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변인의 항일운동·반공투쟁의 발자취(I)
- 이종주(李鍾柱) -
국권을 회복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은 남북한 통틀어 약 3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중에서 독립유공자로 보훈부가 심의·의결하여 선정한 대상자는 현재까지 2만여 명이다. 현재 국가 보훈부에 등록된 안변군 출신 독립유공자는 23명이며, 이들 중 생존한 유족 생존이 확인되고, 독립운동 세부자료가 존안되고 자료를 확인 가능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여 활동단체 및 개인을 차례로 소개하기로 한다.
만주(滿洲)에서 항전한 독립투사, 이종주(李鍾柱)
사진 | 이종주(李鍾柱) *이명(異名): 이종주(李宗柱) |
생몰년: 1900.6.9. ~ 1968.10.31 | 본적: 안변군 서곡면 석방리36 |
활동영역: 만주방면 | 훈격: 애족장, 대통령 표창 |
• 1900년 6월 9일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석방리 36번지에서 출생하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아호는 일구(-球)이며, 6세 때 조부와 부친의 항일투쟁을 목격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을 체험하게되었고, 17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성장하였다.
• 18세에 천도교에 입문하여 조국의 독립에 깊은 관심을 갖고 뜻을 두게 되었다. 1919년 3월 5일 원산에서 기미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피신하였다.
• 1921년 서울로 상경하여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 고등부를 수료하고,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국어를 수학했다. 중국 해남성에서 활동 중인 해공 신익희 선생을 만나 육군교도단에 입단했고 6개월간의 과정을 수료하고 준위로 임관하였다.
• 25세가 되는 1925년 북경육군훈련처(군관학교)의 군관반을 수료하고 대위로 임관되었다. 26세 때 신민부(新民府)에 들어가서 통합된 단체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려고 했으나 끝내 신민부가 해체되므로 인해서 한인학교 교원에 취임하여 독립에 대비한 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인재양성 교육에만 전념하게 된다.
•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한·중항일 연합군이 편성되었고, 연합군사령부의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중국군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한중연합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1932년에는 해림역에서 연합군 수송열차를 폭파하려는 일본군 특공대 3명을 사살했고, 같은 해 5월에는 무단강 전투에서 일본군 86명을 사살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 이듬해부터 몇년간 일본군의 보복작전으로 연합군은 패퇴하며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었고, 급기야는 독립군마저도 지하운동으로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 지하운동 기간중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으로 억울한 등지들의 구명운동 앞장서서 중국군에게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수모를 받을 뻔한 동지들을 다수 구출했다. 이러한 연유로 동포들의 비호를 받을 수 있어 일본경찰에게 잡히지 않았고, 수시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지하운동을 지속하였다.
• 1945년 조국광복으로 귀국하여 원산에서 청우당을 조직하고 원산시당 위원장 겸 강원도당 총무국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북괴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자진 월남했다.
• 그후 서울에서 한국독립단과 민족청년단 등으로부터 수차례 입단 권유를 받았으나 신병으로 칩거하다 1968년 별세했다.
• 장지는 최초 안변동산에 안장되었다가 보훈부에 의해 대전헌충원으로 이장되었고, 유족으로 4남 3녀가 있었고, 4남 이형식은 안변군 서곡면 명예면장(1985~1992)을 역임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