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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 낙태
(시139:1-16)
2006/06/25
오늘은 피임과 낙태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실제로 우리 교회에 필요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서 유아 세례를 받고 자라는 상황에 있는 우리 교회 상황에 피임과 낙태에 대한 가르침은 꼭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써 이런 것에 대한 설교도 했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제야 하는 것이 때가 늦은 것 같기도 합니다.
피임과 낙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차례대로 생각해 보기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피임에 대하여
먼저 피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부간의 성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생활을 통해서 부부가 가장 깊이 연합을 이루며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있는 이러한 성 생활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죄스런 것도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건전한 부부에게 성 생활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 생활은 하나님이 부부에게 주신 가장 깊은 연합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 생활이라는 것을 주셨는가에 대하여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 캐토릭의 견해입니다. 로마교에서는 성을 주신 것은 생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식의 목적 외에 성 생활은 자연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부라도 가능한 한 성생활을 절제하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개신교회에서는 이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성을 주신 것은 부부의 연합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홀로 있는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육체와 정신 전체를 서로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서 서로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구속사적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도 이와 같이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연합이 일차적이며, 자녀 출산은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견해가 더욱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얻어지게 되는 것이 2세입니다. 그래서 혼인을 하면 ‘자녀를 몇이나 둘 것인가? 언제부터 아이를 둘 것인가? 아이들의 터울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런 질문은 이전 시대에는 가질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때에는 그저 임신을 조절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으로 인해 생기는 대로 낳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녀출생도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절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피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임이란 임신을 피하는 것입니다. 임신이 되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방도를 강구하여서 임신이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피임을 우리 인간이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아닙니까? 이에 대하여서도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학적인 입장이 좀 다릅니다. 천주교에서는 자연법 즉 임신 되는 법도 하나님이 주신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공적으로 피임을 시도하는 것을 하나님의 법을 위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임신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공적인 피임을 하지도 않고, 임신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것이 바로 월경 주기를 이용하여 부부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임신이 되는 가임기를 피하여서 부부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임신을 피하여서 부부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런 방식을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적극적으로 사람이 임신이 되지 않도록 방도를 강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임신이 되지 않도록 방도를 강구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는 인간이 거절할 수 없는 자연 법도 있지만, 또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자연 질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신이 되지 않도록 방도를 마련하는 것은 이러한 자연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몇이나 가질 것인가도 사람이 계획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학에서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임신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콘돔이나 루프를 사용한다든지, 또는 영구적인 불임 시술로서 정관수술이나 복강경 수술 같은 것을 시행할 수 있는 일로서 생각합니다. 저도 이러한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더 얻을 계획이 없다면 남자가 하는 정관 수술이 부작용 없이 무난한 것 같습니다. 남자가 이러한 일에 결심을 하고 아내의 고통을 들어주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흔히 정관수술은 정력을 떨어뜨린다는 속설을 말하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피임 방법을 이용해서 적절한 피임을 실시하면서 부부 사이의 성 생활을 통하여 연합의 의미를 배워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신자들을 이런 방법을 남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이런 방법을 선하게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상은 부부 사이에서 피임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 드렸습니다.
낙태
낙태는 피임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낙태는 임신한 상태에서 생명을 제거하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낙태를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에서도 일반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낙태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입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 즉 아이를 더 가질 수 없는 상황이거나 가져서는 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만 임신하게 된 경우에 부부는 낙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구태히 예를 들지 않아도 여러분이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낙태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견해가 논쟁하고 충돌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생명권 우선론을 지지하는 쪽과 선택 우선권을 지지하는 쪽의 충돌입니다.
생명권 우선론이란 직업이나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는 일이 있어도 잉태된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생명도 보호받고 태어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입장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주로 지지되고 있는 입장입니다. 반대로 선택권 우선이란 주로 진보적인 입장에서 취하는 입장입니다. 즉 낙태는 전적으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에 해당된다는 입장입니다. 낙태를 시키든지 시키지 않든지 그것은 여성이 선택하고 결정하여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적지 않는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교회도 조건을 붙이기는 하지만 이 견해에 동의하기도 합니다. 이 주장은 여성이 자아실현과 성취를위해서 임신을 계속할 것인지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임신을 계속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신의 삶에 엄청난 고통과 좌절감을 준다면, 여성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보다는 자신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여 가부간에 선택할 권리를 여성이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태아의 생명권을 고수하려는 견해와 여성의 권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견해의 논쟁입니다.
