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 여름의 광란
상황(1) 07시 50분 - 돌격 준비
26번 버스에서 내렸다.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서 해방된 것이다. 날마다 시달리는 등교에 이미 이력이 났건만 오늘 아침의 등교는 고역이었다. 구정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듯 온 몸이 스물거린다. 덜 마른 속옷을 입은 느낌이라면 차라리 상쾌하기나 하리라. 아침부터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천주산에서 불어 내리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알 수 없는 새로운 힘이 전신으로 불끈 솟는다. 쌀 반말 무게의 책가방 끈을 힘주어 잡고 나는 비탈길을 오른다. 아무리 뺄 것 빼고 최소한의 무게로 줄이지만 가방의 무게는 줄지 않는다. 도시락의 무게는 어머니의 정성과 비례한다. ‘너만한 나이 때가 한창이다. 많이 묵어야 쓴다.’ 커다란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담는 어머니의 정성, 차마 거절할 수 없다. 두세 개의 반찬 통도 가득가득하다. 교과서와, 늘어나는 참고서의 무게로 가방은 늘 만원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방은 날로 부피가 늘어나는지도 모른다. 학교로 오르는 비탈에는 등교하는 학생들로 꽉 찼다. 역류하는 인파의 홍수, 바쁘게 바쁘게 출렁거리며 오른다.
교문을 지나자 거대한 시멘트의 우람한 건물이 언덕 위에 서서 겔겔 웃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교사의 유리들이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다. 게시판 앞을 지나자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글자 세 마리, ‘123’. 디데이가 일백이십삼 일 남은 것이다. 한 마리 한마(汗馬)가 되어 앞으로 넉 달의 강행군, 디데이를 향해 달려야 하는 것이다. 방학도 없이 과외 보충수업으로 등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더위를 이기는 끈질긴 인내와 투지를 닦기 위해 멀고도 아득한 돌격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실로 들어서자 일찍 온 급우들이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다. 가방을 책상 위에 놓자 말자 나는 세면장으로 달려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면장은 만원이었다. 약간의 물을 수건으로 찍어 얼룩진 얼굴의 땀을 닦아 낸다. 몇 분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상기된 얼굴의 열기를 식히며 천천히 교실로 향한다. 하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곧 1교시 보충 구업이 시작될 것이다. 돌격 준비는 이상 없는가. 오늘의 더위 앞에 결코 나는 질 수 없다.
상황(2) 10시 50분 - 활활 타오르고 싶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3교시가 끝났다. 휴식 시간이다. 성급한 급우 몇몇은 벌써 반찬 내를 풍기며 도시락의 뚜껑을 열고 점심들을 먹고 있다. 저 왕성한 먹성을 말릴 자 누구인가.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먹은 만큼 힘써 공부해라.’ 어머니의 다정한 음성이 귓가에 와 닿는 듯하다. 나는 연습장을 내 편다. 어느 한 페이지를 읽는다.
교복 자율화 이후 운동화와 청바지가 학생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 논술하라.
튼튼한 운동화가 골고루 있다. 디자인도 다양하다. 운동화의 끈을 단단히 매고 우리는 강행군할 것. 타이거, 방방, 프로 스펙스, 아식스, 미즈노, 나이키, 까발로, 슈레진저, 워크엔드, 아디다스, 월드 컵, 페가수스, 콜카, 죠다쉬, 프로젝트, 블턴, 레오파드, 스펙스, 무스탕, 카미드, 퓨마, 아티스……. 가볍고 멋진 태깔, 질기고 발 편한 운동화를 고르자. 갑자기 쏟아져 나온 상표의 홍수, 우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어떤 운동화의 의미도 이젠 가치가 없어졌다. 수 없이 튀어나오는 운동화의 이름에 박수하자. 운동화 한 켤레 만드는 데도 기술 제휴를 해야 하는 이 나라 신발 산업이 슬프다. 코쟁이들의 꼬부랑말에 미친 상혼, 신발공장 사장아, 엿먹어라. 영어 단어 하나 외우는 데도 진땀 빼는 우리들인데 운동화 이름까지 외워야 하는 이 슬픈 숙명이라니. 기뻐하세, 찬양하세. 그리고 약간은 슬퍼도 해야지.
