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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儒敎)의 교리(敎理)
Ⅰ 의의(意義)
중화의 주(周)나라 세력이 약해져 분열되고, 패자(覇者)들이 주도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림(儒林)들이 주(周)나라의 기록을 중심으로 상고시대의 학문을 체계화 하고, 이를 교육한 것이 유학(儒學)이다. 즉 공자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춘추전국의 혼란기에 사라져 가던 기존의 서책(書冊)들을 집대성하여 교육한 학문을 일컬어 유학(儒學)이라고 하고, 이들 교육자들을 유학자(儒學者)라고 한다.
유학자들은 동족끼리의 니전투구식 싸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국가의 역사(歷史)와 인간의 심성(心性)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운영과 통합에 있어서도 천도(天道)와 의례(儀禮)를 매우 중요시하였으므로, 유학은 국인의 정체성(正體性)의 학문이자 국가의 평화(平和)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다수의 국가로 분열되어 대립하던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시대에는 단기간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이 필요했던 제후들을 설득하기 어려워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학문적으로 논의되던 유학은 한(漢)나라 시기에 공자를 성인(聖人)으로 모시는 유교로 발전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아시아 전역에 전해져 국가와 국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공자(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이고, 그 경전(經典)은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등 13경(十三經)이다.
유교의 경전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인 유림(儒林)이 기존의 시문, 역사와 철학사상을 집대성하여 교육한 것이다. 유교는 아시아 국가의 정신문화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국민들의 교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유교는 초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시대에는 교화를 중시하는 학파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한(漢)나라에서 유교(儒敎)로 발전하였고, 송(宋)나라의 주희(朱熹)에 이르러서는 우주론과 제사하는 의례가 중시되었다.
유교의 우주관은 천지와 만물이 태극, 양의, 칠성, 오행, 팔괘 등에서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주역, 예기와 대학에 잘 나타나 있는데, 주역은 천지(天地)의 문리(文理)와 세상(世上)의 인사(人事)를 밝히고 있고, 예기는 천지인(天地人)의 변화(變化)에 따른 제례(祭禮)와 예악(禮樂)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유학자(儒學者)들은 하늘의 도(道)를 따라 땅에서 덕(德)을 쌓고 세상에서 예(禮)를 따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것이 대학(大學)의 내용으로, 이러한 이상 사회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향약(鄕約)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교에서는 예악(禮樂)을 중시하는데, 옛날에 음악에 관해 저술한 악기(樂記)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유교의 대표적인 교리(敎理)는 인(仁)과 의(義) 그리고 예(禮)와 지(智)와 신(信)이다. 유학(儒學)에서 천지인(天地人)의 바탕은 삼재(三才)와 육효(六爻)로, 여기에서 천지(天地)의 문리(文理)와 세상의 인사(人事)가 생성하였는데 사람의 인사는 삼진(三眞)의 형성을 말한다. 인은 자기의 근본이고 의는 세상의 모든 일을 화평하고 질서있게 하는 것이다.
즉 유학(儒學)의 지향점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인(仁)과 의(義)는 유학자들이 처음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고기(古記)에 전해져 오던 내용으로 천지속의 사람의 종횡과 표리의 위치를 말한다. 따라서 인(仁)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양의(兩儀)로 혼백이고, 의(義)라는 것 역시도 글자 그대로 이에 따라가는(從) 것이고 의지이다. 그리고 인은 혼이고 의는 백이고, 인은 의이고 의는 지이다. 그리고 인(仁)은 성명정에 해당하고, 의(義)는 감식촉에 해당하고, 예지신(禮智信)은 심기신에 해당한다. 그리고 또 인은 천상(天上)이고 의는 천하(天下)이다.
그리고 인(仁)은 천지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位)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학자들은 천지의 변역의 중심에 있는 인(仁)을 체득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고, 사회와 국가에서 이러한 인을 행하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주역에 의하면 성인과 군자는 역의 순서를 체득하고, 그 상을 살펴서 고하는 사람으로 하늘이 그를 도와 길하고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사람의 인성(人性)에 관해서 유교는 성선설(性善說)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착하게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악에 물들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그 지향점이 된다. 따라서 사람은 성인(聖人), 현인(賢人),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으로 구분된다.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은 군자로 덕, 지식, 능력을 갖추고 가정, 사회와 국가를 위해 힘쓰는 자이다.
그리고 칠정(七情)은 사람의 머리에 있는 감정(感情)의 표현으로 이는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辱)을 말한다. 사람의 감(感)은 천상과 천하에서 모두 표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식(息)에서 규(竅)의 호흡이 생기는데 상하좌우와 내외의 교류로 팔풍(八風) 또는 율려(律呂)가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촉(觸)에서 사람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촉감(觸感)이 생(生)하는데 대개 소리, 색, 냄새, 맛, 느낌 등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사단(四端)이 나오는데 인에서 측은(惻隱)하는 마음(心)이 나오고, 의에서 수오(羞惡)하는 마음(心)이 나오고, 예에서 공경(恭敬)하는 마음(心)과 사양(辭讓)하는 마음(心)이 나오고, 지에서 시비(是非)하는 마음(心)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儒敎)의 내세관(來世觀)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되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혼기(魂氣)는 하늘(天)로 되돌아(歸) 가고 형백(形魄)은 땅(地)으로 되돌아(歸) 간다고 하였다. 사람(人)이 생(生)하면 혼기(氣)가 있고 백(魄)도 있으니, 혼기(氣)라는 것은 신(神)이 성(盛)하는 것이고, 백(魄)이라는 것은 귀신(鬼)이 성(盛)하는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공자께서는 사망(死)하면 반드시 흙(土)으로 돌아가(歸) 가는 것을 귀신(鬼)이라 하고, 천궁(天)으로 되돌아(歸) 가는 혼기(魂氣)를 신(神)이라고 하셨다. 사람(人)이 죽으면(死) 곧 혼(魂)은 승천(升)하고 백(魄)은 하강(降)한다는 기록이 있다. 유행(遊)하는 혼(魂)이 변화(變)가 되는(爲)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기(古記)에서 신(神)은 선(善)한 것으로 도움이 되고, 귀(鬼)는 나쁜(惡) 것으로 피해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신은 천지(天地)의 신명(神明)이고 귀는 귀암(鬼暗)이고, 신은 순수(純)한 것이고 귀는 때(垢)가 낀 것이다. 유교 경전에 화(禍)와 복(福)이 장차(將) 도달(至)하려고 할 때에 선(善)한 것과 선(善)하지 아니(不)한 것을 반드시 먼저(先) 아는(知) 하는 연고로 지성(至誠)은 신(神)과 같은(如)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신은 신장(伸)하고 귀는 되돌아(歸)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제사 대상은 천지신기(天地神祇)와 상하신기(上下神祇) 그리고 상제(上帝)와 역대 왕조의 신령(神靈)이었으나 후대에는 공자와 유학자들도 배향되었다.
