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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World Assembly of Muslim Youth, WAMY) 에서 출판되어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슬람의 실상
함무다 압달라티 박사 저
http://www.quran.or.kr
헌정사
진정으로 머리 숙여 당신의 도우심에 감사하나이다.
오, 하나님!
진실한 이슬람의 정신으로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오, 하나님!
온 마음 다 받쳐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오, 하나님!
당신의 인도와 사랑이 없다면,
이 책이 나올 수 없었기에,
당신의 도우심과 대의가 없다면,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결코 빛을 볼 수 없었기에,
그리고 이 책이 바쳐질 만한 가치가 있다면
부디 가납하시어 이를 축복하여 주소서
삼가 당신께 이 책을 바치나이다.
오, 하나님!
-함무다 압달라티-
머리말
본서는 단지 일반독자에게 이슬람의 기본을 알려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분명해지겠지만 본서에서 이슬람의 깊이와 폭을 드러내 보일 의도는 없다.
의도한 바는 단지 교양 있는 일반 독자로 하여금 문제를 올바로 꿰뚫어 보게 하고
이슬람이 나타내는 제 원칙을 인식하게 하자는 것뿐이다.
일단 처음에 생긴 관심을 계속 발전시키면 스스로 보다 깊이 있는 지식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반구의 무슬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외딴 지역에 거주하는 젊은 무슬림들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주위의 상황이 전부 이슬람에 관한 한 불리하다. 라디오논평, TV쇼, 잡지기사, 영화
그리고 심지어 학교 교과서까지 모두가 이슬람을 잘못 전하고 있는 바, 여기에 반드시 악의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극성스러운 단체들은 무슬림이 이 교파나 혹은
저 종파로 개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이런 무슬림들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든다.
한편, 살다 보면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올바른 신앙의 길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유혹을 많이 받게 된다. 이는 극히 해로운 것이다. 특히 젊은 무슬림들의 경우에는 더욱
해로우며, 세계의 이쪽에서 오해받고 있는 종교인 이슬람의 경우에는 더 한층 해롭다. 일부
무슬림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종교적으로 인도하고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제한된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이와 같이 주위에서 자꾸 압력을 가해
오는데 어떻게 그것이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정은 어떤가?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 가져 온 결과는 무엇인가? 사태가 암담해
보이기는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일부 무슬림들은
주위에서 가해 오는 심한 압력에 무고한 피해를 입어 무관심해지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들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거나 자기 주위를 의심한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아무런 가치 있는 기여도 할 수 없게 되며 그 사회로부터 아무런 실속 있는
혜택도 받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유행에 뒤지지 않고 남의 마음에 들고 싶은 나머지 사회의
조류에 휩쓸려 버리는 무슬림들도 있다. 이들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기여할 수
없거니와 그로 하여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실효성 있는
종교적 도덕이라는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관심해지고 위축되거나 해이해진 무슬림 말고도, 어떻게 해봐도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무슬림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 집단의 고도로 능률적인 조직 같은
것이나 세속적인 종교 단체가 사회에 널리 유포시킨 것에 빠져 있는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그저 가입하고 있을 뿐 실상은 주변인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고독한 군중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로도 볼 수 있다. 이 혹은 저 특수 집단의 신념이
철저히 주입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타집단에 가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슬람적 유산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데다가 비무슬림적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무슬림으로 나서서 버텨 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용기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무슬림”들이 종교에 진정 어린 관심을
가진다면 이슬람의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야말로 그 종교적 발전과 인간적
열망의 수준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인류의 정신적, 도덕적 복지에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이슬람의 체제
내에서 가장 커다란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집단에 가입해 봐야 항상
그 관심이 피상적(皮相的)일 수밖에 없으며 더 좋은 것을 찾다가 보다 못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들은 같은 무슬림들과의 정신적 유대를 잃고 새로 들어간
집단의 주변에서 맴도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황 전체의 최종적인 결과를 분석해 보면 그 결과가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도 애처롭고
유해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슬림 강령에 의해 해가 되는 것은 다른 모든 훌륭한
강령에 대해서는 더 큰 해가 된다. 진정한 무슬림이야말로 책임질 줄 아는 시민 정신과 세계의
평화상호 이해와 인류의 형제애, 양심의 자유와 인간 존엄성 보존의 실현에 가장 보람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원칙들은 이슬람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바로 이런 원칙들이 무슬림에게 부과, 위임되어 있다. 만일 이런 원칙들을 지킨다고 하는
무슬림들이 방황하거나 무관심해져 버리면 인류 일반이 그의 가치 있는 기여를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이는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다.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성서(聖書)인 영광의 꾸란이 최고의 계시서이며 종교적 진리의 기준이라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이들도 또한 이슬람이 영원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재확인하고
과거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여 인간이 각계 각층에서 건설적인 창조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무슬림들이 나머지 인류와 다르게 혹은 그들보다 우월하게 선별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슬람을 강요하려 하지 않으며 인류를 열등 계급과 우수 계급으로 나누려 하지도
않는다. 어떤 민족은 은총을 받고 어떤 민족은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선민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교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고 필요 불가결한 공헌을 할 임무가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슬림들에게는 무관심해지거나 배타적이 되거나 오만을
부릴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실생활의 모든 면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신분과 교의(敎義)와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팔을 내밀어 환대하는 것이 그들의 엄숙한 의무이다.
이들이 이슬람을 실천하고 친절하고 진정 어린 이슬람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과 화합 해야만이 비로소 이들이 베풀 수 있는 선행과 바칠 수 있는 봉사가 그 의의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에 비추어 이슬람을 참신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무슬림들을 맹목적인
광신자나 편협한 사람들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이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무슬림들과 그에 상당하는 사람들에게 이슬람의 진리를 재인식시키고
세계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과 인간 조건에 대한 윤리적 접근법을 갖게 해 주고 싶을 따름이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진다면 무슬림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네 나라의 책임감 있는 시민,
인류의 존경할 만한 일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현대 세계에서 이슬람이 처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비관적으로 그려본 것일까?
아니면 무슬림들이 겪고 있는 절망감과 무력감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 것일까? 혹은
무슬림들이 신세계에서 종교적 싸움에 패할 것을 예상하고 그 결과를 반성해 볼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관론과 절망감은 이슬람의 정신에 위배되며 무력감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이슬람의 미래가 곧 인류의 미래이며 인류에게 미래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나는 있다고 믿는다-이슬람의 앞에도 위대하고 밝은 미래가 가로 놓여 있다.
비록 그 진전이 더디어 보이기는 하지만 무슬림들은 지금 전개하고 있는 종교적 싸움에서
패배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무슬림들이 이 종교적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신세계의 무슬림들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을 실감 있게 그려내는데 본 머리말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부모와 자녀에게 다 같이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과 손실을 방지해야 한다는
경고를 해 주자는 것이다. 또 인류의 영적인 복지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 모두로 하여금,
정신을 바짝 차려 인류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알라의 배려에 우리의 무슬림 형제들을 맡기는 바이다. 그 분을 무한히 신뢰하기에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직 힘을 다하여 개혁(改革)을 바랄 뿐이니 나의 (과업의)성공은 오직 하나님께서 비롯됨이라. 그 분을 나는 신뢰하며 그 분을 나는 의지하노라.”(성꾸란 11:88)
함두다 압달라티
제 1장 이슬람의 이념적 기초
알라(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바로 이슬람의 기초를 이룬다. 주제가 매우 중요해서 철저하고도
이것은 명백한 논의가 요구된다. 명료를 기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간단한 논증을 하게 될
것이다.)) 많은 세기 동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위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아 오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한한 인간의 지능이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인간의 지능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그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과학이나 철학 혹은 특수한 인식론을 신뢰한다고
공언한다. 이들의 논법은 사리에 맞지 않거나 부적절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항상 복잡한데다,
이해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계발된 자유로운 정신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기
마련이다. 그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체를 부인한다고 해서 그
실체가 실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흥미 있는 비교 견해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 Jacques Maritain, 하나님에의 제접근방법(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4);
- Muhammad Zafrulla Khan, 이슬람 : 현대인에 대한 의미. (New York: Harper & Row, 1962);
- John Hick, ed., 하나님의 존재(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4)
이것은 이 주제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거나 너무 단순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참고 읽어 주기를
당부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혹은 경험과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의문을 던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비록 이들이 박학한 지식인으로 자처하지만, 불안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정확한 입장이다. 이렇게 하자니, 논의의 상당 부분이
마치 성인이 아닌 아이를 주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꾸며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본서는 젊은 무슬림에게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올바른 개념을 알려 주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비무슬림으로서 소위 하나님을
믿고 종교를 옹호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몇 가지 단순하면서도 초보적인 논증을 하는 것은 이상의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논증의 단순성이 오히려 많은 성인들에게는 심오한 사색을 유도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러한 단순성은 바람직하고 창의적인 단순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단순성 단체가 이슬람의 뚜렷한 특징이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가정마다 가장이 있고, 학교마다 교장이 있으며, 도시마다 시장이 있고,
주마다 주지사가 있으며, 국가마다 국가의 원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산물은
어떤 생산자의 작품이며, 모든 아름다운 예술품은 어떤 예술가의 창작품임을 우리는 의심 없이
안다. 이 모든 것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구와 세계의 범상치 않는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수려하고 절묘한 경치를 보여주는 자연의 미,
끝없는 하늘의 지평선, 그리고 그 지평선 멀리의 아스라함, 쉬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낮과 밤의 교대, 해와 달과 행성의 궤도, 생물계와 무생물계, 대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부단한 과정과 진보, 이 모든 것을 보고 인간은 종종 경탄해 마지아니한다.
우리가 더불어 살고 있고, 무한히 향유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 자주 의문에 사로잡힌다.
거대한 우주를 설명해 낼 수 있는가? 존재의 신비가 납득할 수 있게 풀어져 있는가?
책임을 진 가장이 없이는 가정이 제 구실을 할 수 없고, 행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시가 번창해 나갈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수반이 있지 않고서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또 무엇이든지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게다가 우리는
우주가 존재하고 가장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존속해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과 인간의 존재를 단순한 우연에 맡겨 버릴 수 있는가
인간이 단순히 우연에 생겨난 것이라면, 인간의 전 생애도 우연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그 전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여길 수 없으며,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한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스스로 어떤 계획에 따라 행동의 모범을 설정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는 자기의
행동방침을 설정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는 자기의 행동방침을 계획하며, 용의주도한
계획은 모든 어떤 원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인간이 어떤 종류로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훌륭한 계획의 가치는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조그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이렇게 세운 계획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존재와 우주의
존립 역시 어떤 계획된 방침에 의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물리적 존재의
배후에 계획하는 의지가 있으며 사물을 존재하게 하고 질서 있게 운용시키는 유일무이한
정신이 세계에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세계가 보여 주는 경이로움과 생명의 신비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는 만물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한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가장 매력적인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고, 만들어 내되,
그 존재에 어떤 특수한 목적을 부여하는 위대한 예술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 힘은 모든
힘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이며 이 예술가는 모든 예술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진실한 신앙인들과 사리에 밝은 사람들은 그분을 알라 혹은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창조자이며 세계 제일의 건축가이며, 생명의 창시자이며 만물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부양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창조하거나 만들 수 없기에, 그분은
인간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동물이나 혹성이 아니며 우상이나 신검(身檢)같은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스스로 생겨날 수도 다른 것들을 창조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은
기계도 아니다. 태양도 달도 아니며 그렇다고 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체계에 의해 통제되며 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들을
만들고 유지시켜 주는 분이기에 이 모든 것들과 구별된다. 만든 자는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며
그보다 위대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또한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으며 경이로 가득 찬 이 세계가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세계에서 생성되는 부단한 변화가 그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바이며 만들어진
것이면 무엇이나 그것을 만든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분, 인간을 창조하고 부양하시는 분,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효율적인 힘, 이 모두가 하나로서 동일한 바, 알라 혹은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분이야말로 신비중의 신비이며, 만유 중에서 가장 지고한 분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책, 성꾸란은 이렇게 말한다.2)) 훌륭한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꾸란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꾸란은 자국의 아랍어와 문학의 대가들에게
도전을 제기하였던 바(지금도 도전하고 있다) 그 가장 짧은 장(章)을 놓고도 이와 근소하게
유사한 것조차도 이들이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꾸란의
의미와 미와 매력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꾸란의 의미와 미와
매력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것은 꾸란의 완전 번역이 아니며,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본래의 꾸란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다른 언어를 써서 내린
인간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원전의 힘찬 문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제시된 번역에는 인용부호의 삽입이 엄격히 배제될 것이다.
너희에게 밤을 만들어 주어 쉬게 하시며, 낮을 만들어 주어 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 진실로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은혜와 자비로 충만하시거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적도다. 너희의 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신 것을. 그 분 외에 신은
없나니, 너희는 어찌하여 그분을 외면하느뇨. 하나님의 표징을 부인하는 자들이 도리어 외면
당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땅을 만들어 너희의 안식처로 삼으셨고 하늘을 만들어 너희의
은신처로 삼으셨도다. 너희에게 형체를 주시되, 그 형체를 아름답게 하셨으며, 너희에게 맛나고
정결한 음식을 마련하여 주셨도다. 너희의 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 그분을 영예롭게
할지어다. 그분은 세계의 주이시도다! 그분은 살아있는 분이시며 그분 외에 신은 없나니
그분에게 요청하며 그분에게 진실하게 헌신할지니라. 세계의 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꾸란, 40:61-65)
너희에게 바다를 복종시켜, 그분의 명으로 배가 항해할 수 있게 하며, 너희가 그분의 선물을
구하게 하고 감사함을 보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 그분은 천지의 만물을
당신께로부터 너희에게 복종시키셨도다. 보라, 진실로 그 가운데 숙고하는 자들을 위한 표징이 있으리니:(꾸란, 45:12-13)
전 세계의 최고주인이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분은 알라(하나님)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분이시기에, 사람은 다만 성찰과 명상을 통해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무소부재하시며 그분의 큰 힘은 세계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다. 세계의 만물이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상, 인간은 그분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위대한 힘을
믿어야만 인류는 생명의 그 많은 신비를 가장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지식과 종교적 통찰력을 얻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며, 실행과 건전한 윤리에 이르는
정로(正路)요, 행복과 번영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지침이다.
일단,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은 다음에는 그분의 속성과 명칭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완전한 모든 것과 절대적 선은 그분에게 속하지만, 결점이나 악은 그 어느
것도 그분에게 해당이 없다. 특히 다음 사항을 알고 믿어야 한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므로 동반자나 자식이 없으며 누구를 낳지도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분은 영원히 만인의 간구를 받으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 무엇도 그분과
동등하지 못하다.(꾸란, 112:1-4)
2. 그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시며, 보호자요, 진실한 안내자이시며, 공평한 분이고
최고의 주이시며, 창조자요, 감시자이시며,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며, 전지(全知)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듣고 아시는 분이시며, 증인이요, 영예로운 분이시며 유능하고 유력한
분이시다.(예, 꾸란, 57:1-6, 59:22-24)
3. 그분은 사랑하는 분이요 부양자이시며,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이시며, 부유하고 독립
자존하는 분이시며, 용서해 주는 분이요, 온화한 분이시며, 인내심 있고 안식(眼識)있는
분이시며, 유일무이한 분이요 보호자이시며, 재판관이요 평화로운 분이시다.
(예, 꾸란, 3:31, 11:6, 35:15, 65:2-3)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과 속성들 하나 하나가 성꾸란의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창조물에게 지극한 사랑과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자비 속에 살고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헤아릴 길이 없으니, 이는 그분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꾸란, 14:32-34, 16:10-18)
하나님은 지고하시지만, 생각 깊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가까운 분이시다. 그분은 이들의
기도에 응하여 도움을 베푸신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이들이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 그분은 당신과 화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환영하며, 결코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는 선량해지고, 옳은 일을 하며,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분은 선함과 사랑이 지극한지라, 선하고 옳은 일만을 권하고 또 이를 가납하신다. 그분의
자비의 문은 당신의 후원과 보호를 진지하게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
(꾸란, 2:186, 50:16)
하나님의 당신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무한하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저울질 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출생시 이후는 물론 그 오래 전부터도
우리를 잘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시되, 창조물 중 가장 좋은 형체를 주셨고 또 우리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온갖 감각과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부양하신다. 그분은 인간에게 지성을
창조하시어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영혼과 양심을 창조하시어 선량하고 정의롭게 하시며,
느낌과 감정을 창조하시어 친절하고 인정스럽게 해 주신다.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획득하고 빛다운 빛을 보는 것은 그분의 자비가 있음으로서이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에, 우리를 창조하시되, 그 형체를 가장 아름답게 하시며, 해와 달을,
육지와 바다를, 땅과 하늘을 식물과 동물을 우리에게 마련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것들과 우리가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타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드시며, 인간에게 존엄과 지능을,
명예와 존경을 부여하시니, 이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부왕(副王)이기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 희망과 평온을, 용기와 자신을 심어 준다. 하나님의 자비가
있으므로 해서 비탄과 슬픔을 치유하며,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성공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의 자비는 고난에 빠진 자를 구제하며, 고통을 당하는 자의 기운을
북돋우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절망에 빠진 자를 일으켜 세우며, 궁핍한 자에게는 위안을 주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 삶의 곳곳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당연시 한 나머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실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으며 정신적으로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자비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잊거나 저버리지 아니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진지한
요청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자비와 사랑이 있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옳은 길을 보였으며,
사도와 성서와 계시를 보내 주셨다. 모두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고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낸 마지막 사도는 무함맏이며, 현존하는 가장 믿을 만한
하나님의 성서는 꾸란이다. 무함맏이 세운 관습과 꾸란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 만일 누가 죄를 짓거나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그분을 크게 거역하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존엄성과 존재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쳐 하나님에게
되돌아서고 싶어하며, 하나님에게 성실히 용서를 구하고 정직하게 그분께 나아간다면, 그분은
정녕코 그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나 그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깨닫고,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로 작정한다면 틀림없이
용서받을 것이다. 이에 대한 꾸란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동반자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나, 이외에는 당신이 용서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시나니, 하나님께 동반자를 세우는 것은 실로 가장 가증한
죄이니라.(꾸란, 4:48,116)
이같이 말하라 : 스스로 그 영혼을 욕되게 하는 나의 종들이여! 하나님의 자비를 단념하지
말지니, 그분은 지극히 관대하고 자비로우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이라. 너희의 주께로
(회개하여)돌아서, 그분께 복종할지니라. 형벌이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형벌이 내리고 나면
도울 자 없으리라. 그런 즉 너희의 주께서 너희에게 계시한 최선의 길을 따를 지어다. 형벌이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꾸란, 39:53-54)
이렇게 커다란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보답으로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자라는 게 없으며, 독립 자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보답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에게 보답할 수 없거니와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자비에 값을 매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다만
선량하고,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할 줄 알며, 그분의 권고를 따르고, 그분의 법을 시행하며,
그분의 미덕과 속성들을 올바로 나타내고, 지상에서 그분을 정직하게 대리하고 진실하게
대표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존엄과 명예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를 노예로 삼고자
아니하신다. 두려움과 미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복종시키고자 아니
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지위를 만물 위로 높이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굴욕을
주고자 아니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어떤 규칙과 규정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든 그것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하려는 배려다. 우리를 도와, 서로 화목하고 친절하게, 형제애를 나누며,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삶을 누리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귀어 큰 기쁨을
누리며,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을 찾게 해 주자는 의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분에 대해 말할 것도 많다. 심오한 불가사의와
감동적인 경이로 가득 찬 이 세계는 마치 펼쳐놓은 책과 같아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읽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인간에게 보내 주신 많은
사도들과 계시들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러 오신다. 이러한 사도들과 계시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자연을 깊이 살펴보고 사도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분께 나아가는 정로(正路)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몇 가지 대표적인 꾸란
구절들을 다음에 옮겨, 본 논의를 결론짓기로 한다:
알라께서는 자신 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언하시나니 천사와 지식 있는 자들 역시 그러하도다. -그분은 정의의 수호신이도다. 그분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시로다. (꾸란, 3:18)
알라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수호하시나니, 하늘과 땅의 열쇠들이 그분의 것이로다.
(꾸란, 39:63-64)
알라는 창조를 시작하시고 또 창조를 거듭하시나니, 그분께로 그대가 돌아가리로다.
(꾸란, 30:11)
하늘과 땅에 있는 무엇이나 다 그분의 것이니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는도다. 창조를 시작하시고
또 창조를 거듭하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니, 그분께는 지극히 쉬운 일임이라, 하늘과 땅의 가장
높은 지위가 그분의 것이니, 그분은 강하고 지혜로우시도다.(꾸란, 30:26-27)
이슬람의 의미(意味)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 싸리마 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국외자들은 우리의 종교를 마호멧주의자(마호멧교도) 라고 부른다. 무슬림들은 이런 말의
사용을 거부하며 이에 항의한다. 우리의 신앙이 마호멧주의로 유별(類別)되고, 우리가
마호멧주의자로 불리울 경우, 심히 그릇된 의미가 내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명칭은 이 종교가 일개 인간, 곧 무함맏의 이름을 따서 명명(命名)되고, 이슬람 역시
유태주의(유태교), 힌두주의(힌두교), 마르크스주의 등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주의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잘못된 명칭이 내포하는 또 하나의 오류는 국외자들이
자기네가 마호멧주의자라고 부르는 무슬림들이 실례로 마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함맏을 숭배하거나 믿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하나 더 보면, 마호멧주의자라는 말이 국외자들을 오도하여 그로 하여금
이 종교가 무함맏에 의해 창시되었고, 그 때문에 이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틀린 명칭에 내포된 의미는 모두 심히 잘못된
것이다. 고작해야 오해를 일으킬 뿐인 것이다. 이슬람은 또 하나의 주의(ism)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숭배하지도, 기독교인, 유태인, 힌두인, 마르크스주의자 등이 각자
자기네 지도자를 생각하듯 그를 생각하지도 아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만을 숭배한다.
무함맏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모범적으로 생활할 임무를 하나님께 부여받은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 대한 경건성과 완전성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서 역사
속에 서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사람됨 그리고 미점과 미덕의 면에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경지의 산 증거다.
또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종교적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무함맏에 의해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창시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슬람의 원 창시자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슬람의 창시 년대는 아담시대까지 소급한다. 이슬람은 어떤 형태로든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마지막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교의 올바른 명칭은 이슬람이며, 이를 신봉하는 자들이 무슬림인 것이다.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이슬람, 혹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법에 복종하는 것과
더불어, 결코 개인의 자유의 상실이나 운명론에의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슬람의 올바른 의미와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그분을 가장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가장 사랑이 많고 인간의 안녕에 가장 관심이 많으신 분, 지혜로 충만하고
당신의 피조물을 보살펴 주는 분으로 평한다. 따라서 그분의 뜻은 자비롭고 선한 뜻이며,
그분이 규정하는 법은 무엇이나 인류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문화인들은 자기네 나라 법을 준수할 때, 건전한 시민으로, 그들이 속한 각 사회의 정직한
성원으로 간주된다.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들이 법에 복종함으로써 자유를
잃게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운명론자들이요, 무력한 자들이라고 단 한시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한
뜻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최선의 법인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는 한편, 타인의 권리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책임을 다하는 창조적인 고차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한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줄어들거나, 박탈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차원의 자유가
풍부하게 주어진다. 이러한 순종은 정신을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진리로 가득 채운다.
영혼을 죄와 악에서 해방시켜 선과 청결로 그것을 자극한다. 자아를 허용과 탐욕에서,
질투와 긴장에서,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시킨다. 사이비신들과 저급한 욕망에서 해방시켜,
선과 미덕의 아름다운 지평을 인간 앞에 펼쳐 놓는다.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하고 그분의 유익한 법에 복종하는 것은 평화와 조화를 보존하는 최선의
수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한편으로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사회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연의 제 구성요소들 간에 조화를 창출해
낸다. 이슬람에 의하면, 세상만물, 혹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현상은 하나님께서 정한 법칙에
지배된다. 그러므로 전 물질계가 이슬람의 상태에 있다는 것, 혹은 그것이 무슬림임을 뜻한다.
물질계는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갖지 않는다. 자의적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즉 복종의 법인 창조주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유독 인간에게만 지성과 선택 능력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능과 선택의 자질이 있기에, 하나님의 선의에 복종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라고 권유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길을 택해야만,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게 필연적으로 복종하는 기타 자연의 모든 구성요소 사이에 조화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정로(正路)에서 이탈하여 일관성을 잃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입법자의 노여움과 처벌을 받게 된다.
이슬람이 하나님의 선의에 순종하고, 그분의 유익한 법에 복종하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도들의 메시지의 정수를 이루는 것이므로, 무슬림이라면 무함맏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과 이들의
추종자들 모두가 무슬림이었으며, 그들이 믿는 종교는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세계 종교인 이슬람이었다는 것을 믿는다.(꾸란, 2:128-140, 3:78-85, 17:42-44, 31:22, 42:13)
1972년 12월 4일자 Observer Dispatch(O.D)지에 실린 나의 성명을 여기에 전재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성명은 이제까지 논의된 문제와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왜곡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지를 지적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되풀이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쟁점이 극히 미묘하고 이슬람의 관점을 재론할 필요가
있어서인 만큼, 양해해 주기 바란다.
특종 뉴스 하나(O.D.11월 25일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미처 모르고 있던 대중에게
동정을, 많은 학교 교사와 종교계 인사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의와 양식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자신의 도의적 책임을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커스 일리아슨(Marcus Eliason)이 요르단의 이스라엘 점령지역에서 모슬렘들이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숭배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요즘 세상에, 우리가 사는 이 조그만 세계에서 무슬림들이 이브라힘을 숭배하고 있다는,
생생한 보도에 접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더욱 믿어지지 않는 것은 이 뉴스가
짐작하건대 정통한 소식통에서 흘러나와 알 권리가 있는 대중에게 보고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서양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함맏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무함맏의 종교가 마호멧교로 통하고 그 추종자들이 서양에서 마호멧교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경위야 어떻든 무슬림들이 일종의 신 인 알라를 숭배한다는 것이
서양인들에게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들이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숭배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나 그 외 어떤 인간도 숭배한 사실이 없다. 이들이 항상 믿어 오고 있는
바는, 무함맏은 그 보다 앞서왔던 수많은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간이며, 한
인간으로써 예언자 지위라고 하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인류에게는 최대의
찬사가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맏이 마지막 예언자이긴 하지만 유일한 예언자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낸 영원한 메시지를 보강하여 영원히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지를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많은 예언자들에게 계시하였으니, 이들 예언자 가운데
아브라함, 이스마엘, 이삭, 다윗,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맏(이분들께, 평화가 깃들기를)이
포함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슬림들이 이들을 믿되, 그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우주적 소망과 세계주의적 정향(定向) 때문에 자기들을 마호멧교도라
부르고 자기들의 신앙을 마호멧교라 부르는 것을 불행한 오칭(誤稱)이라고 보아 이를
유감스러워 한다. 거기에 내포된 의미가 불쾌함에서다. 까닭 없이 그런 게 아니다. 무슬림들은
자기들이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이고 영원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종교의 올바른 명칭은 이슬람이며, 그 신봉자는 무슬림이라고 불러야 타당하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본 이슬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함을 뜻한다. 꾸란은 하나님의 뜻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그분의 법을 가장 이롭고
공정한 것을 규정한다.
따라서 이렇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슬람의 윤리적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의 무슬림인 것이다. 꾸란이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믿을 만한 예언자들을 무슬림이라
칭하고, 이들의 종교를 오직 하나의 동일한 명칭 즉 이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의미로서이다. 따라서 무슬림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무함맏의 추종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나머지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추종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슬람의 기본신조(基本信條)
진실하고 충실한 무슬림들은 다음에 제시하는 주요 신조들을 믿는다.
1. 그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은 지고하고 영원한 분이며, 무한하고 강하신 분이며, 자비롭고 자애로운 분이요,
창조주이며, 부양자이시다. 이런 신념이 힘을 발휘하는데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그분만을 바랄 것이 요청된다.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그분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 이러한
신념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공포와 절망, 죄의식과 혼란에서 인간이 해방된다.
독자에게 앞에서 설명한 이슬람의 의미를 살펴 볼 것을 권한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를 모두 믿되, 이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민족마다 하나님께서 보낸 경고자, 혹은 사도가 있었다. 이 사도들은 선을 가르친
위대한 교사였으며, 정의를 수호한 진정한 투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택하여 인류를
가르치고 당신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다. 이들은 역사의 여러 시대를 통하여 보내졌으며,
민족마다 하나 이상의 사도가 있었다. 시대에 따라서는 한 민족에게 두 명 이상의 사도들을
동시에 보내시기도 하였다. 성꾸란은 이들 중 25명의 이름을 들고 받아들인다. 이들은
무함맏을 제외하고는 민족적, 지역적 사도로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지, 그들의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았으며, 이슬람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니, 이는 그것이 하나의 동일한 근원, 즉
하나님에게서 비롯하여, 하나님 정로(正路)로 인류를 인도한다는 한 가지의 동일한 목적에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도들은 예외 없이,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었던 바,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내리고, 이들을 임명하여 어떤 과업을 수행하게 하셨다.
이들 중 무함맏은 최후의 사도로서 예언자 지위의 초석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우리 멋대로 하는 생각이 아니요, 편의상의 신념도 아니다. 다른 모든 이슬람의 신념이
그렇듯이 그것은 근거 있는 논리적 진리인 것이다. 참고로 여기에 위대한 사도 몇 분 곧
노아와 아브라함, 이스마엘과 모세, 예수와 무함맏-이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축복이
있기를-제위의 이름을 언급해 둔다.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 야곱과 그 12지파에게 내려진
계시를 믿나이다. 그리고 모세와 예수에게 내려진 계시와, 주께서 당신의 모든 예언자들에게
내리신 계시를 믿나이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서로 차별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나이다.(꾸란, 2:136, 비교3:84, 4:163-165, 6:84-87)
3. 진실한 무슬림은 제 2조의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경전과 계시를 믿는다.
이들은 인도의 불빛으로서 사도들은 이를 통하여 제각기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의 정로(正路)를
보였다. 꾸란은 특히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예수의 경전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이
계시되기 오래 전에 이런 경전과 계시의 일부가 소실되거나, 왜곡되었으며 또 일부는 망각되고
등한시되거나, 혹은 감추어져 버렸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경전으로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꾸란뿐이다. 무슬림들은 꾸란 이전의 경전과 계시를 믿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 완전한 원본이 어디 있는가? 사해(死海)밑에 아직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두루마리들이 더 발견될 지도 모른다. 또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고고학자들이
성지에서 발굴을 계속하여 찾아낸 것들을 전부,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면 이에 대한 정보를 더
입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다. 완전하고 믿을 수 있는
꾸란이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소실된 부분이 없으며, 더 첨가될리도 없다. 그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신중한 학자나 사상가 가운데 그 누구도 그것이 진본(眞本)이라는데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꾸란의 이런 특성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인 바,
하나님께서는 꾸란을 계시하시어, 친히 책임을 지시고, 그 첨삭과 왜곡을 철저하게 막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꾸란은 여타의 모든 경전의 판단 기준으로서 무슬림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꾸란과 일치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되지만, 꾸란과 어긋나는 것은 다 배제되거나
보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
진실로 우리가 꾸란을 보내었노니, 또 정녕코 이를 보존하리라.
(꾸란, 15:9 비교 2:75-79, 5:13-14,41,45, 6:91, 41:43)
4.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믿는다.
이들은 순수한, 빛나는 영적 존재들이며, 본질적으로 먹고 마시거나 자야 할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육체적 욕망이나 물질적 욕구가 없다. 이들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런 천사들은 많이 있으며 천사마다 어떤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육안으로 천사를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되지 않는 것이 많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의 존재를 믿고 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장소들이 있는가 하면, 기체나 에테르처럼 육안으로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만져 보거나, 맛을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를
믿는 것은 지식이나 진리를 오로지 감각적 지식이나 감각적 인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슬람의 원칙에서 연원한다. (꾸란, 16:49-50, 21:9-20, 제 2조 참고)
5. 진실한 무슬림은 최후 심판일을 믿는다.
이 세상에 언젠가는 종말이 오며, 사자가 부활하여 공정한 최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쌓은 행적, 우리가 가지는 의향, 우리가 하는 거동, 우리가 마음에 품는
생각,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 하나 하나가 모두 헤아려져 정확히 기록, 보존된다. 심판일에 이
모든 것이 심리(審理)될 것이다. 기록이 좋은 사람은 푸짐한 보상을 받고, 하나님의 천국으로
따뜻한 영접을 받을 것이다. 기록이 나쁜 사람은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진짜 성격과 그 정확한 모습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무함맏이
말한 대로라면, 천당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어 본적이 없으며, 마음속에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선행에는 보상이, 악행에는 형벌이 어김없이
따르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 날은 정의의 날이요, 마지막 총결산의 날이다.
인간이 만든 법의 처벌을 면할 수도 있듯이, 약삭 바르기만 하면 죄를 짓고도 벌을 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심판일에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입장을 대변해 줄 변호사도 없이 현장에서 체포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들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보실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대리자들이 일일이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건한 사람이 있어, 선행을 베풀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도, 잠시
어울렸다가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사례나 찬사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날에는 결국 응분의
보상을 받을 것이며 널리 사례를 받게 될 것이다. 절대적 정의가 모두에게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일을 믿는 것이 지금 세계가 당면한 복잡 다단한 많은 문제들을 풀어 주는 종국적인
해답이다.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부도덕한 행위에 있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업에 성공하고 생활이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덕망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지한 노력에 응분의 대가가 따르기는커녕, 피해만 더 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도 대립하는 상황인
것이다. 죄진 사람이 세상법망을 피해 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게다가 더 부유해진다고
한다면 덕망 있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선의 대의를 증진시킬
것인가? 선에는 보상을 하고, 악은 저지시키는 무슨 방법이 있어야만 한다. 비록 지금
세상에서는 이렇게 되고 있지만-주지하는 바와 같이 된다 하더라도 제때에 즉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니, 이날이 바로 심판날이다.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를 용납하고 해악을 묵인하려고 심판일이 있는게 아니다. 착취당하는 자를
회유하거나 착취하는 자를 안심시키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정로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조만간 완전히 구현되리라는 것을 다짐해 두려는
것이다.(예, 전기의 논급 창조)
6. 진실한 무슬림은 초시간적인 하나님의 지식과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무관심하시지 않으며 수수방관 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의 지식과 힘은 수시로 작용하여 그분의 관대한 영역에 질서를 유지하며 그분의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지혜롭고 사랑하는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반드시 선한 동기와 의미심장한 목적을 수반한다. 일단 이런 생각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비록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틀리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굳은 신앙심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굳게 믿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지식이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생각이 개인적인 차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그분의 지식은 무한하고 그분의
계획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운명론자가 되거나 무력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와 인간의 책임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줄 뿐이다. 우리는 날 때부터 유한하고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의 능력과 자유도 그 정도에 있어 유한하고 한정적이다. 우리는 만능이 아니기에
그분은 인자하시게도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으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거나 우리에게 유한한 능력을 주시어, 우리의 유한성 및 책임한계와 균형을 이루게
하셨다. 한편 하나님의 초시간적인 지식과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가
자신의 한정된 능력 범위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권유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거나 계획한대로 되지 않더라도 신앙심을 잃어버린다든지, 정신적 긴장이나
건강을 해치는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한번해서 안되면 다시 해 보아야 하며
그래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엔, 최선을 다 했으니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의 능력과 책임의 한계밖에 있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이런 신조를 가리켜 까다와 와 까다르 를 믿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초시간적인 지식은 사건을 예견하며, 사건은 하나님의
정확한 지식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 꾸란, 18:29, 41:26, 53:33-62, 54:49, 65:3, 76:30-31)
7.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무의미하게 창조하시지 않았으며 인생에는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물리적 활동을 초월하는 웅대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완전한 은둔과 철저한 명상 속에 전 생애를 보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안다는 것이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분의 계율에 복종하고 삶의 곳곳에서 그분의 법을 시행하며, 옳은 일을 하고, 악을
피함으로써 그분의 대의를 세운다는 것을 것이며, 그분과, 우리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공정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삶에서 도피하지 않고 삶을 사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고한 속성을 우리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소박한 언명이 아니며,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언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에 목적이 있고, 인간이 그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창조된 것이라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부과하실 때는,
이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데 필요한 도움도 함께 베풀어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행동방침을 결정할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부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라고 강권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생을
헛되이 보내거나 혹은 자기의 소임을 등한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참조, 꾸란, 21:17-18, 51:56-58, 75:37)
8.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유의 위계 질서 속에서 인간은 특별히 높은 지위를
누린다고 믿는다.
