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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석회와 나무가 빚은 비경
- 중국 황룡~구채(黃龍-九寨)여행
김 명 녕*
집 떠나면 고생인 줄 뻔히 알면서 여행길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가족을 비롯하여 절친한 사람과 함께 떠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번 4박 5일의 중국 황룡-구채(黃龍-九寨)여행은 중학교 동기동창 부부에다 여섯 살바기 친손녀와 친구의 외손녀를 보태 14명이 떠난다. 10월 22일 오전 9시 55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145인승 대한항공비행기로 165분 동안 날아가서 장안이라 부르던 역사적 도시인 시안(西安)에서 내린다. 오후에 진시황과 관련된 아방궁 세트장, 대자은사에 있는 당대(唐代)의 대안탑(大雁塔) 및 대규모의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이화궁대주점(頤和宮大酒店- Yihe Palace Hotel)에서 첫날밤을 묵는다.
23일 오전 8시 10분에 시안공항을 이륙하는 중국동방항공 소형비행기를 타고 황룡-구채공항으로 떠난다. 1시간쯤 뒤, 착륙하려고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의 창밖으로 구름을 뚫고 불쑥 솟아오른 눈 쌓인 바위산들의 황홀지경이 펼쳐진다. 9시 20분에 해발 3,500미터의 공항에 착륙한다. 해발 3,454미터인 스위스의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역과 해발 3,571미터인 바로 위의 스핑크스(Sphinx)전망대와 엇비슷하게 높은 지역에 있는 공항이다. 7년 전에 ‘유럽의 지붕’이라는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갈 때는 사람에 따라 고산증세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잔뜩 긴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무덤덤하다.
공항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를 타고 황룡으로 가다가 천주사(川主寺)마을에 들러 장강공예(藏姜工藝)전시관에서 장족(藏族)과 강족(姜族)의 희귀 보석류인 천주석(天珠石)공예품을 구경하고, 가까운 식당에서 한식(韓食)으로 점심을 먹는다. 해발 3,200미터라 기압이 낮아 80℃에서 물이 끓으므로 쌀밥은 메져서1) 입에 맞지 않지만 아삭아삭한 고산(高山)상추가 입맛을 돋운다. 다시 버스로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오늘은 황룡풍경구를, 내일은 구채구를 관광합니다. 황룡지역은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산이라 대소변이 자주 마렵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나고, 식욕이 떨어지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세로 괴로울 수 있습니다. 예방약과 산소통을 준비하였으니 필요한 분만 쓰되 예방약 2병은 지금 마시고, 산소통은 가지고 다니다가 고통스러울 때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예방약과 산소통은 각각 미화(美貨) 10달러입니다. 황룡에서는 될수록 느릿느릿 걷고, 잠깐잠깐 쉬고, 말을 적게 하고, 담배를 절대 피우지 말고, 물을 자주 마시기 바랍니다. 물은 무료로 드리니 1통씩 가져가기 바랍니다.”하고 말한다. 이번 중국여행은 버스에서든, 비행기에서든, 호텔에서든, 물 인심이 넉넉해서 좋다.
점심식사 후 버스로 험준한 산길 40㎞를 80분 동안 달려서 오후 1시 25분에 해발 3,050미터에 있는 황룡케이블카센터에 도착한다. 걸으면 두세 시간 동안에 황룡고사(黃龍古寺) 근처까지 올라갈 500미터 높이를 2006년에 설치된 케이블카를 타면 5분 만에 올라간다. 예방약은 버스에 탄 손님 25명이 모두 마셨으나 산소통은 몇 사람만 챙긴 채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탄다. 늦가을과 초겨울이 섞인 풍경을 지나 해발 3,550미터의 케이블카 위쪽 역에 닿는다. 역에서 내리니까 나무가 빼곡한 망룡평(望龍坪)에 닦은 관광길이 열린다. 황룡지역은 쓰촨성 송판현에 있는 민산(岷山)산맥의 주봉인 설보정(雪寶頂) 아래에 펼쳐진다. 설보정의 주봉은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고, 많은 관광손님이 둘러보는 골짜기는 길이 약 7.5㎞, 폭 300미터, 평균 해발 3,550미터인 석회협곡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 마리의 황룡이 산림에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못과 개울의 바닥은 모두 석회침전물이고, 종유석동굴이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생김새와 빛깔이 독특한 카르스트(karst)풍경을 이룬다. 황룡은 ‘채지(彩池), 설산(雪山), 협곡, 삼림’의 ‘4대 절경’으로 이름을 떨친다. 우리나라에서는 ‘황룡의 오채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못은 중국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황룡관광지역은 1992년에 세계자연유산목록에 올랐고, 2000년에 세계생물권보호구, 녹색환경지구21에 선정되었다.
고산반응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게 나타나므로 4시간 후인 오후 5시 40분에 버스터미널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구름이 산에 걸쳐서 공기가 희뿌옇다. 자연도 깨끗이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일거리도 제공하는 정부정책에 따라 길에서 비로 쓰레기를 쓸거나 집게로 줍는 사람이 많고 쓰레기통이 즐비하다. 800미터 간격마다 산소공급소가 있는데, 산소는 무료지만 마스크이용료가 1위안이다. 무료로 이용하는 화장실도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어서 편리하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산허리 길을 많은 관광손님과 더불어 걸어간다. 대부분은 즐거운 마음으로 걷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걷는 사람, 의자에 앉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및 산소공급소에 들어앉은 사람이 심심찮게 보인다. 손녀가 고산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가니 천만다행이다. 울창한 숲을 2㎞쯤 지나가니까 물소리가 들리더니 누런 비탈에 맑은 물이 흐른다. 황룡의 백미(百媚)인 오채지(五彩池)로 가는 오르막부터 손녀가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르막에서 땀을 흘리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라 초가을 옷차림새로 나서서 산바람을 차갑게 느끼던 판이라 등에 업고 달리다시피 오르며 추위를 쫓아버린다.