유교는 귀신(鬼)을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양의의 음(陰)으로 보는데, 귀신(鬼神)은 천지(天地)를 따르는(從) 것이라고 전하고, 귀신(鬼神)의 정상(情狀)이 천지(天地)와 더불어(與) 서로(相) 유사(似) 한 것이라고 전하고, 귀신(鬼神)에게 물어도(質) 의문(疑)이 없다는 것은 천도(天)를 아는(知) 것이라고 전(云)하고 있다.
유교의 의례는 오례(五禮)로, 오례는 길례(吉禮), 즉 대사(大祀), 중사(中祀) 와 소사(小祀) 등의 제사에 관한 의례, 흉례(凶禮), 즉 본국(本國), 이웃 국가의 국상(國喪), 국장(國葬)에 관한 의례, 군례(軍禮), 즉 출정(出征), 반사(班師)에 관한 의례, 빈례(賓禮), 즉 국빈(國賓)을 맞이하고 보내는 의례, 그리고 가례(嘉禮), 즉 즉위, 책봉, 국혼(國婚), 사연(賜宴), 노부(鹵簿) 등에 관한 의례를 말한다. 상고시대의 제레(祭禮)에 관한 내용은 예기에 기술되어 있다.
Ⅱ 유학(儒學)의 교육(敎育)
동아시아에서 교육(敎育)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중화지역에서 상서학교(庠序學校)의 제도가 성립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즉 학(學)은 중앙의 국학에 해당하고, 교(校)는 지방의 향학에 해당한다. 그리고 퇴직관리가 교육을 담당한 상(庠)이 있었는데 후대의 서원이나 서당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序)는 활쏘기 교육으로 군사를 양성하는 학교에 해당한다.
주(周)나라 말기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등장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이론을 주창하였고, 공자, 맹자 등 유림에 의한 유학교육도 전파되었다. 그 내용은 주역(周易)으로 대표되는 천지인의 생성과 발전, 예기(禮記)로 대표되는 제례와 예악 그리고 논어와 맹자로 대표되는 인륜과 정치철학 등이다. 유림들의 유학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한(漢)나라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아시아 모든 국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의 교육제도는 다음과 같다. 삼국(三國)의 교육제도는 고구려의 대학(大學)과 신라의 국학(國學)이 대표적이다. 고구려(高句麗)는 소수림왕(小獸林王) 372년 6월에 대학(大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로변에 경당을 지어 미혼의 자제들이 경전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전하는데 조의선인은 이들이 봉함을 받은 관직으로 보인다.
백제(百濟)는 국가를 연 이래 문자로 일을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근초고왕 375년 11월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추게 되었다. 일본에 오경박사(五經博士),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노반박사, 와박사(瓦博士) 등 다양한 박사를 자주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신라(新羅)에서 교육과 의례의 업무를 담당한 부서는 예부로 그 장관은 영(令)이고, 경(卿), 대사(大舍), 사지(舍知), 사(史)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신문왕(神文王) 2년(682년) 6월에 국학(國學)을 세웠고, 경덕왕(景德王)때에 태학감(大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때에 본래대로 되돌렸고, 경덕왕(景德王) 747년 1월에 국학에 박사와 조교를 두었다고 전한다.
국학의 교수법은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 등으로 구분하여 학업으로 삼았고, 학생은 대사(大舍) 이하로 부터 관등(位)이 없는(無位) 자로 15세에서 30세까지인 사람들로 하였고, 재학 연한은 9년이었다. 관등이 대나마(大奈麻)와 나마(奈麻)에 이른 이후에는 국학(國學)을 마쳤으며, 관리 선발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고 전한다.
진흥왕(眞興王)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봉(奉)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취하여 꾸며서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들을 봉하였는데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歌)와 음악(樂)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유람하여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게 되어 훌륭한 자를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 라고 전한다.
따라서 신라 역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화와 화랑을 국선의 관직에 봉하였고, 이들 중에 조정에서 현자나 충신이나 장군이나 병사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의 화랑은 국선(國仙)으로 수백의 낭도를 거느렸으며, 전쟁시에는 출전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백제에도 상방(尙方)의 글에서 선인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고, 가야에도 초선대(招仙臺)의 기록을 통해 선인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는 전쟁이 많은 시기였으므로 군사를 교육하고, 국가의 방어를 담당한 군정(軍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정치교육과는 달리 기술교육은 잡학을 통해 전승되었는데 신라의 잡학, 백제의 박사제도가 대표적이다. 교육기관에서 담당하던 기술직 이외에는 각 해당 관청에서 관련된 기술을 교육하였고, 성 밖에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장인(匠人)의 도제(徒弟)가 되어 함께 일하면서 기술을 배워서 장인이 되었다.
고려(高麗)의 교육기관은 수도에 관학인 국자감(國子監), 동서학당(東西學堂)과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가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鄕校)와 서당(書堂)이 있었다. 성종 11년(992)에 왕이 학교를 세우라는 교서를 내리고, 유사(有司)에게 승지(勝地)를 얻게 하여 학사(學舍)와 서재(書齋)를 넓게 만들고, 전장(田庄)을 급여하여 학자(學資)를 충당케 함으로써 국자감이 창립되었다고 전한다.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고, 문무관의 자제들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에 제한이 있었다. 교과의 운영은 박사와 조교가 각기 경서를 분담하여 교수하고, 입학정원은 300명이었으나 후기로 오면서 그 수가 줄었다. 수업 연한은 유교 경전을 가르쳤던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9년, 기술교육을 담당했던 율학, 서학, 산학은 6년이었다.