인간이 이처럼 뛰어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행동 능력을 비롯하여 합리적
기능과 영적 열망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위가 뛰어날수록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부왕(副王)의 지위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대리자로 임명하여 활동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어떤 권력과 권위를 가지게 마련이며,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명예와 고결성이 부여된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서의 인간의 지위인
것이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저주받은 종족이 아니다. 훌륭하고 고귀한 업적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된 존엄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서 사도를 택하신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신뢰할 수 있고 유능하며 선의 엄청난 보물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꾸란, 2:30-34, 6:165, 7:11, 17:70-72, 90-95)
9. 진실한 무슬림은 사람은 누구나 다 무슬림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것은 출생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분의 명에
복종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적인 잠재력과 지적인
성향이 있어, 이슬람에 올바로 접하고 그 천성이 향상되어 나가도록 놓아두기만 한다면,
이러한 잠재력과 성향을 통하여 그가 훌륭한 무슬림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슬람을
올바르게 전해 주기만 하면, 쉽사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자손들의 천부의 열망을 비롯하여 윤리적 영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개인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 차원에 걸쳐 건설적이고 건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신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은 인간성을 창조하셨기에 어떻게 해야
인간성이 가장 유익한가를 아시는 하나님의 세계 종교이기 때문이다.
(꾸란, 3:30, 64:1-3, 82:6-8)
10. 진실한 무슬림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에는 죄가 없으며 덕을 유전 받았다고 주장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사람은 마치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 책과 같은 존재다.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이 온전할
경우, 성인의 연령에 달하면 자신의 행위와 의사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는 한 죄에 구속되지 아니하며,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이 두 가지의 자유 곧 죄에 구속되지 아니하는 자유와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유전 받은 죄라는 무거운 짐에서 무슬림의 양심은 해방시켜 준다.
원죄의 교리가 야기하는 불필요한 긴장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제거시켜 주는 것이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과 개개인이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진다는 원칙에 그 바탕을 둔다.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누구도 타인의 죄는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아담이 원죄라는 것을 범했다고 한다면, 거기에 속죄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용서하실 수 없었고, 다른 누구에 의해 그 죄를 대속
시켜야 했다든지, 아담이 용서를 빌지 않았거나, 용서를 빌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속성과 용서의
권능은 물론이려니와, 그분의 자비와 정의에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상식을 철면피하게 무시하는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개념을 무모하게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제 9조 참조, 꾸란, 41:46, 45:15, 53:31-42, 아래의 죄의 개념 참조)
이러한 합리적 생각과 꾸란의 권위를 바탕으로 하여 무슬림은 아담이, 여느 지각 있는
범죄자가 그러하듯이,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고 믿는다. 또
마찬가지 근거에서 자비로우사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용서를 베푸셨다고
무슬림은 믿는다.(꾸란, 2:35-37, 20:117-122)
그러므로 무슬림은 아담을 비롯한 전 인류에게 유죄선고가 내려져 예수가 그 죄를 대속 하러
올 때가지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교리를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 결국 무슬림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전 인류의 죄를 단번에 제거하였다는 극적인 이야기를 환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가 그릇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 둘 게 있다. 무슬림은 예수가 그 적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형의 교리는 그
바탕에 있어 그것이 인간의 논리와 존엄에 어긋나는 만큼이나 무슬림의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슬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높은 지위가 깍아내려진다든지,
하나님의 뛰어난 예언자로서 예수를 받드는 무슬림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를 배척함으로써 무슬림은 보다 더한 경애와 존경으로써 예수를
받아들이며 예수께서 원래 가져온 메시지를 이슬람의 불가결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무슬림이 되려면 하나님의 예언자 모두를 차별 없이 받아 드리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 둔다. 이슬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일반적 지위는
뒷장에 가서 더 논의될 것이다.
11. 진실한 무슬림은 인간은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구원을 얻으려면 신앙과 행동, 신념과 실천이 겸비되어야 함을 뜻한다.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없는 행동만큼이나 불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고 그 신념이 현실화되어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본조는 이슬람이 여타 신조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말뿐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진실한 신자라면 신앙의 실천적 요건에 관한 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본조는 지적한다. 또한 그 누구도 타인을 대신하거나 그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예, 꾸란, 10:9-10, 18:30, 103:1-3 참조)
12.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든 먼저 그에게 올바른 길을 보이지 않고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많은 사도와 계시를 보내시고, 인도를 베풀고 경고를 발하기 전에는
징벌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소이(所以)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나 사도에
접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건전한 상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데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알면서도 고의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그분의 정로(正路)에서 이탈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해서 처벌될 것이다.
(꾸란, 4:165, 5:16 & 21, 17:15)
이 점이 무슬림 각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는 이슬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하고 이슬람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도 이슬람을 애써 찾는다면 진실해질 수 있고
훌륭한 무슬림이 될 수도 있다. 알지도 못하고,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무슬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이슬람은 이런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무슬림들이, 이들을 이슬람으로 초대하여, 이슬람의 참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에게 말로써 이슬람을
전파할 뿐 아니라-더욱 중요한 것으로서-생활 속에 이슬람을 액면 그대로 실현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예, 꾸란, 3:104, 16:125)
13. 진실한 무슬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성에는 악보다는 선이, 절망적으로 실패할
가능성보다는 선도에 성공할 가망성이 더 많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신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과업을 부과하시고, 사도들에게 그를 인도하기 위한
계시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날 때부터 가망 없는 존재이고, 선도의 여지가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어떻게 절대적인 지혜를 가진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에게 책임을
과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권고를 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이
허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살피고
관심을 쏟고 계시다는 사실이 인간은 무력하거나 가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식별하고
선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굳건하고 인간을
합당하게 신뢰한다면, 정녕 우리 세대에서도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꾸란의 관련 구절을 면밀히 연구하고 그 뜻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14. 진실한 무슬림은 신앙이란, 이치를 따져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완전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신앙이 행동을 자극하고, 신앙과 행동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기만이나
강요도 당함이 없이, 확고한 신념 위에 신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문의
전통 때문에 무슬림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나 강요를 받거나 맹목적으로 모방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무슬림으로 보시지 않는다.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충분한
근거를 가진 신념 위에 자신의 신앙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심이 남아
있거나 반신반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앙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연의 펼쳐진 책 속을 살펴보고, 추리력을 발휘하고, 꾸란의 가르침을 음미해
보라고 권유하신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를 찾을 때까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능력과 성의에 부족함이 없다면 틀림없이 그러한 진리를 찾게 될
것이다. (예, 꾸란, 2:170, 43:22-24 참조)
이슬람이 건전한 확신을 요구하고 맹목적 모방에 반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슬람은
진실하고 진지한 사상가로 정평이 나 있는 모두에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남김 없이
발휘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믿을 만한 종교 경전만을 의지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러한 경전은 그 자체로서 충분할 뿐 아니라 그로서는 여기에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요는 신앙이 건전한 확신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말끔히 가셔 버리지 않는 한 누구든지 진정한 무슬림으로 자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전한 확신과 선택의 자유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경우에만 이슬람이 완전한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그것이 강요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요당한 신앙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거나, 자유롭고 건전한 확신에서 비롯되지 않는 이슬람은
진정한 이슬람으로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고로, 무슬림
국가에서 많은 비무슬림 집단이 완전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무슬림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슬람이 종교의 강요를 금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내부에서 비쳐 나와야 하는 빛이다. 선택의 자유가 책임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최선을 다해서 이들에게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야 한다.
건전한 바탕 위에 신앙을 확립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영적인 접근법이 있는 바,
이것은 주로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에 근거하는 것이다. 또한 합리적 접근법이 있는데,
이 방법에 의하면 결국, 지고한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 유도된다. 이렇다고 영적인 접근법에
확실한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합리적 접근법이 영성을 고취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양자는 상호 보완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 지식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면, 합리적 접근법이나 영적인 접근법 혹은
두 가지 방법에 다 의지할 수 있으며, 자신이 내린 결론의 타당성에 자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할 능력이 없거나, 자기의 추리력에 자신이 없으면 영적인 접근법에만
국한해도, 믿을 만한 종교원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에 만족할 수 있다. 요컨대, 영적인
접근법에 의하든, 합리적 접근법에 의하든, 혹은 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하든 결국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모든 길은 그 중요성에 차이가 없으며 이슬람에서 똑같이
취급되고 있다. 올바른 경로만 밟는다면 같은 목적, 즉 지고한 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지게
된다. (꾸란, 5:16-17, 12:109, 18:30, 56:80)
15. 진실한 무슬림은 꾸란이 천사 가브리엘을 매개하여 무함맏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꾸란은 하나님으로부터 때에 따라 조금씩 계시되었으니, 이는 어떤 의문에 답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논쟁을 종결지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영원한 행복으로 인간을 이끄는 최선의
길잡이가 되기 위함이었다. 꾸란의 글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속에서 울리는
소리 하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의 반향인 것이다. 꾸란은 이슬람 제일의 가장 믿을 만한
원전이다. 이것이 아랍어로 계시되었던 바, 지금도 여전히 완전한 아랍어 원전으로 되어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관심을 두시어 꾸란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언제
어디서나 인류에게 최선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시며, 그 왜곡을 방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비교, 꾸란, 4:82, 15:9, 17:9, 41:41-44, 42:7,52-52)
꾸란이 그 문제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심지어 점하나 바뀌지 않고 완전한 원전으로 보존된
역사상 유일한 경전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전하셨음을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꾸란을 기록하고, 그 장절을 짜고, 그 본문을 보존한 역사는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진지한 학자들의 마음속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어떤
신앙을 가진 학자-자신의 지식과 정직성을 존중하는-든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온 인류가 나선다 해도 꾸란의 장 하나도 흉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무함맏이 이룬
불멸의 기적이다.(꾸란, 2:22-24, 11:13-14, 17:88-89)
16. 진실한 무슬림은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은 확연히 구분된다고 믿는다.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인 반면, 무함맏의 전승은 꾸란의 실천적 해석이다. 꾸란은 받은 그대로
전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함맏이 맡은 역할이었다. 그가
내린 해석과 그 실천이 소위 무함맏의 관습(전통)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이 이슬람
제이의 원전인 바, 제일의 원전이요, 판단의 기준인 꾸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관습(전통)과 꾸란 사이에 조금이라도 모순되거나 불일치 하는 점이 있으면, 무슬림은
꾸란만을 고수하고, 꾸란 이외의 것을 전부 의문시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무함맏의 진짜 관습이 꾸란에 어긋나거나 상반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러두기
이제까지 이슬람의 주요 신조들을 논하면서, 일부러 전통적인 방법에 따르지 않았다. 이 주요
신조들을 5개조 내지 6개조에 국한시키지 않고, 가급적 많은 원칙들을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술한 모든 신조는 꾸란의 가르침과 무함맏의 관습(전통)에 근거하여 유도해 낸
것임을 여기에 지적해 둔다. 꾸란의 구절을 더 많이 인용하고 관습을 많이 들어서 본 신조들의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지면 관계상 이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꾸란과 무함맏의 전승을
참고로 하여 자세히 연구해 볼 수 있다.
또한 운명 예정설이니 숙명론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등의 서구식 술어와 전문용어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 혼란과 전문성을 피하고 싶어서 일부러 이렇게 했다. 아랍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용어는 대부분의 경우, 이를 이슬람에 적용시키면 오해의 소지를 낳을 뿐
아니라 그릇된 인상을 주게 된다. 따라서 외래 종교용어를 가져다가 이슬람에 대입시키게 되면
본서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또 외래 종교용어를 본서에서 사용할 경우, 이슬람의
실상을 밝히자면 많은 단서와 주석의 첨가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면을 늘려야
하는데 형편상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평이하고 단순한 말로 설명을
가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본서의 설명은 이에 준할 것이다.
제 2장 이슬람의 기본개념 신앙(이만)의 개념 참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고 무함맏을 그분의
마지막 사도로 믿는다고 고백하면 무슬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완전한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슬람에서의 신앙이란 행복한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행복은 적극적 행동과 건설적 개념 그리고 역동하는 효과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다.
성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전통)이 이러한 요구 수단을 규정하고 의미 있는 신앙을 구축하는
기준을 확립한다.
따라서 진실한 신자는 :
1.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과 꾸란으로 완결되는 경전들과 무함맏을 마지막으로 하는 사도들과
최후 심판일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식과 지혜를 믿는다.
2.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확고부동하게 신뢰한다.
3.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부와 생명과 건강과 지식과 경험 등을 하나님을 위해 베푼다.
4. 주집회(週集會)와 일상 예배를 제 때에 준행(準行)한다.
5. 종교세(자선 혹은 자카)를 정당한 수혜자(개인이나 기관)에게 지불한다. 종교세의 최소한도는
연 순수입 혹은 투자한 경우 증권 총가액에서 모든 비용과 채무를 공제한 나머지 2.5%이다.
6. 의와 선을 명하고 불의와 악에 대하여는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 마음대로 맞서
싸운다.
7.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 무함맏에게 복종하여, 꾸란이 낭송되면 신앙심이 고조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들리면 마음이 겸손해짐을 느낀다.
8.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극진히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동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9. 원근(遠近)의 이웃을 사랑하고, 손님 특히 낯선 사람에게 진심 어린 친절을 베푼다.
10. 진실을 말하고, 건전한 대화에 끼거나, 아니면 말을 삼간다.
분명히 신앙의 이런 의미에 의한다면, 이슬람은 생활의 모든 측면으로 깊숙이 그리고
건설적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에 의하면 진실한 신앙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운명과 개인적, 사회적 행동 그리고 정치행위와 재정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다음에 몇 가지 실례를 들어 꾸란이 진실한 신자를 가리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기로 한다.
꾸란에는 이런 종류의 언급이 많다:
진실한 신자는 이러하니 곧 하나님 얘기가 나오면 복종심이 우러나오고, 마음이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계시가 낭송되면 신앙심이 고조되고 굳세어 지느니라. 또 주를 신뢰하고 (명을 받은
대로)예배를 준행하며, 우리가 부여해 준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베푸나니 이들이야말로 진실한
신자이니라.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높은 명예와 풍성한 마련이 있느니라. (꾸란8:2-4)
진실한 신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서로를 보호해 주는 (결연한)친구들이니라. 저들은 의를
명하고 악을 금하며 예배를 준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베풀 것을 베풀며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에게 복종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니 진실로 하나님은 강하고
지혜로우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남녀 신자 모두에게 아래로 강이 흐르는 동산의 거처와 영원한
행복의 동산 속의 아름다운 저택을 약속하시느라. 그러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의 선한
기뻐하심이니, 그것이야말로 지고한 행복이니라(꾸란, 9:71-72)
진실한 신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무함맏)를 믿되, 돌아서서 의심하지 않고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나니 이러한 사람이라야 진실하다 할 수 있느니라
(꾸란, 49:15)
이러한 꾸란의 언급 말고도 여기에 관련된 무함맏의 전승도 적지 않다. 무함맏의 말씀을 예로
들어본다. 너희 중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동료신자에게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없느니라 세 가지 성품이 건전한 신앙의 징표를 이루는데, 이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만이 신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1)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이며
(2)같은 인간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며
(3)마치 불 속에 던져지기라도 하듯 발분(發憤)하여 불신으로 돌아서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최후 심판일을 믿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금지되며, 손님 특히 낯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진실을 말하든지 아니면 말을 삼가야 한다. 위의 인용 예와 유사한
꾸란의 구절과 관습은 많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은 아랍어 원전에 나오는 꾸란과 무함맏의
말씀 그대로는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학식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 해석을 내린다 하더라도, 다른 언어로 꾸란의 영적인 힘과 마음을 끄는 활력은
결코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꾸란은-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흉내 낼 수 없으며 인간의
상상력과 재현능력을 초월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까지 무함맏의 관습도 꾸란과 마찬가지다. 꾸란 다음으로 무함맏의
말씀은 가장 결정적이고 웅변적이기 때문이다.
정의(正義:비르)의 개념
이슬람은 항상 피상적 개념과 겉치레만의 의식을 경계하며, 무미건조한 정식절차와 효력 없는
신념을 경계한다. 꾸란의 대표적인 한 구절에서 하나님은 정의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신다.
(예배 중에)고개를 동쪽이나 서쪽으로 돌리는 것은 의가 아니니라. 의는 곧 이것이니 하나님과
마지막 날과 천사들과 경전과 사도들을 믿는 것이요, 너의 재물-비록 아끼는 것이라 하더라도
-을 친척과 고아와 궁핍한 자와 나그네와 간청하는 사람과 노예의 속전(贖錢)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며 예배를 착실히 보고 때맞추어 자선을 하는 것이요, 계약을 이행하며, 고통과 역경
속에서 그리고 공포가 밀려와도 내내 동요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사람이
진실하고 하나님을 염원하는 사람이니라(꾸란, 2:177)
여기 인용한 꾸란 구절에 의로운 사람이 아름답고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정의로운 사람은 모두 유익한 규칙에 복종하고, 진지한 동기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하여 동료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다음에 4개 강령을 제시한다 :
(1) 우리의 신앙은 진실하고 진지해야 하며,
(2) 같은 인간에게 자선과 친절을 베풀어 우리의 신앙심을 보일 각오가 서 있어야 하며,
(3) 자선단체와 사회기관을 후원하여 선량한 시민이 되어야 하며
(4) 어떤 상황에 처해서는 태연자약해야 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정의는 결코 실속 없는 말만으로는 서지 않는다. 정의는 굳센 신앙과 실천
위에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생활의 내면과 외면으로,
공사의 모든 문제로 확대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정의와 원칙이 서게 되면, 개인에겐 항상 평온이 깃들고, 사회는 각 방면에서 안정을
누리며 국가는 결속되고 국제 사회에는 희망과 조화가 넘칠 것이다.
사람들의 개념에 맞게 정의를 실천한다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평화롭고 대의명분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마음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피지배자의 깊은 관심을 덜고 착취당하는 자의 고통을 줄이며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의 궁핍한
처지를 돌보는 것보다 더 인도적인 일은 무엇인가
약속을 이행하고 양심을 깨끗이 보존하며, 성실성을 지키는 것보다 더 정연(整然)하고 정직한
일은 무엇인가?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어김없이 행하는 것보다
더 정신적인 기쁨을 주는 일이 또 있겠는가
경건(敬虔:따끄와)의 개념
신앙과 정의에 대해 말한 내용이 대개는 경건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건 역시 편의상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입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이보다 한층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꾸란이 우리의 최선의 전거(典據)인 바, 꾸란은 경건한 사람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바)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예배에 철저하며 우리가
마련해 준 것을 베풀면서 무함맏에게 보낸 계시와 네 이전에 보낸 계시를 믿고, (마음속으로)
내세를 확신하느니라, 이들은 주님의 올바른 인도를 따르나니 바로 이들이 번영을 누릴
자들이니라.(꾸란, 2:3-5)
경건한 사람은 유복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하나님을 위하여 아낌없이)베풀며 분노를 참고
(모든)사람을 용서하여 주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사람과-부끄러운 일을 했거나
스스로 그 영혼을 욕되게 했을지라도-진정으로 하나님을 염원하고, 용서를 빌며-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으리요 결코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자기가 저지른 (악)을 고의로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심이라, 이들에게 주께서는 용서로 보상하시며, 아래에
강이 흐르는 동산을 상으로 주어 영원히 거하게 하느니라.
힘써 (노력하는)사람들에게 정녕 훌륭한 보상이 아닌가! (꾸란, 3:134-136)
여기 인용한 꾸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경건하려면 하나님과 생의 진리를 파악함으로써
지성을 선용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베풀어줌으로써 부를 선용하며,
예배를 준행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적신체적 능력을 선용해야 한다.
경건은 또한 분노와 감정에 대한 고도한 자제력과 용서하고 인내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과
그리고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께 돌아서게 해야겠다는 의지적 행동을 요청한다. 경건하다는
것은 곧 올바르고 훌륭한 확신을 보지(保持)하고 결단력과 인격을 갖추며 의지와 용기를
겸비한 사람이 됨을 뜻하며 특히 하나님의 사람이 됨을 뜻한다. 경건과 정의와 의미 있는
신앙은 상호관련 되어 하나의 길로 통하게 된다.
즉 이들 모두는 이슬람으로 인도하여 진정한 무슬림을 만들어 낸다.
예언자 지위의 개념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민족마다 하나 이상의 예언자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예언자 모두는 훌륭한 인격과
드높은 명예(위엄)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택하고 예비시켜 당신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게 하셨다. 그들의 정직성과 진실성 그리고 지성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이들에게는 과오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인간이었기에 인간사를 해결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본의
아니게 실책을 범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의 개인적 판단이 반드시 옳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강한
유대가 있음을 명백히 시현(示顯)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개선의 의지가 있고, 선한 기질이
다분히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언자 지위를 둔 목적은 인간이 이미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것을 확인시키고, 그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데 있다. 또한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하나님의 정로를 찾고, 의를 행하고 악을 피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언자 지위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그 피조물을 올바른 신념과 행동으로
이끌고자 하는 그 분의 의지를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그것은 또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부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올바른
인도를 베풀고, 다음에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를 발하고 있는 데도 사람이 자기 악행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의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인간이 주님께 책임을 질만한
가치와 능력에 완전히 부합한다. 예언자직의 근원과 모든 예언자들의 후원자는 하나로서
동일하니 곧 하나님이 이에 해당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한
가르침을 알게 하여 진리와 선을 확립하고 도움을 베풀어, 자기 존재의 진정한 목적을
실현하게 하며, 목적이 있는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 이들 예언자의 목적이다. 무슬림이
예언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이들의 가르침을 일관성 있고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바탕에서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무슬림은 하나님의 모든 경전을 믿고 앞서 말한 모든 예언자들을 받아들인다.
생명(生命))의 개념 생명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찬란한 전시이며 그분의 기술과 능력의
생생한 반영이다. 그분은 생명의 수여자요, 창조자이시다. 그 무엇도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은
없으며 그 누구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창조해 내지 못한다. 생명은 귀하고 소중한 재산이며,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쪽을 택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서서히 자신을 죽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들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다시 살아
날려고 애쓰며 재생의 기회를 잡고 싶어한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므로,
그것을 도로 찾을 정당한 권리를 가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살생의 권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이 자살과 자멸을 어떤 경우에도 금하며 귀중한 영혼이 떠날 때,
인내와 강한 신앙을 권하는 소이(所以)이다. 살인자가 처형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권리와
그 분의 법에 따라 그의 생명이 제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면서 공연히
독특한 자질과 뛰어난 능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며, 부질없이 어떤 의무를 부과한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의 목적을 이루고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창조적 삶의 기술을 터득하여 삶의 진미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신탁물이며 인간은 그 수탁자로서 하나님을 염두해 두고 그 분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여 그 신탁물을 정직하고 요령 있게 다루어야 한다. 생명은 어떤 지점에서
출발하여 어떤 목적에서 끝나는 여행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생명은 일종의 과도계단(過渡階段)
이며 내세의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인간은 이 여행을 하는 여행자이며, 오직 내세의
생명에 이로운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순간 순간을 영원을 향하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생명을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로 삼아 될 수 있는 한 생을 가장 보람있게 보내야 하는 것이다.
떠날 때가 오면 단 한 시도 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명이 다하면 때는 이미 늦어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늘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을 가장 보람있게 보낸다 함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며,
그 생이 미래의 영생에 이르는 안전한 통로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하므로 이슬람은 규정과 원칙의 완전한 체계를 세워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해 주고 취할 것과 버릴 것 그리고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 등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그분께로 돌아갈 것은 뻔하다.
예언자 무함맏은 현명하게도 자신의 포괄적인 언명 가운데 하나에서, 사람에게 스스로 이생의
객이요, 세상을 스쳐 가는 나그네로 하라고 충고한다.
종교의 개념
종교는 역사의 전개 속에서 악용되었으며 오해를 받아 왔다. 종교가 착취와 압제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편견과 박해의 구실이 되는가 하면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권력과 지배의 근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부당한 전쟁이 펼쳐졌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억압되었으며 과학이 박해를 당하고 개인의 자아 완성의 권리가 박탈되는가 하면 개인의
존엄과 명예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또 종교라는 미명하에 인류에게 불의를 강요하여 종교
자체가 많은 타격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현실이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종교 본연의 기능이며 종교를 다루는올바른 방법인가
이것이 종교의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연코 “아니다”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저마다 유일한 참종교라고 자처한다. 종교마다 사람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로 모순하여,
한 분이신 자애로운 세계의 하나님 아래 인류를 범세계적인 형제애로 결속시키기는커녕,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고 종교에 대한 거센 반발만을 초래하였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이런 상황을 주시해 본 사람은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이며, 필시 종교라면 어디서나 다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최광의로 본 이슬람의 종교의 개념은 독특하다. 참종교는 인류를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성과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고금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개념은 한가지 결론을 유도하니 곧 한 분이신
같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하여 항존(恒存)하는 미해결의 인간 문제를 처리하는 참종교는 오직
하나라는 것이다. 이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예언자 무함맏만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는 달리
무함맏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도 모두 이슬람을 가르쳤으며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하여
예수와 나머지 예언자들의 진실한 추종자들은 무슬림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하나님의 범세계적인 참종교로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한 분으로 변함없으며, 시간과 공간, 종족과 언어 그리고 그 밖에 어떤 다른 요인이
작용하더라도 이에 관계없이 인간성과 인간의 기본 욕구가 근본적으로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이슬람의 개념은, 종교는 영적, 지적, 필요물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단언한다. 인간을 미혹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도하려는
것이며 인간을 격하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성을 향상시키려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박탈하고 그에게 짐을 지우거나 그 자질을 억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고와 올바른 행동의 무진장한 보물을 그 앞에 펼쳐 보이려는 것이다. 좁은 테두리에 그를
가두려 함이 아니요, 진리와 선의 광활한 지평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참종교는 인간에게 하나님과 자기자신과 세계를 알게 하는데 그 참 뜻이 있는 것이다.
종교의 기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의미를 풀어 보면 이렇다.
참종교의 목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가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적당한 육체적 요구를
만족시켜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심리적 매듭과 강박관념을 풀어 주며 본능과
열망을 순화시키고 욕망과 인생 행로로 전체를 훈련한다. 세계 최상의 진리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켜 준다.
인간에게 생명의 신비와 인간성과 이들을 다루는 방법과 선과 악 그리고 의와 불의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다. 악을 제거하여 영혼을 정좌시키며 마음에서 의혹을 말끔히 가시게
하며 인격을 강화시키고 인간의 사고와 신념을 바로 잡아 준다.
이 모든 것의 실현은 사람이 종교가 제시하는 정신적 의무와 육체적 규정을 충실히 지킬 때만
가능하다.
한편 참종교는 인간을 교육하고 단련시켜, 희망과 인내심을 가지게 하며, 진실과 정직을
지키게 하고 의와 선을 사랑하게 하며, 용기와 참을성을 배양시킨다. 이 모든 것이 우수한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또한 참종교는 두려움과 영적인 피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며, 하나님의 도움과 끊을 수 없는 유대를 인간에게 보장해 준다. 인간에게 평온과
안정을 주고 그의 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참종교가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이슬람에서의 종교의 개념이다. 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종교는 어느 것이든 이슬람이 아니다. 아니 아예 종교도 아니다.
또 종교로부터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심도 하나님을 염원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다음에 제시하는 성 꾸란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옳다: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종교는 이슬람이니 성서의 백성들도 지식이 저들에게 이른
이후로는 서로 시기하지 않는 한 거기에 반대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표징을
부인한다면, 하나님께서 속히 책임을 물으시리라, (꾸란, 3:19)
그리고 누구든 이슬람 외에 다른 종교를 원한다면, 그것이 결코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니와 내세에서는 (모든 영적 유익을)상실한 자들의 대열에 서게 되리라 (꾸란, 3:85)
죄의 개념
인간 존재를 괴롭히는 근본 문제 중의 하나는 세상의 죄와 악이다. 에덴 동산에서 살던 아담과
이브에게서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 사건의 결과 타락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인류는 죄와 치욕의 낙인이 찍히고 혼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 전반에 대해 이슬람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독특하다. 우리가 아는 어떤 종교도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꾸란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에덴 동산에
거하며, 에덴에서 나는 것을 마음껏 즐겼으며, 풍부한 양식과 안락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해악과 불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특정한 나무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사탄이 간계로 이들을 유혹하여 이들이 누리던 즐거운 상태를 앗아
가 버렸다. 에덴에서 쫓겨난 이들은 땅으로 유배당하여,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죽어
마침내는 땅에서 다시 일으켜져 최후의 심판을 받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깨닫고 수치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셨다. (꾸란 2:35-38, 7:19-25, 20:117-123)
이 상징적 사건이 계시하고 있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은 인간이 낙원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하며 미흡한 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처럼 죄를 짖거나
과오를 범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인간의 마음이 무디어져 영적인 개선이 안 되고, 도덕적
성장이 정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는 충분한 감수성이 있어 자기의 죄와 결점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며 누구에게 인도를 구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더 한층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진지한 요청에
언제라도 기꺼이 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워낙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시기에
용서하시되 여지를 남기지 않으며 자비를 베푸시되 빠짐이 없게 하신다.(꾸란, 7:156)
이 사건이 마지막으로 계시하는 한 가지는 성(性)에 의한 차별과 유전죄라는 것이 이슬람의
정신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원죄 혹은 유전죄의 개념은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 꾸란 (30:30)과 예언자에 의하면 인간은 피뜨르, 혹은 순수의 자연상태, 곧 하나님의 뜻과
법에 복종한다는 의미의 이슬람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사람이 출생 후에 어떻게 되든 그것은
외부의 영향을 받고 여러 요인이 간섭해서 생긴 결과이다. 현대적 사고 방식을 빌어 말한다면
인간성이 순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화 과정이 인성의 형성과 도덕성의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고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부인되거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전죄 혹은 본능적 죄의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定議)에 의하면
공정하고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완전하시다. 그 분은 자신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 (꾸란, 15:29, 32:9, 66:12)
하나님은 절대적인 무한의 선이시며, 그분의 영은 절대로 완전한 것이므로, 또한 인간은
창조되면서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에게는 적어도 창조주의 이러한 선한 영의
일부나마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선한 기질과 영적 열망이 설명된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숭배하도록 창조하셨지, 그분과 대등한 경쟁자로,
그분의 선의 완전한 화신, 절대적 권화(權化)가 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한 힘으로 아무리 선하고 완전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과 완전성에는 미칠 수 없음을
뜻한다. 과연 인간에게 이런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한정되어
있으며 인간의 유한성과 능력과 책임에 맞춰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하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과오를 범한다는 것이 곧 죄에 상당하거나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적어도 이슬람에서는 그렇다-인간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결점의 제물이 되도록 도움 없이 방치해 두시지는 않는다. 인간은 계시에
의해 권능을 받고 이성의 후원을 받으며, 선택의 자유에 의해 강화되고 상대적 완전성을
추구성취할 수 있는 갖가지의 사회적, 심리적 성향의 인도를 받는다. 선과 악의 힘 사이에
작용하는 부단한 인력(引力), 곧 삶의 투쟁이다. 이러한 인력(引力)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을
기대하고 이상을 추구하며 업적을 이루고 역할을 수정해 나가게 한다. 생을 단조롭게
정체시키는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력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영적, 도덕적 승리를 쟁취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슬람의 윤리적 범주에 의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거나 잘못을 범하는 것은 죄에 들지
않는다. 이것은 유한하고 한정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성의 일부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는데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다.
죄는 행위와 사고와 의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1) 고의적이며,
(2) 하나님의 명백한 법을 무시하며
(3) 하나님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며
(4) 영혼과 육체에 유해하며,
(5) 되풀이 저질러지며
(6) 정상 상태에서는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범죄의 구성요건인 바, 타고나거나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범죄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경건과 선의 능력보다 더
크지는 않다. 선의 잠재력이 아니라 죄의 잠재력을 행사하게 되면, 자신의 순수성에 새로운
외부적 요인이 더해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오직 이렇게 더해진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이슬람에서는 크고 작은 죄들이 있어 하나님에 대한 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범하는 죄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죄는 하나만 빼놓고, 죄를 진 사람이 진지하게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꾸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녕코 쉬르크의
죄(다신론, 범신론, 삼위일체설등)는 용서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나머지 다른 죄는
용서하시며 당신이 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하여 주신다. 그러나 다신론자와 무신론자도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면 그의 죄는 용서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죄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응분의 보상과 처벌, 혹은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이루어져야 용서가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죄는 생득적(生得的)인 것이 아니며, 어쩌다 저질러지는 것이지 천성적으로
몸에 밴 게 아니며 피할 수 있는 것이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법을
의식하면서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이 곧 죄인 것이다. 타고난 본능이나 억제가 절대 불가능한
욕구와 제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어떤 일을 저지를 것이 분명하다면 이러한 행위는
이슬람에서는 죄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의미해지고 인간의 책임은
무위로 끝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실현성이 있고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 있는
것만을 요구하신다.
자유의 개념
자유는 하나의 개념과 가치로서 많은 개인과 집단과 민족에게 그 권리가 부인되었다. 오해와
악용의 사례도 자주 있었다. 사실은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어느 곳이나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사회가 일단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어느 정도의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슬람은 자유를 가르치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비무슬림은 물론 무슬림에게도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자유 개념은 각계 각층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자발적 활동에 적용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피뜨라 혹은 순수한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게 태어난다. 이것은 예속과
죄와 유전적 열등함과 인습적 장애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태어남을 뜻한다. 인간의 자유권은
그가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모독하지 않는 한 신성하다.
이슬람이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명한 생활지침 속에는 심오한 지적 노력과
부단히 지켜야 할 영적 관습과 구속력 있는 도덕적 원칙 그리고 음식에 관한 금기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 이런 생활지침을 독실하게 따른다면, 자유와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게 될 것이다. 신앙과 양심과 숭배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꾸란의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
종교를 강요하지 말지니라, 진리는 오류와 뚜렷이 구별되나니, 누구든지 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가장 튼튼한 끈을 잡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들으심이라.(꾸란, 2:256)
이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종교란 신념과 의지와 참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힘으로 강제하면 무의미해진다. 더욱이 이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회의 형태로 제시하며, 사람이 스스로 길을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의 자유를 준다.
꾸란의 말씀은 이러하다 :
진리는 너의 주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니, 믿기 원하면 믿게 하고 믿기를 원치 않으면
믿지 않게 버려 두라.(꾸란, 18:29)
이슬람의 자유개념은 신조의 하나이며 최고의 창조주께서 내린 엄한 명령이다. 이 자유개념은
다음의 제 기본원칙 위에 세워진다.
첫째, 인간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한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사람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며, 그 자신만이 자기가 이룬 업적을
거두어들일 권리를 가진다.
셋째, 인간에게는 충분한 영적 인도가 베풀어지며, 책임을 지고 건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합리적 자질이 부여된다.
이러한 것이 이슬람의 자유개념의 기초요, 이슬람의 자유의 가치다. 그것은 천부인권이요
영적인 특권이며 도덕적 특권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의무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자유
개념의 체계 속에는 종교적 박해와 계급 투쟁 혹은 인종적 편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
자유권은 그의 생존권만큼이나 신성하다. 자유는 생명 그 자체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평등의 개념
이슬람의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하나는 평등의 원칙이다. 형평의 원칙이라는 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평등의 가치를 획일성이나 스테레오 타이프로 오인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만 반드시 똑같지 만은 않다는
것이 이슬람의 가르침이다.
능력, 잠재력, 의욕 그리고 재산 등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자체만으로
한 사람이나 종족이 다른 사람이나 종족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혈족, 피부색, 가지고 있는 재산의 양, 그리고 누리는 특권의 정도는 하나님에 관한 한,
개인의 인격과 사람됨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영적
우수성의 기준이다. 꾸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오 인류여! 진실로 우리가 너희를 한 쌍의 남자와 여자에게서 창조하여 너희로 민족과 부족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서로 알게 하려함이라. 정녕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는 가장 의로운 자이니라.(꾸란, 49:13)
인종과 피부색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우연적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됨의 진정한 크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평등의 가치는 단순 헌법상의
권리나 신사협정 혹은 생색내는 자선으로 실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슬림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고수해야 하는 신조다. 이러한 이슬람의 평등의 가치 토대는
이슬람의 체계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평등의 가치는 다음의 기본 원칙에서 나온다.
(1) 모든 사람은 만유의 최고 주이신, 유일한 영원불변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2) 모든 사람은 인류로서 같은 종(種)에 속하며 똑같이 한 부모,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다.
(3)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게 공정하시고 친절하시다. 그분은 특정 종족이나 연령
혹은 종교에 치우치시지 않는다. 우주 전체가 그분의 지배 영역이며 모든 사람이 그분의
피조물이다.
(4)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온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며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5) 하나님은 각 사람들 그 자신의 공과를 근거로 그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
(6)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누릴 권리를 부여하신다.
이러한 것은 이슬람의 평등의 가치 배후에 있는 원칙의 일부다. 이러한 개념을 충분히
구체화시키게 되면 편견이나 박해의 여지가 없어질 것이다. 또 이런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면, 압박이나 억압의 소지가 사라질 것이다. 선민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식의 개념,
특권 받은 민족이냐 저주받은 민족이냐 하는 말들 그리고 사회적 특권층이나 이등 시민이니
하는 표현들이 모두 의미를 잃고 사장되어 버릴 것이다.