유명한 황룡고사를 지나면서 얄궂게 구름이 갑자기 짙게 끼더니 설산은 물론 눈앞의 절경마저 가린다. 오채지 둘레의 위쪽에는 구름에 밴 는개2)가 물꽃을 흩날리며 떠다니는 가운데 물이 바위와 수목을 뚫고 흐르고, 아래쪽에는 오색영롱한 물빛의 무릉도원이 펼쳐진다. 못에 고여 있는 물마다 노랑, 초록, 파랑, 자주 등등 제각각 찬란하다. 화산 폭발 이후 생겨난 석회성분 중에서 칼슘이 지표면에 많이 깔려 있어서 물이 다양한 빛깔로 보인단다. 다섯 가지 빛깔을 내뿜는 오채지를 한눈에 바라보며 ‘힘들어도 올라오길 참 잘 했다.’고 생각하면서 “신선이 살 법한 높은 곳에 올라 우리평생에 다시 못 볼 아름다운 선경(仙境)에 우리부부와 손녀가 들어왔군요.”하면서 온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손녀와 씨름하면서도 물과 석회와 나무가 빚은 비경에 넋을 잃는다. 해발 5,588미터의 설보정 입구 안내표지가 있는 해발 4,010미터 지점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많은 사람 틈에 치이는데다 날씨도 흐리고, 고산증세를 느껴서 만사가 마뜩찮은 손녀의 기분에 따라 ‘업다, 내려놓다’를 되풀이하며 빛깔고운 개울과 못, 물 가운데 선 나무 및 단풍이 어우러진 경치를 감상하며 내려온다. 신선을 맞이하는 접선교(接仙橋), 구름이 머무는 숙운교(宿雲橋), 맑은 거울처럼 거꾸로 보이는 명경도채지(明鏡倒彩池), 화분을 쏙 빼닮은 분경지(盆景池), 금모래가 깔린 금사탄지(金沙灘地), 풍덩 뛰어들어 미역 감고 싶을 만큼 맑은 세신동(洗身洞), 물꽃을 흩뿌리며 물이 뛰어내리는 비폭류휘(飛瀑流輝) 등을 지난다. 작은 그릇만한 크기부터 100평 이상의 무논만한 크기까지 모양이 제각각인 못이 우리나라 산허리에 들어박힌 다랑논처럼 옆으로, 아래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못 둑은 터키의 파묵깔레처럼 수직으로 엷게 쌓였지만 단단하고 아름답다. 못마다 물이 가득하고 물 빛깔이 서로 다르다. 금세 본 물빛이 고와서 다시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신기롭게도 다른 빛깔로 바뀐다. 산에 나무들이 빼곡하고, 개울은 조잘조잘 지껄이고, 폭포는 게거품을 내뿜으며 떨어진다. 구름이 걸린 고산인데다 낮이 토끼꼬리만큼 짧아져서 약속시간인 5시 40분 이전에 내려왔지만 벌써 땅거미가 드리워진다.
버스에서 일행을 만났으나 피로해서 시르죽은3) 사람과 고산증세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서 분위기가 엉망이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김, 고추장, 김치 등을 밑반찬 삼아 현지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구채도가촌(九寨度假村- Jiuzhai resort hotel)에서 이튿날 밤을 묵는다. 침대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어서 따듯하다. 내일은 온종일 구채구를 관광하므로 아침에 거뜬하게 일어나도록 푹 자는 것이 보배다.
어린 손녀와 가냘픈 몸매의 아내가 기압이 낮고 산소가 적은 황룡을 아무 탈 없이 관광해서 그저 고맙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으면서도 수줍음이 많아서 구름을 짙게 두르고 고원에서 끄떡없는 사람에게만 일부 모습을 드러낸 황룡지역은 틀림없이 빼어난 선경(仙境)이다. 우리나라 국립공원도 산세가 아름답고, 골짜기물이 맑고, 울긋불긋한 가을단풍이 매우 고우면서도 다채롭고, 깃들여 사는 동식물의 종과 개체수가 많고, 누구나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등 황룡과 뚜렷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새근새근 잠든 손녀의 숨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난생 처음 백두산보다 높은 곳에 있는 호텔에서 단잠을 이루려고 눈을 감는다.
1) 메지다 : 끈기가 적다. 차지지 아니하다.
2) 는개 : 안개보다 좀 굵은 비.
3) 시르죽다 : 맥이 쑥 풀리거나 풀이 죽다.
* 충북 충주 출생, 공학박사, 한밭대 교수, 수필집 달리면서 만나는 세상, 달릴수록 넓어지는 세상,
인터넷 문학상(문학사랑), 한국농촌문학상 대상(농림부장관) 수상, mnkim@hanbat.ac.kr
유성(儒城)에 살아보니
신 강 남*
저는 유성에서 태어난 토박이가 아닙니다. 동구에서 중구를 거쳐 서구에 살다가 충남대학교가 문화동시대를 마감하고 유성으로 이전할 즈음에 대덕군 유성읍으로 이사하였답니다. 충남대학교와 함께 유성으로 옮겼다니까 혹자는 제가 자녀교육에 열심이어서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거창한 자녀교육계획을 가지고 ‘대전의 八學群 儒城으로 먼저 입성하지 않았나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구요, 제가 말단 공무원으로서 제 앞길도 추리지 못하는 칠칠치 못한 꼴을 보다 못한 집안어르신께서 대학교 옆에 붙어살면 굶어 죽지 않는다. 충남대 옆에 가서 학생하숙이라도 치면 먹고 산다.는 귀중한 정보(?)를 주셔서 이사를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귀중한 정보가 있으면 무엇합니까. 집지을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귀중한 정보는 사장되었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한밭대학교 부근에서 양현재(養賢齋, 현인을 키워내는 집)을 운영해요. 양현재가 무엇을 하는 곳이냐구요? 궁금하시면 언제 덕명동 127번지로 놀러와 보세요.
어느 유명한 도시공학자가 말했다지요. “모든 도시는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그 학자의 주장이 맞는 것도 같아요. 대전을 예로 들어 봅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전발전의 시발점은 대전역 부근이겠지요. 대전역을 중심으로 남쪽의 원동시장, 신흥동부근과 북쪽의 삼성동, 정동을 중심으로 확장되던 추세가 대전천을 넘어서 중구 은행동, 선화동, 문화동을 형성하더니만 초창기엔 이름도 생소하던 변동, 괴정동, 삼천동, 월평동, 둔산동 등이 발전추세를 이어갔고 이제는 서구의 발전추세가 주춤하고 그 여세가 유성구쪽으로 빠르게 전이되는 현상을 우리들은 지금 목격하고 있습니다. 벌써 노은동, 지족동, 반석동일원과 송강동일대는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고 학하동 일원도 개발의 가속도가 붙은 상태입니다. 자, 조금 숨 좀 돌리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과 같이 빠르게 도시화되는 것에 많은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구연한이 고작 30년 밖에 되지 않는 박스형 아파트로 도시가 채워진다면 얼마나 삭막한 환경으로 변할까요. 편의성, 효율성만 추구하다가 더 많은 것을 잃지는 않을런지 심히 우려가 됩니다.
유성구의 토지는 제한되어있고 영구불변일진대 앞으로 이곳에서 태어나서 살아가야할 후손들도 그들의 취향에 따라 도시를 설계하고 살 수 있는 여백은 조금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 가요.
