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제주도 일주 1
-행하지 못할 백가지 이유를 찾기 보다는 지금 당장 떠나라!
어느 틈에 나의 신조가 된 이 문구가 자다가도 나를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다.
제주 입도 5개월 만에 떠날 기회가 온 것이다.
과연 자전거 세계일주가 나을까? 오토바이 세계 일주가 나을까?
고민을 시작한 것은 2년 전 부터다. 가족의 동의를 구하는데 1년, 내 의지의 나약함에 망설이는데 1년을 허비했다. 허비라는 단어로 지난 1년을 표현하면 허송세월로 보일까봐 두렵다.
서울에서 내려온 조카가 가게를 대신 볼 테니 도전해 보란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 다른 이들이 쓴 세계일주 후기 글만 가지고 뭐가 좋은지 판단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나는 조카의 응원에 힘입어 바로 오토바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대림 시티에이스 2로 일주를 하고 싶은데 오토바이 있습니까?”
“스쿠터 밖에 없어요.”
20여 년 전, 대림 시티100오토바이로 5년 동안 장사를 했었기에 나는 스쿠터보다 더 자신이 있었다.
“그럼 125cc 혼다 디오로 부탁합니다.”
연비가 1리터에 51km를 간다기에 나는 과감히 디오를 선택했다.
36시간 빌리는 데 45,000원 이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나는 오토바이 센터로 차를 몰았다. 길가에 트럭을 세우고 렌탈 계약서를 작성했다.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고 액셀에 힘을 주었다.
오토바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박차고 나갔다.
일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길을 가는데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 갑자기 나를 붙잡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을 때의 그 당혹감이라고나 할까?
내가 상대의 여성이 마음에 들어 말을 거는 것과는 분명 다르지 않은가?
기름을 가득 채우고 해안도를 타는데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을 후벼 판다. 누군가 그랬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내 가슴은 쿵쿵 뛰기만 했지 대체 뭘 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내가 행하는 그 길이 나의 길이야!’
쿵쿵 뛰는 가슴이어도 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목을 타고 가슴으로 쓸어내리는 한기는 서늘하다 못해 아팠다.
‘그래 바람아! 너희가 호락호락 하지 않구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트럭으로 갔다. 점퍼를 꺼내 입고 장갑을 끼었다. 그냥 걸을 때의 체감온도와 오토바이를 탔을 때의 체감온도는 5도 정도 차이가 나 보였다.
점퍼를 입고 헬멧을 쓰고서야 추위는 사라졌다.
용두암을 벗어나 이호 테우 해변을 거쳐 도두 항에 도착하고서야 나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이제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감이 밀려왔다.
지금 나에게 오토바이는 애마였고 나는 성난 애마를 다루는 조련사였다.
성난 애마가 낯설어 내가 주저할 때 애마는 오르지 못할 산 같았고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의 조련사가 되어 그를 어루만질 때 애마는 가녀린 소녀 같았다.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 오토바이나 자전거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보아왔다. 어떤 이는 로시난테, 어떤 이는 돈키호테, 어떤 이는 세바스찬, 어떤 이는 짱구…….
나도 멋진 이름을 오토바이에게 지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딱히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디오? 디오도 나쁘지 않은걸’
오토바이는 도로에 바퀴를 내리고 아스팔트를 끌어당기며 겨우겨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로에 바퀴를 내리고 아스팔트를 밀어내는 느낌이다.
휘어진 도로는 휘어지면서 밀어내고 좁아지는 도로는 속도를 줄이면서 밀어낸다.
자전거가 도로를 끌어당기는 것이라면 오토바이는 당겨놓은 도로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애마는 외도 어느 한가한 보리밭을 달렸다.
누렇게 익은 보리이삭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수줍음을 모를 때 벼는 어느 외진 논 하우스 모판에 심겨져 못자리란 이름으로 생을 시작한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데 보리는 익을수록 하늘을 향해 떳떳하다. 세상은 벼와 보리를 차별하지 않는다. 다만, 보리는 보리대로 벼는 벼대로 인간의 선택에 따라 운명을 결정지을 뿐이다. 나는 누구의 선택에 따라 내 운명을 맡길 것인가? 길에게 물었지만 길은 다만 길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애월을 지나 곽지 과물 해변에 도착할 때 오토바이는 이제 잘 길들여진 백마 같았다.
내 뛰는 가슴에 장단 맞춰 달릴 줄도 알았고 내 호흡의 격정에 녹아들어 저 푸른 바다 물결에 엔진소리를 묻어놓을 때도 있었다.
잠시 시동을 껐다.
곽지 과물 해변의 바닷물이 연녹색으로 출렁였다. 남색의 두려운 바다가 아닌 연초록 바다였다. 바다는 새봄 한라산 숲 터널의 가녀린 잎이 막 움트기 시작해 차마 만지기도 미안한 연초록 풀빛이다.
한라산의 백록담 언 눈이 이제 막 녹아 개천 속으로 흐르다가 바다가 만나는 어느 외진 곳에서 겨우 솟구쳐 나오고선 이내 바다로 풍덩 빠져버리던 그 여리고 시린 물빛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하얀 모래사장…….
나는 잠시 현기증을 일으켰다.
이곳이 피비케이츠가 꿈꾸던 영화 ‘파라다이스’ 같기도 했고 부룩쉴즈가 처음 성에 눈뜨던 영화 ‘푸른 산호초’ 같기도 했다.
나는 하얀 모래사장에 멍 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가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자주 가던 협재해변 대신 이번엔 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나는 애마를 산으로 끌고 갔다.
새별 오름이다. 얼마 전 달집태우기를 한다며 떠들썩했던 그 오름에 올라 늘 올려다보며 살았던 내가 이번엔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것을, 사는 대로 살면 되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참 편한 세상이 아니던가?
오토바이를 타다보니 다리가 아프다. 마치 컴퓨터에 오래 앉아 있으면 피가 통하지 않아 다리가 아픈것처럼, 그래서 지금 오르는 이 오름이 나는 좋다.
뙤약볕아래에서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름 아래에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올라갔다.
걷는 것은 자전거처럼 도로를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요. 오토바이처럼 도로를 밀어내는 것도 아니다. 걷는 것은 다만 내딛는 것이다.
길에 발을 내 딛을 때 길은 길의 역할에 충실했고 발은 길 위에서 행복했다.
디뎌 나가라고 만든 것이 발이라서 발은 길 위에서 정처없었고 길의 높낮음을 탓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상이다. 포개지고 포개지다가 벌어진 것들이 오름이다. 수많은 오름들이 듬성듬성 퍼져있다. 시야가 열리고 하늘이 풀려서 천하가 내 것 같았다. 나는 호령하지 않았다. 다만 천하가 알아서 내 아래에 있었고 나는 왕처럼 서 있었다. 멀리서 수학여행을 온 버스 대여섯대가 멈췄다. 그리고 우르르 무리지어 몰려왔다.
‘저들이 신하로구나!’
웃음이 났다.
‘장하다. 정녕 깨어있는 선생님과 제자들이로구나.’
나는 그들의 땀방울을 사랑한다. 비록 선생님이 “작은 언덕일 뿐이다. 그러니 다들 올라갔다 얼른 내려오자”라고 그랬더라도 지금 정상에 오른 너희들을 나는 사랑한다. 시간 지난 어느 날 몸살 나게 그리운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여기 새별 오름을 기억해 다오.
수학여행단의 왁자지껄함을 피하고자 서둘러 하산했다. 새별 오름을 거의 다 내려갔을 무렵이다.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