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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소설인협회지인 '부산소설 제 10집(2013.11.10발행)'에 실린 본인의 졸고인 단편소설 한 편을 올립니다. 많은 비평과 조언을 부탁하고자 감히 올리는 바이오니 너무 허물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김 길수 배상>
잊혀진 옹이
형주는 한마디로 폭삭 늙어있었다. 보름달 같이 훤한 정수리에다 얼마 남지 않은 양옆의 머리칼도 거의 허옇게 세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큰 덩치에다, 나이 탓인지 허리마저 구부정했기에 과연 우리들의 동기가 맞나? 싶었고, 어리둥절하리만치 변해버린 뜻밖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거기다가 친구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가끔 입 꼬리를 들썩이며 어설픈 웃음을 빼무는 모습이 나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반면에 다른 친구들이야 그동안 가끔씩 보아온 탓이라 그런지,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금년에 모두 회갑을 맞았으니 인생은 60부터라는 요즘 말마따나 아직 한창 때로 보였다.
몇 잔씩의 술이 오가고 나니 분위기도 차츰 무르익기 시작했다. 초등동기들이 회갑을 맞아 고향에서 다 함께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자고 만든 자리다. 해마다 한 번씩 모이는 동기모임이지만 올해는 회갑이라는 의미를 더하였고,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도 예년보다 많은 스물한명이나 모였다.
지리산을 이고 사는 벽촌에서 자라온 우리가 회갑나이에 이만큼이나 모일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고들 했다. 대부분 서울이나,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모여들었고, 고향에 터 잡고 사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하루 밤을 새우며 그동안 묵혀왔던 이야기꽃들을 피울 참이다.
늦은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오겠다는 친구가 다 모였고 동기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시골에서 과수원과 목장으로 꽤나 부농을 이룬 회장은 모두들 모여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어 회갑을 자축하고, 앞으로 더욱 건강에 신경 써 오래오래 만날 수 있게 하자며 건배를 제의했다. 우리는 회장의 선창에 따라 요즘 유행하는 ‘구구팔팔이삼사’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는 나와 형주에게 오랜만에 와 줘서 고맙다며 환영의 박수를 유도했다. 동기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다가 참석한 데 대한 특별한 환영의 의미였다. 나와 형주는 일어서서 간단한 인사말로 환영에 화답했다. 나는 삼년만의 참석이었지만, 형주는 거의 5년도 더 된 것 같다며, 가까이 와 있으면서도 자주 참석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를 했다.
다음에는 고향지킴이로 살아오며 모든 동기들의 근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총무인 영수가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의 불참 사유를 자세히 알려줬다. 대개는 하는 일 때문에, 또는 시간이 맞지 않아, 부득이 불참하게 되었고 간혹 건강이 좋지 않다는 친구들의 근황도 소개했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모이는 이 모임에 늘 들쑥날쑥하며 참석한 탓에,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들지 못하고, 약간씩의 생소함도 없지 않았다. 참석보다는 불참회수가 더 많았던 탓도 있겠지만, 내성적인 나의 성격도 한 몫을 한 탓이다. 그러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친구도 많았고,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그것은 다른 친구 중에도 나처럼 형편 따라 들쭉날쭉한 경우가 있다 보니, 그중 아귀가 맞지 않은 친구는 자연스럽게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나와 형주와의 만남이었다.
형주는 지금 고향 인근에 내려와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옛날의 고향집이 아니라, 고향마을에서 오십여 리가 떨어진, 지리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근처에다 조그만 집을 별도로 마련해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가 약간의 치매기를 보이고 있고, 자신도 폐가 좋지 않아 요양 겸 함께 내려와 있다며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낙향한 이유는 40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퇴직하고 여러 가지 사업도 시작해 봤지만 여의치 않아 모두 접고, 내려온 지 6년째로 접어든다고 했다. 그리고 가까이 내려와 살고 있지만, 정작 이곳 고향마을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며 미안해했다. 부모님도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고향에서 물려받은 유산도 깡그리 처분한데다, 별로 자랑스러운 말년도 아니기에. 고향 친구들에게 자주 들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부끄러운 듯이 덧붙였다.