형제애의 개념
이슬람의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기본 요소는 인간은 모두 한 형제라는 형제애의
가치다. 이 가치 역시 자유와 평등을 다룰 때 논한 것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한다. 전술한 바,
이러한 제 원칙뿐 아니라 이슬람의 형제애는 숭배 받으시는 분인 하나님의 유일성과 보편성
숭배자인 인류의 통일성 그리고 숭배의 매개체인 종교의 통일성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에
기초한다. 무슬림에게 있어 하나님은 유일하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분이시다. 그 분은 만인의
창조주요 만인의 부양자이시며, 만인의 재판관이고 만인의 주이시다. 사회적 지위와 민족적
우수성 그리고 어느 인종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그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분 앞에 만인은 평등하며 서로의 형제이다.
무슬림은 창조의 근원과 원래의 조상과 최종 운명이 같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통일성을 믿는다.
창조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다. 첫 조상은 하나로서 같으니 곧 아담과 이브이다. 모든 인간은
이 첫 조상의 후손으로서 같은 부모를 가진다. 무슬림은 최종운명이, 모든 인간이 결국은
돌아가야 할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하나님의 종교의 통일성을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교를 한정시키거나
특정 민족이나 종족 혹은 연령을 편애하시지 않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을 올바로 해석하면
우월한 체한다든지 주제를 모르고 남을 배척하는 일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신 속에 자리잡을 때 사람은 모두 한 형제라는 형제애의 개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그 형제애의 바탕이 튼튼하게 될 것이다. 무슬림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인류의 통일성
그리고 종교의 통일성을 믿기에 하나님의 모든 사도와 계시를 차별 없이 믿는다.
3) 평화의 개념
이슬람의 몇 가지 기본적 사항을 살펴보게 되면, 이슬람이 평화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평화와 이슬람은 같은 어근에서 파생하며 동의어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명칭 가운데 하나가 평화다. 모든 무슬림이 일상 예배를 끝내며 하는 말은 평화의
말이다. 무슬림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는 인사는 평화다. 무슬림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도 평화라는 말이다. 형용사로서의 “무슬림”은 어떤 의미에서는 평화롭다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에서의 천국의 평화의 거처다. 이처럼 이슬람에서는 평화의 주제가 근본적이고 지배적인
것이다. 이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자기자신, 그리고 같은
인간들과 평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모든 가치를 받아들이고 우주 속의 인간에게 합당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훌륭한 신앙과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정녕 우리의 세계를
개선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며, 평등을 이루고 세계적 형제애를 누리며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공동체의 개념
공동체라는 말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 중의 어떤 것은 낭만적이고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또 어떤 것은 경멸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근본을
따져보려는 것인 만큼, 공동체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논하는데 그치기로 한다.
한 가지 기본적 의미에서 본 공동체의 개념은 “고도의 대인적 친밀감, 감정적 깊이, 도덕적
약속, 사회적 결속, 그리고 시간적 계속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관계를 뜻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지연, 종교, 민족, 종족, 직업 혹은(공통의 목적을 가진 집단)속에서 발견된다.
그 원형이 …가족이다.”(Nisbet 47-8면)5)
또 다른 기본적 의미에서의 공동체는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주로 하는 포괄적 집단이다:
(1) 공동체는 개인이 그 안에서 자기에게 중요한 활동의 대부분을 전개하고 경험을 획득하는
집단이다.
(2) 이 집단은 공유된 귀속감과 일체감에 의해 결속된다.(Broom & Selznick, 31면)
공동체라는 친밀하고 깊은 도덕적 관계로부터 대중사회라는 몰인간적(沒人間的)이고 형식적인
공리주의 관계로 전이(轉移)해 나아가는 것이 역사의 주된 흐름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갖가지
양상 속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파급적 결과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보고,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역사적 진전은 전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오로지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결과는 사람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다르다.
둘째, 현대사회는 결코 완전하지 못하며, 헤쳐 나가야 할 커다란 과업이 가로 놓여 있다.
셋째, 인간조건은 목적이 상실된 것도, 희망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위기와 진통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전혀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끝으로, 인류의 상호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으며, 인간사회는 더욱 더 복잡하게 얽혀졌다.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나머지 다른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슬람의 공동체 개념을 논한다.
이슬람의 공동체 개념이 고유의 특징을 가진다는 말은 대체로 보아 틀림이 없다. 이러한
고유의 특징은 공동체의 기반, 그것이 역사적 목적, 다른 공동체 사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 그 주체성과 계속성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슬람에서의 공동체는 인종, 국적, 지연, 직업, 친족 관계 혹은 특별한 이해 관계를 터전으로
하여 세워지는 게 아니다. 어떤 지도자나 창설자 혹은 사건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부여되지도
않는다. 국경이나 정치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이슬람의 공동체다. 이슬람에서의 공동체의
기초는 하나의 원칙으로서 이러한 원칙은 알라의 뜻에 복종하고, 그분의 법에 순종하며 그분의
대의에 기여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요컨대, 이슬람의 공동체는 그것이 이슬람에 의해 육성
촉진될 경우에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공동체는 단순한 생존이나 권력지향, 종족번식이나 생리적 연속성을 초월하는 역사적
사명을 지닌다. 이러한 사명을 성 꾸란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너희 가운데 공동체(혹은 움마)를 두어 선을 널리 펴며, 의를 내세우고, 악을 근절 시킬지니라,
이리하여야 형통하리라(꾸란, 3:104)
일찍이 너희보다 더 훌륭한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았나니 너희는 의를 시행하고 악과 싸우며
알라를 믿을지니라(꾸란, 3:110)
이슬람 공동체의 역사적 소임은 미덕과 건전성과 고결성의 진정한 구현체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다운 공동체는 선의 빈틈없는 수호자요 악의 철저한 적이다. 공동체 일반에 요구되는
것이 그 공동체의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이며 각 개인은 저마다 알라에게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무슬림 개개인의 소임은
예언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대 중 누구든지 악한 일을 보거든 행동으로 그것을 바로잡아 나가야 하느니라. 그래도
안 되면 말로 고쳐야 하며, 그래도 안 되면 거부와 비난의 감정을 격하게 할지니, 이것이
신앙의 최소 한도이니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규정은 매우 의미 심장하고 포괄적인 것이다.
(대중)매체가 혁명을 일으키는 이 시대에,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일치된 행동의
힘이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말의 힘, 혹은 감정의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슬람 공동체의 역사적 소임은 꾸란 구절에 다음 같이 부연되고 있다.
우리가 너희를 중앙의 민족, 뭉쳐진 공동체, 균형 잡힌 움마로 만들었나니, 이는 너희가
다른 민족에게 증인이 되고 사도가 너희에게 증인이 되게 하려함이다. (꾸란, 2:143)
이러한 증거의 소임은 지극히 의미 심장한 동시에 그 요청하는 바가 자못 심각하다. 그것은
이슬람의 공동체가 모범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슬람의 공동체는 행위의 최고 기준을
설정하고 타의 준거가 되어야 한다. 극단과 사치와 정체적 경직성과 즉각적인 증발을 피해야
한다. 행동에 중용을 취하고, 확고부동하게 일관성을 유지하고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지를 알며 원칙을 세우되, 융통성을 견지하는 것이 아마 인간성과 사회의
생존력을 판가름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슬람 공동체의 소임이며 무슬림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평가
기준에 의해서 무슬림의 공동체가 인간이 지금까지 발전시킨 최선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슬람 공동체의 정체성(正體性)은 일관성 있는 균형, 모범적 행위, 목적의 통일성,
감정의 상호성 결속과 형평의 제 원칙을 그 중심내용으로 한다.
꾸란과 순나에는 이런 취지의 언급이 많다.(예 꾸란, 4:135, 21:92, 25:52)
이슬람 공동체의 계속성에 관하여는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자기가 가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런 계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무슬림의 의무이다. 혼인과 상속에 관한 규정, 자카와 핫즈의
의무, 친족의 상호권리와 의무, 개인의 양심, 사회적 귀속, 이 모든 것이 이슬람 공동체의
건전한 계속성을 지향한다.
한편 알라께서는 몇 가지 방법에 의해 이러한 계속성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셨다.
첫째, 그분은 꾸란을 보존하고 그 순수성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셨다. (꾸란 15:9) 이것은 꾸란을
신봉하는 공동체가 항존(恒存)할 것임을 뜻한다. 다른 경전의 신봉자들은 있는데 꾸란의
신봉자가 없는 경우는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 자체가 하나의 연속체다. 한민족이 알라의 길에서 일탈할 때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을 재다짐하고, 당신의 진리를 재확인하였으며 새로운 예언자나 개혁자를 임명하여 이를
계속하게 하였다.
셋째, 알라께서는 만약 무슬림들이 정로를 버린다면 실패하게 될 것이며, 실패한 무슬림들은
이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실 것이라는 취지로 엄히 경고하셨다.(꾸란, 47:38) 또
신자들에게는 경고하시되 만약 신자들 중 누구라도 자신의 신앙을 등진다면 하나님께서는
속히 저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신자들에게 겸손하고 불신자들에
대해 꿋꿋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고 수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사람들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셨다.(꾸란, 5:57)
윤리(倫理)의 개념
이슬람에서의 윤리의 개념은 몇 가지 기본적 신념과 그 핵으로 한다. 이런 신념과 원칙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모든 선과 진리와 미의 창조주로 근원이시다.
(2) 인간은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존엄하고 명예로운 창조주의 대리자이다.
(3)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만물이 인류에게 봉사하게 하셨다.
(4)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시기에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을 기대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지도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의
진미를 즐기는 것을 금하시지 않는다.
(5) 중용과 실천성과 균형이, 드높은 고결성과 건전한 윤리성을 보증한다.
(6) 원칙적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나, 다만 의무로 규정된 것은 이를 지켜야하며, 금기로 규정된
것은 이를 피해야 한다.
(7)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지며, 인간 최고의 목적은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윤리의 차원은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이슬람의 윤리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다른 인간, 그리고 인간과 우주를 이루는 제 요소와 피조물, 인간과 그 자신의
심층자아의 관계를 규율한다. 무슬림은 외부에 대한 행동을 경계하고, 분명히 드러나는 행위와
말과 생각과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무슬림의 소임은 의를 옹호하고 악과
싸우며, 진리를 추구하고 거짓을 버리며, 아름다움과 건전성을 소중히 하고 무례를 피하는
것이다. 진리와 덕이 무슬림의 목적이다. 겸손하고 소박하고 예의바르며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그의 제이의 천성이다. 무슬림에게 있어 오만과 허영 그리고 매정함과 무관심은 불쾌하고
무례한 처사이며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이다.
특히 무슬림과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과 순종, 철저한 신뢰와 깊은 사려, 평화와 감사, 불구의
의지와 적극적 봉사의 관계다. 이러한 고등한 윤리가 인간적 차원에서의 윤리를 육성,
강화시켜 줄 것임을 확실하다. 왜냐하면, 같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무슬림은 친족에게
다정하고, 이웃에 관심을 보이며, 연장자를 존중하고 젊은이를 감싸주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의기소침해진 사람을 격려하며, 남의
경사를 보면 기뻐하고 유혹에 빠진 자에게 참을성을 보이며, 무지한 사람에게 아량을 베풀고,
무력한 사람을 관용하며 악을 거부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나,
더욱이 무슬림은 자기 자신의 권리에 못지 않게 타인의 법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의 정신의 건설적인 생각과 진지한 탐구열로 가득 차야 한다. 그 마음은 동정심과 선의로
고동쳐야 하고, 그 영혼은 평화와 평온의 빛을 발해야 하며, 충고는 하되 진심을 깃들여
정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정직과 완전의 산 본보기가 되고 약속을 이향하며, 자기의 과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더하여 지식과 덕을 추구하며, 잘못을 고치고 죄를 회개하며, 사회의식을 보다
민감하게 하고 인간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성품을 기르며, 가족을 풍족하게 부양하되
사치를 피하고 가족의 정당한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무슬림의 윤리적 의무인 것이다.
자연과 세계는 무슬림의 탐구의 장(場)이요, 향락의 대상이다. 무슬림은 자연과 세계를 이루는
제요소를 활용하고 그 경이를 음미하며 그 경이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간파하고
그 선을 보존하며, 그 경이를 탐구하고 그 속에 깃든 신비를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활용을 하든, 즐기는데 그치든 낭비와 무절제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양심적인 자로서 무슬림은 자기와 세계를 공유하며 앞으로 그 뒤를
이어갈 사람들을 항시 염두해 두고 있어야 한다.
이슬람의 윤리적 원칙은 일부는 이행의 의무가 따르는 긍정적 서약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또 일부는 금지의 일부가 따르는 부정적 명령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긍정적인 형식이든
부정적인 형식이든 모두다 인간에게 건전한 정신과 평온이 깃든 영혼과 강한 인격 그리고
건강한 육체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인류의 전체 복지와 번영의 필요조건임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이러한 요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이슬람은
다음의 규정을 두고 있다.
1. 하나님의 유일성과 무함맏이 사도임을 증언하되, 의미심장한 서약의 방식을 취할 것.
2. 일상 예배를 규칙적으로 올릴 것.
3. 자선 혹은 빈자(貧者)의 몫(자카)이라고 하는 종교세를 바칠 것.
4. 성원(聖月)라마단의 단식(斷食)을 지킬 것.
5. 적어도 평생에 한 번 성도(聖都) 멕카를 순례할 것.
이런 규정에 내포된 윤리적사회적 의미는 후에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이러한 적극적 수단에 더하여, 예방적 수단이라고 할 만할 규정들도 있다.
사람은 광란과 퇴폐에서, 우유부단과 방종에서, 추잡과 유혹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이슬람은
음식과 음료와 성에 관한 금기 사항을 규정하였다. 이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포도주, 증류주, 독주(毒酒) 등 취하게 하는 술 전부(꾸란, 2:219, 4:43, 5:93-94)
2. 돼지고기와 그 제품(포오크, 베이켄, 햄, 돼지기름), 발톱이나 이빨로 먹이를 잡는 들짐승 (호랑이, 늑대, 표범 등)의 고기와 그 제품, 설치류, 파충류, 벌레등을 먹이로 하는 모든 날짐승 (매, 독수리, 까마귀 등)의 고기와 그 제품, 제대로 도살이 안 된 짐승과 새의 시체에서 나온
고기와 그 제품(꾸란, 2:172-173, 5:4-6)
3. 도박과 무익한 스포츠 전부(꾸란, 2:219, 5:93-94)
4. 모든 혼외 성관계와,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걷거나, 쳐다보거나, 옷을 입을 때, 유혹을
부채질하거나 성욕을 자극하거나 은연중 음란 행위로 이끄는 모든 태도와 몸짓
(꾸란, 23:5-7, 24:30-33, 70:29-31)
하나님께서 이런 금지의 법을 두신 것은 인간의 영적, 정신적 안녕과 인류의 윤리적,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마음내키는 대로 취한 조처가 아니요, 인간이 강요를 자청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복지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며, 그분이
인간을 잘 보살피고 있음을 지적하는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금하시는 이유는 인간에게서 요긴하고 이로운 것을 박탈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훌륭한 식별력과 생의 보다 나은
것에 대한 세련된 취미와 보다 숭고한 윤리 가치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키우게 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영과 정신, 영혼과 육체, 양심과 정서, 건강과 부,
체위와 사기(士氣)를 잘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금기는 박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풍요하게 하려는 것이며,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훈계하자는 것이며,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려는 것이다.
모든 금기는 자비와 지혜의 법인 바, 이와 관련된 이슬람의 2가지 원칙을 지적하여 이점을
밝혀 보기로 한다.
첫째, 비상 사태나 위급한 상황, 불가피하고 긴급한 정황에 처한 무슬림은 정상 상태에서는
금지된 행위라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불가피하게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윤리적 규정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꾸란, 2:173, 5:4참조)
둘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비의 법을 다짐하셨으니, 몰라서 죄를 지으나 후에 회개하여
자기의 행위를 고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것이다. 정녕 하나님은 자비롭고, 용서에 인색하지
않는 분이시다. (꾸란, 6:54)
전형적이고 두드러진 꾸란 구절에, 건전한 윤리적 행위의 바탕과 철학이 규정되어 있다.
그 구절을 다음에 옮겨 본다:
오 아담의 자손들이여! 언제 어디서 예배를 보든지 아름다운 옷을 입을 지니라.
먹고 마시되 지나치게 낭비하지 말지니, 하나님께서는 낭비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이렇게 말하라: ‘누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마련해 준 아름다운 선물과 깨끗하고
정결한 음식을 금하였느뇨’
이렇게 말하라: ‘그것은 이생에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심판날에는 오직 이들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라.’ 이와 같이, 우리가 이해하는 자들을 위해 그 징표를 자세히 설명하노라.
이렇게 말하라: ‘진실로 나의 주께서 금(禁)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누가 보든, 안 보든,
수치스런 짓을 하는 것과 진리와 도리를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동반자를
붙이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꾸란, 7:31-33)
이슬람에서의 윤리적 범주는 포괄적통합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의식
영적인 관습, 사회적 행위, 의사결정, 지적탐구, 소비습관, 말씨와 예법, 그리고 기타 인간
생활의 모든 부면(部面)이 이러한 윤리적 범주 속에서 일체를 이룬다. 윤리는 이처럼
이슬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에, 그 윤리적 색조가 꾸란의 전 구절에 깔려 있어,
성서전체를 통하여 여러 문맥에서 그 윤리적 가르침이 되풀이 강조되고 있다. 이래서 이러한
윤리적 가르침을 통하여 꾸란에 나오는 대로 정리하면 간결하나마 요령 있게 분류하려는
계획이 어려워진다. 각 원칙마다 여러 문맥 속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중요한 단일
원칙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전체 윤리체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서 나타나기도 하는 바,
이러한 요소는 또 다시 종교적인 상위(上位)체계 전체를 이루는 한 요소인 것이다.
그런 만큼, 다음에 제시하는 꾸란 구절은 꾸란에서 대표적으로 발췌해 낸 데다 인간이 번역과
해석을 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번역과 해석은 아무리 해도 원전(原典)의
완전성에 미칠 수 없거니와 그 완전한 번역이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섬기되 그분에게 어떤 동반자도 붙이지 말라. 선을 행하되 네 부모와 친척과 고아와
가난한 자와 가까운 이웃과 낯모르는 이웃과 네 곁의 벗과(네가 만나는)나그네와 네 오른손의
소유(포로, 노예, 동물, 새 등)에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만한 자와 자기를 높이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또 스스로 인색하거나 남에게 인색해 지기를 명하는 자들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선물을
감추는 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나니, 우리가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저희로 수치를
당하게 할 형벌을 예비하여 두었음이니라.
또 저의 재산을 베푸나(위선 되어)남에게 보이려고만 했지 하나님도 마지막 날도 믿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니라. 만일 누가 악한 자를 저의 친구로 사귄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일진저!(꾸란, 4:36-38)
이렇게 말하라(오 무함맏이여): ‘오라, 내가 하나님께서(참으로) 네게 금하신 일을 자세히
보이리라? 그 무엇도 동등시하여 그 분께 붙이지 말라. 네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난을 구실로
네 자녀를 죽이지 말라. 우리가 너와 네 자녀에게 식물(食物)을 마련하였음이라. 고아의 재산을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저가 자라서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거기에 가까이 말라.
자질과 저울질을 공정하게 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라. 우리는 어느 영혼에게나 감당할 수 있는
짐 이외는 지우지 아니하느니라. 또 말할 때는 언제나 비록 가까운 친척이 관련되어 있을
지라도 공정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라. 이와 같이 그분이 너에게 명하시나니 이는
너로 기억하게 하려 하심이라. 진실로 이것이 곧게 뻗은 나의 길이니 그 길을 따르고 다른
길을 따르지 말라. 다른 길은 너희를 흩어 그분의 정로(正路)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그분에 네게 명하시나니 이는 너로 의롭게 하려 하심니라(꾸란, 6:151-153)
하나님께서 명하시나니 정의를 시행하고 선을 행하며 일가친척에게 친절히 대하라. 또 그분은
모든 부끄러운 행위와 불의와 배반을 금하시느니라. 그분께서 네게 가르치나니, 이는 너로
훈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으면 그 계약을 이행하며, 네게 맹세하고
그 맹세를 다짐한 후에는 그것을 깨지 말라. 진실로 너는 네 하나님을 보증으로 삼았나니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는 일을 아심이라,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의를 행하며 신앙을 가진 자는
누구에게나 정녕 우리가 새 생명을 주리니 곧, 선하고 순수한 생명이라, 우리가 이처럼 애쓰는
자들에게 저들의 최선의 행위에 따라 상을 내리리라(꾸란, 16:90-91,97)
지혜를 다하고 아름다운 선교를 펴(모든 사람을)네 주의 길로 초대하라, 그리고 저들과
의논하되 최선을 다하며, 가장 정중하게 할지니라, 네 주께서 누가 당신의 길에서 빗나갔으며,
누가 올바른 인도를 따르는지 가장 잘 아심이라.(꾸란, 16:125)
누가 있어 이 사람보다 더 좋은 말을 할 수 있으리요. 저는(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초대하고
의를 행하여 이 같이 말하느니라: ‘나는 이슬람에서 경배하는 자 중의 하나라.’ 선과 악이 같을
수 없나니 최고의 선으로 악을 물리치라, 그리하면 말하건대 너와의 사이에 증오함이 있던
자가 너의 절친한 친구가 되리라!(꾸란, 41:33-34)
(세상에서)네가 받는 것은 무엇이나 이생을 편하게 할뿐이나 하나님에게 있는 그것은 보다
낫고 더 오래 가느니라. 그것은 이런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곧 저들은 자기의 주를 믿고
신뢰하며, 더 큰 범죄와 부끄러운 행실을 피하고 분노가 치밀어도 용서하며, 주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예배를 거르지 않느니라. 또 저들은 서로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고 우리가 식물로
준 것을 베풀며, 악에 억눌리면(겁에 질림이 없이) 스스로를 도와 지키느니라. 상해에 대한
보상은(정도에 있어) 그에게 상응하는 상해를 가하는 것이나, 용서를 베풀어 화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분의 보상을 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악행 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그러나 누가 위해를 가해와 스스로를 도와 지킨 것이 사실이라면 죄의 여지가 없는 것이니라.
죄는 오직 악행으로 사람을 억누르며 무모하게 땅의 경계를 범하고 공평과 정의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돌려지느니라. 이러한 자들(압제자와 위반자)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리라,
그러나 진실로 인내하여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진정 담대한 의지와
결의를 보이는 것이니라.(꾸란, 42:36-43)
(이생의)덧없는 것을 누가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리라.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가 저들에 대해 마련해 둔 것은 지옥이니,
저희는 지옥 속에서 타오르며, 수치를 당하고 버림을 받으리라. 그리고 내세의 것을 바라고
그를 위해 응분의 노력을 다하며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 저들이야말로 그 노력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기는 자들이니라. 네 주의 선물을 우리가 이 사람이나 저 사람 모두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나 니, 제 주의 선물은 (그 누구에게도)막힘이 없느니라…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사람들이여!)는 수치와 빈곤을 면치
못하리라. 너의 주께서 명하셨나니, 너는 그 분 외에 그 누구도 숭배하지 말며 네 부모를
상냥하게 대할 지리라. 네 생전에 그분들 중에 노령에 달한 분이 있거든 멸시하여 말하거나
반박하지 말고 공손히 말할지니라.
그리고 친절한 마음씨로 겸손의 날개를 그분들께 내려 이같이 말하라 ‘나의 주여! 어린 저를
저분들이 애지중지하셨듯이, 저분들께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너희 주께서 너희 마음속을 가장
잘 아시나니, 너희가(돌이켜) 의를 행한다면 정녕 그분께서는 몇 번이고 (회개하여)당신께
돌아서는 너희를 아주 관대하게 용서하시느니라.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에게 하듯 친족에게도 저들의 정당한 권리대로 해 줄지니라
그러나 방탕한 사람처럼(네 재산을) 탕진하지 말라. 진실로 방탕한 자들은 악인의 형제이니
악인은 저의 주를 감사할 줄 모르느니라.
그리고 네가 저들(앞에 말한 사람들)에게서 돌아서 네가 의지하는 주의 자비를 구하고자
하더라도 저들에게 거슬리지 말고 다정한 말을 해 줄지니라. (인색한 사람처럼)네 손이 목에
매이게 말며(무책임한 탕자처럼)네 손을 쭉 뻗지도 말라(어떻게 하든)너는 비난을 받고 곤궁케
되리라. 진실로 너희 주께서는 당신이 베풀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식물을 베푸시나니
그분은 또한 공평히 베푸시느니라, 그분은 당신의 모든 종들을 아시며 주시하고 계심이라.
가난이 두려워 네 자녀를 죽이지 말라. 우리가 너와 네 자녀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리라.
자녀를 죽임은 실로 큰 죄이니라.
간음을 멀리하라. 이는 수치스런 짓이요 죄악이며 또 다른 죄악의 길을 엶이라.
정당한 이유 없이 살생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룩하게 하셨나니,
그리고 만약 누가 부당하게 살해당한다면, 우리가 저의 후계자에게 권한을 주었나니(저는
동등한 처벌을 요구하거나 용서를 베풀 수 있느니라.) 그러나 살생에 관해서는 한계를 넘지
못하게 할지니, 이는 저가(법(法)의) 도움을 받음이라. 고아의 재산을 늘려 주지 않으려면
저가 자라서 제 힘으로 살아 갈 때까지 거기에 가까이 말라. 그리고 (모든)약속을 이행하라.
(심판날에)모든 약속이 조사 될 것임이라. 자질을 후하게 하여 저울을 곧은 것을 쓸지니라.
이것이 가장 온당하며 종래에 가장 이로움이라.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는 것(부질없는 헛된
호기심)을 추구하지 말라. 듣거나 보거나 마음에 느끼는 행위 하나 하나가 (심판날에)조사될
것임이라. 땅 위에서 오만하게 행치 말라. 네가 땅을 갈라지게 못하며 높은 산에 이르지
못함이라. 그 무엇보다도 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니라. 이러한 것들이 네 주께서
네게 나타내신 지혜의(가르침)가운데 드느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지 말지니 이는
네가 지옥에 던져져 질책과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꾸란, 17:18-39)
우리가 루끄만에게 지혜를 주었노라: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렇게
하여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느니라. 혹 누가 감사하지 않더라도,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으시며 모든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그리고 우리가 사람에게
명하기를 자기 부모에게 친절하라 했느니라. 진통을 거듭하여 어머니가 저를 낳았으며,
두 해가 지나서야 저가 젖을 떼었느니라.(명을 들으라), 나와 네 부모에게 감사하라 나를
향하여 최고의 목표가 있느니라. 그러나 나 외에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애써 숭배시키려
한다면 부모에게 순종하지 말라. 그러나 이생에서 공평하고 (정중하게)부모님을 모시며
(사랑하며)내게 향하는 자들의 길을 따르라. 너희 모두가 결국 나에게 돌아오리니. 내가 너희가
행한 모든 일의 진상과 의미를 너희에게 말하리라…오, 나의 아들아(루끄만의 말이다):예배를
거르지 말고, 공평과 의를 명하며 악을 금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꾹 눌러 참으라,
이리하는 것이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의지가 확고한 것임이라. 또 사람에게는 네 볼을
불룩하게 하여(오만을 부리지)말며, 땅에서 오만하게 행치 말라,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게 뽐내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 그리고 걸음걸이를 절도 있게 하며, 목소리를 낮출지니, 진정
소리 중 가장 거친 것은 나귀의 울음소리이니라(꾸란, 31:12-19)
오 너희 믿는 자들이여! 취하게 하는 것과 도박…은 가증한 것이요 사탄의 소행이라 이런
(가증한)짓을 피해야 너희가 형통하리라. 사탄의 술책은 오직 취하게 하는 것과 도박으로서
너희 사이에 적의와 미움을 부채질하고, 너희를 훼방하여 하나님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거늘 너희가 삼가지 않으려느냐꾸란, 5:90-91)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으로 내세의 본향(本鄕)을 구하라. 현세에서 네 본분을 잊지
말되, 하나님께서 네게 선하셨듯이 너는 선을 행하며, 땅에서 해악을 짖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해악을 짓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심이라.(꾸란, 28:77)
여기 발췌한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꾸란의 다른 구절과 무함맏의 관습은 많이 있다.
여기에 발췌한 것만으로도 이슬람의 기본적 윤리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이슬람의
윤리는 경우 여하를 막론하고 그 성격이 독특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윤리원칙을 세우신 뜻은
어쩌다 보고 감복하라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시행, 발효시키려는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을
도와서 가장 건전하게 성격을 개선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그분과의 결속을 다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사람을 위협하여 소극적이 되게 하거나 무관심하게 만들려고 이슬람의 윤리를 세워 놓은 게
결코 아니다. 예를 하나 들면 요점이 설명될 것이다. 만약 무슬림이 해를 입거나 억압을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는 자유선택에 의해 여기에 저항하여 상응하는 보복을 가하거나
용서를 베풀어 자기 행위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맡길 수도 있다. 그는 자기에게 어느 쪽으로도
조처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며, 용서해 주는 쪽이 더 좋다는 것도 역시 안다.
그러므로 그가 용서를 베풀 경우, 그 자신의 자유선택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보복을 가하는 경우에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부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처인 것이니, 이런 태도는 그 자체가 신성한 의무이며
동시에 관계당국이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는 데도 일조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슬람이 여느
교의가 내세우는 이론처럼, 절대적인 용서를 요구한다면 수양이 안 된 많은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쪽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여느 교의가 무자비하게
가르치는 것처럼 이슬람이 오로지 보복만을 요구한다면 자비와 인내 그리고 영적 개선과
윤리적 성숙의 여지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많은 훌륭한 성품이 자취를
감출 것이고 많은 윤리적 잠재능력이 결코 빛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여하한 일이 있어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침 받은 사람은 그런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않으려니와 아마 실천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결국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윤리 그 자체를 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보복을 가하라고 가르침 받은 사람은 인간의 덕이라는 것을 거의 혹은
전혀 존중하지 않으며 보편적 규정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관심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못하다.
그러나 인간성의 신성한 육성자인 이슬람은 인간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제시하였다.
악인이지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고, 용서를 베풀면 더 나아지거나 이롭게 될 경우에는
용서를 권하게 되며 또 그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용서의 동기를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악의 길을 걷기 쉬운 자들에게는 원한에 따라 상응하는 보복을 가하게 된다.
따라서 어느 경우에나 무슬림은 건전하고 유익한 태도를 견지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를 베푸는
경우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월한 입장에 서서 비행을 저지른 자의 선도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보복을 가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권리를 보호하고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며 악을
저지하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건전한 윤리인가? 물 불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복수하는 자의
태도인가? 아니면, 자비와 용서의 여지를 두고 예외적 경우를 허용하는 무슬림의 태도인가?
그리고 누가 윤리적으로 건전한가? 보복이 허용되지 않음을 알고서 용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보복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용서하는 무슬림인가?
어느 쪽이 진정한 용서인가? 외적인 강제와 금지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어서 하는 용서인가
아니면 선택과 행동의 자유에서 비롯하는 용서인가?
이슬람의 윤리원칙이 건전하고 독자적이며 융통성이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것은 모든 선과 윤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교훈인 것이다.
세계의 개념
머리말에서 간략하나마 서반구에서의 무슬림의 위치와 이슬람의 미래상을 논했는데 이번에는
현대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인간의 전반적 상황 그리고 이슬람의 세계의 개념 또는
세계관을 논하기로 한다. 이미 논의된 개념을 재확인하는 한편, 몇 가지 새로운 생각을
덧붙이고 다양한 차원에 걸친 주제를 한데 묶어 요약하게 될 것이다.
현재 인간이 처한 상황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절박한 감을 금할 수 없다. 선의와 신앙심을
가진 사람 모두의 관심과 적극적 반응을 요청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이나
체념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희망의 정신이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이슬람의 긴요한 속성이다.(예, 꾸란 12:87, 65:3 참조)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제문제와 위기는 오로지 현대만이 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와
위기는 난감하고 복잡하며 고통스러운 것임은 사실이다. 아마 이전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 한층
더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와 지난 세기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현대가 처한 곤경이 점점 복잡성을 더해 가는 것은 주로 우리의 기대와 능력의 수준이
비슷하게, 비례하여 높아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세기에 걸쳐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난감한 위기는 주로 생소하고 이질적이고 외래적(外來的)인 것에 대한 일종이
완고하고 배타적이고 편협한 태도에서 기인하였다. 이러한 정향(定向)은 인종주의, 엘리트 의식,
완고한 신앙, 편견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불쾌한 일군(一群)의 태도를 조장하였다.
그 누구도 감히 인류가 유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이런 위기는 외부적인 밖을 향한 물질적 탐구와 내면적인 안을 향한 윤리적 탐색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에서 야기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균형의 유지를 요구하고, “중도”를 주장하고,
중용을 위한 개혁운동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 성취하기 어려운 일도
없었다. 과거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왜곡되어 인간의 물질적 복지를 무시해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때도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을 오해한
나머지, 만사를 맡겨 버리는 운명론이나 절대적인 부정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영성(혹은 탈속(脫俗))과 체념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필경 이에 대한 반동으로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와 “자유의지”등을 강조하게 된다. 영성(혹은 탈속)을 어느 한계를 넘어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미신과 미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강조가 지나치면 물질주의가 방종으로 자유의지가 방탕으로 화하고 합리주의가
공리공담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 지난 수세기의 지성사(知性史)가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지난 수십 년간 정신의 저울은 비틀거렸다. 60년대와 그리고 70년대인 지금, 추종을
불허하는 미증유의 외계 탐사가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이 되었다. 안으로 파고드는 존재의 내면
세계에 대한 전례 없는 탐구도 그것이 비록 광적이거나 신경질적인 혹은 일시적 유행의
양상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고조되고
있는, 전대 미문의 균형을 잃은 2가지 유형의 탐구열은 유례없는 불안을 자아내고 있다.
그 이유를 필시 이 두 가지 유형이 수렴하기는 고사하고 서로 무관계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뚜렷한 상호관계나 상호보완 혹은 교접(交接)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이 두 가지 유형의 존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불안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이로 인해
사회문제는 심화되고 현대인의 운명에는 찬물이 끼얹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외계 탐사와 윤리적 내면 탐색이 다소나마 화합하게 된다면 이런 불안한
경향을 역전시킬 수도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예배만으로도 살 수 없다. 인간은 정치적 물질주의적 동물인 동시에 성(聖)의 탐구자이기도
한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현대세계는 허다한 문제로 좌절에 직면해 있다.
한편, 이런문제를 해결하려는 처방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 역시 못지 않은 좌절의 요인이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식의 대중가요를 읊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도주의, 악마주의 혹은
과학주의를 궁극의 해결책으로서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장차 구세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더욱 많다. 그러나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 놨지만 무관심한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 냉담한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낙관론자들이
결성한 클럽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이해”의 절박한 필요성일 것이다. 인간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본성과
잠재력과 한계 그리고 세계속의 자기의 위치와 그 요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제 문제는 이슬람이 어떻게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그 자신을 이해시키고, 정신에서 장애를
제거하며, 흐릿한 시야를 맑게 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하려면 이제까지 논한 이슬람의 기본개념을 머리에 새기고, 그 가치체계를
구성하는 일부요소를 정치화(靖緻化)시킬 필요가 있다. 바라건대 이건 분석을 통하여 이러한
제개념과 가치체계의 제요소가 어떻게 진통하는 현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관련될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인이 자기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중용의 원칙은 이슬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것은 이슬람이 인간성과 생의 의미와 하나님의
개념을 파악하는 방식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슬람은 편파적인 “인본주의” 철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을 거의 신격화시키고, 그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또한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고 죄성(罪性)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 철학에 못지않게 편파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인생은 추잡하고 동물적이며
짧고 비참하다는 관념을 배격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생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서 즐겁고, 태평하다는 관념 역시 배격한다.
이슬람은 생에 긍정적인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이슬람이 지상에서의 생의 가치를 저하
시키는 경우는 내세와 관련시켜서 일뿐이다. 오로지 목전의 현실과 순간적인 향락주의와
찰나적 쾌락에만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현실을 도피하여 철저하게 내세의 낙원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슬람은 지상에서의 인간조건에 관심을 갖는 동시에 내세에서의 인간의 운명을 중시한다.
물론 이런 관심은 비례적인 것으로서 이슬람은 존재의 각 단계를 평가하되 그것이 인간의
전체 복지에 미치는 영향의 상대적 크기에 의존한다.(꾸란 7:33, 17:18-21, 28:77, 57:20-21)
여타의 많은 성귀(聖句)를 만할 꾸란의 성귀(꾸란, 2:27-39)가 하나 있다. 이 성귀는 이슬람의
기본원칙의 일부를 포함하며, 이슬람의 세계관의 기초를 제시한다. 이런 원칙들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것을 들여보면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하나의 생성체로서 설계자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어, 의미심장한 목적을 위해
유지된다. 역사는 그분의 의지대로 전개되며, 정해진 법칙을 따라 흘러간다. 역사의 전개는
맹목적인 우연에 지배되지 않으며, 우발적으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2. 인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어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부왕(副王)으로 임명된다.
