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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계룡산 자연성릉에서 송년 산행을 하다
1. 일자 : 2009. 12. 19 (토)
2. 장소 : 계룡산 (845m)
3. 행로 및 시간
[동학사 주차장(11:18) -> 일주문(11:30) -> 관음암(11:44) -> 동학사 삼거리(11:47, 남매탑 1.6km/삼불봉 2.1km) -> (계곡길) -> 01-04 이정표(12:13, 남매탑 0.6km) -> 천정골 갈림길(12:37, 천정골 3.3km) -> 남매탑/상원암(12:40) -> (중식 -13:05) -> 삼불봉 삼거리(13:17, 갑사 2.7km) -> 삼불봉(13:27, 775m) -> (10분 휴식) -> (자연성릉길, 13:40-) -> 소나무 전망대(13:51-58) -> 이정표(14:17, 관음봉 1km, 삼불봉 0.6km) -> (파이프 암릉길/철계단) -> 관음봉(14:52, 816m, 은선폭포 1km) -> (10분 휴식) -> 연천봉 갈림길(15:05, 은선폭포 0.8km, 연천봉 0.9km) -> 은선폭포(15:55) -> 동학사(16:30) -> 주차장(16:58)]
4. 동행 : 성우, 대식
< 계룡산 산행을 준비하여 >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세모(歲暮), 산행 오리지널 멤버와 함께 충청의 진산, 계룡산을 가려고 한다. 계룡산은 지리산 다음, 국내 2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선정된 곳으로 유서깊은 절과, 시원한 계곡, 무엇보다 정상부 능선의 산세가 수려한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80년대 중반, 입대 전 마음을 정리하고자, 홀로 다녀 온 경험이 있는 산이다. 당시에는 동학사에서 남매탑을 지나 갑사로 내려 왔는데, 남매탑에 대한 흐릿한 이미지와 무척 힘들었던 기억만이 머리에 새겨져 있다.
계룡산은 그 높이는 800m 급이지만, 대전과 공주에 걸쳐져 있고, 경관이 수려하고 무엇보다 유서 깊은 절인 동학사와 갑사를 품고 있는 곳으로 정감록의 이상향인 동시에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계룡산의 명명의 유래는 닭의 볏을 쓴 용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에서 기원했으며, 자연스런 성곽의 모습을 지닌 자연성릉이 이 산의 최대 장관이라 한다.
늘 마음 속으로 그리던 곳을 오늘 다시 오르려 하니, 내 청춘의 추억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아 인도어 클라이밍 단계부터 가슴이 설렌다. 날씨는 한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12월에 계룡산을 오른 이들의 산행기를 보니 온통 눈 덮인 자연성릉의 모습이 압권이다. 아이젠도 준비하고 스패츠도 챙겨야겠다. 따듯한 커피나, 자스민차와 함께 말이다.
< 희망사항 >
80년대 중반 어느 봄, 입대를 보름 앞둔 한 청년이 혼자 계룡산을 찾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늦은 오후, 버스에서 내려서 곧바로 다리를 절던 중년 남자의 오토바이 뒤에 탄 체 민박 집에 도착하게 되었고, 낯선 상황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곧 닥쳐 올 군생활의 험난함을 생각하며 이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가려고 애쓴다. 짐을 정리하고 저녁 먹거리를 준비하는데, 바로 옆 방에 웬 군인 둘과, 그 옆 방에는 여자대학교 학생들이 들이 닥쳤다.
군인들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마치고 특별 휴가를 얻어 산에 온 것이었는데, 이야기 중에 그들이 내 대학 1년 선배와 입대 동기인 것을 알게 되었고 또 내가 곧 군에 입대한다는 사실에 금방 친해지게 되었다. 여대생들은 당시 D여대 학생들로 동아리인지 학과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것이었다.
