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二日庚申。乍晴。(초이일경신。사청。)
8월2일[경신/9월12일] 잠시 개었다.
初三日辛酉。晴。早朝。宣傳官梁護。賫敎諭書入來。乃兼三道統制使之命。肅拜後祗受書狀書封。卽日發程。直由豆峙之路。初更。到行步驛歇馬。三更。登程到豆峙。則日欲曙矣。朴南海失路。誤入江亭。故下馬招來。到雙溪洞。則亂石稜稜。新雨漲流。艱難渡越。到石柱關。則李元春與柳海守伏見之。多言討賊事。暮到求禮縣。則一境寂然。宿于城北門外前日主家。則主人已避山谷云。孫仁弼,孫應男卽來見。獻早柿。(초삼일신유。청。조조。선전관량호。재교유서입래。내겸삼도통제사지명。숙배후지수서상서봉。즉일발정。직유두치지로。초경。도행보역헐마。삼경。등정도두치。즉일욕서의。박남해실로。오입강정。고하마초래。도쌍계동。즉란석릉릉。신우창류。간난도월。도석주관。즉리원춘여류해수복견지。다언토적사。모도구례현。즉일경적연。숙우성북문외전일주가。즉주인이피산곡운。손인필,손응남즉래견。헌조시。)
8월3일[신유/9월13일]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그것이 곧 겸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하동읍 두곡리)로 가는 길로 곧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자정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 했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화개면 탑리)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 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갔다고 했다. 손인필,손응남이 와서 보고, 올감(早枾)을 가져왔다.
賫 재 (齎와 같음) 가져오다. 주다.
初四日壬戌。晴。到鴨綠江院秣馬。高山縣監。以軍人交付事到來。多言舟師事。午到谷城。則官舍閭里一空。宿于同縣朴南海。直往南原。(초사일임술。청。도압록강원말마。고산현감。이군인교부사도래。다언주사사。오도곡성。즉관사려리일공。숙우동현박남해。즉왕남원。)
8월4일[임술/9월14일] 맑다. 압록강원(곡성군 오곡면 압록리 : 남북류의 순자천[섬진강]과 동서류의 대황천[보성강]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고산현감(최진강)이 군인 교체할 일로 와서 수군의 일을 많이 말했다. 오정에 곡성(곡성읍 읍내리 713-2번지)에 이르니 관청과 여염집이 하나같이 비어 있어, 그 현청(현감 최충검)에서 잤다. 남해현령 박대남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初五日癸亥。晴。到玉果境。則避亂之人。彌滿道路。下坐開諭。入縣時。逢李奇男父子。到縣。鄭思竣,思立來迎。縣倅托病不出。欲爲捉出罪之則來見。(초오일계해。청。도옥과경。즉피란지인。미만도로。하좌개유。입현시。봉리기남부자。도현。정사준,사립래영。현t쉬탁병불출。욕위착출죄지즉래견。)
8월5일[계해/9월15일] 맑다. 옥과(곡성군 옥과읍) 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옥과현에 들어갈때, 이기남의 부자를 만나 현에 이르니 정사준,정사립이 와서 마중했다. 옥과현감(홍요좌)은 병을 핑계대며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니 그제야 나와서 봤다.
初六日甲子。晴。留玉果。初更。宋大立探賊而來。(초륙일갑자。청。류옥과。초경。송대립탐적이래。)
8월6일[갑자/9월16일] 맑다. 옥과에서 머물렀다. 저녁에 송대립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初七日乙丑。晴。早發直往順天。路逢宣傳官元潗。受有旨。兵使軍。盡爲潰還。連絡道路。故馬三匹,弓箭若干奪來。宿谷城江亭。(초칠일을축。청。조발직왕순천。로봉선전관원집。수유지。병사군。진위궤환。련락도로。고마삼필,궁전약간탈래。숙곡성강정。)
8월7일[을축/9월17일] 맑다.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순천시행동)으로 갔다. 길에서 선전관 원집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병마사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곡성 강정(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일대)에서 잤다.
初八日丙寅。曉發。朝飯于富有倉。則兵使李福男已令衝火。只餘灰燼。所見慘然。光陽倅具德齡,羅州判官元宗義在倉底。聞吾行到。急走鳩峙。余卽傳令。則一時來見。余以轉避責之。到順天。則城內外人跡寂然。而僧惠煕來謁。故付以義將帖。官舍倉穀軍器等物。依然如舊。兵使不爲處置而退奔。可歎。銃筒等物。移埋。長片箭。則軍官等分持。而留宿。(초팔일병인。효발。조반우부유창。즉병사리복남이령충화。지여회신。소견참연。광양쉬구덕령,라주판관원종의재창저。문오행도。급주구치。여즉전령。즉일시래견。여이전피책지。도순천。즉성내외인적적연。이승혜희래알。고부이의장첩。관사창곡군기등물。의연여구。병사불위처치이퇴분。가탄。총통등물。이매。장편전。즉군관등분지。이류숙。)
8월8일[병인/9월18일]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이곳은 병마사 이복남이 이미 명령하여 일부러 불을 질렀다. 다만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광양현감 구덕령, 나주판관 원종의가 부유창 언덕에 있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구치(순천시 주암면 행정리 접치)로 달아났다. 내가 곧 전령을 내리니 한꺼번에 와서 봤다. 나는 피해 다니는 것을 꾸짖었다.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발자취가 하나도 없어 적막했다. 중 혜희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관사와 곳간의 곡식 및 군기 등 물건은 옜날과 같다. 병마사가 처치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한탄스럽다. 총통같은 것은 옮겨 묻고, 장전과 편전은 군관들이 나누어 가지고 거기에서 머물러 잤다.
初九日丁卯。晴。早發到樂安。則人多出謁五里。問其奔散之由。則皆言兵使以賊迫爲㤼。衝火倉庫而退。故以是而人民潰散云。到郡則官舍倉穀。盡爲焚燒。官吏村氓。莫不揮涕而來見。午後。登程到十里許。則父老列立路傍。爭獻壺漿。不受則哭而强之。夕到寶城兆陽倉。了無一人。而倉穀則封鎖如故。使軍官四貟守直。余則宿于金安道家。其家主已爲避出。
(초구일정묘。청。조발도낙안。즉인다출알오리。문기분산지유。즉개언병사이적박위겁。충화창고이퇴。고이시이인민궤산운。도군칙관사창곡。진위분소。관리촌맹。막불휘체이래견。오후。등정도십리허。즉부로렬립로방。쟁헌호장。불수즉곡이강지。석도보성조양창。료무일인。이창곡즉봉쇄여고。사군관사원수직。여즉숙우금안도가。기가주이위피출。
8월9일[정묘/9월19일] 맑다. 일찍 떠나 낙안(순천시 낙안읍)에 이르니, 사람들이 많이 나와 오리까지나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겁을 먹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다. 그 때문에 이와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군청에 이르니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와서 봤다. 오후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늙은 할아버지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가 버렸다.
初十日戊辰。晴。以氣甚不平。因留安道家。裵同知亦同留。(초십일무진。청。이기심불평。인류안도가。배동지역동류。)
8월10일[무진/9월20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도 같이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