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역사 상식
골프의 정확한 기원은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골프와 비슷한 그림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봐서는 도구를 이용해서 공을 치고 구멍에 넣는 게임은 인류의 본능적인 행위에 의한 필연적인 발전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초창기 골프의 역사는 미국골프협회에서 로마시대 시이저 황제때 로마인들이 파가니카라는 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골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프랑스의 죄 드 마이나 네덜란드의 콜벤이라는 경기가 골프로 발전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파가니카라는 게임은 병사들이 야영지에서 휴식 시간에 한 쪽 끝이 구부러진 스틱과 새털로 속을 채운 공을 치며 즐기는 경기였는데 이 파가니카를 로마인들이 1세기 무렵에 유럽을 정복하고 영국에 건너가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를 점령하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골프의 기원의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현대적인 골프를 완성한 곳이 바로 스코틀랜드라는 것이다.
1457년 스코틀랜드의 완 제임스 2세는 골프와 축구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이 법령이 공포되기 1백년 전부터 국민들에게 골프는 큰 인기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2세의 이 같은 조치는 이웃나라 잉글랜드의 전쟁위협에 대비해 남자들이 무술 연습보다는 골프나 축구에 열을 쏟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초창기의 골프는 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네덜란드에서 수입되던 골프공에 세금이 부과되었지만 골퍼들은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골프를 즐기었고 왕에게 직접 항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왕은 스포츠는 힘가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골프는 이런 요소가 전혀 없으므로(요즘 사람 중에도 골프는 전혀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스포츠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골퍼들은 왕에게 직접 골프를 시험해 보기를 권하였고 이에 왕은 몇 번 스윙을 해보았지만 공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고 말았다. 망신을 당한 왕은 다음 날 다시 골프코스에 나가 도전을 하게 되었고 왕은 그 날 이후로 열렬한 골퍼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법령과는 달리 왕족과 귀족 그리고 상인과 평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골프를 즐기게 되었다. 캐디의 어원역시 제임스 5세의 딸인 메리 공주가 프랑스 유학시절 골프를 즐기면서 학생들 중에서 공주의 클럽을 들어주는 시중을 들었는데 그들을 Cadets(아우, 생도의 의미, 불어 발음으로 Cad day)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현재의 캐디가 된 것이었다.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 골프를 도입하였는데 제임스 6세는 런던 근교 블랙히스에 1608년 6홀 코스를 만들었다. 이후 1754년 골프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코스가 정식으로 개장했다. 왕족의 보호를 받던 골프는 점차 지위를 굳혀 갔으나 또 다시 교회의 방해에 부딪혔다. 당시 교회는 왕족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교회는 안식일에 골프를 하는 행위를 신성모독을 단정하고 1593년 에딘버러에서 안식일의 골프를 금지하고 예배 시간에 골프를 하는 모든 사람은 고발당했다.
초창기 골프는 대부분 해안을 가로질러 나가 마을 어귀의 여관 근처로 추측되는 지점에서 끝나는 어부들 간의 경쟁적인 경기였을 거라고 추측되는데 그 후 잔디가 덮인 코스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코스에는 인공적인 장애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스코틀랜드에는 자연적인 코스가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페어웨이가 매우 좁고 홀의 숫자는 제한돼 항상 골퍼들로 붐볐다고 한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골프를 체계적인 경기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골프만을 위한 클럽과 공인된 규칙이 제정되었다. 최초의 골프클럽은 1744년에 젠틀맨 골퍼스 오브 리스(훗날 오너러블 컴퍼니 오브 에든버러 골퍼스로 개칭함)가 설립되었다. 18세기에는 각 골프클럽들이 자체적으로 대회를 열어 거기서 우승한 사람을 다음 해의 회장으로 선정하는 것을 관례였는데 그때 회장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실버 볼을 실버 클럽에 붙여 놓곤 했다. 1754년 소시어어티 오브 세인트 앤드류스 골퍼스는 실버클럽을 사들였고 또한 이들은 13개 조항의 정관을 채택했는데 이 정관이 세계 최초의 공인된 골프규칙이 되었고 그 결과 골프를 세계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골프역사는 구한말 외국 고문이었던 영국인들이 원산 세관 구역 안에 6홀 규모의 골프 코스를 만들어 즐기면서 시작되었다. 이때가 1900년경이었는데 일본 최초의 골프코스가 영국인 구론이 1901년에 설계한 고베로코우산이고 보면 한국의 골프역사가 일본보다 일찍 시작되었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이가 훗날 경성골프구랍부의 회원이기도 했던 일본인 다카토미 타네오였다는 것은 역사적 증거를 보다 확실하게 해준다. 그는 1937년 일본의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골프소사를 보면 구한말 1910년 원산 해변가 세관 구역 내에 영국인 고문에 의해 6홀 규모의 골프 코스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1913년 외인촌 그리고 황해도의 구미포에도 외국인의 골프 코스가 있었다고 했는데 한국인과 일본인의 출입이 금지해 그 규모를 알 수 없었고 썼다. 그 후 일제에 의해서 나라가 합병되면서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고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한국의 골프는 다시금 휴면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 상주하는 일본인들이 증가하면서 골프장이 점차 증가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효창원 골프코스(경성 골프코스)는 조선호텔에서 외국인 여행객의 서비스를 위해서 1921년 6월 1일 개장하였다. 그러나 이용객이 적어 적자를 면치못하였는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골프장은 회원 유치에 나섰고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1922년 6월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으로 아리요시추유이치가 취임했는데 그는 영국식 골프에 조예가 깊어 많은 사람들에게 골프를 전수시키는데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효창 골프코스는 개장한지 2년도 안되어서 효창원 일대가 공원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1924년 4월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때 새롭게 물색한 곳이 바로 청량리 이왕가의 능림 주변 부지였는데 또다시 정무 총감인 아리요시 추유이치의 힘을 빌어 이곳에 청량리 골프코스를 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영향을 받아 1923년에 대구에도 9홀 규모의 골프 코스가 조성되었다.
