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LA 수필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중
인터넷 시대와 수필문학의 변화 / 김성곤
1. 수필문학의 등장과 변천
수필문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이나 플루타크, 또는 로마 시대의 키케로나 세네카와 만나게 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수필은 16세기 프랑스의 몽테뉴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수필(essay)’이라는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몽테뉴였는데, 그는 시골로 은퇴한 후 자신의 사적인 삶과 기분과 견해들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1580년에 출간한 저서에 ‘essai’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수필문학의 시효가 되었다. 몽테뉴가 굳이 ‘시도(attempts)’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essai’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수필은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논의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파편적인 이야기들이며, 친숙하고 개인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몽테뉴는 수필이란, 현명하고 여유 자적한 시골 신사가 삶의 잡다한 것들에 대해 기지가 넘치고 예리하며 통찰력 있게 쓴 글이 바로 수필이라고 보았다. 수필문학을 주창하면서 몽테뉴가 보여준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필이란 기본적으로 사적이고 주관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수필의 그러한 특징은 곧 수필의 또 다른 특징인 긴밀한 저자․독자 관계를 창출해내었다. 수필을 읽는 사람이 수필가의 글에 공감을 느끼고 자신의 상황과 동일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베이컨은 주관적인 몽테뉴의 수필과는 달리, 보다 더 진지하고 잠언적이며 사색적인 주제들, 예컨대 진리․명예․학문․풍요 등에 대한 수필을 써서 보다 더 심오한 성찰 속에서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럼에도, 베이컨 역시 몽테뉴처럼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수필을 썼으며, 수필을 인간과 사회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로 생각했다. 이들에게 수필은 간결하고 명료하며 암시적인 글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르네상스 시대)의 현란하고 장식적인 글보다는 경구적이고 상식적인 글을 좋아했던 17세기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성과 합리주의 시대였던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수필은 더욱 환영을 받고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18세기에 활발했던 사교활동과 위트 넘치는 대화, 그리고 갑자기 붐을 일으킨 커피숍과 살롱과 술집 문화, 또 유행과 관습과 행동양식에 대한 급증하는 관심은 모두 수필문학의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더욱이 18세기에 생겨나기 시작한 신문과 잡지의 등장은 수필문학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소위 ‘칼럼 수필’의 유행을 초래했다. 당시 수필은 비공식적이었고 풍자적이었으며 유머가 배어있었고, 수필이 다루는 관심사는 사교, 교육, 도시생활, 시골생활, 오페라, 우정, 연애, 결투, 유행 등 모든 일상사였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은 언제나 저자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시각과 경험을 통해 논의되고 제시되었다. 즉 수필은 객관적일 필요가 없는 문학장르였다는 것이다.
수필의 그와 같은 특징은 낭만주의 시대인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더욱 각광받고 환영받았는데, 그 이유는 낭만주의가 개인주의와 감성을 특히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필은 개인적, 심미적 견해 표출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비판을 시도하는 출구로 사용되었는데, 수필의 이러한 특성은 지금도 면면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를 대표한 수필가는 찰스 램(Charles Lamb)이었는데, 그는 아무리 사적인 것이라도 즉시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사회문제로 승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수필가였다. 19세기 중반 빅토리아시대(1837-1901)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찰스 램의 전통을 계승하는 조지 기싱(Geroge Gissing)같은 유명한 수필가가 등장했으며, 또 다른 편에서는 보다 더 철학적인 월터 페이터(Walter Pater)나, 존 러스킨(John Ruskin)이나,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같은 수필가들이 활동했다.