각자 저녁 식사를 하고 어찌하다 보니 이들(군인과 여대생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밤 늦게까지 술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화는 주로 군대 생활에 관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입대를 앞 둔 예비 군인이 선배들을 만났으니 벌써부터 군기가 팍 들어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초저녁에 뻗어 버리게 되었다. 당시는 여대생들에 관한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취기가 돈 이후에 합석했었나 보다. 다음날 아침 그 군인들은 숙취에 시달리던 나를 깨우고 아침을 먹이고 같이 산에 끌고 올라 갔다. 남매탑까지의 길이 죽음의 길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힘겹게 오른 남매탑에서 다시 여대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자연성릉으로, 나는 홀로 갑사 방면으로 행선지를 정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나는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문산으로 자대를 배치 받게 되었고, 인근 부대에서 한 명은 포병, 한 명은 헌병인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땐 정말 놀랐고, 그 중 한 명을 그 후 입사동기로 또 다시 만났을 때는 ‘인연의 끈’이라는 것이 정말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 군인들과 당시의 여대생 중 일부는 그 날 이후도 한동안 만남을 이어왔던 것으로 기억되니, 계룡산은 여러 가지로 영험한 산임에 틀림없다.)
벌써 20년이 훨씬 지난 추억이다. 당시 입대를 앞두고 주변을 정리할 생각으로 2박 3일의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 것인데,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오늘 다시 동학사와 계룡산을 찾으며, 21살 청년의 심정으로 돌아 가서, 내 중년의 삶을 차분히 정리해 보고 싶다. 또한 당시 그 존재마저도 몰랐던 계룡산의 정수, 눈 덮인 자연성릉의 장관도 직접 보고, 감동도 느껴 보고 싶다.
출발 전 성우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자주 온다. “음식은? 바비큐? 점심 도시락은? 길이 위험하지 않을까? 날씨가 너무 추워! 등 등”. 나도 메시지를 보낸다. “가서 재미나게 놀자, 눈이 왔으면 좋겠다” 등 등.
< 서울에서 동학사 가는 길 >
토요일 아침, 평소 같으면 안내산악회 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달렸을 시간에
집을 나선다. 좌석버스를 타고 가는데 판교를 그냥 지나친다. 아차
해서
성우 차에 올라 타니 9시 10분,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니 비로소 기분이 전환된다. 성우가 운전하고 대식이 앞자리에 앉아 있다. 강형이 동참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같이 탔으면 벌써 맥주 한 캔 개봉했들텐데 말이다. 웬 일인지 올 들어 산행을 하려 하지 않는다. 송년산행만이라도 동참했으면 좋으련만. 다행히 저녁에 동학사 부근 펜션으로 합류한다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천안을 지나 논산 방향으로 향하는데 눈 발이 거세다. 나는 오는 눈이 반가워 흥분이 되는데, 성우와 대식은 걱정이 되나 보다. 눈 오는 날의 산행이라, 기쁘지 아니한가!
제법 내리던 눈이 대전 근방에 오니 거짓말처럼 그쳐 버린다. 성우 왈, “우리나라 참 넓다”.
이 좁은 나라 땅이 넓게 느낄 만큼 겨울 날씨는 변화가 무쌍하다. 11시를 조금 넘어 동학사
입구 ‘
< 동학사에서 남매탑 >
행장을 챙기고 길을 나선다. 11시 20분. 카메라를 당겨 계룡의 마루금을 그림에 담는다. 좌측 통신탑이 서 있는 곳이 천황봉일 것이고, 그 우측으로 ‘V’자 모양의 쌀개봉이 보이고 그 옆으로 관음봉도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자연성릉을 그려 보다 문득,‘지금은 여기까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면 안되지’하고 멈추고 길을 나선다.
< 주차장에서 본 계룡산 정상부 >
포장도로를 따라 길을 오르니 곧이어 탐방 안내소가 나온다. 무표정한 공익요원들이 추운 날씨에 떨고 있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 “아무리 추워도 국립공원 입구에서 근무 중인데, 얼굴은 조금 펴고 살아라”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로 험상궂은 표정이다.
이어 걷는 길 위로‘호객 행위를 하는 집에는 들어 가지 맙시다’라고 적힌 현수막 주변 음식점에서, 쉬었다 가라고 유혹한다. 단속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모든 유원지 부근의 익숙한 풍경이다. 일일이 대꾸하지 않는 것은 꼭 그들이 싫어서 만은 아니다. 모른체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에 익숙해져서 일 따름이다.
