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형상으로서 지리산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장엄한 명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사의 숱한 소용돌이 속에 위치해 있으며 또 민중의 고난과 한을 품고 호흡을 같이 해온 지리산으로 볼 때는 더 이상 미적 신비감에만 싸여
있는 '순수한 산'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피의 전장'으로 변하는 비극적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의 군경 토벌대와 좌익 빨치산들이 벌인 치열한 싸움일 것이다. 이 7년여 동안 지리산은 실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아우성과 절규의 세계로 일변하였고 전쟁의 포화로 인해 처참한 모습으로 그슬려져야만 했다. 그뿐 아니라 전쟁 당사자들이었던 군경과
빨치산들 2만명의 고귀한 생명들이 지리산의 이름 모를 능선과 계곡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또 그 틈바구니에서 수를 헤아리기 힘든 무고한
양민들이 불합리한 전쟁의 와중 속으로 편입될 것을 강요당하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불과 40여년 전의 비극적인 역사는 그동안 금기시되고 유보되어왔던 측면이
강했다. 이제까지 우리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문제의 올바른 정리와 최소한 몇몇 부분에서의 진상규명 자체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인데 최근 몇 년 전 '빨치산 증후군' 이라는 일과성 유행이 있고 나서 그나마 작은 물꼬가 트였던 것도 부정한 수 없는 바다. 그러나
아직은 재갈물린 침묵의 지리산의 말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그 이후 보다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틀 속에서 규명되고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들이 일시
중단된 느낌이다. 물론 극히 뒤틀리고 제한된 2차 사료들, 관점상의 불가피한 마찰과 그리고 오늘의 우리 분단상황과 관련된 몇몇 민감한 사안들과도
부딫치기 때문에 차라리 더 두고 보자는 손쉬운 선택과 게으른 발상이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재검토되어야
할 민족사의 중요 덩어리가 이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것은 당대의 주역들이 사라지고, 지리산의 역사적 모습과 유적들이 여러 의도 속에서 붕괴일로에
있다는 점에서 볼때는 두려움과 초조감이 앞선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리산의 '닫힌 입'과 '회피하는 시선'을 다그쳐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 사료로써 밝혀지지 않는 부분은 살아있는 증언들을 통해서, 이를 정제하여 새로이 보충되어져야 할 것이다. 아직은 개인적으로 통한의 기억을
내뱉기를 주저하거나 현실 상황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는 익명의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에서는 비경의 지리산이
자기 양면성 속에서 어떻게 피의 역사를 감당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많은 한계점이 지적될 줄 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지리산을 깊이 인식하고
더 나아가 민족사의 사각지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풍류적인 읊조림이 아닌 쓰라린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과정을 통해서
지리산을 바로 안다는 것은 오늘날 지리산이 안고 있는 제 1의 과제라 생각한다.
