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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6:31-34 고센 땅에서 살아 갑시다. 2014. 2 .23
여러분은 게토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게토”(ghetto)란 중세 시대 이후로 유대인들을 강제 격리시켜서 유대인들만 살도록 만들어 놓은 유대인의 거주 지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게토라는 말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군들이 유대인들을 모아다가 만든 유대인 수용소인 게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게토가 가지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모습을 떠나서 사용됩니다. 오늘날의 게토는 유대인들만 모여서 죽음을 기다리던 수용소의 개념이 아니라, 주로 특정 인종이나 종족이나 종교집단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면서, 외부와 자신을 격리한 거주 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쓰입니다.
게토의 역사는 참 오래전입니다. 1179년 제3회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교류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것이 발단입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전 유럽에 페스트(흑사병)가 창궐하여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는데, 이 유행병을 유대인들이 포트렸다는 소문에 의해 각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선량한 유대인들에게 애궂은 화살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더 이상 병을 퍼트리지 못하게 강제로 유대인들을 모아서 한곳에 생활하게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유대인은 어디에 가나 <게토>를 형성합니다. 유대인들을 차별하여 강제로 만드는 외부적 요인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 자기들 스스로가 구별되고, 성별되어야 한다고 생각에 따라 스스로 게토를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자주 보이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서 사람들이 조금 모였다고 생각되면 가장 먼저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코리아 타운>입니다. 전 세계 에디를 가나 차이나 타운이 있는 것처럼, 전세계 한국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코리아 타운이 다 있습니다. 이런 코리아 타운도 한국인 스스로 만들어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생활하도록 만드렁 놓은 게토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이번에 이집트를 성지 순례하던 분들에게 테러사고가 나서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이집트로 성지 순례를 가면 대부분 둘로 보는 곳이 <고센지역>입니다. 고센이 어떤 곳인가요?창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고센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 야곱과 70명의 식구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은 곳입니다.
이집트는 전 국토의 95%가 사막이며 모래흙입니다. 그런데 이 고센지역은 모래흙이 아니라 검은 빛을 띤 비옥한 흙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고센 지역을 두고 말하기를 “케메트”(Kemet)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이집트인들은 아랍어로 자기 나라이집트를 말할 때에 “이짚트”라고 말하지 않고 , “미스르”(Misr)라고 말합니다. 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짚트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지 않고 “미스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 하면, “케메트 혹은 미스르”라는 말이 고센을 의미하는 말이고, 이 단어의 뜻은 모두 “검고 비옥한 땅”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로 이집트의 진정한 국토의 의미는 95% 모래땅이 아니라 비록 5%에 불과하지만 검고 비옥한 땅, 곧 고센 땅이란 말입니다.
현제 고센지역은 이집트에서 가장 관계수로가 잘되어 있는 곳입니다. 거미줄처럼 수로가 얽혀 있고, 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막의 나라인 이짚트이지만 고센에서는 물이풍부하여 모든 사물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렇게 고센은 옛날부터 풍요한 땅이었습니다. 민 11:5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고 합니다. 고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정해 놓은 성별한 땅입니다. 에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보세요. 하나님이 애굽 전체에 재앙을 내려 파리가 들끓게 했지만, 고센에는 파리가 없었습니다. 애굽의 전 가축들이 다 죽게 했지만, 고센의 이스라엘의 가축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전 지역에 우박이 내렸지만, 고센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전 애굽에 빛이 없이 흑암이었지만 고센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하여 놓은 고센 땅은 에굽인들은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창 46:34절 보면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축을 하찮은 직업으로 여긴 바로가 그냥 내버리듯이 야곱에게 준 땅이 바로 고센 땅입니다. 자신들에게 쓸모 없는 땅이라고 준 그 고센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땅이 될 때에 가장 비옥한 은총의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고센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드는 게토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람을 가증히 여깁니다. 얼마나 교회를 미워하고 크리스천들을 증오하는지 그들이 가진 증오심을 무서울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사탄의 자식이요 어둠의 무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이 축복과 은총의 게토 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특별히 만들어 놓은 고센 땅에서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성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축복인 것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고센 땅에서 떠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애굽은 영원히 거할 나라가 아닙니다.
창 46:31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1절은 바로 앞에서 요셉이 자신의 가족들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바로에게 자신의 가족들을 설명할 때에 요셉은 “자신의 가족들이 가나안 땅에서” 온 것을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굳이 가나안 땅에서 온 것을 강조하지 않아도 바로는 알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있고 가나안 땅에서 에굽 땅으로 왔다”는 말을 빼도, 얼마든지 의미가 전달되는데 왜 요셉은 꼭 “가나안 땅에 있던”이란 말을 넣어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나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애굽땅은 어떤 의미일까요? 에굽 땅은 잠시 머물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에굽 땅에 제 아무리 살기 좋다고 하더라도 성도는 세상 나라에 영원히 머물러서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에굽은 정착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떠나야 할 자리입니다. 에굽을 떠나 광야 40년을 생활하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도 우리가 뿌리 내리고 정착할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 자리입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을 맴 돌고, 결국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은 성도가 영원히 살아야 하는 천국이며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순례자의 진행))이란 존 번연의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을 “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고 번역한 분이 개화기 선교사였던 게일목사님였습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소설을 가지고 와서 한글로 번역된 첫 번역소설입니다. 게일목사님이 제목을 그렇게 번역했고 지금까지 그 제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기독도가 끊임없이 십자가를 향해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기독도는 세상에 머물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전진합니다.
