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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 백두산, 그 웅혼한 기상과 만나다.
김 현 종*
집을 떠나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여름방학을 기해 백두산에 다녀왔다. 교원의 직업적 매력으로 가장 첫손에 꼽는 것이 방학이다. 현대인의 삶이란 것은 하룬들 맘 편하게 쉬고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반해 교원들에게 주어진 방학은 넓은 세상을 돌아볼 수 있는 재충전 기회이자 더운 여름날 시원한 느티나무 그늘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백두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10명. 30년 지기 친구들 셋과 그 가족이 함께한 여행이다.
백두산은 잘 알다시피 백두대간의 첫 출발지이자 한 민족 발원의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민족의 영산이다. 등산이나 즐기는 그저 그런 산이 아니다. 정신세계로 치자면 한때 중국과 더불어 북방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이 아직도 말을 달리고 있는 한 민족 태동의 정신적 고향이며, 그 놀라운 비경으로 치자면 신이 빚은 예술작품의 극치다. 또한 우리 땅이면서도 지금은 이념의 장벽에 가로막혀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그래서 더욱 그리운 향수의 산이기도 하다.
청주 공항에서 연길까지의 전세기 직항로를 이용한 탓에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의 여행은 대체로 평안하게 진행되었다. 한밤중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직행해 눈을 뜨니 첫 새벽이다. 나는 식구들 깨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 연길의 아침을 보러 새벽 거리에 나선다. 채 안개가 가시지 않은 연길의 아침은 외국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한적한 소도시를 연상케 한다. 가장 먼저 외국임을 실감하는 게 상점 간판인데 한자가 한글 밑에 병기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 모든 간판이 다 한글로 되어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약간 남루해 보이지만 별반 우리와 다르지 않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좀 미안한 말인데 길거리가 좀 지저분하다는 것이 눈에 밟힌다.
백두산 천지, 신의 이름 앞에 서다.
조식 후 버스로 3시간여를 달려 백두산(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른다.) 초입에 도착했다. 해발 고도가 높아 햇볕은 따갑지만 선선하다. 오늘의 등정 코스는 북파. 백두산 등정코스는 동, 서, 남, 북 모두 4곳인데 우리는 이번 등정에서 북파와 서파 두 곳을 간다. 1년 중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대략 잡아 60일 정도라고 하는데 오늘 날씨가 좋아 백두산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가이드의 말을 믿기에 확률은 너무 낮다. 이틀 중 하루는 보겠지.
정상인 천문봉까지는 지프차로 이동한다. 꼬불꼬불한 길을 지프차는 엄청 빠르게 달린다. 좀 과장해서 시속 100km는 되는 것 같다. 한국의 총알택시는 이도 안 났다. 까마득히 아래로 고원이 보인다. 한번 굴렀다하면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처박힐 정도의 높이인데 차는 맹렬한 속도로 올라간다. 앞차가 커브를 돌 때 보니 한쪽 바퀴 2개가 지면에서 10cm 정도 붕 뜬다. 중국 운전수는 승객의 비명소리를 “더 쎄게 밟아”로 번역해 듣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황천길 20분을 달린 후 차에서 내린다. 정신을 좀 수습하자 정류장 바로 위쪽의 능선에 키 작은 나무를 빼곡히 심어 놓은 것처럼 사람 능선이 한 겹 포개져 있는 것이 보인다. 서녘을 보니 곧 구름이 깔릴 듯이 가깝다. 금방이라도 덮쳐 올 것 같다. 저들은 지금 천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정상까지는 불과 5분 거리. 한 달음에 닿을만한 거리를 나는 천천히 올라간다. 일생 일대 최고의 장관을 개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몸은 올리고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히며 능선으로 올라간다.
▲ 백두산 ‘천지’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을 몇 걸음 앞두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천천히 눈을 뜬다. 한눈에 확 끼쳐오는 천지(天池). 천지다! 하늘 아래 첫 못 천지다! 그 진청(眞靑)의 못은 16좌 장대한 산기둥의 어깨에 안겨 하늘과 구름을 짙게 붓질하며 명경(明鏡) 아래에서 깊은 숨을 쉬고 있다. 백두의 천지는 정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신의 심장이다. 천지의 숨소리에 내 숨이 턱턱 막힌다. 잔바람과 뜬 구름이 그 푸른 심장위에서 시녀처럼 놀다 흩어진다. 나는 능선 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 그 밑바닥에서 두근거려 오는 천지의 숨소리를 듣는다.