뱅뱅, 써지오, 바렌테, 조다쉬, 에트윈, 레비스, 캐논, 에라스트, 캘빈, 클라인, 블랙죠, 제이제이, 블루웨이, 뉴망……. 청바지주식회사 사장, 당신 애국자로군. 자, 외우자, 우리 시대의 불쌍한 청바지 이름을. 학력고사 문제에 청바지 이름도 나올지 몰라. 뉘라 알리. 외워, 외워.
<결론> ① 운동화, 청바지 아무 거나 신고 입기. 이름난 신과 옷 결코 질긴 것 아님.
② 신경 쓰지 말 것. 자율화 물결에 머리 든 상혼. 잡아라, 뚝딱.
보라야, 나는 너의 이름을 불러 본다. 그리운 이름 → 보라, 물보라, 보라매, 보랏빛 소묘. 이 여름 한낮, 지긋지긋한 불 땡볕 속에서도 너의 그 시원한 이름의 이미지. 보라야, 나는 어쩔 수 없이 네 이름을 부르기만 해야 하나? 못 만나는 이 답답, 잊기로 한다. 너와의 약속 지키기 철저 맹세, 맹세, 또 맹세!
나는 연습장을 넘긴다.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무 의미 없이 그저 그린다.
● 이것은 수성 사인펜의 동그라미 자국이다. 흑포도알, 보라, 너의 눈동자 같다. 잊자, 잊자.
창틀로 가 먼 바다를 본다. 숨이 갑갑하다. 자연이 낮게 낀 도시 저 너머로 손바닥 크기 만한 바다 한 자락이 누워 있고, 가까이 운동장엔 흙이 허연 배를 드러낸 채 뒤채고 있다. 흙인들 저 뜨거운 햇빛에 편하게 누웠을 수 있으랴. 바다와 도시와 낮은 산들이 햇볕 아래 한 무더기로 푹푹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 오르는 환시 현상을 느낀다. 나도 저 속에 뛰어들어 햇볕에 활활 타오르고 싶다. 운동장에서 뜨거운 바람 한 무더기가 훅 끼쳐 든다. 슈베르트의 뻐꾸기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시작 시간임을 알린다.
상황(3) 11시 45분 - 금강산 식후경
선생님의 말씀이 메말라 있다. 선생님의 손수건은 이미 물걸레처럼 젖어 있다. 그 손수건으로 선생님은 연신 이마로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고 있다. 계체량 통과를 위해 한증탕에서 땀을 빼는 권투 선수들도 뚱보 영어 선생님처럼 저런 수고는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러닝 셔츠도 땀 투성이다. 교탁 바로 옆에 앉은 두 녀석은 선생님의 땀 흘리는 모습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책받침으로 펄럭펄럭 부채질하여 바람을 선생님께 보내고 있다. 학생도 선생님도 이 더위를 잘들 참아 내고 있다. 대부분의 급우들은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있지만 그것도 사실은 물걸레나 다름없다. 간 큰 아이들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아예 허리띠를 풀고 앞 자크를 열어 놓은 채 샅에다 부채질이다. 문제지의 영어 알파벳 글씨가 개미떼처럼 꼬물꼬물 기어가는 착각을 이따금 느낀다. 나는 꼼짝 않고 말씀을 들으며 문제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간을 요리했다.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참으로 거북살스러웠다. 머리 속에 무조건 채워 놓고 볼 일이었다. 잊어 버려도 하는 수 없었다. 맑은 정신이 들면 다시 한번 점검하기로 하였다.