미국의 경우, 정착 역사가 시작된 17세기와 18세기에 수많은 청교도 목사들과 문필가들이 수필과 수상을 썼는데, 그 중 유명한 수필가는 단연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었다. 그가 쓴 ꡔ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ꡕ은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이 즐겨 읽는 수필집인데, 그는 이 유명한 글에서 미국인들이 지켜야할 열세 가지 덕목, 절제․침묵․질서․결의․절약․근면․성실․정의․중용․청결․평온․순결․겸손을 미국인들이 추구해야할 아메리칸 드림(The American Dream)의 성취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본격 수필가는 19세기 사상가들인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헨리 데이빗 소로(Henry David Thoreau)였다. 「자연론」이나 「미국의 학자」 등으로 잘 알려진 에머슨과 [월든 숲 속의 생활]로 유명한 소로는 둘 다 미국 수필문학의 아버지들인데, 이들 역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글을 썼으며, 궁극적으로는 사적인 소재들을 이용해 뛰어난 당대 사회비판을 성취해냈다. 에머슨도 자신의 사적인 성찰들을 글로 썼지만, 특히 소로의 [월든 숲 속의 생활]은 소로가 문명을 피해 약 2년 동안 보스턴 근교 콩코드 소재 월든 숲 속에 들어가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는 신문과 잡지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미국에는 수필문학의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수필을 실었던 유명한 잡지들로는 [하퍼스], [애틀란틱 만슬리], [새터데이 리뷰 오브 리터래춰], [뉴요커], [라이프] 등이 있었다.
2. 정보 테크놀로지 시대의 수필문학
20세기에 들어서는 ‘essay’와 ‘column’ 또는 ‘essay’와 ‘article’의 차이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대 수필(Modern Essasy)]라는 책을 펴낸 미시건 주립대의 러셀 나이(Russell Nye)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적어도 수필가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혼란은 에세이와 아티클 사이의 구분인데, 후자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원하는 요즘 독자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 아티클은 개인적인 편견이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어서 저자의 개성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반면, 에세이는 정보를 초월해 저자의 개성이 들어가 있는 글로서, 사실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이치를 깨우쳐주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에세이의 기본 특성은 언제나 개인적 접근에 있다.
그럼에도, 영어의 ‘essay’라는 단어에는 이미 ‘article’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미국인들은 학술논문도 일반적으로 에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 에세이와 아티클 사이의 구분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으며, 에세이와 칼럼 사이의 구별은 아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수많은 신문과 잡지의 등장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경계의 소멸은 수필의 성격에도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예컨대 전통적인 수필관은 예전에 우리 교과서에 나오듯, 수필을 “단아하고 청초하며” “학(鶴)이요, 난(蘭)이요, 연적(硯滴)”에 비유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고전적 수필관은 다분히 예술을 현실과 괴리된 아름답고 지고한 것으로 생각했던 모더니즘적 예술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격변하는 20세기 후반의 현실은 이제 수필을 더 이상 전원적 풍경 속에 머무르기 어렵게 만들었고, 따라서 수필은 이제 상아탑에서 나와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성찰하고 반영하는 거울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신문이나 잡지에 에세이나 칼럼을 쓰는 것을 ‘잡문’이라고 경시했던 교수사회의 잘못된 편견 역시 예술과 학문의 순수성을 중요시했던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자의 의무는 학술논문을 쓰는 것이겠지만, 지식인의 책무는 분명 수필이나 칼럼을 통해 사회적 문제점들을 제기해 개선하는 것이다. 서지문 교수의 지적대로, 지식인들의 에세이는 비록 즉시 사회개혁을 불러오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개선과 문제점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서지문 [어리석음을 탐하며] 6쪽).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훌륭한 학자였는지는 몰라도 지식인의 역할은 소홀히 해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주위에서는 ‘잡문’을 쓴다고 빈정거리고, ‘잡문’을 쓴 교수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 자체가 사실은 짐짓 그런 척 해보는 위선이었으며, 사실은 모두가 영향력 있는 매체에 글을 쓰고 싶은 지식인적 욕구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잘못된 것은, 객관적이고 사색적인 것만 수필이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은 수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수필의 특성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수필가는 그 사적인 사건이나 성찰을 개인적인 차원에 가두어놓지 않고, 보다 더 큰 차원으로 확대해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비판이나 문제제기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그러므로 훌륭하고 능숙한 수필가는 자신의 사적인 경험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대사회의 제반 문제점들에 대한 통렬한 고발을 수행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국수필가협회 조경희 회장의 탁월한 수필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견, 저자 자신의 사적인 경험담처럼 들리는 이 수필은 사실은 외모에만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천박한 사회풍토에 대한 한 수필가의 예리한 비판과 강력한 고발로 승화되면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수필가 조지 기싱은 자신의 수필집 제목을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사적인 기록(The Private Papers of Henry Ryecroft)]이라고 붙인 후,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충실히 기록했다. 이 수필집의 역자 이상옥 교수는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수상록] 한편의 감동적인 수상록이 되는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 책이 저자 자신의 부단한 자아성찰의 기록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참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자기 자신의 반생에 대한 회고적 성찰이다.