또한 대전시 전체가 생산도시라기보다는 소비도시인데 특히 유성은 변변한 공장조차 없는 것 같아요. 송강동의 테크노밸리를 제외하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50~60대 성인들에게 유성하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가 “목욕탕”, “고급술집”이었지요. 연구단지가 자리하고 있지만 그곳은 서민이나 중산층이 접근하기 어려웠고 이름조차도 유성연구단지가 아니라 대덕연구단지입니다. 얼마 전 부산의 군수사령부가 유성으로 이전하였으나 지역경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젊은이들이 많이, 그리고 안심하며 정착할 수 있도록 목민관(牧民官)님은 고민하셔야할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제가 30여년 살아본 유성지역은 큰비나 바람으로 인한 피해가 별로 없었습니다. 축복받은 땅이지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학하리의 고구마, 금성농장의 배는 어느 곳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품들이었지요. 그런대 지금은? 고구마밭은 아파트단지로, 배밭들은 도시화에 초토화되어 유성의 상표를 자랑할 품목이 없어진 것이 아쉬워요. 10여 년 전 강릉에서 택시기사에게 강릉의 자랑거리가 무엇인가 질문을 하였더니 주저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첫째는 적송(赤松), 둘째는 강릉고등학교, 셋째는 맑은 공기라고하면서 신나게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자랑에 수긍이 가요. 강릉지방에는 우리민족이 제일 좋아하는 적송이 많고 시민들이 적송 보호에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나요. 또한 대관령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도시전체가 맑은 공기의 혜택을 만끽하고 있고, 강원도 전역에서 강릉고등학교입학전형에 합격만하여도 사법고시에 합격한양 마을입구에 현수막을 부착한답니다. 그러면 유성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요. 다행이 유성고등학교가 빛을 내주고 있어서 무척 자랑스럽고 그 외에는 선뜻 떠오르지 않네요. 제가 문외한인가요, 정말 자랑거리가 없는가요. 저도 헸갈리네요. 혹자는 온천을 이야기하실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에서 온천을 자랑거리로 선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남들이 수긍하려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동네 목민관님께 부탁드립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명암(明暗)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부자와 가난한자가 공존하기는 필연이기는 하나 목민관님은 관내의 사궁민(四窮民, 늙은 홀아비. 젊어서 남편을 잃은 홀어머니. 어린고아. 자식 없는 늙은 노인)이 외롭지 않고 더 궁핍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세요. 지금까지도 잘 해오셨지만 더욱 좋아진다면 진짜, 진짜 멋진 진청장님이 되실거예요. 오죽했으면 태조대왕이 즉위교서에서 사궁민은 왕정(王政)으로써 먼저 할 바라고 천명하고 조선개국이념의 하나로 여겼을까요.
유성구 개청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러나 20세의 성년은 책임과 의무가 부여되듯 구민들은 더욱 성숙된 모습의 유성구의 변화를 기대할 것입니다.
* 대전 출생, 수필가, 양현재학사 대표, ≪상상의 힘≫ 작품상(2010), kangnam1945@hanmail.net
빛바랜 학적부
류 양 숙*
어제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만한 시간들이었다. 남편은 내일도 이렇게 비가 오면 못 갈 것이라며 조급한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모교 교문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고, 교정을 수 백리나 걷고 나서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십여 년 전의 아침 햇살이 자욱한 안개를 자꾸 밀어 올리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고향의 모교를 이제야 찾아 나선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 설레게 하는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찾아 가는 여정에 하늘도 소녀의 꿈처럼 해맑은 형상이다.
교사의 꿈을 꾸며 동경하던 공주 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의 마음은 저 금강의 은빛 여울처럼 파닥이었으리라. 그러나 학과 선생님들의 얼굴을 채 익히지도 못한 채, 6.25사변이 터져 우리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제는 강산이 다섯 차례나 바뀐 저편의 세월 속에 갈무리된 시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시간의 여울목에서 늘 못 이룬 꿈에 대한 미련을 끈끈하게 간직했었다. 교사에 대한 꿈보다 더 값지고 보람 있는 큰 꿈이 있음을 알고서야 나는 그 여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른 해 동안 전도사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교직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릴 수 있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 보다, 한 영혼을 보살피며 구원하는 일이 더 보람이 있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주여자 사범학교의 교명도 공주 교육대학교로 바뀌었다. 내가 다니던 시절의 학교와는 전혀 디른 모습이다. 운동장 한 편에 주차를 한 후, 학적과를 찾았다. 1950년도의 학적부를 찾아달라는 내 부탁에 여직원은 한참 만에 돌아와 내 이름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버젓이 입학했는데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얼마 후에, 여직원이 낡고 빛바랜 서류를 꺼내온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서류를 직접 받아들고 한 장씩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류정숙! 내 이름이 있었다. “1937년 5월 8일생, 부 : 류경석”. 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름은 류정숙(柳貞淑),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아마 한자를 잘못 기재한 것일 지도 모른다. 다른 내용은 없었다. 하긴 한 달밖에 안다녔으니 기재할 내용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하는 수없이 그것을 복사해 갖고 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남편은 이왕 온 김에 공주여고에 가 보자고 한다. 다행이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교대 부설초등학교 후문을 따라가니 공주여고 정문이었다. 금학동에 지은 이 학교는 내가 다니던 기숙사 자리에 있던 모양새와는 전혀 달랐다. 반듯하고 산뜻하게 지은 오층 건물교실에서 나오는 학생들은 막 피어나는 장미꽃 봉우리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신선함과 싱그러움에 내 시선이 머문다.
나도 한 때는 저런 때가 있었지!. 이젠 먼 옛 날의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다. 교장실로 찾아갔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교장 선생님은 이 학교 졸업생인데 학적부를 복사해 달라는 내 부탁에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차를 내 놓는다. 사범대학 교수로 은퇴한 큰오빠 이야기를 꺼냈더니, 많이 들었다며 아들인 조카가 몇 년 후배란다. 교장 선생님은 정년이 삼 년 남았다며 부여에서 전근 온 지 석 달 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서류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교장선생님은 친절하게 앞서서 안내한다. 여기서도 나는 누렇게 낡고 빛바랜 서류를 만나야 했다. 그 서류에서 나는 내 연륜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한 장씩 서류를 넘겨가며 나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 나갔다. 거기에 내 이름 석 자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인적 사항도 자세하였다.
“신체 건강하고 출석 양호함. 성격 온순하고 영리함. 협동심과 책임감 강함. 언어 명쾌하고 통솔력 우수함. 상벌 : 개근상, 우등상, 도지사상, 학급대의원. 1956년 2월 27일, 3년 전 과정 졸업한 것을 증명함.”
내 지난날의 흔적이었다. 삼년간 결석하지 않고 개근상을 탄 것이 감사하다. 온순 영리하다고 한 성격도 좋은 평이다. 순하면 환영받지만 무시당할 수도 있었을텐데, 다행이다. 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보는 순간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받았다. 막내딸이다. 어디냐는 물음에 아빠와 같이 공주여고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더니, 엄마는 아빠와 인생을 즐겁고 참 멋있게 지낸다며 기뻐한다.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기뻐하듯 부모가 정답게 지내면 자식이 기뻐해 준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물이 오늘따라 한결 아름답게 보인다. 금강을 끼고 산성공원을 뒤로 한 채 대전으로 돌아오는데, 운전대를 잡은 남편도 참 잘 다녀왔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졸업 후, 강산이 다섯 번 하고도 세 해가 지나 처음으로 찾은 모교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에 부끄럽지 않다. 교장선생님을 통해 학교에 내 수필집 사랑의 메아리를 기증했다. 남편이 추석에는 자식들한테, 엄마는 이렇게 공부했다고 보여주란다. 연어가 알을 깔 때는 본자리로 회귀한다는데, 나도 꿈 많던 소녀시절로 회귀하는 것 같은 감상에 젖어 들었다. 오늘 따라 금강의 물빛이 유독 맑고 투명해 보인다.
