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소명서
저는 부모 슬하 2남1녀의 차남으로 친가와 외가가 모두 비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중등․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의 지독한 술버릇으로 인해 가정에 잦은 불화가 있었음에도 탈선하지 않았고, 일찍 철이 들어서였던지 불안정한 가문을 빛내고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위해 학업에 열심이었습니다. 때로는 여유롭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듯하였지만 실상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젊은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읽는 중에 담임선생님이 책을 압수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정한 종교는 없었지만 외가의 조부님과 삼촌이 ‘聖德道’라고 하는 종교집단의 ‘랍비’와 같은 역할을 하였기에 한때 ‘자기수양’을 위해 ‘無量淸淨正方心’을 반복해서 묵상하면서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교회’, ‘성경’, ‘하나님’이니 하는 단어들은 어리석고 불쌍한 맹신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학창시절동안 상위권에 머물렀기에 내심 교만하였으나 목적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큰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단코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자 실패를 경험케 하셨다고 믿습니다. 다시 새로운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한 대학시절에 마음 한 구석에는 비교의식에 눌리고, 여전히 경쟁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1989년 말, 외조부님이 말기 암으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유복자였기에 할아버지라고는 외조부뿐이었고, 특별히 사랑해주셨던 분이었으나 일평생 ‘聖德道’가운데 선하고 강직하게만 사셨던 한 인생이 죽음 앞에서 무력하고 저 또한 어찌할 수 없음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인생인가?’라는 의문을 진지하게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한 기독 교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 ‘성경’, ‘교회’ 라는 단어가 다시 들려지고 영혼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부인할 수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한 하나님의 최대의 사랑임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구절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구절을 고백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넉넉함 가운데 평소 자기중심적이고 경쟁적인 삶으로부터 자유로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생의 얼마를 남겨두고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외조부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을 소개했고, 마침내 일생을 통해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일이 있은 후 영적인 순례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환경을 통해 제자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영혼을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 등을 지속적으로 배웠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모교인 한국해양대학교의 실습선 교관으로 근무를 시작할 무렵, 당시 BSU(침례교학생선교부)에서 제자훈련과 캠퍼스에서의 복음전도에 열심을 내고 있었기에, 전임사역자로의 권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가운데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삶은 모교에서 교원으로 평생을 드리는 것이라 스스로 작정하였기에, 전임사역자로서의 초청을 一言之下에 거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당시 BSU 직장모임에서 불신가정 가운데 영적싸움을 외롭게 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를 보면서 以心傳心이 되어 1995년 5월에 결혼하여 믿음의 1세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때마다 일마다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지혜를 얻고, 풍성한 환경을 만나게 하셔서 미국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하나님의 은혜로 대망의 뜻을 품고 시작된 유학생활 중에도 미국 현지 한인교회에 모여든 청년들을 향한 영적 부담은 특별했었던 것 같습니다. BSU 사역의 연장으로 생각하면서 교회와 청년유학생들을 열심히 섬기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비보(悲報)가 한국으로부터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6개월 ‘시한부인생 판정’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10여년동안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던 터라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어머니 영혼을 터치하고 계심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중에 이사야 55:8-9 즉,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어떠한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학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1999년 5월에 귀국하였습니다.
악성 종양으로 투병 중이신 어머니의 영혼 구원을 제일 목표로 삼고 귀국했지만, 당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도착한 즉시 기도원에서 일주일을 보내었습니다. 신앙생활 10년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동일한 시험(test)을 하고 계신다’라고 여겨졌습니다. ‘보장된 인생과 인정받는 삶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려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간 ‘크리스챤 평신도사역자’라는 좋은 명분(?)으로 인해 조금씩 변질되어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망각하고, 자기중심적인 동기로 하나님보다도 더 우선했던 심령의 부패함(가난으로부터의 탈출, 명예 등)이 가려져 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실상을 정직하게 자백하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제가 계획했던 생각과 길보다는 높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남은 일생동안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자(목양자)로 전적인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이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저와 아내의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한 인생, 외조부님의 생명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또 다른 한 인생, 어머니의 생명을 통해 평생의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어머니와 관련한 소식은 더 이상 비보(悲報)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투병 중 부산을 떠난 한적한 곳에서 저희 가정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양으로 남은 5개월의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1999년 9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후 2000년 3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대전 침례신학대학원 과정을 마무리하였고, 부족한 역량임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4년간 부산 BSU 대표간사로 섬겼고, 이제 2005년부터 한아름공동체교회 담임목회자로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허락하셨습니다.
목양자로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로 부르시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매진해야 할 소명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짧은 인생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언제나 저의 생각과 길보다 높았음을 기억합니다. 그로 인해 앞으로도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따라 걸어감이 더욱 안전함을 믿고, 허락해 주신 사명을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감당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