백두산은 그저 산이 아니다. 한 민족의 태초를 빚어낸 신의 다른 이름이다. 백두는 지금의 이 땅을 짓기 위해 온 세상을 끓는 용암불로, 광포한 포효로, 생명 탄생의 새 빛으로 차지게 빚어 잔치 차려 주고 지금은 깊이 잠들어 있는 창조주다. 천지를 내려다보며 화산 폭발로 백두가 탄생하던 절대 혼돈의 그날을 상상해 본다. 금방이라도 다시 용암이 터지며 천지를 뚫고 솟아오를 것만 같은 무섬증이 난다.
백두산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좋은 포인트를 찾아가며 사진을 수 백 장 찍는다. 구름이 높고 날씨도 좋아 굳이 후보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은 그림들이 카메라에 속속 담긴다. 룰루랄라다. 일행들을 위한 인물사진도 천지를 배경으로 찍어 준다. 배경이 좋으니 인물이 덩달아 환하게 아름답다. 그만 내려가자는 가이드의 눈치를 눙치며 고원 쪽 후사면도 담는다. 맨 마지막으로 떠밀리듯이 사진이 가득 담긴 카메라가 행여 다칠세라 애 보듬듯이 안고 내려왔다. 정상 아래에는 예의 황천행 찝차가 사천왕처럼 우릴 기다리고 있다. 기왕에 타야 할 거라면 빡세게 타기 위해 맨 뒷자리로 갔다. 물론 피가 아래로 마구 쏠려 하산 길에 본 창밖 경치는 전혀 기억이 없다.
연달아 찾아온 행운, 백두산 다시 보기
둘째 날, 어제 본 백두산의 감동을 다시 느끼기 위해 이번에는 서파로 방향을 잡아 빽빽한 편도 1차로의 나무숲을 헤치고 올라간다. 서파는 북파와 달리 산 밑에서 버스를 내려 1시간가량 경사진 계단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코스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지에 다가가는 것도 설레어서 좋다. 다리가 아파 못 오르는 이들을 위한 2인 가마가 보인다. 왕복 10만원이란다. 돈 버는 방법도 가지가지. 따져 보니 나도 금새 10만원 벌었다. 내 다리로 올라가니 10만원이 굳은 셈이다. 멀리 산 중턱을 따라 트래킹하는 사람도 보인다. 길가에 핀 야생화를 접사로 정성껏 담으며 천천히 오른다. 날씨는 좋다. 이틀 연속 천지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만큼 적덕(積德)하며 살지 못했음을 면구스러워 하며 산정을 향한다.
정상에 섰다. 어제의 감흥 못지않은 감격이 다시 밀려온다. 몇 번을 봐야 질릴까? 사계절 모두 다시 와 보고 싶다. 꽃, 바람, 눈, 구름, 비, 해와 달, 그 무엇과 어울려도 백두산은 다 녹여 낸다. 오늘은 사진 찍기에 주력하기로 했다. 원근감을 살려 보기도 하고, 천지에 담긴 하늘에 초점을 맞춰도 본다. 3장을 이어 붙일 파노라마 사진도 찍는다. 이리도 찍고 저리도 찍는다.
서파의 산정 부분은 넓고 평평하지만 인파로 넘쳐난다. 그러나 넓은 반쪽 ‘조선’이라고 새겨진 비석 바깥쪽에 길게 쳐져 있는 줄 너머로는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다. 북한 땅이란다. 슬픔과 답답함이 몰려든다. 북한 땅은 구글 지도에도 하얗게 빈 여백으로만 나와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 경계선 너머의 빈 땅에 오는 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이드가 100m쯤 앞쪽에 지하 온실처럼 파 놓은 초소가 있는데 그 안에 경계병들이 지키고 있다 한다. 믿기지 않는다. 멀리 장군봉이 보인다. 무슨 글씨가 써 있다고 하는데 망원렌즈로도 잡히지 않는다.
하산하는 길에 용암이 지하로 흘러들어 만들어낸 ‘금강(장백산) 대협곡’에 들렀다. 이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랜드 캐년처럼 넓고 웅장하지는 않은 반면 기묘한 형태의 기암괴석들이 협곡 저 아래로부터 수직으로 뻗어 올라와 형형색색의 옷감처럼 휘고 접히고 펼쳐져 있어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지하에 또 한 층의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도록 깎아지른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지상과 똑같이 시내가 흐르고 산과 나무가 있고, 바람이 부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100년 전으로의 역사 여행, 그리고 북녘 땅
여행의 마지막 날. 오늘의 여정은 일제시대의 아픔과 시인 윤동주의 추억이 깃든 ‘용정’과 북한의 실상과 아픔을 최근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도문’이다.
용정(龍井)은 일제시대 때 삶의 터전을 버리고 간도로 이주해 간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역사의 시계를 100년쯤 전으로 돌려 생각하면 쉽다.
