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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川任氏(司正公派)
 
 
 
카페 게시글
★☆ 풍천임씨 인물 스크랩 땀 흘리는 사명대사 비문
邃菴(任文鎬) 추천 0 조회 95 13.01.10 18:4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땀흘리는“사명대사 비문”)

 

 

 

 

 

== 비문의 격식과 내용 ==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書)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개 비명병서(碑銘幷序)

 

 

 

 

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이나,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은 비송(碑頌)

 

 

 

 

또는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서(序)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은 4언·5언·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銘)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 詩經>의 송(頌)이나 아(雅)와 같은 전아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명이 없는 비기는 원래 한문 문체의 기(記)에서

 

온 것으로 기사(記事)를 뜻하는데, 사적비 따위의 사실을 기록하는

 

비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비기의 형식을 취한다.

 

 

 

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

 

 

 

 

?我 昭敬大王在有之二十五年에 日本賊이 大擧兵入寇하여

 

월아 소경대왕재유지이십오년에 일본적이 대거병입구하여

 

主上이 鄙在西隋하니 凶鋒이 彌滿八路하여

 

주상이 비재서수하니 흉봉이 미만팔로하여

 

中外食焉者多雉兎逃하고 賊遂肆意蹂躪이라 維時에

 

중외식언자다치토도하고 적수사의유린이라 유시에

 

松雲大師惟政은 佛者流也라 飛錫入高城하여

 

송운대사유정은 불자류야라 비석입고성하여

 

諭賊勿嗜殺하니 賊見其儀容 凜然卽起敬하여 戒基徒하니

 

유적물기살하니 적견기의용 름연즉기경하여 계기도하니

 

由是로 領東九郡이 得免屠戮之慘이라

 

유시로 영동구군이 득면도륙지참이라

 

旣而慷槪語諸僧曰 吾等의 優游飮啄은 皆聖恩也라

 

기이강개어제승왈 오등의 우유음탁은 개성은야라

 

今國危至此어늘 坐視不救

 

금국위지차어늘 좌시불구

 

可呼아하고 乃募衆至數百하여

 

가호아하고 내모중지수백하여

 

?赴順安하니 時에 師之師休靜이 方總諸道僧兵타가

 

극부순안하니 시에 사지사휴정이 방총제도승병타가

 

辭以老하고 擧師自代어늘 遂從體察使柳成龍 協同天將하여

 

사이로하고 거사자대어늘 수종체찰사유성룡 협동천장하여

 

破平壤賊하고 隨都元帥權慄下嶺南하여 婁有斬獲하니

 

파평양적하고 수도원수권률하영남하여 루유참획하니

 

進階堂上하고 使隨劉總兵綎하여 入倭營諭意淸正할세

 

진계당상하고 사수유총병정하여 입왜영유의청정할세

 

三往三返에 盡得要領이라 正이 門 「朝鮮에 有寶乎아」

 

삼왕삼반에 진득요령이라 정이 문     조선에 유보호아

 

曰「無有오 寶在日本하고 若頭是也」라하니 正이 色沮라

 

왈   무유오   보재일본하고 약두시야    라하니 정이 색저라

 

及還에 上이 召至內?하여 歷問事情하고 仍 敎曰 「昔에

 

급환에 상이 소지내달하여 력문사정하고 잉 교왈      석에

 

劉秉忠 姚廣孝는 俱以山人으로 勳在國家 하니

 

유병충 요광효는 구이산인으로 훈재국가 하니

 

爾若長髮이면 百里之寄와 三軍之命이 無所不可라」한대

 

이약장발이면 백리지기와 삼군지명이 무소불가라    한대

 

師辭以不敢커늘 上亦不屈其志하고 特給武庫鎧杖하여

 

사사이불감커늘 상역불굴기지하고 특급무고개장하여

 

?抄擊餘賊이러니 已又助築城?할세 飭儲胥完保障하고

 

비초격여적이러니 이우조축성비할세 칙저서완보장하고

 

卽上印綏하여 抗章乞休호대 不許하니라

 

즉상인수하여 항장걸휴호대 불허하니라

 

丁酉에 倭再逞커늘 從麻劉二督府하여 具有勞?일세

 

정유에 왜재령커늘 종마유이독부하여 구유로예일세

 

特陞嘉善하여 拜同知中樞하고 辛丑에 又築釜山城하니라

 

특승가선하여 배동지중추하고 신축에 우축부산성하니라

 

甲辰에 奉國書하고 往日本하니 諸倭 相顧驚憚하여

 