대구 골프구락부는경상북도 수성면 대명동에 위치한 9홀 규모로 전장 2,800야드에 파 35였다가 점차 회원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전장 5,590야드, 파69의 18홀로 증설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선골프연맹이 창립된 이래 1937년 9월 23일 한국 최초의 전조선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16명의 선수가 출전해 대구골프 구락부의 일본인 회원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대회는 훗날 한국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로 그 명맥을 이어진다.
효성골프코스는 1924년 4월 20일 사단법인 경성골프 구락부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1929년 6월 22일 군자리 골프코스로 옮길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고 연덕춘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홀은 18개이나 그린은 16개였으며 코스주변에 버섯이 많이 났고 그린은 샌드(모래)그린이어서 볼이 온 그린이 되면 모래에 박혀있는 볼을 꺼내고 고무래로 볼 자국을 평탄하게 긁은 다음에 퍼팅을 했다고 한다.
평양 골프코스는 1928년 11월 28일에 일본인 프로골퍼 나카카미 가츠이치가 설계와 공사와 담당하였다. 코스는 평양부의 의암리에 2,550야드의 9홀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그가 설계를 맡은 것은 경성골프구락부가 일본에서 그를 초정해 회원들의 레슨을 맡도록 한데서 인연이 됐다. 얼마 후 평양 골프 코스는 18홀로 증설하였는데 이용객의 대부분은 일본인과 철도국 직원 그리고 철도호텔의 숙박객이었다. 클럽 하우스는 철도호텔 안에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때 비행장으로 변한 코스는 해방 후 복구되지 못했다.
경성골프코스는 일명 군자리 골프코스로 불리며 당시 행정 구역상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군자리였는데 현재는 서울시 성동구 능동 438번지이다. 전조선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청량리 골프코스가 대회를 치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논의끝에 국제규모의 규격을 갖춘 골프코스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돼 코스이전을 계획하게 되고 그리고 물색한 자리가 바로 이왕가의 유릉으로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자리인 군자리였다. 30만평의 넓은 부지에 경성골프구락부의 회원이자 이왕가의 장관이었던 시노타 치사쿠가 영친왕 이은 공에 간청해 토지를 무상으로 빌렸다. 영친왕은 골프장 건설자금으로 2만원을 지원하고 3년 동안 5천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코스 설계는 설계에 조예가 깊었던 일본 최고의 아마추어 골퍼인 아카보시 로쿠로가 맡았고 혼마 도쿠오란 인물이 건설 책임을 맡았다.
군자리 골프코스는 1929년 6월 22일 정식으로 개장했는데 이는 한국 골프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가 개막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연덕춘이라는 한국 골프계의 시조와 같은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후 서울골프장과 한국프로골프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연덕춘은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골프를 시작하고 일본으로 골프 유학을 가서 결국 1941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개장 당시의 회원은 40명이었고 1941년 폐장될 때 입회금이 500원이었다. 당시의 코스 전장은 6,160야드에 파69였다. 옷차림은 닉카라는 무릎까지 오는 바지에 스타킹을 신고 와이셔츠와 같은 상의를 반드시 입어야 했는데 특히 에티켓을 지킬 줄 모르는 골퍼로 지적되면 티잉 그라운드에서 퇴장시킬 정도로 엄격했는데 요즘 세태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군자리 코스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인 1943년에 완전히 폐쇄됐는데 이유는 송진 채취와 비행장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코스는 밭으로 변했고 다시 서울 골프장으로 탄생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원산 골프코스는 당시 한국 제일의 피서지로 손꼽히는 송도원 해수욕장 부근에 건설된 코스였다. 원래 이곳은 1929년 일본인 실업인들에 의해 2,100야드의 9홀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이곳을 이용했던 시모무라 카이난이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원산 골프코스는 입회금이 없고 그린피는 내지 않고 월 5엔만 내면 골프를 즐길수 있었는데 캐디피는 주일을 계산해서 5전에서 10전이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일반 회사원과 은행원 그리고 우체국 국장이나 중학교 교사, 주재 기자, 신문사 직원등도 골프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 골프가 대중화된 요즘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어서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원산골프코스 역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부산골프코스는 1932년 2월 8일 원산골프코스에서 골프를 즐겼던 임영식이라는 내과의사가 병원을 개원하기 위해서 부산으로 내려와서 한국인 유지들과 일본 관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건설하였다. 코스는 부산 남면의 수영천 변에 위치했는데 아카보시 로쿠로가 설계를 했다고 한다. 총전장이 2,610야드에 파33의 홀로 구성되었으나 이 코스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장으로 개조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
위 내용은 오래된 골프잡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파골프 잡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