뻐꾸기가 운다. 반가운 울음이다. 4교시도 끝났다. 오늘의 공식적인 수업은 끝난 것이다. 모두들 서로 축축한 가슴을 내밀며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오후 세시까지 자유시간이다. 중식 후 시아스타 시간이 있다. 급우들 대부분은 떠들며 밖으로 나간다. 교문을 벗어나 분식집으로, 또는 하숙집으로 갈 것이다. 더러는 교내 매점으로 가 시원한 냉국수를 곱빼기로 시켜 먹을 것이다. 그리고는 더위먹은 개처럼 그늘을 찾아 어슬렁거릴 것이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금강산 구경도 배가 차야 할 일이었다. 열댓 명의 급우들이 교실에 남아 점심을 먹는다. 나는 광수랑 기호랑 함께 앉았다. 도시락 뚜껑에다 냉수를 떠놓고 반찬들을 죽 전시한 다음 포크로 밥과 반찬을 찍어 목구멍으로 우겨 넣는다.
“날씨 하나 째지게 멋지다. 팔껏.”
기호가 중얼거린다.
“야, 나는 어제 한숨도 못 잤다.”
광수의 축축하게 젖은 말.
“공부는 안 했을 끼고 와 못 잤노?”
내가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하도 더워 창문을 열어 놨다 아이가. 니거무, 새 한시쯤 뇌니까 옆집에서 사람 살리라 고함 지르는데, 너그덜 알제? 여자 멱따는 소리, 밤중에. 창문으로 넘보니까 시커먼 사내 하나가 인상이야 볼 수 없고 등짝만 보이는데 여자 멱살을 쥐고 밀어붙이고 있다 아이가……. 팬티만 입고.”
물 한 모금 마신 후 광수는 밥을 떠 넣는다. 그리고는 반찬을 밥보다 많이 떠서 불룩불룩 씹는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호가 묻는다.
“그래, 우째 됐노? 그 자석 강간범 아니가?”
입 안의 것을 삼킨 후 광수가 말한다.
“별건 아니고. 지 남편이 술 좀 쎄게 퍼먹고 왔나 봐. 박박 긁자, 철썩 여편네 뺨다구를 치고 와당탕. 밤새도록 싸우는 거 있제? 울고 때리고 발악하고 박살 내고……. 지 옷 확확 다 찢어대며.”
“하하하. 거 신났겠구나. 이웃 하나 잘 둬 많이 배우겠다. 일마, 니도 함께 뛰어들어 빈 냄비라도 두드리며 그 연놈 벗은 꼴 구경하지, 그냥 있었나?”
“야, 말 마라. 신이고 구두고 자시고 배울 게 다 뭐냐. 생각만 해도 그 치들 지긋지긋하다야!”
“참아라, 참는 게 약이다.”
기호의 삭발한 머리가 이제 제법 보송송하다. 삭발의 의미를 기호는 거창하게 늘어 놓았지만, 그의 삭발은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 머리통으로 인한 수난만 뒤따를 따름이었다. 삭발계까지 하지 않고도 중생의 득도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을.
“야, 느그들 점심 먹고 산에 안 갈래?”
별명이 땅꾼인 정우가 도시락을 들고 다가오며 하는 말이다. 그는 아예 반찬을 싸 오지 않는 효성(?)이 지극한 뻔뻔스런 녀석이다.
“밥맛 떨어진다. 가까이 오지 마라.”
기호의 말이다.
“뱀이야 냉혈이라 시원한 짐승이잖아. 피서치곤 댓길이지. 이따 한 마리 여유 있으면 줄께.”
고릴라처럼 생긴 녀석이다. 계란부침 하나를 통째 찍으며 흉물스레 느물느물 웃고 있다. 나는 도시락 바닥을 딸딸 긁으며 밥을 우겨 넣었다. 쥐포 무침을 어금니로 꾹꾹 눌러 씹었다.
“일 없다. 네 놈이나 피서 많이 하거라.”
상황(4) 13시 - 비에 대한 회상 또는 꿈
“원두막에서 멀지 않은 밭 언저리로 사람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가며, 서두르지 않고 유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자 한 사람…….”