환절기
쌩쌩 불던 바람이 매섭더니, 잔잔해졌다. 하얗게 쌓인 눈도 봄빛에 녹아버렸다. 한낮에는 제법 따스한 햇볕이 등을 어루만져 준다. 아직도 아침과 저녁엔 차가운 바람에 몸이 움츠러진다. 환절기인가보다. 이맘때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어머니의 편지다. 아직도 어머니의 사랑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환절기엔 몸조심하고, 아이들 감기 걸리지 않게 해라”
평범한 글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배어있고, 따스한 정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철이 바뀔 때마다 받아보던 서신이었는데, 어머니가 하늘나라에 가시자 끊어진지 오래되었다. 그토록 극진히 날 사랑해주시고, 기도해주시던 어머니가 안계시니, 그 사랑이 더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외할머니의 말씀도 생각난다.
“나이가 드니 환절기만 되면 추운 것도 못 참고 더운 것도 못 참겠더라”
아마 인체의 조절기능이 떨어져서 그런가보다. 체온을 옷으로 조절해주는데,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진 탓 일게다. 그래서 환절기에는 옷 입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한다.
우리 인생에도 환절기가 찾아오는 것일까? 인생의 환절기는 갱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소년 ‧ 소녀시절에는 이유 없이 반항해보고, 공연히 우울해지며 서글퍼지기도 한다. 사춘기라고도 한다. 그 때 친구가 옆에 있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한결 가볍게 지나갈 수 있을 텐데,
여성은 멘스가 끊어지고 나면 또 한 번 우울증이 찾아온다. 호르몬 부족으로 없던 질병도 찾아온다. 골다공증이나 퇴행성관절염, 디스크 같은 반갑지 않은 손님도 찾아 든다. 나는 다행히 갱년기가 오는 줄도 모르게 지나가버렸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나, 심령이 상한 사람들을 돌보기에 바빴던 나는, 내 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바쁜 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칠십 세에 정년퇴직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런 증세를 느끼게 되었으니, 건강을 주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환절기는 절기가 새롭게 변화해가는 과정이며, 대나무의 마디가 형성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를 잘 보내면 한 단계 성숙해 질 것이다.
며칠 전, 큰 딸한테서 전화를 받고 감동했다.
“엄마, 감사해요, 절 낳아주시고 길러주며, 기도해 주신 것을 정말 감사해요, 혹시 자라면서 엄마한테 제가 잘 못한 것이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린 것 있으면 용서해줘요, 저도 자식들이 제 멋대로 할 때 마음이 몹시 아팠거든요.”
가족은 거울이다. 제 자식을 통해 거울을 보듯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주부로서 인생의 환절기를 맞아 철이 들었나보다. 어찌 보면 환절기의 아픔은 인생을 철들게 하고, 알차게 해주는 특효약이 될지도 모른다. 내 지나온 날을 돌아보아도 그랬던 것 같다.
입에 쓴 약이 몸에 보약이 되는 것이다. 삼일 간 금식을 하며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환절기가 지나면 새봄이 오고, 마른 가지에는 새잎이 돋아나며,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것이다. 딸네 가정에도 이번에 환절기를 잘 견디어내면,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부풀어 온다.
공작선인장
한 겨울동안 안방에서 햇볕을 받아보지 못한 선인장이다. 텔레비전에서 품어내는 전자파를 제 몸으로 막아준 선인장을 본다. 전자파를 차단하는데 선인장이 좋다는 말에 안방에 들여놓았다. 가지마다 독소를 마신 탓인지 검버섯이 생겼다. 아버지의 얼굴에 있는 검버섯처럼 검게 얼룩진 선인장을 보니, 하늘나라에 가신 지 이십년이 넘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회활동을 하시느라 늘 분주하게 지내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에게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셨다. 추운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차가운 내손을 화로 불에 쪼여 녹여주시며 일하느라 거칠어진 손으로 비벼주시던 생각이 난다. 치아는 팔복에 든다며 손수 양치질을 해주셨기 때문에 칠순을 넘긴 지금도 아직 의치를 하지 않고도 견디고 있다. 날 끔찍이 사랑해주시고 내게 관심이 많으신 아버지는 내가 실수해서 97점을 받아 온 날은 다음엔 주의해서 꼭 100점을 받도록 하라고 하셨다. 당신이 교사였기 때문일까? “넌 공부 열심히 해서 선생님이 돼야한다 넌 선생감이야.” 라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으시곤 했다. 이때부터 내 마음은 선생님이 되어서 2세들을 가르쳐야겠다는 꿈으로 부풀어 가고 있었다.
부지런하신 아버지는 새벽 기도를 하신 후, 교인들이 앉을 방석을 줄을 맞추어 깔아 놓으셨다고 한다. 눈비가 오는 날에도 교회에 가서 나라와 우리 칠남매를 위해 기도하시는 건강하시던 분이셨는데, 운동하다 넘어져서 대퇴부 골절상으로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할 때, 94세의 고령이시라 마취에서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회복은 되셨지만 항상 부지런하게 일하시던 분이 활동을 못하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아버지는 97세 가을에 주무시다가 고요히 가셨는데, 다니시던 공주 중앙교회에서 교회 장으로 온 성도들이 함께 예배했다. 그 때 현광국 장로님의 조사를 난 잊을 수 없다. “맨 앞자리는 류 장로님이 앉으셨는데, 이젠 누가 앉을는지요” 하며 제일 먼저 오셔서 방석을 깔아주셨다는 말을 할 때는 모두 숙연해졌다.
늘 자신보다 가족과 남을 먼저 배려해 주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우리 가족의 건강 지킴이가 돼준 병든 공작선인장을 보는 순간, 오늘따라 더 측은해 보인다. 그 고마움을 잊어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든다. 밖에 내 놓고 분갈이를 해 준 뒤, 양지 바른 곳에 두고 정성으로 보살폈더니 새순이 돋아났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드디어 공작꼬리에 빨간 봉우리가 보인다. 아마 공작의 꼬리를 닮아서 공작선인장이란 이름을 얻었는지 모른다. 삼 년 만에 회생한 선인장이 고맙고 대견스럽다. 그것이 점점 불러오더니 꽃을 피우기 위한 산고가 시작된다. 단 하루만 피어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그렇게도 오래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냈나보다. 꽃피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남편과 함께 거실로 옮겨 놓았다.
드디어 해산의 고통이 시작되는 듯, 꽃잎 한 장이 파르르 떨리며 겨우 벌어졌다. 그렇게 한 잎 한 잎 다 열렸다. 맨 나중에 속에 숨어 있던 꽃술이 혀처럼 내민다. 공작선인장이 완전히 회생했다.
