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두 관점, 두 운명
히2: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히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신년이 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습관적으로 자기 삶을 검토하고 상황을 두루 살펴봅니다. 그런 때 고려해야 할 명백한 질문이 두 가지 있습니다. "현 상황이 야기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으로 전망 -개선된 희망이 있는지, 장차 어떻게 된 것인지-은 어떻습니까?" 성공한 사업가들은 이런 질문들을 던집니다. 장부를 들여다보며 지불 능력 여부 등을 가늠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실태와 자기가 당면한 현 상황을 살펴보고 그에 따라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 두 질문과 관련하여 취할 수 있는 관점은 오직 두 가지뿐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즉, 비기독교적 인생관과 기독교적 인생관이 있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적 인생관은 정치적·사회적·경제적·국제적·인종적 관점 등으로 갈라지지만, 비기독교적이라는 점에서는 전부 똑같습니다. 예컨대 대중지나 책이나 라디오에서 접할 수 있는 평범한 비그리스도인의 관점을 보십시오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오늘날 상황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현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상태를 보면서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삶에 만족한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펑펑 쓰며 이 파티 저 파티 전전하는 이들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곤 하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면 진정으로 행복해 할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만사는 편안하도다 라고 더 이상 떠벌리지 못합니다.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인과 사회와 세상 전체의 현 상태를 깊이 염려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데는 세상의 상황 및 삶의 불확실성, 현대인이 겪고 있고 시달리고 있는 온갖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홍미롭게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지한 사상가들과 철학자들 중에 누구보다 비관적인 이들이 많습니다. 오스발트 슈팽글러의 [서구의 몰락 ] (The Daline of the Bar)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오래전에 나온 절박한 책으로서, 저자는 그 당시에 이미 전쟁을 예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의 흐름과 국제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지켜보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게 마련입니다. 극심한 비관론자 중에는 선도적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원자력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과학자들이 누구보다 두려움을 느끼며, 인간을 각성시키는 무슨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세상은 결국 폭파되고 문명은 파괴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늘어나는 범죄와 무법상태, 살인, 강도질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발언도 들어 보십시오. 사람들은 이기주의의 발흥 및 음주와 도박, 패륜과 악덕에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현재의 삶은 50년 전만큼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안전하지 못합니다. 해마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점차 감소하는 것을 보며 전세계적인 기근을 크게 우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온 세상이 지금 무서운 재앙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삶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비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깊은 우려와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려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다소 모순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여전히 힘을 내고자 애를 쓰며 완전한 비관론자가 되길 거부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참으로 절망적이라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년 초마다 낙관론이 등장합니다. 신문마다 광적으로 우리를 안심시키려 들며 우리가 매달린 만한 것을 제공하려 듭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그 확신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데 말로만 계속 좋아질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명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겪은 오늘날 인간이 진화해서 점점 나아지리라 말은 헛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이 눈앞에 뻔히 보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굳게 믿어 온 방책이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정치 활동이나 교육이나 서로 알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을 종식하면 모두 함께 행복해질 뿐 아니라 유례없는 번영기를 누린 것이라고 믿었으니. 그런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미래을 기대하며 희망과 위로의 말을 찾는 이들이 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던 말, 본인들조차 의심하며 주저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신문과 라디오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전형적인 연대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 '과 그의 책 [변화하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보십시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데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철학을 아는 이 사람의 해결책은 생각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3-4세기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입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가 들은 말도 생각하라. 이성으로 문제를 바로 잡으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세우고 대학을 충실해서 사람들에게 할 일만 알려 주면 저마다 일어나서 행동하리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일어났고 패륜과 악덕이 무섭게 증가 했습니다 생각할 기회가 이전 어느 때보다 많아 졌는 데도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최근처럼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받은 시대는 없습니다 이 방책은 새로운 희망이 되지 못한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최소한 배웠어어야 하는 교훈은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과음이 해롭다는 것 계속 술을 찾으면 몸이 망가진다는 것은 의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의사가 술을 마시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추론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 있습니까? 비 기독교적인 관심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비기독교적 관점이 항상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유는 인간과 세상의 삶에 관한 세 가지 기본사실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사실은 인간 자신과 그의 본성에 전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예컨대 전쟁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전쟁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야고보서 4:1에 대답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정치인들이나 악의적인 인간들이 국가의 물리력을 조종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보며 "정말이지 역겨운 짓이야. 왜 저런 짓을 하는 거지?"라고 했습니다. 다른 나라를 향해 "내가 갖고 싶으니 빼앗겠다"라고 말하는 독일 지도자를 보며 경악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생활에서 자기가 남의 아내한테 똑같은 짓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경악하지 않습니다. 사실 두 가지는 똑같은 것입니다. 집단이 하는 행위나 개인이 하는 행위나 똑같이 악합니다. 개인도 국가도 그 본성이 악하고 왜곡되고 부정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은 결코 상황이 나아지길 바랄 수 없는 이 이유. 즉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약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려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옳은 일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이 점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 비기독교적 관점의 첫 번째 오류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마귀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개명한 시대에 누가 마귀를 믿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을 볼 때마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조종해서 저런 짓을 하게 만들까?"라고 묻게 됩니다. 성경이 줄곧 내놓는 대답은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자...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22)으로