인간이 부왕으로 선택된 것은 땅을 경작하고, 지식과 덕과 목적과 의미로서 생을 풍요케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천지의 만물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어 인간에게
도움을 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생은 인간을 가두어 놓은 감옥이 아니며,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전생의 죄를 임의로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이나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3. 지식은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며 인격과 존재의 필수요소다. 인간에게 창조주의
부왕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하나님의 천사들에게조차도 존경과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지식이다.
4. 지상에서의 생의 초두부터 죄와 반역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뒤를 이어 일어난 일련의 일들-아담과 이브의 양심의 가책, 회개,
하나님의 용서와 동정 그리고 인간과 사탄 사이의 적의-이 모든 것은 창조주에게 의외의 일이
아니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발적이기에는 너무나 의미심장하였다.
오히려 첫 인간을 훈계하고, 타락과 회복, 도덕적 패배와 승리 그리고 창조주로부터의 이탈과
그분과의 화해를 실지 체험시키려는 계획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생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고, 생의 불확실성과 고통스런 순간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혜안을 가지게 될 것이다.
5. 이브는 첫 인간부부의 연약한 쪽이 아니었다. 이브는 아담을 유혹하여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지 않았으며, 그녀만이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담과 이브는 똑같이 유혹을 받았으며 똑같이 유책(有責)하였다. 둘 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였으며, 하나님의 용서와 동정을 받았다. 이는 의미 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이브는 여성으로서의 그녀에게 태고적부터 따라다녀 온 저주로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꾸란은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미덕과 약점을 지니며, 똑같이 감수성과
장점을 갖는 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6. 인간은 자유의지가 부여된 자유 행위자다. 이것이 인간성의 본질인 동시에 인간이
창조주에게 책임을 지는 근거다. 인간에게 상대적 자유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자신의 목적을 깨는 것이 되고, 인간은 전혀 어떤 책임도 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은 물론이다.
7.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생명은 영원하지도, 그 자체가 목적인 것도 아니다. 생명은
하나의 과도기로서, 이 기간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8. 인간은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자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임은 실제 죄를 지은 사람만이
진다. 죄는 유전되지 않으며 전가가 불가능하고, 연대성을 갖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인간은 타락하기 쉬운 반면, 구제와 선도의 가망성도 아울러 갖는다.
이것은 이슬람이 집단보다 개인을 선호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인주의는 사회적
맥락에서 유리시켜 생각하면 무의미해진다. 개인마다 상이한, 일련의 역할을 갖는다는 것이
개인주의 본래의 의미다. 각 개인은 자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되, 자신의 도덕적 성실성을
지키고 그 주체성을 보존하며, 하나님의 권리를 지키고 자기의 사회적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9. 인간은 존엄하고 명예로운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에게 창조주의 영이 불어
넣어진다는 사실에서 연원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존엄성이 특정 종족이나 피부색 혹은
신분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존재인 인간 모두의
천부적 권리이다.
10. 끝으로 이 성귀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인류의 통일성이 깊이 뿌리를 내려 요지부동임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인간 최고의 덕은 경건과 지식이며,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런 지식을
습득, 활용하면 그 사람에게는 행복한 운명이 보장되고 그 생애가 평탄해지리라는 것을
지적한다.
제 3장 신앙의 적용
본 장에서는 이슬람이 규정한 신앙의 실천사항을 다룬다. 이 가운데는 예배(쌀라), 단식(싸움),
자선-기부 혹은 희사(자카) 와 순례(핫즈)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들 실천 사항을 명하신 방식이
이들 실천사항으로 하여금 영적인 제반목적에 합치하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게 한다.
그 중에는 매일 실행해야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번
실행해야 되는 것이 있고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실행해야 되는 것도 있다. 결국 이러한 실천
사항은 한 주의 모든 요일, 한 달의 모든 주, 일 년의 모든 달, 그리고 평생의 모든 해에 걸려
있는 셈이며, 특히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전 생애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게 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행동과 실천이 없는 신앙은 이슬람에 관한 한 막다른 길목이다. 신앙이란
워낙 아주 민감하며, 극히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실천하지 않거나 그냥 내버려두면
생기와 동기유발 능력을 금방 잃어버리고 만다. 신앙에 생기를 주고 신앙이 그 목적에
합치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의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존속과
효과를 부여한다. 역으로 신앙은 인간을 고무하여 부단한 헌신과 꾸준한 실천으로 유도한다.
이것은 신앙과 실천의 상호관계가 매우 깊고 둘의 상호의존이 쉽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뚜렷하게 감화를 받을 만한 곳이 없고 따라서 성취하거나 열망할 만한
가치 있는 목적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의 생은 무의미하며 그날그날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렇게 산다면 아예 사는 것도 아니다. 한편 신앙을 고백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실제로는 신앙을 갖지 않은 것이니, 이런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빗나간 사람이나 진배없다.
이슬람에서 신앙과 실천 사이의 상호관계는 종교제도 전체를 생생하게 반영하며 그 가르침의
심오한 철학을 드러낸다. 이슬람은 여하한 경우에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종교와
실생활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인간을 받아들이며
영육으로 이루어진 그 본성을 인정한다. 이슬람은 인간의 영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영성을
무시한다며,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슬람은 또한 인간의 육체적 요구를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육체적 요구가 없다면 인간은 천사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또 천사가 될 수도 없다. 이슬람에 의하면 인간은 피조물의 연속선상에서
중앙에 자리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를 초월하지도 않는다. 하나님만이 오직 영적인 존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물리적, 육체적 존재인 것만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존재는
동물이나 기타 이성 없는 피조물 외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처럼 상보적(相補的)
본성을 갖는 존재이기에, 상응하는 요구와 상응하는 필요를 지닌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할 수 있는 종교는 이러한 모든 요구와 필요를 고려에 넣는 종교이며 인간의 영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육체적 욕망을 훈련하는 종교인 것이다. 이런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인간성의
어느 한 면을 억누르거나 균형을 잃거나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심어준 본성을 무책임하게 무시함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부인하여 학대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이슬람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인간의 영적, 물질적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종교를 사사로운 문제로 보거나 실생활 전반과 유리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공사를 불문하고 전체적인 인생행로에 눈에 띄는 흔적을 내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생활을 조직적으로 영위해 나가지
않는다면 생은 무의미하다. 이슬람이 사회 각 방면-개인적, 사회적 행위, 노동과 산업, 경제와
정치, 국가적, 국제적 제관계 등-으로 그 조직적 감각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나
또 같은 연유에서 이슬람은 세속주의 나 성속(聖俗)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종교와 의미 있는 생활의 상호작용은 지극히 중요하다. 이것이 이슬람이 사회 각 방면으로
침투하여,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고, 인간에게 자비로운 건전한 방식으로 인간의 제반사를
지도하는 까닭이다.
참종교와 일상생활 사이의 이러한 필연적인 부합의 결과로서, 이슬람은 엿새는 나 혹은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하루는 주님을 위해서 라는 식의 교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런 교리는
결국에 가서는 공허해지고 종교의 활기를 창백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교리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심히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며, 인간 자신의 영혼에
해로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 윤리적 욕구를 심각하게 무시하는 것인 바,
이러한 영적, 윤리적 요구는 물질적 욕망보다 더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할 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을 위험하게 분열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불균형은 곧 타락의 징후이다.
마찬가지로 엿새는 수도생활이나 명사에만 몰두하고 하루는 자신을 위해 보낸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균형이 깨어지기는 매일반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행로는 이슬람이 제시하는 행로가 된다. 인간은 상보적 본성을 지닌 존재이고
피조계(被造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영혼이나 육체를 등한시하거나 어느 한 쪽을
다른 쪽보다 우위에 둔다면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영혼과 육체 모두에 자양분을
주고, 양자를 균형 있고 건전하게 육성시키는 것이 인간의 정의감과 성실감 그리고 의지력과
진실성을 가늠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그리고 인간을 도와 이 시험에 통과시키고자,
이슬람이 신앙의 규칙적인 실천사항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예 배(쌀라)
예배의 목적
예배는 이슬람을 버티는 하나의 지주이며, 종교의 기초로 간주된다. 합당한 이유도 없이
예배를 보지 않는 무슬림은 중대하고 가중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범죄가 중대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이것만해도 나쁜데-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존재를 숭배하고 숭고한 목적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동시에 가장 숭고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성격을 건전하게 키워 주고 성숙과정에서 그 열망을 실현시키는 최선의 방법이 이슬람의
예배이다. 예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인간성의 선한 자질을 억누르고 인간성이 누려야 할 권리
곧 숭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권리와 열망하고 고매해질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선에 뛰어나고
고상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당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억누르고 거부하는
것은 극히 심각하고 파괴적인 범죄를 구성한다. 예배가 인간의 생에서 가지는 의의와 생명력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예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만 우리의 번영과 복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분이 예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우리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시는 것은 우리를
도우려는 그 분의 뜻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하든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하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인간이 인력(引力)의 중심이다. 그가 보이는 일반적인 흥미가 주된 관심이다.
인간이 이슬람의 예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한하여 예배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하나의 이론 이나 상투적인 가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사실이며
영적인 체험이다. 다음에 이슬람 예배의 효과를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존재와 선에 대한 신념을 강화시키며 이런 신념이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게 한다.
2. 이러한 신념에 생기를 주는 한편, 실생활에서 그것이 건설적으로 작용하게 한다.
3.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 위대성과 숭고한 윤리 우월성과 원숙한 덕에 대한 천부적, 본능적
열망을 실현하게 한다.
4. 마음을 정화하고, 정신을 계발(啓發)하여 양심을 길러 주고 영혼을 위로한다.
5. 인간에게 선하고 예의바른 기질을 함양시켜, 악하고 무례한 성향을 억제시킨다.
이슬람의 예배를 분석하여 그 독자성을 연구해 보면, 이슬람의 예배가 단순히 신체 동작이나
성서의 공허한 낭송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것은 지적인 명상과
영적 헌신 그리고 윤리적 향상과 신체 운동 모두를 총괄하는, 독자적이고 유례없는 신앙
형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슬람적인 체험인 바, 예배하는 동안 신체의 모든 근육이 영혼과 정신에 합일하여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 예배의 완전한 의의를 말로써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다.
이슬람 예배는…
1. (심신)단련과 의지력의 수업이다.
2. 하나님과 모든 가치 있는 목적에 대한 헌신의 실습이다.
3. 하나님과 부단히 계시되는 그분의 선을 빈틈없이 상기시킨다.
4. 영적 수양과 윤리적 건전성의 씨앗이다.
5. 생의 가장 곧은길로 이끄는 안내자이다.
6. 무례와 악, 그릇된 탈선과 이탈에 대한 방어수단이다.
7. 진정한 평등과 확고한 통일성과 형제애의 시현(示顯)이다.
8.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인식의 표시이다.
9. 마음의 평온과 안정의 길이다.
10. 인내와 용기, 희망과 자신의 풍부한 원천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예배이며, 그것이 예배가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혜택이다. 예배를 실제
체험해 보고 그것이 주는 영적인 즐거움에 젖어 보면 이 말이 실감나게 된다. 그런 연후에야
예배의 진정한 의의를 알게 될 것이다.
예배의 제조건
다음의 조건을 갖춘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의무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1. 정신이 온전하고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2. 비교적 성숙하고 사춘기의 연령-보통 14세-에 달해 있을 것(자녀들의 경우 7세가 되면
예배를 시작하라고 권해야 하며, 10세가 되면 강권해야 한다.)
3. 중병에 걸려 있지 않아야 하며, 여자의 경우에는 월경 중이 아니고, 해산과 수유로 행동이
부자유스럽지 않을 것, 양자의 최대기간은 각각 10일과 40일이다. 이런 경우에 여자는 예배의
의무가 완전히 면제된다.
다음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예배는 무효이다.
1. 세정(우두)을 할 것.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한다.
2. 온몸과 몸에 입은 옷을 청결하게 하고, 예배 장소에 있는 먼지와 불순물을 깨끗이 치울 것.
3. 의복을 격식대로 입어 음부를 가리는데 그 뜻이 있는 윤리적인 규정을 지킬 것.
남자는 적어도 배꼽에서 무릎까지는 가려야 한다. 여자는 얼굴과 양손, 양발을 제외한 전신을
가려야 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예배 중에는 속이 들여다보이는 의복을 피해야 한다.
4. 가능하면 마음과 말로써 예배 의사(니얏)를 밝힐 것.
5. 끼블라 의 방향, 즉 멕카의 카바 방향을 똑바로 향할 것. 방향을 제대로 잡는 방법은 많다.
방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자신의 최선의 판단에 따른다.
예배의 종류
예배의 종류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무예배(파르드) : 하루 다섯 번의 예배와 금요일의 정오 집회, 그리고 장례예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예배를 보지 않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가벌적 중죄다.
2. 추가 의무예배(와집과 순나) : 의무예배에 수반되는 예배와 두 개의 큰 축제(이-드)의 집회가
이에 해당한다. 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유해한 태만이며 지탄받을 행위다.
3. 임의예배 :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이든 자진해서 드리는 모든 예배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다음의 두 시기를 택해서 예배를 보는 게 좋다: 동트기 직전까지의 늦은 밤과 늦은 오전.
예배 시간
모든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합법적 면제 사유가 없고 모아서 하거나 일시적으로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의 예배를 때 맞춰 드려야 한다. 다섯 번의 예배는
다음과 같다.
1. 이른 아침 예배(쌀라뚤-파즈르) : 새벽 이후 해뜨기 전-전체 약 두 시간의 길이-사이에 드리면 된다.
2. 정오 예배(쌀라뚤-주흐르))) 주간의 시간 절약대의 무슬림들은 금요일의 회중
예배(주마)시간을 제대로 잡기가 어려워 혼선을 빚고 있는 모양이다. 예배 시간을 오후 1:15와
2:30분 사이에 잡아서 일년 동안 고정 시켜 두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렇게 되면 겨울부터
여름까지 시간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다. 저자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하기를 강권한다. 형제들이
위 예배시간을 주간 계획에 넣어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일요일 정오 집회에
대해서는 이에 마찬가지로 조정할 수 있다. 남중한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여 서녘 하늘에 질
때까지의 중간을 잡아서 그 사이에 드리면 된다. 예를 들어, 일몰시간이 오후 7시인 경우에는
예배 시간은 정오 12시 조금 후에 시작해서 오후 3시 30분 조금 후까지 계속된다. 그 직후에
다음 예배 시간이 시작된다. 하지만 정확한 달력이 나와 있어서 이것을 보면 각 예배 시간을
알 수 있다. 이런 달력을 입수할 수 없다면 자신의 최선의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3. 이른 오후 예배(쌀라뚤-아스르) : 정오 예배시간이 끝난 직후에 시작해서 해질녘까지 계속
된다.
4. 해질녘 예배(쌀라뚤-마그립) : 이 예배시간은 일몰 직후에 시작해서 서쪽 지평선에서
저녁놀이 사라질 때까지 1시간 20분 내지 30분 동안 계속되는 게 보통이다.
5. 밤 예배(쌀라뚤-이샤) : 서쪽 지평선에 저녁놀이 사라진 후(일몰 후 약 1시간 30분 뒤)에서
새벽 조금 전까지 계속된다.
이슬람에서 예배시간을 정한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이 방식에 의하면 영적 안식이 신체의
영양 섭취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한편 마음의 평온과 신체의 휴식을 겸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른 아침 예배는 통상 아침 식사 시간대에 올리도록 되어 있고,
정오 예배는 점심 시간대와 일치하며, 이른 오후 예배는 대략 차나 커피를 마시는 휴식 시간에
해당한다. 해질녘 예배는 저녁 식사시간에 올려지고 밤 예배는 밤참을 먹을 때와 일치한다.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무슬림이 이들 예배를 준행함으로써 하루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하루 전체에 영적 인(印)을 찍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무슬림은 종교와 생활을 결합시키고 하루 종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영적인 기분에 젖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의 도덕적 위신을 튼튼한 기초 위에 구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무슬림은 자기의 생활 곳곳으로 영적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며, 종교는 활동 분야 전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상점과 회사에서 가정과
농장에서 공장과 작업장에서, 종교가 그 효력을 나타내게 된다. 업계 전반으로 종교가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실 이런 시간표가 돋보이는 이유는 즉,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슬람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예배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다.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 예배를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들 예배는 신성한 경기다. 이 경기를 치르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무한하며, 그 기쁨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이 얻는 행복, 느끼는 즐거움,
받는 명예는 형언할 수 없는 정도다. 반면에 이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처벌할 수 있는
죄에 해당한다. 엄한 형벌과 영적인 일탈과 정신적 고민과 사회적 소외를 초래한다.
정오(주흐르)와 오후(아스르)예배는 여행 중이거나 병중인 경우에는, 한꺼번에 드릴 수도 있다.
해질녘(마그립) 그리고 밤(이샤)예배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허용된다.)) 첫 번째 유형의
예배 결합은 조기형이다. 실례를 보면 이른 오후 예배가 정오 예배를 올린 직후에 제시간 전에
올려지게 된다. 두 번째 유형의 예배 결합은 후기형이다. 실례를 보면 해질녘 예배가 제시간이
지난 후에 밤 예배 직전에 올려지게 된다. 이렇게 예배를 한꺼번에 봄으로써 합법적인 사유(예,
여행, 업무변경 등) 때문에 예배를 제 시간에 행하지 못하는 무슬림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게
된다.
일부세정(우두)
예배를 올리기 전에 먼저 용모를 단정히 하고, 청결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먼지나 스모그에
전체가 노출되는 신체 부위를 씻어내야 한다. 이렇게 씻는 것을 세정(우두)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행하는 것이 좋다.
1. 숭배와 청결을 위해서 세정한다는 의사를 밝힌다.
2. 손을 손목까지 세 번 씻어낸다.
3. 입을 물로 세 번 헹궈 낸다. 될 수 있으면 칫솔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4. 콧구멍 속으로 물을 들이켜 세 번 씻어낸다.
5. 얼굴 전체를 양손으로 세 번 씻는다. 가급적이면 이마 위에서 턱 아래까지 그리고 양쪽 귀
있는 데까지 씻어낸다.
6. 오른팔을 팔꿈치 끝까지 세 번 씻고 다음에 왼쪽 팔도 같은 식으로 씻는다.
7. 머리의 전부 혹은 일부를 손을 적셔서 한 번 닦아 낸다.
8. 귀 안쪽은 집게손가락으로, 귀 바깥쪽은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낸다. 젖은 손으로 해야 한다.
9. 목둘레를 적신 손으로 닦아 낸다.
10. 양발을 발목까지 세 번 씻는다. 오른발부터 시작한다.
여기까지 하면 세정이 끝나게 되는데, 이처럼 세정을 한 사람은 예배를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세정이 유효하면 가급적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여, 다시 세정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회수만큼 예배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가능하면 다시 세정하는 것이 좋다. 다시 할 경우에도
위의 순서대로 하는 게 역시 좋다. 그러나 이 순서를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도 세정한 것으로
인정된다. 위에 말한 대로 세정을 하면 다른 사유에 의해 무효화되지 않는 한 예배를 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게 된다.
세정의 무효
세정은 다음 각 경우에 무효가 된다.
1. 생리적 배설 즉 소변, 대변, 방귀 등
2. 신체 부위에서 피나 고름 혹은 유사물질의 유출
3. 구토
4. 수면
5. 마약이나 술 종류로 인한 정신 이상
이중에 어느 한 가지 경우라도 생긴다면 그 후에 세정을 다시 해야 예배를 볼 수 있다.
또 생리적 배설 후에는 물을 써야 한다. 숭배와 청결을 위해서는 화장지만으로 충분치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정의 완전한 대체(따이야뭄)
따이야뭄 혹은 깨끗한 흙의 사용은 세정을 대체할 수 있다. 목욕도 이로써 대체가 가능하다. 따이야뭄은 다음 각 경우에 허용된다.
1. 병중이거나 물을 쓸 수 없을 때 :
2. 충분한 양의 물에 접할 수 없을 때 :
3. 물을 쓰면 해가 되거나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 때
4. 세정을 하고 나면 장례예배나 이-드 예배를 놓칠 우려가 있을 때, 이 두 예배는 대체가 안
된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따이야뭄을 하는 게 허용되는데 그 시행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양손을 깨끗한 흙이나 모래 혹은 돌 위에다 가볍게 두드린다.
2. 세정할 때와 같은 식으로 흙이나 모래 혹은 돌로써 한 번 손을 문질러 털어 내고 얼굴을
닦는다.
3. 손을 다시 두드리고, 왼쪽 손으로 오른팔을 그리고 오른쪽 손으로 왼팔을 팔꿈치까지
닦아낸다.
이 따이야뭄은 세정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세정은 건강과 숭배 양자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반복 가능한 세정을 도입함으로써 이슬람은 어느 종교 교리나 의학적 처방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선의 위생요법을 아울러 가져오게 된 것이다.
세정의 편의(便宜)
이슬람은 세정에 관한 몇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세정 후에 양말이나 스타킹을 신거나,
신고 있었던 경우에는 세정을 다시 할 때 이를 벗지 않아도 된다. 벗지 않는 대신 적신 손으로
그 위를 스쳐 닦는다. 그러나 24시간마다 적어도 한 번은 벗어 내고 발을 씻어야 한다. 장화를
신은 경우에는 그 바닥이나 겉이 깨끗하면 이와 마찬가지 방식에 의한다. 세정시에 씻어내야
할 신체 부위에 상처를 입었거나, 그 부위를 씻어내면 유해할 경우에는 위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맨 붕대를 젖은 손으로 닦아내도 된다.
전부 세정(구슬/목욕)
다음의 각 경우에는 예배에 들어가기 전에 콧구멍, 입, 머리를 포함하여 전신을 목욕에 의해 완전히 씻어내야 한다.
1. 성교 후
2. 몽정 후
3. 여자의 경우, 월경기간이 끝나자마자
4. 산후수유로 자리를 뜰 수 없는 기간(산욕기)-최장 40일로 추산-이 끝날 때, 이 전에 끝나도
전부 세정을 해야 한다.
지적해 둘 점은, 목욕과 세정을 시작할 때 청결과 숭배를 위해서 한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부나 전부 세정을 하는 사람은, 세정과 동시에 말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올바른 인도를 간구해야 한다. 이 때 하는 말의 유형이 정교한 원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말하다면 자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여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배 알리는 소리(아잔)
이제 앞에 설명한 대로 세정을 마친 예배자는 예배를 올릴 준비가 된 것이다. 예배시간이 되면
무함맏의 관습(전통)을 따라, 소리를 내어 예배를 알리는 것(아잔)이 좋은 관습이다. 소리를
발하는 사람은 끼블라(멕카의 카바 방향)를 향하여 서서, 양손을 양쪽 귀로 올려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4번 반복) ;
2. 아쉬하두 안 라 일라하 일랄라(나는 유일신 하나님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하노라),
(2번 반복)
3. 아쉬하두 안나 무함마단 라수룰라(나는 무함맏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하노라), (2번 반복)
4. 하이야 알랏-쌀라(어서 예배를 보러 오라). (2번 반복 :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5. 하이야 알랄-팔라(어서 오라, 형통하리니). (2번 반복 :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다)
6.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2번 반복).
7. 라일라하 일랄-라 (유일신 참 하나님 외에 신은 없도다). (한번)
이른 아침 예배를 알릴 때는 소리내는 사람은 위(5) 직후에 한 마디를 추가한다.
이 때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앗-쌀라 뚜 카이룸 미난-나움 (예배는 잠자는 것보다 나으리라), (2번 반복)
다음에 소리를 말하는 사람은 (6) (7)로 계속한다. 아침예배에 이런 예외를 둔 것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여서 예배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 들어가기(이까마)
예배를 알리는 소리가 나면 예배자는 예배 준비를 하고 예배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이것을
이까마라 함)-예배를 거행한다. 이 때 하는 말은 위 아잔의 경우와 같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ㄱ) 이까마는 보다 빠르지만 낮은 목소리로 낭송하며
(ㄴ) (5) 직후에 다음과 같이 두 번 말한다.
꺼드 꺼맛디-쌀라 (예배 볼 준비가 되었다.)
다음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7)로 끝까지 계속해 나가야 한다.
예배의 거행
예배자가 세정을 마치고, 아잔과 이까마가 낭송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예배를 시작한다.
1. 이른 아침 예배(쌀라뚤-파즈르)
이 예배에서는 추가의무(순나)로 먼저 두 라카를 올린다. 다음에 다시 의무(파르드)로
두 라카가 따르게 된다. 추가의무 라카와 의무 라카는 같은 방식으로 올린다. 다만 예배
의사를 밝힐 때 둘 중 어느 쪽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거행 방법은 다음에 설명한다.
동작1. 공손하고 겸허한 자세로 서서 끼블라를 향하고 양손을 양쪽 귀로 올려 이렇게 말한다.
나와이뚜 쌀리 순나따 쌀라띨-파즈르 혹은 파르다 쌀라띨-파즈르(각 경우에 따른다) ;
알라후 아크바르.
뜻은 다음과 같다. 아침의 추가의무 혹은 의무(각 경우에 따른다.) 예배를 드리고저 하나이다 ;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다음에 양 팔을 내려 배꼽 바로 아래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갠다.)) 여기서 손의 위치는 어느 한 법학파에 따른 것이다. 학파에 따라 내세우는 손의
위치도 다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사소한 것이어서 예배의 유효성 여부에는 상관이 없다.
사실 이러한 차이는 방해나 제한이 아니다. 편리나 편의로 간주되고 있는 터이다.
동작2. 다음에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수브하나깔-라훔마와 비함디까, 와 따바라까-쓰무까, 와 따알라 잣두까, 와 라일라하 거이루크
아우주 빌라히 미낫-샤이따니르-라지임 비스밀-라히-르-라흐-마니르-라히-임
뜻은 다음과 같다 : 오 하나님, 영광을 누리소서, 찬미가 당신 것이오며 당신의 이름은 복되며
당신의 위엄은 홀로 뛰어나니, 당신 외에 신은 없나이다. 저주받은 마귀로부터 당신께
피하고자 하나이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 이 부분은
권고 사항이다. 이 부분을 꼭 해야만 예배가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동작3. 다음에 나지막하거나 혹은 들릴 수 있는 목소리로 꾸란 서장(알-파티하)을 낭송하고 이어서 성귀를 낭송한다.(서장과 짧은 장절의 예가 본장 말미에 나와 있다.)
동작4. 다음에 알라후 아크바르 를 외면서 머리를 직각으로 구부려,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한다.
수브하나 랍비얄-아지임
(나의 주 위대하신 이여 영광을 누리소서 3번 반복)이것을 일컬어 루크라고 한다.
그 다음에 다시 기립자세를 취하며 이렇게 말한다.
싸미 알-라후 리만 하미다 ;랍바나 라칼-함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시나니 ;우리의 주여 찬미를 받으소서)
이 말을 할 때 손은 양편에 그대로 둔다.
동작5. 다음에 예배자는 알라후 아크바르 라고 말하며 양발의 발가락과
양 무릎과 양손과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한다.
이것은 수주드 자세인데 다음과 같은 말이
따른다.
수브하나 랍비얄-알라
(나의 주, 지고하신 이여 영광을 누리소서, 3번 반복)
동작6. 다음에 알라후 아크바르 라고 말하며, 줄루스 곧 앉은 자세의 짧은 휴식에 들어간다 :
왼발 바깥쪽 그리고 오른발 발가락-곧추 세운다-을 바닥에 닿게 하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 다음에 처음 할 때와 같은 말을 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부복한다.
이로써 예배 한 라카가 끝난다.
동작7. 첫 번째 라카가 끝나면 예배자는 일어나면서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하고 기립자세를
취하여 두 번째 라카를 준비한다. 그리고 첫 번째 라카에서와 마찬가지로 꾸란 서장(파티하)을
낭송하고 이어서 꾸란 한 구절을 더 낭송한다.
동장8. 첫 번째 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경배와 두 번의 부복을 마쳤으면, 줄루스
때처럼 앉은 자세를 취하고 2부로 되어 있는 따쉬아후드(장말(章末)에 나와 있다)를 낭송한다.
동작9. 끝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이렇게 말한다. 앗 쌀라무 알라이 꿈 와 라흐마 뚤-라
(평화와 하나님의 자비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다음에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같은 인사말을 한다.
이것이 예배 두 라카를 거행하는 방식인 바 의무냐, 추가의무냐를 불문한다.
이 예배를 제대로 거행할 줄 알면 다른 예배는 모두 거의 쉬워진다. 이슬람 예배에서는 동작
하나 하나 말 한마디가 큰 의의를 수반하여 매우 심오한 의미를 상한다는 것을 밝혀 둔다.
2. 정오 예배(쌀라뚤-주흐르)
이 예배는 순나 네 라카 그 다음에 파르드 네 라카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순나 두 라카로
이루어진다. 이 예배에서 파르드는 다음과 같이 거행한다.
(ㄱ) 처음 두 라카는 아침 예배와 같은 식으로 거행한다. 파티하와 꾸란 한 귀절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낭송한다. 경배와 부복 자세를 취하는 방식은 같다.
(ㄴ) 두 번째 라카 이후 따쉬아후드를 낭송할 때, 예배자는 제 1부 끝에서 멈추고 다시 기립자세를 취한다.
(ㄷ) 다음에 세 번째 라카에서는 파티하만 낭송하고 꾸란 구절을 덧붙이지 않는다.
(ㄹ) 세 번째 라카가 끝나면 일어서서 네 번째 라카를 준비하고 세 번째 라카에서처럼
파티하만 낭송한다.
(ㅂ) 다음에 오른쪽과 왼쪽을 향하여 평화의 인사를 한다.
(ㅅ) 순나 두 라카를 드리는 방식은 아침 예배와 같지만,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3. 이른 오후 예배(쌀라뚤-아스르)
이 예배는 순나 네 라카 그 다음에 파르드 네 라카로 이루어진다.
거행 방식은 정오 예배와 같으며 역시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4. 해질녘 예배(쌀라뚤-마그립)
이 예배는 파르드 세 라카 그 다음에 순나 두 라카로 이루어진다. 처음 두 라카를 올릴 때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할 수도 있고 들릴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세 번째 라카에서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거행 방식은 정오 예배나 이른 오후 예배와 같지만, 네 번째 라카가 빠지고,
파티하 낭송과 경배, 부복에 이어지는 마지막의 앉은 자세를 여기서는 세 번째 라카 이후에
취한다는 점이 다르다. 세 번째 라카는 평화의 인사로 끝난다. 순나 두 라카는 이른 아침
예배와 같은 방식으로 올린다.
5. 밤 예배(쌀라뚤-이샤)
이 예배는 파르드 네 라카 순나 두 라카 그리고 위뜨르)) 여러 법학파들 사이에 해석상 조금씩
차이가 있다. 위뜨르를 요구하지 않는 학파들도 있다. 학파에 따라서는 약간의 변화를 가하여
이른 예배에 위뜨르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위 있는 학파 중 어느 하나를 따르면
된다.(순나 보다는 높고 파르드 보다는 낮다) 세 라카로 이루어진다. 파르드 네 라카 중에서
처음 두 라카를 올릴 때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할 수도 있고 들릴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그 이외에는 정오 예배나 이른 오후 예배와 같은 방식으로 거행한다. 순나 두 라카를 거행하는
방식은 이른 아침 예배와 꼭 같다.
위뜨르 세 라카는 해질녘 예배와 똑같이 거행되나 두 가지 예외가 있다 :
(ㄱ) 세 번째 라카에서 파티하 다음에 꾸란 한 구절이 따른다. 그리고
(ㄴ) 경배 이후 부복 이전 예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알라 훔마 인나 나쓰따이이누까, 와 나쓰따흐디까, 와 나쓰따그피루까, 와 나뚜부 일라이까,
와 누우미누 비까, 와 나따왁 칼루 알라이까, 와 누쓰니 알라이칼-카이라쿨라후나쉬쿠르까,
와 라 나크푸루까, 와 나클라우 와 나뜨루쿠 만 야프주르크 알라훔마 이야카 나아브드, 와라카
누쌀리 와 나쓰주드, 와 일라이카 나쓰우-와 나흐피두 나르주 라흐마따까, 와 나크쉬아
아자-바까, 인나 아자-바카 빌-꾸파리 물하꾼 와 쌀릴-라훔마 알라 싸이이디나 무함맏 와 알라
알리히 와 싸흐비히 와 쌀림.
이것을 꾸누트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오 하나님! 저희가 당신의 도움과 인도를 간구하오며, 당신의 보호를 구하나이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의지하며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감사하며, 당신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 하리이다.
정녕코 당신께 불순종하는 자와 상존하지 아니하고 저의 곁을 떠나리이다.
오 하나님! 당신께 저희가 엎드려 비오며 당신을 향해 나아가며 당신께 속히 복종하여 당신의
자비를 저희가 바라옵고 당신의 형벌을 저희가 두려워하옵니다. 당신의 형벌이 불신자들에게
내려짐이나이다.
오 하나님! 저희의 지도자 무함맏과 그분의 백성과 그분을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을 높여
주옵소서.
이 꾸누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을 터득할 때까지 그와 유사하게만 낭송해도
족하다. 모든 순나(추가의무) 예배는 개별적으로 올려야 한다. 이-드 예배나 라마단 달의
위뜨르를 제외하고는 집단적으로 올릴 수 없다.
파르드 예배를 놓친 사람은 순나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 대신 놓친 예배를 벌충하여
의무예배를 올려야 한다. 또(순나 예배를 수반하는)파르드 예배가 끝난 경우에도 역시 순나
예배를 올릴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예배를 놓쳐 벌충하고자 한다면, 파르드만 올려야 한다.
예배자가 전혀 아랍어를 낭송할 줄 모르는 경우에는, 자기가 아는 다른 말을 써도 된다.
다만 그렇게 해서 아랍어와 같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아랍어의 낭송의 편의를 위해
음역을 제시해 두고 있다.
파르드 예배는 이맘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올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집회는 마스짇에서 여는게 최적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열 수도 있다.
회중(자마아) 예배
1. 예배 참석자들 중에서 뽑은 이맘이 회중을 인도한다. 이맘은 종교적 지식과 경건성에
의거하여 뽑아야 한다.
2. 회중의 이맘은 혼자 앞에 나와 서고 피인도자들은 이맘의 뒤에 직선으로 도열하여 전원
끼블라를 향한다. 두 사람 곧 이맘과 피인도자 한 명으로 회중을 이룰 수 있다.
3. 이맘은 예배 의사를 밝히고 나서 파티하와, 보충으로 꾸란 구절을 들릴 수 있게 낭송한다.
이는 이른 아침 예배와 처음 두 라카의 해질녘 예배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맘이 꾸란을
큰 소리로 낭송하면 피인도자들은 잠자코 겸허하게 경청한다. 이맘을 쫓아서 파티하나
다른 귀절을 낭송하지 않는다.
4. 이맘이 파티하를 마치면 피인도자들은 아민하고 말한다. 이맘이 경배 자세에서 기립한 후
싸미알-라후리만 하미다 (하나님은 당신께 감사하는 자들을 받아들이시느니라)라 말하면
피인도자들은 이렇게 회답한다 : 랍바나 라칼-함드 (우리의 주여 찬미를 받으소서)
5. 피인도자들은 이맘을 따라 움직여야 하며 이맘을 앞질러 행동해서는 안 된다. 만약
피인도자가 어느 한 동작에서라도 이맘 행세를 하면, 이 사람의 예배는 무효가 될 것이다.
6. 집단 예배는 이맘이 이맘의 자격으로 예배를 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무효다.
피인도자들 역시 자기가 지금 같이 올리고 있는 예배에서 이맘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
7. 예배가 시작된 후에 와서 회중에 들어갈 경우, 한 라카 혹은 그 이상을 놓쳤더라도 이맘을
따라야 한다. 이맘이 마지막 평화의 인사를 하여 예배를 끝마치더라도 늦게 온 사람은 여기에
상관없이 기립자세를 취하여 처음의 놓친 라카를 벌충한다. 경배 자세에서 일어나기 전에
회중에 들어갈 경우에는 그 라카에 한하여 처음부터 참석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경배
이후의 자세에서 참석한 경우에는 그 라카는 놓친 것이 되고, 이맘이 예배를 끝낸 직후에
개별적으로 이를 보충해야 한다.
8. 무슬림은 집단 예배를 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집단 예배는
통일된 목적과 행동, 하나님 앞에서의 복수적 경건과 겸손, 무슬림 상호의 효과적 결속 그리고
공공질서와 상호 호응의 멋진 현현(顯現)이다.
이슬람 회중은 인종 차별, 사회적 특권계급, 인간의 편견에서 야기되는, 인류가 당면한 첨예한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이다. 이슬람의 회중 예배에서는 왕과 신하, 부자와 빈자, 백인과
유색인, 일등계급과 이등계급, 앞자리와 뒷자리, 특별석과 일반석이 따로 없다. 세속적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예배자 전원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일사 분란 하게 움직인다.