솔로몬의 시에 나오는 들의 백합화처럼 아름답고, 모란꽃처럼 찬란하다. 잠시 후면 시들어 버릴 것이란 아쉬운 마음에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나는 어느 꽃도 피어나는 순간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공작선인장은 꽃잎이 크고 현란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활짝 핀 꽃을 보며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저 꽃처럼 젊고 밝은 모습으로 회생하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천국에선 이 세상에 살 때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 충남 공주 출생, 협성신학교 졸, 3·1 여성동지회 부회장, 시온 중앙교회 전도사, ≪창조문학≫에 수필「형님은 평강공주」로
등단, 부부 수필집 사랑의 메아리,
부부 송(松)
이 장 연*
오늘은 사진동우회원들과 청 매실 축제가 열리는 곳에 가는 날이다. 삼월이라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씨다. 이곳은 아직 몽우리도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는데, 남녘에는 꽃이 만개하였다니 봄맞이 가는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새벽 다섯 시에 출발이라서 무리인 듯싶었으나 이겨보리라 결심하고 출발지로 향했다.
정각에 출발한 차는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이렇게 일찍 출발한 이유는 해뜨기 전에 하동 평사리에 있는 부부송(夫婦松)을 찍기 위함이다. 소나무는 산에 있어야 제격인데, 부부 송은 들에 서 있다. 안개 속 저 너머로 부부 송이 보인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베일에 가려진 듯한 모습이다.
삼각대를 세워놓고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원우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드넓은 보리밭은 부부송을 위해 깔아 놓은 양탄자처럼 보인다. 안개에 가려진 모습은 신방을 차린 부부 같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중년의 너그러운 부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리 보면 둘이요, 저리 보면 하나다. 부부는 둘이면서도 하나가 되는 거라 했던가. 풍상을 겪은 노부부가 되어 내게로 다가온다. 노송부부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계절 내내 사진동호인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부부라는 이름은 언제 들어도 넉넉함을 전해준다. 만일 혼자 서 있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부부송은 엄동설한일 때는 키 큰 남편소나무가 여린 아내소나무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여린 아내소나무는 남편소나무에 의지하면서도 너무 거친 숨을 쉴 때는 다독여 주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없는 허허벌판이니 부부의 사랑은 더욱 돈독하였으리라. 산에 있어야 하는 소나무이지만 불평 없이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다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얼마나 인내하며 살았기에 고고한 자태로 만인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까.
오늘 아침, 부부송을 내 마음 밭에 옮겨 심어본다. 소중히 가꾸어 보리라. 삶이 고달플 때면 언제나 변함없는 부부송을 꺼내보고 내 마음 밭을 가꾸어보리라. 사람도 배필을 잘 만나면 평생을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서로 섬기는 마음이 행복의 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한으로 살아간다면 그들은 분명 불행한 부부일 것이다.
시어머님 생각이 난다. 아버님 열세 살, 어머님 열일곱 살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어린 신랑을 극진히 섬기면서 살아오셨다. 어린 신랑이지만 아내를 끔찍이 아끼셨다.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가면서 아들 딸 사남매 낳고,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셨다. 어머님의 말씀인즉, 어린 신랑이었지만 한눈팔지 않은 것에 항상 고맙게 생각하셨다. 부부란 억만 겹의 인연이 닿아야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요즈음 젊은 부부들은 가정 일을 공동으로 분담하지만 예전에는 모든 일을 여자가 하는 줄만 알았던 시대에도 집안 청소는 아버님이 하셨다. 간장 끓일 때, 고추장 담글 때는 불 조절을 하시면서 다정하게 이야기하시면서 도와주신다.
생전에 선대 산소 아래에 당신들이 들어갈 기묘를 해 놓았으나, 어머님은 그 자리로 안 가겠다고 했다. 자식들이 밭에 나와 일하는 모습을 보시겠다고 하여 유언대로 가까운 뒷산으로 모시었다. 후에 아버님께서도 어머님 계신자리로 들어가겠다고 유언을 하셔서 합장을 했다. 부부의 정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신 아버님이시다.
우리도 어언 오십 년을 바라보며 부부의 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따스한 봄날이 있었는가 하면, 비바람 몰아칠 때도 있었고, 눈보라가 몰아칠 때도 있었다. 어두웠던 긴 터널은 아무래도 가장이 직장을 잃었을 때였다.
이제 인생 역경을 이겨내며 황혼의 뜰에 서 있다. 어려웠던 지난날의 상처는 옹이로 남아 있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인한 부부송을 닮아 우리도 사는 날까지 건강하기를 바라니, 어느덧 내 마음 밭에 심은 부부송이 우리 집 거실에 다정히 자리하고 있다.
꿈 키우기
희망찬 삼월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장차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부모의 뜻에 걸맞게 아이들 또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는 아이, 법관이 되어 힘없는 사람을 돕겠다는 아이, 선생님이 되겠다는 아이 등 저마다의 꿈을 안고 자란다. 그들 가운데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사람도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딸의 전화다. 큰 여행 가방이 있느냐고 묻는다. 며칠 후 하와이 대학으로 연수를 가는데 한 달간이나 있을 예정이어서 가방이 두 개가 필요하단다. 수화기를 놓으면서 나는 세월의 강을 건너가고 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학교에 다녀오더니,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버스 차장이 되겠다고 한다. 목표를 크게 잡아도 자라면서 점점 작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장래 희망이 버스 차장이라는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이면 버스 차장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차장 언니는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딸에게 버스 차장이 아니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면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탈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제는 여군이 되겠단다. 군대에 간 큰 아들이 휴가 나왔을 때, 딸이 보기에 군복을 입은 제 오빠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보아도 제복을 입은 아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딸아이는 몸이 약해서 씩씩한 대한민국 군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라면서 꿈도 달라지리라 생각을 했다. 중학교에 가더니 이제는 선생님이 되겠단다. 그때 남편은 실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정 형편을 아신 선생님께서 혹시 여상으로 갈까 걱정되시는지 “은하야 너는 인문계로 꼭 진학하여야 한다.”고 조언을 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딸은 선생님이 될 꿈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루어 교사가 되었다. 한 그루의 나무도 병충해를 이겨내고 비바람과 엄동설한을 견뎌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또한 적당한 시기에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해 주는 것과 같이, 선생님의 그러한 제자 사랑이 있었기에 딸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어려운 생활에 꿈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먹는 것이 부실하고 밤잠을 줄여야하니 한창 피어야 할 나이에 누렇게 뜬 얼굴이다. 그때 아이들 넷이 학생이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설악산 수학여행을 다녀왔을 때다. 선생님 말씀인 즉, 다른 아이들은 잠도 안자고 떠들고 노는데 은하는 내내 잠만 자고 왔단다. 하도 이상해서 전화를 주셨단다. 선생님 은하 아빠는 지금 쉬고 있습니다. 그때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담임선생님의 놀라움……
하루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어미의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우리식구 이렇게 사는 것만도 나는 만족해요 내가 이다음에 선생이 되면 엄마에게 효도하고 일 년 봉급만 가지고 결혼 할 거예요.” 나는 되레 딸에게 위로를 받았다. 딸아이는 아빠의 힘을 덜어 주기위해 장학금으로 졸업을 했다. 노력이 천재성을 이긴다고 했던가. 세월은 흘러 손자가 고등학교 이학년이다. 지난세월 돌이켜 보면 마음 아팠던 옛날이야기다. 고생의 차이는 있지만 자식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
나 또한 육이오로 나라가 폐허가 되었던 시절에 야간학교를 다녔다. 책상이래야 긴 판자였고 의자도 궁둥이만 부치는 긴 의자였다. 어려운 과정에서도 꿈을 키우며 살아왔다. 이제 자식들 사남매가 교직에 있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라 하지만 결손가정과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많이 있다고 한다. 연수를 잘 받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딸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지혜로운 교사가 되기를 거듭 빌어본다.