묘사합니다. 알든 모르든,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사악하고 더럽고 악의적인 영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와 목표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인간과 역사의 전 과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과 권세가 지금도 우리에게 손을 써서 파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비기독교적 관점은 이런 말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토록 교육에 힘쓰는데도 세상이 여전히 이 모양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적 관점의 신봉자들은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이유를 물으면서도 이 악한 통치자 때문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항상 잊고 있는 세 번째 사실은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그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이것은 그들이 완전히 잊고 있는 사실이자 성경이 시종일관 진술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지식은 습득할 수 있고 세상의 부는 축적할 수 있으며 무수한 일 또한 할 수 있지만,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의 진노 아래 있게 됩니다.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되며, 그의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떠난 미래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진단이 잘못된 탓에 치료법도 잘못 찾습니다. 인간은 오랜 세월 같은 해결책을 시도해 왔지만 그 시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비기독교적 관점의 특징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은 본문에 완벽하게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비기독교적 관점과 똑같이 출발합니다. 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기독교적 관점이나 비기독교적 관점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 점을 아주 분명히 짚고 넘어갑시다. 현 세상에 대한 견해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말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이 분석합니다. 기독교적 인생관은 비기독교적 인생관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정직하며 용감합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덮으려 듭니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어쨌든 인간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려 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지 않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위장막을 걷어치웁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알며 나에 대해 철저하고 적나라한 진실을 말해 주는 책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신문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진실을 알려 줍니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며 악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렘 17:9. 마 12:34). 우리는 시기하고 질투하며 추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는 피조물입니다. 천성적으로 서로 미위하는 피조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그 말은 진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앞으로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세상이 점차 개선되는 장밋빛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며, 마지막 때 세상의 모습이 홍수 이전과 아주 흡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다 쓸리 갈 때까지 먹고 마셨습니다. 마지막 때도 그럴 것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마 24:38).
복음의 첫 진술은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비그리스도인 상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피조 세계의 주인으로 만물을 다스리기는커녕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외부 세력에게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다스리기는커녕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반박할 것입니다. '현 세상을 정말 비관적으로 보는군요 이것이 당신이 해줄 말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연이어 해주는데, 그 말은 세 글자로 된 짧은 단어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그러나. ....기독교 복음 전체가 '그러나'라는 이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비기독교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의 본질적인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과거에 제시했던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기에 현 상황에 '그러나"라는 말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러나'라는 이 말에서 출발합니다 "오직 그러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교리일 뿐이라고 그 말만 잘 따르면 전쟁이 종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주 이론적이고 멋진 주장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기독교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늘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주 비관적입니다 개선의 희망이 어둡기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조청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암울한
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 예수를 보라는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무엇을 보라는 뜻일까요? 복음은 베들레헴에 태어나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라고 합니다. 아무도 정죄할 수 없었던 분을 보라고 합니다. 이적을 행하신 놀라운 분,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신 분(요 10:30), 생업을 버리고 따라올 것을 요구하신 분. 그래서 사람들이 따라갔던 분. 3년간 모두가 놀랄 만한 설교를 하신 후 연약한 모습으로 체포당하신 분을 보라고 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손발이 못 박힌 채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으면서, 그가 자신에 대해 주장한 모든 말도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실제 사실이요 역사입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가르침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귀와 그 무리에 종속된 인간의 상대와 실패와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셨습니다. 