나는 형주를 보자마자 이번에야말로 내게 박힌 그 옹이진 마음을 서로 웃으며 풀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주의 생각이야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어떻게든 한번 풀어야 할 옹이라 생각해 온 일이다. 그래서 결자해지라고, 내 딴엔 형주가 먼저 다가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안 만났으면 몰라도 만난 이상, 나로서는 무슨 얘기보다, 우선 그 사건이야기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그게 바로 내가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평생의 옹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주는 처음 진지하게 몇 마디 인사를 끝내고는 별 말이 없었다. 자리마저 멀찌감치 앉은 채, 내게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된 일인지라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도 많긴 하지만…? 설마 그럴 리야? 나름대로 생각하며 될수록 느긋해지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론 나도 무슨 얘기부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연히 주위친구들의 왁자한 분위기에 동참하면서도 마음은 전혀 엉뚱한 콩밭을 나르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들으며 형주를 가만가만 지켜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녀석이 내게 다가와 무슨 얘기든 해주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어렸을 때 기분대로라면 뛰어가 주먹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이제 인생을 거의 마무리해가는 단계에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정말 친구니까 마치 가을하늘처럼 시원하게 오랜 동안 옹이 진 일을 풀어버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형주와는 너무도 오랜만의 만남이다. 그러니까 중학1학년이었던 그 해 여름이후, 오늘날까지 내가 형주를 만난 게 오늘로써 딱 두 번째다. 어떻게 고향친구이자 동기끼리 그럴 수 있나? 하겠지만,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만큼 서로에게 별 볼일이 없는 관계였던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형주의 소식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오늘 처음 그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동기모임에 참석하면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기회가 열리면, 형주가 참석을 하든 말든, 형주는 언제나 우리들 화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궁금해 하는 한가지만은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그렇게 전도유망했던 친구가 왜 갑자기 퇴직을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누군 무슨 사고가 생겨 불명예제대를 했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소식통인 영수마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로부터 한 10여년은 동기회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에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았다. 유학간 아들 뒷바라지하기 위해 외국에 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무슨 일 저지르고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까지 뒤죽박죽이었으나 모두 추측에 불과했다.
중학1학년 그때 이후 처음으로 형주를 만난 게 20년 전이었다. 꼭 20년 전인 그때가 우리초등학교의 개교 60주년이었다. 당시 기념행사에 전국의 동문들이 고향에 모였었는데 그때 형주도 참석했기에 만났던 것이다.
그때도 오늘과 분위기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달랐던 점은 그때는 모두 갓 40대에 접어든 젊은이들이었으니 패기만만했고, 누구나 기백이 살아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너나없이 술 마시고 노래하며 엄청 시끄럽게 보냈다. 지난 일이라 그런지, 어쩌면 오늘보다 훨씬 오래 동안 기억될만한 모임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치 즐거운 모임이었다.
그날도 형주는 변함없이 키 크고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멋진 군인장교신분이었고, 무슨 정보기관의 간부로서 앞날이 창창한, 시쳇말로 아주 잘나가는, 우리들 모두의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당연히 그날의 중심인물은 형주였었고.
형주가 어떻게 군인장교가 되었는지는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되었다. 중학이후 고향을 떠나버린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구들이야, 모두 하나같이 형주와의 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형주가 방학이나 휴가 때면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왔고, 스스로 어릴 때의 친구들과는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모두의 중평이었다. 그러니 모든 친구들이 형주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고, 모두가 앞 다투어 이를 전해주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정보나 이야기의 끄트머리에는 형주가 제3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이 되었고, 성격과 체질이 맞았는지 비교적 빠르게 승진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얘기가 거의 언제나 대미를 장식하곤 했다.
중학이후, 처음 만난 그날, 단박에 알아본 나와는 달리, 형주는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멀뚱했다. 두어마디 이야기를 하고서야 겨우 나를 알아보았는데, 녀석의 살집이 깊고 유들유들해 보이는 얼굴표정은 어린 시절과 꼭 같았다.
“넌 지금 뭘 하고 있니?”
“초등학교 선생”
“아 그래 잘 됐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중학시절의 그 사건을 생각하자, 오늘과 달리 그때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흥분상태가 되어 녀석에게 한 마디 쏘아붙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나의 예상과는 너무도 다르게 행동했다. 자기신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근엄한 포즈를 잡느라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생각 밖으로 과묵했기에 말을 붙여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때는 일단 녀석을 만났으니 무슨 얘기든 먼저 해보고 안 되면,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라도 그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끄집어내기에는 너무 쪼잔 하고 엎드려 절 받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친구들도 있는지라, 내심 기다려보기로 했었는데 녀석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나는 차츰 안달이 나기 까지 했었다.
도대체 형주 녀석은 그날 저녁 내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술도 될수록 사양하며 별로 마시지 않았다. 처음과는 달리 차츰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묻거나, 띄엄띄엄 대화에 끼어들면서도 나에겐 애써 대화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난 뭔가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녀석이 설마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그 일을 어떻게 잊어버려?’
애써 치밀어 오르는 목의 가시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그러자 난데없이 ‘30여년이 다 되어가는 옛일을 이제 와서 기억 못하는 게 뭐 잘못이냐?’ 며 적반하장으로 내뱉지나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녀석의 생각을 끌어내보려고 화제를 돌려 눙쳐보았다.
“넌 요즘 출세도 하고 잘 나간다며?”
그러자 형주는 전혀 엉뚱하게 눈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야 인마! 그런 말, 어디서 쓸데없이?”
당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던 소속기관의 슬로건 영향인지는 몰라도 하도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정색을 하는 바람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도 욱! 하는 기분이 들어, ‘이런…? 참! 웃기는 자식이네.’ 싶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시비를 걸 수도 없어 애써 참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들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고 자정이 가까워오자, 형주는 갑자기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내뱉고는 졸병이 모는 새까만 자동차를 타고 휑하게 가버렸다. 나는 마치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그저 멍청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먼저 말을 꺼내면 어때서…?’ 나는 체면만 차리다가 할 말도 못하고 만 스스로를 자책했다. 동시에 녀석에 대한 열등감이 아직도 살아있었나? 싶어 나의 기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혼자 투덜거렸다.