11시 30분 동학사 일주문 부근을 지난다. 커다란 솟을 대문 구조물이 왠지 생뚱맞다. 길이 흙 길이었으면 잘 어울렷을텐데 하고 혼자 생각해 본다. 길가 좌측으로 동학사 계곡이 흐른다. 폭도 넓고 수량이 제법 되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큰 나무들이 이어져 있어, 여름 날에는 멋진 풍경을 연출하겠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행락객들을 찾아 보기 힘들다. 호젓해서 좋다. 11시 44분 관음암 앞에 도착한다. 커다란 돌 비석에 ‘날마다 줗은 날 되세요’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젊은 신세대 스님이 만든 문구일 것이다. 어렵고 무거운 글귀보다 정감이 가는 표현이다. 기분이 가벼워 진다.
조금 더 올라 가니 동학사 삼거리가 나오고 좌측으로는 동학사 당우들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남매탑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당초 은선폭포 방향으로 오르려 했으나, 성우의 제안으로 길이 더 순한 남매탑 방향으로 길을 택했다. 이정표에 남매탑 1.6km, 삼불봉 2.1km, 은선폭포 1.7km, 관음봉 2.7km 등 글귀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남매탑까지는 80분이 소요된다 되어 있다. 길이 순하고 거리가 1.6km인데, 왠지 신뢰가 가지 않는 안내다. 50분 정도로 나름 예상을 하고 길을 나선다.
30여 분의 워밍업으로 나는 다리를 길에 적응하고 있으나, 친구들은 첫 오르막 길에 긴장하고 있다. 천천히 오르자 곧이어 01-01 이정표가 나온다. 지리산. 설악산 등에서의 경험에 의하면 숫자 하나에 500m이니 ‘04’가 나오면 남매탑에 도착하겠지 하고 걷는데, 얼마 가지 않아 ’02’ 이어 ‘03’ 11시 47분에는 ’01-04’에 닿는다. 남매탑까지는 0.6km가 남았다 한다. 동학사 삼거리 출발 25분 만이다. 아마도 이곳 계룡산에서의 숫자는 200m/250m를 의미하나 보다. 여기까지는 편하고 완만한 오르막 길을 걸어 왔으나, 가야 할 길은 철제 가이드가 처 있는 울퉁불퉁한 돌 길이다. 기울기도 이전보다 가팔라 보인다. 성우는 가쁜 쉼을 내 쉬며 내 뒤에 바짝 붙어 오고 있고, 대식은 평소처럼 20여 미터 후방에서 천천히 걷고 있다. 길이 험하던 쉽던 간에 대식만의 산에서의 ‘리추얼’은 언제나 변함없다. ‘조금 뒤처져서 내 속도에 맞추어 묵묵히 걷는다’.
< 남매탑에서 >
대화 없이 걷기만을 50분. 좌측 언덕 위로 남매탑이 살짝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이는 지점에, 천장골 갈림길이 나온다. 천장골까지는 3.3km라 한다. 남매탑은 바로 위다. 마지막 힘을 내어 언덕을 올라 서니, 남매탑과 상원암이 우리를 반긴다. 동학사 삼거리 출발 55분만이다. 이정표의 표식보다 내 예상이 더 근접했다.
우리가 흔히, 승려와 여인의 사랑이 승화된 결과물로 알고 있는 남매탑은, 사실은 패전국 백제와 승전국 신라의 힘의 세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구조물이다. 원래 백제시대 5층 석탑(현재는 4층임)이 세워져 있었는데, 훗날 신라가 이곳을 점령한 이후 그 보다 높은 7층 석탑을 세워 그들의 힘을 과시한 결과가 각기 높이가 다른 두 석탑이 연이어 세워진 연유이다. 애당초 건립연대가 이처럼 틀리니, 남매탑에 둘러싼 승려와 여인의 사랑 전설은 후대에 지어낸 것이거나, 실제 다른 사랑의 인연을 탑에 연관시킨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출발 후 처음으로 친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랜만에 산행 온 그들을 고려 안하고 내 페이스만 고집했음에 미안한 마음을 가져 본다. 돌아 가며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편다. 성우가 준비한 김밥과 샌드위치가 밥상으로 차려 진다. 성우 컨디션이 영 안 좋아 보인다. 추운 날씨의 산행에 혈압이 걱정되었다. 다행히 따스한 차와 음식이 뱃속에 들어 가자, 추위가 한결 사라져 가는 기분이다. 식사를 마치자 모두가 조금은 더 힘이 나는 느낌이다.
