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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 지눌 [知訥, 1158~1210] |
조계종(曹溪宗) 개조(開祖)이다. 속성 정(鄭), 호 목우자(牧牛子), 시호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1188년(명종 18)에 공산(公山: 현재의 팔공산)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한편,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을 조계산(曹溪山),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아래는 월간 중앙 기사입니다.
한국 조계종의 완성자 보조국사 知訥
"禪은 부처의 마음(佛心)이고 敎는 부처의 말씀(佛語)인데, 이를 어찌 분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다. 서구 물질문명이 한계에 부닥치면서 동양사상에, 정신적 부분에 눈길을 돌리는 것인데 그 대상의 한가운데 불교가 있다. 지금까지는 일본불교와 티베트불교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점차 한국불교가 주목받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이처럼 호응받게 된 데는 화계사 조실인 숭산(崇山) 스님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숭산은 보스턴 흑인촌의 아파트에 홍법원(弘法院)이라는 선방(禪房)을 세웠는데, 현재 홍법원은 약 13만평의 부지에 500여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2개의 법당, 50개의 선방 그리고 미주 전역에 35곳의 지원을 두고 있을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도 숭산의 제자다. 그래서인지 홍법원의 여러 지원 가운데서도 뉴욕 맨해튼의 인터내셔널 젠(禪의 일본식 발음)센터는 엘리트 미국인이 모여드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이처럼 한국불교가 서구인들의 심성을 파고드는 데는 일본불교와 티베트불교가 갖지 못한 장점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불교는 너무 엄하고 형식에 치우쳐 있으며 달라이라마로 대표되는 티베트불교는 지나치게 신비적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한국불교가 새롭게 부상하는 것이다. 엄한 형식과 지나친 신비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기능이 한국불교에 있음을 발견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선종(禪宗)인 조계종이다. 조계종이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종단이라는 사실은 비불교도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이 어떻게 해서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계종이 어떻게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이 될 수 있었는지 알려면 약 800여년 전 고려시대로 돌아가 그 시대와 한 승려를 만나야 한다. 바로 지눌이다.
‘한국의 토종불교’ 조계종
고려는 잘 아다시피 불교국가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서 “우리 국가의 대업은 필연코 여러 부처님(諸佛)의 호위에 의지한 것”이라고 한 것이나 문종시대 개경에 2,800간이 넘는 대사찰인 흥왕사(興王寺)를 비롯해 개경에만 70개의 사찰이 즐비할 정도의 불교왕국이었다. 무신정권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고려사”에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무신정권의 추대로 임금이 된 명종은 즉위년 10월 승려 3만명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을 비롯해 자주 절을 방문하고 승려들을 접대했다. 불교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사찰과 승려들은 무신정권에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명종 4년(1174)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명이 성 북문으로 침입해 선유승록 언선(彦宣)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신정권의 실권자 이의방(李義方)이 1,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서 수십명의 승려들을 주륙했으나 승려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다음날에는 오히려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귀법사·홍화사(弘化寺) 등의 승려 2,000여명이 성 동문에 집결해 저항했다.
이 기세에 놀란 이의방이 성문을 닫자 승려들은 성 밖 인가에 불을 지르고 숭인문까지 불태운 후 성안으로 돌입해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했다. 이의방의 군사와 이들 승군이 맞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승려 100여명이 사망했으나 군사들 또한 전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쌍방 많은 희생을 냈다.
이의방은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일절 금지시키고 군사들을 보내 중광사·홍호사·귀법사 등 반란의 중추가 된 절에 불을 지르고 절의 기물을 압수해 돌아오게 했는데 중도에서 승려들이 이들 군사를 요격하여 기물을 탈환하고 군사들을 다수 사상케 했다.