‘자식이 뭐 저래? 옛날이나 지금이나 꼭 같이 제멋대로네. 저 따위가 무슨 장교라고?’
형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키도, 덩치도 보통의 우리들보다 월등하게 컸기에 거의 언제나 우리들의 대장이었다. 거기다가 공부도 상위그룹에 속할 정도로 잘 했고 더욱이 얼굴도 잘생긴 아이였다. 그런 반면에 명랑하고 엉뚱한 사고도 잘 쳤다. 동네아이들과 싸움질은 도맡아 했고, 여학생들 괴롭히기도 선수였다.
내가 형주보다 조금이라도 나았다는 부분은 학교 성적뿐이었다. 그 덕분에 녀석이 그나마 다른 친구들보다는 내게 많은 호감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속맘이야 모르지만, 겉으로는 언제나 나를 친한 친구그룹에 끼워주었으니까.
나는 형주가 그럴수록 가끔씩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형주아버지가 면소재지 술도가사장이었고, 우리 아버지는 그곳 직원으로 술 배달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형주는 매사에 나보다 어른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내가 갖지 못한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태도, 그리고 대범한 성격까지 갖고 있었기에, 나이는 같은데도 거의 두세 살 형님 같았으니까.
그러다가 중학에도 함께 진학했는데 같은 반이었다. 중학에는 인근 몇 개의 초등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이 모였지만, 형주는 입학 후 몇 달 내 자연스럽게 학년전체의 리더가 되어있었다.
그 해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아마 6월말이나 7월 초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기말 시험이 있었던 날, 우리는 평소의 자기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이 지그재그로 지정해주는 자리에 앉아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새로 지정받아 앉게 된 자리가 맨 뒷자리였는데, 옆자리에 하필 형주가 앉아있었다. 형주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더니 귓속말로 조그맣게 ‘야! 답 좀 알려줘야 한다. 내가 번호를 대면 작은 소리로 답해! 아니면 죽어!’ 하며 주먹을 쥐어보였다.
나는 약간 찜찜하긴 했지만 그저 지나가는 말로 생각했다.
이윽고 국어 과목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비교적 쉽게 답을 적어 내려갔다. 그런데 형주가 가만히 7번 했다. 7번 문제의 답은 영화대본을 말하는 시나리오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머뭇거렸다. 그랬더니 형주는 감독선생님이 앞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팔을 뻗어 나의 어깨를 툭 쳤다. 나는 엉겁결에 조그만 소리로 ‘시나리오’라고 했다. 그 순간 감독 선생님이 어깨 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돌아보았고, 빠르게 다가오더니 나와 형주의 시험지를 빼앗았다.
감독 선생은 당시 호랑이 선생님으로 소문난 장철수였다. 체육선생인 장선생은 나와 형주 둘을 의자에서 일어서라고 하더니 ‘이놈들 어디서 커닝을 해?’ 하며 고함을 쳤다.
시험이 끝나고, 나와 형주는 장선생을 따라 교무실로 끌려갔다. 고개를 숙인 채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장선생은 큰 소리로 마치 자랑하듯 외쳤다.
“여기 시험 중 커닝한 두 놈 적발했어요. 안 선생님!”
그 소리에 여러 선생님들이 우리를 쳐다보았고, 장선생은 자기책상 앞에 앉아있던 우리 담임인 안선생에게로 다가가 의기양양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얘는 가르쳐주었고, 이 녀석은 듣고 있었다.’고. 듣고 있던 담임인 안선생은 몹시 화가 나는지 벌떡 일어서며 나와 형주를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대뜸 ‘가르쳐준 놈이 더 나쁜 놈이야!’ 하면서 다짜고짜 나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나는 쓰러질듯 움찔하며 간신히 중심을 잡긴 했으나,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더 놀라고 말았다. 안선생이 형주에게는 ‘왜 그랬어? 인마!’ 하면서, 녀석의 머리통을 슬쩍 쥐어박는 시늉만 하고는, 둘이 함께 교실바닥에 꿇어앉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학교 교문 근처의 게시판에는 나와 형주, 그리고 2~3학년 선배를 포함한 10며 명을 모두 교칙에 의거 일주일간 근신(勤愼)처분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매일 반성문을 써서는 반드시 교무실에 직접 가져와 담임께 제출하라고 했고, 수업시간에 공부대신 운동장에 나가 잡풀을 뽑는 등, 잡부처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근신의 뜻도 모르는 채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항의도 했다. 형주의 강요에 못 이겨 그랬다고 했더니 ‘의리도 없이 친구에게 덮어 씌우려한다.’며 또 나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그리고는 우리 반의 명예를 실추시킨 놈이 무슨? 하더니, 정학을 시켜버려야 할 걸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 잘 말씀드려서 간신히 근신처분만 시켰는데도 말이 많다며 내말은 일언반구 들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운동장에 나가 뿔 뽑기 등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창피했다. 한마디로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정학을 시켜버렸으면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결석한 것쯤으로 알 것이지만, 전교생이 시시각각 바라보는 학교 운동장에서, 마치 전쟁포로들이 집단 노역을 하듯, 그것도 훈육주임선생이 수시로 점검까지 하고 다니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모든 친구들이 나를 보고 그동안 공부 좀 한다던 게 그런 거였나! 하며 놀리는 것 같기도 해 순간순간이 마치 지옥 같았다.
