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은 적시지 못하고 두드렸다. 내 이마와 핸드폰 액정을 똑똑똑 하고. 그 빗방울처럼 책 속 인물들의 생이 몰려왔다. 나는 모든 해답을 가진 체하며 그들의 삶을 비판할 수도 있었고 생각 많은 독자가 되어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제대로 읽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처음 헌책방에서 루이제 린저의 책, <생의 한가운데>라는 책 제목을 보았을 때, 과연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궁금했다. 이 제목엔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다가 슈타인이라는 한 남자가 반평생을 바쳐 니나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임을 알게 된 후, 역시 그런 내용이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극진히 사랑하는 삶이라면 생의 한가운데를 사는 풍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슈타인의 편이었다.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니나를 향한 사랑없이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그의 독백이 절절히 이해가 되었다. 대체 사랑하지 않는다면 먹고, 자고, 숨을 쉬어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불타는 사랑은 심지어 니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는 것을 보고 난 후에도 지속되었다. 사실 슈타인은 그 꼴을 보기 전에 니나를 소유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발적으로 물러섰고 소유권을 반납(?)했다.
물러선 이유는 니나의 삶이 자신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음을 이해했고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니나에게 생의 한가운데란 위험과 모험으로 생을 겪어나가는 것이었다. 글 쓰는 사람의 숙명이란 대체로 그런 것 아닐까. 슈타인은 그 숙명을 기꺼이 안은 니나의 용감함과 신념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평온한 자신의 삶의 테두리에 데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긋나는 데에서 뜻이 맞았다. 슈타인의 열정은 끝없이 그녀를 찾아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놓치는 것을 ‘선택한다.’ 펭귄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안타까웠다. 펭귄 아버지와 펭귄 어머니가 보석 같은 알을 잘 보호하여 부화시키기 위해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보석 같은 서로의 생을 지키기 위해 함께할 수가 없었다.
서로 추구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추구하는 것이 같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이 가진 보석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원했던 행복한 왕자 동상과 그를 위해 보석을 나누어 주려고 추위를 견디었던 제비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처럼. 중요한 가치일수록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대가를 지불한 후에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성향은 니나의 언니처럼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어하고 지리멸렬한 평온 쪽으로 잘 기운다. 동시에 니나처럼 고통을 받아들이기 원하며 새로운 일을 겪는 모험을 싫어하지 않는다. 또한, 니나를 맴돈 슈타인처럼 용감하고 개방적인 사람을 가까이 두기 원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겐 니나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슈타인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니나 언니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건 상대적인 것이니까.
나는 선교단체 예배와 기도회들을 즐겨 가는 편인데, 그렇다고 내가 선교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소소한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모임에서 선교사를 준비하는 누군가의 열정적인 말을 들으면 감동을 많이 받는다. 10년 전보다 지금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10년 후, 20년 후에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그런 삶을 확신한다는 뜨거운 말들은 내게 따라가야 할 표지판이 되어준다.
물론 선교사를 지망해야만 그런 뜨거운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모두에게 자신의 길이 각자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돈과 시간, 미래... 많은 것을 포기하였고 그렇게 절실한 만큼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와 똑같은 빛은 아니라도 저마다 자신만의 빛으로 반짝이기 위해선 나름의 희생을 치뤄야 할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10년 후, 20년 후에 나는 과연 얼마나 더 잘 걸어가고 있을까. 나만의, 생의 한가운데를.
첫댓글 럽투르니에~ 역쉬, 죽지 않았군. 살아 있어~
이햐~ 감사합니다^^*
연구원 공간에서 우연히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 들쳐봤다. 처음 같이 공부할 때 보다 성숙된 글의 흐름이 강같아서 다시 읽고 했다. 4년이 흘렀으니 지금은 글만큼이나 모습도 달라 졌으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독서와 글쓰는 무대에서 어서 주인공이 되길 기대하며 적는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군요 4년 ㅠㅠ
그동안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며
뜻대로 살아왔는지 되돌아봅니다...
장로님도 잘 지내고 계시지요?
이렇게나마 이야기해서 기쁩니더
정성어린 댓글도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