“고려사”에는 이외에도 승려들이 무신정권에 무력으로 반발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당시의 승려들은 깊은 산사에서 참선하는 구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무사집단의 모습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에 대한 승려들의 반발을 군사쿠데타에 분개한 종교계의 양심있는 행동으로 볼 수 없다는 데 고려불교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무신정권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종파는 화엄종·법상종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교종(敎宗)종단이었다. 교종은 왕실이나 문벌귀족과 결합해 온갖 특혜를 누리다 왕실과 문벌귀족이 무신들에 의해 무너지자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
무신정권에 대한 교종의 반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최충헌 집권 때인 고종 4년(1217)에 발생했다. 최충헌은 개경 가까이 접근해온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흥왕사·왕륜사·경복사 등의 승군들을 동원했는데 이들은 거짓 패했다고 보고하고 성안으로 들이닥쳐 최충헌의 집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최충헌의 가병(家兵)과 맞서 싸우다 무려 300명이나 사망했는데, 뒤이어 최충헌이 성문을 닫고 도망간 승군을 찾아 죽이니 때마침 내린 큰 비에 피가 개울처럼 흘렀으며, 또 다시 300명을 남계사(南溪寺) 냇가에서 죽이니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승려가 800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사람들이 몇달 동안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최충헌은 각 사찰에 물샐 틈 없는 경비를 강화했으나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무력만으로 불교를 억압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불교계 내부에 다가가는 한편 불교계를 변화시켜 정권의 안정을 기하려 했다. ‘최충헌묘지’에 따르면 그는 아들을 조계종의 승려로 만들고 승려 혜심(慧諶)에게 선시(選試:승과)를 거치지 않고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는 등 불교계를 포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충헌 또한 왕실과 가까운 귀족불교 교종을 불교계 내부에서 제어하기 위해 선종을 의도적으로 지원했다. 고려에서 선종, 즉 조계종이 발전한 것은 최충헌과 그 후예들의 이런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지눌은 바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 등장한 선승(禪僧)이었다. 그러나 지눌의 사상과 활동은 무신정권의 이런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눌은 고려 의종 12년(1158)에 태어나 희종 6년(1210)까지 53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지만 이 기간은 임금이 무려 네번이나 바뀌는 변란기였다. 그 변란의 시작이자 정점이 무신난이었다.
무신난이 일어나 정중부와 이의방이 문신들을 대거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을 때 지눌의 나이 13세였다. 지눌은 여덟살에 출가했으니 법력으로 따지면 벌써 5년째 수행생활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눌의 속성(俗姓)은 정(鄭)씨이고 자호는 목우자(牧牛子)로서 황해도 서흥 출신인데, 아버지는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이고, 어머니는 개흥군 출신의 조(趙)씨였다. 지눌이 태어날 때부터 병약해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썼으나 효험이 없자 그의 아버지는 병이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올렸고, 그뒤 실제로 병이 깨끗이 낫자 여덟살 때인 의종 19년(1165)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에 속했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승려생활 기간은 참선만 하기에는 너무 변란이 많았다. 의종은 각 사찰을 전전하면서 문신·승려들과 함께 향락을 일삼다 무신난으로 쫓겨나고, 무신정권 내부의 다툼으로 실권자가 정중부경대승이의민 등으로 바뀌는 극도의 혼란을 목도해야 했다. 정중부가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에게 제거되고, 경대승이 병사한 후 천민 출신 이의민(李義旼)을 거쳐 최충헌(崔忠獻)이 집권했을 때는 그의 나이 38세였다.
