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용 관찰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함을 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순종할 수 없게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내 안에 거하시는 그의 성령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몸도 살리신다.
2. 느낌
1) 성령에 따르는 삶을 만들기 위해 환경의 조성
목회의 여정을 함께 해 오면서 확실한 것은 성령을 따르는 삶의 환경이 일차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훈련이 되었다는 것이다. 매일의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토요일에 하는 주일준비, 주일예배 이것이 성령에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한 일차적인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음악회나 모임 등이 많은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주말에 시간이 많이 생기는 친구들은 만날 수도 없다. 어쩌다 세미나에 가서 차라도 마실 때면 예전과 달리 별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고 기쁘지 않고, ‘시어머니 험담’같은 것을 주로 하는 것을 들을때면 오히려 귀에 거슬리며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후회되기 시작함을 알 수 있었다.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나는 예배중심으로 살았고, 이것이 삶의 한 습관으로 잡혔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어쩔 때는 형식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없는 나를 옭아매는 틀과 같이 생각되어졌고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예수님의 영이 인격적으로 내 안에 거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 안에 무언가의 중요한 내용이 부재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부모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러한 형식적인 틀이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성령에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 형식적 틀은 내가 육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주기적으로 회개하고 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되어졌다. 거기에 인격적으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 내가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들어갈 때, 나는 때로 가끔은 실패하지만 그래도 육신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내 자신에게 주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처음 개척을 할 때는 새벽예배를 하다가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자 나는 나의 육신의 상황에 따라 기도생활을 하곤 했다. 피곤하면 새벽 기도를 쉬기도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특별히 있을 때는 기도를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내 마음대로 살기도 했다. 새벽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특별히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봉담으로 이사오고는 1년이 넘게 새벽 4시 30분터 새벽예배를 지켰다. 물론 여기는 상가아파트 상가교회라 기도를 하고 싶은데 교회를 멀어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기도회에 오기 때문에 하루라도 빠지면 안되었다. 혹 몸이 아파 나가지 못하면 ‘어디가 아픈지’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 하는 새벽예배 멤버들은 나를 기도의 자리를 지키게 만들었다. 때로 육신의 약함 속에 있다 할지라도 눈을 비비고 예배당에 간다 할지라도 육을 극복하고 이기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틀을 새벽예배를 통해 만들어 주셨다. 기도가 잘 되든, 되지 않든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도회의 자리에 성령의 음성에 내 몸을 복종시킬 수 있는 훈련이었던 것이다. 이 훈련은 나를 새벽에 자명종이 울리면 눈을 비비며 자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체질을 만들었던 것이다.
화요일의 제자훈련을 더욱 나를 육신적인 것을 쫓지 않고 영을 쫓는 생활로 나를 인도하였다. 화요일에 제자훈련을 하게 되면 토요일부터는 제자훈련에서 요구하는 과제를 하기도 하고 큐티를 하기 위한 생각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을 지나고 월요일이 되어도 화요제자훈련 준비를 위한 본격적인 시간을 투자하므로 월요일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없다.
수요일은 수요예배로 성경통독을, 금요일은 금요기도회로 주님께 부르짖어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토요일은 어린이부 리코더 사역으로 주님을 위해 내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으로 육을 따라 사는 삶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주님께서는 날마다 인도하고 계심을 느낀다.
예전에는 교회사역에 매달리다보니 내가 포기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 내 시간이 없는 것 같으면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지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형식적인 틀이 없으면 내 마음대로, 멋대로 기도생활과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매우 연약한 육을 가졌음을 인정한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교회를 주시고, 그곳에서 교우들과 나눌 수 있게 되는 여러 가지 기도회나 예배를 통해 내가 육으로 살지 않게 하는 중요한 환경을 만들어주신다는 것을 것을 깨닫는다.
형식적인 틀에 주님께서 기름부으심이 있으면 회복이 일어나며 성령이 역사하심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이 요즘 중요하게 생각한다. 성령께서 기름부으실 때 담겨질 수 있는 예배의 형식과 나의 그릇을 만들어 가는 것..