여순반란사건에서부터 시작돼
이미 알다시피 지리산 유격투쟁은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당시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병장에 때 아니게 다급하게 울려 퍼진 비상나팔 소리로부터 상징적으로 시작된다. 제주도 폭동진압에 출동을 거부한다는 표면적 명분으로 당시 인사계
지창수 상사에 의해 주도된 군반란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면서 지방 남로당원들의 동조와 궐기로 폭동화된다. 약 3천여 명의 반란군은 일시에 여수,
순천을 점령하고 인근 학구와 광양, 벌교 등 3방면으로 진격하여 22일 아침에는 위 세 곳과 지리산 가까이 구례, 곡성까지 모조리 점령하게
된다. 소위 이 '여순반란사건'은 그동안 남로당의 군침투공작의 성과와 2.7 구국투쟁, 5.10 단선반대투쟁 및 그 이후의 인공수립투쟁의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앙당과의 사전 연락을 취한 계획적 봉기로서의 성격보다는 돌발적인 군반란의 성격이 강한데 이들 14연대
반란군 패잔병들은 그후 백운산과 지리산 문수골, 화엄사골, 산청 근처의 웅석봉으로 숨어들어 산악 근거지를 만들며 본격적인 유격투쟁에 들어가게
된다. 김지회가 지휘하는 반란군이 지리산 입구인구례읍에 모습을 나타낸 때는 1948년 10월 25일경이다. 이틀 후 왕시루봉 아래 문수리
계곡에서 국군토벌대와 소규모 충돌이 있고 나서 지리산으로 잠입한 듯하다. 그후 정규군과의 전투를 연상케하는 구례읍 기습공격이 두 차례 있고 나서
월동준비를 하며 소조별 분산을 꾀한다. 여수 순천을 온통 피바다로 만든 여순사건을 통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지리산이라는 넓은 지형적 요새를
근거지로 하여 14연대 반란군 잔여세력은 유격투쟁에 돌입한다 한편 여순사건 이후 남북지구로 분할하여 반란의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호남방면
전투사령부는 1949년 3월 1일 호남지구전투사령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로 확대 강화되어 토벌작전을 수행하는데 동년 4월 9일 지리산 뱀사골
반선부락에서 김지회,홍순석 등 반란 지도부를 궤멸시키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보자면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 유격대 지도부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지만 달리 살펴보면 군부반란을 통한 정규군 형태의 유격대가 종언을 고하고 순수 빨치산으로 질적 전화하는 상징적 의미도
된다. 이제껏 반란군 패잔병 1,000여 명이 지리산에 입산, 지리산 유격대의 근간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이미 거의 대부분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투항,사살된 바 있다. 잔여세력 200여 명이라는 전력상의 공백은 마땅히 지방당 야산대와 좌익 동조자들의 입산으로 메꾸어져야
했다. 남로당 지도부가 정부의 토지개혁과 미곡 강제공출 문제에 대한 농민의 불만과 빈곤을 간파하여 농촌에서의 잠재적 혁명성을 재인식하고 이를
통해 지방 야산대로 재편성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였다. 한편 지방당과 일정한 관련성하에 있으면서도 당사업과 유격투쟁을 동시 병행적으로 수행한
형태가 아니라 일관된 군사행동을 고집한 지리산 유격전구의 활동은, 호남유격전구가 지방당과 유격대가 결합되어 활동하던 바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점은 소위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남파 유격대가 1948년 11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오대산, 태백산 지역에 아무런 당적 기반 없이 무력지원차
10여 차례 내려왔다가 결국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것과 함께 유격전의 원칙에서 볼 때 중대한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송치골 회의와 백야전 사령부 토벌작전
1951년 5월 중순 덕유산 송치 골에서 열린 '남한 6개도당 위원장회의'는 남한 빨치산
투쟁의 통일적 지도체계를 확립한 중요한 회의였다. 이제껏 각 도당단위로 당사업과 유격대 사업을 병행해 실시하던 것을 분리해서 당사업은 여운철이
군사적 지도는 이현상이 각각 맡아서 행한다는 것이 송치회의의 요지이다. 즉 각 도당별로 개별 분산적으로 유격투쟁을 수행하던 것을 이현상을
정점으로 하는 사단제 체계로 통일시켰는데 그 총 거점은 지리산에 두게된다. 그러나 송치를 회의에서 이현상이 6개 도당을 상대로 설득하려 했던
사항들은 상당한 논란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각 도당 산하에 있던 유격대를 때어내어 남부군이라는 단일의 순수 군사 조직체계에 편입하는 것은
당과 유격대를 분리시키는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됐고 또 소부대를 통한 기동투쟁이 생명인 본래의 격전답지 않게 대부대로 편성하는 것은 정규전이나
진지전을 펴겠다는 의도가 아니냐 하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들 반론이 어떠했는가는 1953년 8꿜 26일 제 5차 당 해체를 결의한 소위 '빗점골
회의'에서 명백하게 보여준다. 빗점골 회의는 치골 회의의 시행결과를 두고 이현상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형태로 열리게 되는데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되게 됨으로써 이들 반론이 걸국 판정승을 거두게 된 셈이 된다. 송치골 회의에서 이현상이 제기한 문제는 1950년 11월 후평에서
이승엽이 내린 지시였다. 이승엽이 지시한 바는 일면 6,25 개전 초기 나름의 상황판단에 근거하였고 또 남로당과 북로당의 세 우위문제를 다분히
염두에 둔 일종의 종파적인 형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점은 이승엽이 이현상을 남부군 총사령관 직책에 임명한 것이 바로 당 중앙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하다. 한편으로 이승엽의 후평지시는 상황이 변하여 이미 송치골 회의때는 사문화된 명령이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즉
1959년 12월의 지시가 통신체계의 미비로 이듬해에 시행된 것도 그렇지만 그 후 1951년 8월 31일 노동당 중앙 정치위원회는 위 '94호
결정서'를 통해서 이제 막 사단제 개편을 끝낸 이쪽 상황과는 아랑곳 없이 다시 소조별로 분산 개편하라고 지시한다. 이처럼 송치골 회의는 이미
시효가 지난 사문화된 지시가 결정사항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을 결국 부인할 수 없는 격론 끝에 이현상의 뜻대로 관철되게 된다.