6. 금요 예배(쌀라뚤-주므아)
지금까지 일상 예배를 다루었다. 이제 금요일의 주 회중 집회로 넘어간다. 이 예배는 다른
예배를 올리도록 되어 있고 또 면제의 합당한 사유가 없다면 무슬림 누구나가 지켜야 할
의무다. 이 예배는 매주 금요일에 보게 되는데 특히 다음의 이유로 해서 중요하다.
금요 예배는:
1. 무슬림이 집단적인 헌신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기회다.
2. 지난주를 영적으로 결산하고 다음 주를 준비하기 위한 약속이다. 사업하는 사람의 경우나
꼭 같다.
3. 무슬림들이 새 힘을 얻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유대와 사회적 결속을 윤리적 영적 토대 위에
다짐하기 위한 집회다.
4. 무슬림들이 다른 어떤 관심사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금요 예배의 하이라이트
금요 예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예배 시간이 정오 예배 시간과 같고, 정오 예배를 대체한다.
2. 이맘이 인도하는 회중에서 드려야 한다. 한 사람이 혼자서 이 예배를 드릴 수는 없다.
3. 이 예배는 놓치고 나면 벌충할 수 없다. 대신, 통상 이 예배에 의해 대체되는 원래의 정오
예배를 드려야 한다.
4. 금요일에도 다른 요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상 업무와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 예배가 끝난
이후 세속활동을 다시 시작해도 좋다.
5. 금요 예배는 마스짇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마스짇에서 거행해야 한다. 마스지드가 없다면
다른 장소 예를 들어 집, 농장, 공원 등에 모여서 거행해도 된다.
6. 예배 시간이 되면 아잔을 부른다. 다음에 순나 예배 네 라카는 개별적으로 드린다. 정오
예배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한다. 이 부분이 끝나면 청중을 향하여 서서
설교(꾸뜨바)를 한다. 설교는 예배의 필수부분이다. 이맘이 설교하는 동안, 누구도 말하거나
기도해서는 안 된다. 참석자는 제각기 앉은 자세에서 설교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경청해야
한다.
7. 설교(꾸뜨바)는 2부로 이루어지는데 각각 하나님을 찬미하는 말과 예언자 무함맏을
축복하는 기도로써 시작된다. 제 1부에서는 꾸란 구절 하나 하나를 낭송 설명하여 훈계와
충고를 베풀어야 한다. 제 1부가 끝나면 이맘은 앉은 자세에서 잠시 휴식하고 다시 일어서서
전반적 관심사를 거론할 수 있다. 특히 설교 2부에서 이맘은 모든 무슬림의 전체 복지를
간구한다.
8. 그 후에 이까마를 하고 이맘의 인도를 따라 의무 두 라카를 올린다. 이맘은 꾸란의
파티하와 다른 구절을 들릴 수 있게 낭송한다. 이로써 예배가 끝나게 된다. 다음에 두 라카를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하여 개별적으로 올린다.
순나의 처음 네 라카와 나중 두 라카는 집에서 올려도 된다. 또한 먼저 번에 놓쳐서 벌충해야
하는 의무 예배로써 이를 대신할 수도 있다.
주집회 혹은 이드 예배 참석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말쑥하게 해야
한다. 전부 세정을 해야 할 의무적 이유는 없지만 목욕을 하도록 특히 권하는 바이다. 목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상쾌해지기 때문이다.
축제(이-드) 예배의 의의
이-드는 행복의 회귀를 뜻한다. 이-드 예배는 무슬림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앞에 설명한 일상 예배의 장범과 주집회(주므아)의 효과와 무슬림 간의 연례 재회의 특성을
아울러 갖는 것이 바로 이-드 예배다. 이러한 이-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을 이둘-피뜨르(破斷祭)라 부른다. 이날은 이슬람 력 10월 곧 샤우왈월 초하루다.
꾸란이 계시되고, 단식을 하는 날인 라마단 달의 다음이다.
두 번째 이-드를 이둘-아드하(희생제)라고 부른다. 이날은, 이슬람력 마지막 달 곧 줄-힛자월
10월이다. 핫즈(멕카순례)여정이 끝난 다음이다. 핫즈는 순전한 헌신의 여정이다.
이슬람의 이-드는 모든 점에서 특이하다. 여타의 종교나 사회 정치제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각 이-드는 숭고한 윤리적, 영적 특성을 갖는 외에도 다음과 같이 비길 데 없는
특성을 지닌다.
1. 각 이-드는 무슬림 각자가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서 해낸 괄목할 만한 성취를 기리는 건전한
축전(祝典)이다. 첫 번째 이-드는, 한달 전체에 걸쳐 낮 동안에 절대적으로 단식하는 기간이
지난 후에 돌아온다. 두 번째 이-드는, 멕카 핫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핫즈의 여정은
무슬림의 세속적 관심사를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원한 음성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 준다.
2. 각 이-드는 감사의 날이다. 무슬림들은 이날 모여 형제의 정이 오가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드에 앞서 자기들의 영적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러한 감사 형식은 영적 헌신이나 언어적 표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을 훨씬 초월하여
사회적 인도주의적 정신의 당당한 모습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라마단의 단식을 마친
무슬림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첫 번째 이-드 일에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무슬림은 물론 멕카의 핫즈 여정을 마친 무슬림도 제물을
도살하여 희생을 바치고 나서 이 제물을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자선을 베풀고
제물을 나누어주는 것은 이-드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감사 형식은 영적 헌신과
인도주의적 자선의 건전한 결합인 바 이러한 결합은 이슬람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3. 각 이-드는 기념의 날이다. 무슬림들은 아무리 즐거운 시절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숭배의 복수적(複數的) 회기에 즈음하여 이날을 새롭게 시작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자신들이 그 분의 은총을 기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고인이 된 자를 기억하여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자를 기억하여 도움의
손길을 뻗치며, 슬퍼하는 자를 기억하여 동정과 위로를 베풀고 병든 자를 기억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문안하여 쾌차를 빌어 주며 부재자를 기억하고 충심으로부터 안부인사를 하고
진정어린 친절을 보인다. 따라서 이날의 기념의 의의는 한계를 전부 초월하여 인간생활의
광범위한 차원으로 퍼져 나간다.
4. 각 이-드는 승리의 날이다. 자기의 영적 권리와 성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는 사람은 승리의
정신으로 이-드를 맞이한다. 이-드에 관련된 영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승리자가
된다. 자기의 욕망을 엄하게 다스리고 건전한 자제력을 행사하며 수련 생활의 묘미를 맛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자질을 획득한 사람은 최대의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자질을 획득한 사람은 최대의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자제하고
욕망을 훈련할 줄 아는 사람은 죄와 악, 공포와 비겁, 악덕과 무례, 질투와 탐욕, 굴욕과 기타
온갖 예속의 원인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의 성취를 특징으로 하는 이-드를
맞이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자기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드는 승리의
날이다.
5. 각 이-드는 결실의 날이다. 하나님께 봉사하여 훌륭하게 일한 모든 사람들, 모든 충실한
신자들은 이날 자기들이 베풀 선행의 결실을 거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축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슬람 사회는 종교적 형제애와 사회적 책임을 위하여 응당
치러져야 할 기부금을 거둔다. 기부금은 이러한 형제애와 책임을 의식하여 사랑과 동정과
관심이 교차하는 속에서 지불된다. 이슬람 사회의 성원 각자는 어떠한 식으로든지 결실을
거두거나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동료신자들의 전체 복지에 진정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무한히 베풀어주신다. 베풀 수 없는 수혜자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베풀어주는 것에 대하여 동료 기부자들이 내놓은 기부금을 받게 된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서로 어울려 하나님의 마련을 향유하는 것이니 이날은 정녕 훌륭한 결실의 날이 될
것이다.
6. 각 이-드는 용서의 날이다. 이날의 집회에 모인 무슬림 모두는 온 마음을 다하여 용서와
강한 신앙심을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을 다하여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보증하신 터이다. 이 순수한 대회, 고도로 영적인 집회에서 무슬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적으나마 악감을 품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러워 질 것이다.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이 형제끼리의 영적인 대회에 깊이 감동되어 어떤 악감이 생기더라도
이를 극복하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란히 이 날의 정신에 호응하여 자기의
마음과 영혼을 순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자기에게 해를 입혔더라도 그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며 용서를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고도로 헌신적인 대회의 정신이 용서해야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용서를 베풀 때 하나님의 용서의 미덕이 자비롭게 시현되고 또 무슬림 상호간에 이런
미덕이 오고 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용서의 날로서의 이-드의 특징이다.
7. 각 이-드는 평화의 날이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수련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이룩한 무슬림은 하나님과 신성 불가침의 평화조약을 굳게 체결한 것이다. 일단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사람은 자신과 평화를 이루고 결국 세계와 평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이-드를 올바로 경축하는 무슬림은 실제로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평화협정의 체결을
경축하는 것이니, 이것이 평화의 날로서의 이-드의 특징이다.
평화와 감사의 날, 용서와 도덕적 승리의 날, 훌륭한 결실과 주목할 만한 성취의 날, 그리고
기념 축제의 날이 곧 이-드인 바, 이것이 이슬람의 이-드의 본연의 의의인 것이다. 이슬람의
이-드는 이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훨씬 이상이다. 그것은 이슬람의 날이며, 하나님의 날이기
때문이다.
축제(이-드) 예배(쌀라뚤 이-드)의 거행
1. 금요예배를 볼 때처럼 예배자 각자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새로,
활기차게 이-드 집회에 임해야 한다. 마스짇 혹은 대회장소에서 실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구두로 예배를 올린다. 이것을 따크 비-르라 하는데, 장말(章末)에 보면 나와 있다.
2. 이-드 예배 시간은 일출 시간 이후와 정오 이전의 사이다. 아잔이나 이까마는 할 필요가
없다. 예배는 두 라카로 이루어지는데 매 단위에서 이맘은 꾸란의 파티하와 다른 한 구절을
들릴 수 있게 낭송한다.
3. 이맘은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라 말하며 예배를 인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 다음에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한다. 손을 양쪽 귀로 올렸다가 말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양편으로 내린다. 세 번째 따크 비-르(말하기)가 끝나자 이맘은 다른 예배를 볼
때처럼, 배꼽아래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갠다. 예배자는 한 동작 한 동작씩 이맘을 따라
행하며 말과 행동을 이맘과 정확히 일치시킨다.
4. 첫 번째 라카가 끝나면 이맘은 일어서서 두 번째 라카를 준비하며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한다. 다음에 첫 번째 라카에서 한 것처럼 같은 동작을 취하면서 같은 말을 세 번 더 한다.
그리고 회중도 같은 방식으로 따라 한다.
5. 예배 두 라카가 끝나면 이맘은 설교를 행한다. 설교는 이부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잠깐
휴식한다. 제 1부는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말을 아홉번 되풀이함으로써 시작되며, 제 2부는
같은 말을 일곱 번 되풀이함으로써 시작된다. 이어 설교에 들어가면 금요일 설교에서 하는
것처럼 훈계와 충고를 펴 나간다.
6. 그해 첫 번째 이-드 설교에서 이맘은 싸다까 뚤-피뜨르(단식의 자선)문제를 주지시켜야
한다. 이것은 의무적인 세금인 바, 이것을 낼 수 있는 모든 무슬림은 그것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끼의 정식 식사나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베풀어야 한다. 식구가 딸린
경우, 매 식구마다 같은 식으로 베풀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기와 식구를 합해서 네 명인 경우,
최소한의 네 끼의 정식 식사나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배보다 아주 일찍 이러한 자선을 베푸는 것이 훨씬 보람있고 바람직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축제의 즐거운 기분으로 그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7. 두 번째 이-드의 설교에서 이맘은 희생의 의무를 주지시켜야 한다. 이둘-아드하(희생제)일에
자력이 있는 모든 무슬림은 제물을 바쳐야 한다. 한 가구 당 양이나 염소 한 마리면 족하다.
이-드일에 예배를 보고 나서 희생동물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이틀째 혹은 사흘째 잡는
것도 인정된다. 희생동물의 고기에 관하여 성꾸란은 이렇게 지시한다.
그 고기를 먹고, 가난하나 만족하는 사람과 구걸하는 자…에게 먹일지니라(꾸란, 22:36)
같은 곳에서 성 꾸란은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고기에 관심이 없으며 또 그 고기를 취하지도
아니 하시는 바, 그 분이 취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숭배자들이 보이는 경건함이라고
단언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드 예배는 이른 아침의 의무(파르드)예배를 대신하지 않으며 그 자신 역시
다른 예배에 의해 대신될 수 없다.
두 이-드 예배 이전 그리고 두 번째 이-드에 이어 삼일동안 거행되는 정규집회 이후에
올려지는 따크 비-르를 일컬어 따크비-룻 따쉬리-끄라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알라후 아크바르,(3번)
라 일라하 일랄-라. 알라후 아크바르(2번)
왈 릴-라힐-함두 알라후 아크바르 카비-라 왈-함두릴-라히 까씨-라 와 수브 하날 라히
부끄러딴 와 아씨-란 라 일라하 일랄-라후 와흐다 싸라까 와 아드하, 와 나싸라 압다,
와 아 앗자 준다후 와 하자말 아흐자바 와흐다후 라-일라하 일랄-라후 와라 나흐부두
일라-이-야후 무크리씨-나 라훗 디-나 왈라우 까리할-까피룬 알라훔마 쌀리
알라-싸아디나-무함맏 와왈라-아-리 싸이디나-무함맏 와알라-아스하-비 싸이디나-무함맏
와알라-안싸-리 싸이디나-무함맏 와알라-주르리-야띠 싸이디나-무함맏
와 쌀림 따쓰리-만-까씨-란 이 따크 비-르의 뜻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외에 신은 없도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2번),
찬미가 그분의 것이다. 정녕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 넘치는 찬미가 그분의 것이로다.
주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하나님 곧 한 분이신 참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당신의 종(무함맏)을 후원하시며
당신의 용사들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 주고, 동맹한 적군을 가차없이 무찔러 버리시도다. 하나님 외에 신은 없나니 우리는 오직 그분만을 숭배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노라
비록 불신자들이 분을 낸다 하더라도. 오 하나님! 우리의 주인 무함맏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백성들과, 우리의 주인 동료들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지지자들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아내들과, 우리의 주인 무함맏의 자손들을 높이사, 축복하여 주옵시며
저들 모두를 큰 화평으로 맞이하여 주옵소서
약식 예배
1. 집을 떠나 48마일 이상을 갈 작정으로 여행 중이라면, 의무 예배 네 라카를 각 두 라카로
줄여야 한다. 이러한 약식 예배는 정오(주흐르) 예배, 이른 오후(아스르) 예배, 밤(이샤) 예배에
적용된다. 이른 아침(파즈르) 예배와 해질녘(마그립) 예배는 변함없다.
2.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거기에 15일 이상 머물러 있을 작정이 아니라면 이러한
편의는 그대로 유효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약식 이전의 예배를 원래의 라카대로 올려야 한다.
3. 이런 조건에서 여행하는 동안 이른 아침 예배(파즈르)의 순나 두 라카와 밤 예배(이샤)에
따르는 위뜨르를 제외하고는 모든 추가 의무 예배(순나)가 면제된다.
예배를 금하는 때
무슬림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의무 혹은 추가 의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금지된다.
1. 해가 떠오르고 있을 때
2. 해가 남중에 있을 때
3. 해가 떨어지고 있을 때
4. 월경기간이나 해산, 수유로 인해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기간에 있을 때
5. 부정을 탔을 때, 일부 전부를 불문한다.
예배 지체의 벌충
1. 일반적으로 무슬림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지체하는 합당한 사유가 없을 경우 벌받을 죄에 해당한다.
2. 해산하였거나 월경 중인 여자 그리고 정신이상이거나 한동안 의식불명인 사람을 제외하고
무슬림 각자는 지체된 의무 예배를 벌충해야 한다.
3. 지체된 예배를 벌충할 때는, 원래의 형태대로 올려야 한다. 예를 들어 지체 예배가 바로
약식 예배라면, 약식대로 올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정식 예배를 올려야 한다.
4. 지체 예배 상호간 그리고 지체 예배와 현재 예배 상호간에는 순서를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상 맨 처음 예배를 맨 먼저 올려야 한다. 다만 예배를 너무 많이 놓쳐서 일일이 그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거나, 지체 예배와 현재 예배를 다 올릴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예배를 먼저 올리고 지체 예배를 나중에 올려도 된다. 아무튼 무슬림은 자기가
아는 한 자신의 기록에 오점이 없으며 놓친 예배도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위 예배
이 예배는 라마단 달의 특징인 바, 밤(이샤) 예배 다음에 올려진다. 여덟 내지 스무 라카로
이루어지는데 두 라카씩 올리고 각 두 라카 사이에 잠깐 휴식하게 된다. 이 예배는 집단적으로
그리고 밤 예배의 마지막 부분인 위뜨르 이전에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예배의 무효
다음 행위 중 어느 하나라도 하면, 그 예배는 무효가 된다.
1. 예배 행위나 동작에서 이맘을 앞지르는 행위
2. 예배 중 먹거나 마시는 행위
3. 예배의 진행규정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는 행위
4. 멕카 방향으로부터 위치를 바꾸는 행위
5. 예배의 행위나 동작 이외의 행위나 동작을 노출시키는 행위
6. 세정을 무효화시키는 배설행위, 예를 들어 소변, 대변, 방귀, 혈액 유출 등
7. 기립 꾸란 낭송, 루꾸, 수주드 등과 같은 예배의 필수적 행위 중 어느 하나를 지키지 않는
행위
8. 남자의 경우, 예배 도중 배꼽과 무릎 사이를 노출시키는 행위,
여자의 경우, 손 얼굴 발 이외의 신체부분을 노출시키는 행위
무효가 된 예배는 제대로 다시 올려야 한다.
장례예배(쌀라둘-자나자)
1. 고인이 된 무슬림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공공의 의무(파르드 키파야)다.
이것은 무슬림 여러 명이 예배를 올려야 하며, 당시에 참석한 몇 명의 무슬림이 예배를 올리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책임이 면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2. 무슬림이 죽으면, 전신-세정(우두)하는 노출부분에서 시작한다-을 비누나 다른 세제 혹은
소독제로 여러 차례 씻어내어 눈에 띄는 불결물을 모두 없애야 한다. 시신을 아주 깨끗하게
씻어 냈으면 흰 무명 천으로 시신을 감싸서 신체의 모든 부위를 가린다.
3. 다음에 시신을 영구차나 관에 넣어 예배장소로 운구한다. 예배장소는 마스짇이나 기타
깨끗한 구내로 한다. 시신의 위치는 멕카쪽으로 얼굴을 향하게 잡는다.
4. 예배 참석자 전원은 먼저의 세정이 유효한 상태에 있지 않는 한 세정을 해야 한다.
이맘은 시신 옆에 서서 멕카의 끼블라를 향하고 피인도자들은 이맘 뒤에 도열한다.
5. 이맘은 손을 양쪽 귀로 올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인을 위해 예배드리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도다)라 말한다. 예배자들은 이맘의 인도를
따라서 이맘이 먼저 한 다음에 다른 예배처럼 배꼽 아랫부분에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갠다.
6. 다음에 이맘은 다른 예배에서 통상 낭송되는 싸나 와 파티하 만을 나직한 목소리로
낭송한다.
7. 이 단계에서 이맘은 양손을 올리지 않고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하고 따쉬아 훗 제 2부
( 알라 훔마 쌀리 싸이디나 무함맏 에서 시작하여 끝까지)를 낭송한다.
8. 다음에 양손을 올리지 않고 알라후 아크바르라 말하며 세 번째 따크비-르를 올리고 적당한
말을 생각해서 기도(두아)를 드리되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좋다.
알라훔마 그피르리 하이이나-와 마이이띠나-와 샤히디나-와거-이비나-, 와자까리나-와운-싸-나
와써기-리나와 까비리나-. 알라훔마 만 아흐야이 따후 민나-파아흐이히 알랄-이슬람와만
따와파이따후 민나-파따와파후 알랄-이슬라-미 알라훔마라-따흐림나-아즈러후 와라-따프
띤나-나바아 다후.
오 하나님! 저희의 삶과 죽음에 용서를 베푸시며, (여기에)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 젊은이와
노인들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게 용서를 베푸소서. 오 하나님! 저희들 중 당신께서 삶을 허락한
사람은 누구든지 이슬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 주시오며, 저희 중 당신께서
죽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앙 안에서 죽을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고인을 잃음에 당하여 저희가 인내하오니 그 보상을 저희에게 거두지 마시오며
저희로 고인을 따라 시련을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9. 다음에 양손을 올리지 않고 네 번째 따크비를 하고 이어 다른 예배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좌우를 향하여 평화의 인사말을 한다. 기억해 둘 것은 뒤에 도열한 예배자들은
이맘의 인도를 따라 단계적으로 동작하고 저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같은 내용을 낭송해야
한다는 점이다.
10. 예배를 마친 후, 얼굴을 멕카 방향으로 두고 시신을 내려 매장한다. 시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비쓰밀-라히 와빌-라히, 와알라-밀라띠 러쑤-릴라-히 쌀랄-라-후 알라이히 와 쌀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사도의 순나(전통)에 따라 고인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평화가 내려지이다.
이것 말고도 달리 적절한 기원을 할 수도 있다. 고인이 사춘기 이전의 아이인 경우에는
같은 방식으로 예배를 올린다. 세 번째 따크비르 이후 앞에서처럼 길게 기도하는 대신,
예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알라훔마-즈알후라니-파라딴-, 와즈알후라나-두크란-, 와즈알후라나-싸-피안 와무싸파 안
오 하나님! 저를 우리의 선구가 되게 하시고 저를 우리의 상, 우리의 보배가 되게 하시며 우리의 탄원자가 되게 하여 저의 탄원을 들어 주업소서
장례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선 자세로 올린다. 장례순서 하나가 지날 때마다, 그것이
무슬림이 하는 순서들이니, 무슬림 모두는 선 자세로 고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남자의
염(殮)은 남자가 하고 여자의 염은 여자가 한다. 여자라도 자기의 남편은 염할 수 있고 남녀를
불문하고 어린 자식은 염할 수 있다. 염할 때는 손에 장갑을 끼거나 헝겊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시신의 음부는 눈에 띄지 않게 염해야 한다.
무덤은 표가 나게 세우되 소박하게 해야 한다. 시신은 규격에 맞는 흰 무명천으로 덮어야
한다. 무덤을 사치스럽게 만들거나 시신에 좋은 옷 등을 입히는 것은 이슬람식이 아니다.
그 것은 가당치 않는 허영이며 여러모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재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고인을 매장할 때는 비용을 많이 들여 연회를 크게 여는 북미의 일부 무슬림들의 관습 역시
이슬람식이 아니며, 다른데 바치면 더없이 유익한 시간과 돈을 무책임하게 낭비하는 것이다.
예배 총론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무슬림의 정신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어야 하며
그 혀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예롭게 하는 말로 분주해야 한다. 전술한 예배 유형 말고도
예언자 무함맏이 예배를 강권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런 경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비가 과도하게 내릴 때
2. 가뭄이나 비가 모자랄 때
3. 일식할 때
이런 경우 무슬림은 권고대로 자기가 원하는 라카 수와 시간만큼 예배를 올린다.
때에 따라서는 일반 예배에 규정한 식에 따르지 않고 달리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할 때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도움을 의지하며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자비를 간구함을 나타낸다.
1. 해산할 때
2. 결혼식을 올릴 때
3. 취침할 때와 기상할 때
4. 출타할 때와 귀가할 때
5. 화장실을 출입할 때
6. 여행을 떠나거나 도시에 들어갈 때
7. 승마하거나 승차할 때
8. 승선할 때
9. 재난을 당할 때
10. 거울을 대할 때
11. 목욕이나 세정 후에
12. 첫 수확물을 받을 때
13. 묘를 방문할 때
각 경우에 무슬림은 권고를 따라 적절하고 합당한 말로써 하나님을 기념하고 자기의 느낌과
깊은 사례를 표시한다.
이 경우에도 기도하는 식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아무 것이나 자기가 아는 기도를 올려도 된다.
다만 그 내용이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념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에 적절한 기도 유형으로
쓰이는 특별한 실례 몇 가지를 들어 둔다.
1. 식사하거나 마시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비쓰밀 라히 와 알라-바러 까띨-라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더불어)
또 식사하기 전에 파티하를 낭송하는 습관을 들여도 좋다.
2. 식사를 마친 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알-함두릴라 힐-라디-아뜨아미나-와싸꺼-나-와자알라나-무슬리민-
(찬미는 오직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하나니, 그분은 우리에게 베푸사 먹고 마시게 하시며
우리로 무슬림이 되게 하셨음이라.)
3. 문병갔을 때는 이렇게 말한다.
아즈히빌-바으싸 럽반-나씨. 와쉬피 안딴-샤피, 라쉬파-아일라쉬파-우까 쉬파-안 라 유거-리
싸거만
(병을 물리치사 쾌차하게 하소서 오 만인의 주님이시여! 당신은 치료하는 분이시니
당신이 치료하지 않으시면 치료할 수 없나이다. 쾌차를 주사 병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이제 파티하 따쉬아 훗 그리고 짧은 꾸란 귀절 몇 개를 다룰 차례다.
1.파티하(서장 혹은 알-함드)
비쓰밀-라히르-라흐마-니-르-라히임, 알함두릴-라히럽빌-알-라미-인 아르러흐마-니르러 히임-,
말리끼 야우믿-디인. 이이야카 나으부두 와이이야카 나쓰따이-인,
이흐디낫-시러-딸-무스따까-임. 시러-딸-라지나 안암따 알라이힘 거이릴 마그두-비 알라이 힘
와랏-돠-라인. (아민)
이것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 이름으로 찬미를 받으소서.
온 세상을 소중히 하사 유지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분이시며 심판 날의 주인이시로다.
당신만을 저희가 숭배하오며, 당신의 도움을 저희가 구하오니 저희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당신이 자비를 베푸신 사람들, 진노를 사지 아니하는 사람들, 길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길로… (아민)
2. 따쉬아 훗
(ㄱ) 제 1부
앗-따히야 뚜릴-라히 왓 썰라와뚜 왓 따이이 받뚜, 앗 쌀라-무 알라이까 아이유한 나비이유
와러흐마 뚤라-히 와바러 까-뚜후 앗쌀라-무 알라이나-와알라-이바-딜라-힛 썰-리히-인.
아쉬하두 알라일라-하 일라-라-후 와흐다후라 싸리이깔 라후 와 아쉬하두 안나
무함마단-아브두후 와러쑤-루후.
해석
모든 존경과 모든 숭배와 모든 신성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도다.
오 예언자시여 당신에게 평화와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이 내려지이다.
우리 모두와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에게 평화가 깃들어지이다.
저는 우직 하나님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하오며,
무함맏은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하나이다.
(이 부분은 세네 라카로 이루어지는 예배에서 그 각 두 번째 라카 후에 낭송된다.
그 다음에 예배자는 기립하여 세 번째 라카를 준비한다.)
(ㄴ) 제 2부
알라훔마 쌀리 알라-싸이디나-무함맏 와 알라-알-리 싸이디나-무함마딘 까마-썰라이따
알라-싸이디나-이브러-히-임. 와 바-리까 알라-싸이디나-무함 마딘-와 알라-알-리 싸이디나-
무함마딘-까마 바럭크따 알라-싸이디나-이브러히-임 와 알라-알-리 싸이디나-이브러 히-임.
필알-라미-인 인나까 하미-둔 마지-둔.
해석
오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의 지도자(주) 아브라함과 우리의 지도자 아브라함의 백성을
높이셨듯이,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과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의 백성을 높여 주옵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지도자 아브라함과 우리의 지도자 아브라함의 백성을 축복하셨듯이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과 우리의 지도자 무함맏의 백성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진실로 당신은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고, 영예로운 분이시나이다.
(2부로 된 따쉬아훗은 예배를 마치는 마지막 단위에서 낭송된다. 제 2부가 끝나면 평화의 말이
이어지고 예배는 완결된다. 장례 예배에서는 세 번째 따크비이르 이후에 제 2부만 낭송된다.)
3. 꾸란의 짧은 구절
(ㄱ) 수러뚤 이크라스
비쓰밀-라 히르러흐마-니르러히-임 꿀후왈-라후 아하드 알-라훗-싸마드 람야리드 와람유우라드
와람 야쿨라후 꾸푸완-아하드
해석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하라 :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곧 한 분이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만인의 간구를 받으시는
분이시라 그분은 낳지도 태어나지도 아니 하시나니 그분과 동등한 자 없도다 (꾸란, 112장)
(ㄴ) 수러뚤 아스르
비쓰밀-라히르러흐마-니르러히-임 왈-아쓸르 인날-인싸 나라피-꾸쓰르 일랄-라디-나-와마누-와
아밀룻-쌀리하-띠 와따와-써우빌-학끼 와따와-써우 빗-써브리
해석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금을 통하여) 시간을
증거하나니 진실로 사람은 손해를 보고 있음이라 그러나 신앙을 지니고 의를 행하며 뜻을
같이 하여 진리와 다함 없는 인내를 서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 하도다.(꾸란 103장)
이런 짧은 구절 중의 하나가 처음 각 두 라카에서 파티하 이후에 낭송된다.
셋째, 넷째 라카에서는 파티하 이외의 낭송은 요치 않는다.
꾸란에는 짧고 쉬운 구절이 많이 있다. 무슬림 각자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가급적 많은
꾸란 구절을 암기해야 한다. 또한 꾸란의 가르침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꾸란을 읽는 것
자체가 고상한 숭배 형식이며 헌신의 보람찬 시간이다.
단식(싸움)
또 하나의 이슬람 특유의 윤리적 영적 특징은 단식제도의 규정이다. 단식은 문자적 정의에
의하면, 이슬람 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달의 전체에 걸쳐 동트기 전부터 해질녘까지
음식, 음료, 성교, 그리고 흡연을 완전히 삼감을 뜻한다. 그러나 이슬람 단식의 의의를 이런
문자적 의미에 한정시키는 것은 몹시 잘못된 생각이다.
이슬람이 이런 비길 데 없는 제도를 도입한 것은 마치 항상 자라며 무한한 덕과 아주 귀중한
산물을 생출하는 나무를 심은 격이었다. 다음에 이슬람 단식의 영적 의의를 설명한다.
이슬람 단식은:
1. 진정한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단식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곧 사랑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아는
사람이다.
2. 창조적 희망감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단식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하며, 그분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진정한 덕, 곧 효과적으로 헌신하고 정직하게 봉납(捧納)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덕을
심어 준다. 단식은 하나님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방심함이 없는 건전한 양심을 배양시킨다. 단식하는 사람은 누가 보든, 안 보든, 단식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단식을 할 때는 세속적 권위에 의해 행동이 저지되거나 단식이 강요되는
일이 없다. 단식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남이 보든, 안 보든, 충실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한다. 건전한 양심을 배양시키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5. 인내심과 비이기심을 고취시킨다. 단식을 할 때는 박탈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박탈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확실히 이렇게 직접 체험해 봄으로써
몇 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생필품을 박탈당한 사람이 당하는 극심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인도주의적 의미에서 이런 체험이 갖는 의의는 이런
체험을 해 본 사람이 누구보다도 빨리 같은 인간으로서의 처지를 동정하여 필요한
도움을 베푼다는 데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비이기심과 진정한 동정심을 웅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6. 절제와 의지력의 효과적인 실습이다. 단식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욕을 훈련하고
육체적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곧 인격자요,
의지력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다.
7. 투명한 영혼으로 초월의 경지에 들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여 경쾌한
몸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이 모두가 위를 가볍게 해서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인 바 의학적
지식과 생물학적 법칙 그리고 지적인 경험이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8. 현명한 저축과 건전한 가계 예산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덜 먹고 덜 마시면 그만큼 돈과
노력도 덜 드는데 상례(常例)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식은 가정경제와 가계예산을 익히는
영적인 학기(學期)다.
9. 노련한 적응 기술을 터득시킨다. 단식할 경우, 일상생활의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는데
주목하면 이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활 방식의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체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새로운 규칙에 순응하여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현명한 적응감각과
예기치 않은 곤경을 이겨낼 수 있는 자발적인 힘이 길러지게 되는 것이다. 건설적인 적응력과
동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이점에 있어서 단식이 미치는 효과를 쉽게 인식할 것이다.
10. 심신 단련과 건강한 생존의 기초를 닦아준다. 성월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또 매년 성월
마다 단식을 규칙적으로 지킨다면 확실히 고도의 단련과 훌륭한 질서감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를 쉬게 하여 소화기관을 이완시키면 위를 혹사시켜 초래되는 해가
영혼은 물론이고 신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완시킴으로써
신체가 평소의 무질서와 단절에서 해방되고 영혼이 계속해서 순수하고 평화롭게 빛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11. 사회적 귀속, 화합과 형제애, 하나님과 법 앞의 평등의 참다운 정신을 진작시킨다.
이러한 정신은 단식을 하는 사람이 그 자신 전체 무슬림 사회의 일원으로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동기로,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의무를 이행하고 있음을 의식한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당연한 결과다. 이처럼 훌륭한 이슬람의 제도에 견줄만한 것이 역사상 어느
시대인가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회학자는 아무도 없다. 고금을 막론하고 귀속 화합,
형제애, 평등을 외쳐오기는 했지만, 이러한 외침에 대한 반향은 미미하였고 또 그 성과라고
해 봐야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슬람의 인도의 빛이 없다면 사람들이 어디서
자신들의 목표를 찾을 수 있겠는가
12. 자기 안정과 자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보존, 승리와 평화를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다.
이러한 결과는 생생한 현실로써 단식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속에 반드시 나타난다.
단식을 제대로 하면, 자제하고 정욕을 완전히 다스리며 욕망을 훈련하고 모든 악의 유혹을
물리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안정시키고 그 존엄성과 성실성을 회복하며 악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입장에서는 것이다. 일단 이 모든 것을 달성하면 마음의 평화를 이룬
것인 바, 마음의 평화는 하나님과, 결과적으로 온 우주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는 원천이다.
이제 혹자는 이런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질지 모른다. 이슬람의 단식 제도가 그런 것이라면
또 그것이 이 점에 있어서의 이슬람의 실상이라면, 어째서 무슬림들은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의에 대해서는 다만 무슬림들이 역사상 어느 시대에 유토피아에서 삶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유토피아 실현은 역사상 한 현상으로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업적이었다.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이슬람 이외의 어떤 종교나 사회제도도 일찍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종교나 사회제도의 유토피아는 항상-때로는
분명하지만 때로는 막연한, 때로는 가깝지만 대부분이 요원한-이론 혹은 소망과 꿈의 범주에
머물렀지만 이슬람의 유토피아는 실현되었고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연출 실천되었다. 인간적
실천적 의미에서 이것은 이슬람의 유토피아가 바로 지상에서 재현될 수 있으며, 확고한 기초와
실천성 있는 제 원칙 위에 세워짐을 뜻한다.
오늘날 이슬람의 유토피아가 건설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복잡다난하지만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논의를 단식제도에 한정시켜 설명하면, 많은 무슬림들이 자신들에게 불행하게도 단식을
하지 않으며 고작 한다는 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단식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진정한 의의를 알지 못하여 결국 단식을 하면서도
거의 혹은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무슬림 들이 전체적으로 단식의
특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한 이유다.
또 혹자는 이슬람의 단식만 그런 게 아니다. 유태교의 유월절, 기독교의 사순절, 간디형 등과
같은 다른 유형의 단식도 마찬가지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무슬림들은 자기네
단식에 대해서만 독단적인 주장을 펴는 것인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예언자 중 그 누구라도
비방하거나 진리를 배척하거나 신성한 종교를 왜곡시키는 것은 무슬림으로서의 우리의 종교적
원칙과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아무 거리낌없이 이런 무책임한 죄를 범할
수 있겠지만 우리 무슬림은 그렇지 않다. 일단 이런 저급한 윤리 아니 부도덕에 빠지면 사실상
이슬람의 대열에서 벗어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단식의 제도가 역사 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무슬림에게 이런 제도를 규정하셨듯이, 이슬람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규정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타의 단식 유형을
규정하신 정확한 형태와 고유의 방식을 알지 못한다.-아는 사람이 많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고 사실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이러한 이슬람의 제도를
다른 유형의 단식과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주장을 실증할 수 있다.
비교 단식론
1. 타종교나 교의, 철학이나 교리의 경우에 단식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음식물 혹은 물질을
삼가지만 그 대신-역시 물질적 성격을 띠는-다른 것을 섭취하여 자기 마음대로 배를 한껏 채울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영적 기쁨과 도덕적 자양을 얻기 위해서 물질적 성격을 갖는-음식,
음료, 흡연 등을 삼간다. 무슬림은 물질을 전혀 섭취하지 않고 공복 상태를 유지한다. 영혼을
평온과 축복으로, 마음을 사랑과 동정으로, 심령을 경건과 신앙으로, 정신을 지혜와 결의로
채우기 위해서다.