이러한 논쟁의 배후에는 태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임신 8-10주 이전의 태아가 초점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시기의 태아는 ‘단순한 생명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아니면 임신 되었을 때에는 단순한 생명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부터 인간이 되는 잠재적인 인간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태아는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 인정하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가장 지지를 받습니다. 즉 태아는 잠재적인 인간일 뿐이지 그것을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자기의식을 가져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최소한 뇌가 조성되고 뇌 기능이 시작되는 단계 즉 뇌파가 감지되는 시점이 지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신 되고부터 8-10주가 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전의 태아는 아직 인간이라고 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의식을 가지기 전에는 부모가 결정하여 낙태를 시켜도 윤리적으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자기 아이로 흔쾌하게 인정해야 인간이 되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태아라면 그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받지를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되는 것을 엄마가 인정하느냐 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되는 것을 관계론적으로 정의하는 경우’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태아를 낙태를 시켜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기독교 안팎의 윤리학적인 입장에서 논의하고 있는 관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낙태를 인정하려는 생각들을 볼 때에 그들의 생각이 너무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권 중심적인 생각은 여자의 권리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 태아의 생명 존중이라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사람으로 자랄 잉태아가 아직 자기의식을 가질 정도로 자라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인간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수태된 이후 계속해서 성장해 가게 되어 있는 인간 배아가 어느 시부터 비로소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어느 시까지는 아직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편리를 위한 논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인간 생명이라면 처음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천주교와 보수적인 신학계 및 교회의 생각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생명을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일종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이 들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을 무조건 존중해야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의 죽음을 그토록 많이 죽도록 허용했을까요? 아시다시피 가나안에 정복하여 들어 갈 때에 진멸하도록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속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스라엘과 여러 이웃 나라들과의 싸움과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셨던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인간이라면 무조건 다 존중하실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질병과 천재지변을 통하여 죽고 사라졌던 수많은 인간들과 지금도 화산과 지진으로 인하여 수 천 수 만 혹은 수십만이 죽거나 상하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인간 생명을 존중하기나 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과연 존귀한 것일까요? 그리고 인간의 생명이란 다른 동식물의 생명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창세기에 보면 흙에서 지어진 동물들을 보고 생물라고 했고, 사람도 흙에서 지어서 생명을 불어 넣고는 그것을 생물라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은 다 같은 생물로서 별 다른 구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동물의 죽음이나 인간의 죽음이 함께 흙으로 돌아가고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과연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할까요? 저는 구속 역사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 독단적인 생각이라고 욕할지 모르지만 제 생각은 간략히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타락한 이후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는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후 인간의 신분은 그저 그 본질인 흙에 불과하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저 보고 계셨던 것이겠지요. 노아 홍수 때에 남은 사람은 단 한 가족 여덟 사람입니다. 그 외에는 다 죽였습니다. 단 한 가족을 남기신 것은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한 가족이라도 믿음으로 살아서 남도록 해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오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도록 하기 위해서 한 가족을 남겼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생명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나라 즉 구속에 참여하도록 할 때에 귀하게 여겨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구속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간의 생명은 그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어린 아이나 태아라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생명이란 동식물의 생명과 별로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시각인 것으로 생각 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하여서는 심판 하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성경의 입장이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창조 때에 지은 하나님 닮은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참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 나라에게 끊어진 죄인으로 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태아도 배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씨앗 곧 죄인의 씨앗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의 생명이라면 언제 심판을 받아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배아 때에 낙태를 통해서 죽고 태어나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 것이나, 태어나서 일생을 이 땅에서 다 살고 난 후 심판을 받는 것이나, 결국은 다 같이 심판을 받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역사상 수 없이 죽어간 인간들과 아이들과 태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죽음들은 모두가 인간의 존귀한 생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한낱 흙과 같은 존재로서 흙으로 돌아 간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인간의 배아와 태아 또는 아기라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이 낙태를 시키는 것도 자기들의 죄악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지만 이들 중에서 귀중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의 생명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삭과 야곱을 택하셨듯이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이런 생명은 아들의 생명으로 구속 되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명은 태아이든지 혹은 어른이든지 다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런 생명을 귀중하게 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하셨고, 그 후에 야곱이 그의 자녀들을 잉태할 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신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시편 139편의 말씀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나를 모태에서 조성하셨으며”(13),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16)라고 하신 말씀들도 선민이 고백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을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셨고 태에서부터 돌보셨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어버이 야곱의 고백 같기도 합니다. 또 아담이 지음 받을 때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태에서 지음을 받을 때와 역시 연결이 됩니다. 땅에서 지음을 받는 아담의 모습과 태속에서 형성되는 사람의 모습을 서로 겹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인간 생명권을 생각하고 낙태를 반대하는 것도 어느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참으로 존중해야 하는 것은 언약의 자손의 생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믿는 자의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생명은 태아든지 배아든지 존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도 피임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임신이 되었다면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로 생각하고 존귀하게 여기며, 낙태시키는 일 같은 무서운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택된 생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령 장애가 있는 경우이거나 강간을 당해서 임신이 된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경우에도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다면 낳아서 기르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로 인하여 성도에게 아픔과 상처가 크기는 하겠지만, 또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짐을 도무지 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후에는 하나님께 맡기고 낙태를 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택 중에 있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이 경우 어쩌면 천당에 가면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낙태시켰던 아이를 천당에서 만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이 생각은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라면 기도하고 의논하는 중에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낳게 하셔서 성도로서 살게 하시겠지요. 그리고 만약 택하시지 않는 생명이라면 낙태를 허락하시기도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랬든지 저랬든지 함부로 낙태를 시켜야 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의논하면서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성도는 생명권이나 혹은 여성의 선택권을 가지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과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