책 속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열대의 한낮을 식혀 준다는 그 스콜이라도 한 차례 쏟아져 주었으면 좋겠다. 국어 책을 소설 삼아 읽어보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연습장을 꺼낸다. 표지에는, 시원한 아침 바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다. 사진 속에서 파도는 정지 상태이지만 계속해서 파도 소리와 그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아침 바다 위에 박두진의 시 <해>가 곱게 쓰여 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표지를 넘긴다.
● 이것은 수성 사인펜의 동그라미 자국이다. 흑포도알, 보라의 눈동자 같다. 에라, 잊자.
아까 긁적인 낙서들이 들어온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생각한다. 저지난 주일이던가, 보라를 마지막 만난 날의 기억이. 구름이 진하게 끼어 있던 날이었다.
―난 모의고사를 칠 때 말야, 정답을 골라 가맣게 칠할 때 네 눈동자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거든. 까맣게 칠을 하며 이건 보라의 눈동자다. 틀림없이 이건 정답일 꺼야. 보라야, 맞지? 네 눈은 맑고 티 없어 거짓말을 안 한다. 맞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삼백이십 개의 동그라미, 바로 너의 눈동자를 그려 넣는 버릇이 있어. 그런데 글쎄, 그게 순 엉터리야. 오답이 수두룩하게 나오기도 하거든. 정성이 모자랐나 봐.
나는 생글생글 웃는 보라의 흑포도알 같은 눈동자를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 아이, 너도 참 미련하구나. 그러나 경주야. 이 보라가 그대의 순 엉터리 사실 고백에 오늘 비로소 감동해야 하는가 봐.
― 그래? 하하하. 감동은 자유잖니. 앞으로 감동 많아 많이 해라.
― 이 능청꾼 좀 봐 주지. 호호.
우리들은 한참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보라는 웃음을 거두더니 앵두 입술을 매몰차게 잘끈 깨물고는 청천 벽력 같은 선언을 한 것이다. 무의미한 만남, 무엇엔가 쫓기는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 만나지 말자, 학력고사 끝나거든 만나자고 한 것이다.
― 좋다. 만나지 말자. 네 이름까지 잊어 주마.
내가 말하자
― 얘, 너무 한다. 이름만은 서로 머리 속에 크게 페인팅해 두자.
하늘이 어두워진 줄도 몰랐다. 빗방울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일어서야 했다. 곧 빗줄기가 풀밭으로 내려꽂히기 시작했다. 무성한 잡목들 사이로 빗줄기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뛰었다. 보라의 손을 잡고 뛰었다. 바닷바람이 비를 몰고 달려오고 있었다. 비는 세차게 뿌려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비가 쏟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손을 꼬옥 쥔 채 큰길까지 나왔다. 손을 놓지 않았다. 뛰었다. 비 뿌리는 하늘을 향해 우리들은 빗소리보다 더 크게 웃었다. 우리들의 웃음은 그러나 빗소리에 여지없이 부서지고 흩어져 젖고 말았다. 시원하고 힘차게 취우는 내리고 있었다.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보라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 몇 개가 구슬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다. 창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몰고 버스는 덩컹거리며 바퀴를 굴려가고 있었다. 나는 젖은 보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라는 머리를 내게로 기대왔다.
질식할 듯한 더위에 갇혀 비 오는 날의 회상을 하는 것도 잠시뿐, 한낮의 더위를 떨칠 수는 없었다. 죽자살자 책이나 잡고 늘어지기나 하자.
다음 네 개의 바둑알 중 검은 바둑알의 유전인자를 찾아라. 찾아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만화, 무협지에 열을 올리는 친구. 혈세 천하여 아멘. 주간지 누드 모델의 가려진 신비에 대한 탐구. 형이하학의 유치한 눈요기. 터무니없는 환상에의 질긴 여행.