* 충남 연산 출생, '계룡수필' 회원, grlgang@hanmail.net
인생은 어차피 선택이다.
김 기 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파스칼이 오래 전에 말했다.
이렇듯, 보는 이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시간차에 따라 해석도 다르다. 겪어야 하는 시기에는 어려움도 많겠지만 지나고 나면 그것도 추억이 되어 무용담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같이 보이지만 가슴에는 고민거리 한 두 개 쯤 안고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했다는 평범한 얼굴의 방송인 최 모 여사가 입담 하나로 방송에 나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지만 본인은 당대에 보기 드문 희귀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의 도움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람은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양면성에 현혹되어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보면, 그 결과에 따라 안면 근육이 다르게 발달되어 인상을 만들었나보다.
어려서부터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꿈을 가지라는 긍정적인 삶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손이 닿지 않는 그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로봇처럼 지정된 길을 걸어간다는 운명론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볼 수가 있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에 맞는 것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에 맞는 일이다. 그러므로 뒤에서 날아오는 돌은 어쩔 수 없지만 앞에서 날아오는 돌은 정신만 차리면 피할 수도 있으니 운명쯤은 거슬리며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라고 말을 하면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결과가 잘 풀리는 경우는 무슨 이유이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경우는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술잔 위에 울분을 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잘못 된 결과는 항상 선택의 기준에서 오류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하여 자신 있는 부분을 가지고 계획하고 추진하여 삶을 꾸려가야 하는데 이것은 생각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점이다. 실제 행동에서 많은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의해 몰려가는 세에 합류하여 동행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생각도 없이 자신을 점검해 보지도 않고 급한 마음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 가지고 몰려가는 시류에 동승하려 한다. 혹 선택이 늦어 함께 가지 못하면 그것이 삶의 패배자로 생각되어 서둘러 합류하게 되니 결과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아가 실패를 했으면 실패한 원인이라도 알게 되어 똑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현명한 사람인데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의 기준으로 20년 후를 계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맞을 리가 없다.
앞으로 20년, 더 나아가 30년 후에는 모든 것이 변하는데 지금의 조건으로 미래를 꿈꾸니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점쟁이도 알 수 없는 일을 설령 안다 해도 맞는 일이 드물 것이다. 30년 전 우리나라 30대 기업 중에서 지금도 30대 기업에 남아 있는 기업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선인의 명언에 동감하는지 모르겠다.
고금리를 맛보며 많은 사람들이 장기 저축하여 노후를 계획했던 사람들은 앞이 캄캄해졌다. 외환위기 시절 천정부지로 오르는 금리에 현혹되어 퇴직 시 일시불로 받은 사람의 낭패는 더 심하다.
먼 옛날 과거제도에 미련이 남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동내 어귀에 현수막이 나붙기도 하지만 있는 힘 다하여 노력하여 얻은 명예가 이제는 흔해져서 존재감마저 줄어들었다.
앞날에 우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머리 좋은 기초과학 전공자들이 노후생활이 걱정되어 의대나 한의대로 방향을 트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20년 후에는 연구한 부분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 돈방석에 앉을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어려운 세상일하고 돌아와 이모작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곳에도 혼동의 선택은 계속된다.
한마디로 제법 오래 살았다고 말하지만 일모작을 끝내고도 내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것 중에서 현명한 선택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살아가며 제일 중요한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의 기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그저 돈과 명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착각의 혼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구름 위에서 허상에 잡힌 체 살다가 생각 데로 안 되면 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한다.
지금은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들었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모두가 내가 선택한 결과들이다. 시류에 역행하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 노력한다면 못 이룰 것도 없는 세상이다. 더구나 세상 판단의 도마 위에서 내 삶을 조명하지 말고 자식들이 우리 아버지처럼 살았으면 하고 따라와 준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은 항상 고민을 수반하고 결과는 우리 삶의 질을 좌우한다.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젊음이 따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오늘 하루도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다. 내가 있어 세상이 즐거운 그런 삶은 내 선택의 결과에 의해서 따라온다고 생각된다.
“살아보니 어뗘”라는 질문에 “사는 게 별거 아니라네.”라는 답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스님과 자선냄비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것이 개인이던 국가든 마찬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인 갈등이 제일 크다.
특히, 국가와 국가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이 종교적 갈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봤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선을 추구하며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인도하는 것이라는 종교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현실은 종교적 이념을 살리지 못하고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끼리끼리 모여 있는 집단이기주의로 변질 되어 발전하지 안했나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산의 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난 보기 드문 일이 있었다.
예수가 태어났다는 성탄절이 정확하게 12월 25일인지 모르지만 지구촌에 많은 사람들은 그 날을 예수가 태어난 날로 기정사실화 하였고, 일 년을 보내는 연말 분위기에 편승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온 일 년을 되돌아보고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분위기를 우리들에게 갖게 하였다.
그렇게 성탄절이 가까이 오는 부산 서면에서의 어느 날, 길거리에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하고 지나가는 많은 행인들이 그 냄비 속에 이웃을 돕는 마음으로 작은 정성을 다하여 성금을 내 놓고 있었다.
어린 아이든 어른이던, 기독교인이던 아니던, 사람 신분에 관계없이 남을 돕는 일에 동참하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구세군 측에서 두 명이 나와 냄비를 차려놓고 지나가는 행인을 위해 목청 높여 가난한 이웃을 돕자면서 종을 울리고 있는데, 뒤에 나타난 스님 한 분이 구세군이 걸어 놓은 냄비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스님 앞에는 시주 받을 조그만 그릇 하나를 놓고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시주를 바라는 듯 눈을 감고 염불을 외우며 목탁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금을 기탁하는 것이 구세군과 스님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누구 앞에 사람이 많이 찾아가나 관심을 가지고 자리를 지켜보게 되었다.