박이문 교수 역시 [다시 찾은 빠리 수첩]이라는 수필집에서, 수필이란 결국 개인의 사적 경험의 기록이며, 다만 그것이 사회적 문제로 확대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거기에는 광복 직후의 정치 및 사회적 혼란, 가난, 6․25 전쟁, 폐허가 된 서울,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 소주 한잔을 놓고 시와 프랑스 문학을 놓고 떠들던 무교동 선술집, 빠리의 골목길, 쏘르본느 대학의 강의실, 로마, 스페인, 모로코 등의 퇴색한 사진들만 남아 있다. 그것들은 아픔과 일그러진 꿈의 기록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그리고 우리의 진실한 삶의 기록들이다.
[다시 한번 강가에 서다]라는 수필집을 출간한 이창국 교수는 “모두가 제 나름대로 아름답고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사건들을 정성 들여 적은 글이 수필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수필가 주연아 선생은, 수필집 ꡔ누구나의 가슴에도 빙하는 흐른다ꡕ에서, “좋은 수필이란 결국 공감하는 감동을 받는 글이라 생각하고 그 필요조건인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서 보편성이 있는 주제를 택했다”고 하면서, 주위의 죽음을 겪으며 받았던 자신의 상처와 삶에 대한 성찰을 보편적인 인간사 문제로 잘 승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또 수필에는 해학과 위트가 깃들어 있어야만 한다. 예컨대 박규환 교수의 [파적담(破寂談)]과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라는 수필집은 해학과 풍자로 가득 차 있어서 웃음 속에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파적담]의 서문을 쓰면서, 고재기 교수는 “박형이 있는 데는 어디나 그의 재기발랄하고 해학이 풍부한 농담으로 화기애애하다. 그의 수필의 맛이 이런데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적고 있다.
정보 테크놀로지(IT) 시대에는 해학과 풍자, 그리고 위트와 패러디가 수필문학에 더욱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최근 인터넷 통신망에 연재되다가 수많은 조회 수를 기록해 드디어 단행본으로 출간된 [니나와 폴의 한국어 레슨](문학사상사, 2003)의 인기 이유는 해학과 풍자, 그리고 위트와 아이러니, 또 패러독스와 패러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인터넷 공간에서는 재미가 없으면 그 순간 지워짐(delete)을 당한다.
또 정보 테크놀로지 시대에 수필은 더욱 더 활발하게 사적인 소재를 통한 사회비판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 통신망은 극도로 사적인 글들이 발표되는 개인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감하고 교류하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니나와 폴의 한국어 레슨] 역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일본계 미국인과 결혼한 교포 여인의 사적인 경험담을 통해 언어와 문화의 충돌과 갈등, 그리고 화해 가능성을 성찰해보는 수필집이다. 정보 테크놀로지 시대에 수필은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글쓰기 공간과 새로운 의사소통 방법을 습득하게 될 것이며, 인터넷을 이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독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등장해 보편화되던 1960년대 미국과 1990년대 한국에서는 「문학의 위기」와 「소설의 죽음」이 선언되었다. 허구(fiction)에 의존하던 소설(fiction)은 이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때문에, 그리고 허구로부터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게 된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밀려 그 전통적인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필은 허구에 근거하는 문학장르가 아니어서 IT 산업의 발달에 굳이 위협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스스로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습적 인식에 본질적 변화를 초래한 거대한 시대적 변화에 눈을 뜨고, 수필문학 역시 적극적인 자세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미래의 수필문학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