출가한 지눌은 불문에서의 성장기 대부분을 왕실과 결탁한 사원의 부패 및 무신에 의한 문신의 살육, 무신 상호간의 권력투쟁, 그리고 무신정권에 대한 교종 세력의 조직적인 반발을 목도하며 보냈던 것이다. 특히 교종 세력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거듭 봉기했다 대거 살육당하는 모습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왕실 및 귀족과 결탁한 불교는 이미 현실정치에서 초월할 수 없는 처지였고, 이에 따라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스스로를 밀어넣어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불교 내부적으로도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는 특혜를 이용해 토지와 농노를 겸병하고 노비를 사유화해 막대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외적으로는 현실정치에의 무분별한 개입과 내적으로는 사원과 승려들의 부패와 타락에 의해 고려불교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종교 본연의 위치를 잃어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눌은 불교계의 혁신을 절감하게 되었고, 무신정권도 왕실과 결탁한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양자의 이런 필요성이 자연스레 선종을 부흥시키는 것으로 결합되었던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교 밖에 따로 전한다’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는 종지를 가진 선종은 7세기 중반 신라 승려 법랑(法郞)에 의해 도입되어 통일신라 말기 진골 귀족과 대립하던 지방 호족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눌의 제1차 깨달음
신라 문무왕때 해동화엄종(교종)을 개창한 승려 의상(義湘:624∼720)이 진골 귀족 출신인 점에서 알 수 있듯 교종은 강력한 중앙 권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왔다. 의상은 중국 북방에서 두순(杜順)과 법장(法藏)이 일으킨 화엄종 사상을 받아들여 해동화엄종을 연 것인데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된다는 화엄종 사상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왕권 강화에 적합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신라 말기 지방을 장악한 호족들은 교종의 이런 사상에 맞설 이념체계가 필요했고 그 결과 선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왕조의 성립과 함께 다시 교종은 왕실불교, 귀족불교로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 결과 불교 자체가 하나의 특권세력이 되어 극도로 부패하게 된 것이었다.
부패한 불교에 대한 지눌의 개혁 의지와 왕실과 결탁한 불교계에 대한 무신정권의 재편 의지가 시대적 요구와 함께 맞물려 나온 것이 지눌의 불교계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지눌이 오늘날까지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무신정권의 불교계 장악의 도구로 불교 혁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사상적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지눌은 무신 집권기인 명종 12년(1182) 약관 25세에 승려 대상 과거인 승선(僧選)에 합격했다. 고려시대에 승선은 출세의 관문으로, 그 합격은 평생의 영화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눌은 승선 합격이 주는 영화의 길을 포기했다. 승선에 합격한 직후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에 참석해 그곳에 모인 승려들과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은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정혜결사는 명리를 멀리하고 불교계를 혁신하자는 개혁모임이었다.
그러나 외적인 개혁을 주창하기에는 아직 개인적 깨달음이 부족하다고 느낀 지눌은 결사의 본격적인 활동을 뒤로 미루고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전남 나주의 청량사(淸凉寺)에 들어가 참선과 독경에 힘썼다. 지눌은 청량사 강당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던 중 다음 구절에서 커다란 깨우침을 느꼈다.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
심성(心性)의 본성은 외부에 의해 물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지눌이 기쁨을 가눌 길 없어 불전을 돌면서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것을 지눌의 제1차 심기일전이라 하는데 이때 심성과 선(禪)의 본바탕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 뒤 지눌은 평생 “육조단경”을 지은 혜능(慧能)을 사모하여 스승으로 모셨다. 글자를 알지 못하는 스님으로 알려진 혜능은 많은 일화를 남기는데 “육조단경”에 깃발과 관련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떤 중이 바람이 분다고 하자 다른 중이 깃발이 나부낀다고 하여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나아가 말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깃발이 나부낀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네.”
그는 또한 “부처란 성품 가운데로 향하여 이루어지니, 몸밖으로 향해 찾으려 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이 말은 지눌이 깨달음을 얻은 말과 근본적으로 같은 취지로서 혜능의 깨달음의 본류를 보여준다.
지눌이 얼마나 혜능을 사모했는지는 만년에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한 뒤 송광산을 육조 혜능이 머물렀던 조계산(曹溪山)의 이름을 따 조계산으로 개칭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조계(曹溪)란 본래 중국 선종(禪宗)의 6조 혜능(慧能)의 별호로서, 그가 중국 소주부성(韶州府城) 동남을 흐르는 ‘조계’부근의 남화사(南華寺)에서 수행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소수 학설이지만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이를 오늘날 우리나라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이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비문에도 ‘조계의 한 파가 동쪽땅으로 건너왔다’고 썼는데 이때 조계의 한 파란 혜능의 선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눌이 열다섯살 때인 명종 2년(1172)에 세워진 고려국 ‘조계종’굴산하단속사 대감국사지비(高麗國曹溪宗堀山河斷俗寺大鑑國師之碑)에 조계종이라는 종파 이름이 보이며, 이보다 앞선 인종 3년(1125)에도 ‘대선사 조응(祖膺)이 조계선(曹溪選)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계종은 지눌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눌이 조계산에 수선사(修禪社)를 개창한 이후부터 조계종은 그 세력이 흥성해졌으므로 조계종이 오늘날의 위치를 차지하는 데 지눌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禪·敎의 융합으로 한국적 불교 창도
지눌의 등장은 무신정권의 정권 유지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었지만 그가 단순히 무신정권의 이념적 합리화를 통한 불교 개편에 앞장선 것은 아니다. 무신정권은 교종을 억압하는 한편 선종을 지원함으로써 불교계를 친정권적인 세력으로 개편하려 했지만 지눌은 교종을 억압함으로써 선종을 중흥시키는 반사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선종과 교종의 융합을 시도했다.