2. 타종교나 철학에서의 단식의 목적은 항상 부분적이다. 영적 목적이나 신체적 필요 혹은
지적 수련을 위한 단식이지 결코 이 모두를 통틀어 그 목적으로 하는 단식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단식은 이러한 모든 유익과 기타 많은 목적 곧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인도주의적, 사적, 공적, 개인적, 집단적, 내적, 외적, 지방적, 국가적, 제목적 모두를 위한
것이다.
3. 비이슬람 단식은 어떤 물질을 부분적으로 삼가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만, 이슬람식 이
외에도 헌신과 숭배, 자선과 꾸란 연구, 사교성과 활기, 자기수양과 양심의 자각을 수반한다.
따라서 단식하는 무슬림은 자신이 전혀 딴 사람이 됨을 느낀다. 내면과 외면 모두가 순수하고
깨끗해지며 영혼이 투명해져서 완전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아는 한, 또 일상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다른 도덕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세속의
인연을 뿌리뽑지 않는 한 자신의 도덕적 목적을 이루거나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세속적 관심사와 이혼하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등한시하며,
단식이 반드시 끼게 되는 모종의 고행이나 엄한 수도생활에 의지할 필요가 생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하는 이런 종류의 단식은-여태까지 그래 왔듯이-정상적인 생활을 등진
굴욕적인 은둔 생활을 감추기 위한 구실로 이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슬람의 단식은
실생활과의 이혼이 아니라 그것과의 행복한 결혼이며, 은둔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장한 침투며
등한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풍요케 함인 것이다. 이슬람의 단식은 종교를 일상 생활과
이혼시키지 않으며 영혼을 육체와 분리시키지 않는다. 깨뜨리지 않고 조화시키며, 풀어지게
하지 않고 배어들게 하며, 해체하지 않고 메우고 벌충하는 것이 바로 이슬람의 단식이다.
5. 이슬람의 단식 시간표까지도 주목할 만한 현상을 보인다. 단식시기가 일년 중 어느 때에
고정되어 불변하는 경우와는 달리, 이슬람에서는 그 시기가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 달과
더불어 온다. 이슬람력은 태음력인데 달의 경과는 달의 위상변화(位相變化)에 따른다. 이럴
경우, 이슬람의 단식은 특정 연수에 걸쳐 일년 네 계절을 포함하여 가을과 봄을 거쳐 여름과
겨울 사이를 교대로 왕복 순환하게 된다. 음력의 성격상 라마단 달이 예를 들어 어느 해에는
1월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느 해에는 12월이 될 수도 있다. 두 해에 걸쳐 있는 경우도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무슬림이 다양한 차원에서 단식의 도덕적인 경험을 하고, 상이한
기후의 상이한 계절 곧, 때로는 낮이 짧고 추운 겨울에 때로는 낮이 길고 무더운 여름에
때로는 그 사이에 영적인 묘미를 맛보게 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의 다양성은 언제나,
활기에 찬 이슬람 제도의 인상적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무슬림의 준비성 역동성,
적응성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이것은 확실히 이슬람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건전하고 주목할
만한 요소다.
단식 기간
이미 지적한 대로, 단식 의무기간은 라마단 달이다. 하루의 단식 기간은 동트기 전에 시작해서
해가 떨어진 직후에 끝난다. 보통은 달력을 보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지만, 이런 달력을
이용할 수 없으면, 자기가 찬 시계나 태양의 위치 혹은 지방신문을 보든지 기상대 등에
문의해야 한다.
라마단의 단식은 책임을 질 수 있고 건강한 무슬림(무 칼리프) 모두의 의무다. 한편 이외에도
예언자 무함맏의 관습(전통)을 따라 단식을 강권하는 경우가 있다. 매주의 월요일과 목욕일,
라마단의 도래를 예고한 두 개의 달 곧 라잡 달과 샤반 달의 각 며칠, 이둘-피뜨르일 다음의
6일이 이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드일과 금요일-무슬림은 이날 단식할 수 없다-을 제외하고
일년 중 어느 달 어느 날에 단식하든 항상 보상이 따른다. 그러나 되풀이 말하지만 라마단의
단식-달의 위상에 따라 29일이 될 수도 있고 30일이 될 수도 있다.-만이 의무 단식이다.
라마단의 단식은 이슬람의 지주이며, 합당한 사유 없이 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은 벌받을
중죄다.
하나님께서는 단식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바를 아시기에 맹세를 파하는 사람에게
대안으로서 3일간의 단식을 명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금기라고 선언-이슬람 이전의 낡은 풍습-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경솔하고 무책임한 언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속죄하려면 대안으로서 두 달 동안 계속해서 단식을 해야 한다.(꾸란, 2:183-185, 5:92, 58:1-4))
진지한 맹세를 파하는데 대한 속죄로 10명의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입혀야 한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그것이 안 되면 종을 해방시키거나 몸값을 치르고 종을 풀어 준다. 그것도 안
되면, 마지막 대안으로 3일간 단식을 한다(꾸란, 5:92). 불쾌한 이슬람 이전의 풍습대로 말을
경솔하게 한 경우에 죄진 자의 첫 번째 의무는 종을 해방시키거나 몸값을 치르고 종을 풀어
주는 것이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으면 아내와 다시 관계하기 전에 두달 동안 계속해서 단식을
해야 한다. 단식을 할 수 없으면 60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균 60끼니의 식사를 나눠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처리 곤란한 일을 대신하여 단식을 요구하거나 권하는 경우가 있다.
(꾸란, 58:1-4, 비교 2:196)
누가 단식해야 하나
라마단의 단식은 남녀를 불문하고 다음의 자격을 갖춘 무슬림 모두의 의무다.
1.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할 것, 다시 말하면 정신이 온전하고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을
것.
2. 성년이거나 사춘기, 분별연령-보통 14세 내외-에 달해 있을 것. 이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쉬운 데서부터 이러한 좋은 습관을 시작하도록 권해야 한다. 그리하면 아이들이
사춘기에 달할 때, 정신적 단식을 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
3. 주소지, 고향의 도시, 농장, 점포 등에 머물러 있을 것.
다시 말해서 50마일 이상 여행 중이 아닐 것 ;
4. 단식을 하면 건강이 악화될 염려가 있는 환자들. 이 사람들은 병에 걸려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후일로 연기했다가 나중에 빠질 날 수 만큼 벌충하면 된다.
5. 50마일 이상의 거리를 여행 중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여행 중에만 일시적으로
단식을 파하고 후일에 빠진 날 수 만큼 벌충하면 된다. 그러나 꾸란의 언급대로 특별한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한 될 수 있는 대로 단식을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좋다.
6. 임산부와 수유기의 산모 역시 단식을 하면 자기 자신이나 유아의 건강에 해로울 염려가
있는 경우, 단식을 파할 수 있다. 그러나 뒤로 미뤘다가 빠진 날 수 만큼 단식을 벌충해야
한다.
7. 월경기간(최장 10일)이나 산욕기간(최장 40일)중의 부녀자들 이런 부녀자들에게는,
설사 단식을 할 수 있거나 하기를 원하더라도, 단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회복할 때까지
단식을 연기했다가 다음에 빠진 날 수 만큼 벌충해야 한다. 이슬람에서 하는 여타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 경우에도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 분의 명에 응하여 그 분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행동에 착수한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
라마단의 단식 중 고의적으로 먹거나, 마시거나, 흡연하거나, 또는 성교를 하면, 그날의 단식은
무효가 된다. 무엇이든지 입을 통하여 몸 속으로 들어가게 해도 그날의 단식은 무효가 된다.
합법적인 사유 없이 고의적으로 이런 행위를 하면, 벌로 60일 동안 계속해서 단식을 하거나
두 번째 대안으로서 단식이 무효가 된 날 수 만큼 단식을 하는 외에 60명의 가난한 사람들을
흡족하게 먹어야 한다.
라마단 기간 이외의 단식이 전기 면제 라는 표제 하에 나열된 사람들처럼 합법적 사유 때문에
파해지는 경우에는 당사자는 나중에 빠진 날 수만큼 그 단식을 벌충해야 한다.
누구든 실수로 통상 단식을 파하는 행위를 한 경우 자기가 하는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에 그 행위를 멈추면 단식은 무효화되지 않으며 그대로 유효하다.
라마단의 단식을 마치는 즉시 싸드까뚤-피뜨르(파단의 자선)라고 하는 특별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일반적 권고 사항
특히 라마단 기간 중에는 다음의 습관을 지키라고 예언자 무함맏은 강권한다.
1. 동트기 전에 가벼운 식사를 할 것. 이것을 수흐르라고 한다.
2. 해가 떨어진 직후에 대추야자 세 개를 먹고 물 한잔을 마시며 이렇게 기도할 것.
알라 훔마 라카숨나, 와 알라 리즈끼까 아프 따르나(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저희가
단식하였사오며 이제 당신께서 저희에게 주신 음식으로 단식을 파하나이다.)
3. 가급적 식사는 가볍게 할 것. 예언자 무함맏이 말씀하셨듯이 사람이 채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나쁜 것이 배(위)이기 때문이다.
4. 따라위라고 하는 추가 의무 예배를 드릴 것 :
5. 서로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고 인도주의적 봉사에 열을 올릴 것.
6. 꾸란 연구와 낭송에 더욱 힘쓸 것.
7. 최선을 다하여 인내하고 겸손하게 행할 것.
8. 오감과 정신 특히 혀의 사용에 각별히 유의할 것 ;
9. 부주의한 잡담을 삼가고 수상쩍은 거동은 모두 피할 것.
자선(자카)
또 하나의 뛰어나게 주목할만한 이슬람의 제도이자 중요한 지주(支柱)는 자카다. 우리가 아는
한 꾸란의 자카라는 말과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에 상당하는 말은 타언어에 없다. 그것은
일종의 자선이나 희사 혹은 세금이나 십일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친절의
표시도 아니다. 자카는 이 모두를 합친 것이어서 그 훨씬 이상이다. 자카는 자기 재산에서
일정 비율을 공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다 풍요케 하는 영적인 투자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나 대의 명분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도 아니요, 약삭빠른 사람은 안내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국가 세금도 아니다. 오히려 자카는 사회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무슬림들이 떠맡은 의무다. 꾸란의 자카라는 말은 자선, 희사, 십일조, 친절, 국세, 자발적 기부
등을 포함할 뿐 아니라, 이러한 모든 하나님을 지향하는 마음과 영적 및 윤리적 동기를 아울러
내포한다. 이것이 자카에 상당하는 말이 없는 까닭인 바, 이러한 특징은 하나님의 성서 꾸란의
비길 데 없는 독창성에서 연유한다.
자카의 문자적 의미는 단순한 청결이다. 이 말의 기술적 의미는 재산을 가진 무슬림이 정당한
수령자들에게 분배해 줘야 하는 현품이나 현금의 액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카의 종교적,
영적 의미는 이보다 한층 심오하고 한층 생생하다. 자카의 인도주의적 사회 정치적 가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에 자카의 광범위한 효과를 설명한다.
1. 자카는 재산가의 재산을 정화시키며, 그 재산에 더 이상 속하지 않고 정당한 수혜자들에게
분배해야 하는 몫을 공제하여 그 재산을 깨끗하게 한다. 자카를 지불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일정 비율의 재산을 즉시 올바로 분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 그 몫에 대한
도덕적 법적 소유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적, 영적 관점에서 보든 법적, 상업적
관점에서 보든 어느 모로 보나 부패요, 명백한 강탈이나 이는 불법적으로 소유한 몫 때문에
전체 몫이 부정해지고 위태롭게 됨을 뜻한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정당한
수령자들에게 고루 분배되면 몫의 나머지 부분도 깨끗하고 떳떳해진다. 깨끗한 자본과 떳떳한
재산은 영구적인 번영과 공정한 거래의 제 1요건이다.
2. 자카는 기부자의 재산을 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이기심과 재산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기부자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카는 질투와 시기, 미움과 불만을
제거하여 수령자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대신에 기부자에 대한 선의와 따뜻한 호의를
마음속에 심어 준다. 결국 사회 전체가 정화되어 계급 투쟁과 의혹, 악감과 불신, 부패와 분열,
그리고 이런 류의 모든 해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3. 자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회선원들의 고통을 최소한도로 덜어 준다. 자카는 불운한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게 위로가 되겠지만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자기 재산을 늘려 가는 사람
모두에게는 성가신 간청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것은 자카는 원래 비상조처에
불과하므로 여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되고 자신과 남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부자에게 있어서 자카는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득을 보라는 따뜻한 권유다.
관련 당사자 모두에 대해 자카는 직간접적으로 보상이 풍부한 만큼 영적으로 투자해 볼만한
공개된 보물이다.
4. 자카는 이기적 탐욕과 사회적 불화, 파괴적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대한 건전한 형태의
내부적 방위 수단이다. 기부자에게 사회적 책임의 정신을, 수령자에게는 안전감과 귀속감을
길러 주는 효과적인 도구의 구실을 한다.
5. 자카는 개인과 사회가 서로 화답하여 상호 작용하는 영적 인도주의적 정신의 생생한
시현이다. 자카는 이슬람이 개인 기업을 막거나 사유 재산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본주의는 관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실증이다. 개인과 사회, 시민과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물질주의와 영성 사이에 온건하고 중도적이긴 하지만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노선(路線)을 취하는 이슬람의 일반 철학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 자카다.
자카율
연말에 현금이나 상품으로 대략 15달라 이상에 상당하는 재산을 소유한 모든 무슬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최소한 2.5%의 비율로 자카를 내야 한다. 재산 액수가 현금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간단하다. 그러나 소유 재산이 증권이나 상품인 경우에는 매년 말에 자기
재산을 시가로 평가하여 최소한 재산 총가액의 2.5%의 비율로 자키를 내야 한다. 임대료
건물이나 산업과 같은 부동산에 투자한 경우에는 자카율은 재산 전체의 총가액이 아니라
총순수입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건물이나 가옥을 팔려고 내놓으면, 자카율은 재산
전체의 총가액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채권자의 경우, 채무자가 신용할 만한 사람이면 자기가
빌려 준 액수에 대해 자카를 지불해야 한다. 그 역시 확실한 자기 재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나 기억해야 할 것은 자카는 차감 순잔액에 대해서만 지불한다는 점이나 개인비용,
가족 용동, 필요 경비, 이행기채무(履行期債務)를 먼저 모두 지급하고 나서 자카는
차감순잔액에 대해서만 따진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2.5%라는 비율은 최소한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긴급사태가
발생하거나 구호의 필요가 생기는 경우에는 자카율에 한계가 없다. 많이 베풀수록 당사자
모두에게 그만큼 더 좋다. 자카의 배분은 수많은 기금 모금운동이 전개되는 제반 목적에
이바지한다. 자카 기금은 다른 모든 기금을 대신한다. 믿을만한 보고에 의하면, 이슬람통치의
역사상, 자카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대 이슬람
제국의 신민-무슬림, 기독교인, 유태인-모두가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가진 게
충분하였으며, 통치자는 거두어들인 자카를 국고에 보관해 두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카의 법이 올바로 시행되면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막대한
잉여액마저 생길 정도로 국민에게는 부족한 것이 극소화되고 국고는 넉넉해진다.
공익의 실현을 위한 이러한 효과적인 수단이 발휘하는 끊임없는 힘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명이요, 법이라는 사실에서 연원한다. 그것은 사사로운 문제나 자발적인 기부가 아니라,
오히려 당사자가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지고 이행해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자카는 일반적인
관심 속에 시행되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법이기 때문에 무슬림은 누구라도 이것을
등한시할 수 없다.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관계 당국이 민중을 대신하여 나서서 이 제도를
확립시키고 그것이 시행되도록 조처를 취해야 한다.
자카의 정당한 수혜자들
성 꾸란은 자카의 정당한 수혜자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불쌍한 무슬림,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
2. 가난한 무슬림, 생활비를 스스로 벌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
3. 새로 개종한 무슬림, 정착해서 생소한 필요에 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
4. 무슬림 전쟁포로,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켜 주기 위해 :
5. 빚진 무슬림, 급한 사정 때문에 진 빚에서 구해 주기 위해 :
6. 무슬림 통치자가 자카 징수를 위해 임명한 무슬림 고용인,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
7. 이슬람을 연구하거나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대의에 봉사하는 무슬림. 이들에 대한 몫은
비용을 충당하고 봉사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8. 외국 땅에서 궁지에 빠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슬림 여행자.
자카의 정당한 수혜자는 연말에 무일푼이거나 가진 게 거의 없어서 (15달라 이하) 자신의
필요에 응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가진 게 대략 15달라 이상 되면 자카의 수혜자가 아니라
기부자가 되어야 한다. 수혜자는 자기 몫을 받아서 시급한 필요에 충당하고도 15달라 정도
남는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받아서는 안 된다. 받는 대로 자격 있는 다른 수혜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자카는 전술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직접 분배할 수도 있고, 이들을 돌보는 복지 단체에 분배할
수도 있다. 총망하고 유망한 무슬림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 장학금 형식으로 분배해 줄 수도
있고, 복지 단체나 이런 대의 명분을 후원하는 공공단체에 보조금의 형식으로 분배해 줄도
있다.
무능력하거나 병약한 불쌍한 무슬림이 능력 있고 다만 얼마라도 벌 수 있는 무슬림보다
더 적격이다. 기부자는 최선의 판단으로 가장 합당한 수혜자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이 종교세를 대체하지 않는다. 이 종교세는 특별한
의무로써, 국가세금 이외의 별도로 계산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북미의 무슬림의 경우,
자선에 대해 일정액을 공제해 주는 세법을 이용할 수 있다. 먼저 자카를 합당한 수혜자에게
지불하고 나서 지불한 금액을 정당한 법적 공제액으로 청구해야 한다.
기부자는 이 의무를 이행했다고 해서 자만하거나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의무이행은 가급적 은밀하게 해야 한다. 선행을 전부 무효화시키는 위선이나 허영심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거나 기부했다는 것을 알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와 자극이 될 경우 그렇게 해도 좋다.
농축산물도 자카 의무의 대상이다. 자카로 지불해야 할 몫은 경우에 따라 다르며 자세한
논의를 요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법과 종교를 다룬 자세한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순례(핫즈)
이슬람의 마지막 지주이자 가장 훌륭한 제도의 하나는 핫즈 혹은 멕카 순례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 핫즈를 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정신적, 재정적, 신체적 능력을 갖춘 무슬림 모두의
의무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연령에 달해 있고 건강이 상당히 양호하며 재정적으로 능력이 있고
안전한 무슬림은 적어도 평생에 한 번 핫즈를 해야 한다. 여기서 재정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은
핫즈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빚을 진 경우에는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가진 게 충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핫즈 여정은 또 하나의 이슬람 고유의 특징이다. 그것은 여러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 그 목적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서로를 알고 공통의 문제를 연구하며 자신들의 전체적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무슬림들이 만나는 연례 최대의 신앙집회다. 또한 인류 역사에 등장한 최대의 정기
평화회의다. 핫즈 여정에서는 평화가 으뜸가는 주제다.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며, 무슬림 상호간과 동물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고 새와 심지어 곤충과도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타인이나 형태를 불문하고 다른 생물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엄금이다.
2. 이슬람의 보편성과 무슬림의 형제애와 평등을 건전하게 현현한다. 사회의 각계각층, 지구의
구석구석으로부터 무슬림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여 멕카로 모인다. 무슬림들은 똑같이
간편하게 옷을 입고, 같은 규정을 지키며 같은 시간에 같은 식으로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은
기원을 드린다. 왕이 따로 없다. 하나님에 대한 모두의 충성이 있을 뿐이다. 귀족이 따로 없다.
겸손과 헌신이 있을 뿐이다.
3. 무슬림의 하나님에 대한 서약과 물질적 이익을 버리고 하나님께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더욱)굳게 한다.
4. 순례자들에게 예언자 무함맏의 영적, 역사적 환경을 숙지시켜, 뜨거운 감화를 받게 하고
신앙심을 강화시킨다.
5. 아브라함과 이쉬마엘(이브라힘과 이스라엘)이 행한 신성한 의식을 기념한다. 아브라함과
이쉬마엘은 지상 최초의 하나님의 성전 곧 멕카(막카)의 카바를 최초로 순례하였다고 한다.
6. 심판날의 대회를 상기시킨다. 이 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서서 자신들의 마지막
운명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인종이나 혈통의 우수성을 주장할 수 없는 날이 이 날이다. 또한
아브라함 시대부터 일신교의 중심지였고, 마지막 때까지 변함없이 순수한 일신교인 이슬람의
중심지로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오직 멕카만이 현세계에서 하나님에 의해 성역화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핫즈를 하다 보면, 그것이 영적으로 풍요케 하고 도덕적으로 재무장하는 여정, 열렬하게
헌신하고 수련의 체험을 하는 여정, 인도주의적 관심과 고무적인 지식의 여정-이 모든 것이
이슬람의 하나의 제도 속에서 종합된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핫즈 기간 중에 따라야 하는 규칙과 단계를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진다.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다.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룬 저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핫즈 여정 전체에 걸쳐 항상 박식한 안내자들이 있어서 순례자들은 이들로부터 올바른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또 하나 지적해 둘 것은 헌신의 전 여정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무슬림들이
멕카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지, 돌에 입을 맞추거나, 어떤 인간, 혹은
반신 인간을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카바의 흑석에 입을 맞추거나, 그것을 만지는 것은
임의적 행동이지 의무나 명령이 아니다. 흑석을 신앙하거나 거기에 어떤 미신적 속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입을 맞추거나 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신앙의 대상이다. 카바를
개축할 당시, 카바의 기초에 흑석을 놓았던 예언자 무함맏에 대한 존경의 증거로서 또한
그분에 대한 사랑의 상징으로서만, 흑석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만지고 가리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이 사건은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이 사건에서 무함맏은 중재자로 지명된 사람으로 나온다. 이슬람이 도래하기 수년 전, 카바를
개축하고 있을 당시, 흑석을 그 기초 위에 놓게 되었다. 그런데 누가 흑석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영광을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부족의 족장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고, 성역에는 내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흑석은 돌 한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족장들은 이것을 극진하게 숭상하였다. 이 흑석이 아마 고대에 건축한 대사원의
유물로써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돌일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존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런 돌은 이슬람과 무슬림에 관한 한 전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족장들은 자기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맨 처음 온 사람에게 그 논쟁의
해결을 맡기기로 합의했다. 무함맏이 바로 맨 처음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함맏은 천 조각에
그 흑석을 싸기로 결정하고 논쟁자들에게 그것을 함께 들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각 족장마다, 그 작업에서 한 몫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들은 무함맏의 현명한
결정을 흡족히 여겨 즉시 그대로 실행하였다. 이것이 흑석의 이야기에 내포된 교훈이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이 흑석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은 경의의 표시로서
현명한 중재자인 무함맏을 기념하는 행위인 것이다. 비교하면 이점이 더 뚜렷해진다.
망명했다 귀국하는 애국자나 싸움터에서 귀환하는 군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의 국경선에
당도하자마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국경선의 땅에다 입을 맞추거나
맨 처음 만나는 동포 몇 사람을 감정이 북받쳐 포옹하거나 경계표를 보고 감탄하는 등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은 정상적이고 수긍이 가는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애국자나 군인이 땅을 숭배하거나 자기 동포를 신격화하거나 경계표에 신적인 속성이 있음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례자들의 행동도 이와 마찬가지로 해석해야 한다.
멕카의 카바는 이슬람의 영적 중심지이며 모든 무슬림의 영적 조국이다. 순례자가 멕카에
당도하면 망명했다 귀국하는 애국자나 결정적 전투를 치르고 개선하는 군인과 같은 기분이
들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해석이 아니다. 역사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초기의
무슬림들은 현존하는 하나님의 지성소인 카바에서 숭배할 권리를 거부당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이들의 주 목적지는 카바였다. 기쁨에 넘쳐 성전에 들어간 이들은 거기에 있는 우상과
형상들을 모두 파괴하고 나서 순례의 의식을 끝마쳤다.
특별한 사람들이 겪은 유별난 체험을 보면 이런 해석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 유명한
헝가리인 작가 한 사람이 자기 나라가 침략 당하자 흙 한 줌을 가지고 피나하였다. 문학
년보에 의하면 이 작가는 그 한 줌의 흙에서 가장 큰 위안과 가장 깊은 즐거움을 얻었다고
한다. 그것은 이 작가에게 있어 격려의 원천이었고 언젠가는 자유조국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저자는 50년대에 이 기사를 읽었는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도 없고, 그 작가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예로서,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라는 기록 영화 한편이 CBS에 의해 제작되어
1974년 6월 15일에 방영되었다. 이 영화에서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자의 테러를 피하여
망명한 부유한 사업가 한 사람이 베이루트에 있는 현대식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자기재산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미소를 띠며 흙이 반쯤 찬
조그만 병을 가리켰다. 피난 올 때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것인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그 흙이 가장 소중하며, 자기의 조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진 재산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더욱 인상깊었던 것은 이 사람의 가족이 더 흥분해서
열을 올렸다는 점이다. 이 사람이 비슷한 처지의 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해서, 또 그 적은
보물의 흙 이 앞으로 몇 년이고 아주 특별하고도 신성하기까지한 물건이 된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1973년 10월 14일 자로 낸 (미)연합통신사의 보도는 이보다 더욱 실감난다. 다음은 그 보도
내용이다. : 수에즈운하의 동쪽 둑에 있는 이스라엘군의 마지막 거점이 항복해 왔다. …지치고
흙투성이가 된 이스라엘군 포로 37명이 작은 배에 실려 수용을 위해 건너편으로 호송되었다.
…이집트군 몇 명이 마침내 이 마지막 거점(바르-레브 전선)을 해방시켰다는 감격을 가누지
못하여 모래 한 줌을 움켜쥐더니 입에 집어넣었다. 땅에다 입을 맞추는 자들도 있었다.
(Dispatch observer 지 2A면)
더욱 최근에 동통신사는 시리안군 전쟁포로의 귀환을 보도하는 가운데 이같이 밝혔다.
맨 처음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앉은 채로 들것에 비행기 밖으로 나왔다. 두 다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라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그는 외쳤다.
그러더니 들것에서 땅으로 내려 달라고 졸랐다. 몸을 굽혀 땅에다 입을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Dispatch observer지 1974.6.23A면)
이런 인간적 견지에서 흑석에 얽힌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 또 비상한 상황 아래서 겪은 이러한
인간의 체험에 비추어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결어
메디나(마디-나)에 있는 무함맏의 묘를 반드시 의무적으로 방문해야만 핫즈가 유효하게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무덤을 찾아서 인류에게 있어 최대의 스승인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메디나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항상 권할만한 일이며 또 그것이
강권되는 바이기도 한다.
기억해 둘 것은 하나님을 위한 제물인 희생을 바치고, 이 헌신의 여정의 완료를 축하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만인이 누리는 이-드일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함으로써 핫즈는
그 절정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순례자들에게만 이런 의무가 지워진 건 아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재산을 가진 무슬림 모두에게 지워진 의무인 것이다.
일부 무슬림 가운데서 핫즈 철에 희생으로 도살되는 동물이 너무 많아서 막대한 양의 고기가
낭비된다는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어 왔다. 날씨는 무더운데 냉동시설은 없고 운송 수단은
부족한데다가 며칠만에 고기가 과잉 공급되니까 대부분의 고기가 그대로 방치되거나 못쓰게
되어 버린다. 이것은 새로운 상황에서 야기되는 새로운 문젯거리다. 양심적인 무슬림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고금의 권위 있는 종교학자들의 학문적 견해를 놓고 법적으로 따져가며 토론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종류나 정도 여하를
막론하고 낭비를 허용하지 않으며 보다 시급한 필요에 먼저 응하고 나쁜 것은 보다 덜한 쪽을
택하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부터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또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부터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선 순위의 체계에 맞춰 운용되며, 기략이
풍부한 동시에 적응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입각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 해결책은 문자적인 해석에서 다소 벗어나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슬람의 정신으로부터
나온다. 여러 단계와 수준에서 이 해결책을 적용할 수 있다.
첫째, 무슬림은 최선을 다해 남은 고기를 저장할 수 있는 냉동시설을 확보하여 성역과
그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일 년 내내 그 고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도처에 있는 가난한 무슬림들에게 남은 고기를 운반해 주는데 노력해야 한다.
희생동물을 멕카에서 잡아서 그 고기를 통조림으로 만들거나 냉동시킨 다음 세계 각지의
가난한 무슬림들에게 운반할 수도 있다.
셋째, 남은 고기를 팔아서, 거기서 생긴 돈을 지역적, 지방적, 국가적, 국제적 규모의 자선에
사용할 수도 있다. 무슬림들은 합심해서 이런 조처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조처가 취해질
때까지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남은 고기가 낭비되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되면 희생을 바치는
날짜를 연기하거나 앞당겨도 된다.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택해서 낭비를 피할 수 있다.
혹은 핫즈 기간 중 멕카에서 희생하게 되어 있는 동물의 값에 해당하는 돈을 합법적 명분을
위해 자선 형식으로 지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이맘이었던 고(故) 마흐묻 샬투트가
자신의 저서 알-파따와(카이로 : 알-아즈하르대학 출판부, 1959)152-160면에서 매우 학문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삼가 그 내용 중 일부와 의견을 달리한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만이 올바른 이슬람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사회생활과 관련되는 한도 내에서 핫즈라는 제도는 무아마라트(인간사(人間事))
이라고 하는 샤리아 (이슬람법)의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이 분야의 법은 핫즈 제도가 소속돼
있다고 흔히 믿는 이바다뜨( 숭배 와 의식의 문제)의 분야를 보완한다.
그러나 두 분야는 불가분의 것인 바, 아주 깊은 의미에서 핫즈는 음식과 돈과 노력이 너무
낭비된다는 현실적 문제를 감안하여 이슬람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희생 규정을 재해석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온건성, 합리성, 현실성을 보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와 같이 해석을 내리는 바이다. 이런 해석이 하나님께 가납되고 동료
무슬림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마지막으로 희생의 문제와 그것이 실제 상징하는
바에 대해 한 마디 하겠다. 앞서 이-드를 논하는 가운데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고기나 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그 분에 대한 신앙과
예언자 아브라함(이브라힘)에게 자기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진 그 역사적
사건의 확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기꺼이 이 명령에 복종할 각오가 서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은 보존되었고 양 한 마리가 대신 희생되었다. 희생을 바치는
것은 이 때를 기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거행하는 축전이
되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명에 응하여 희생으로 바쳐지게 되어 있었던 것은 이삭(이샤끄)이 아니라
이스마엘(이스마일)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그의 아버지가 기꺼이 복종할 각오를
보이자 그는 대속되었다. 이러한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적어도 스무 가지는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 중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적 역할이나 예언자 모세가 이들에게 전한
빛과 지혜를 흠 잡으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꾸란도 그러한 점을 아주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터이다.(예: 꾸란, 2:40,47, 7:137, 17:2, 40:53, 45:16)
이들 논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꾸란(37:101-103)에 기록된 사건전체의 경위로 보아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명에 응하여
아버지가 희생으로 바치려 했던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
2. 지금 있는 구약성서(창세기 21:5)에 의하면 이삭은 아버지가 100세일 때 태어난 반면
이스마엘은 아버지가 86세일 때 태어났다.(창세기 21:16) 그렇다면 14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스마엘이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셈이나 하시(何時)라도 이삭이 같은 위치에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구약성서(창세기 22:2)에 의하면 이제 너의 아들 곧 너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데리고…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에서 너의 아들을 번제(燔祭)로 바치라 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내려졌다. 이 문맥 가운데 나오는 이삭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삽입되었을 것이다.
또 모리아 땅이 이슬람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멕카의 마르와 산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정확한
위치가 분명치 않게 된다.
3. 사건 전체가 일어난 곳은 멕카 근방이었다. 그리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을 따라
멕카로 가서 거기에 정착하여 아브라함을 도와 카바 신전을 세운 것은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였다.(꾸란, 2:124-130, 14:35-40)
4. 아마 다음이 이슬람의 신념을 저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일 것이다 : 유태-기독교식 해석에
의하면 다음 같이 심히 부당한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ㄱ) 한 사람의 어머니는 종이고 다른 사람의 어머니는 자유인이라는 이유. 형제들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
(ㄴ) 인종이나 교의 혹은 피부색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
(ㄷ) 자기 조상의 이름으로 영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
(ㄹ) 어머니가 종인 자식은 정계(正系)로 인정하지 않는 것.
이런 추정과 결론은 모두 이슬람의 정신에 어긋난다. 무슬림은 이런 추정과 결론으로 유도하는
것은 다 배격해야 한다. 자기 조상의 지위, 어머니의 고귀함과 비천함 그리고 사회적 출신과
피부색의 차이는 사람의 영적, 인간적 자질과 하등 관계가 없다. 적어도 하나님에 보시기에는
그렇다.)) 여기에 언급한 것 이외에 다음 서적을 참고할 것.
유숲알리, 성꾸란, 원문번역과 주석(1946) p. p. 1204-1206: Ibn Qayyim al-jawazayh,
Zad al-Ma' ad…(베이루트판, n. d)1권 p. p15-17.
제 4장 이슬람의 일상 생활에서의 적용 이슬람은 그저 명목상 숭상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추상적 이상이나 한 곳에서 꼼짝 못하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숭배나 받는 우상이
아니라는 무슬림의 주장은 타당하다. 이슬람은 생활 규범이며, 인간 생활의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힘이다. 무슬림이 내세우는 또 한 가지 주장은 개인이 인력의 중심이며 이슬람이나
이에 상당하는 다른 제도를 완전히 가동시킬 수 있는 시동기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항상
개인에게서 시작되고 양보다 질을 우선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이슬람이 시작되는 곳인,
개인부터 시작하자. 개인의 본성을 고찰하고 이슬람이 이러한 본성을 어떻게 보는 지를
알아보자. 철학적 논쟁이나 추상적 논의에 빠져들지 않고 가급적 명료를 기하기 위해, 아주
긴밀하게 서로 관련되고,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두 가지 상보적 본성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 두 가지 본성은 내면성과 외면성이다. 혹은 두 부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실상은
한 가지 본성만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내면적이고, 다른 하나는 외면적이다. 인간의
내면성이란 루흐(영혼이나 자아 혹은 마음)와 아끌(지성이나 추리력 혹은 지능)을 가리킨다.
인간의 내면성을 설명하자면,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1)영적윤리적 측면과 (2)지적 측면,
나머지 인간의 활동과 거래는 외면성으로 갈라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1. 내면성 영적 생활 이슬람은 경건과 정의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온갖 영적
자양을 인간에게 공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간의 영적윤리적 생활을 조직한다.
이슬람의 영적 생활 규정에 충실히 따르면 인간의 영적 성장과 성숙에 관한 한 최대한의
긍정적인 결과가 부여된다.
이러한 이슬람의 주요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쌀라)
2. 자카 혹은 자선, 기부
3. 단식(싸움)
4. 순례(핫즈)
5. 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와 인류를 사랑할 것.
6. 항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것.
7. 비 이기심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할 것.
이들 내력의 여러 측면은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이슬람에 관한 한
이런 기본적 요소 없이 진정한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부언 하는데 그치기로 한다.
독자는 본서의 앞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2. 지적 생활 인간의 지적 본성은 전술한 바와 같이 지성이나 지능 혹은 추리력으로
이루어진다. 이슬람은 이러한 측면에 각별히 유의하여 인간의 지적 구조물을 아주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운다. 이러한 기초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
1.“경험”이나 실험 혹은 양자에 의해 획득한, 명백한 증거나 논의의 여지가 없는 근거에 바탕을
둔 정확한 지식이점에 관하여, 꾸란이 실험과 명상과 관찰은 물론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열심히 탐구하라고 명한 최초의 전거(典據)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지식을 추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무슬림 모두에게
과해진 하나의 명령이다. 자연과 온 세계는 지식과 진리를 끊임없이 계시하는 공개된
보물이며, 꾸란은 이러한 지식의 풍부한 원천을 지적한 최초의 책이었다. 꾸란은 전래의
“진리”라든가 증거나 근거에 의해 실증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가
지금까지 아는 한 꾸란이 다음과 같이 지적으로 말한 최초의 경전이었다. “이유가 뭐냐”
확신이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할 증거를 대 보라(꾸란, 2:111과 21:24). 꾸란 자체가 특출한
지적 도전이다. 꾸란은 그 속의 진리와 다투거나 자신을 모방해 보라고 인간의 지능에
도전한다. 꾸란의 아무 장이나 펼쳐 보라. 자연이라는 무한한 원천을 통하여 지식을
탐구하라는 가장 열렬한 호소가 그 속에 있을 것이다. 이슬람은 정확한 지식에의 헌신을 가장
보상이 풍부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에의 헌신으로 간주한다.