< 남매탑에서 삼불봉 >
좌측으로 눈에 덮인 삼불봉의 모습이 보인다. 제법 험한 위용이다. 가파른 계단 오르막을 10여분 이상 오르자 삼불봉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해 가면 금잔디고개를 거쳐 갑사(2.7km)로 향하게 되고, 삼불봉은 좌측 길이다. 남매탑에서 고도를 조금 높였을 뿐인데 설경이 훨씬 더 화려하다. 소나무의 푸른 잎뿐만 아니라, 참나무 앙상한 가지에도 눈이 소복이 내려 앉아 있다. 변화된 화려한 눈(雪)에 눈(眼)이 바빠진다.
다시 10여분 된비알을 오르자 삼불봉에 도착했다. 초입 벼랑에서 내려다 보는 신성봉, 수정봉, 장군봉 능선의 전경이 그만이다. 계룡8경 중 삼불봉 설화가 제 2경이라 하였는데, 몇 일 전 내린 눈으로 제대로 된 설화를 보게 되었다. 겨울 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눈 덮인 설경을 보는 것이라 했는데, 출발 시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
< 삼불봉 전 전망대 전경 >
< 삼불봉에서 >
삼불봉 정상에 올라서니 일망무제, 천황봉 일대 계룡산 정상부의 모습이 뚜렸하다. 계룡산은 흔히, 머리 부분이 암탉의 벼슬을 한 용의 형상과 같아서 그 이름이 명명 되었다 하더니, 이곳에서 바라 보는 천황봉, 쌀개봉 능선의 굴곡은 자못 용트림의 형상을 유추해 내기에 충분하다. 천황봉이 용의 머리라면, 자연성릉은 용의 몸통쯤 일 것이고, 이곳 삼불봉 일대는 용의 꼬리 부분일 것이다. (물론 큰 용이라면 저 멀리 동학사 입구의 장군봉 부근이 꼬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나도 그랬지만, 동학사로 올라 갑사로 내려가는 것은 계룡산의 꼬리 부근만 경험하고 산행을 마치는 꼴이 되니, 계룡산 등산의 묘미는 비록 출입이 통제된 천황봉은 가지 못하더라도 자연성릉을 경험해 보아야만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삼불봉에서 단체사진도 찍고, 소나무 설화 밑에서 흐드러진 눈꽃의 향연도 즐기면서 10여분을 서성이다, 13:40분 좌측 철제 계단을 내려 서며 자연성릉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선다.
< 삼불봉에서 본 천황봉 부근 >
< 삼불봉에서 본 공주 방향 전경 >
< 삼불봉에서 관음봉 >
삼불봉에서 계단을 내려 서며 설경 뒤로 굽어 보이는 공주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서쪽 편으로 물이 보이는 곳이 계룡저수지일 것이고, 부근의 회색으로 빛나는 도시의 모습도 새롭다. 계단을 지나자 이내 걷기에 편한 능선 길이 이어진다. 눈이 제법 있고 돌 길이라 위험해 보였으나, 실제 걷기에는 무리가 없다. 10분쯤 걷자 소나무가 서 있는 벼랑 전경이 멋지다. 걸음을 멈추어 전경을 사진에 담고 얼마 안 가니 더 멋진 풍경이 나타난다. 솔잎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눈의 양에 가지가 휘어질 지경이다. 낭떨어지 밑으로 아스라이 굽이치는 산맥들의 모습도 역동적이다.