거기다가 학교에서 집으로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다. 교칙에 위반된 행동을 했으므로 근신처분을 내렸고, 동시에 나의 경우 입학 시 받게 되었던 입학성적 우수 장학금도 2학기에는 중단된다는 내용까지 들어있었다. 이걸 보고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닦달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함께 일을 저지른 아이가 술도가 집 사장아들이라는 내말을 듣고는 잠잠해져버렸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나를 꾸짖었으나 체념한 듯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형주는 유들유들했다. 표정에 별다른 동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뭘 생각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더더구나 내게 미안하다는 눈치는 눈곱만치도 없어보였다.
같이 걸린 3학년인 한민규는 우리 담임인 안선생한테 들켰다면서 풀 뽑기 내내 마구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 형주가 적발된 걸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형주 저 새끼는 여름방학 후에 대구로 전학 갈 거라 카던데…! 그라고 안선생은 지금 한창 저 자식 누나와 연애중인데…, 우짜다가 걸렸노? 아, 맞다. 우리담임인 장철수가 적발했다고 했제? 그란께 어쩔 수 없었구마!’ 했다. 그러면서 장선생이 안선생반 학생인 나와 형주를 적발하자, 안선생은 또 장선생에게 보복하기 위해, 다음 시험시간에 억지로 자기를 적발했다는 식으로 시부렁거렸다.
나는 이런 이야기에 더 화가 났다. 그리고 형주가 멀뚱한 채, 말이 없었던 이유나 내게 무관심했던 이유가 이런데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왠지 왈칵 눈물까지 쏟아지려고 했다. 더불어 천연덕스러운 녀석의 성격 때문이겠지! 했던, 나의 생각도 차츰 배신감으로 바뀌어갔다.
그러자 처음에는 담임선생의 편파적인 조치 때문에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형주의 유들유들한 태도와 언제나 녀석에게 끌려 다닌 것 같은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는 형주와 많이 친해졌다. 그전에는 너무 어렸던 탓인지 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대신 5학년 때부터는, 자진해서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형주가 불러주면 흔쾌히 동참했다. 그리고는 많이도 어울려 다녔다.
5학년 여름방학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형주는 영수와 함께 우리 동네까지 나를 찾아왔다.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마을에 살고 있는 형주와 영수가, 한 마장가량이나 떨어져있는, 아홉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우리 마을 까지 놀러왔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같은 또래 친구가 없었던 나로서는 형주와 영수가 우리 동네까지 와준 게 무척이나 반갑고 고마웠다. 그때 우리 반 친구들은 누구나 형주와 친하게 지내기를 희망하고 있었으니까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주는 함께 미수(美水)강으로 미역을 감으러 가자고 했다. 미수강은 학교가 있는 면소재지 마을에서 우리 동네로 가는 중간쯤에 있는 조그만 하천이었다. 그곳은 은모래 밭도 조금 깔려있고 해서 아이들이 여름 한 철 놀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강가에서 씨름을 하거나, 강둑을 따라 달리기를 하다가 땀범벅이 되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천의 양 둑을 따라 논과 밭이 펼쳐져있었다.
우리는 미역 감기를 위해 강둑을 걸었다. 도중에 영신이네 참외밭 원두막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 강가로 갔다. 강가에는 버드나무들이 하늘로 쭉쭉 뻗은 채, 한낮이라 그림자를 짧게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홑겹 웃통을 벗어 던진 채,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한낮의 무더위 탓인지 물도 시원하다기보다 오히려 뜨뜻미지근했다. 하천 가운데의 깊이가 우리의 가슴께까지 올라오는 정도라, 우리가 미역 감기에는 한마디로 딱! 이었다.
한바탕 헤엄을 치고는 모래사장에 나와 뒹굴었다. 모래판에서 레슬링이랍시고 엉켜 놀았는데…, 나와 영수가 한편이 되어 형주와 맞붙었지만, 번번이 나와 영수의 어깨가 먼저 모래판에 닿곤 했다. 그러다 지치면 모래찜질을 하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곤 하며 오후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형주가 나와 영수를 은근히 불러 모았다.
“야! 우리 오늘 밤에 참외서리 하러가자.”
나와 영수는 형주의 갑작스런 제의에 멍해졌다. 그러자 형주가 다시 빙긋이 웃으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우리 참외서리 가자 안카나?.” 그러자 영수가 대답했다.
“어디로?”
“어딘지는 나중에 가르쳐줄께. 저녁 묵고 여덟시까지 여기로 나와” 형주가 대답했다
“야, 기호! 니는 와 대답이 없노?”
“무신? 서리를 한다고? 어떻게?”
나는 서리를 한 번도 해본일이 없었기에 덜컥 겁이 났지만, 애써 태연한 척 담담하게 물었다. 형주의 엉뚱한 제의가 내게는 엄청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겉으로는 태연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의뭉한 생각을 다 하고 있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꺼니까. 저녁 여덟시다. 그때까지 꼭 여기 나와야한다. 알았제?.”