예종 4년(1109)에는 국학에 7재(七齋)를 두고 유생들을 교육하였는데 칠재는 국자감의 교과목을 7개의 재(齋)로 나누어서 교수하는 것이었다. 7재는 여택재(麗澤齋, 주역(周易)), 대빙재(待聘齋, 상서(尙書)), 경덕재(經德齋, 모시(毛詩), 구인재(求仁齋, 주례(周禮)), 복응재(服膺齋, 재례(載禮)), 양정재(養正齋, 춘추(春秋)), 강예재(講藝齋, 무학(武學))이었다.
동서학당(東西學堂)은 왕경인을 위해 설치된 교육기관이고, 향교(鄕校)는 지방인들의 교육을 위하여 설치된 교육기관이다. 원종 2년(1261)에 동서학당을 두고 별감(別監)을 보내서 교학(敎學), 교도(敎道) 하였다고 전한다. 동서학당은 고려 말기에 오부학당으로 확충되었다.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는 고려시대의 사학 교육기관 12개교를 총칭하는 것으로 비록 사학이었지만 국가의 감독을 받았다. 사학십이도의 설립은 최충(崔沖)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교육의 목적은 인격 완성과 과거 준비에 있었다. 서당(書堂)은 향촌의 부락에 설치된 민간의 사설 교육기관이다. 마을 거리에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민간의 미혼자제들이 무리를 이루어 선생(先生)에게 경서를 배웠다고 전한다.
고려의 교육제도 역시도 과거제도와 연계되었는데 과거는 광종 9년(958) 5월에 최초로 실시되었고, 제술과(製述科)와 명경과(明經科)의 양대업(兩大業)과 잡과(雜科) 시험이었다. 과거시험의 응시자격은 제한된 일부 계층 외에는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고려 말에는 원(元)나라에서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되면서 국자감이 진흥되었고, 기술계 3학은 국자감에서 분리해서 기타 잡과와 같이 해당 관청에서 교육하게 되었다.
조선(朝鮮)은 유학을 국가의 정치철학으로 선택한 국가로, 유교주의(儒敎主義)에 따라 교육기관을 증설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초등 교육기관인 서당(書堂)이 있었고, 중등 교육기관인 4부학당(四部學堂)과 향교(鄕校) 그리고 고등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이 있었는데 주로 한자와 유학과 인륜을 교육하였다. 어릴 때에는 서당에서 한자와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청소년기에는 서울은 4부학당(四部學堂), 지방은 향교(鄕校)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초등 교육기관인 서당(書堂)은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각 지역의 이름있는 선비들이 해당 지역의 어린이들을 교육하던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중등 교육기관인 4부학당(四部學堂)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군과 현의 인구에 비례하여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중등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향교의 학생들은 과거를 통해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서원은 이름있는 유학자인 선현(先賢)을 모시는 사당으로 선현을 제사하고, 지방의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당시 한양, 즉 오늘날의 서울에 있던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입학하게 하였는데 성균관의 유생에게는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과 4부학당은 중앙 정부에서 관할하였고, 향교는 각 주현(州縣)에서 관할하였던 대표적인 관학(官學)이었다.
기술교육인 잡학(雜學)은 태종 때에 이학(吏學), 역학(譯學), 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 의학(醫學), 자학(字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악학(樂學) 등의 교육시설을 두고, 해당관청에서 교육하였는데 주로 양반의 서자(庶子)와 중인(中人) 계층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한학(漢學), 몽학(蒙學), 여진학(女眞學), 왜학(倭學)은 사역원(司譯院)에서 교육하고, 의학(醫學)은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등에서, 천문학(天文學), 지리학(地理學), 명과학(命課學)은 관상감(觀象監) 에서, 주학(籌學)은 호조(戶曹)에서, 율학(律學)은 형조(刑曹) 등에서, 회화학(畵學)은 도화서(圖畵署)에서, 도학(道學)은 소격서(昭格署)에서 교육하였다.
조선시대 역시도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연계되었는데 과거에는 문과(文科)시험과 무과(武科)시험이 있었다. 문과시험은 다시 4서5경(四書五經)으로 시험을 보는 생원과(生員科)와 시(詩), 부(賦), 표(表), 책(策) 등 문장으로 시험을 보는 진사과(進士科)의 소과(小科)가 있었고, 소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시험을 보는 전시과인 대과(大科)가 있었다.
양반의 자체들은 초시와 복시에 모두 합격하면 생원이나 진사가 되었고, 소과는 200명, 대과는 33명이 선발되었다. 무관시험도 초시, 복시, 전시를 거치는데, 초시에서는 서울과 각 도의 병영에서 200명을, 서울의 병조에서 행하는 복시는 28명을 선발하여 선달(先達)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유교는 교육과 제례와 예악을 특히 중시하였다. 특히 교외의 단(壇)에서 행하는 상제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고, 종묘(宗廟)와 가묘(家廟)에서 행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다. 유림들은 유향소(留鄕所)에서 향약(鄕約)으로 향촌의 자치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Ⅲ 공자(孔子)
공자(孔子)는 춘추(春秋)시대의 말기인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에서 아버지 공흘(孔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는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으나 주(周)나라의 예악(禮樂)을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성인이 되면서 계손씨(季孫氏)의 위리(委吏), 승전리(乘田吏)로 낮은 대우를 받았으나 직무에 성실하였다.
당시 대부(大夫) 맹희자(孟僖子)가 그의 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공자에게 예(禮)를 배우도록 하였고, 공자가 주나라 여행으로 견문을 넓히자 제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35살에 제(齊)나라로 가서 교육하다가 노나라로 되돌아 왔다. 그의 나이 50살에 정공(定公)이 그를 중도재(中都宰)로 삼자 사방의 제후들이 그의 제도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공(司空)이 되었고, 다시 사구(司寇)가 되었다. 정공 14년, 그의 나이 56살에 재상(宰相)의 상사(相事)업무를 섭정하게 되었다.