빨치산 유격전의 실패
남부군이 내려오면서 지리산 유격전선에 분명 새바람이 분 것은 사실인 듯하다. 7-11월까지
유격대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다. 각 전투 사례는 들지 않겠지만 거의가 큰 촌락들을 습격하는 형태다. 아마도 사단제 개편으로 거대한 몸집이 있으니
큰 상대와 싸우는 것은 당연할텐데 이것은 곧 앞서 지적한 대로 게릴라의 원칙으로부터 이탈된 모습이다. 사단제 개편의 부정적 모습이 이렇게
가시화된 셈이지만 빨치산측 지도부에서도 시정할 의사를 안보이고 연이어 운봉, 마천, 하동등을 습격하는 것은 8사단 철수 후 지리산 지역에는
강력한 군병력이 아직 진주하지 않은 것에도 이유가 있다. 1951년 11월 26일 백야전 사령부(사령관 백선엽)가 남원에 설치되고 수도사단,
8사단, 서전사 등이 배속되어 대대적인 동계토벌을 나선다. 제1기 작전은 12월 1일-15일까지 지리산을 집중 공격했고 제2기 12월
19일-1952년 1월 3일에는 전남북지역을 2개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토벌에 나섰다. 제3기 작전은 1월 9일-1월 31일까지 지리산과
기타지역에 대해 소탕전을 폈고 2월 4일 -27일까지의 제4기 작전도 역시 지리산과 인근 지역의 소탕에 주력하였다. 이 기간을 거치면서 빨치산
숫자는 남한 전체 6,911명에서 2,070명으로 대폭 감소한다. 토벌작전이 일단락되자 분산된 병력들은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하지만 워낙 심한
타격을 받았다 백야전 사령부가 해체하고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지리산 잠비 소탕을 담당하고 1952년 8월 5일 에는 남부지구 경비사령부로
개칭된다.