2시 무렵 작은 언덕을 넘어가며 바라보는 삼불봉의 우람한 모습도 압권이다. 삼불봉은 이웃 산에서 바라다 뵈는 자신의 모습이 이리 멋질 줄은 모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내 가족과 동료, 친구들이 보는 내가 참된 내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눈발이 날린다. 계획대로라면 삼불봉에서 관음봉까지의 자연성릉 길은 1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인데, 눈 길에 조금은 더 걸릴 듯하다. 눈이 내렸고/내리고 있으나 다져지거나, 녹았다 얼어 빙판이 되기 전이라 미끄럽지는 않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길에도 대식은 여러 번 엉덩방아를 찌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런지 아이젠을 바꾸어도 별 효과가 없다. 바람도 조금은 거세진다. 뒤따라 오는 성우의 얼굴이 추위와 바람에 붉게 변해져 있다. 대식도 비슷하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즐겨 하는 일이 아니라면 못할 짓이다. 주위에 산에 가지 않는 친구들은 우리를 보고 미쳤다 할 것이다. 이번 주 날씨는 연일 영하 10도씨를 오르내리고 있으니, 그런 말을 들어 싸다. 다행인 것은, 산 위에서는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체감온도가 그리 춥지 않다는 것이다. 무장을 단단히 해서 왔고, 무엇보다도 몸을 움직이면서 체온이 올라가 추위에 대한 내성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 자연성릉의 바위 전망대에서 >
< 자연성릉에서 본 삼불봉 >
< 자연성릉에서 본 관음봉 >
자연성릉을 걸으며, 이 길은 오늘 같은 설경도 좋지만 단풍이 든 가을날의 풍경도 그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야가 확 트인 완만한 능선 길을 걷는 행복은 산꾼만이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 관음봉 부근 쇠파이프 암릉길 >
2시 17분 자연성릉 길에서 첫 이정표를 맞는다. ‘관음봉 1.0km, 삼불봉 0.6 km. 꽤 많이 걸었다 생각했는데 아직 반도 못 왔다. 조금 더 속도를 내 본다. 잠시 후 두 봉우리 간의 거리가 같아지는 지점을 통과했고, 이어 멀리 관음봉 정상의 전경이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길은 좌측으로 위험한 낭떠러지가 있는지, 쇠파이브가 설치되어 있는 완만한 암릉 길로 이어진다. 이런 길이 이후 20여분 정도 계속된다. 멀리서 보면 위험해 보이지만 걷는 당사자에게는 걷기에 무리가 없는 길이다.
관음봉 좌측 편으로 계룡산의 능선길이 굽이치며 흐른다. 균형 있게 굵은 선을 붓으로 칠해 원근을 표현한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느낌이다. 그만큼 굽이치는 능선의 균형미가 돋보인다. 균형미 끝에는 우뚝 솟아 오르는 파격이 있어 그림을 더욱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 굽이 치는 계룡산 능선 >
< 관음봉 벤치에서 >
2시 52분 관음봉에 도착했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 관음봉 부근에 산하고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다란 정자가 있다. 관음봉
< 자연성릉을 배경으로 >
전망데크에서 바라보는 지나 온 자연성릉의 모습은 말 그대로 황홀 그 자체다. 멀리 천황봉에서 시작한 용트림이 자연성릉에서 S자 형상을 그리며 삼불봉으로 꼬리를 치켜든 모습이 말 그대로 ‘계룡’이다.
걷기 시작하여 1시간 여가 지나고 몸이 산에 적응한 이후는 쉼 없이 걷는 내 산행 스타일에 친구들이 고생이 많다. 말은 안 해도 중간에 여러 번 쉬었다 가고 싶었을 것이다. 모진 놈 만나서 ‘니들이 고생이 참 많다’. 등산이 주는 감동과 기쁨이 몸의 피로와 괴로움보다 크다 한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르는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이 길을 꿋꿋이 걸어 가는 것일 것이다. 여행과 등산은 길을 떠나 다시 길 위에 놓이는 일이다 한다. 오래된 능선 길을 걸으며 다시금 인내와 겸손을 생각해 본다.