나와 영수는 형주의 위압적인 제의에, 찬성도 반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엄청 겁이 났지만, 형주가 다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정자나무 아래로 놀러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다. 들판 길을 조금 걸어가자, 바로 강둑이었으므로 천천히 약속장소로 갔다.
형주와 영수는 벌써 와 있었다. 그믐께였던지 상당히 깜깜했지만, 어둠에 눈이 익자 움직이거나 활동하기에는 거의 지장이 없었다. 형주는 별로 말이 없었고, 나와 영수는 녀석의 행동을 지켜보며 몇 군데의 참외밭 중 어디가 좋을까? 를 이야기했다. 한참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멀리 보이는 면소재지 동네의 불빛들이 거의 사라지고, 가까이 있던 영신이네 원두막의 남포(lamp)등불마저 꺼졌다.
그때서야 형주는 우리에게 말했다.
“자, 인자 서리하러 가자”
“어디로?” 내가 물었다.
“저 앞에 참외밭 있다 아이가?”
“어디? 영신이네 참외밭?”
내가 깜짝 놀라며 되묻자, 형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래, 영신이네 참외밭!”
“야, 거긴 안 돼? 우리가 친구네 참외를 서리하마 되겠나?”
“야 인마! 몇 개만 해 오는 기라. 그냥 재미로 한 번 해보잔 말이다. 인마야!”
영수도 기가 차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신이는 바로 우리 반 여자 친구가 아닌가!
“야! 니 들키마 영신이 오빠한테 맞아 죽는다!”
내가 어떻게든 영신이네 참외밭은 만류하고 싶어 들러댔지만, 형주는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야! 인마! 웃기지마! 내가 그 새끼 겁낼 줄 아나?”
형주는 의기양양했다. 나와 영수는 멍한 생각이 들었지만, 형주는 전혀 딴청이었다. 영신이 오빠는 우리보다 두 살이나 위인 중학생이다. 그런데 형주 녀석은 무슨 배짱인지 큰소리였다.
영신이는 우리 반 부반장인데 진작부터 형주 녀석이 영신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들은 영신이 오빠가 형주에게 제 동생을 집적거리면 그냥 안둔다고 했다는 소문까지 났었다. 영신이 오빠가 이렇게 한 이유는, 온 면민들이 다 알고 있듯, 형주아버지와 영신이 아버지의 사이가 매우 안 좋은 탓이라고들 했다. 바로 이웃 친구이지만, 술도가를 경영하는 형주아버지가, 일꾼들의 새참으로 밀주를 담근 영신이 아버지를 세무서에 고발하여 벌금을 물게 한 게 원인이라고도 했다. 나는 왜 형주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인 영신이네 참외밭을 굳이 고집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얼마 전 형주가 학교에서 청소문제로 다투다 영신이한테 욕을 한바가지 얻어먹은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 하필이마 와 영신이네 참외밭이고?”
내가 맘에 켕겨 다시 이의를 제기했으나 형주는 아예 묵살하며 딴소리를 했다.
“야, 잔소리 말고 옷들이나 벗어.”
그러자 영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옷은 와 벗는데?”
“야 인마! 만약에 들키마 그냥 토껴야 되는데…, 옷을 입고 있으마 붙잡히기 쉬운기라.”
“…?”
“야, 이 새끼들아! 빨리 옷이나 벗어. 그리고 여기 버드나무 밑에 숨카라.”
그러면서 형주는 팬티까지 홀랑 벗었다. 그리고는 옷을 뚤뚤 뭉쳐서는 버드나무 아래 가지에다 걸쳤다. 나와 영수는 으스스한 기분도 없지 않았으나 옷을 홀랑 벗으려고 하니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어, 긴장이 다소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조심조심 원두막을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형주는 꽤나 큰 꼴망태 하나와 못줄 창을 챙겨 들고 나섰다. 녀석이 든 못줄 창은 보기에도 창끝이 꽤나 날카롭게 보였다.
“야 ! 이런 거 갖고 가마 진짜 큰일 난다 아이가!”
내가 놀란 나머지 말리고, 영수마저 그건 가져가면 안 된다며 거들었지만 형주는 태연했다.
“만약 들키든지 하마 이걸로 겁을 주면서 토끼뿌마 되는 기라. 주인이 몬 따라 오구로…!”