당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은 심각했다. 선종에서는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교외별전과 심법(心法)을 주장하면서 경전의 문자와 이론을 무시했고, 교종에서는 경전과 법문만이 부처의 참된 가르침일 뿐 선(禪)은 중국에 와서 성립된 종파의 하나에 불과하다며 선종을 정통불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눌은 1185년 예천의 하가산 보문사로 옮겨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의 이론과 경전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선종의 종지에 의거해 수행을 계속하는 한편 교종의 해탈 방법을 알기 위해서도 노력한 것이다. 그 전에 지눌은 이원화된 선과 교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당대의 이름 있는 화엄종장(華嚴宗匠)들을 방문하여 교종의 수행방법에 관해 물었으나 모두 교리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어서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눌은 스스로 대장경을 탐독하며 교종을 연구했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교종에 대해 연구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은 심성(心性)의 본성은 외부에 의해 물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1차 깨달음과 같은 견지로서 지눌은 여기에서 선종과 교종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지눌은 또 교종을 연구하는 와중에 화엄종 계통인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華嚴新論)을 읽고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데, ‘보살은 십신위(十信位)에서 자기 성품 중에 있는 근본부동지(根本不動智)·보광명지(普光明智)를 깨달아 십주초위(十住初位)에 들어간다’는 구절과 ‘몸은 지혜의 그림자요, 국토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도 맑아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용납됨이 인타라망(因陀羅網)과 같다’고 한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달았다. 화엄종을 통한 이런 깨달음을 두번째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이때 지눌이 책을 덮고 탄식했다는 말이 그가 직접 지은 “화엄론절요”에 실려 있다.
‘부처님이 입으로 말씀한 것이 곧 교(敎)이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곧 선(禪)이다. 부처님의 입과 조사의 마음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그 근원을 파고들지 않고 제각기 자기가 익힌 것에 안주하여 부질없이 논쟁하며 헛된 세월만 보낸다는 말인가? …여래의 지혜가 또한 반복됨이 이와 같으니 중생의 몸 안에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머리 꼭대기에 경전을 이고 다니면서 떨어뜨려 놓고 울 줄도 모른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선·교(禪敎)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佛語)인데,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 선과 교가 둘일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눌사상과 한국 조계종의 독창성이 있다. 그는 선·교가 하나라는 원리를 깨달은 위에서 인도적인 교와 중국적인 선을 회통함으로써 선(禪)을 위주로 하되 교(敎)도 소홀히 하지 않는 한국적인 불교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불교개혁운동
대각국사 의천이 교가 위주가 되어 선을 통합하려 했다면 지눌은 선이 위주가 되어 교를 통합하려 한 것이다. 지눌은 이처럼 교와 선을 회통했지만 그 진정한 본령은 선에 있었다. 즉 선을 위주로 교를 포용한 것이었다. “화엄론절요”서문에서 지눌이 한 말이 이를 말해 준다.
