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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정심이 누나를 다시 만난 것은 거리에서였다. 1987년 6월 10일에서 6월 29일 사이일 텐데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종로 5가쯤으로 기억된다. 시내에서 시위가 계속 벌어질 때이고 날씨가 꽤 더웠으니 6월인데 6.29 선언 이전일 것 같다. 시내로 가두시위를 나갔다가 길모퉁이에서 정심이 누나와 마주친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6월 10일에는 낮에는 지역에서 집회와 시위를 했고, 저녁에는 서울로 가서 민정당 전당대회를 에워싸는 시위를 했었다. 그 뒤로는 주로 서울 시내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흩어지고 다시 모여서 시위를 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종각에서 종로 5가까지 가게 됐는데 어떤 여자 둘이 걷고 있었다. 모습을 보니 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인 듯하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너무 놀라서 멈칫했다. 정심이 누나가 먼저 돌석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신돌석씨도 누나라고 불렀다. 너무 반가우면서 희한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나? 정심이 누나는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왔다가 동생과 함께 시내 나와 본 것이라고 하였다. 같이 있던 여자는 정심이 누나의 바로 밑 여동생이었다. 길에서 시위 도중에 만나는 바람에 이 날은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정심이 누나는 동생 집에 와 있단다. 강동구 어디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연락을 해서 찾아갔다. 서로 대화를 나누던 내용으로 봐서 아마 6.29선언 이후일 것이다. 정심이 누나는 프랑스에서 대학에 들어가고 불문학을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였다. 시간 강사로 나가는데 전임 자리를 얻기 힘들어서 한국에 온 김에 자리가 있으면 알아보려고 한다고 하였다. 정말 대단한 정심이 누나였다.
동생도 대학원에서 서양사 공부를 하면서 시간 강사를 한단다. 정심이 누나가 많이 도와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심이 누나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어른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눈을 감지 못한다고 한다. 정심이 누나의 어머니도 그랬는지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한국으로 가는 데 한 달이나 걸렸는데 그때까지 살아 계시다가 정심이 누나가 도착하자마자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그래 내 새끼 장허다.’였다고 한다. 정심이 누나는 자라면서 어머니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단다. 물론 집 떠날 때도 느꼈지만, 그 뒤로 프랑스 가기 전에 잠깐 보고 한 번도 못 뵀다고 한다. 그때도 어머니는 그저 덤덤하게 몸 간수 잘 하라고 하셨단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내내 정심이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오랜만에 만난 처녀 총각, 연인일 수도 있고 거기에 근접했던 관계일 수도 있는 사이가 꼭 물어야 되는 말이 있다. 지금 결혼은 했느냐 하는 것이다. 정심이 누나는 아직 혼자라고 하였다. ‘아직’이라는 말을 한 걸 보면 요즘 흔히 말하는 ‘비혼’은 아니고, ‘미혼’인 모양이었다. 공부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하느라 연애는 생각도 못했단다. 그런 말을 상당히 힘을 주어서 강조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심이 누나도 이 만남을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신돌석씨는 그때 결혼식은 안 올렸어도 사실상 결혼한 상태였고, 힘찬이까지 낳아서 아이 아빠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정심이 누나가 묻는 말에 아직 혼자라고 하였다. 왜 그랬는지 그 뒤에 생각해 봐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건 커다란 배신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 걸 바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 분위기에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신돌석씨가 아주 개략적으로 자신이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살아온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정심이 누나는 돌석이가 아주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프랑스에서는 노조라든가 파업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데 여기 오니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르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 시위로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정심이 누나가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외국 살다 온 사람답게 프랑스는 어떻다는 말이 좀 거슬렸다.
