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기(緣起)된 세상을 보는 세 가지 방법
- 김경윤 「달빛 정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이 세상 모든 것(법)을 우리 마음이 지었다(연기)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세상이 펼쳐지는 순간 내 마음 작용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나의 지난 삶에 의해 다시 새롭게 이해된 세상입니다. 즉, 세상 자체가 아니라 나에게 인식된 세상이며, 나의 마음 작용과 관계하여 펼쳐진 세상입니다.”(목경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 89쪽)
그런데 보통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와 세상은 나뉘어 있고 내가 그 세상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대중들의 생각이 전도된 분별 망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부처님은 다양한 말씀으로 연기법을 설명합니다. 그 설명법 가운데 십이입처, 십팔계, 오온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방법들은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法)이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작용에 의해 드러난 세상임을 일깨워주고자 다양한 측면에서 말씀하신 가르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분별 망상을 빨리 내려놓으라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목경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 92쪽)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달빛 정사
- 김경윤
밤새 달빛 그리도 밝더니만
새벽 목마름 달래려고 찾아간 세심당(洗心堂) 돌샘가엔
어젯밤 달님이 놀다 간 흔적 가뭇없고
산 그림자 모로 박힌 샘물에선 단내가 나네요
아마도 밤새 동백나무와 흥건히 젖어 놀던 상현달이
새벽녘에 뒷물이라도 하고 간 걸까?
나도 몰래 불경스런 생각에 귓불이 붉어져
표주박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글쎄 등 뒤의 동백나무는 또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붉어진 꽃송이 툭! 툭! 떨구네요
일순 무슨 우주의 비밀이라도 엿본 양
귓속이 먹먹하고 가슴이 다 쿵쿵거려
한참을 말없이 동백나무 곁에 서 있다
찬물에 얼굴 씻고 일어서는데
저 건너 법당에선 새벽 염불소리 들리고
그새 문바위에 올라선 말간 해는
어두운 산그늘을 지우고 있네요
시를 읽으면 풍요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런 풍요로운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 시인의 마음입니다. 시인의 마음 작용이 그의 세계를 연 것입니다. 어떤 세계냐 하면 모든 것이 인연으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시를 읽는 내내 그 감각 방식이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선 밤새 달빛이 그리 밝았던 것과 나의 새벽 목마름이 무관하지 않습니다. 밤새 달빛이 그리 밝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있었던 것이고, 그로 하여 깊이 잠 들지 못하고 새벽 목마름에 깼던 것입니다. 그냥 목마름과 관련되어 있다면 냉장고 열고 차가운 물을 먹으면 될 일이지만 어제의 산란한 마음도 있고 하여 “세심당(洗心堂) 돌샘”을 찾습니다. 이름도 ‘마음을 씻는 돌샘’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깨끗하게 씻긴 상태에 보인 세상은 어떻습니까?
“어젯밤 달님이 놀다 간 흔적 가뭇없고/ 산 그림자 모로 박힌 샘물에선 단내가 나네요”. 샘물이 그냥 물이 아닙니다. 보통 때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 달님과 산 그림자로 이어진 샘물입니다. 내 마음에 낀 잡스러운 생각을 씻어내면 인연으로 이어진 온 세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아마도 밤새 동백나무와 흥건히 젖어 놀던 상현달이/ 새벽녘에 뒷물이라도 하고 간 걸까?/ 나도 몰래 불경스런 생각에 귓불이 붉어져/ 표주막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글쎄 등뒤의 동백나무는 또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붉어진 꽃송이 툭! 툭! 떨구네요”. 사물들 사이가 막힘 없이 생명의 힘으로 이어져 충만하게 펼쳐진 세상입니다. 생명의 흐름이 ‘나-산 그림자-샘물-동백나무-상현달-새벽 뒷물’이라는 사사(事事) 물물(物物) 사이를 막힘없이 흐릅니다. 인연이 달빛 정사라는 시간의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이 시간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흐르는 시간과 다른 달빛 정사로 꽃 피고 지는 사건으로서의 시간입니다). 돌샘에서 단내가 나는 것도, 산 그림자가 샘물에 모로 박힌 것도, 내가 귓불이 붉어지는 것도, 붉어진 동백 꽃송이 툭! 툭! 떨어지는 것도 그런 사건으로서의 시간의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천지의 인연이 꽃 피고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감동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일순 무슨 우주의 비밀이라도 엿본 양/ 귓속이 먹먹하고 가슴이 다 쿵쿵거려/ 한참을 말없이 동백나무 곁에 서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에 가득한 인연 관계를 느끼니 어찌 풍요로운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마음이 그린 법계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펼쳐진 위대한 한 몸 한 생명의 세상을 축원하듯 “저 건너 법당에선 새벽 염불소리 들리고/ 그새 문바위에 올라선 말간 해는/ 어두운 산그늘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 작용에 의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어디 있던 것입니까?
- 우리 마음속에 있던 것입니다. 욕탐 없는 십이입처(十二入處)로, 십팔계(十八界)로, 오온(五蘊)으로 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시인이 어젯밤 생각에 붙들려 세심(洗心)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잔뜩 마음에 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소위 “달빛 정사”라는 우주적으로 가득한 생명적 흐름의 풍요라는 연기적 사건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가득 채운 욕탐의 분별심을 씻어내 청정한 마음이 되면 “일순 무슨 우주의 비밀이라도 엿본 양” 우주적 연기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느낄 수 있는 까닭은 그 마음에 의해 그 세상이 펼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중표님은 연기한 법의 공함을 보는 세 가지 방법을 다음처럼 안내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 속에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업을 지으며 살아가는 마음이나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우리의 삶 속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자아(自我)는 없다.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속하는 자아 없이 여러 인연을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참모습이다. 우리는 업보로 존재할 뿐,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자아로 집착하고 있는 오온은 업, 즉 삶의 결과로 나타난 과보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삶을 통해 새로운 오온이 끊임없이 상속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고, ‘업보는 있으나 행위자는 없다’는 것이 공(空)의 의미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우리의 삶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 삶을 살고 있는 행위자[作者]로서의 몸[色]도 없고, 마음[受想行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듣는 지각행위를 하는 주관적 자아[眼耳鼻舌身意]와 보이고 들리는 객관적 대상[色聲香味觸法]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십이입처(十二入處)이다. 우리가 실재하는 자아와 세계, 즉 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이러한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것이다. 십이입처에서 오온이 연기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십팔계(十八界)와 십이연기(十二緣起)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통해서 괴로움의 생성과 소멸을 보여주는 교리가 사성제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가르침이다.”(이중표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178쪽-179쪽)
-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