갑진에 봉국서하고 왕일본하니 제왜 상고경탄하여

 

受約束惟謹이라 還被虜男婦三千餘口하고 復 命에

 

수약속유근이라 환피로남부삼천여구하고 복 명에

 

加階嘉義하고 優錫賚以?之하니라 是後年益老하여

 

가계가의하고 우석뢰이장지하니라 시후년익로하여

 

乞骸하고 自雉嶽으로 入伽揶山이라니 至庚戌秋하여

 

걸해하고 자치악으로 입가야산이라니 지경술추하여

 

示寂하니 世壽六十七이요 僧夏五十七이라

 

시적하니 세수육십칠이요 승하오십칠이라

 

茶毘之夕에 得舍利一具하여 藏之石鍾하고 建?堵波하니라

 

다비지석에 득사리일구하여 장지석종하고 건솔도파하니라

 

師는 豊川任氏也니 父守成이 娶達城徐氏하여

 

사는 풍천임씨야니 부수성이 취달성서씨하여

 

生師於嘉靖甲辰하니 幼有異質하고 稍長讀書타가

 

생사어가정갑진하니 유유이질하고 초장독서타가

 

忽有契悟하여 投黃嶽山?髮하고 字曰離幻이라하고

 

홀유계오하여 투황악산치발하고 자왈리환이라하고

 

才思夙詣하여 爲蘇齋 思菴 高峯 霽峰諸名公所賞識하고

 

재사숙예하여 위소재 사암 고봉 제봉제명공소상식하고

 

與詩人崔嘉運許美叔 林子順 李益之輩로 遊하여 爲詩에

 

여시인최가운허미숙 임자순 이익지배로 유하여 위시에

 

淸酒可觀이라 有泗溟集하여 行于世나 然이나 斯皆師之土

 

청주가관이라 유사명집하여 행우세나 연이나 사개사지토

 

?粃糠이라 余固不足道也오 唯是稟氣豪逸하고

 

저비강이라 여고부족도야오 유시품기호일하고

 

自有達識明智하여 從異敎而不爲其敎所?하고

 

자유달식명지하여 종이교이불위기교소유하고

 

出世而懷?亂之志하며 離倫而篤衛國之誠하고

 

출세이회미란지지하며 이륜이독위국지성하고

 

當賊勢潮驅하여 雰??天일세 忠義鬱律을 不能自禦하여

 

당적세조구하여 분몽잡천일세 충의울률을 불능자어하여

 

片言이 折伏群醜하고 尺劍이 建立殊績하니 有不可以談空

 

편언이 절복군추하고 척검이 건립수적하니 유불가이담공

 

說幻之一枯禪으로 比而倫之로다 聖敎에

 

설환지일고선으로 비이륜지로다 성교에

 

引古英傑策勉者蓋亦深知其抱負之不常則 豈不爲一時之毅夫

 

인고영걸책면자개역심지기포부지불상즉 기불위일시지의부

 

蓋代之衛男也哉아 嶺南之密陽에 有表忠祠하니

 

개대지위남야재아 영남지밀양에 유표충사하니

 

以享師而休師는 以有最初勘難之功하고 靈圭는

 

이향사이휴사는 이유최초감난지공하고 영규는

 

以殲賊著烈하여 終又殉節하고 與師??이러니 肅宗朝命官

 

이섬적저열하여 종우순절하고 여사병체이러니 숙종조명관

 

供祭하고 當?又命給復하니 所以樹風聲勸來後也라

 

공제하고 당저우명급복하니 소이수풍성권래후야라

 

師嘗存髥不去하여 其長이 至帶하니 亦異矣라

 

사상존염불거하여 기장이 지대하니 역이의라

 

今遺像이 留在祠中하니라 余雅不喜爲釋子作文字하여

 

금유상이 유재사중하니라 여아불희위석자작문자하여

 

有來請이면 輒麾之로대 唯師事跡은 絶奇하여

 

유래청이면 첩휘지로대 유사사적은 절기하여

 

義難一例斥却일세 遂爲之銘하니 其詞에 曰 人有五倫에

 

의난일례척각일세 수위지명하니 기사에 왈 인유오륜에

 

一則君臣이로다 臨難奮義에 有國無身이로다

 

일즉군신이로다 임난분의에 유국무신이로다

 

斯爲正理요 名敎攸遵이로다 呪梵持鉢은 佛也匪人이나

 

사위정리요 명교유준이로다 주범지발은 불야비인이나

 

獨守空門하여 自甘夷淪이로다 視世危亂하고 寧肯嚬呻가

 