나는 갑자기 가슴이 옥죄어드는 것 같았다. 영수도 놀랐는지 묵묵히 따라 걷고는 있었지만 긴장한 게 역력했다. 밤인데다 옷까지 벗었으니, 많이 시원해야 할 텐데도, 긴장한 나머지 얼굴에는 땀이 삐질삐질 배어나왔고, 형주 녀석이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원두막 가까이 갔을 때, 갑자가 남포(lamp)등불이 켜졌다. 우리는 서둘러 길옆 언덕 아래로 바짝 엎드렸다. 들켰구나! 싶어 간이 콩알 만 해졌지만, 들킨 건 아니었다. 남포등불만 켜졌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는 속으로 차라리 들켜 달아나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결국 우리는 한참동안을 꼼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두막이 참외밭의 입구에 있었으므로, 원두막에 사람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밭 가운데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영신이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원두막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날 영수와 나는 오금이 저려 아예 참외밭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대신 형주는 혼자서 태연하게 한 망태기의 참외를 따 등에 걸머지고 나왔다. 우리는 다시 강변으로 나갔고, 두어 개를 먹어보고는 모두 강물에다 팔매질을 했다. 참외밭만 망쳐놓은 셈이고, 나와 영수로서는 생전 처음 겪은 일이라, 가슴만 두근거릴 뿐이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영수와 나는 형주와 공범이 됨으로써, 다음부터는 종종 형주의 악동놀음에 끌려 다니게 된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후부터 영수와 나는 형주의 부하가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어울려 다니며 악동 짓을 하는 것이 꽤나 재미가 있었고, 스릴 넘치는 일이였다. 녀석은 항상 기발한 생각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곤 했으니까.
6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는 중학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국가고시를 치렀다. 그래서 시골이었지만 경쟁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정규시간 외 담임선생님의 보충수업도 많이 받아야 했다.
보충수업을 일찍 마쳤던 어느 날, 형주는 난데없이 나와 영수에게 미수강변에 가서 다가올 체육시험을 대비해 달리기와 던지기 연습을 하자고 했다. 나도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데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함께 강변으로 갔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우리는 그곳 모래밭에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씨름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귀가하기 위해 강둑을 걸었는데, 강둑을 걷다보니 아직도 푸른색을 잃지 않은 가을 김장배추밭이 나타났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의 가을벌판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음에도, 그 을씨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게 바로 김장배추밭이었다. 곧 수확할 배추포기들을 하나하나 짚으로 묶어놓은 상태라, 마치 축구공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형주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주변 들판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야, 우리 축구연습도 한 번 하고 가자”
“무슨 축구?”하며 내가 의아한 눈으로 묻자. 녀석은 배추밭을 가르쳤다.
그리고는 배추밭둑으로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모두 들어와 봐!”
하고는 배추포기 하나를 축구에서 프리킥을 하듯 힘껏 찼다. 그러자 배추가 툭! 뿌리째 뽑히면서 3~4미터 정도 앞으로 날아갔다. 순간 나는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야! 인마, 그러지마!”
순간. 내 소리에 나도 놀랐지만, 형주도 많이 놀랐던지 멍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형주에게 난생처음 정면으로 대든 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형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녀석이 내게 한 대 쥐어박으러 오는 걸로 각오했다. 하지만 놈은 싱긋 웃으면서 그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기호 인마 이거! 간딩이가 부았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나와 영수도 함께 둑길을 걸었다.
일주일간의 근신처분을 마치고 수업에 복귀했지만 나의 관심은 차츰 공부와는 멀어졌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며칠 후 방학이 되면 대구나 부산등 대도시에 있는 친척집으로 놀러갈 거라며 들떠 있었지만 나는 울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형주를 만날 때마다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녀석은 언제나 뚱한 얼굴이었으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형주를 골탕 먹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열등감에 빠져드는 것 같아 더 미칠 지경이었다.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다른 친구들도 내 말보다는 형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얼른 전학이라도 가서 하루속히 내 눈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여름방학을 맞았다. 선생이나 친구들을 만나지 않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다행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어영부영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개학을 할 무렵부터 나는 공부도 친구도 싫어졌다.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2학기 등록금까지 내주었으므로, 학교를 빼 먹을 수도 없었다. 학교에 가니 다행스럽게도 형주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대구로 전학을 가버렸다는 말에 정말 오랜만에 속이 시원해졌다. 놈의 그 유들유들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은근히 좋아졌다. 그렇지만 나는 점점 조용하고 말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내가 가만 있나봐라!’ 며 형주에 대한 섭섭함과 담임인 안선생의 편파적인 언행이 단단한 옹이로 굳어가고 있었다.
학교생활도 외양으로는 아무 표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보내기에 익숙해갔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눈초리가 겁이 났다. 어느 친구도 드러내놓진 않았지만, 나를 보는 친구들의 시선 속에서 낙인이 찍혀버린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마치 뒤에서 손가락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고 자주 운동장에서의 노역장면을 꿈속에서 만나기도 했다. 안선생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학교 안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안선생이 저쪽 골목에 보이면 나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친구들도 내가 먼저 만나고자 해서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만 가끔씩 나의 공부를 독려하곤 했지만, 아버지는 그날그날 생활에 바쁜 나머지 나의 공부에는 무관심했다. 초등학교 때 언젠가 어머니가 나의 성적을 보며 자랑스러워하자, 아버지는 ‘가르칠 능력도 없는데…, 공부를 잘하면 뭘 해!’ 하며 씁쓸해하시면서. 중학을 졸업하면 대처로 나가 기술을 배우는 게 최고라고 했던 말이 항상 머릿속을 맴돌았으므로 별로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중3 졸업이 가까웠을 무렵에야 아버지와 어머니도 나의 성적이 기대이하로 떨어졌음을 눈치 챘다. 처음엔 도대체 원인이 뭐냐? 며 노발대발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그렇잖아도 진학시킬 경제적인 여력도 없던 터였으므로 차라리 잘됐다는 반응이었다. 대신 어머니는 달랐다. 힘이 되는 데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이 기회에 아예 대도시로 이사를 가자고 아버지를 졸랐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술 배달하느니보다는 대도시에 나가 막노동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그해 겨울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 양정동 산비탈에 달세 방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건축공사장으로, 어머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고, 나도 공구(工具) 상에서 심부름을 하며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이사를 하고나니 아무도 아는 녀석이 없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학교 다닐 때는 귀찮아 멀리했던 공부가, 막상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학교 가는 일이 차츰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야간고등학교에라도 가야한다며 채근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1년간을 쉰 게 약이 되었던지 공부도 열심히 했다. 동시에 커닝으로 인해 생긴 옹이가 불쑥불쑥 나를 채찍질한 탓인지, 나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건질 수 있었고 겨우겨우 힘들게 대학까지 진학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내게 보여준 형주의 행태는,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노력을 해도, 나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며 더욱 큰 옹이로 자랐다.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자 차츰 모임자리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곁에 앉은 영수가 술잔을 내게 권했다.