복음은 그가 완전한 삶을 사셨다고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하셨으며 어느 점에서도 실패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홀로 시험에 맞서 사탄을 완전히 정복하셨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죽음과 무덤도 정복하셨으며, 부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고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습니다. 세상에 계셨던 예수는 지금 그 관을 쓰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입고 인간이 되어 인류가 풀지 못한 문제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서 이런 일들을 하셨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과 세상의 미래를 넘겨주셨습니다. 땅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세상을 넘겨주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그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가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복음의 메시지로서,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나라들은 사탄 마귀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새 백성, 새 나라를 세우고 계십니다. 악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불러내 자신의 새 나라로 옮기고 계십니다. 주님은 거의 2천 년간 이 일을 해오셨고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한 사람씩 이 진리를 깨닫고 그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하신 것이며, 완성되는 날 세상에 다시 오신 것입니다. 사단과 죄로 가득한 모든 것과 모든 악을 멸하시고 새 시대를 시작하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신 것입니다. 친히 그 나라에 거하시며 다스리실 뿐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 자신이 영광으로 이끄신 많은 아들들도 그 나라에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친히 그들을 위해 예비하고 계시는 세상 장차 온 세상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그들은 새 나라의 삶을 누릴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듯이. 주님은 세상을 대속하시고 구원하시며 온전케 하신 후에 다시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저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라거나 작년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물론 그 권면도 포함되지만, 그 권면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복음은 예수와 그의 계획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것들은 전부 사실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시면서 이제껏 말한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오셨고, 장차 다시 오실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비웃었으며, 오신 그를 믿지 않고 못박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재림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초림 때 믿지 않았던 자들과 같은 무리가 되긴 자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모든 것을 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속한 자들은 영광 가운데 그와 함께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각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 모양인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저주의 대상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지신 주님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고, 우리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삶이 이 모양인 것은 악한 본성 때문입니다. 옛 본성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영광스러운 상태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필요한 새 본성을 주십니다.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본성을 입히심으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으며(롬 8:29), 새로운 인류의 선도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과 악과 지옥을 이길 수 없지만, 그는 전부 이기셨습니다.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도 똑같이 정복하게 해주십니다. 그가 다시 오시면 마침내 사탄을 불 못에 던지실 것이며, 세세토록 거기 가두실 것입니다(계 20:10).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처럼 악했던 당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그러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라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를 끝까지 읽어 보면 계속 이 말로 도움을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께 시선을 고정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보듯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이제껏 말한 모든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그를 떠난 세상은 정죄를 받고 길을 잃었다는 것. 아무 소망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세상이 죄로 가득하고 악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본성 또한 죄로 가득하고 악하다는 것. 여러분의 힘으로는 그 죄를 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까? 세상을 미워하고 있습니까? 이러분 안에 있는 악한 본성도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 본성에서 해방되길 갈망하고 있습니까? 예수 없이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모든 것을 정복하셨다는 사실,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의탁하는 모든 자들에게 똑같이 정복할 힘을 주고 해방시켜주며 장차 올 그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를 이런 분으로 보고 있습니까?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과 미래가 달라집니다. 이 문제가 시급한 것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우리 모두 예수를 볼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계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계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제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눈이 그를 보게 될 날, 아무도 피하지 못할 날이 확실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볼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진노보다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독생자시라는 사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그가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마리아의 태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우셨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위해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일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 모든 일을 겪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세세토록 비참하게 고통당했을 것이라는 사실, 그러나 그를 믿기에 그와 함께 임할 나라에서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마침내 세상에 다시 오셔서 모든 원수를 발등상으로 삼으실 예수, 여러분을 자신에게로 영접하여 장차 올 뛰어난 영광과 말할 수 없는 지복을 누리게 하실 예수께서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 쓰고 계신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제가 이처럼 여러분에게 촉구하는 것은 심판 날 너는 그들에게 좋은 조언이나 즐거움이나 더 나은 행복감을 주는 대신 예수에 대해 알려 주었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날 주께서 제게 던지실질문, 너는 그들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간 예수에 대해 알려 주었느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지금 영광과 존귀로 관 쓰고 내 우편에 앉아 있는 예수에 대해 알려 주었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우리 모두 예수께 충성된 자로 나타나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