점심 시간도 이미 지났다. 시아스타나 즐기자. 머리가 지근지근하다. 텅 빈 머리 속에 쌓여 가는 잡념의 거미줄, 잊어야 한다. 내 잡념의 낙서를 잊어버리자. 그로 하여 감당해야 하는 고통가지 잊자. 나는 연습장의 낙서들을 찢었다.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서 의자 몇 개를 가로로 놓고 그 위에 길게 누웠다. 눈을 감는다.
전보. ‘어머니 사망 급래’ 나는 헐떡이며 달린다. 눈물을 뿌린다. 뿌려도 쏟아지는 눈물 속에 허덕거린다. 아,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날 공부시키려 공장에서 밤일까지 하던 어머니가 아니던가. 파리한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 늘어가는 어머니, 아무리 피곤해도 내색을 않으시던 어머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 도시락을 꾹꾹 누러 담으시던 어머니였는데. 어딜 가야 어머니를 찾나. 나는 아스팔트 위로 정신 없이 달리고 있다. 보라가 마주 뛰어오고 있다. 보라가 전보를 쳤단다. 나를 보고 싶어 전보를 쳤단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보라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앞에서 샐샐 웃고 있다. 머리끝까지 타오르는 분노. 마침 굉음을 쏟으며 기차가 달려오고 있다. 나는 보라의 가슴을 힘껏 주먹으로 내리친다. 달리는 열차의 바퀴 아래서 비명을 지르는 보라. 비명은 붉은 피를 뿌리며 쏟아진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꿈이었기 다행이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이 흐른다. 일회용 샴푸를 가지고 세면장으로 간다. 잊자. 수도꼭지를 틀고 머리를 감는다. 거품이 허옇게 일어난다. 허연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나 떨어진다. 아무리 거품이 많이 일어도 내 머릿속의 잡념을 하얗게 씻어낼 수는 없었다.
상황(5) 13시 30분 - 이열치열
누군가 라디오를 켜 놓고 있었다. 경음악 가락이 낮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나운서의 늘어진 음성이 전파를 타고 흘러 나와 조립된다.
“방금 들어온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포항, 대구의 현재 기온이 한시 현재 섭씨 37도 20분을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이크를 대구로 돌리겠습니다. 여보세요, 대구, 대구 나와 주세요.”
“야, 라디오 꺼라.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 어이 스펄. 더럽게 덥다 더워.”
의자 위에 늘어져 누운 한 녀석이 버럭 고함을 쳤다.
“야, 경주. 옷 벗고 나자. 답답해서 미치겠다. 일광욕(日光浴) 한판 벌이자.”
기호가 머리를 털고 있는 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는 빨간 해수욕 팬티를 입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벗은 그의 가슴에 쌀알처럼 돋아난 땀방울들이 더없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바다에는 못 가도 바다를 향한 그리움은 간절한가 보았다.
“그래, 좋다. 나가자.”
벌떡 일어섰다. 러닝셔츠를 벗었다. 짧고 푸른 반바지 체육복만 입은 채 나는 맨발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야, 이 미친놈들아. 미친 짓 하지 말고 뱀이나 잡으러 가자.”
땅꾼 정우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등판을 때린다. 기호와 나는 킬킬 웃었다. 골마루 신장 위에 광수가 길게 누워 있었다. 차가운 타일의 감촉에 도취된 것일까. 일간 스포츠를 한 손에 구겨 쥐고 지긋이 눈을 감고 있다. 선생님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시간이라 한껏 쉬고 있으리라. 그의 풍만한 아랫배가 두꺼비 배처럼 벌럭벌럭 오르내리고 있다. 많이 쉬어라. 이 불쌍한 두꺼비야.
“뛰자!”
기호가 말했다.
“그래, 뛰자!”
내가 말했다.
우리는 현관을 거쳐 시멘트 포도 위로 내려섰다. 갑자기 쏟아지는 일광의 폭포, 우리들은 그 폭포 속에서 축구를 하자는 것이다. 발바닥이 뜨겁다. 타서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운동장으로 뛰었다.