내 시간을 내 것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예배하는 삶으로 먼저 배치하고 나머지 시간을 내가 사용하는 것. 그것이 성령에 따르는 삶을 위한 일차적인 환경조성이다. 육은 선을 행하고자 하고, 영을 따르고자 하나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과 죄의 법은 끊임없이 갈등상황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환경을 주님 중심으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요즘 내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미디어와 멀리 지내는 것이다. 가끔씩 TV를 새로 사고 싶은 생각이 이만큼 올라오지만 없는 것이 훨씬 삶의 유용을 준다는 것을 알기에 하이마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곤 한다. TV를 갖다 버리고, 인터넷 기사, 연예란을 읽는 것을 하지 않는 것 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성전인 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였다.
2) 행동에 앞선 생각의 중요성
삶을 살아가다가 남의 것을 훔치고, 폭력을 써 죄짓는 사람, 불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나는 특별히 그런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행동에 앞서는 생각에 대해서는 조금 관대한 편이다. 내가 그렇다는 것을 1주일의 삶속에서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
내가 삶에서 내가 왕이 되어있을 때 특히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난 안 그러는데’, ‘저 사람은 왜 저러지’ 판단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며 불평을 늘어놓는 내 자신을 말이다. 남편은 때로 나의 이런 태도를 지적한다. 그러면 나는 ‘내 생각인데, 생각도 못해’ ‘말도 못해’ ‘왜 내편은 안들어’라며 오히려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씀을 배우며, 이런 생각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을 미워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작용하지 않고, 나 마음에 강팍한 마음이 생겨서 내 멋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성령님이 주시는 부드러운 마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며, 점점 더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됨을 말이다. 결국 나는 생명이신 성령님과 멀어져서 영의 죽음으로 치닿게 된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내가 가끔 보는 드라마는 주말 8시에 하는 KBS ‘사랑을 믿어요’라는 것인데, 요즘 안방극장에 불륜소재를 방영한다고 미디어에서 난리다. 미디어에서 난리가 날수록 시청률은 높아진다. 나도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드라마를 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을 믿어요’에서는 마음이 맞는 유부녀와 유부남이 그냥 직장내에서 ‘생각’만으로 갈등하는 장면들만을 방영해 주기 때문이다. 어쩔때는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고 궁금해져서 또 다음회를 본다. 그리고 다음회를 볼쯤에는 그 불륜을 하기 전 단계인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진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으니까 죄라고 생각이 들지 않고, 드라마 속에서 보이는 죄에 무뎌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면 그것을 보는 것조차 불편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는 것 쯤이야..
성령님은 처음에 내 맘에 저것은 죄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에 따르는 삶이 충만할때는 이것이 잘 들어온다. 바로 인정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것에 빠지게 되면 ‘생각인데 어때요’라고 성령의 생각과 대적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로마서 8장의 말씀.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지킬 수도 없게 만든다는 말씀이 성령의 음성가운데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금 나의 생활을 정비하고, 인터넷으로 ‘가쉽기사’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 CCM 음악을 틀어 놓는 환경적인 장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을 생각하게 되고, 성령의 감동이 내 안에 있으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말하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죄이다. 좋은 생각을 하며 좋은 것만을 보는 것..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다시금 새겨진다.
3. 적용 및 결단
1)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도록 환경을 치밀하게 조성하자.
일주일, 하루를 세밀하게 짜서 주님께 기뻐하시는 삶을 드리자
2) 조성된 환경에 성령의 영역을 인정해 드리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운전은 성령님이 하시며,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 뿐이다.
3) 아침예배를 통해 온 가족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결단하며 하루를 시작하자. 그러면 생명과 평안이 하루 중에 임할 것임을 믿는다.
첫댓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시네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려는 의지가 확~! 느껴집니다^^
이제는 성령님이 충만히 역사하셔서 권능을 받으시길 중보하고있습니다^^
사모님처럼 되어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저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시간들 말이지요. 전 제가 선 줄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교만이었으며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 저를 위로 하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렵니다. 그렇게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다보면, 저 역시도 자연스레 사모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