독수공문하여 자감이륜이로다 시세위란하고 녕긍빈신가

 

偉哉松雲은 跡幻心眞이로다 存髥至膝하니

 

위재송운은 적환심진이로다 존염지슬하니

 

有燁精神이로다 想厥雅意호니 不屑緇紳이로다 蠻警卒起에

 

유엽정신이로다 상궐아의호니 불설치신이로다 만경졸기에

 

誓淸?塵이로다 ?兵選徒에 師律一新이로다 楡岾救衆에

 

서청분진이로다 부병선도에 사률일신이로다 유점구중에

 

化彼兇?이로다 九郡安帖하여 全活惟均이로다

 

화피흉은이로다 구군안첩하여 전활유균이로다

 

西山讓先하니 困徹重新이로다 歷載從戎에 箕疊鼎津이로다

 

서산양선하니 곤철중신이로다 역재종융에 기첩정진이로다

 

鹵獲侯多에 特侈緋銀이로다 釜營三返에 尤竭?恂이로다

 

노획후다에 특치비은이로다 부영삼반에 우갈침순이로다

 

說寶語壯에 氣薄秋旻이로다 以舌代鋒하여 遠?强隣이로다

 

설보어장에 기박추민이로다 이설대봉하여 원섭강린이로다

 

七年兵戈에 功在南民이로다 聖情眷?하여 諭敎諄諄이로다

 

칠년병과에 공재남민이로다 성정권이하여 유교순순이로다

 

曰昔劉姚는 勳比麒麟이로다 爾能屈志하여 佑我昌辰이로다

 

왈석유요는 훈비기린이로다 이능굴지하여 우아창진이로다

 

百里三軍은 嘉命可申하니 師拜稽首하여 其敢逡巡가

 

백리삼군은 가명가신하니 사배계수하여 기감준순가

 

臣老無能하여 願垂慈仁이로다 祗林道場에 猿鳥相親이

 

신로무능하여 원수자인이로다 지림도장에 원조상친이

 

是臣本懷니 困款畢陳이로다 翩然歸臥에 雉嶽??이로다

 

시신본회니 곤관필진이로다 편연귀와에 치악인순이로다

 

恩?奏疊은 表節之純이로다

 

은장주첩은 표절지순이로다

 

毫光遽?하니 法運終湮이로다 塔廟湧空에 玄珠示珍이로다

 

호광거비하니 법운종인이로다 탑묘용공에 현주시진이로다

 

凝川報祀에 永綏千春이요 遺像在堂하니 爽氣??이로다

 

응천보사에 영수천춘이요 유상재당하니 상기온인이로다

 

給需賜復하니 寵章式頻이로다 惟此一着은 蓋飭戎?이니

 

급수사복하니 총장식빈이로다 유차일착은 개칙융균이니

 

非如前代의 渠敎是因이로다 三師薺享에 共作主賓이로다

 

비여전대의 거교시인이로다 삼사재향에 공작주빈이로다

 

酬功彰烈하여 施及無垠이로다 我述其事하여

 

수공창렬하여 시급무은이로다 아술기사하여

 

刻之貞珉이로다 爰??子로 師義寔循이로다 毋泥虛寂하고

 

각지정민이로다 원비추자로 사의식순이로다 무니허적하고

 

追師濟屯하라

 

추사제준하라

 

崇禎後再壬戌 十月 日立

 

숭정후재임술 시월 일립 *崇禎1年 戊辰(仁祖6年):1628年*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李宜顯 撰

 

대광보국숭록대부령중추부사 이의현 찬

 

嘉善大夫行弘文館副提學知製敎 金鎭商 書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지제교 김진상 서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兪拓基 篆

 

대광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 유척기 전

 

 

 

 

 

*(원문 해석)*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

 

 

 

아, 우리선조 임금 25(1592)년에 일본 놈들이 많은 군사를 

일으켜 침략을 하니 선조는 서북 신의주 변방으로 피난하시고

악한 무리들이 팔도에 침입함에 안 밖으로 국록을 먹은 자들은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을 다니니, 적은 드디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짓밟았다. 이때 송운대사 유정은 불교를 닦고 있었는데

석장을 짚으시고 고성에 들어가서 적에게 살상을 즐기지 말라고

타이르니 적이 대사의 그 위엄이 늠름하신 것을 보고는 바로

일어나 공손히 절하고 그 무리들을 훈계하니 이로 말미암아

영동의 9군은 비참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정은 강개한 어조로 모든 스님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잘살고 있는 것은 모두 임금의 덕택이며 나라의

