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평
잊을 수 없는 맛
- 조경란의 『혀』
홍 웅 기*
1.
모든 서사물은 의미를 대상으로 한 탐색의 과정이다. 그 탐색의 대상과 내용에 따라 독자 혹은 청자는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기에 인간이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이야기에 대한 욕망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대상은 끊임없이 미끄러짐의 과정을 통해 고정되지 않은 무엇으로 항상 존재한다. 특정한 대상을 욕망하고 그것에 대한 욕망이 실현되었다고 믿는 순간, 우리의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탐색하고 탐닉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통해 새롭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것 또한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무엇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이야기라는 서사물의 형식을 통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킨다. 어쩌면 우리가 서사물을 대하는 일련의 태도들은 현실적으로 충족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채워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뚱뚱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나는 통제할 수 없다. 그 두려움보다 큰 것은 바로 먹는 것에 대한 쾌락이다. 미각은 닦을수록 반짝이는 금강석 같은 것이다. 식욕을 가진 사람은 살아갈 의욕을 가진 자다. 살아갈 의욕을 잃은 사람이 가장 먼저 잃는 감각이 바로 미각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은 글을 쓰고 있을 때 또 어떤 사람은 쇼핑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이 살아 있는 걸 느낀다. 최근의 나는 먹고 있을 때 살아 있는 걸 느낀다. 언제 어디서나 먹을 준비가 돼 있다. 게다가 아주 강렬하게 먹고 싶은 게 생겼다. 가질 수 없을 때, 그 욕구는 부풀고 팽창한다.
조경란의 『혀』는 서사물에 내재된 인간의 욕망을 식(食)이라는 친숙한 대상을 통해 구체화시킨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뚱뚱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사는 것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콤플렉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食)을 통해, 미각(味覺)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맛의 쾌락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만찬을 즐기기 위해 위를 비우는 고통을 감수했고,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는 복어회를 가리켜 “한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 하며 즐겼다. 진정 복어의 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독을 지닌 알과 함께 그 맛을 즐기는 것이 제격이라 하니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극단적 모습이 공존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인간의 삶은 다양한 욕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고 지속된다. 생의 한 순간을 확인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식(食)의 새로운 가치를 목도하게 된다.
2.
소설에서 공간은 부차적인 요소로 작용할 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 여러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의미를 형성하며, 작품의 존재 이유이며, 장소적 의미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다른 요소들에 영향을 미치고, 소설의 효과를 강화함으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주요한 문학적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공간을 떠나 인간이 존재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설의 인물들도 그들의 공간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 속 공간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들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존재의 영역인 공간을 침범당하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을 상정하고 타인으로부터 그 공간을 분리한다. 이 사적인 공간은 타자로부터 침범당하는 순간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다. 지원에게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 요인은 식(食)이다. 그리고 식(食)이 창조되는 주방은 지원 자신을 확인하는 삶의 현장이다. 하지만 “담배 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의 땀 냄새뿐만 아니라 간밤의 체액 냄새까지 확연히 맡을 수 있는” 노베(nove)의 주방과 같은 곳이 아니라,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인 WON'S KITCHEN을 창조한다. WON'S KITCHEN은 지원 개인의 삶의 방식과 과정,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지원이라는 개인을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인 것이다. 하지만, 연인 석주의 배신을 통해, 지원의 존재를 규정짓는 WON'S KITCHEN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해체된다.
자신의 존재를 상실한 지원이 돌아간 곳은 노베의 주방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노베의 주방장은 “먹지 않는 요리사는 필요 없음”을 강요한다. 식욕은 삶의 의지의 반영임을, 에로스적 본능 그 자체임을 지원에게 일깨워 준다.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사적 공간의 와해는 삶의 진정성마저 해체시킨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한 요리사는 식(食)의 진정성을 이행할 수 없는 부적격의 존재일 뿐이다. 먹는다는 것에 대한 욕구만큼 그 대상을 생산하는 행위 역시,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행위이자 가치이기 때문이다.
요리사는 자신을 긴장시키는 손님을 좋아한다. …… 미식가들은 메뉴에 없는 요리를 원하는 사람이다. …… 미각이 먼저 입술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다. 음식이 입에 닿는 그 첫 느낌, 그 즐거움을 더 지속적으로 느끼기 위해서 두루미의 입보다 더 긴 입을 갖고 싶어 하며 음식이 위장으로 내려가는 동안의 그 만족감과 쾌감을 더 즐기기 위해서 두루미처럼 긴 목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삶을 투쟁의 과정이라 전제한다면 식(食)을 만들고 소비하는 과정은 이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요리사에게 진정한 맞수는 다른 요리사가 아닌, 자신의 요리를 진지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미식가일 것이다. 지원에게 미식가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이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일 뿐 아니라, “찬미와 예찬은 입으로부터 나오며 그들은 입술이 인간의 몸 중 최초의 에로스기관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로 평가한다.
식(食)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 아닌, 삶을 규정하는 척도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기에 주방이라는 공간을 통해 지원은 보다 명확한 의미를 형성한다. 지원에게 WON'S KITCHEN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공간이자, 삶을 매듭짓는 공간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석주와 세연의 행동이 WON'S KITCHEN의 해체를 유도했다면, 지원의 WON'S KITCHEN을 모방한 한석주와 이세연의 “쿠킹 클래스”이자, “젊은 건축가 한석주가 지은 모던 키친”은 지원의 삶의 존재를 부정하는 침범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세연의 “쿠킹클래스”는 WON'S KITCHEN의 모방이다. 더구나 식(食)의 진정성을 체득하지 못한 세연과 석주의 행동은 지원의 존재를 부정하고 손상시키는 심각한 도발이다.
“살아 있는 것은 차례차례 바뀐다. 중요한 건 지금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게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지원에게 식(食)은 일종의 놀이로 인식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거기에는 “미식가가 맛을 위해서 음식 재료에 망설임”이 없듯, 지원은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치유를 시작한다. 그것은 최상을 재료를 통해, 최상의 식(食)을 만들어, 평가받는 것, 그 속에는 일체의 도덕적 가치가 거부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린한 이들에게 행할 수 있는 최상의 복수 방식이다. 다소 엽기적인 하지만 엽기적이지 않은 『혀』가 남겨주는 묘한 여운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지만, 이것이 바로 식(食)을 통해 혀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느껴오던 친숙한 쾌락의 한 조각이란 느낌이 든다.
미각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쾌락을 주는 감각이다. 먹는 즐거움은 시각이나 후각 같은 다른 감각들 쾌락들과 뒤섞일 수 있으며 다른 쾌락의 부재를 달래 줄 수도 있다.
* 충남대 박사과정 수료, 문학평론가, 충남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