구세군은 더욱 목청을 높여 가난한 이웃을 돕자고 외쳤고, 스님은 표정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계속하여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선냄비와 시주 그릇에는 돈이 쌓여갔고 서너 시간이 흘러간 후 구세군 중 한사람이 다른 구세군한테 예수님이 태어나 축하하는 성탄절에 즈음하여 하필이면 이곳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저의가 무엇인지 항의하자고 말을 하는데, 그때 스님이 구세군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일어나면서 시주 그릇에 담겨져 있는 돈을 전부 모은 후 구세군이 세워 논 자선냄비로 다가가더니 구세군을 보고 씨-익 웃는 것이었다. 이때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스님의 행동에 놀라면서 구세군과 스님하고 자리싸움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모두가 스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은 그동안 시주 받았던 돈을 들고 천천히 자선냄비에 다가가더니 그 곳에 모두 넣는 것이었다.
‘보시는 이런 것이야’라고 말이라도 하는 듯, 씨-익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염화시중의 부처님 미소처럼…… 이런 모습에서 종교 갈등의 벽은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제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부니 30년 전 부산 지하철 공사를 하며 겪었던 그 일에 내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 溫洞, 대전 둔산 3동 거주, 글지이, 부름새, 달림이. 刻장이, 토장이, 온동마을 촌장, 수필집 소똥위의 홍시,
살아보니 어뗘, blog.daum.net/ondong.
추억의 깃발을 다시 올리며
강 명 수*
머리가 유독 빛나시던 역사 선생님의 비스마르크 훈시가 그리워, 동화 속 건물같이 예쁜 음악당에서 사랑의 슬픔을 가슴 설레며 같이 배우던 친구들과 함께 우리는 40주년 추억의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 시절 같이 합창했던 카프리섬은 아니었지만 무려 70명 인원이 가기에는 안성맞춤인 타일랜드의 파타야 해변!
그러나 밤늦게 도착한 후덕지근한 상하의 나라 입국장에서 68명이라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보자 순간 “이 여행이 과연 즐거울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저녁때부터 삼삼오오 모이더니 한잔 나누며 살아왔던 이야기, 그리고 우스운 헛소리도 하는 즐거운 수학여행 속으로 이내 빠져버렸다.
…
다음날 나는 개인적으로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어 방콕에서 140km떨어진 칸차나부리로 향했다.
이 칸차나부리 지역이 바로 콰이강이 흐르고 영화로 나온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곳인데 아카데미상을 받은 명화 속의 배경지를 찾아가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방콕에서 2시간 남짓 가니 6천 여 명의 연합군포로들의 묘가 안치되어있는 기념묘지가 있었다. 주로 서양에서 온 관광객들이 조의를 표하는 듯 경건한 분위기에 맞게, 조신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당시 병사들의 나이가 대부분 20대 중후반이고 그들이 동료들에게 남긴 짧은 글들을 비석에서 읽다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곳에서 나오니 바로 지척에 콰이강의 다리가 실제 그 장소에 재현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중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이 미얀마로 400km의 철길을 잇기 위해 공사를 감행하였는데 몇 만 명의 전쟁 포로들이 강제 노역 중 더위와 굶주림, 그리고 열대 풍토병으로 사망하게 만든 죽음의 철도가 바로 콰이강 브릿지이다.
2백 여 미터 정도 되는 다리를 서양인 관광객들과 태국승려들이 걸어오는 죽음의 철도 저 건너에는 정글 지역답게 초록의 풍광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 밑에는 황갈색의 강이 흐르고 불교 사원이 신축 중 이었는데, 간혹 사진작가풍의 젊은이들이 전쟁의 상흔을 담으려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바로 저 철교 넘어 기슭에서 배우 윌리암 홀덴과 데비드 니븐의 절박한 연기가 가물가물 떠오르면서 그 멋진 영화주제곡이 들려오는 듯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다리 끝에서 길거리 악사가 이 악기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아코디언으로 그 영화 주제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니 한국인임을 알았는지 들음직한 우리 가요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오리지널 같이 휘파람으로 콰이강 마취를 할 수 있느냐고 말을 건네니 웃음만 짓는다.
1달러를 그의 모자에 넣어주며 내가 저 편으로 가는 동안 3번 정도 그 주제곡을 연주하라고 부탁하니 시익 웃으며 아코디언을 가슴에 펼친다.
어찌되었든 길거리 악사가 들려주는 연주곡을 들으며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콰이강의 다리를 건너 왔다. 그리고 이 역사적 표징인 철교의 난간에 손을 지긋이 대보았다. 아열대의 강한 햇빛 속에 반사되어 뜨거워진 철의 느낌만큼 무언가 훅하고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 순간 이 비운의 다리에 서있었기 때문이리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콰이강의 여정은 충남고 8회 추억의 수학여행이 준 고급스러운 역사공부이자 영화를 회상하는 낭만적인 시간이었다.
……
그날 오후, 돌아가 태국 전통마사지를 받는데 역시 친구들이 단체로 들어가니 재미가 솔솔 했다.
옆에 누운 동창들이 마치 방아개비처럼 허리를 꺾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보여 피식 웃음이 나와 신음소리를 내니 배 위에서 마사지를 하던 아가씨가 “어디 아프세요?”하며 나긋하게 속삭인다.
……
태국의 밤 문화 역시 70명의 메머드급 동창들하고 어울리니 퇴폐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처럼 재미있는 엔터테이먼트가 없을 정도로 백미였다.
이곳 인터내셔널 스트리트는 뉴욕의 타임 스퀘어 가든 보다 더 환락적이었고 재즈가 흐르는 뉴올리언즈보다 더 야한 컨셉을 보여주었다.
한 라아브 쇼룸에서 이 이상 원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몇몇 동창들의 화끈한 연기를 보며 일 년 동안 웃음을 다 웃을 정도로 앤돌핀이 분출되었다.
세월만 지났지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호기심 가득한 총각, 처녀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
다음 날 산호섬에서 낙하산타기로 몸을 풀고 우리들은 마치 해병대원처럼 경쾌하게 보트를 타고 코발트색 바다 속으로 몽땅 들어갔다.
첨부덩 소리가 날 정도로 과거의 여학생들을 빠트려 보는 과거의 남학생들은 이 날 만큼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소년, 소녀였다.
또, 술 한 잔을 나누며 때로는 서로의 인생살이 역경을 듣고 ‘애썻구나!’ 하며 위로해주고 또 위로를 받았던 반백 장년들의 술회도 하면서 우리들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화가 천경자는 추억은 사막을 걷는 낙타 봉우리 속에 들어 있는 물이라 했다. 대상들이 결정적으로 피로에 쌓일 때 빼서 마셔야 하는 봉우리 속의 물과 비견될 정도로 삶에서 좋은 추억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평범하지만 다정한 모습들… 우리 동창들…
두 세 갈래 줄을 돌아야 하는 태국 출국장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몇 번씩이나 다정히 마주 보았다. 모두들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모두 회춘한 사람들처럼 상기된 표정들이다.