위태함이 이에 이르렀거늘 어찌 앉아서 보기만하고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수 백 명을 모집해 급히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 송운대사의 스승인 휴정은 방총제도승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늙었으므로 사퇴하고 사명대사를 천거하여 자기의

대를 이어서 드디어 유성룡을 따라 명나라장수와 협동하여

평양의 적을 파하고 도원수 권율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 수차례

적을 참획하였으므로, 임금께서 감탄하시어 당상관을 제수하시고

 유총의 병정을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왜군의 영에 들어가 가등청정을 회유하는데 세 번을

왕복하여 그 요령을 얻은 것이 많다. 가등청정이 조선에 보배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으니

네 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니 청정의 낮 빛이 창백했다고 한다.

대사가 돌아오자 임금이 내당에 불러 정탐한 왜적의 정세를

낱낱이 묻고 전교하기를 옛날에 유병충과 요광효는 모두

선인으로써 국가에 공훈이 많더니 대사도 만일 머리를 기르고

속인이 된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의 명을 무엇이든지 맡기리라

하셨으나,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 뜻을 굽힐 수 없으므로 특히 갑옷과 무기를 하사하여 남은

적을 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군량미와 병기 등을 굳게 보완하고 곧 관직에서 물러나 나이가

많으므로 쉬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정유(1597)년에 왜적이 다시 침입함에 대사는 명나라에서

온 마유와 유정을 따라 갖은 포악을 해온 왜적을 평정하였다.

임금께서는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려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신축(1601)년에 또 부산산성을 쌓고 갑진(1604)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니 모든 왜놈이 서로 돌아보고 놀래며

두려워하였다. 오직 삼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남녀 삼천 수 백 명을

데리고 와서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가의대부에 올리고 말과 옷감 등을 내리어 포상하였다.

그 후 대사는 나이가 많음으로 사직하고 치악산과 가야산에

들어가 경술(1610)년 가을에 별세 하였으니 세수 67세요 법랍은

57세이다. 장사 하던 날 저녁에 사리 한 과를 얻어 석종에

간직하고 부도를 세웠다.

대사는 풍천 임씨이며 아버지 수성이 달성 서씨에게 장가드시어

가정 갑진(1544)년에 대사를 낳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차차

자라면서 글을 읽다 홀연히 깨닫고 황악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자는 이환이며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나니 소재 사암,

고봉, 제봉 같은 여러 높은 사람들과도 잘 알게 되고, 또 시인

최가운, 허미숙, 임자순, 이익지 등과도 시로서 놀게 되는데

시를 주고받는 것이 훌륭하였다. 사명집이 있어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가 대사의 한 찌꺼기만 남은 것이며

진실한 것은 볼 수 없어 정녕 말할 것이 못된다.

품기가 호일하고 사리에 달관하는 식견이 있고 지혜에 밝았다.

불교에 쫓았는데 그 교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에 나와서

난리를 그치게 할 뜻을 품었으므로 인륜을 떠났으나

나라를 지킬 성심이 돈독하여 적의 세력이 호수와 같이

밀려들어 온 나라가 어지러운 때 명나라 장수들을 맞이하되

능히 막지 못한 것을 한마디 말로서 뭇 왜를 굴복시키고

한자의 칼로서 뛰어난 공훈을 세우니 공을 말하고 환을

말하는 한 선(중)에 비할 바 아니다.

임금께서도 옛날의 영걸에 비교하여 그 포부가 보통이 아닌

것을 잘 알 수 있으니 어찌 한 시대의 의부가 되고 한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영남 밀양 표충사에서 사명대사를

향사 하는데 휴정대사는 처음에 난을 감당한 공이요,

영규대사는 적을 섬멸한 공이 현저하고 또 순절하였으므로

대사와 함께 향사한다. 숙종대왕 때 명령을 내리어 제수를

관에서 주었고 지금 임금께서 또 명하여 복호를 주니,

이것은 아름다운 풍속을 후세에 권장하는 까닭이다. 대사는

 일찍이 수염을 깍지 아니하고 그 길이가 띠에 까지 이르니

또한 훌륭하였다. 지금 유상이 표충사 영당에 있다.