2. 두 번째 지적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식의 끊임없는 계시
원천이며, 사고의 무한한 장(場)을 파고드는 영적인 통찰이다. 이슬람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종교라는 건물 전체의 초석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효케 하기 위해서,
이슬람은 그 신앙을 부동의 확신과 신념 위에 구축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지성의 적절한 투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침체하고 무관심한 정신, 보잘 것 없는
상상력으로서는 애당초 지고한 진리-하나님-의 정상에 도달할 수 없거니와 신앙의
정말 깊은 곳에 이를 수도 없다.
이슬람은 맹목적으로 모방하여 아무런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인간의 지적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며
꾸란도 아주 여러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서재에서 혹은 마음속에서 뒷전으로 밀려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게 아니다. 지성에 대해서
깨어 생각하며, 숙고하고 명상하라는 열렬한 권유와 절실한 호소를 한다는데 이러한 말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꾸란이 하나님에 대한 필수적 진리와 제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아무 노력도 하지않고 빈둥거리는 상속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꾸란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점 역시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꾸란은 사람이 진지하게 노력하고 정직하게 벌어서
지적인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지적으로 든든해지기를 바란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없어지는
법”이어서 이슬람은 쉽게 없어지게 마련인 쉽게 얻은 신앙을 부정한다. 이슬람이 바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효과적이고 영속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비추고, 생활 곳곳에서
드러나는 신앙인 것이다. 쉽게 얻은 신앙으로서는 전혀 그것이 불가능하며, 이슬람은 이보다
못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은 지식과 연구에 바탕을 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동시에 지성 앞에,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데까지 침투해 볼 수 있도록 온갖 드넓은 사고의 장(場)을 활짝 펼쳐 놓는다.
이슬람은 지식을 추구하여 시야를 확장하고 정신을 폭넓게 하려는 자유 사상가에 대하여는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든, 혹은 실험적인 것이든 가리지 말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지식을 추구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 이렇듯 지성을 요청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존중하고 그것을 신뢰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답답한 속박과 유형성의 한계로부터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을 향상시키고 정신의 범위를 온갖 사고의 장 -물리적형이상학적 과학적철학적조직적 기타 등등-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이슬람이 바라는 바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지력(智力)에 자양을 주는 한편, 지적 생활은
풍요해지고 생산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지적 활동이 전술한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조직될 때, 인간의 내면성은 건전하고 튼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내면적으로 건전하고 튼튼해질 때, 외면성 역시 건전하고 튼튼해질 것이다.
외면성
인간의 외면성 역시 내면성만큼이나 복잡미묘하고 광범위하다. 전자의 건전성이 후자의
건전성에 의존하는 바 크며, 전자의 건전성 역시 후자의 건전성에 의존하는 바 크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완전한 본성은 양측 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명료를
기하기 위해, 인간의 외면성을 또 다시 상위와 하위로 구분한다. 그러나 항시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인간성의 체계가 균형을 잃으면,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인즉 인간의 내면성과 외면성은 상호작용반작용하는 것이며, 이슬람은 생활의
내면과 외면으로 그 거룩한 손길을 뻗쳐 왔던 것이다.
1. 사생활
이슬람은 개인의 순수성과 청결성을 보장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물을 섭취하게 하는 한편
예외에 맞는 복장품행몸치장스포츠 등으로 이끌 수 있는 방향으로 인간의 사생활을
다룬다.
1. 순수성과 청결성
무슬림은 앞서한 세정이 유효한 상태에 있지 않는 한,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의 명령이다. 이러한 의무적 세정은 상태에 따라 일부 세정이 될 수도 있고 전부
세정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무슬림이 순수한 마음과 정신으로 깨끗한 몸에 깨끗한 옷을 입고,
순수한 동기와 의향을 가지고 매일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 의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한 가지 행위가 인간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과 유익한 결과를 금방
깨달을 수 있다.(비교, 꾸란, 4:43, 5:7)
2.음식물
순수한 마음과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열망하는 영혼과 깨끗하고 건강한 신체에 자양을 주기
위해서, 먹고사는 음식물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슬람이 바로 이렇게 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배를 규칙적으로 채우는 사람의 전체 상태에 아무런 직접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일부 피상적이고,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슬람의 견해가 아니다. 이슬람은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본다.
이 점에 대한 이슬람의 일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깨끗하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적당하게
섭취하는 한 모두 음식으로서 적법하다. 그리고 불결하고 해로운 것을 정상적인 상황 아래에서
섭취하는 것은 모두 위법이다. 항상 예외를 허용하는 여유와 융통성으로써 절대적인 필요에
대처한다.(꾸란, 7:157, 전기 이슬람의 윤리참조)
이러한 일반 원칙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금기로 지정하신 음식과 음료가 있다
: 이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죽은 짐승이나 새의 고기, 돼지고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빌어 도살한 것의 고기
(꾸란, 2:173, 5:4),
이슬람이 인간의 정신이나 도덕, 체격과 사기에 유해하다고 여기는 음료가, 취하게 하는 것과
도박이나 내기를 전부 금지한 꾸란의 구절 속에 포함되어 있다.(꾸란, 5:93-94)
이러한 음식과 음료를 금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신 행위가 아니며,
또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내린 명령도 아니다. 이러한 금지는 최우선적으로 바로 인간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다. 꾸란이 이렇게 금지된 것들을 나쁘고 불결하고 해롭다고 말하는 것은
곧 인간의 도덕성과 지혜, 건강과 재산, 경건과 공유행위-이 모든 것을 이슬람에서는 아주
귀중한 재산이라고 본다.-를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간섭
배후에는 많은 이유가 숨어 있다. 이들 이유는 지적영적윤리적정신적경제적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오직 인간에게 올바른 생활을 통한 자기 향상의 방법을 보여 가족의,
나아가 사회의, 궁극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건강한 구성 단위가 되게 하려는 데 있다.
믿을 만한 의사나 사회 과학자는 이제 틀림없이 이러한 이슬람의 법령이 이롭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은 인간의 영적 건전성과 지적 성숙에 대한 큼이나 사람이 먹는
음식물의 질에 대하여도 정통적이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점은 어떤 음식물은 전술한
바와 같이 종류에 있어서 금지되고 또 어떤 음식물은 정도에 있어서 금지된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무슬림에게 적법한 것이라도 적당량을 섭취해야 한다. 거기에 탐닉해서도 안 되고
도에 지나쳐도 안 된다.(꾸란, 7:31)
종류나 정도에 있어서 금지된 모든 것을 피한 연후에야 무슬림은 하나님께 초대되어 그 분의
은혜가 깃든 양식을 즐기고, 자비로운 부양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느껴보게 된다.
(꾸란, 2:168,172, 5:90-91)1)
3.복장과 몸치장 남자의 복장과 몸치장에 있어서 이슬람은 품위, 겸손, 정숙, 남자다움이라는
원칙들을 신중하게 고려한다. 이슬람은 이러한 자질의 달성, 유지, 향상에 반하는 복장과
몸치장을 금한다. 오만한 마음이나 터무니없는 자만심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옷감과 옷차림새는
엄금이다. 남자의 도의심을 악화시키거나 남자다움을 해치는 몸치장 역시 엄금이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정해 준 남자의 천성에 충실해야 하며, 자신의 성격을 나약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것은 모두 멀리 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은 남자에게 비단 등의
옷감이나 금 등의 보석으로 몸치장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런 것들은 여자의 천성에만
어울린다. 남자의 멋은 보석을 소지하거나 비단 옷을 입고 으스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고결한 덕성과 매력 있는 그리고 건실한 품행에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 남자에게 금지되고 여자의 천성에만 어울리는 것을 여자가 사용하도록 허락했다고
해서, 여자가 방정치 못하게 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려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천성에
어울리는 것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 천성을 남용하거나 망칠 우려가 있는 것을 삼가도록
주의시킨다. 여자가 옷을 입고, 아름답게 하고, 걷고, 쳐다볼 때 취해야 하는 방식은 아주
미묘한 문제인 바, 이슬람은 이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이슬람은 특히 여자가 자신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유지향상시키고, 실없는 험담이나 악의에 찬 소문 그리고 의심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남자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를 베풀어 오고 있다.
꾸란은 이렇게 충고한다. :
믿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내리고 겸손을 지키라고 말할지니라. 그리하면 저희의 순수함이
더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하는 모든 일을 익히 알고 계시느니라. 또 믿는 여자들에게
말하되, 시선을 내리고 겸손을 지키며, 저의 아름다움과 장식을 (평소에)보여야 하는 것 말고는
드러내지 말며, 너울을 가슴에 드리워, 저의 남편이나 아버지…(그리고 집안의 다른 식구들)앞이
아니라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말며, 발을 굴러 눈에 안 띄는 장식에 주의를 끌려하지
말라고 할지니라(꾸란, 24:30-31)
이슬람은 옷차림새와 몸치장하는 방법에 매우 민감하다. 남자나 여자가 제각기 자신의 천성을
지켜 타고난 본능을 보호하고, 겸손과 고결한 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이슬람은 아주
분명히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맏은 여자처럼 행동하는 남자들과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무해하고
품위 있는 복장과 몸치장에 대해서는 아무 제한도 가하지 않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실, 꾸란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이라 일컫고 있으며 그것들을 금기로 여기는 자들을
꾸짖고 있다. (꾸란, 7:32-33)
4.스포츠와 오락
대부분의 이슬람의 숭배 형식, 예를 들어 예배단식순례가 근본적으로는 원래 영적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상당히 스포츠 적인 특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나면 유쾌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사람의 체격과 사기가 부단히 상호 작용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스포츠와 오락에 대해 이슬람이 할 말을 다 한 건 아니다. 이슬람은
건전한 사색을 자극하거나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몸의 생기를 회복시켜 건강한 체형을 유지케
하는 것은 무엇이나 권장한다. 또 그것이 범죄 행위를 내포하거나 그것을 부를 소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며, 해를 초대하거나 다른 의무의 이행을 지체시키거나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관한 일반적 교훈은 무함맏의 언명이다. 무함맏은 이 언명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는 선한 성격을 가지나, 강한 성격이 약한 성격보다 낫다고 말했다. 또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무함맏은 체격을 강인하게 하고 사기를 돋우는 스포츠와 오락을 인정하였다.
스포츠답지도 오락답지도 않은 것을 스포츠와 오락에 관련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박이나 음주를 스포츠와 오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의 견해가 아니다. 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분명한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부여된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기 생을 남용하거나 전적으로 요행이나 단순한 우연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그 거룩한 손길을 뻗쳐 극히 사사로운 데
까지 생활을 조직하는 것은 인권 침해가 아니다.
생명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고상한 목적들을 지향하도록 만들어 졌기에, 이슬람은
생을 올바르게 즐겁게 사는 방법을 인간에게 제시하여 왔다. 도박의 금지가 이런 관점에서
취해진 조처 가운데 하나다. 도박은 사실상 긴장을 풀어 주기는커녕 긴장을 촉진시킨다.
요행이나 단순한 우연에 생을 맡겨 버리는 것은 심각한 남용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박
기구에 운을 걸거나 도박판의 예측을 불허하는 움직임에 자기 능력을 바치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로부터의 이탈이다. 이런 모든 불필요한 정신적 긴장과 신경 파탄을 미연에 방지하고,
목적은 물론 수단에 있어서 자연스런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슬람은
형태와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도박을 금지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벽에 빠지거나
알콜의 악성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 도피인 동시에 인간 최고의 자질인
지성에 대한 무책임한 모욕이다. 술에 취해서 생기는 위험과 비극은 너무나 뻔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매일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으며, 이런 위협 때문에
많은 가정이 붕괴하고 있다. 술 마시는데 들어가는 돈만 해도 매년 수 십억 달러에 달한다.
음주 습관이 불러온 곤궁과 불행 때문에 결단나는 집안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건강은
파괴되고, 정신은 피폐해지며, 재산은 줄어들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인간 존엄성이
훼손되고 도의심이 없어지며 부끄럽게도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소위 교제상 술을 마신다는
사람은 모두 알콜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은 이런 위협을 좌시하거나, 인간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자기 생의 의미를 남용하도록 방관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슬람은
도박과 음주를 훌륭한 스포츠와 기분을 전환시키는 오락에 관련시키지 않고 이들을 단호하게
금하였다. 뉴스매체를 조사하고 의학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거나 사회사업 기관을 방문하고
재판 절차를 지켜보기만 하면, 이 점에 있어서 이슬람의 견해가 옳다는 것은 알게 될 것이다.
모든고민스러운 사회 문제 중에서 알콜 중독이 단연코 가장 심각하다. 매년 130만 이상의
미국인들이 알콜 중독자가 되고 있다. 어느 해에 열 내지 열 두 명이 처음으로 술을 마신다고
할 경우 그 중에 한 명은 앞으로 알콜 중독에 걸린다는 얘기다. 구태여 이론이나 거래액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이러한 모든 고통스런 비극과 당면한 손실이 현실을 더 잘 대변하는
터이다.
2.가정 생활
가족에 대해서는 많은 정의와 기술이 나와 있다. 편의상, 다음의 단순화된 정의를 택한다. 가족이란 그 성원들이 혈연이나 혼인 관계를 유대로 하여 결속된 인간의 사회 집단이다.
가족의 유대는 종교에 의해 규정되고, 법에 의해 시행되며, 집단 성원에 의해 준수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한 상호적 기대를 수반한다. 따라서 가족 성원들은 일정한 상호적 책임을 공유한다.
일체감대비상속의논연소자에 대한 애정연로자의 안전가족의 계속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의 극대화가 이러한 책임의 내용이다.
이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슬람에서의 가족의 기초는 혈연이나 혼인의 서약
혹은 이 두 가지다. 입양, 상호결연, 예속자(家臣), 성교에서의 은밀한 동의, 그리고
“시험”(“commonlaw" or "trial")은 이슬람적 의미에서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합리적 계속성과 진정한 안전 그리고 무르익은 친밀감을 제공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 위에
가족을 세운다. 가족의 기초는 진정한 상호성과 도덕적 만족감을 키워 줄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슬람은 혈연 관계가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이며 도덕적 만족이
결합된 성교가 가장 건전한 성교임을 인정한다.
이슬람은 결혼의 종교적 미덕과 사회적 필요성과 도덕적 장점을 인정한다. 무슬림 개개인에게
있어 정상적인 행로는 가족을 지향하고, 자기 자신의 가족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혼인과
가족은 이슬람제도의 핵심이다. 꾸란의 많은 구절과 예언자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을 정도다.
결혼한 무슬림은 그로써 자기 종교의 절반을 완성한 것인즉, 저는 하나님을 염원하며 나머지
절반에 유념할지니라.
결혼은 종교적 의무며 도덕적 안전 장치며,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이 꾸란의 결혼관에 대해
무슬림 학자들이 내린 해석이다. 종교적 의무로써 그것은 이행되어야 하지만, 이슬람의 여타의
의무가 그렇듯이, 그것은 관련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과해진다.
1.결혼의 의미
사람들이 결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관계없이, 이슬람은 결혼을 강한 유대(미싸꾼
갈라즈), 가장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도전적인 서약이라고 본다. 그것은 삶 자체와 사회와
인류의 존엄하고 의미 있는 생존에 대한 서약인 동시에, 결혼 배우자들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하여 한 서약이다. 결국 배우자들은 이런 서약 속에서 상호적 의무 이행과 자아 실현,
사랑과 평화, 동정과 평온, 위안과 희망을 확인한다. 이 모든 것은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최우선적으로 의로운 행위, 신뢰할 수 있는 헌신의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성적 통제가 도덕적 승리, 생식이 사회적 요구 혹은 봉사, 건강이 만족스러운 정신 상태라고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의 제 가치와 목적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읽혀지고
또한 종교적 서약으로 여겨지며, 신선한 축복으로 내재화된다면, 그것들은 특별한 의의를
지니고 새롭게 강화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서의 결혼의 초점이 아닌가 한다.
다음에 꾸란 구절 몇 개를 말을 바꿔 제시한다. 하나님께 충실하자.
-이는 인류에 대한 외침이다. 하나님은 한 영혼으로부터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또 그 한
영혼으로부터 그 배우자를 창조하셨으며, 저들 둘로부터 많은 남녀를 널리 퍼뜨리셨음이라
(꾸란, 4:1).
살아 있는 한 영혼으로부터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영혼으로부터 한 배우자를 창조하시어
저가 그 여자에게서 위안과 안식을 찾게 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꾸란, 7:107)
하나님의 표징은 이것이니 곧, 당신께서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을 위하여 배우자를 창조하사,
저들이 함께 거하여, 평화와 평온을 찾게 하시여, 저들 사이에 사랑과 자비를 두신 것이다.
진실로 그 가운데 생각 깊은 자들을 위한 표징이 있느니라(꾸란, 30:21)
결혼 생활이 아무리 어려운 시련기에 부딪치더라도 또 법적 분쟁과 소송의 와중에서도 꾸란은
당사자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상기시킨다. 꾸란은 이들에게 서로 다정하게 대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용서해 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충실하라고 명한다.
이슬람의 결혼 규정이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를 남자에게는 독신 생활을 권하지 않는다면, 여자에게도 그것을 권하지 않는다.
이것은 여자의 요구도 동등한 합법성을 가지며, 진지하게 고려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이슬람은 결혼이 남자에게 있어서와 꼭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있어서도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로라고 간주한다. 아마 여자에게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 결혼은 무엇보다도,
여자에게 상대적이긴 하지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 쪽에 이처럼
무시할 수 없게 유리한 면이 따른 다고 해서 결혼을 순전히 경제적 거래로 볼 수는 없다.
사실, 경제적 요인은 그것이 아무리 우세하더라도 이슬람이 중시하는 결혼의 측면 중 최하위를
차지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는 여자를 아내로 맞을 때, 통상 여자가 가진
재산아름다움혈통의 고귀성종교적 품성을 보게 되지만 무엇보다도 경건을 앞세워
배우자를 고르는 자가 복 받은 행운아라고 말했다.
꾸란은 독신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비록 가난하거나 노예 신세일지라도 결혼하라고 명한다. (꾸란, 24:30)
한편, 남자가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에게 주는 결혼 예물은 무엇이나 다 여자의 소유가 된다.
여자가 결혼 전 후에 얻은 것은 모두 다 여자만의 소유다. 남편과 아내의 재산 공유는 “필요로
하지”않는다. 더구나 가족의 부양과 경제적 안정에 대해 책임이 있는 쪽은 남편이다. 심지어
남편은, 아내가 결혼 전에 남의 시중을 받았다면 결혼 후에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
몇몇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아내에게는 매일 되풀이되는 집안 일에 매달려야 할 의무가 없다.
협동이나 절약 등의 이유로 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고 또 통상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2. 결혼의 영속성 이슬람은 결혼을 매우 중대한 서약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인력으로
결혼의 유대를 영속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수단을 규정하였다. 결혼 당사자들은 다음의 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적정한 연령, 전체적인 조화, 분수에 맞는
결혼예물, 호의, 자유로운 동의, 헌신적 보호, 명예로운 결혼의식, 적절한 분별, 결혼계약을 맺을
때는 그 유대를 영속 시켜 일시적임시적인 것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험 결혼과 기한부 결혼 그리고 실험적이거나 일시적임시적
성격을 띠는 결혼 모두가 이슬람에서는 금지된다.
예언자(P. B. U. P)는 자신의 가장 단호한 언명 가운데 하나에서, 배우자를 자주 바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즉 얼마 동안은 한 배우자를 즐기다가 다른 배우자로 바꿔치는 식으로
“맛만 보는”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결혼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곧 결혼 계약은 해체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의해 중앙의 민족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슬람 또한 참으로 중용의 종교요, 균형과
통합을 잘 이룬 제도다. 이것은 결혼의 경우에 특히 분명하다. 이슬람은 결혼을 성례나
단순한 일반 계약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성례적 성격과 계약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 독특한 것이다. 또 이러한 일시적임시적이라는 극단에 대한 대안이 결혼 계약
해제의 절대 불가능이라는 또 다른 극단이 아니라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이슬람은 공평하고
현실적인 중용의 길을 걷는다. 결혼계약은 중대하고 영속적인 유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결혼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친절과 명예를 견지하며
공평하고, 평화롭게 결말지을 수도 있다.
3.남편과 아내의 관계
경건을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결혼의 제조건을 진지하게 만족시킨다면, 당사자들은
틀림없이 행복하고 본분을 다하는 결혼생활로 순조롭게 인도될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여기서 한층 더 아나가 남편과 아내의 행동 방식을 규정한다. 꾸란과 순나에는 친절과 공평,
연민과 정과 사랑, 동정과 이해성, 인내와 호의를 명하는 말이 많다. 예언자는 자기 가족에게
가장 친절한 사람이 가장 훌륭한 무슬림이며, 인생에 있어 가장 크고, 가장 복된 기쁨은
착하고 의로운 아내라고까지 단언까지 하고 있다.
신방을 치르고 나면,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진다. 각 역할은 공평하고,
비례적인 일단의 권리와 의무다. 남편의 역할은 자기 아내를 인내심으로써 친절하고 명예롭게
대우하며, 아내를 명예롭게 보살펴 주든지 아니면 결혼의 유대로부터 명예롭게 해방시켜 주며,
아내에게 해나 슬픔을 끼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남편의 엄숙한 의무라는 윤리원칙을
중심으로 한다.(꾸란, 2:229-232, 4:19)
아내의 역할은 여자는 의무를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권리를 가지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다는 꾸란 구절로 요약된다.(꾸란, 2:228).
무슬림 학자들은 통상 이 지위를 다른 구절과 관련시켜 해석한다. 이 귀절이 특히 지적하고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보다 뛰어나게 하셨으며, 남자가 자기 재산으로 여자를
부양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수탁자, 감시자, 보호자라는 것이다. (꾸란, 4:34)
이 지위는 분업과 역할 분화에 따라 가정 내에 생긴, 사회학자들의 소위 “수단적 리더십” 혹은
외적 권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절대적 차별이나 남자의 여자에 대한 우월을
뜻하지는 않는다.
(1) 아내의 권리 : 남편의 의무
이들 윤리원칙이 행위규칙으로 구체화되면, 이에 따라 여자에게 권리와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배당된다. 꾸란과 예언자의 순나가 여자에게 친절하라 명했으므로 자기 아내와 화합하여
공평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남편의 의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의 한 가지 특별한
결과로서, 남편은 자기 아내를 전적으로 부양할 책임을 진다. 남편은 이 부양 의무를 기꺼이
이행하되, 나 무랄 데가 없어야 하며,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생색내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부양의 내용, 부양은 의식주와 전체적인 보살핌, 안녕에 대한 아내의 논쟁의 여지없는 권리를
수반한다. 아내의 주거는 아내에게 합리적 수준의 프라이버시안락 독립을 보존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아내의 안녕과 결혼의 안정이 급선무다. 주거만 그런 게 아니라
의복음식전체적인 보살핌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의 재산과 자신의 생활 양식에
맞춰 남편에 의해 입혀지고, 먹여지고, 보살핌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의 행사가
무절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을 행사하는데 인색해서도 안 된다.
물질외적 권리, 물질적 권리만이 아내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이외에도
윤리적 성격을 띠는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권리 역시 마찬가지로 구속력이 있고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법은 남편에게 자기 아내를 공평하게 대우하고 아내의 감정을 존중하며 아내에게
친절과 이해심을 보이라고 명한다. 남편은 아내를 혐오해서는 안 되며 아내가 불확실하고
어중간한 상태에서 불안을 느끼게 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규정의 당연한 결과로서, 남자는
아내에게 해를 입히거나 아내의 자유를 가로막을 작정으로 아내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거나 동정하지 않을 경우 여자는 결혼의 유대를 풀어 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며 누구도 그녀의 사생활을 방해할 수 없다.
(2) 아내의 의무 : 남편의 권리.
결혼관계에 있는 배우자로서 아내가 지켜야 할 주된 의무는 가급적 결혼 생활을 원만하고
행복하게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안락과 안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편을 화나게 하거나 남편의 기분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아마 다음의 꾸란의
말씀보다 핵심을 더 잘 찌를 말은 없을 것이다. 이 꾸란의 말씀은 의로운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주여! 우리에게 아내와 자식을 주사 우리 눈의 기쁨과 위안이 되게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의의 본이 되게 하소서.(꾸란, 25:74)
이것이 아내의 모든 의무가 의거하고 발원하는 기초다. 이러한 기초적 의무를 이행하려면
아내는 충실하고 신뢰할 만하며 정직해야 한다. 특히 남편이 적출(嫡出)을 갖지 못하게
할 양으로 임신을 고의적으로 회피하여 남편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아내는 전적으로 남편의
권리인 동침을 타인에게 허락해서도 안 된다. 이의 당연한 결과로서, 아내는 남편이 모르게,
남편의 승낙 없이 낯선 남자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거나 접대해서는 안 된다. 또 낯선 남자가
주는 선물을 남편의 허락 없이 받아서도 안 된다. 이는 필시 질투의심험담 등을 피하고
관련 당사자 모두의 결백을 지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남편의 재산은 아내의 신용이다.
남편의 재산이 일부라도 자기에게 달려 있거나 자금 등이 맡겨진 경우에는 슬기롭고 알뜰하게
자기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남편의 허가 없이 그 재산을 빌려주거나 처분할 수 없다.
동침에 대하여 말하자면,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보면 마음이 끌리게 해야 하고, 매력적이고
민감해야 하면, 협조적으로 나와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을 거부할 수 없다.
꾸란이 부부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과 체면을 마땅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아내는 자기와 동침하고 싶은 생각이 가시게 하거나 만족을 빼앗을
여지가 있는 행위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행위를 하거나 자신을 소홀히 할 경우,
남편은 아내의 자유에 간섭하여 사태를 바로잡을 권리를 가진다. 양 당사자에게 최대한의 자기
달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남편 역시 아내의 만족을 방해할 소지가 있는 행위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4.부모와 자녀의 관계
(1) 자녀의 권리 : 부모의 의무 이슬람의 자녀에 대한 접근 방법은 몇 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첫째, 자녀가 부모에게 해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둘째, 부모는 넌지시 반응을 보여야 하며, 자녀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꾸란은 부모에게 과잉 보호나 무관심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인정한다.
이런 인정을 근거로 하여
셋째, 꾸란은 몇 가지 지침을 확립하고 자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였다.
꾸란은 자녀가 자만의 근원, 허영과 허망의 씨앗, 고난 유혹의 원천일 뿐 아니라 삶의
기쁨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꾸란은 서둘러, 심령의 보다 큰 기쁨을 강조하고 부모에게
과신하거나 터무니없이 자만하지 말고 자녀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비행을 방지하라고 경고한다.
이런 입장이 가지는 종교적 윤리 원칙은 부모와 자녀를 막론하고 각 개인은 하나님께
직결되며, 자기 행위에 대해 개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심판날에는 자녀가 부모를
사면할 수 없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위하여 나설 수도 없다. 끝으로 이슬람은 자녀가
부모에게 결정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에 특히 민감하다. 자녀 인격형성에 부모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슬람은 분명히 인정한다. 예언자는 매우 시사적인 언명 가운데서 자녀는
모두 피뜨라(이슬람의 순수한 자연 상태)라는 진정한 의미의 순응성을 제각기 타고나는데,
부모가 나중에 자기 자식을 유태교나 기독교도 혹은 이교도로 만드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들 지침에 의하면 이슬람에서 가장 양도 불가능한 자녀의 권리 중
하나는 생존과 동등한 삶의 기회를 누릴 권리이다. 자녀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이슬람의
세 번째 계명이다.(꾸란, 6:151 비교 17:28ff)
마찬가지로 양도 불가능한 또 하나의 권리는 자녀마다 오직 한 아버지를 가질 것을 주장하는
적출(嫡出)의 권리다. 세 번째 부류의 권리에 해당하는 것은 사회화와 양육 그리고 전반적인
보살핌이다. 자녀를 잘 보살피는 것은 이슬람에서 가장 높이 칭찬하는 행위 중 하나다.
예언자는 아이들을 가장 좋아하였고, 자신의 무슬림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으로 유명해지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자녀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자녀의 영적 복지, 교육의 필요 그리고 전반적 안녕 임이 최우선의 과제인 것이다.
예언자의 지시에 의하면, 일곱째 날까지 자녀에게 훌륭하고 호감이 가는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며, 머리를 깎고 아울러 건강하게 자라는 데 필요한 기타 위생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런 날은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축일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책임과 동정은 사회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부모의
생사나 동거여부에 관계없이 또 부모를 알거나 모르거나 어린아이에게는 최적한 보살핌이
베풀어져야 한다. 아이의 복지를 책임질만한 유언 집행자나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우선
이들에게 이러한 의무가 부과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없으면, 그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당해 관리와 일반 대중 다시 말해서 전체 무슬림 사회의 공동 책임이 된다.
(2) 자녀의 의무 : 부모의 권리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이슬람에서의 부모와 자녀는 상호적 의무와 상호적
책임에 의해 결속된다. 그러나 연령 차이가 너무 벌어져 부모의 심신이 이미 나약해져 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흔히 조급해지고 기력이 쇠퇴하며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리고
어쩌면 판단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부모의 권위가 남용되거나 요새말로
“세대격차”와 유사한 세대간이 소원과 불안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이슬람이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개인의 부모와의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 규정을 만드는데 있어서 필시 이러한 점들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부모가 나이가 더 많고 대체적으로 경험이 더 풍부하다는 사실 자체가 부모의 견해를
정당화시키거나 그 기준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은 그 자체가
활기나 이상주의 혹은 지혜의 유일한 원천인 것도 아니다. 꾸란은 여러 곳에서 자신과의
대립에서 부모가 잘못된 경우와 자신이 부모의 입장을 그릇 판단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참고, 꾸란 6:74, 11:42, 19:42-48)
어쩌면 관습이나 민습, 전통 혹은 부모의 가치 체계와 기준이 그 자체로서 진리와 정의를
구성하지 않는 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꾸란은 몇몇 구절에서 진리가
자기들에게 새롭거나 친숙한 것에 반하거나 부모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진리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엄히 꾸짖는다. 더 나아가서 꾸란은 부모에게 충실하거나
복종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될 경우에는 말하자면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부모에게는 마땅히 고려와 동정과 사랑과 자비가 베풀어져야 한다. 하지만
부모가 적정 선을 넘어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한계선을 긋고 그것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꾸란은 의와 선과 미를 이흐싼이라는 최상위 개념으로 문제 전체를 요약한다. 이흐싼의
개념이 부모에 대하여 실제 내포하고 있는 사항은, 적극적 감정 이입과 인내, 감사와 동정,
부모에 대한 존경과 그분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 그분들의 정당한 서약에 대한 존중과
그분들에 대한 진지한 조언이다. 이흐싼의 한 가지 기본적 차원은 복종이다. 부모는 자신들이
자녀들에게 해 준 데 대한 부분적인 보답의 의미에서라면 자녀들이 복종해 주기를 기대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부모가 불의를 명하거나, 부정한 일을 요구하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복종을 하든, 하지 않든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태도가 절대적인 복종이나 무분별한 반항이 될 수는 없다.
끝으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이흐싼의 중요한 일면은 자녀들이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요긴할 때에 부모를 부양하고 가급적 편안한 여생을 누릴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은 절대적 종교의 의무다. 5. 가족 생활의 기타측면 “종”이나 다른 식구, 친척 그리고 이웃에
대한 대우는 가족 생활과 밀접히 관련된다. 예언자 무함맏은 종신 하녀를 거느린 사람들에게
충고와 좋은 소식을 아울러 주었다. 자기 종을 노예가 아니라 형제처럼 대우하라는 것이
“주인”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 종을 잘 대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통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임종의 순간을 쉽고 평안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종(하인)들도 정의친절자비의식주와 기타 개인 비용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예언자는 종들도 주인이 먹고 입는 것과 같은 것으로 먹이고 입혀져야 하며, 주인은 종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의 일부로서 이런 마련을 해 주어야 하는 말까지 하고 있다. 종들을
학대하거나 멸시하거나 너무 부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규정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고,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부르지 않고, 노동을 존중하는 방법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종이나 노동자라로 해서 그 권리가 박탈되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또 종이나 노동자라고 해서 공상적 프롤레타리아라는 아편에 빠져들게 되는 것도
아니다. 참다운 무슬림 사회의 시민 모두는 동등한 입장에 선다. 이슬람은 카스트 제도나
2등 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인정하는 유일한 우월성은 하나님을
섬기는데서 나타나는 경건과 선행의 우월성이다. (꾸란, 9:105, 49:13)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식구나 친척에 대해 최대한의 도움과 친절을 베풀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관심을 보이라고 명하신다. 아랍어로 친척이라는 말이 자비(라힘과 라흐마)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한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 친척에 대한 친절은 낙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와는 달리 이런 의무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게는 낙원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언자는 친척들을 친절하게 대우하는 것을 가리켜 자신의 삶에 대한 신성한 축복이며,
규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친척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신성한 의무다. 비록 그 친척이 똑같이
대해 주지 않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 의무는 하나님의 명인 바, 친척의 반응에 상관없이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웃의 지위를 아주 높게 본다. 이웃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이슬람이 부여하는 많은 특권을 누린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맏은
그 누구도 자기 이웃이 자기에게서 안전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자기 이웃은 굶주려 밤을 보내는데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들도 역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이웃에게 가장 친절한 사람은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이웃이 될 것이다. 이웃간에는 선물을 주고받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또 다른 언명 가운데서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 “이웃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느냐? 이웃이
네 도움을 구하면 도와주며, 네 구원을 청하면 구원하고, 빌려 달라는 게 있으면 빌려 주라,
걱정거리가 생기면 염려해 주며, 병들면 간호해 주고 초상이 나면 장례에 참석하라. 경사를
만나면 축하해 주고 재난을 당하면 위로해 주라. 이웃의 허락 없이 네 집을 높이 올려 하늘을
막지 말라. 이웃을 괴롭히지 말라. 과일을 사거든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 나누어 주지 않으려면
네가 산 것을 남이 눈치 안체게 집으로 바로 가지고 들어가되, 네 자녀들이 그것을 들고 나가
옆집 자녀들이 보고 샘내는 일이 없게 하라.” 게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는 이웃에게도
상속에 참여할 권리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자신에게 들 정도로 천사 가브리엘이 이웃의
권리를 누누이 강조했다고 말했다.(또한 앞 문단의 꾸란 구절 참조)
3. 사회 생활
진정한 무슬림의 사회 생활은 최고의 제 원칙에 입각하여, 사회는 물론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보상하는데 그 의의를 둔다. 계급투쟁, 사회적 특권 계급, 그리고 개인지배는 이슬람의
사회생활과 그 질을 달리 한다. 꾸란이나 무함맏의 전승의 어디에도 계급이나 출신(혈통) 혹은
재산을 근거로 우월성을 인정한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인류에게 살아가는데 있어
지극히 중요한 제사실을 상기시키는 꾸란 구절과 무함맏의 말씀은 많이 있다. 이러한 제
사실은 동시에 이슬람 생활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제원리를 이룬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은 인류는 같은 한 부모에게서 나서 같은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를 공통 부모로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인류의 통일성을 생각한다. 사람은 모두
첫 아버지와 첫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 가족의 일원이며, 따라서 공통의 책임이
과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통의 이익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사람들이 자기들 모두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종적 편견이나 사회적
부조리 혹은 2등 시민의 지위라는 것이 발붙일 여지를 잃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통 부모라는
유대에 의해 본성이 통일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적, 행동에 있어서 통일될 것이다.
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은 인류가 본성과 기원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는 곧 인종적 자만과 민족적 혹은 종족적 우수성에 대한 주장을
타파하고 형제애를 향한 탄탄대로를 여는 것이 아닐 수 없다.(꾸란, 4:1, 7:189, 49:10-13)
인류는 그 기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궁극적 목적에 있어서 통일된다. 이슬람에 의하면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 분으로부터 와서 그 분을 위해 살다가 모두
그 분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사실 꾸란이 말하는 창조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만을 숭배하고,
진리와 정의사랑과 자비형제애와 도덕이라고 하는 그분의 대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꾸란, 51:56-58)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이슬람의 사회 생활의 배경을 이루는 이러한 기원과 궁극적 목적의
통일성에 기초한다. 개인의 역할은 사회의 역할을 보완한다. 양자 사이에 사회적 결속과
상호적 책임이 자리한다. 개인은 사회의 공공복지와 번영에 책임을 진다. 이러한 책임은
사회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여 개인은 건전한
사회성을 갖추고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을 올바로 의식하여 활동에 임하게 된다. 사회를 위해
최선을 그 공공복지에 기여하는 것이 개인의 역할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역시 개인의
복지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개인에게 능력이 있을 때, 그 개인은 기부자가 되고
사회는 수혜자가 된다. 그 대신 그 개인이 무능해진다면 안전과 보호의 권리를 누리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개인이 수혜자가 되고 사회가 기부자가 된다. 그러므로 의무와 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는 상호적이다. 국가가 개인을 지배하고 개인으로서
의 존재를 말살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개인이나 계급이 사회를 착취하고
국가를 부패하게 할 수도 없다. 개인과 사회는 건설적으로 상호 작용해야 한다.