‘나는 마음을 닦는 이는 먼저 조사의 도가 자기 마음의 본묘(本妙)임을 알아 문자에 얽매여서는 안되며, 그런 다음에 변론한 글로써 마음의 체용을 변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의 도, 즉 선(禪)을 위주로 하되 그 바탕 위에서 교를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의천과는 정반대의 방법이었는데 의천의 천태종이 그의 사후 세력이 약화된 반면 지눌의 조계종은 오늘날까지 연면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이유는 무신정권의 지원이란 불교 외적 차원을 넘어 교리의 통합이라는 내적 융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선을 위주로 교종을 융합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은 이처럼 오래된 것이고 지눌에게서 일단 그 사상적 완성을 이루어 한국불교의 중요한 특질이 된다.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불교계 개편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적극 활용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최충원이 창복사(昌福寺)를 중창하여 ‘장차 총림(선문)을 크게 열어 심법(心法:선종)을 천양하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에 대한 문답을 나누는 담선법회였다. 이 담선법회에는 판공(弁公)을 비롯한 선종 지도자들이 적극 호응해 선에 대한 문답을 나누며 불교계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지눌도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뜻을 같이하는 도반(道伴)들과 함께 불교계 개혁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명종 18년(1188),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했던 도반 득재선백(得才禪伯)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전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사람을 시켜 청했으나 지눌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개혁이라는 외향적 행위보다 참선이라는 내재적 수양이 불교계 개혁의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2년 후인 1190년에야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거조사로 거처를 옮겨 불교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지눌은 예전에 결사를 약속한 동지를 모은 후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했다. 그리고 정혜사 발기 취지문이라 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하 결사문)을 반포한다. 결사문은 당시 불교와 승려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자취를 돌이켜보면 불법을 빙자하고 의지하고 나와 남을 구별해 이(利)를 기르는 길에 허덕이고, 진세(塵世)의 흙탕물에 빠져 도덕을 닦지 않고 의식(衣食)만을 허비하니 비록 다시 출가한다고 해도 무슨 덕(德)이 있겠는가.’
이 결사문에서 알 수 있듯 정혜결사는 당시 불교의 폐단을 안에서부터 일신하려는 개혁운동이었다. 이 결사문은 미혹한 중생이라도 마음을 바로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밝혔는데, 그 방법이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였던 것이다. 정(定)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조용하게 하는 선정(禪定)을 의미하고, 혜(慧)는 사물을 사물대로 여실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정은 마음의 본체, 곧 근본지(根本智)를 가리키며, 혜는 마음을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의 작용을 말한다. 마음의 본체와 작용을 분리할 수 없듯 정과 혜도 항상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결사문에서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종과 교종, 정(定)과 혜(慧)로 나뉜 당시 불교계의 분열상을 비판하고 선·교 양종의 통합과 정혜를 함께 수행하는 쌍수를 주장한 것이다. 지눌은 이런 바탕 위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을 강조했다.
그러나 지눌은 정혜사를 결성한 후에도 현실세상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자기수양에 더욱 정진했다. 그는 현실불교의 타락한 모습을 비판하면서도 현실개혁에 직접 나서기보다 도를 닦으며 외연(外緣)을 끊고 내관(內觀)에만 전심전력하는 수행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현실 개혁에 직접적으로 나서는, 즉 현실에 관심을 가져 중생 속에도 도를 행하게 되는 깨달음이 다가온다. 최충헌 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제(王弟)를 임금으로 세운 신종 1년(1198) 41세의 지눌은 다른 선승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자리를 옮겨 경전을 읽으며 참선을 계속하던 중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다 다음 구절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른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으로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먼저 고요한 곳이니, 시끄러운 곳이니, 일상의 인연에 따른 곳이니, 생각으로 분별하는 곳이니 하는 것을 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같지 않은 바에 맞춰 아래에서 편안히 즐길 뿐이다.’
도는 산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를 지눌의 3차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이 깨달음은 그에게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서 중생 속에서 도를 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훗날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년 동안 일찍이 방심한 일 없이 마음에 만족한 수행을 하여왔건만 오히려 정견(情見)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보다 홀연히 눈이 열리어 당장에 안락해졌다.”