내가 본래 스님에게 문자를 지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글을 지어 달라는 청이 오더라도 거절 하였으나, 오직 대사의

사적은 특히 훌륭하고 뛰어났으므로 참아 의례상으로 다른 것과

같이 물리치지 않고 드디어 새기게 되니, 그 말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오륜이 있으니 첫째는 군신이다. 전쟁에 나아가 의를

위해 분기하니 나라는 있고 몸은 없었다. 이것이 정리요 명교를

따르는 바이로다. 범서를 읽고 바릿대를 가지면 부처요 사람은

아니다. 홀로절만 지키고 불경만 읽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세상의 위란을 보고 어찌 가슴속에만 신음할 것인가.

거룩하다! 송운대사의 행동은 환이요 마음은 진이다.

수염이 무릎에 이르니 그 정신이 더욱 빛났다. 그 본뜻을

생각하니 수행자는 의관에 만족함이 아니로다. 임진왜란이

졸지에 일어났음에 난리를 밝히기로 맹세하고 군사를 모으니 군사의

규율이 새로워 졌다. 유점사에서 중생을 구제하니 감화가

왜적에도 미쳐서 아홉 고을이 편안하니 사람들을 고루 살린

것이다. 서산대사가 먼저 하기를 사양하고 임금에게 알리더라.

군사를 지낸 때를 생각해 보니 평양과 정진이다. 노획이 곱으로

많으니 비단과 은이 융숭하였다. 부산적영에 세 번이나

갔다 왔을 때는 정성을 들여 힘을 다하였고, 보배를 말을 하니

그 말이 장하였으며 기운이 하늘을 덮었다. 혀로서 칼날을

대신하니 멀리 강한 이웃이 항복하였다. 칠년전쟁에 공이

백성에게 있었도다. 임금이 갸륵하게 생각하고 교서를 내려

순순히 이르기를 옛날 유병충과 요광효는 그 공훈을 기린에

비함직 하니 너도 능히 뜻을 굽혀 속세에 나와 나를 도운다면

백리의 땅과 삼군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스님은 절하고 이마 숙이고

“감이 할 수가 없나이다. 신은 늙어서 무능하옵니다. 바라오니

인자하심을 드리우시어 다만 산속에 들어가 잔나비와 새,

짐승과 서로 친하게 해주신다면 이것이 신의 본뜻입니다.”하며

지성으로 아뢰고 편안히 돌아와 치악산에 들어갔다.

은혜와 상을 거듭 내리니 표절이 순수한데 호광이 갑자기

사라지므로 법운이 마침내 기울어 졌다. 탑 묘는 공중에 솟았고

현주는 진귀함을 보았다. 밀양무안에 있는 표충사는 천추에

길이 편할 것이다. 유상이 사당에 있으니 상쾌한 기운이 고요히

서렸도다. 오직 이와 같이 배향하는 것은 대게 제사 받들기를

신칙하여 이전과 같이 하지 아니하니 그 가르침이 이에 인함이요

세분의 대사를 함께 향사하니 서로가 주빈이 되게 함이로다.

공에 보답함을 창열이 들어내어 깊이 후세에 미치게 하였다.

내가 그 일을 쓰고 정민에 새김은 스님들로 하여금 스승의

의리를 따르게 함이니 공허한 적막함에 빠지지 말고

스승을 따라 환난을 구제할 것이다.

조선영조 18년 임술(1742)10월에 세우다.

대광보국승록대부령중추부사 이의현 찬.

가선대부행홍문관부제학지제교 김진상 서

대광보국승록대부행판중추부사 유척기 전.

(2013年 1月 9日 邃 菴 任 文 鎬)

 

[空門] (1)‘불교(佛敎)’를 달리 이르는 말.

불교가 공(空)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다는 데에서 나온 이름이다.

印 綏(인수)

중국에서 쓰이던 관인(官印)의 끈

관인이란 천자(天子) 이하, 여러 관리의 관직이나 작위를 표시하는

인(印)이며, 수(綬)는 그 인의 고리에 맨 30cm 정도의 끈이다.

관직에 취임하면 그에 해당하는 관인과 끈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인수를 허리에 찬다.'라는 말은

임관한다는 뜻이고, '인수를 풀다'라는 말은 퇴관(退官)·면관을

의미하였다. 관직과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관인의 형태·재질 등이

뚜렷하게 구별되었던 것처럼 끈에도 그 빛깔에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인수의 출현은 전국시대(BC 403∼BC 221)라고 추정되는데 제도로서

갖추어진 시기는 진(秦)·한(漢) 시대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이후는

관인의 제도가 바뀌고, 그에 따라 끈은 인(印)을 허리에 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허리띠에 매는 장식용 매듭 끈이 되었다.

[출처] 인수 | 두산백과

 

(2013년 1월 9일 수암 임 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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