정심이 누나는 6.29선언이 되어서 아주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제 직선제로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화를 진전시켜 가면 한국도 머지않아 유럽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사실 6.29선언은 그 당시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진영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래서 속이구라고 불렀고, 혁명의 유산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정세 분석을 자세히는 할 겨를도 없었지만 대다수는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신돌석씨 역시 그런 정서였는데 정심이 누나 말을 들으니 괜히 화가 났다. 직선제로 정권을 교체한다는 것 자체가 신돌석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6.10항쟁 시작 이후에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유럽처럼 된다는 등 하는 말은 당시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개량주의로 빠져드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정리해서 정심이 누나에게 말할 능력이 당시의 신돌석씨에게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괜히 트집잡는 사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정심이 누나가 좀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양김씨도 환영하고, 언론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신돌석씨는 양김씨는 정권욕만 있는 사람들이고, 언론이 언제 제대로 된 보도를 한 적이 있냐고 하였다. 정심이 누나가 좀 놀라는 눈치였다. 양김씨로 정권이 교체되지 않으면 무얼 바라냐고 했다. 혹시 돌석이는 사회주의자냐고 물었다.
신돌석씨는 그 질문에 멈칫했다. 자신이 사회주의자인가? 언젠가 조철구를 비롯한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그들은 분명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그 중 일부는 북한과는 다른 사회주의라는 점을 강조했고, 조철구는 그런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애매하게 말하였었다. 신돌석씨는 그냥 듣기만 했었는데 자신도 어느새 사회주의자가 된 것일까?
하지만 정심이 누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판단이었다. 자기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친북도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철저한 민주주의이고, 그 바탕 위에서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고 하였다. 뭔가 비겁하게 말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기에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정심이 누나는 그러냐고 하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동생이 한마디 했다. 그게 바로 사회주의이고, 우리 사회는 분단 현실이 가져다 준 냉전 논리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말을 하기를 꺼려하는데 이제 그걸 자유롭게 말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도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역시 역사 공부를 한 사람다웠다.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은 많은데 신돌석씨는 뭐라고 하기 어려웠다.
[삽화-백소(白笑)]
그날은 그 정도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 뒤 한동안 한국에 머무는 정심이 누나와 몇 차례 만났다. 6.29 이후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있었고, 7월 들어서면서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신돌석씨는 이 공장 저 공장에서 벌어지는 파업을 지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는 대부분 자연발생적인 투쟁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지원이 절실한 때였다. 그런데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서 엄청나게 폭발적으로 투쟁이 확산되었다.
투쟁 지원하러 뛰는 동안에 신돌석씨는 당시 악법인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수배가 되었다. 사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데 집으로 형사들이 찾아왔고, 노동법을 좀 아는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하여서 그런 줄 알았다. 집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주로 아는 노동자들의 자취방에서 잤다. 때로는 파업 현장에서 자는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정심이 누나 동생의 집이었다. 가끔씩 거기 가면 편하게 잘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심이 누나 동생은 13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방이 두 개였다. 신돌석씨가 가면 좀 불편하긴 하지만 정심이 누나와 동생이 함께 자고 나머지 한 방에서 신돌석씨가 자면 못 잘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밤늦게 무작정 찾아갔고 정심이 누나와 동생은 조금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날은 늦은 시각까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 다 책가방 끈이 길어서 아는 것이 많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돌석씨는 새로운 것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는 역시 신돌석씨가 잘 알았고,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러다가 정심이 누나가 요즘 노동자들 투쟁은 좀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 전 국민의 뜻을 모아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중요한데 잘못하면 군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이 말에 반발했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눌려 왔으면 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겠느냐?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투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우려하는 것은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들이 자기 것 잃을까봐 그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정심이 누나를 자극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소부르주아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이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고 화를 냈다.
이야기가 어색하게 되어 가자 동생이 자기는 내일 아침 일찍 강의가 있어서 그만 자겠다고 하고는 옆방으로 갔다. 둘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불편한 나머지 정심이 누나도 자겠다고 하고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뭔가 다른 말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지금 하던 이야기도 어떻게든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았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이었다.
정심이 누나가 이야기를 돌렸다. 어쨌든 신돌석씨를 그렇게 두고 떠난 것이 미안하다고 하였다. 편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있었지만 하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주소를 묻지 않고 간 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후회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렸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신돌석씨가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정심이 누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먼 훗날이 되어서 또 다시 만나지 않았냐고 했다.
