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북서부 사하라사막 서쪽 끝에 있는 이슬람공화국. 정식명칭은 모리타니이슬람공화국(Jumhuriyat Muritaniya al-Islamiya).
아프리카 북서부 사하라사막 서쪽 끝에 있는 이슬람공화국. 정식명칭은 모리타니이슬람공화국(Jumhuriyat Muritaniya al-Islamiya). 면적 103만 700㎢. 인구 291만 2584명(2003). 북쪽은 서(西)사하라와 알제리, 동쪽·남쪽은 말리, 남서쪽은 세네갈강으로 세네갈에, 서쪽은 대서양에 닿아 있다. 수도는 누악쇼트.
모리타니의 자연
국토의 대부분은 사하라사막과 건조지대이며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다. 해안평야와 세네갈강 유역을 제외한 내륙부에는 아드라르고원과 타간트고원이 있으며, 고원 기슭에는 오아시스가 분포해 있다. 대서양 연안은 대륙붕이 발달하여 어업자원이 풍부하다. 서사하라 국경에 사주상(砂洲狀)의 블랑곶이 있는 천연의 항구 누아디부가 있다.
북위 17˚선 이북 국토의 4/5 지역은 연강수량 200㎜ 미만의 사막기후이고 그보다 남쪽은 강수량 200~500㎜의 사헬(스텝)기후이다. 사헬기후의 우기는 8월을 중심으로 여름 3개월간인데, 강수량은 해마다 변동이 심하며 자주 큰 가뭄이 든다. 기온은 내륙부와 연안부가 상당히 다르나, 전체적으로 여름은 고온이고 겨울은 20℃ 전후로 선선하다.
지지(地誌)
국토는 북위 17˚선 이북의 사하라지역, 그 남쪽의 사헬지역, 서쪽의 대서양 연안지역으로 구분된다. 사하라지역은 주로 무어인(人)이 살며 낙타·양의 유목을 하고, 대추야자·야채의 오아시스농업을 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수단지방을 오아시스로 잇는 교역로가 있으며, 아타르는 그 교역로의 한 중계도시이다. 북부의 주에라트에는 고품질의 철광산이 있다.
인구밀도는 아주 낮으며 북동부는 무인지대이다. 사헬지역에는 주로 수단인이 살며 조·수수·옥수수를 재배하고 소의 목축도 하며, 세네갈강 유역은 논농사도 한다. 모리타니에서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말리와 세네갈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로소·카에디·알레그·키파·네마 등 농산물 집산도시가 있다.
대서양 연안지역의 앞바다는 대어장을 이루며 연안에는 어촌이 분포한다. 철광수출항 누아디부는 어업기지이기도 하다. 누악쇼트는 고정된 사구(砂丘) 위에 새로 건설한 도시로서 이 나라의 정치·경제·교통·문화의 중심지이다.
모리타니의 역사
이 지방은 예부터 북아프리카와 흑아프리카의 남북 양 세력이 접촉하는 곳이었다. 4세기 이후 수단인(흑인계)의 가나제국 세력하에 있었으나 11세기 베르베르인의 무라비트왕조가 지배하면서 이슬람화했다. 이슬람세력이 남하한 13세기에 아랍계 유목민 베니 하산족이 침입함으로써 아랍어가 널리 보급되었다. 15세기 유럽인이 노예와 아라비아고무 교역을 시작했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화의 경합을 벌였으나, 20세기 초 프랑스가 점령하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해외영토로서 정당이 결성되었는데, 1951년의 선거에서는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모리타니진보동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였다. 1956년에 모리타니지방의회는 행정부를 조직했고, 1958년 프랑스공동체의 공화국이 되었다가 1960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1961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에 M.O. 다다가 취임, 의회는 여러 세력을 통합한 모리타니인민당이 모든 의석을 차지했다. 1968년부터 1970년대 초에 걸친 가뭄으로 인한 사회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1972년 프랑스 자본 철광회사를 국유화하는 등 모리타니화를 추진했다. 1975년 서사하라문제로 모로코와 협정을 체결해 서사하라 남반부의 리오데오로를 분할 영유했으나, 서사하라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폴리사리오전선(戰線)의 저항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전비 증대와 광산 파괴로 경제가 악화되었다.