“우리는 천국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천국에 별로 관심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맛과 멋에 흠뻑 취하여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엇인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애굽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세상 에굽에 취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에굽 땅은 영원히 내가 머물 땅이 아니고 잠시 있다가 떠날 자리인 것을 잊어 버렸기에 에굽의 생활에 젖어 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세상 에굽의 달콤한 맛에만 빠져서 헤어 나올 줄 모르게 됩니다.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이며 영성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를 향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마치 세상을 종착역처럼 여기고 삽니다. 종착지까지 가는 사람은 중간에 내릴 걱정하지 않기 때문에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중간에 내릴 경우라면 어떠합니까? 깊이 잠이 들거나 정신을 놓고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작은 아이가 대학교 신입생 예비 모임을 위해 아침같이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집에 출발할 때 제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아빠 아침 9시 지나면 꼭 전화나 문자 해 주세요.”왜 그럴까요? 행여 기차타고 가다가 잠이라도 들어서 내려야 하는 동대구역에 내리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므로, 긴장하고 마지막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잠시 거쳐 가는 세상 에굽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활하고, 천국에 더 이상 소망을 두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의 사람은, 즉 성도는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C. S. 루이스는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나안을 목표로 하면 광야도 은혜롭습니다. 재미가 있습니다. 축복이 됩니다.
민 16장에 보면 고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에게 반기를 들고 대항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라의 말에 선동된 사람들이 모세를 돌려 치려고 하는 사태까지 발전합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나요?
민 16: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이것이 무슨 말이에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을 보리고 에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고라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을 목적으로 삼으면 광야 생활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축복이 되지만, 에굽을 목적으로 삼으면 다 잃어 버립니다. 에굽도 잃어 버리고 하늘나라도 잃어 버린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얼마 전 ‘동물의 왕국’에서 본 내용입니다. 아프리카 사하라의 쇠똥구리가 큰 모래언덕 중간에 갇혔습니다. 쇠똥구리는 쇠똥을 크게 만들어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가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하지만 모래 언덕이 얼마나 높은지 올라가다가 굴러 떨어지고 또 굴러 떨어집니다. 한낮이 되어서 사막의 온도는 점점 뜨겁게 올라갑니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더위에 쇠똥구리 자신도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쇠똥구리는 결국 먹이를 버리고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먹이도 중요하지만 생존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날개만 피고 날아가면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닌데 세상의 것에 집착하며 매달리다가는 결국 세상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포기하여 놓고 날개만 피면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5:1에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집은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애굽은 떠나야 하는 곳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굽의 생활이 아무리 달콤하다고 하여도 성도는 가나안으로 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머물되 세상에 정착하지 말고, 하늘의 집을 지향하며 사모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맙시다.
창 46:32에는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야곱과 그의 식구들은 목축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자라는 천직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양과 소와 소유,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을 버리지 않고 가나안에서 애굽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반대로 농경민이었던 에굽 사람들은 목축을 더럽고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요 짧은 구절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참 큰 구절입니다. 야곱 가족들이 에굽으로 이사했습니다. 이사해 보니 에굽 사람들은 “목축은 천한 직업이고 농사는 고상한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에굽 사회의 분위기를 보고,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라야지”말하면서 자신들의 목축을 버리고 에굽 사람들이 좋아하는 농사나 지어야지 라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세상이 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직업 수는 수천수만 가지입니다. 1964년에는 약 1,300개의 직업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12,500개로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근래에 와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식의 양이 늘었고 전문화 되었으며 동시에 직업도 다양하게 분화되고 수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이냐 물으면, 대부분 말하기를 “월급 많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지 또는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지, 이런 것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세상 에굽이 좋은 것이라면 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따라 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에굽에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천직인 모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믿었기에 그들은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탈무드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백수 천만시대>라고 하는데, 일이 없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도 큰 보람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 47:3에는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야곱의 식구들은 대대로 이어온 천직인 목자라는 사실을 바로 앞에서 떳떳하게 얘기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가 훌륭한 직업관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그의 책에서 인간을 “쫓겨 다니는 사람”과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가진 것과 생각이나 관계와 자신의 소유물 등이 내 것이라는 생각 하에서 지키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빌려온 것이라는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기에 나누고 베풀어 주는 것에 충실하게 생활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다음 주일이면 3월이 됩니다. 비록 추위가 남아 있지만 봄이 오는 3월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2월을 마무리하고 3월을 준비할까요? 나는 고센 땅에 살아야 하고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만족하지 말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덕민 교회 성도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잠시 머무는 세상에 뿌리내리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는 우리 덕민 교회 성도님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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