이후에 그는 위(衛)나라로 갔고, 다시 조(曹)나라로 갔고, 다시 정(鄭)나라로 갔다가 진(陳)나라에서 머물렀고, 다시 채(蔡)나라로 갔다. 당시 공자(孔子)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맞이하려는 국가들의 대립으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다. 초(楚)나라의 왕(王)이 군대를 일으켜 그를 맞아들였으나 63살에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여러 국가를 주유한지 14년만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예악을 정비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애공(哀公) 16년 4월 기축일, 그의 나이 73살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관직에 종사하였지만 자주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정비하며 제자들을 교육하였다. 공자 당시에 그와 제자들은 주대(周代)의 기록을 바탕으로 기존의 시(詩)들을 편찬한 시경(詩經)과 역사서인 서경(書經)을 편찬하였고, 천지인의 역도(易道)에 관한 책인 주역(周易) 또는 역경(易經)에 십익(十翼)을 추가하여 편찬하였다. 그리고 제례서인 예기(禮記)를 편찬하였으며, 노나라 사관(史官)들이 편찬한 춘추(春秋)를 재편찬하기도 하였다. 음악에 관한 서적인 악경(樂經)도 편찬되었으나 이후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공자의 유학(儒學)은 증자(曾子), 자사(子事), 맹자(孟子)로 이어졌는데 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논어(論語)가 편찬되었다. 그의 손자인 자사가 중용(中庸)을 편찬하였고, 자사의 문하였던 맹자와 그의 제자들이 맹자(孟子)를 편찬하였다. 공자의 일대기는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자를 가히 성인(聖)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배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사람은 우선 배워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자(子)께서는 괴력(怪力)과 난신(亂神)에 관해서는 말씀(語)하지 않으시고, 사람(人)을 섬기(事)는 일을 귀신(鬼)을 섬기(事)는 일보다 중시하셨고, 생(生)하는 것을 아는(知) 것을 죽는(死) 것을 아는 것보다 중시하셨다.
그리고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사람(人)이 생(生)하면 혼기(氣)가 있고 백(魄)도 있으니 혼기(氣)라는 것은 신(神)이 성(盛)하는 것이다. 중생(衆生)은 반드시 사멸(死)하니 사멸(死)하면 반드시 흙(土)으로 돌아가(歸) 가는데, 이것이 귀신(鬼)이라고 이르는 것이고, 혼기(魂氣)는 하늘(天)로 되돌아(歸) 가는데 이것이 신(神)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아는 것(知)은 귀신(鬼神)을 공경(敬)하지만 멀리(遠)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공자(子)께서는 내(丘)가 상하신기(上下神祗)에 기도(禱)한 것은 오래(久) 되었다고 하셨고, 신(神)께 제사(祭) 하실 때에는 신(神)이 존재(在)하는 것 같이(如) 하셨다. 그리고 귀신(鬼神)이 덕(德)이 되게(爲) 하는 것이 성대(盛)한데 그것이 위(上)와 좌우(左右)에 존재(在)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망(死)하면 반드시 흙(土)으로 돌아가(歸) 가는 것을 귀신(鬼)이라 하고, 천궁(天)으로 되돌아(歸) 가는 혼기(魂氣)를 신(神)이라고 하셨다고 전한다.
공자는 학문을 하는 목적이 알아서 미혹(惑)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엮어서 예(禮)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비록 지식이 있더라도 학문(學)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으므로 관직(仕)에 나아가 실무를 익혀야 하고, 실무를 행하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학문을 하여 이론과 실무를 완비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論語)는 공자가 돌아가신 춘추(春秋)시대 말기에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책이다. 당시는 주(周)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제후들이 다스리던 지방국(邦)의 세력들이 새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공자는 옛날의 모범적인 대국(大國)과 모범적인 천자(天子)에 대해 설명하고, 지방국(邦)에 필요한 정치의 바람직한 지도자(指導者)의 상(像)을 묘사하고 있는데 군자(君子)와 선비(士)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군자(君子)는 이러한 지방국(邦)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군주(君主)뿐만 아니라 대부(大夫)와 제후(諸侯)를 포함한다. 비록 이러한 자격과 능력을 가졌더라도 도(道)가 있으면 관직에 나아가고, 도(道)가 없으면 자신의 능력을 감추는 것을 현명한 사람으로 보았다. 공자(孔子)는 임금(君)이 임금(君)답고, 신하(臣)가 신하(臣)답고, 아버지(父)가 아버지(父)답고, 자식(子)이 자식(子)답다면 정치(政)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정치철학(政治哲學)은 대국(大國)과 소국(小國)들이 하늘의 도(道)와 군주의 덕(德)과 국가의 예(禮)에 따라 평화롭게 운영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子)는 정치(政)를 덕(德)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北辰)이 그 자리(所)에 있고, 무리별들(衆星)이 그것을 공동(共)으로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자(子)는 도리(道)가 정치(政)로써 되고, 다스림(齊)이 형벌(刑)로써 되면 백성들(民)은 면(免)하면 수치심(恥)이 없게 되지만 도리(道)가 덕(德)으로써 되고, 다스림(齊)이 예(禮)로써 되면 수치심(恥)도 있고, 또 인격(格)도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君主)의 덕(德)과 국가(國)와 백성(民)들의 예(禮)를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공(子貢)이 정치(政)에 대해 묻자, 식량(食)을 풍족(足)하게 하고, 병사(兵)를 풍족(足)하게 하고, 백성(民)들이 신뢰(信)하도록 하는 것이다고 말한 것에서 부국강병과 화합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맹자(孟子)
맹자는 공자의 제자인 맹가(孟軻)의 존칭이기도 하고, 그가 저술한 서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맹자는 전국(戰國)시대의 말기인 기원전 372년, 추((騶))나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그의 아버지는 격(激)이고, 어머니는 현모 장(仉)씨로, 맹자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하였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주(周)나라 왕실이 그 권위를 상실하고 패자(覇者)들이 등장하여 패권을 다투던 시기였다. 맹자는 어릴 때부터 공자(孔子)를 숭상하여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는데, 이후에 공자의 고향인 노(盧)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門下)에서 육경(六經)을 배웠다고 한다. 맹자는 40여세 전후에 학문을 이루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제후들을 방문하여 유가의 이념을 전하였다. 처음에 추나라 목공(穆公)을 알현하였고, 이후에 제(齊)나라, 송(宋)나라, 등(滕)나라, 노(魯)나라, 위(魏)나라 등을 주유하면서 유가의 이념을 설파하였다. 제(齊)나라에서 경(卿)의 지위에 올랐고, 등(滕)나라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였던 당시에 맹자는 성선설(性善說)과 천명론(天命論)을 바탕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주창하였으나 당시 전쟁 상황에 필요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절실했던 국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러(退)나서 제자 만장(萬章)의 무리(徒)들과 함께 시경(詩)과 서경(書)을 순서(序)대로 편찬하고, 공자(仲尼)의 뜻(意)을 서술(述)하여 맹자(孟子) 일곱 편(七篇)을 지었고, 기원전 289년에 사망하였다.