기원과 궁극적 목적에 있어서의 인류의 통일성, 그리고 이러한 상호적 책임과 관심 이외에도
이슬람의 사회 생활은 선하고 경건한 일을 하는데 서로 협력한다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개인과 개인이 가지는 생명재산명예에 대한 신성한 권리를 충분히 인식하는 것과 아울러
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측면에서 개인이 수행하는 효과적 역할이 이슬람 사회생활의 특징을
이룬다.
이슬람 사회의 개인은 무관심할 수 없다. 이슬람 사회의 개인은 선을 권하고, 또는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온갖 악과 마음대로 싸울 수 있도록 사회의 도덕과 윤리를 확립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명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뿐 아니라
타인도 그와 같이 하도록 돕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무관심한 개인은 이기적인 죄인이다.
도덕은 문란해져 있고 양심은 혼란에 빠져 있으며, 신앙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사회생활의 구조는 매우 고상하고 건전하며 포괄적이다. 이러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실질적 요소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동료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 젊은이에 대한 자비,
웃어른에 대한 존경, 고통 당하는 자의 위안과 격려, 슬퍼하는 자의 위로, 진정에서 우러난
형제애와 사회적 결속감, 타인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에 대한 권리의 존중개인과 사회 사이의
상호적 책임, 다음과 같은 언명을 흔히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에게서 이 세상의 슬픔을 덜어 주면, 하나님께서 심판날에 저의 슬픔을 덜어
주시리라. 연소자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고 연장자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 무슬림 가운데 들지 않는 자라. 너희 중 누구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슬람의 진정한 신자가 아니니라.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사람은 누구든지 선을 행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즉 응분의
보상이 따르리라. 그리고 악을 충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을 행하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즉 응분의 처벌이 따르리라.
한편, 꾸란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교훈이 많이 나온다.
오, 너희 믿는자들아! 하나님을 유념하되 온당하게 하며 이슬람의 상태 밖에서 죽지 말라.
다 함께 하나님의 밧줄을 굳게 잡아 흩어지지 말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네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라. 너희가 적이었으나 그 분이 사랑으로 너희 마음을 맺어, 그 분의
은총으로 너희가 형제가 되었으며, 너희가 불구덩이 옆에 있었으나 그 분이 거기서 너희를
구해 냈음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표징을 너희에게 분명히 하시나니, 이는 너희를
인도하려 하심이라. 오직 선을 권하고 의를 명하며 악을 금하는 사람의 무리를 너희에게서
일으키라. 저들이야말로 지복을 누릴 자들이니라.(꾸란, 3:102-104)
오, 너희 믿는자들아! 모든 의무를 이행하며…의롭고 경건한 일에는 서로 돕되, 죄를 짓고
원한을 짓는 일에는 서로 돕지 말라. 하나님을 유념하라. 하나님은 엄히 벌하심이라.
(꾸란, 5:1-2)
전술한 내용에 더하여 순례의 여정 중에 예언자 무함맏이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슬람의
사회 생활 양식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 수만 명의 순례자들에 대한 설교에서 무함맏이 특히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오,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후에 한 해가 더 내게 허락되어
이 곳에서 너희를 다시 대하게 될 지 알 수 없음이라. 이 달 이 날이 모두에게 신성한 것처럼,
너희가 주님 앞에 나타날 때까지 너희 생명과 재산은 너희 사이에서 신성 불가침한 것이니라.
그리고 기억할지니, 너희는 너희 모든 행위의 회개를 너희에게 요구하실 주님 앞에 나타나야
하리라. 오, 사람들아! 너희는 아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아내는 너희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느니라. 너희 아내를 사랑스럽고 친절하게 대하라. 정녕 너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으로 너희 아내를 맞이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몸이 너희에게 합법적이 되게
하였느니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맡기사 너희에게서 안주하고 있는 아내에게 성실을 지키고
죄를 피할지니라. 이제부터 무지와 이교의 시대에 횡행하던 유혈보복을 금하며 모든 피의
복수를 폐하노라. 그리고 너희 종들이 있으니, 너희는 살펴 너희 종들에게 너희가 먹는 음식을
먹이고 너희가 입는 것으로 입히라. 만약 너희 종이 잘못을 저질러 용서해 주고 싶지 않거든
저를 떠나 보내라. 저는 하나님의 종인지라 학대할 수 없음이라.
오, 사람들아! 내 말을 듣고 이해하라. 무슬림은 모두 형제임을 알라. 너희는 한 형제이니라.
호의로 그냥 준 것이 아니라면 다른 형제의 것을 취함은 불법이니라. 너희 자신을 지켜 불법을
행치 말라. 이 성역에서의 이 달 이 날처럼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 주를 만날 때까지 너희
각인의 생명과 재산을 다른 사람에 대해 신성 불가침한 것이 되게 하셨느니라.
여기 있는 사람은 여기 없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도록 하라. 아마 직접 듣게 될 자가 소문으로
들은 자보다 더 잘 기억할 수 있으리라. 진실로 나는 나의 사명을 이루었노라. 이제 그것을
너희 가운데 남기나니 곧 분명한 명령이요, 하나님의 성서요, 명백한 법령이라. 너희가 굳게
지키면 결코(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4.경제 생활
이슬람의 경제 생활 역시 확고한 기초와 하나님의 교훈에 입각하나. 버젓하게 일해서 생계비를
버는 것은 의무일 뿐 아니라 큰 미덕이기도 하다. 능력이 있으면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해서 사는 것은 종교적 죄요, 사회적 오명이며 수치스런 자기비하다.
하나님께서는 무슬림에게 남에게 짐이 되지 말고 제 힘으로 살아가라고 명한다. 이슬람은
떳떳하지 못하거나 나쁜 일이 아닌 한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하는 일은 모두 존중한다. 깨끗한
양심으로 사회에서 합당한 존경을 받으면서 무슬림은 자신과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일에나 나설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맏은 주거나 말거나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보다 새끼줄을 들고 나무를 베어 팔아
자기도 먹고살고 남에게 자선도 베푸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이슬람에 의하면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의 지위를 그 사람의 생업의 종류를 보고 격하시킬 수
없다. 오히려 노동자들도 아무런 제약 없이 능력껏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다. 노동자들도 자기 뜻대로 균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업의 자유를 향유한다.
개인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벌어들인 것은 모두 그 개인의 사유재산이다. 국가나 그 어느
누구도 이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함은 부당하다. 이러한 사유 재산권에 대한 보답으로
사회에 대하여 일정한 의무를 이해하고 국가에 세금을 바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누리게 되며 사업의 자유가 보장된다.
이슬람 제도 아래서는 탐욕적인 자본주의와 파괴적인 공산주의가 결코 고개를 쳐들 수 없다.
기업정신이 왕성한 개인은 국가의 번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역으로 국가는 개인의 안전에
대해 책임을 진다. 협동과 조화가 계급투쟁을 대신하여 상호의 안정과 신뢰가 공포와 의심을
제거한다.
산술적 계산과 생산능력만을 보고 이슬람의 경제 제도를 도출할 수는 없다.
이슬람의 경제 제도는 도덕과 원칙의 포괄적인 체계에 비추어 도출되며 또 이러한 체제에
비추어 그 제도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회사 혹은 기관에 고용된 사람에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능률적이고 정직하게 수행하라고 명하신다.
예언자는 누구든지 일단 어떤 일을 맡았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맡은 일을 제대로
능률적으로 해 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하신다고 말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일한 사람은 자기가
일한 대가로 공정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고용주가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거나,
깎아 내리려고 하거나 주기를 망설이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벌 받을 행위다.
이슬람은 특히 상거래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정직한 거래를 허용하시며 또 그것을 축복하신다.
거래는 개인, 회사, 대리점 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모든 거래 관계는 숨김없이 정직하게
맺어져야 한다. 속이거나, 상인이 상품의 흠을 숨기거나, 고객의 필요를 악용하거나 자기
가격을 강요하기 위해 매점을 하는 것은 모두 범죄 행위이며, 이슬람법에 의해 처벌된다.
떳떳한 생활을 하려면 정직하게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없어져 버린다. 그 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말씀에 의하면 부정한 양식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날에 지옥 불에 탈것이다. 사기와 이기적 악용을 막기 위하여 이슬람은 거래에 있어서
정직을 요구하고 사기꾼에게 경고하며 떳떳하게 일할 것을 권하고, 고리 대금업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을 금한다. 이는 곧 자신이 일해서 얻은
것만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요, 타인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하는 것은
비종교적이요, 비인간적이며, 부도덕한 처사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꾸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
고리(高利)를 받아먹는 자들은 서지 못하리니, 저들이 선다 하더라도 악마가 건드려
광기(狂氣)들리게 한 자들 같으리라. 저들의 장사도 고리대금과 마찬가지라고 말함은 이런
연고에서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사는 허락하셨으되 고리대금은 금하셨느니라. 주님에게
명을 받은 후 그치는 자들은 그 지난 일을 용서받으리니, 이들의 처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라. 그러나 이(죄)를 되풀이하는 자들의 불의 친구인 즉 저들은 (영원토록)그 속에
거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고리에 대해서는 모든 복을 제하실 것이나 자선에게는 (복을)
더하시리라.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악한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라(꾸란, 2:274-276)
그분은 하늘을 높이 올리사 (공정한)균형을 이루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합당한)균형을 범치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런 즉 공정하게 무게를 달아, 모자람이 없게 하여 균형을 지키라.
(꾸란, 55:7-9)
이는 곧 공정과 정직에 의거하여 모든 거래를 하도록 인간을 인도하려는 것이다.
사기꾼의 앞날은 냉혹하며 그 운명은 끔찍스럽다. 꾸란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속이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저들은 재서 받아야 할 때는 한치도 어긋남이 없으면서 재거나,
달아서 주어야 할 때는 제대로 주지 않는 도다. (온)인류가 주님 앞에 설 권능의 날에 자신들이
헤아려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뇨.(꾸란, 83:1-6)
그 외에도 예언자 무함맏의 많은 전승이 진실한 무슬림이 대열에서 사기꾼착취자독점자
부정직한 상인을 제외시키고 있다. 부정이나 사기 혹은 착취가 개입된 상거래는 엄히
금지되며 거래 관계가 맺어진 후에라도 이슬람법에 의해 취소할 수 있다. 경제와 상업에 관한
이슬람법의 주목적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의 결속을 유지하며 실업계의 고도의
윤리를 세우고 그 분야에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슬람이 이러한 제측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논리 일관의 귀결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영적 신조뿐 아니라 각 분야를 총괄하는 완전한 생활 제도이기 때문이다.
소유주들에게 부단히 주지되는 사실은 소유주들은 실상 단지 하나님께서 그 소유물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한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무슬림이 합법적인 수단과 떳떳한 경로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물질적 풍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진짜 소유주인 것이다. 다른 소유주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대리자요 수탁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현실일 뿐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중대한 관련을 갖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소유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베풀고, 가치 있는
대의 명분에 기여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갖추고 있게 한다. 소유주로 하여금 사회의
필요에 호응하게 하며 그에게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 이행해야 할 신성한 사명을 부여하는
한편, 이기심과 탐욕과 부정의 수령에서 소유주를 구해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에서 말하는
재산의 올바른 개념이며, 그 것이 소유주가 자처하는 사실상의 지위다. 꾸란은 재산의 소유를
뛰어난 덕과, 특전이 주어진 고귀한 신분의 증거, 혹은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참기 어려운
시험으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대리지로 땅의 상속자로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라. 그분은 너희 중 어떤 사람의 지위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셨나니, 이는 당신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선물로 너희를 시험하려 하심이라.
진실로 너희 주는 속히 처벌하시나, 참으로 관대하고, 지극히 자비로운 분이시라.(꾸란, 6:165)
또한, 꾸란은 모세와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오고 간 흥미 있는 대화를 인류에게 권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세가 이렇게 말하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인내하며 변치 말고 기다리라. 땅이
하나님의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원대로 그 종들에게 땅을 유산으로 주시나니 의로운
자의 결말이 가장 좋은 것이니라’ 백성들이 말하되, ‘당신이 우리에게 오기 전이나 후나 우리가
고생만 하는도다’ 하니 모세가 이렇게 말 하니라 : 너희 주께서 너희 적을 멸하시고 그 땅에서
너희를 상속자로 삼으시리니 그런 즉 그 분은 너희 행위로 너희를 시험하실 지 모를 일이다.‘
(꾸란, 7:128-129)
모세와 백성이 주고받은 이 대화가 종족의 기원이나 민족의식을 내세워 인류 가운데 특권
받은 족속을 인정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꾸란이 후대의 모세의 추종자들이 한 행위나 생각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본문의 어조는 오히려 의심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비판하는 투다.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상속받은 신탁물이나 시험물의 형태로 그것을
당신의 종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사실을 재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꾸란 전체를 통하여 되풀이 확인한다.
예를 들어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
천지의 주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만사가 그분께로 귀일하는도다…하나님과 그분의 사도를 믿고
그 분이 너희에게 상속해 준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 너희 중 믿고 자선을 베푸는 자들에게는
큰 보상이 있음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나니, 천지의 유산이
하나님의 것임이라.(꾸란, 57:5,7,10)
공산주의와는 달리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익한 주권으로 공산주의 국가의 인위적인 전체주의
주권을 대신하게, 건전한 윤리와 상호적 책임과 화합으로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이론을
대신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은 탐욕적인 자본주의와 가진 자들의 무자비한 착취를 최대한
억제한다. 이슬람의 경제제도는 개인이라는 “독립된” 실체가 일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개인의
타고난 열망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이나 세계(우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인간이나 인간이 가진 자본을 신격화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를 신성시하고 자유기업을 폐하지도 않는다.
이슬람의 경제제도는 인간을 창조된 그대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걸맞게 인간을 다루고 인간의
타고난 열망과 능력 한계를 고려에 넣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인간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또 그렇게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절대의 권력과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무류성을 주장하는 신이나 반신반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찮고 미천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본연의 지위와, 과장되거나 무시되지 않는 본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식되는 존재다.
자신을 제외한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 체계의 일부분이요, 세계의 전체적인 바탕을
이루는 한 요소인 것이다. 인간에게 일을 권하고 사업의 자유와 벌어서 소유할 권리를
부여하지만 인간이 단순한 수탁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간이 신탁물로서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정직한 관리를 보증하는데 필요한 조처를 요구한다. 벌어서 투자하고 소비할 권한이
인간에게 있지만, 일탈을 방지하기 위한 고도의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요점이 충분히 설명된다. 소유주에게는 아무 제한 없이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돈을 쓰거나 재산을 처리할 자유가 없다. 지출은 일정한 규정에 따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의 말씀 가운데서 소유주에게 같은 인간들에 대한 재정적 의무를 이행하고
검소한 소비를 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이 진정한 공급자요, 사실상의 소유주라는 것이
소유주에게 항상 주지되는 사실이다. 꾸란은 이렇게 단언한다 :
가난한 사람과 여행자에게 하는 것처럼 친척들에게도 저들의 정당한 권리대로 해 주라.
그러나 방탕한 자처럼 너희 재산을 낭비하지 말라. 진실로 방탕한 자들은 악마의 형제이니,
악마는 저의 주께 감사할 줄 모르느니라.…(인색한 사람처럼) 네 손을 목에 매이게 말며
(어리석은 탕자처럼)네 손을 쭉 뻗지도 말라. 너희가 질책을 당하고 곤궁해질까 함이라.
진실로 너희 주께서는 당신이 베풀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식물을 풍성히 베푸시나니,
그분은 또한 공평히 베푸시느니라. 그분은 당신의 모든 종을 알고, 주시하고 계심이라.
(꾸란, 17:26-27, 29-30)
5. 정치 생활
이슬람의 정치 생활은 사회경제 생활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영적도덕적 기초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교훈에 의해 인도된다. 이슬람의 정치제도는 그 구조와 기능과 목적이 독특하다.
그것은 실용주의나 도구주의가 아니다. 이슬람의 정치제도는 특정계급이 신적인 세습 혹은
비세습권리를 사칭하여 국민 위에 군림하고 책임을 초월한 듯한 태도를 취하는 신정이 아니며
복수심에 불타는 일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도 아니다. 이슬람의 정치 제도는 이 모든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정치관은 그것이 다음의 제원칙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올바로 인식된다 :
1. 무슬림 개인이나 집단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법인 꾸란에 의해 고무인도되어야 한다.
꾸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실한 종들을 위해 택하신 헌법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판결하지 (혹은 다스리지)않는 자는 누구든지 불신자요…행악자요…반역자니라. (꾸란, 5:47-50)
이 꾸란이야말로 지고한 의라 선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꾸란, 17:9)
2. 이슬람 국가의 주권은 통치자나 국민에게 속하지 않는다. 주권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법제화하기 위해, 국민전체가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그 주권을
행사한다. 통치자는 누구든 하나님의 법에 따라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행정관 대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기초인 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유일한 주권자로 계시는 세계에 대한 이슬람의 전체적 소망과 일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꾸란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언명에 접하게 된다 :
권위와 권력과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 축복을 받으소서, 하나님이시여, 주권이
그 수중에 있으며 만물을 지배하시는 도다.(꾸란, 67:1)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 수탁물을 응당 받아야 할 자에게 되돌려 주라.
그리고 너희가 사람들 사이에서 판결할(혹은 다스릴)때는 공정하게 판결할지니라. 그 분이
너희에게 베푸시는 가르침이 정녕 우월하지 아니한가!(꾸란, 4:58)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의 주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만사의)궁극 목적이 그분께로 향하는 도다
(꾸란, 5:18)
3. 이슬람 국가의 목적은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교의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헌법인 꾸란의
규정과 일치하게 모든 국민에게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종교적 혹은 인종적 소수의
문제를 이들이 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지키는 국민으로 있는 한, 생기지 않는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
오, 너희 믿는 자들아! 공정한 처리의 증인으로서 어디까지나 공명정대 하라.
남들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악으로 빗나가지 말며 공정에서 벗어나지 말라.
공정 하라. 그것이 경건에 아주 가까우니라. 하나님을 유념하라. 하나님은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을 익히 알고 계심이라(꾸란, 5:8, 비교 4:135)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과…우리가 그 땅에 안주시키면 예배를 거르지 않고 제 때에
자선하며 의를 명하고 악을 금하는 자들을 수호하시리라. 만사의 끝과 (결정이)하나님께 달려
있느니라.(꾸란, 22:38-41)
4. 전술한 목적을 위해 형성되고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기 위해 세워졌기에 이슬람 국가는
비이슬람적 강령의 정당에 의해 지배되거나 타 강대국에 종속될 수 없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리고 그 분을 위하여 정당한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이슬람 국가는 독립국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무슬림이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그 분의 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며, 법을 시행하고
그 규정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최대한의 협조와 지지를 해 주는 자라는 원칙에서 연원한다.
그러므로 무슬림 국민이 비이슬람적 강령의 정당을 지지하겠다고 서약하거나 그 근본이나
목적이 외국적인 비이슬람 정부를 따르는 것은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이기거나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꾸란, 4:141)
하나님께서 신자들 사이에서 판단(혹은 지배)케 하기 위해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에게
소환될 때 신자들은 다만 이렇게 답할 뿐이다 :
저들은 말하되, ‘우리가 듣고 우리가 복종하나이다.’ 하리라. …너희 가운데 믿고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 하셨나니, 그 분은 정녕코 저들보다 앞선 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저들을 그 땅에서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시며, 저들이 두려움 속에 살았던 지난날의 형세를
안전과 평화의 형세로 바꾸시리라 : ‘저들이 나만을 숭배하여 나에게 어떤 동반자도 붙이지
않으리라.’(꾸란, 24:51,5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하셨다 : 나와 나의 사도들이 정녕 이기리라. 진실로 하나님은 힘에
충만하고 당신의 뜻을 시행할 수 있는 분이시라. 너희가 하나님과 마지막 날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들을 적대하는 자들을 비록 저들이 자기 아버지나 아들이나 형제나
친척이라 하더라도 사랑함을 보지 못하리라. 이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 분께서 저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기록하셨으며 친히 영으로 저들을 강하게 하셨느니라.(꾸란, 58:21-22)
5. 통치자는 누구든 국민에 대한 주권자가 아니다. 통치자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국민을
대표하는 고용인이며, 하나님께서 감독하시는 엄숙한 계약에 의해 통치자와 피치자를 다함께
구속하는 하나님의 법에 통치자 자신이 복종함으로써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슬람의 정치적
계약을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만 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계약은 정부와 국민 그리고
그 상대로써 하나님 사이에 체결되며 그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경우에 한하여 도덕적으로 유효하며 구속력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행하기 위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된 통치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 국민으로부터 협조와
지지를 받을 권리가 있다. 국민이나 어떤 사회 성원이 어떤 행정관들에 대해 지지와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면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은 물론 정부에 대한 무책임한 범죄로 간주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하나님이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분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똑같이
죄를 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지지와 충성을 받을 권리를 잃게 된다. 꾸란은 이렇게
말한다 : 오, 너희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의)사도와 너희 가운데 권위가
부여된 자들에게 순종하라. 너희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거든, 하나님과 마지막
날을 믿는다면 그 일을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에게 맡기라. 그렇게 함이 최선이며 종래에 가장
온당하니라. (꾸란, 4:59)
권위가 부여된 자들에 대한 순종은 이들 자신이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의 전승에 순종한다는
것을 그 조건으로 한다. 무함맏은 결정적인 언명 가운데 하나에서 그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법에 구속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통치자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순종이나
충성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무함맏의 초기 계승자들은 이런 원칙을 아주 분명하게 하였던
바, 정책을 처음 발표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한 백성은 자신들에게 복종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6. 통치자나 행정관은 덕성과 적성과 능력을 근거로 하여 최선의 자격을 갖춘 국민들 가운데서
선출되어야 한다. 출신 인종이나 가문의 위광 혹은 경제적 지위 그 자체는 결코 후보자의 고위
공직에 대한 자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각 입후보자는 그 자신의 실적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며, 가문의 위광재산인종연령 따위는 이런 실적의 유의적 부분이 아니다. 후보자는
총선거를 통하여 국민의 동의에 의하여 선출하거나 사회 여러 분야의 자유 동의에 의해
리더십이 위임될 민중의 지도자가 뽑아서 권한을 부여해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는
원하는 만큼의 대의원회 혹은 시의회를 둘 수 있다. 선거권과 행정 행위는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으며, 사회 전체의 최선의 이익을 그 목표로 해야 한다.
예언자 무함맏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 사회에 더 적임자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공직을 맡기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 분의 사도와 무슬림들의 신뢰를 배반한 것이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유권자들이 도덕적으로 말하면 공사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투표할
경우에는 반드시 신중히 알아본 다음에 투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면 국가는
현대의 많은 민주국가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안전과 책임이 따르는 시민권에 대한 최대한의
보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7. 국민이 선거를 통하여 통치자를 선출한 다음에 국민 각자에게는 자기 자력으로 정부 행위를
감독하고 공사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항시 그 처리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 요구된다.
만약 정부가 하나님과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다면 직무 수행을 할 권리를 상실한다. 그 정부는
축출되고 다른 정부로 대체되어야 한다. 국민을 위해 이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민 모두의 의무다. 그러므로 세습정권이나 종신통치의 문제는 이슬람국가에 해당이 없다.
8. 통치자는 국민에 의해 선출임명되지만 통치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지며
그 다음으로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 통치자의 직책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 역할 역시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통치자는 문서에 서명이나 하고 국민의 의사를
그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집행하는 것을 일삼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국민 최선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게 실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통치자다. 통치자는
이중의 책임을 짊어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께 책임을 지는 일과, 자기를
신뢰하는 국민에게 책임을 하는 것이다. 국민이나 국민의 대표자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대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실직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국민은 또한 꾸란을
어떻게 취급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력을 가진 그 분의 법을 어떻게 여겼느냐에
대해서도 이실직고해야 할 것이다. 국민에 대한 책임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이슬람의 정치 제도는 인류가 알고 있는 여타의 모든 정치 제도와 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국민을 지배하지 못한다. 통치자는 정의를 불문율로 하고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님에 대한 진정한 복종을 국가의 정식 기능으로 하며 건전한 윤리를
행정부의 고상한 사업으로 하여 국민에게 봉사해야 한다.
9. 꾸란이 이슬람 국가의 헌법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슬림들에게 협의의 방법을 통하고
공사를 처리하라고 명하신다. 이는 국가적국제적 차원은 물론 지방적 차원에서 입법회의와
자문기관을 둘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국민 모두에게는 공사에 대하여
최선의 조언을 할 것이 요구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무와
이행을 실천적이고 실속 있게 보증하기 위해 통치자는 학식 있고 경험 있는 국민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리낌없이 말해야 하는 일반 국민의
권리를 부정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이슬람 국가의 국민 모두는 어떤 자격으로든 이행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으며
공사의 처리에 직간접적으로 깊이 관여한다. 이슬람의 역사는 최고 통치자와 칼리프들이
남녀를 불문한 일반 국민에게 추궁 당하고 조언과 시정을 받은 믿을 만할 기록을 보여 준다.
상호 협의의 원칙은 이슬람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인 만큼 자기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말해야
할뿐만 아니라 가장 진지하고 효과적으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정치 혹은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다른 분야에 있어서의 협의의 방법은 민주적인 통치
방식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명령이요 피치자는 물론 통치자에게 부과되는 도덕적인 의무다.
예언자는 그 자신 어떠한 원칙을 부단히 실천한 데 더하여, 훌륭한 조언을 제시하는 것을
가리켜 종교의 필수요소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조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법의 준수와 국민의
권리의 존중과 그 의무의 이행을 보호하는데 있다. 직업적인 정치가 발흥하는 것을 막고
기회주의적 정강을 가진 지하의 정치가들을 꺾기 위해 예언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그것이 조언의 형식이든 다른 형식이든-옳고 선한 말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려거든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고문과 조언자에게 이기적인
성향이냐 유혹을 제어하라고 경고하는 것이며, 조언은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며 그 분을
대신하여 이루어지고 공공복리를 그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가장 진정한 의도로써 최선의
공익을 위해 그것이 제시됨을 보증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조언을 구하고 국민이 조언을 주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자발적인 조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조요, 종교적인 법령이다.
무함맏 자신이 지혜롭고 “무류하며 헌식적”이긴 했지만 이러한 처세훈을 초월해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규정에 대한 예외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무함맏에게 이렇게 지시하신다 :
네가 저들 (너희 백성들)을 온유하게 대함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이라,
네가 가혹하거나 매정하다면, 저들이 네 곁에서 벌써 떠났으리라, 그런 즉 저들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며 저들을 위해 (하나님의)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중요한)일에는 저들에게
조언을 구하라. 그 다음 네가 결정을 내렸으면 (그분을)신뢰하라. (꾸란, 3:159)
꾸란은 신자의 특성을 열거하는 가운데 상호조언(의논)을 하나의 신조로써 명기하고 있다.
신자란 하나님을 믿고 주를 신뢰하는 사람이요, 더 큰 범죄와 수치스러운 행위를 피하고 화가
나더라도 용서하는 사람이며,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배를 거르지 않고 서로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고 우리가 식물로 준 것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요, 부당하게 억압당하면,
(겁을 먹지 않고)스스로 일어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니라. (꾸란, 42:36-39)
10. 이슬람의 정치 제도 아래서는 국민은 저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운명을 개척하며, 일하고 경쟁하고, 벌어서
소유하며, 자신의 정직한 판단에 따라 찬성하거나 반대할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는 혼돈과 무정부 상태로 화해
버린다. 자유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보증되며, 같은 하나님의 법에 지배된다. 이 자유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한, 그것은 국민 모두의 정당한 특권이 되지만, 법의 한계를 벗어나고
공익과 충동할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은 우주 전체의 일부이므로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한편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민족의 일원이므로 피차에 유익하게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소요를 일으키거나 견강부회하는 일이 없이 타인을 설득하여 자신의
신념을 믿게 할 충분한 자유가 있다. 다수가 다른 길을 택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개인은
다수를 따라야 한다. 제기된 문제는 더 이상 개인적인 심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집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꾸란, 3:102-105, 8:46)
11. 이슬람 국가의 통치자의 직위는 공적인 신탁물인 바, 국민 공통의 동의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정관들에게 위임된 것이다. 하나님이 국가의 최고 주권자이므로 최고위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는 누구든지 수탁 권리에 충성해야 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여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므로 대통령이나 칼리프 직위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진실한
무슬림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처를 취하는 것은 공익에 이바지하고 국민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국가의 모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러한 조처는 이른바 종교적인종적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통치가 곡해왜곡된 것은 인류에게
유감스러운 일이다. 실상인 즉 이슬람의 통치는 소수를 차별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주장한다. 법을 준수하는 이슬람 국가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렇게 할 자유가 있으며 책임을 다하는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특권을 타인과 공유한다.
그가 관습법에 복종하고 권리를 행사하되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이행하는 한, 무슬림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지위가 격하되거나 이등 국민의 신분으로 낮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만약 그가 국가의 존속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대가로 무슬림
국민과 마찬가지로 종교세(자카)와 기타 국세를 바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세금(자카)을 바치는 것이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거나 자신이 무슬림이 아니라서
기분이 상한다고 생각한다면 “공물” 혹은 지즈야로 알려진 다른 형태로 세금을 바칠 수도
있다.-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그 국가의 무슬림들이 누리지 못하는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 기여하는데 대한 대가로 그는 국가 공무원과 사회에 의해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을 충분한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국민이 혼인이혼음식상속 등의
사생활을 이슬람의 법에 따라 관리하고자 한다면, 그의 희망은 인정되고 그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 교리에 따라 이런 일들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가 있으며 누구도 거기에 대한 그의 권리를 훼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적인 혹은
감정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의지할 수도 있고 공적 규정에 의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익과 공사의 문제에 있어서는 국가의 법 곧 하나님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거나 안전과 보호의 권리가 다른 국민보다 못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한갖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천국의 꿈이 아니다. 그것은 꾸란의 가르침이요, 무함맏의
관습이며 이슬람 역사의 기록이다.
예를 들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무함맏 이후 제 2대 칼리프인 우마르 이븐 알-까따브가
한 번은 어떤 곳을 지나다가 가엾은 처지에 있는 한 늙은 유대인을 보게 되었다. 우마르는
그 사람에 대해 물어 보고는 그 처지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감이 섞인 말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대가 능력이 있을 때 우리는 그대에게서 공물을 징수했다. 그런데
이제 그대가 돌보는 이 없어 버려져 있으니 진정 이 우마르가 그대에게 불공평하였도다!”
말을 마치자 우마르는 연금을 정기적으로 그 노인에게 주라고 명했고 그 명은 즉각
시행되었다. 우마르를 비롯한 통치자들은 무함맏이 이룬 정치적 정향(定向)을 수용하였으며,
이 무함맏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 가르침이 다음의 꾸란 구절에 적혀 있다 :
너희 신앙을 인하여 너희와 싸우지 아니하며 너희 집에서 너희를 쫓아 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친절하고 공평하게 대함을 하나님은 금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공평한 사람을
사랑하심이라. 다만 하나님께서는 너희 신앙을 인하여 너희와 싸우며 너희 집에서 너희를
쫓아내고 남을 도와 너희를 추방하는 자들에게 우정과 보호를 금하시느니라. 저들에게 우정과
보호를 구하는 자들은 행악자들이니라. (꾸란, 60:8-9)
끝으로 이슬람 국가와 그 무슬림 원수의 필요성을 소수 집단에 속할지도 모르는 자가
이론적으로 국가 원수로 있을 법한 세속국가와 비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이다.
이러한 비교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불합리하며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첫째, 그것은 세속주의가 아무리 피상적이라 하더라도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보다 건전하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 혹은 전체는 과장된 것이다.
둘째, 이슬람하의 국가 원수의 의무와 권리는 전술한 바, 세속질서에 속해 있는 국가 원수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셋째, 현대의 세속 정신은 대부분의 경우 배상하여 구제 내지 사죄하는 것이나 이것은
이슬람에는 적합하지 않다. 더욱이 세속 국가의 원수가 진실한 사람일 수 있다 하더라도
인종적종족적 혹은 종교적으로는 소수에 속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국가 원수는 거의 예외 없이 다수당에 가입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종교적 다수를 정치적 다수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것을 소수의 지위
향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세속 논리는 전반적으로 국가 원수직을 개인에게
부여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나 특전으로 전제한다.
이슬람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국가 원수직은 최우선적으로 의무요
감당하기 어려운 서약이며 두려운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만약 이런 책임을
비무슬림에게 과한다면 그것은 형평을 잃은 처사가 될 것이다.
6. 국제 생활 이슬람의 국제 생활이란 이슬람 국가 혹은 민족과 타국가 혹은 민족 사이의 관계
노선이다. 이슬람 생활의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하나님의 인도에서 비롯하며
하나님의 모범을 따른다. 국제 생활이 세워지는 기초는 다음과 같다 :
1. 기원과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목적에 있어서의 인류의 통일성을 확신한다.
(꾸란, 4:1, 7:189, 49:13)
2. 무슬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타국민의 이익과 생존권, 명예와 재산을 합당하게
존경한다. 이것은 권리 침해와 범죄와 부정이 엄히 금지되기 때문이다.
(꾸란, 2:190-193, 42:42)
3. 평화를 정상적인 관계 노선으로 하여 선의의 사절을 교환하고 만인의 공유하는 인간애를
위해 상호 정직하게 노력한다. (꾸란, 8:61과 전기 참조)
4. 국제 관계에 있어서 유화정책과 침략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이슬람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평화를 어지럽히거나 안보를 위협하거나 평화정책을 악용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국가는 즉시 자신을 방위하고 이런 성격을 가진 모든 기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런 경우 이런 생활 아래서만 이슬람은 전쟁을 정당시한다. 그러나 전쟁을 할 경우에도
그 범위를 최소한도에 국한시키고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전쟁을 한다는 도덕적인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슬람에 있어서의 전쟁과 평화의 법은 자주 도덕적이고 독특하며 포괄적이고
건전하다. 이 법은 본서에서 다룰 이유는 없지만 법학자나 윤리학자들이 특히 연구해 볼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침략전쟁을 정당시하지 않으며 농작물, 동물, 집 등의 전쟁의 객체는
파손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슬람은 비전투원인 부녀자아이노약자의
살해는 허용하지 않으며 전쟁포로의 고문이나 패자에 대한 교리의 강요를 묵인하지 않는다.
전쟁은 세상에 부정과 불의와 침략이 존재하는 한 이슬람의 현실적인 제원칙에 의해
정당화되는 방어 조처에 불과하다.(꾸란, 2:190-195, 216-218, 22:39-41, 또한 후기의 지하드
논의 참조)
5. 이슬람 국가가 짊어질 의무들을 이행하고 이슬람 국가와 타국가 간에 체결된 조약을
존중한다. 이것은 조약 상대방이 자기 의무에 충실하고 조약을 존중하는 경우에 한하여
구속력을 가진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약은 효력을 상실하며 의무의 구속성은 없어진다.
(꾸란, 5:1, 8:55-56,58, 9:3-4)
6. 국내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국제적 차원에서의 인간 이해와 보편적인 형제애의 실현에
진심으로 기여한다. 이상이 이슬람 국가가 국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고무적인 원천이다.
이슬람 국가는 자신과 그 국민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국제적인 장(場)속에서 넓은 활동 범위와
중요한 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이슬람의 명에 의해 이슬람 국가는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자국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 같은 명에 의해 전체 인류에게 가치 있는 공헌을 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 있어서 우호적인 국민과 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마련하며, 이슬람 국가가 국제적
차원에서 인류를 위해 교육경제산업정치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역할은 무함맏에 의해 친히 시작되었고 그 분의 후대 추종자들에 의해
존속되었다. 본 장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모두 꾸란과 무함맏의 관습에
언급된 건전하고 진실하며 참된 이슬람의 제원칙에 근거한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이것이 무함맏과 그 분의 충실한 추종자들이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고 본을 보였던 이슬람이다.
어느 특정 신학자 혹은 어느 특정 법학자나 지배자의 이슬람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이슬람 본연의 이슬람이라고 필자는 믿는 바이다. 또 하나 명심해 둘 것은
이슬람의 생활 제도는 독특하며 여타의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와 다르다고 하는 점이다. 영적
혹은 도덕적, 지적 혹은 문화적정치적 혹은 경제적 관점에서 모든 기타 다른 관점에서 모든
이슬람의 생활 제도가 독특한 성격을 띤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
1.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의 근원이 다르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게 아니다.
파괴적인 정치가나 복수심에 불타는 경제학자의 저작이 아니요, 실용주의적인 윤리학자나
이기적인 산업주의자의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이며 무한하신 분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성질상 그것은 구속력을 가지며 충실한
모든 사람에 의해 존중된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풀기 어려운 신비나 은밀한 제한이나
특권의 사칭이 없기 때문에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2.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또한 다르다. 이슬람의 이데올로기는 세계 지배나 물리적
팽창을 목적을 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의 뜻에 세계를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법의
한계에 세계를 묶어 두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 주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 창조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