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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산 답사 제 2편 (선운사와 개암사)
선운사를 찾아서
다음 일정지 선운사를 찾아간다. 선운사는 이번이 두 번째다. 선운사 입구 식당에서 비빕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작년에도 그렇게 맛없게 먹었는데..금년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자꾸만 '풍천장어'라고 쓴 메뉴판에 눈길이 간다.
장어...110명 전부 내 돈으로 사줄까? 음..200만원 들겠군... 나중에 혼자 와서 먹어야지..ㅋㅋㅋ
반주로 걸친 막걸리 한 사발이 폐부를 찌른다. 카..좋다.
12시간을 삭힌 쭈꾸미가 이제사 제 맛을 낸다.
잘근잘근 씹는 그 고소한 맛이 지금도 잊을 수 없다...지금도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군침이 고인다.
백파선사 비문
절간 초입 부도밭에는 유홍준 교수가 찬사를 늘어놓은 추사 김정희의 '백파선사비문'이 서있다.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라는 힘찬 해서체의 필치가 있다. 책에서는 '송곳으로 강판을 뚫는 힘'으로 붓끝을 강하게 내리 꽂았다고 한다. 고수인 세서재, 유현의 설명을 들어서인지 글씨를 어루만져 본다.
뒷면엔 추사가 왜 백파가 화엄종주인지, 그리고 대기대용을 쓴 이유를 풀이한 비문과 백파를 삶을 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울임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글씨란다. 특히 이 행서글씨는 추사가 죽기 1년전에 쓴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금석문이라 한다. 뒤의 날짜와 '완당학사 김정희'라고 씌여진 글씨는 후대에 추사의 글씨를 모방한 글자라니 추사의 글씨와 비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작은 비석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게 하는 걸 보면 새삼 유홍준 교수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덕분에 3만원이 훨씬 넘는 거금을 들여 '완당평전'을 읽고 있지 않는가? 소설 '상도'를 통해서도 추사의 인간미에 매력을 느꼈는데 직접 그의 글씨를 대하니 감회가 새롭다.
개인적으로 서울 삼성동 봉은사의 '판전'의 현판 글씨에 무한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세상을 등지기 3일전 모든 공력을 부처님을 향해 쏟아낸 현액이기 때문이다. 그 글씨엔 울림도 없고 기교도 없고 오로지 겸손만이 묻어있다.
추사와 백파와는 상당기간 논쟁을 벌인다. 처음엔 백파는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불교의 교리에 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초의와 오랜 친구인 추사가 이 논쟁에 끼어 든다. 싸움 구경하던 추사가 이 논쟁에 끼어든다. 얼마나 심하게 백파를 몰아세웠는지 다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은 80년 공을 쌓은 나이인데 그 공을 쌓은 것이 겨우 이것이냐. 아무런 심증도 없이 이것저것 주워들어서 입으로만 지껄이는 그 꼴이 점점 볼 만하도다."
아마 요새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렸으면, 명예훼손이니 인격모독이니 하면서 '사이버 수사대'에 고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범인이 보기엔 욕설이 난무한 편지 공방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쟁을 통해 두 영웅들은 서로 간의 학문을 키워나간다. 가끔 유현이 나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거는데.. 이 논쟁하고는 틀리겠지? ㅋㅋㅋ
그리고 나서 추사는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로 통해 인생의 쓴맛과 겸손을 터득한다. 기고 만장한 그의 성격이 삶을 초월한 사람으로 변한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대흥사에 가서 원교의 현판을 다시 세우고, 매몰차게 내 몰았던 백파마저 최고의 고승이라고 추켜세우며 시비를 직접 쓰지 않았던가? 그런 인간애가 풍겨 나오기 때문에 나는 추사를 좋아한다.
선운사의 창건설화
백두대간이 소백산맥으로 갈라져 노령줄기가 내려 뻗는데 김제의 구릉지역을 만나고, 그 맥이 바다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용트림을 한 지역이 바로 '선운산'이다. 산세를 둘러보면 기암괴석이 많고 험한 것을 금방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수학자는 이 산의 형상을 '만 필의 말이 뛰어 오르는 모습'이며, '임금이 신하와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하긴 그러한 곳에 절집이 없어서는 안되겠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때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앞 바다에 돌배가 나타났는데 마을사람들이 다가서니 자꾸만 바다 쪽으로 멀어져 간다. 설화는 이때 영웅이 나타난다. '검단선사'라는 스님이 등장하니까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 안에는 삼존불상, 탱화 등등 각종 보물이 가득 실려 있다고 한다.