지눌의 생애를 이때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기도 한다.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을 향한 줄기찬 자기정진의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모든 사람을 위해 정법을 펼친 이타행, 즉 자비의 실천 기간으로 나누는 것이다. 즉 자아의 해탈을 위한 자기수행에서 사회 구원을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이때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지눌은 43세때 다시 송광산 길상사로 옮기면서 그 이름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바꾸는데 이는 그 근처에 정혜사(定慧寺)라는 곳이 있어 정혜결사와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정혜사 대신 수선사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었다. 지눌은 여기에서 “금강경”과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하고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보각선사어록”을 보조자료로 쓰면서 학승들에게 도를 전하였다. 일부에서는 지눌이 바로 여기에서 조계종을 창립한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지눌사상의 핵심 頓悟漸修
지눌이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종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불교 교리와 수행에 대한 그의 사상이 심오하기 때문이다. 지눌의 사상은 정혜쌍수와 함께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문제는 아직까지 한국 불교계에서 논쟁이 계속될 정도로 민감한 부분이다. 돈오점수는 일종의 단계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올바른 수심의 길은 먼저 마음의 성품을 분명히 깨치고 그 깨침에 의거하여 점차로 닦아가는 것, 즉 선오후수(先悟後修)를 뜻한다. 지눌은 “수심결”(修心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다. 그러나 요약해 말하자면 돈오와 점수 이 두 문뿐이다. 비록 돈오와 점수가 최상근기(最上根機)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는 하나 과거에 이미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음에 의지하여 수양하고 점차로 훈습(薰習)하여 왔기 때문에, 금생(今生)에 이르러 도를 들으면 곧 깨달음을 열어 일시에 문득 마쳐버리니 본질에서는 이 역시 먼저 깨달은 뒤 나중에 차차 닦아 나가는 근기(根機)인 것이다. 그런만큼 돈(頓)과 점(漸) 두 문이야말로 수많은 성인들이 밟아온 궤적이다. 예부터 모든 성인은 먼저 깨달은 뒤 수양을 쌓아나가 인수(因修)로써 증(證:진리의 정당성 여부를 확증함)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속해서 “수심결”에서 돈오(頓悟)에 대한 지눌의 설명을 들어보자.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一念廻光)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 한다.’
이 설명대로 돈오란 자신의 마음, 본성 속에 있는 부처를 찾은 것을 말한다. 곧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오랜 수행 끝에 한꺼번에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돈(頓)자와 깨달을 오(悟)자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깨달았다고 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지눌의 생각이다. 한꺼번에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듯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수심(修心)까지 마친 것이냐는 질문에 지눌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다.
돈오했다고 해도 이는 아직 완성된 부처의 경지는 아니라는 것이 지눌의 생각이다. 지눌은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을 기본으로 점차 닦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점수(漸修)다. 돈오한 후에도 점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지눌은 “수심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 차츰 훈습하여 공을 이루고 길이 성인의 태(胎)를 길러 오랜 동안을 지나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다. 이를 어린아이에 비유하면 갓 태어난 날에 이미 모든 근(根)이 완전히 갖추어짐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으나 그 힘은 아직 충분하지 못하여 세월이 얼마쯤 지나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돈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요 앎이라면 점수는 이런 깨달음과 앎이 생활 속에 일관되게 실천되는 기나긴 과정인 것이다. 돈오가 ‘혼돈’(迷)에서 ‘깨달음’(悟)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면 점수는 그 깨달음을 완성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즉 오랫동안 습기(習氣)에 쌓여 있던 범인이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점차적인 과정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가지고 수행을 계속해야 완전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이 지눌의 돈오점수다.
그런데 이 돈오점수는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논쟁 제기자가 다름아닌 한국의 대표적 선승 성철이란 점이 흥미롭다.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은 ‘선문정로’(禪門正路)를 발표해 불교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이 글에서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毒樹生庭, 不可不伐)고 주장했는데 그가 말한 ‘몹쓸 나무’가 바로 지눌의 돈오점수인 것이다.