“야 기호, 니는 인자 정년이 몇 년이나 남았노?”
“다됐지 뭐! 한 2년 남짓?”
“그래, 퇴직하마 이리 온나. 고향이 좋다 아이가?”
“좋지. 하지만 인제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연고는 뭐? 친구들 있으마 됐다 아이가, 아 저기 형주도 내려왔다 안카데?”
“그래, 형주가 이웃으로 왔다카데. 그런데 니는 자주 만나나”
“나야 가까이 있은께네. 가끔 만나지. 하지만 요즘 저놈아 기가 팍 죽었더라. 옛날과 달라. 자식들하고도 인연 끊고 살다시피 하고 산다더라…?”
“와? 무슨?”
“요새 그런 자식들 많잖아. 외국에 가 있은 께, 있으나 마나지 뭐”
“그래? 그렇구나! 그라마 옛날 안선생은? 형주 자형 말이다.”
“아! 그 양반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위암이라 켔제!”
나는 영수의 얘기에 난데없이 웃음이 키득! 터져 나왔다. 그 급한 성질 때문에 일찍 돌아 간 게 아닐까? 싶어서다. 동시에 안선생에게 뺨 맞은 생각도 났다. 그러자 다시금 그때 가졌던 형주의 생각을 꼭 듣고 싶어 에둘렀다.
“영수야, 그런데 형주 저 친구도 옛날에 우리 못된 짓 마이 한 거, 기억하고 있겠제?”
나는 형주에게로 눈길을 주며 가장 궁금했던 일을 물어보았다. 남들이야 아예 관심조차 없겠지만, 나에게는 평생을 통해 가장 파렴치하고 민망한 일이 아니었던가!
“무신? 아, 우리 참외서리 했던 거?”
“참외서리 뿐이가. 우리가 못된 짓 많이 했다 아이가?”
“글쎄, 모르지. 아직도 생각이야 하고 안 있겠나?”
영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했다. 나는 영수의 시큰둥한 반응에 괜히 주춤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 직접 겪었던 좋았거나 싫었던 그 추억들이 어떻게 희미해 질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라마 형주 저 친구 이리로 한 번 불러봐라! 저 자식이 올란지? 모르지만”
“그라마 오지 안와? 지가 뭔데…? 야, 형주야 이리 쫌 온나.”
영수가 뜻밖에 큰소리로 형주를 불렀다. 나는 영수 이 녀석, 옛날의 영수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와 그리 빤히 쳐다보노?”
“니 어릴 때는 형주한테 꼼짝 못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큰소리네…?”
“야, 무슨? 니도 그랬잖아? 인마! 그때야 저 자식 덩치도 컸고…, 저거 아부지부터 기갈이 워낙 쎈 바람에…!”
형주가 앉은걸음으로 어기적대며 다가왔다.
“이 친구가 우리 초딩 때 못된 짓 많이 했던 거, 다 기억하고 있는지 묻네. 기억나나?”
“무슨? 못된 짓이라니?”
“어릴 때 우리 영신이네 참외서리 한 거 기억 안나나?”
“아, 그래 기억나지. 그게 자네들이었나? 난 누구였는지 생각이 잘 안 났거든“
“이런…?”
나는 갑자기 놈의 흐리멍덩한 기억에 화가 났다. 설마 일부러 모른척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더욱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야! 그라마 우리하고 지낸 기억들이 모두 잘 생각 안 나나?”
“아니야. 생각이야 나지. 그런데 상대가 누구였던가는 정확히 다 모르겠어. 하도 많으니까“
그러면서 녀석은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대범했던 옛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
는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그라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중학 1학년 때 커닝 사건도 기억 안나나?”
마침내 나는 거의 평생 동안 나를 괴롭혀 온 옹이의 뿌리를 건드렸다.
“무슨? 아! 그래 어렴풋이?”
“그때 상황이 자세히 생각 안 난다 이 말이가?” 내가 급하게 다그쳤다.