몇 명의 다른 반 녀석들이 운동장을 선점하고 종횡무진 축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도 우리와 비슷하였다.
“차라!“
“그래, 간다.”
나는 공을 따라 질주한다. 땀이 흐른다. 숨이 차다. 헐떡인다. 풋풋, 히히히히. 시험에 대한 압박감도 이 순간만은 잊을 수 있다. 넓적다리는 모기떼의 진수성찬. 밤의 공포, 공포의 모기떼들도 가거라. 찬다.
“바람처럼 뛰자.”
“네가 바람이다! 썅썅.”
“뛰자. 37도의 땡볕, 이 불을 끄자.”
“끄자.”
자, 덨다. 수시로 바뀌는 입시 제도의 올가미, 별것 아니다. 제도 정복의 질주, 질주하는 우리의 이 젊은 뜨거운 피를 보아라. 맨발로 돌격, 먼지 꽃이 핀다. 빙글빙글 돌며 쏟아지는 저 태양의 파편, 분수처럼 흩어지는 빛줄기.
“태양을 보고 찬다. 보라야, 너를 향해 찬다.”
기호의 삭발한 머리통이 땀으로 번들거린다. 놈의 삭발한 머리통을 향해 찬다. 찜통의 불볕 더위, 더위를 잊기 위해 달린다. 담배와 술에 대한 유혹, 유혹을 벗어나려 찬다. 살바도르 달리의 원시의 바다와 시계, 시계처럼 이 몸 흐느적적 녹아내려도 좋다. 온몸으로 흐르는 상쾌한 땀, 차라리 시원하여 한기까지 느껴진다.
기호와 나는 운동장 모서리의 세면장으로 간다. 양동이에 물을 채워 위에서 아래로 붓는다.
“으흐흐흐.”
질겁하는 기호. 킬킬킬, 넉살을 떠는 나. 우리는 서로의 가슴을 애무하며 등판을 민다. 비누칠을 하지 않아도 기호의 등은 풀 향기처럼 싱싱한 체취가 난다. 아름답다.
상황(6) 14시 30분 - 뱀 소동
시아스타 시간도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하나 둘 교실로 찾아드는 급우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감돈다. 광수는 어느 새 제 자리에 앉아 국사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기호는 내 뒤에서 생물 공부에 열심이다. 나도 이제 맑아진 머리로 영어를 복습해야 한다.
“크아 ―!”
복도에서 괴성이 터지는가 하였더니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다. 앞문으로 정우가 뛰어든 다. 그의 목에는 뱀 한 마리가 걸려 굼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도 뱀 한 마리가 S자로 매달려 용을 쓰고 있었다. 집게손가락 크기의 살무사였다. 이웃반 걸물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구경거리 화끈한 게 났다는 것이다. 정우가 교단 쪽으로 가 빈 백묵 통을 열더니 뱀 두 마리를 넣고는 싱글거린다. 녀석의 웃는 꼴로 보아 교실 안은 한 동안 불난 집처럼 북새통이 될 것이다. 바야흐로 그의 뱀장수 타령이 시작되리라.
“야, 버려!”
기호가 버럭 고함질렀다. 나도 후딱 앞으로 나가 정우의 앞을 막아서며 손을 내 밀었다.
“이리 내!”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우는 나를 노려본다. 의외의 방해자에 그도 흠칫 놀란 모양이었다.
“못 주겠다.”
“이래 내. 얼른!”
내가 재차 강하게 말을 하자 정우는 어깨를 움찔하며
“야, 느그들, 우리 경주가 공짜로 뱀을 달랜다.”
응원을 청하는 소리였다.
“살려 줘!”
내가 재빨리 외쳤다.
“살려 주라니까!”
기호가 나의 뒤에서 날카롭게 외쳤다. 기호의 기세에 정우는
“그럼 살려 주지.”
선선히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정우는 백묵통을 연다. 뱀 한 마리를 꺼내려 한다.