사람의 본성(本性)인 인성(人性) 또는 심성(心性)이 선(善)하가? 아니면 선(善)하지 아니(不)한가? 하는 것에 대한 논의인 인성론(人性論) 또는 심성론(心性論)은 예로부터 수양(修養)과 교화(敎化)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基準)이 되었으므로 많은 철학자와 종교인과 정치인들이 이를 논해왔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도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선하지 아니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論議)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고자(告者)와의 대화에 잘 나타나 있는데 고자가 성(性)을 터놓은 방향으로 흐르는 물(水)처럼 선(善)하거나 선(善)하지 않음(不)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맹자는 물(水)이 위(上)에서 흘러 아래(下)에서 고일 때 위의 물이 맑은 것처럼 사람의 성(性)도 선(善)하게 되지 않도록 하여 그런 것이지 원래의 바탕(本質)은 선하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많지 않으므로 먹고 살면서 교육(敎育)을 받지 못하면 짐승(獸)에 가깝게 된다. 따라서 먼저 중용하고, 먼저 현명하고, 먼저 재주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교육해야 하는데 교육의 근본은 바로 인륜(人倫)을 밝히(明)는 것이었다. 순(舜)임금께서는 여러가지(庶) 사물(物)에서 밝히시고, 인륜(人倫)에서 살피셨다고 전한다. 그로 하여금(使) 제사(祭)를 주관(主)하게 하시자 백신(百神)이 흠향(享)하였으니, 이것은 하늘(天)이 받아(受)들인 것이고, 그로 하여금(使) 사업(事)을 주관(主)하게 하시자 사업(事)이 다스려져(治) 백성(百姓)들이 편안(安)하니, 이것은 백성(民)들이 받아(受)들인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성인(聖人) 사람이 지켜야 할 인륜(人倫)으로 교육한 것이 오륜(五倫)이다. 오륜은 곧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즉 부자(父子)에게는 친(親)함이 있어야 하고, 군신(君臣)에게는 의로움(義)이 있어야 하고, 부부(夫婦)에게는 분별(別)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長幼)에게는 순서(序)가 있어야 하고, 붕우(朋友)에게는 믿음(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먼 상고시대에도 정치(政治)는 그 철학(哲學)과 내용(內容)이 명확하였는데, 하늘(天)이 국가(國家)의 천자(天子), 대왕(大王) 또는 군주(君主)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택(選擇)하게 된다는 주장이 천명론(天命論)이다. 즉 천명정치는 전임 천자나 대왕 또는 군주가 후계자를 하늘(天)에 추천(薦)하여 허락을 받고, 하늘(天)과 백성(民)의 뜻에 따라 그 후계자를 선택하는 성인(聖人政治)를 말한다. 맹자께서는 군자(君子)에게 지나(過) 가는 바(所)는 교화(化) 하는 것이고, 존재(存)하는 바(所)은 신(神)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왕(王)과 군주(君主)의 권위(權威)의 정당성(正當性)이 하늘(天)의 뜻과 백성(民)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본 이유는 국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이유(理由)가 선(善)한 정치(政治)로 백성들을 잘 살게 하고, 또 그들이 인륜(人倫)의 길로 나아가도록 교화(敎化)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天)의 선택(選擇)을 받은 사람이 행(行)하는 천명정치(天命政治)는 백성(民)을 위한 위민정치(爲民政治)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의 바탕은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 이는 타인의 어려운 일을 보고 참고만 있지 아니하고 가서 돕게 되는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의 본성인 불인지심은 사람을 다스리는 국가에서 불인정치(不忍政治)로 나타나는데, 이는 군주(君主)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 참고만 있지 아니하고 직접 나서서 돕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불인정치(不忍政治)를 행하면 천하(天下)가 쉽게 다스려질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왕도정치는 인(仁)과 의로움(義)에 바탕을 두는 선(善)한 정치, 왕다운(王者) 정치로 지칭되고 있다. 이러한 왕도정치에는 세부사항들이 있는데 선한 현자를 등용하고, 백성들에게 산업을 제공하여 이들이 떠나거나 가족들과 이별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인륜을 교육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시작은 살아 있는 사람을 봉양(養)하고 죽은 사람을 상(喪)을 치루는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고, 상서(庠序)의 교육(敎)이 신중하게 됨으로써 효제(孝悌)의 의로움(義)이 반포(頒)되어 나이든 어른들이 고생하지 않는 것이다.
군주가 천하(天下)에 대적할 자가 없는 왕다운 왕(王者)이 되려면 우선 백성들에게 신뢰(信)를 주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현명하고 능한 자를 등용하는 것, 시장을 독점하지 않는 것, 관문을 기찰하지만 강제하지 않는 것, 경작자를 보조하고 조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 상점에 조세를 무겁게 부과하지 않는 것이 포함된다. 단지 선(善)만으로 정치(政)를 하게 되기가 부족하고, 단지 법(法)만으로 스스로 행동(行)하게 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왕(先王)의 법(法)을 존중(遵)하고도 잘못하는 사람(過者)은 아직까지 있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왕도정치와 다른 것으로 패자정치와 패도정치가 있다.