지난 며칠 동안 마치 꿈을 꾼 것처럼 40년 전으로 돌아가 동심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96시간을 완전히 18세의 청소년으로 지냈던 것, 그것은 기적이었고 우리 모두를 무의식으로 빠지게 한 몽환스러운 일이었다.
세상에 이런 훌륭한 추억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동기는 멋지게 청운령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평범하지만
다정하고
정겨운 청운령의 깃발을…
* 대전 출생, <충청신문> 논설위원, 기행수필집 고마코의 설국에서 블랑세의 뉴올리언즈까지(2009),
kms19522001@yahoo.co.kr
상처로 만드는 향기
이 경 숙*
친구의 농장에 도착해서 차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가축의 분뇨 냄새로 코를 막아 쥐어야했다. 먹이 주는 시간이 되었는지 돼지들은 일제히 꽥꽥거리며 소릴 질러대어 내 소리는 들리지 않아 나도 목청을 높여야만 했다. 잠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들어간 집안에는 또 다른 새끼 돼지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방안에는 더 어린 아기 돼지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시 후 들어온 친구는 애완견이라도 되는 양 돌아다니는 돼지를 끌어안고 입도 맞추고 아기 다루듯 한다. 오늘 아침에 조산한 아기 돼지에게 우유를 먹이는 손길이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솜털도 잘 보이지 않는 아기 돼지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쌔근쌔근 우유병을 빨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는 했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친구의 모습이 그저 의아하기만 하다.
아무리 씻어대고 새 옷을 입어도 돼지 냄새를 없애기 힘들어 이젠 그냥 산다는 친구의 복장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돼지 엄마다. 학창시절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친구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화려하다는 말은 그녀를 위한 단어인 듯 멋쟁이였던 그녀는 이제 향수 대신 돼지 냄새를 뒤집어쓰고 있다. 얼굴은 건조하여 푸석한 모습이고 거칠 대로 거칠어 마주잡은 손에서는 바람 소리가 났다.
유난히 승부욕이 강했던 친구, 그래서 늘 혼자였던 친구는 부유한 가정에 공부도 잘하고 치맛바람 강한 엄마까지 두어 우리들의 선망과 질시를 한꺼번에 받았었다. 정해진 수순이듯 좋은 혼처에 결혼했다는 소식은 어쩌면 신선한 뉴스거리도 아닌 당연한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만난 친구는, 친정집의 몰락과 두 번의 결혼을 사별로 마무리하고 이젠 돼지 엄마로 변해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자신의 사는 모습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친구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 당당함만은 왠지 예전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해서 도리어 내가 머쓱해졌다. 귀농하고 싶어 하는 남편을 따라 들어온 시골에서 남편을 보내고 이젠 자신의 생활이 되어버린 농장일이 여자 혼자서는 힘든 일이지만 잡념을 잊고 지내기에 그만이라는 친구의 말에 강한 자신감이 보였다. 농장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환경이 사람을 저렇게도 바꿀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들른 선운사에는 꽃무릇이 불타고 있다. 입구부터 산 중턱까지 붉은 색으로 뒤덮인 꽃들 속에서 관광객들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잎이 다 지고 난 뒤에 꽃이 피어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함을 두고 사람들은 상사화라고도 부르는 꽃, 그 붉음에 취해서 환호하며 절 마당에는 들리지도 않고 계속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한결같은 그 붉음의 강열함이 지루함으로 다가와 발길을 돌렸다. 돌아서 내려오는 선운사 절 집의 건너편 야생차 밭에는 철 이르게 하얀 차(茶) 꽃이 피고 있다. 붉디붉어 화려한 꽃만 보다가 하얗고 앙증맞은 꽃을 보니 소박한 모습이 더 반갑다. 화려하지만 향이 없는 꽃무릇에 비하면 은은한 향이 나는 차꽃에 한참을 엎드려 코를 묻고 있었다. 꽃무릇이 잎도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라면 차나무의 꽃은 이전 해에 달린 열매를 다음해 가을, 꽃이 필 때까지 달고 있어 실화상봉수(實化相逢樹)라고 부르기도 한다. 살짝 쪄서 말리면 아주 은은한 향이 나서 차로 마시기에도 그만이다.
차(茶) 공부를 하면서 일 년에 한 번씩 지리산으로 차를 만들러 가곤 한다. 차는 1창 2기라하여 이른 봄 두 세 잎 나올 무렵에 따는 어린 순을 제일로 치는데, 여린 잎을 주로 아홉 번을 덖는다. 처음에는 뜨거운 가마솥에서 덖는데 순간에 익혀 숨죽은 차 잎을 꺼내어 식혀 깨끗한 멍석에 흰 천을 깔고 비비기를 한다. 이를 유념이라고 하는데 익힌 찻잎에 고루 상처를 내어 향을 좋게 하는 작업이다. 너무 강하게 하여 찻잎이 뭉개지면 풋내가 나고 너무 약하게 하면 맛과 향이 우러나질 않는다. 솥에 넣어 가열하고 다시 유념하기를 서너 번 하는데 골고루 적당히 상처를 내어 비벼주는 일이 그러므로 아주 중요하다. 유념이 잘 된 찻잎을 가향 처리하여 다관에 넣고 우리게 되면 아주 향기로운 차 맛을 낸다. 가을이지만 부드러운 새 잎을 피워 올린 차 잎을 한 잎 따서 입에 넣어 본다. 쌉쌀한 맛이 입안에 퍼지다가 어느 순간 달큰한 향으로 변해 다시 하나 입에 넣게 만든다.
많이 걸어 아픈 다리를 뻗고 차 밭에 앉아 건너편 도솔천의 꽃무릇을 바라본다. 곁에 잎 하나 두지 못한 채 홀로 자태를 뽐내는 꽃을 줄기 하나가 받치고 서 있다. 문득 좀 전 헤어진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였을까. 화려했고 도도해서 바라보다가 돌아서면 잊히는 사람 같았던 시절의 그녀에게서 느끼는 향기는 없었다. 그러나 돼지 분뇨에 찌든 그녀의 몸에서 나는 생활인의 냄새가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피워 올린 삶의 유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두 번씩이나 겪었지만 홀로 서 꿋꿋한 생활인이 되어 살아내는 친구의 삶이야말로 상처를 향기로 승화시킨 잘 유념된 차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신세한탄이나 하며 눈물을 흘렸다면 많은 것을 가졌던 지난날들의 모든 것들조차 더 그녀를 괴롭히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당히 아픔을 이겨내고 있는 모습이 진정한 삶의 향기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예고 없이 온다. 크고 작은 상처를 딛고 일어나 어떻게 성숙해 가는가에 따라 삶의 향기는 다르게 피어난다. 잘 늙어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겉모습은 볼품없이 늙어가지만 거기에 비례하여 깊어지는 향기가 그 사람의 품위를 말해 준다. 앞으로 내게 남은 삶을 어떻게 유념할 것인가 그것이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오늘 나의 화두이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수상, asysoo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