▲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이 있었던 곳,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서 지녀야 할 민족정신을 길러주던 대성중학교(지금의 용정중학), ‘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의 흔적, ‘해란강’이니 ‘일송정’이니 하는 가곡의 가사가 생각나는 곳들을 돌아보며 20세기 초엽의 우리 민족이 살아냈던 지난한 삶을 되돌아본다.
용정을 지나 도문까지는 두만강을 따라 이어지는 강변로다. 기분이 참 묘하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중국 땅, 바로 옆으로 개울보다 조금 넓은 두만강 건너는 북한 땅, 이쪽은 너른 들판에 농작물이 그득히 자라고 있는데, 저쪽은 산비탈까지 개간했는데도 황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독히 가난한 이웃을 보는 것 같아 눈가에 번지는 물기를 애써 감추며 차창 너머 북한 땅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멀리로는 ‘21세기의 위대한 태양’으로 시작하는 대략 난감한(?) 패러다임의 문구가 적힌 입간판이 블랙 코미디처럼 외람되게 서 있다. 천지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정반대의 또 다른 충격이다.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 21세기를 빙자하여 지금 저 곳에 저렇게 서 있다니 참 아이러니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인다. 이 도로는 몇 년 전 일시 정차한 관광버스에 몰래 타고 탈북한 사건이 있어 정차할 수 없단다.
도문(圖們)에 도착했다. 도문은 우리나라 지도상의 가장 위쪽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이 이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90도 꺾여 동해로 흐른다. 북한으로 들어가는 철로와 도로가 있지만 지금은 바리케이트가 쳐진 채 막혀 있다. 사람의 들고 남을 허용하지 않는 동토의 땅. 그리고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르며 살아온 지가 벌써 분단 반세기를 넘겼다. 독일도 예맨도 다 하나가 되었는데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나라. 말로는 머리가 우수한 뛰어난 민족이니 어쩌니 해도 여태 통일을 못하고 있으니 남북한 싸잡아 국제적인 망신이다.
북한의 학교와 자매결연 맺기를 제안한다.
그 동안 남북한 양방간의 정체(政體)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쳐댔지만 결과는 저렇듯 도로와 철로를 끊어 놓고 심지어는 불쌍한 백성을 굶어 죽이고 있으니 누구의 책임이 되었든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분단의 세월이 너무 길다. 우리나라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단절되어 살아온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질화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다.
다소 엉뚱한 발상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우리 학교와 북한의 어느 중학교가 되었든 자매결연 맺기를 제안한다. 우리 교육계가 품고 있는 젊은 청소년들 간의 남북한 상호교류와 협력이 기성세대가 이루지 못한 통일에의 염원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교류 없이 통일은 불가능하다. 외국의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처럼 남북한 간의 단위 학교끼리 자매결연을 맺어 상호 방문하고 대화하며 같이 배우고 토론하면서 서로의 인식의 폭을 하나하나 좁혀 나갈 때 비로소 통일은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남북한 간에 경제나 사회, 문화 방면에서의 다양한 접촉들이 있어 왔으며 나름대로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통일의 결실을 맺지는 못 했다. 이제 우리 교육계가 발벗고 나서야 할 때다.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할 때 통일은 온다. 남북한 교실간의 화상 수업, 방학을 이용한 상호 방문 및 홈 스테이, 백두산까지 육로를 이용 수학여행, 개마고원에서의 수련활동.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여행 속에 인생이 보인다.
얼마 전 아들과 둘이서 3일간 제주도 해안도로 240km를 자전거로 일주한 적이 있다. 제주도의 해안 경치도 일품이었지만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과의 둘만의 오붓한 여행,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땀 흘리며 돌았다는 기억은 남다른 것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이나 묵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은 내 대학시절 친구들과 부산까지 자전거로 여행하며 겪었던 기억과는 또 다른 내 추억의 한 장이 될 것이다.
이번의 백두산 여행은 지금까지 다녀 보았던 여러 곳과는 사뭇 달랐다. 한민족의 근원을 찾아 떠난 과거로의 뿌리 찾기 여행이기도 하고, 예술로 다가온 백두산의 풍광에 매료되기도 했으며, 한민족이 다시 합쳐야 함을 다짐하는 미래로의 길찾기 여행이기도 하다.
‘여행만한 스승이 없다’는 말이 있다. 책속에 길이 있듯이 여행 속에 인생이 보인다. 여유가 된다면 배낭을 꾸리자. 아니 여유를 만들어 배낭을 메자. 그리고 떠나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무지무지 많다. 볼 것도 많고”
* 대전 출생,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수필집 『코똥도 안뀌는 놈』(2009), kimkim70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