한편 이 당시에 노동당 중앙 정치위원회는 재산 지구당들이 도시로 내려와 인민들 속에 당의 조직
기반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111호 결정'을 내려보낸다. 이에 호웅 당시 경남도당 위원장 김삼흥이 1953년 12월 부산지구 지하당
재건공작이라는 사명을 띠고 부산시로 잠입하기도 하지만 큰 흐름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리산 지역 토벌작전은 계속되는데 한편으로는 행정, 경찰권이
3개도에 분리되어 있음으로 해서 지리산 지구에서의 토벌작업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을 시정하고 작전과 행정권을 겸임, 수행케
하는 순수 지리산 지구 토벌대가 발족하는데 그것이 1053년 5월 1일 법률 제 282호로 발족한 '서남지구 전 경찰대 사령부' 이며 전남북,
경남지역의 1시 12개군을 관장하는 정예부대 4개 전투연대로 편성된다. 빗점골에서 이현상이 9월 18일 사살되고 그 전 8월 20일 관일은
대호리에서 사살된다. 이 밖에 기록에는 김지희부대 조정기 부대장, 88부대장, 전남도당 병기대장등 거물급들이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 11월 28일 이영희가 신등면서 사살된다. 1953년 12월 1일부터 국군 제5사단과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남부경비사령부가
합동으로 동계토벌 작전을 이듬해 5월경까지 단행한다. 이 때 전남도당 위원장 박 영발, 김선우 등이 국군에 의해 사살되며 전북도당도 남덕유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토벌작전으로 53년 가을 남한 전체를 통틀어 천 명 남짓하던 빨치산이 이듬해 4월경에는 100여명에 불과하게 되어 빨치산은
실질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지리산의 유격전은 이미 여러 차원에서 실패가 예견되었다. 해방구를 차릴만한 공간이 부족했던 점에서도, 식량과 부기를
조달할 수 있는 마땅한 보급수단이 없었던 점에서도, 그리고 민중들의 지지와 협력이 없었던 점에서도 말이다. 규명되어야 할 문제와 양민 학살 사건
그러나 한편으로는 몇가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떠오른다 우선 남로당과 북로당의 지휘체계 및 갈등 문제, 중앙당과 지방당조직,유격대와의 결합 정도,
그리고 위로부터의 지도성이 객관적 현실상황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였는가의 문제를 포함해서, 이현상과 각도당 위원장과의 관련성 문제도 다시
규명되어야 할 듯 하다. 지리산에 빨치산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당국에 의해 공식선포된 때는 1955년 5월 23일이다
한편 이러한 극한적 정면대결 양상 속에서 비무장하의 지리산 인근 양민들의 피신의 폭은 더욱
좁아져 많은 양민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1960년 5월 19일,21일자 「부산일보」는 1949년 9월-12월사이에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여 명의 사람들이 좌익단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덕산 농업 창고 안에 수용되어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차례로 총살당했다는 끔찍한 사건을
기사화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여 명이 국군의 탄약운반일에 징용되어 노역임무를
마친후 사천군 새동 공동묘지에 끌려가 3연대 박모 대위로부터 총상을 당했다. 이들 사건말고도 1951년경에도 역시 대량 양민학살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다. 속칭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정확한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못했다. 그러나 위
사건들이외에 언제, 누가, 어떤이유로 해서 그랬는지 자세한 사연은 알수 없지만 중군리 구진벌,군자리 앞산, 시천면 신천국민학교, 산청읍내외
경호강변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에서 양민들이 집단총살당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한 예로 1951년 3월 12일 오후 2시 시천면 외 공리
점동부락 됫산 소정골짜기에는 피난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양민 500여 명이 11대의 버스에 실려와 김종원 인솔하의 11사단 9연대 화랑부대에 의해
총살당한 끔직한 사건도 있었다. 이와는 좀더 다른 경우지만 마천면 추성리에는 '金明杓公德碑'가 있어 당시 총살의 위기에 몰린 마을 주민들을
이장의 신분으로 온몸을 던져 구해낸 김명표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 화개면 범왕리에서는 반란군이 인민재판을 열어 우익 청년단단장, 부단장의
죄상을 심문하자 마을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호를 하며 처형을 모면케 했는데 이 점 때문에 그후에 진주한 군경에 의해서 또다른 학살을 모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수시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에 살았던 당시 양민들의
고초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빨치산의 약탈,토벌대의 닦달과 보복이 악순환을 거듭하고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곧 자신들의 생명과
맞바꾸어 지는 일로 직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제까지 지리산에서 일어났었던 피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지리산은 분명 자연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신령함을 간직한 우리의 명산이다. 그러나 지리산 어느 구역도 인간세계의 온갖 이념대결, 전쟁포화로부터 결코 독립된 예외지역으로
있을 수는 없다. 차라리 지리산은 자기 외형적 특성 속에서 더더욱 부담스러운 아픈 역사 그 한가운데에 위치했을 뿐이다.
(글 : 홍희돈 님 / 남원시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