성철이 한국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조계종의 핵심 교리로 여겨지던 지눌의 돈오점수는 바른 노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돈오점수를 베어버리고 새로 심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른 노선이 돈오돈수(頓悟頓修)였다. 그런데 이런 정서는 성철뿐만 아니라 1998년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혜암(慧菴)도 “깨닫는 것 자체가 불법(佛法)이고 수행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며 성철의 돈오돈수가 맞다고 손을 들어줬다. 이것은 최근 한국 조계종의 지도노선이 돈오돈수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돈오돈수설에 대해 해인총림측 수행승들은 대체로 지지하고 나서지만, ‘보조사상연구원’측의 김호성 교수는 1991년 ‘돈오점수의 새로운 해석’이란 논문 등을 통해 돈오돈수를 비판하며 돈오점수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행방법과 깨달음이란 구분 자체가 워낙 고차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언어와 교(敎) 밖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선종의 종지이기 때문에 언어로 전개되는 논쟁 자체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박성배 교수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장점을 하나로 흡수하자는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그 풀이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은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 당(唐:618∼907)나라의 화엄종 제5조 종밀(宗密:780∼841) 이후 논란의 대상이 된 선수행(禪修行) 방법의 하나이다. 이는 수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마음의 이치를 먼저 밝혀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로, 종밀은 다섯가지의 돈점설을 제시했는데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각각 그 중 하나다.
다섯가지의 돈점설 중 첫번째인 점수돈오(漸修頓悟)는 꾸준히 수행하다 일시에 깨닫는 것을 말하며, 두번째인 돈수점오(頓修漸悟)는 단번에 수행하지만 차차 깨닫는 것을 말하며, 세번째인 점수점오(漸修漸悟)는 차츰 수행하면서 차츰 깨닫는 것을 말한다. 네번째가 돈오점수(頓悟漸修)인데 이는 단번에 진리를 깨우치지만 그 후에도 계속 수행해 번뇌와 습기(習氣)를 제거하는 것을 말하고, 다섯번째인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일시에 다 깨쳤으므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최고의 상태를 말한다.
지눌이 돈오돈수가 깨침의 최고 형태라는 것을 몰라서 돈오점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지눌이 깨달은 후에도 계속 수행할 것을 주장한 것은 왕실이나 귀족과 결탁함으로써 비대해지고 부패한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극복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만년의 지눌에게 도를 닦는다는 것은 불경을 읽고 참선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경을 읽음으로써 오는 내면적 변화를 깨우침으로 인정했는데, 이러한 깨우침은 불경을 읽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일종의 자기 혁신이란 점에서 일시에 오는 깨우침, 즉 돈오(頓悟)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돈오를 궁극적인 깨우침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증오(證悟)인데 돈오한 후에도 계속 수행함으로써 증오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성철은 “깨친 다음에도 또 닦을 것이 있다면 어찌 그런 깨침이 진정한 깨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며 800여년전 지눌이 주장한 돈오점수를 힐난했다. 깨침을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깨침을 막는 어설픈 앎을 선종 승려들은 지해(知解)라 하여 선문(禪門)최대의 금기로 삼는데, 성철의 비판은 지눌의 돈오는 참된 돈오가 아니라 바로 이 지해라는 것이었다. 잘못 깨친 지해 자체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잘못된 깨침에 근거한 잘못된 수행, 곧 닦음은 남까지 그르치니 돈오점수설의 폐해는 실로 막중하다는 비판이었다.
성철은 지눌이 말하는 돈오 이후의 증오(證悟)에 도달하기 위한 닦음, 즉 점수는 증오의 내용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오에 도달하지 못한 채 잘못된 닦음만 계속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철은 깨침과 닦음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돈수라야 돈오요, 돈오면 돈수라야 한다”면서 이 둘이 일치함으로써 진정한 궁극적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눌과 성철의 주장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상당한 정도의 불교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지눌의 돈오점수설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과도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철은 지눌의 돈오를 지해, 곧 거짓 깨침이라고 비판했다. 즉 거짓 깨침을 궁극적 깨침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지눌이 돈오점수의 돈오를 궁극적 깨우침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철의 비판은 자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지눌은 돈오점수에 대해 “범부가 곧 부처임을 깨달았으나 법력(法力)으로써 부처의 길을 닦는 것”이라고 하여 끝없는 수행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즉, 지눌은 돈오의 깨침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니 여기에 자만하지 말고 부지런히 닦아서 궁극적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글·이덕일 역사평론가
월간중앙 2001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