관음봉에서의 짧은 휴식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 관음봉에서 동학사 >
관음봉에서 은선폭포 방향, 하산 길 초입은 복잡한 나무계단으로 얽혀 있다. 어디로 가든 나중에 길은 만나는데 왜 이리 복잡하게 연결시켜 놓았는지 모르겠다. 연천봉으로 길로 잘못 들까봐 조심스레 내려서니 이정표가 보인다. 은선폭포 0.8km, 연천봉은 0.9km, 좌측 은선폭포 방향 계곡 길로 들어선다. 눈 덮인 계곡 길이 제법 가파르다. 고개를 들어 멀리를 보니, 굽어 보이는 전경 가운데 동학사인 듯한 절집이 아스라하다. 그 뒤로는 복잡한 시가지의 모습도 보인다.
가야 할 길에 목표가 보이니 걸음이 빨라 진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끔씩 대화를 나누며 걸으니 한결 걸음이 가볍다. 강형에게 전화를 하니 받지 않는다. 안 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강형이 빠지는 송년회는 왠지 짝퉁 같다.
관음사에서 50분이나 걸려 은선폭포에 도착했다. 별 특징 없는 내리막 길이 꽤 길었다. 은선폭포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이 겨울에도 흐르고 있다. 여름 한창 때는 제법 큰 위용이 예상되는 폭포의 모습이다. 이어 계곡의 물줄기가 계속 이어진다. 간간이 꽤 너른 소(沼) 도 보인다.
< 은선폭포 가는 길에서 본 동학사 계곡 >
< 은선폭포 전경 >
은선폭포에서 동학사로 향하는 길은 생각 외로 길게 느껴졌다. 대식이 말대로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런가 보다. 4시 30분 동학사에 도착했다. 동학사는 국내의 대표적인 비구니강원이 있는 곳이다. 계룡산의 주요 봉우리의 실 소유주도 동학사라 한다. 부자 절이라 그런지 당우들의 모습이 정갈하고 귀티가 난다. 살짝 들어다 본 절집 안에는 젊은 비구니의 모습이 보인다. 앳된 얼굴이다. 문뜩, 오전에 본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문구가 비구니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별난 경험이다. 동학사에서 주차장까지도 30여분이 걸렸다. 주차장에서 다시 올려다 본 계룡산은 어둠에 젖어 들고 있었다.
< 동학사 어느 절집에서 >
< 주차장에서 다시 본 계룡산 >
< 에필로그 >
빨개진 볼을 하고 남자 셋이
다시 동학사 탐방 안내소 앞에 다시 섰다. 오전에 본 공익들은5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 오전과는 사못 다른 표정이다. 훨씬
밝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임무는 즐거운 일이 아닌가 보다, 그리고
그 임무의 종결은 새로운 즐거움의 시작인가 보다.
내게는 일주일 동안의 심신의 피로를 씻는 ‘산에서의 의식’, 어쩌면 친구들에게는 모진 친구 놈 만나서 송년회를 하기 전의 ‘통과 의례’일지도 모를 산행을 마쳤다. 모두가 몸은 피곤해 보이지만 기분은 들떠 있다. 길을 물어 예약한 펜션에 도착한다. 제법 넓고 크다.‘라일락’ 방에 문을 여니 우리의 강형이 예의 그 피곤한 인상으로 방바닥에 누워있다. 반가움과 동시에 짜증이 난다. “왜 전화는 안 받아”.
어렵사리 샤워를 하고(순간 온수기가 고장을 일으켰다), 짐과 준비한 음식을 챙기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등산 모드를 끝내고, 송년회 모드로 변화를 꾀한다.
산행 중 찍었던 사진을 보면서 오늘 등산의 기억들을 되 집어 본다. 출발 전 다시 계룡산을 찾으며, 21살 청년의 심정으로 돌아 가 내 중년의 삶을 차분히 정리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설경에 취해 아무 생각도 못했다. 대신 계룡산의 정수, 눈 덮인 자연성릉의 장관을 직접 보고 가슴에 담아 두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5시간 30분 동안의 계룡산 등산을 통해 다시금 삶에 에너지를 재충전 받
는다. 오늘도 산이 있어 좋았고, 친구들이 있어 더욱 좋았다. 오늘 저녁 회식에서는 작년처럼 일찍 뻗지는 말아야 하는데 잘 될 지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