한편 선운사 절터는 용이 노니는 연못인데 검단이 돌을 메꾸어 절터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운사 경내에는 유난히 용 조각이 많다.
어째튼 검단선사는 백제의 유명한 고승임이 분명하다. 경기도 하남시에 '검단산'도 있고, 김포 쪽 어디엔가 '검단리'를 본 적이 있거든...
또 하나는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내주고. 이곳에 굴을 파서 지낸 곳이 '진흥굴'이라고 한다. 실제 도솔암을 향해 오르다보면 좌측에 진흥굴이 놓여있다. 왜 그가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살았겠는가? 당시 통일신라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절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진흥왕전설을 끌어 들였으리라 추측된다.
천왕문
천왕문은 2층 맞배집으로 아래층은 사천왕을 모시고 있고, 위층에는 종과 북을 매달고 있는 종루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맞배지붕의 간결한 선이 아름답다. 지붕마루의 부드러운 곡선이 뒷산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이 천왕문 현판은 조선후기 명필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푸른 바탕에 하얀 글씨가 장쾌한 힘을 발휘하며 춤을 추고 있다. 그 아래 내건 '도솔산 선운사' 현판은 현세의 대가 일중 선생의 예서 글씨라는데....
만세루
천왕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건물이 '萬歲樓'다. 정면 9칸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다. 선운사가 흥성 했을 때는 무려 3천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다는데..이곳 만세루에서 까까머리 스님들이 가득 앉아 설법을 청해 들었을 것이다. 그걸 상상해본다.
만세루는 기단도 낮으며 건물로서 세련된 기교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우직한 '돌쇠'의 모습이랄까? 통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자연미가 넘친다. 실제 다른 건물을 짓고 남은 목재를 가져다 지었다고 한다. 선운사가 용의 연못임을 증명하듯 대들보에는 커다란 용이 걸터 앉아 있다.
대웅보전 (보물 290호)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제법 큰 건물이다. 맞배지붕으로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정면의 공포가 유난히 화려하다. 그러나 측면에는 공포가 없으며, 원목도 깍지 않고 자연 주춧돌에 기둥으로 삼고 있다. 특히 오른쪽에서 바라본 측면의 모습이 아름다운데, 부재가 훤희 드러나는 것이 수덕사 대웅전 측면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뒷 쪽의 공포는 앞쪽과 달리 익공계로 간단히 처리되어 있어 사방의 공포가 모두 제 각각임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셔야하는데 특이하게도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또한 불상 뒤에는 탱화가 그려진 것이 아니라 벽화가 그려져 있어 여러모로 기존의 절집과는 차이가 있음을 말해준다.. 천장에는 힘차게 약동하는 용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이곳이 용의 연못임을 증명해준다.
선운사 탑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로 치솟은 안정된 비례감이 돋보인다. 현재는 6층이지만 성종때 행호선사는 '우뜩 솟은 9층 석탑을 보고 중창을 결심했다'라는 문헌이 나온다. 아마 조선 중기까지는 9층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선운사는 폐사와 중창을 반복한 절이다. 역사와 시대에 따라 이 절의 운명도 바뀌었을 것이다. 고단한 인간사와 어찌나 비슷한지....
그나마 묵묵히 절을 지켜 왔던 탑이건만 지금은 수족마저 내어주는 아픔을 간직한 채 6층의 모습을 하며 오늘날까지 선운사를 지키고 있다.
금동보살좌상(보물 279호)
대웅전 우측에 '관음전'이 놓여 있는데 그 안에 관음보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상이 앉아 있다. 우리나라 지장보살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지장상이다.
두툼한 테를 두른 두건을 쓰고 있으며, 후덕한 얼굴에 볼에는 살이 통통히 올랐다. 중국집 주방장 얼굴을 하고 있지만 옷자락의 주름이나 섬세한 손가락 모양을 보면 보통 공력을 들인 것이 아니다. 휘황 찬란한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보라. 어찌나 섬세하게 다듬었는지.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서 이런 멋진 불상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당시 선운사가 성종의 부모와 왕비의 넋을 기리는 왕찰이기에 최고의 조각가를 동원했슴이 분명하다.