정치(政)를 하면 선왕(先王)의 도(道)에서 원인(因)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인한 자(仁者)만이 마땅히(宜) 높은 지위(位)에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인하지 아니한 자가 높은 지위(位)에 있으면 무리(衆)들에게 그 악(惡)함을 전파(播)하기 때문이다. 왕(王)이 선한 정치(善政)를 펴고 인의(仁義)를 베풀어 천하(天下)에 관직에 부임한 자(仕者)들이 모두 왕의 조정(朝)에 서고 싶게 하고, 경작하는 자(耕者)들이 모두 왕의 들판(野)에서 경작(耕)하고 싶게 하고, 장사꾼(商賈)들이 모두 왕의 시장(市)에서 물건을 보관(藏)하고 싶게 하고, 여행(行旅)하는 자들이 모두 왕의 길(途)에 나가고 싶게 한다면 천하(天下)의 그 임금(君)을 싫어하는 자들이 모두 왕에게 나아가(赴) 하소연(愬)하려고 할 것이니, 그것이 이와 같다면 능히 막을 수 없다.
왕(王)이 정치를 행하고자 하다면 그 근본(本)을 헤아려야 한다. 5묘(五畝)의 주택(宅)에 나무(樹)를 심는 것이 뽕나무(桑)가 되면 50세(五十)의 사람들이 가히 이로써 비단(帛)으로 옷(衣)을 만들어 입을 수 있다. 닭(鷄)과 돼지(豚), 개(狗)와 돼지(彘)를 기르는데 그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70세(七十)의 사람들이 가히 이로써 고기(肉)를 먹을 수 있다. 100묘(百畝)의 땅(田)을 경작하는데 그 시기를 빼앗기지 않는다면 여러 식구(數口)인 가정(家)이 가히 이로써 굶주림(飢)이 없을 것이다. 삼가 상서(庠序)의 교육(敎)이 신중하게 됨으로써 효제(孝悌)의 의로움(義)이 반포된다면 머리가 흰 사람(白者)들이 도로(道路)에서 짐을 등에 지(負)거나 머리에 이(戴)지 않을 것이다. 늙은 사람(老者)들이 비단(帛)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고기(肉)를 먹으며, 여민(黎民)들이 굶주리(飢)지 아니하고, 추위(寒)에 떨지 아니하면 왕(王) 다운 왕이 되는 것이다.
항상 있는 산업(恒産)이 없으면서 항상 하는 마음(恒心)이 있는 사람은 선비(士)뿐이다. 만약에 백성(民)들이 항상 있는 산업(恒産)이 없으면 항상 하는 마음(恒心)이 없어져 방탕(放)하고, 편벽(辟)하고, 사악(邪)하고, 사치(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죄(罪)에 빠지(陷)게 되는데 이후에 쫓아가서 그들에게 형벌(刑)을 가한다면 이는 백성을 그물(罔)로 잡는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明君)는 백성들의 산업을 제정(制)하여 반드시 우러러(仰) 보는 것을 풍족(足)하게 하여 부모(父母)를 모시(事)고, 굽어(俯)보는 것을 풍족(足)하게 하여 처자식(妻子)을 양육(畜)하고, 즐거운 세월(樂歲)에는 종신(終身)토록 배부르(飽)고, 흉년(凶年)에는 사망(死亡)하는데서 면(免)할 수 있게 하고, 그런 연후에 몰아서 선(善)으로 나아가게 하는 연고로 백성(民)들이 따르는 것이다.
Ⅴ 유교(儒敎)의 경전(經典)
1. 기자(箕子)의 홍범(洪範)
서(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주(周)나라 무왕) 13년(祀)에 무왕(王)께서 기자(箕子)를 방문(訪)하셨다. 왕(王)이 이에(乃) 말씀(言)하여 이르(曰)기를, “오호(嗚呼)라, 기자(箕子)여! 오직(惟) 하늘(天)과 음(陰)이 백성(下民)들을 안정(騭)시키고, 서로(相) 협조(協)하여서 그기(厥)에 살게(居) 하시니, 나(我)는 그 도리(彛)와 인륜(倫)이 펼치지(敘)는 바(攸)를 알지(知) 못(不)합니다.” 하였다.
기자(箕子)가 이에(乃) 말하여 이르기를, “내(我)가 들으(聞)니 옛날(昔)에 곤(鯀)이 있었(在)는데 홍수(洪水)를 막(陻)는데 어지(汩)럽게 그(其) 오행(五行)을 진열(陳)하니, 제왕(帝)께서 이에(乃) 진노(震怒)하시어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수여(畀)하지 않으시니 도리(彜)와 인륜(倫)이 무너지(斁)게 된 바입니다. 곤(鯀)이 곧(則) 사형(殛)을 받아서 죽(死)고, 우(禹)가 이에(乃) 계승(嗣)하여 흥기(興)하게 되니, 하늘(天)이 이에(乃) 우(禹)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하사(錫)하시니 도리(彜)와 인륜(倫)이 펼쳐지(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처음(初) 첫 번째(一)는 오행(五行)이라 이르고, 다음(次) 두 번째(二)는 존경(敬)으로 오사(五事)를 사용(用)함이라 이르고, 다음(次) 세 번째(三)는 농사(農)로 팔정(八政)을 사용(用)함이라 이르고, 다음(次) 네 번째(四)는 협조(協)로 오기(五紀)를 사용(用)함이라 이르고, 다음(次) 다섯 번째(五)는 세움(建)으로 황극(皇極)을 사용(用)함이라 이르고, 다음(次) 여섯 번째(六)는 재예(乂)로 삼덕(三德)을 사용(用)함이라 이르고, 다음(次) 일곱 번째(七)는 밝음(明)으로 계의(稽疑)를 사용(用)함을 이르고, 다음(次) 여덟 번째(八)는 염두(念)로 서징(庶徵)을 사용(用)함이라 이르고, 다음(次) 아홉 번째(九)는 향(嚮)함으로 오복(五福)을 사용(用)함이고, 위엄(威)으로 육극(六極)을 사용(用)함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첫 번째(一)는 오행(五行)입니다. 첫째(一)는 물(水)이라 이르고, 둘째(二)는 불(火)이라 이르고, 셋째(三)는 나무(木)라 이르고, 넷째(四)는 쇠(金)라 이르고, 다섯째(五)는 흙(土)이라 이릅니다. 물(水)은 적시(潤)고 내려(下)가는 것이라 이르고, 불(火)은 태우(炎)고 올라(上)가는 것이라 이르고, 나무(木)는 굽고(曲) 곧은(直) 것이라 이르고, 쇠(金)는 따르(從)고 고치(革)는 것이라 이르고, 흙(土)은 여기(爰)에서 심(稼)고 거두(穡)는 것입니다. 적시(潤)고 내려(下)가면 짠(鹹) 것이 만들어(作)지고, 태우(炎)고 올라(上)가면 쓴 것이 만들어(作)지고, 굽고(曲) 곧으(直)면 신(酸) 것이 만들어(作)지고, 따르(從)거나 고치(革)면 매운(辛) 것이 만들어(作)지고, 심고(稼) 거두(穡)면 단(甘) 것이 만들어(作)집니다.