“보자아, 요놈 이쁘다. 이리 와, 응?”
뱀을 어르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의 저의가 수상쩍어 와락 그의 팔을 나꿔챘다. 뱀을 교실 가운데로 던질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수작이야. 통째 버려.”
갑작스런 나의 제지에 정우는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입가의 근육이 실룩 경련을 한다. 위기의 순간이다. 그는 지금 나의 거친 제지를 수모로 생각하리라. 그도 나도 이 위기를 서로 모면해야 한다. 정우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올 것임에 틀림없다.
“분위기 흐리지 마.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 이런 짓 하려는 거야.”
그의 앞에 꼿꼿하게 선 채 그의 눈을 노려보며 말의 못을 박았다. 순간이었다. 뱀통을 쥐고 있던 정우가 손을 뗌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크아아 ―. 물 물렸다아. 물물물…….“
정우는 급히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펄쩍펄쩍 뛰었다. 죽는소리 지르는 정우를 뒤로 둔 채 나는 백묵통을 닫아 쥐고 복도로 나가 열린 창 밖으로 멀리 던져 버렸다. 백묵통은 무성한 개망초 꽃 숲으로 사라졌다. 교실은 소란하였다. 정우는 계속하여 뛰고 있었고. 정우가 뱀에게 물렸다는 소문이 복도를 타고 짜 하니 퍼졌다. 나는 차라리 담담하였다. 그런 정우가 고맙기까지 하였다. 나는 정우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한 번 쳤다. 혼을 내 주고 싶었다.
“임마, 선생님 오신다. 계속 이럴 꺼야? 빨리 세수하고 와.”
“썅, 이 새끼가? 니 정말 끝까지 날 가지고 놀래. 뱀장수 체면을 구겨도 유분수지.”
정우의 억센 주먹이 나의 광대뼈에 날아왔다. 나는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펀치였다. 그뿐이었다. 후다닥 복도로 뛰어나가는 정우를 보며 나는 얼얼한 볼을 한 번 쓸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호가 히히 웃으며 수건을 들고 정우의 뒤를 잽싸게 따른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리고들 있었다.
“자, 모두 제 반으로 가요.”
내가 손바닥을 탁탁 치며 말했다.
“짜아씩, 놀랬다 아이가.”
광수가 후훗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자식, 뱀 이빨조차 안 빼고 목에 감고 다닐 놈이야?”
우리들은 모두 큰 소리로 껄끄럽게 웃어댔다.
상황(7) 밤 10시 - 이제부터 시작이다
초저녁의 모기떼도 이제 한 차례 지나갔다. 옥상의 밤바람이 시원스럽다. 멀리 도심의 불빛이 밤하늘의 별빛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머잖아 저 불빛들도 잠을 자리라. 가난도 고통도 모두 잠들리라. 나도 저 지상의 별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올해만 지나면 나도 이 시간쯤에는 저 중의 별 하나가 되어 한껏 인생의 의미를 맛볼 테지. 광란의 여름 하루도 거의 지나갔다. 기호, 광수, 정우 모두 지금은 책 속에 묻혀 문제 풀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이미 한낮의 북새통을 까맣게 잊고 있는지 모른다. 밤 열한시까지 그들은 마냥 저러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 하루,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의 기억도 좋은 추억이 되리.
나는 돌아섰다. 천주산을 향해 옥상 난간까지 걸어갔다. 산을 쳐다보았다. 순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은 거대한 산의 기운이 오락 나의 품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아니다. 내가 그 품에 안긴 것이다. 산은 어두운 밤에도 자지 않고 그 정기를 다스리고 있다가 나에게로 달려 온 것이리. 손나팔을 입에 대고 나는 산을 향해 힘껏 외친다.
“호오이 ― !”
그러자 쿠르릉, 산이 환호하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1984년 여름
경상고등학교 교지 ‘海松’ 9집(1984년 12월1일 발행) 발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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