이 불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三藏' 사상을 알아야 할것이다. 지장보살이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양 협시로 하는 삼존체제에 시왕을 부가하여 지옥의 구제자라는 면모를 갖추었다.
이것이 후세에 와서는 天地人 三才사상과 혼합된다. 보통 천장, 인장, 지장을 나란히 그린 탱화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선운사는 그 삼장을 탱화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불상으로 모신 것이다. 선운사가 지표상 가장 낮으니 '지장'이고, 참당암은 '인장'이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솔암에는 '천장'이 모셔져 있다.
영산전
정면 5칸 특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이곳은 자연스런 2중 축대가 아름답다. 원래 화엄사 각황전처럼 2층의 장륙전으로 쓰였는데..건물이 허술하여 다시 지은 것이 '영산전'이다. 2층에 놓였던 불상이 단층으로 옮겨졌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불상이 큰 것이 아니라 집이 작은 것이다.
근년에도 어느 비구가 이 불상을 다른 곳으로 이안해 모시려다 이곳에서 火光이 충천하여 달려온 사람에게 발각되어 화를 모면한 영험이 전해지기도 하다.
동백꽃
사실 이걸 볼려고 이곳에 왔는지도 모른다. 서정주가 외쳐서인지. 송창식이 흥얼거려서인지..동백꽃하면 당연히 '선운사'가 떠오른다. 사실 여수 오동도나 강진의 백련사 동백이 더 멋지고 아름다운데 말이다.
서양에서 동백꽃이 소개된 시기는 19세기가 지나서다. 오페라 '춘희'의 주인공 품에 꽂혀 있는 꽃이 동백꽃이기에 동백은 창녀나 음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동백꽃의 의미는 정절을 상징한다.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며 다소곳이 앉아있는 조선의 여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꽃봉오리를 튼 동백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백 잎처럼 강렬한 초록색은 없을 것이다. 그 바탕에 붉은 꽃이 뚝뚝 달려 있으니 정절 이상의 것을 표현한다. 다른 꽃은 꽃잎을 휘날리며 죽어가지만 동백은 꽃봉오리 자체가 뚝뚝 부러져 나간다. 그래서 동백이 가장 멋지게 보일때가 그 꽃이 부러져 시체처럼 땅에 머리를 박고 누워 있을 때란다.
3천명의 선운사 스님은 이런 동백꽃과 상사화를 보면서 속세의 여인들을 생각하고 떠난 것이 아닌지? 강장식품인 장어와 복분자술이 질펀나게 널려져 있는데 어찌 부처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져 있는지 의구심마저 든다.
혹시 기회가 되면 선운사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 가보길 권한다. 국내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 자리 잡고 있으며 아늑한 암자 '도솔암'과 '참당암'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해 바다가 훤히 보이는 능선을 거닐면 산이 바다로 내 던지기 전 마지막 용트림한 절경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서정주 시비
다음 일정 때문에 서둘러 절집을 벗어난다.
좌측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서정주 시비를 놓치기 쉽다. 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도 지나쳤는데..이변엔 돌아 가다가 발견한 것이다.
서정주 시인.. 그처럼 살아 생전 세간에 입에 오르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일제 말 친일 행각 때문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처럼 줄을 잘못 서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조용히 자연을 음미하는 시나 쓰면서 참회했다면 조금의 면죄부를 받았을 텐데.. 5공시절 전두환 찬양시까지 읊었으니...원.
죽기 전 신문사 인터뷰에서..
"왜 친일 행각을 하셨어요?"
"누가 그렇게 빨리 해방될 줄 알았나?"
서정주시인 다운 답변이다. 몇 년전 연변에 갔을 때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용정 중학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라를 등지고 그 먼 곳까지 가서 독립을 외쳤고 감옥에서 죽어간 그가 왜 갑자기 떠오르는 거지.
서정주..과거 행적을 보면 그렇게 미울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는 미워하기엔 너무 아름답단 말이야...
송악
의외로 송악을 보는 즐거움을 놓친 회원이 많다. 남한에서 송악이 가장 크게 자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인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송악 밑에 서 있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글이 쓰여져 잇다....그걸 읽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돌계단을 건너가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물론 나도 건넜음.