두 번째(二)는 오사(五事)이니, 첫째(一)는 외모(貌)라 이르고, 둘째(二)는 말(言)이라 이르고, 셋째(三)는 시각(視)이라 이르고, 넷째(四)는 청각(聽)이라 이르고, 다섯째(五)는 사고(思)라 이릅니다. 외모(貌)는 공경(恭)이라 이르고, 말(言)은 따름(從)이라 이르고, 시각(視)은 밝음(明)이라 이르고, 청각(聽)은 총명(聰)이라 이르고, 사고(思)는 슬기(睿)라 이르고, 공경(恭)은 엄숙(肅)함을 만들(作)고, 따름(從)은 재예(乂)를 만들(作)고, 밝음(明)은 지혜(晢)를 만들(作)고, 총명(聰)은 지략(謀)을 만들(作)고, 슬기(睿)는 성인(聖)을 만듭(作)니다.
셋째(三)는 팔정(八政)으로, 첫째(一)는 음식(食)이라 이르고, 둘째(二)는 재화(貨)라 이르고, 셋째(三)는 제사(祀)라 이르고, 넷째(四)는 사공(司空)이라 이르고, 다섯째(五)는 사도(司徒)라 이르고, 여섯째(六)는 사구(司寇)라 이르고, 일곱째(七)는 빈객(賓)이라 이르고, 여덟째(八)는 군사(師)라 이릅니다.
네 번째(四)는 오기(五紀)이니, 첫째(一)는 해(歲)라 이르고, 둘째(二)는 달(月)이라 이르고, 셋째(三)는 날(日)이라 이르고, 넷째(四)는 성진(星辰)이라 이르고, 다섯째(五)는 역수(歷數)라 이릅니다.
다섯 번째(五)는 황극(皇極)이니, 황제(皇)가 (국가를) 세우(建)면 그기(其)에 제위(極)가 있(有)고, 때(時)에 오복(五福)을 거두(斂)어서 베푸(敷)는데 사용(用)하여 그(厥) 서민(庶民)들에게 하사(錫)하면, 오직(惟) 그때(時)에 그(厥) 서민(庶民)들이 그대(汝)의 제위(極)를 그대(汝)에게 수여(錫)하여 제위(極)를 보전(保)할 것입니다. 무릇(凡) 그기(厥)의 서민(庶民)들은 음란(淫)한 벗(朋)이 있지(有) 아니(無)하고, (관직에 있는) 사람(人)들은 공덕(德)을 비교(比)함이 있지 아니하므로, 오직(惟) 황제(皇)만이 제위(極)를 짓는(作)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릇(凡) 그기(厥)의 서민(庶民)들이 계책(猷)이 있(有)고, 위(為)함이 있(有)고, 수호(守)함이 있(有)으면 그대(汝)는 곧(則) 그들(之)을 염두(念)에 두어야 합니다. 제위(極)에 협조(協)하지 않(不)더라도 허물(咎)에 걸리(罹)지 않(不)으면 황제(皇)께서는 곧(則) 그들(之)을 수용(受)하시고, 편안(康)히 하시고, 생기(色)있게 하시고, “내(予)가 덕(德)을 좋아(好)하는 바이다.” 라고 말하(曰)시고, 그대(汝)는 곧(則) 그들(之)에게 복(福)을 하사(錫)하여 주십시오. 때(時)에 사람(人)들은 이것(斯)으로 그것(其)이 오로지(惟) 황제(皇)의 제위(極)임을 생각할 뿐입니다. 외롭(煢)고 혼자(獨)인 사람을 학대(虐)하거나 높고(高) 밝은(明) 사람을 두려워(畏)함이 없(無)어야 합니다. 사람(人)에게는 능(能)함이 있고 위(為)함이 있어 천거(羞)하여 그들(其)이 행(行)하도록 한다(使)면 연방(邦)국이 그것(其)으로 번창(昌)할 것이고, 무릇(凡) 그기(厥)에 바른 사람(正人)은 이미(既) 부유(富)하여 사방(方)에서 곡식(穀)을 거두니, 그대(汝)가 가문(家)에도 좋음(好)이 있(有)도록 하는(使)데 능(能)하지 않으(弗)면 그 때(時)에 사람(人)들은 이에(斯) 그것(其)으로 저버리(辜)게 됩니다. 그기(其)에 덕(德)을 좋아함(好)이 없으(無)면 그대(汝)가 비록(雖) 그들(之)에게 복(福)을 하사(錫)하더라도 그것(其)은 그대(汝)의 사용(用)을 허물(咎)로 만들(作) 뿐입니다. 편중(偏)됨이 없(無)이, 기울어짐(陂)이 없(無)이 왕(王)의 의로움(義)을 존중(遵)하십시오. 좋아함(好)을 지음(作)이 있지(有) 않(無)도록 왕(王)의 도(道)를 존중(遵)하십시오. 악함(惡)을 지음(作)이 있지(有) 않(無)도록 왕(王)의 길(路)을 존중(遵)하십시오. 편중(偏)됨이 없고(無) 당파(黨)가 없(無)으면 왕의 도(王道)가 탕탕(蕩蕩)하고, 당파(黨)가 없고(無), 편중(偏)됨이 없(無)으면 왕의 도(王道)가 평평(平平)할 것입니다. 돌이킴(反)이 없고(無), 치우침(側)이 없(無)으면 왕의 도(王道)가 바르(正)고 곧(直)을 것이며, 그것(其)이 제왕(極) 있음(有)에 모이(會)고, 그것(其)이 제왕 있음(有)에 되돌아(歸) 갑니다. 