1978년 7월 쿠데타로 국가재건군사위원회(후에 구국군사위원회가 됨)가 전권을 잡았다. 1979년 8월 폴리사리오전선과 평화협정을 체결, 리오데오로를 포기했다. 1980년 이슬람법이 도입되었으며 그해 12월 문민정부가 발족했으나 1981년 4월 민정은 폐지되었다. 1984년 폴리사리오전선의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을 승인, 12월 무혈쿠데타가 성공했다.
모리타니의 정치
1978년의 쿠데타 이후 헌법은 정지되고 의회도 해산되어 정당과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군부중심의 구국군사위원회(CMSN)가 실권을 잡았으나 북부 아랍계와 남부 흑인계 주민의 대립과 군부내 권력항쟁이 표면화되어 쿠데타와 혁명이 반복되었다. 1979년 부셰프총리가 전권을 잡았으나 사고로 죽자 하이달라총리와 룰리 CMSN의장의 양두체제가 되었다.
1980년 1월 하이달라는 룰리를 추방하고 총리·CMSN의장 겸 대통령에 취임한 뒤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흑인세력과의 융화정책을 실시했으나, 1984년 12월 쿠데타로 실각했다.
타야대통령은 1984년 군부를 배경으로 정권을 잡은 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도로 구조조정계획을 실시하였다. 1997년 IMF는 모리타니정부의 경제자유화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2000만 달러의 구조조정자금 융자를 승인했다. 1996년 하원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했으며,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야권연합이 선거거부를 선언한 가운데 타야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군대는 징병제와 지원제를 병용, 총병력은 육군 1만 5000명, 해군 500명, 공군 150명(2001) 등 이다.
모리타니의 경제
전통적인 유목국가이나 독립한 뒤부터 철광석과 어업 개발을 추진하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 1700달러(2002)이다. 폴리사리오와의 전쟁비용으로 경제가 악화되어 외국원조에 의존하여 1995년 대외채무가 24억 6700만 달러이다. 목축은 몰인 유목민의 전통적 산업으로서 총사육가축수는 인구의 5.7배이다. 방목지는 국토의 38.8%(2000)로서 취업인구의 59%가 목축업에 종사한다.
세네갈강 유역의 농경지는 국토의 1.9%에 지나지 않는다. 농산물은 조·콩·쌀 등을 경작하나 생산량이 감소되어 매년 20~30만t의 곡물을 수입하고 있다.
어업은 철광석과 더불어 성장산업이며, 문어·오징어 중심의 어패류는 최대 수출품이다. 일찍이 한국·러시아·일본 등 외국어선출어료를 외화획득원으로 삼았으나, 1978년 이후 외국어선 출어를 규제하고 전통적 어업과 저인망어선에 의한 근대어업의 자국 어업단을 육성해 본격적 어업개발에 나서고 있다. 수출품은 어패류·철광석, 수입품은 기계류·식료품·석유제품 등이며, 주요 무역상대국은 프랑스·일본·에스파냐 등이다.
모리타니의 사회·문화
주민은 북아프리카에서 이동해온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의 혼혈인 몰인 60%, 수단인(흑인계) 40%로, 흑인계 증가율이 해마다 늘고 있다. 대략 도시민 25%, 농민 39%, 유목민 36%인데, 도시민은 증가하고 유목민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특히 수도의 인구집중이 매우 심각하다.
공용어는 아랍어와 프랑스어이지만 일상어로는 몰인은 하사니어, 흑인계는 각 부족어를 쓴다. 종교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한다. 의무교육은 초등교육 6년이고, 사범학교·기술전문학교·국립대학 등이 있으며, 문맹률은 58%(2002)이다. 일간지는 《샤브》뿐이고, 국영 라디오방송이 있다.
모리타니와 한국과의 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남한과는 1963년 수교 뒤 1964년 단교상태에 들어갔다가 1978년 다시 수교하였다. 북한과는 1964년 수교했는데 폴리사리오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1977년 단교했다가 1980년 다시 수교하였다. 2002년 대한수입액 227만 달러, 대한수출액 64만 달러, 2003년 체류자수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