개암사를 오르며
선운사에서 개암사까지 가는 동안 잠시 눈을 붙였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다. 회원들이 나이살 먹고 보라색 잠바를 입었다고 하도 구박하기에 배낭에서 다른 색 잠바를 꺼내는 순간 중년의 아주머님이 다가와서 말을 건낸다.
"혹시 이종원님 아니세요?"
"그런데요."
"저 꽃님이 입니다."
"정말이예요.?"
꽃님이님은 내가 활동하고 있는 '모놀과 정수'의 회원이다. 일부러 시간 맞춰 전주에서 이곳까지 달려 왔단다. 어찌나 고맙고 반갑던지....
'인연이란 소중한 것이구나..' 라는 보편적 진리를 깨달았다. 덕분에 난 서울까지 보라색 잠바를 걸치고 다녔답니다. ㅋㅋㅋ
웅장하고 커다란 일주문을 거쳐 개암사로 올라간다. 절 마당까지 가는 그 오솔길이 어찌나 예쁘던지....하늘까지 치솟은 나무가 겹겹히 쌓여 있어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개암사
마지막으로 휘감아 도는 오솔길을 거치면 촘촘한 돌이 박혀진 석축을 만나게 된다. 그 위에 하얗게 드러난 바위..바로 '울금바위'다.
"와...멋지다."
한 단 한 단 계단을 오르며 서서히 나타나는 대웅보전의 지붕선들..그리고 처마..공포, 기둥..석축 힘겹게 몸을 드러내고 있다.
" 와 " 그저 외마디만 내밷었다.
이런 충격은 지난번 여주 고달사지 부도를 봤을 때 감흥과 흡사하다. 당시에도 계단을 오르며 서서히 나타나는 아름다움에....그저 '와'라는 단발마만 밷었거든..
개암사 자리는 원래 '변한의 왕궁터'란다. 변산이란 말도 거기서 나왔다는데.. 그런 궁전을 백제 무왕 때 절로 고쳐 '개암사'라 명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보고있는 절은 조선 중기 효종 때 지어졌다고 한다.
대웅보전
개암사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저 울금바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보면 삼존불 같기도 하고..저길 보며 부처님의 집을 지을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축대는 크기가 일정한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막돌을 박아 넣었다. 울금바위 한 쪽을 으깨서 만든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 자연미에 넋이 빠졌다. 내소사같이 공포가 화려하다. 모서리에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여의주를 물고 있다. 날렵한 처마는 활주가 받치고 있다. 추녀의 귀솟음이 강하고 기둥은 아래에서 위까지 점점 좁아지는 민홀림 기둥을 하고 있다.
이곳 역시 창살이 아름다운데 기하학적 문양이 부처님을 지키고 있다. 처마 밑을 유심히 살펴보면 두개의 도깨비 얼굴이 붙어 있는데 왼쪽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으며, 오른쪽은 씩..웃고 있다. 원래 좋은 나무를 사용했는지..짙은 나무 결 무늬가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창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혼방 문지방을 보는 것처럼...
굽이굽이 절집을 둘러 보았다. 마지막 답사처 이기에 울금바위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도 찍었다. 앵글에 나타난 회원의 얼굴이 어찌나 많은지 부처님의 나발처럼 보인다.
조금 내려가서 마지막 정리하는 자리를 가졌다. 울금바위는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세서재의 '정읍사' 노래를 들어 보았다. 그 노래가 바로 백제수복의 '진군가'란 것을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되었다.
다시금 하늘을 쳐다본다. 그제서야 바위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울금이 아닌 울음소리다. 백제인의 울분과 한맺힌 소리라는 것을 이제사 알았다.
변산에서의 이틀을 정리해본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기쁨과 한이 어우러진 곳이 변산이 아닐까?.
아름다운 유물을 보면서
처절한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이틀동안 옛날로 돌아가 그들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모두들 각자의 숙제를 한아름 짊어지고 하산한다.
아쉽게도 작별의 인사를 해야한다. 백 여명이 넘는 사람들 하나 하나가 가족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 회원들...정말 만나서 기뻤습니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 소개( http://cafe.daum.net/7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