고-,
절 마당은 일찌감치 준비한 초파일 연등이 초등학교 운동회 만국기 마냥 빽빽하게 뒤덮어서 중후한 탑의 기품과 대웅전 지붕 처마선을 가려 버리고 말았다.
여유롭던 절마당 공간에는 콘크리트 청기와 사찰이 계속 들어서고 정체불명의 중국풍 불상과 커다란 자물통을 채운 스테인레스 불전함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원래의 오묘한 사찰의 축(軸)은 사라지고 세월이 갈수록 비움은 없어지고 채워지기만 한다.
새로이 만든 석등(石燈) 석축(石築) 화강석 때깔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고색창연할 것인가?.
이제 와서 고사찰(古寺刹)의 분위기 운운한다는 것은 시대의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풍경소리에 꿈이 놀란 듯
작약꽃 두어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희한 탑 그늘에
천 년 세월이 흘러가고, 흘러오고....
아, 모든 것
속절없었다.
멀리 어디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 김달진의 시 <古寺>-
예산수덕사(대웅전, 국보49호)는 백제 침류왕 때 창건설(358년)이 있으나 현재의 가람 형태는 고려후기에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초기건축물은 기록이 명확치 않고 앞으로도 새로운 기록과 학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族譜는 봉정사 극락전 - 부석사 무량수전 - 수덕사 대웅전으로 이어지며 고려시대의 초기 목조건축물은 불과 10여 채도 남아있지 않다.
목조 초기양식인 주심포, 맞배지붕의 건물은 다포형식 팔작지붕으로 발전한 후기의 건물양식에 비하면 화장끼 없는 옛 시골 처녀처럼의 담백 순수미를 지니고 있다.
대구 근교의 500나한이 있는 은해사 거조암을 가서보면 오리지널 단순 간결미의 진수를 느낄 수가 있다.
수덕사는 한국건축의 특성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조형미와 치밀한 구조미를 보여주는 고전양식의 대표작일 일컫는다.
목조건축의 육중한 量感과 입면비례, 수공예품에 가까운 세부구조의 섬세함은 백제전통적건축적 특성과 조형의식의 계승으로 평가된다.
개인적으로 수덕사의 백미(白眉)를 꼽으라면 측면에 노출된 목구조와 벽면이 보여주는 柔軟性과 强健함의 조화라고 생각한다. 몬드리안의 구성, 꼬르뷰제의 모듈, 아르누보의 곡선, 황금분할에도 비교될 수 없는 한국적인 비례감, 구성미, 색조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려오는 길 일주문밖에는 人體(?)와 닯은 고목이 애교스럽게 배웅을 하고 있으니 잘 살펴보시길,,,,
<人文學의 숨결- 秋史 古宅>
추사고택은 충청지역 사대부 전통주거의 건축학적 원형(原型)을 견학하는 목적과 함께 조선후기 실학자, 서예가, 문장가로서의 추사 김정희의 삶이 담겨진 인문학적 분위기를 교감한다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이 1750경 53칸의 양반 대갓집으로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34칸이 남아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행랑채 곳간으로 구성된 99칸이마당을 둘러 있었다고 한다.
좋은 풍수지리환경에 자리하고 있고 좌향(坐向)은 동향이나 사랑채는 남향으로 특이한 배치이며 충청도지역에서는 드물게 안채는‘ㅁ’자 평면이며 사랑채는‘ㄱ’자 평면으로 구성되어있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안채 중정의 폐쇄된 공간감은 대청마루를 거쳐 뒷산으로 개방감을 유도하고 있다.
추사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34세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서 기거하였으니 그의 삶과 학문이 성장한 터전이며 주택 곳곳의 현판과 주렴의 글귀들 속에는 추사의 소박한 생활과 고매한 생각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 느낄 수 있다.
그가 25세때 청나라 연경(燕京)에서 가지고 온 백송의 씨는 수령200년을 넘기며 천연기념물로 ‘예산의 백송’으로 지정되어있다.
고택 왼편에는 추사 부부의 합장묘가 있고, 오른편에는 화순옹주 부부의 합장묘가 있어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이 한곳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고택은 한때 타인에게 매도되었다가 박정희대통령시대에 유적 정화사업으로 문화재로 지정하며 복원이 되었다.
추사체를 완성한 詩, 書, 畵, 刻에도 능통한 추사는 인생의 영욕만큼이나 글과 그림은 변화무쌍하여 졸(拙)하기도 하고 교(巧)하기도 한다.
평안의 시기의 글들은 살이 올라 기름지고 풍요로워서 헨리무어의 조각 같이 보이다가 유배 시절의 글과 그림에는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기름기 빠지고 건조해 보이는데 특히 歲寒圖에서 절제의 극치를 보인다고 생각된다.
55세 제주도 귀양지에서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여 그려준 세한도(歲寒圖)- 마른 갈필로 그린 삭막한 주변, 소나무, 소박한 흙집에서 냉기가 전해지며 최소의 구도와 글귀로서 최대의 깊이와 품격을 내타내고 있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㨄)‘ - 어려운 歲寒의 시절에도 올곧은 松柏의 기질을 잃지 않아야한다는 논어(論語)의 문귀(文句)는 추사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이기도 한 것 같다.
인근 주변의 개심사, 해미읍성, 서산 마애불, 그리고 서해안 낙조를 조우(遭遇) 못하는 아쉬움은 훗날로 미루고 귀로(歸路)에 오르다. 11시 넘어서 대구에 도착, 너무 늦은 시간으로 뒷풀이는 생략하다.
- 여행은 그 햇살, 그 풍경, 그 느낌의 온도를 오래 간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 여행은 마음의 눈길로 본 풍경의 소중함을 깨닫는 마음이다.
-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일상은 늘 새벽처럼 신선하고 바람처럼 청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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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아트포럼 10호 게재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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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8년? 아트포럼 게재글, 컴 정리하다가 올림니다.
깊어가는 겨울밤에 잠시 머물럿다가 가는 시간들이 아깝지 않는 밤입니다~.^
좋은시 감상하며 ..
속절없다 덧없다 이런 말들이 와닿는 밤입니다~
저도 시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시와 함께 하는 수덕사, 추사 고택, 고건축박물관... 건축가의 시선을 따라 禮山의 文化를 답사하고 나니 이 아침이 그윽해집니다요. 새벽처럼 신선하고 바람처럼 청명한 새로운 일상을 위해 여행 한번 해야겠어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