정심이 누나가 고개를 돌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아내가 떠올랐다. 힘찬이도 떠올랐다. 신돌석씨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너무 갑자기 놓았는지 정심이 누나가 움찔하였다. 그리고는 일어섰다. 피곤할 테니 어서 자라고 하면서 방을 나갔다. 남은 술을 혼자 마시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어쨌든 지나간 일이다.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삽화-백소(白笑)]
노동자대투쟁이 잦아들자 개헌이 되고 대선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심이 누나는 그 뒤 만나지 못했다. 대선이 끝난 뒤 동생네 집을 찾아갔다. 다시는 안 찾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그 근처를 간 적이 여러 번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그 집 초인종을 누르고 말았다. 마침 동생이 집에 있었다. 뜻밖에 굉장히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신돌석씨가 놀랄 정도였다.
동생 말로는 정심이 누나는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거기서 전임 자리가 생겼단다. 여기 있는 동안 신돌석씨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돌석씨에게 전해 주라고 한 편지들을 주었다. 편지를 읽어 보니 정심이 누나는 대선 기간까지는 한국에 있었다. 고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전라도 출신인 정심이 누나는 김대중을 지지하는 운동을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선 결과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썼다.
역시 한국은 안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단다. 국민들이 일치단결해서 굴복시킨 군부독재의 꼼수에 분열되어서 그들에게 다시 정권을 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정심이 누나는 철저하게 김대중 지지라는 전제에서 이야기했다. 후보단일화, 독자후보 등도 다 어리석다고 하였다. 노동자들도 일단 김대중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데 협조했어야 했다는 것이 정심이 누나의 생각이었다.
정심이 누나처럼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을 비하하고 프랑스는 다르다는 등 하는 데는 사실 거부감도 들었다. 그것보다 더한 것은 정심이 누나가 작심한 듯 신돌석씨에게 한 말이었다. 그것은 사람은 자기 노력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회가 정말 민주사회라고 하였다.
정심이 누나는 자기 노력만큼 보상을 받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에 팔리듯이 집을 떠나서 친척집에서 식모살이 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고 수모를 겪었고, 독학을 해서 검정고시 합격하고 산업체 고등학교를 간 뒤 파리로 떠나서 결국 박사까지 받았다. 한국에서 고생한 것은 신돌석씨가 잘 알지만 파리에서라고 고생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것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이니 그야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될 때 얼마나 무서운지를 신돌석씨는 알고 있다. 공장에서도 고생 끝에 사장이나 공장장 된 사람이 누구나 자기처럼 하면 그 정도는 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그것은 자본가의 착취 이상으로 무서운 것이 되었다. 물론 정심이 누나가 그런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신돌석씨는 그 점에 관해서는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또 자기 노력만큼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사회가 정말 민주사회라는 이야기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심이 누나 생각에는 프랑스가 그렇고 한국은 아닌 것이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배울 점은 많다. 그러나 프랑스가 오늘날 누리는 부와 자유, 민주적 제도 등은 제국주의적 수탈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함부로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비하하는 것에 대해 신돌석씨는 분노하였다.
이런 생각들을 정심이 누나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가끔씩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추억과 관련된 곳을 지나거나 추억을 떠올릴 만한 이야기를 들으면 갑자기 가슴이 마구 설렜다. 편지라도 할까. 국제전화라도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아내를 생각하고, 힘찬이를 생각하고, 그 뒤에 태어난 아름이를 생각해서 그런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정심이 누나와는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심이 누나는 정말 개천에서 난 용이다. 하지만 그이는 이미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강을 건너 멀리 가버렸다. 그리고는 자기가 태어난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왜 자기처럼 되지 못하냐고 꾸짖고 있다. 더 이상 만나서 공감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을 굳혔다.
신돌석씨는 임낙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말 모임에 못 나가겠다고 했다. 아쉬워하는 임낙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자신에게 아직 미련이 있음을 느꼈다. 여기 정착한 지 2년 넘었다면 촛불혁명도 알 텐데 어떤 생각을 할까?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연말에는 힘찬이, 아름이 부부를 불러서 우리끼리 조촐하게 송년회를 하자는 생각을 하니 긴 터널에서 나와 눈이 부신 듯하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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