“그래. 그런데…? 야! 넌 뭐 그런 걸 시시콜콜 기억하냐? 복잡한 세상에…?“
나는 형주의 대답에 애써 성질을 누그러뜨리며, 곁에 앉은 영수에게도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야 니도 그때 일이 생각 안나나? 학교 게시판에도 대문짝만큼 나붙고 했었는데…?”
“무신 일인지 난 기억이 없는데…? 무신 일을 말하는지 몰라도. 정말! 온갖 거 다 기억하는 기호 니가 좀 별난 기가? 아니마 기억력이 좋은 기가?”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위에 눌리듯, 머릿속은 훤했으나, 갑자기 숨통이며 말문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갑갑함에 이리저리 목을 쓰다듬던 나는, 어느 순간 목이 뚫리나 싶더니 미처 손바닥으로 가릴 새도 없이, 지금껏 먹고 마셨던 걸, 우웩! 하며 술상위에 토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토한 상태 그대로 소리쳤다.
“뭐 시시콜콜? 니는 시시콜콜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평생 박혀있던 옹이였어 인마. 뭐 이런 개자식이 다 있노? 그걸 시시콜콜하다고. 야, 인마!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갑작스럽게 내뱉은 나의 악다구니에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형주도 영수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토가 올라왔다. 동시에 나의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야, 니 정말? 평생 낙인을 찍어놓고 이 자식 뭐 기억이 안난다꼬?, 너 일부로 그라나?”
나의 고함소리에 이리저리 삼삼오오 흩어졌던 친구들까지 모두 나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 자식, 이거 왜 이래?”
형주 녀석이 남의 말 하듯 주위에 대고 물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무슨 일이야? 어쩌고 하며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크게 고함을 지른 탓인지 정신마저 아물아물해졌다. 도대체 이게 뭐냐? 싶었다. 지친 나머지 나는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럴 리가? 그럼, 그 일을! 아무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나 혼자만 가슴속에 주홍글씨를 새긴 채 지금까지 살아왔단 말인가!’
나는 꿈틀대는 옹이를 달래듯 양손으로 가슴을 싸안으며 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이 서둘러 술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끝.
첫댓글 온천의 글 재주가 아주 준수합니다.
기호님이 어린 학교 시절에 받은 옹이(상처)를 아주 잘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인관관계에서 본의 아닌 순간의 언행에 의해 상처와 스트레스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는데
문제는 준 사람은 모르고 잊고 살아가고 주인공 기호처럼 상처를 받은분은 상당히 오래 동안 힘든다고 봅니다.
치유상담이나 교육 훈련을 통해 용서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아마 그 문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자라는 10대 Boy들 세계의 심리를 아주 훌륭히 잘 다루어 주셨습니다.
온천 계속 좋은 작품으로 세상을 섬기고 밝히시길 바람니다.
별 재미도 없는 글을 읽어주셨다니 감사 또 감사하오!!!
참 재미있게 읽었소. 그동안은 여기 이런 글이 있다는 것도 몰랐네. 읽고 암말 없이 가버린 친구들이 또 미워진다. 우째 그라노. 사람도 아이다. 사람 노릇은 하면서 살자. 뭐 부끄럽닥꼬? 한두살 묵는 아아 들이가.
육한년 되고 부터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옹이가 쏘옥 얼굴을 드러낸다. 아무 생각없이 지나갔던 일,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나 약방에서 돈 삼십원을 훔치고 계속 가슴 알이를 했다. 그 말고도 몇개 더 있다. 용서받고 싶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이러다가 덜컥 죽으면 끝이다. 누구나 가슴속에 옹이 몇개는 남아 있을 껴. 그래도 늙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지. 고향 등지는 사람은 그 옹이들 때문이기도 할 거야.
온천의 글이 날로 섬세해 져 가고 있다. 왠만한 신춘문예 당선작 보다 몇 수 위로 보인다. 지금 부턴, 별로 바쁜 일도 없을 터, 신춘 문예에 도전해 보시기 바란다. 당선, 등단은 실력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비가 말하는 것이라고 알고 시작하시기 바란다. 당선 시켜 줄테니 이 책 100권을 구입해 달라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더라. 가끔 실력으로 뽑히는 수도 있는 모양이더라. 뭐 꼭 등단해야 하는 거 아니다. 정진하시면서 좋은 글 많이 남기시기 바란다. 요즘은 출판 기념회는 정치인이 정치 헌금 모금할 때나 하는 거다. 그러나 친구들 끼리는 다르다. 좋은 글 많이 모이면 ㅈ친구들이 출판해 주기도 한다.
새벽잠을 깨서 일어나, 게시판 마지막 줄에 걸려 있는 제목을 보고 오늘에사 이 글을 읽어 보았다.
처음 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맺힌 '옹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유발하여 끝까지 재밌게 읽었다.
누구나 어릴 적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꼭 나의 어릴 적 과거를 본 것같다.
어린애 같지 않은 천연덕스러운 형주, 주위의 친구들, 컨닝에 얽힌 두 선생의 심리상태,
참외 서리, 선생과 형주 누나와의 연애.....어릴 적 일상의 소재로 잘 꾸며진 소설이다.
온천 친구야 !! 정말 재밌게 읽어꾸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