이르(曰)기를, ‘황극(皇極)의 부언(敷言)은, 이것(是)은 도리(彜)이고, 이것(是)은 교훈(訓)이다.’ 라고 하였으니, 제왕(帝)에게 그것(其)은 교훈(訓)입니다. 무릇(凡) 그기(厥)의 서민(庶民)들이 황극(極)의 부언(敷言)으로, 이것(是)을 교훈(訓)으로 삼고, 이것(是)을 행(行)한다면 이로써(以) 천자(天子)의 빛(光)에 접근(近)하게 될 것입니다. 이르(曰)기를, “천자(天子)가 백성(民)을 지어(作)서 (백성의) 부모(父母)로 천하(天下)의 왕(王)으로 삼게(為)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六)는 삼덕(三德)이니, 첫째(一)는 정직(正直)이라 이르고, 둘째(二)는 굳셈(剛)으로 극복(克)함이라 이르고, 셋째(三)는 부드러움(柔)으로 극복(克)함을 이르고, 고루(平) 편안(康)하면 정직(正直)해야 하고, 억세(彊)어 벗(友)하지 않(弗)으면 굳셈(剛)으로 극복(克)하고, 조화(燮)되어 벗(友)이 되면 유연(柔)함으로 극복(克)하고, 잠기(沈)어 가라(潛)앉으면 굳셈(剛)으로 극복(克)하고, 높고(高) 밝으(明)면 유연(柔)함으로 극복(克)합니다. 오직(惟) 임금(辟)만이 복(福)을 짓(作)고, 오직(惟) 임금(辟)만이 위엄(威)을 짓(作)고, 오직(惟) 임금(辟)만이 음식(食)을 진귀(玉)하게 합니다. 신하(臣)는 복(福)을 지음(作)과 위엄(威)을 지음(作)과 음식(食)을 진귀(玉)하게 함이 있어(有)서는 아니(無) 되는데, 신하(臣)가 복(福) 지음(作)과 위엄(威) 지음(作)과 음식(食)을 진귀(玉)하게 함이 있(有)으면 그것(其)이 가문(家)에도 해롭(害)게 되고, 나라(國)에도 흉(兇)하게 됩니다. 사람(人)들의 등용(用)은 측근(側)으로 치우치(頗)고, 편파적(僻)이고, 백성(民)들의 사용(用)은 참람(僣)하고 어긋(忒)나게 됩니다.
일곱 번째(七)는 계의(稽疑)이니, 복서인(卜筮人)을 택(擇)해서 건립(建立)하는 것입니다. 이에(乃) 복서(卜筮)를 명(命)하여 비가 내림(雨)을 이르고, 비가 개임(霽)을 이르고, 흐림(蒙)을 이르고, 부절(驛)함을 이르고, 극복(克)함을 이르고, 정(貞)이라 이르고, 회(悔)라고 이릅니다. 무릇(凡) 이 일곱 가지(七)는 복점(卜) 다섯(五) 가지에 시초점(占) 두(二) 가지를 사용(用)하여 추연(衍)하고 어긋난 것(忒)으로 여깁니다. 때(時)에 사람(人)을 세워(立)서 복서(卜筮)를 지을(作) 때에 세 사람(三人)이 시초점(占)을 친다면 곧(則) 두 사람(二人)의 말(言)을 따라(從)야 합니다. 그대(汝)가 곧(則) 큰(大) 의심(疑)이 있(有)으면, 계책(謀)이 마음(心)에 닿게(及) 하고(乃), 계책(謀)이 경(卿)과 사(士)에 닿게(及) 하고, 계책(謀)이 서인(庶人)에 닿게(及) 하고, 계책(謀)이 복서(卜筮)에 닿게(及) 해야 합니다. 그대(汝)가 곧(則) 따르(從)고, 거북점(龜)이 곧 따르(從)고, 시초점(筮)이 곧 따르(從)고, 경(卿)과 사(士)가 곧 따르(從)고, 서민(庶民)들도 곧 따르(從)면 이것(是)이 대동(大同)이라고 이르(謂)는 것입니다. 자신(身)이 그기(其)에서 편안(康)하고 강(強)해지고, 자손(子孫)이 그기(其)에서 길(吉)함을 만나(逢)게 될 것입니다. 그대(汝)가 곧 따르(從)고, 거북점(龜)이 곧 따르(從)고, 시초점(筮)이 곧 따르(從)면 경(卿)과 사(士)가 거스(逆)르고, 서민(庶民)들이 거스(逆)른다고 하여도 길(吉)할 것입니다. 경(卿)과 사(士)가 따르(從)고, 거북점(龜)이 따르(從)고, 시초점(筮)이 따르(從)고, 그대(汝)가 곧 거스(逆)르고, 서민(庶民)들이 거스(逆)르면 길(吉)할 것입니다. 서민(庶民)들이 따르(從)고, 거북점(龜)이 따르(從)고, 시초점(筮)이 따르(從)고, 그대(汝)가 곧 거스(逆)르고, 경(卿)과 사(士)가 거슬(逆)러도 길(吉)할 것입니다. 그대(汝)가 곧 따르(從)고, 거북점(龜)이 따르(從)고, 시초점(筮)이 거스(逆)르고, 경(卿)과 사(士)가 거스(逆)르고, 서민(庶民)들이 거스(逆)르면 안(內)에서 짓는(作) 일은 길(吉)할 것이고, 밖(外)에서 짓는(作) 일은 흉(兇)할 것입니다. 거북점(龜)과 시초점(筮)이 공(共)히 사람(人)에 위반(違)하면, 정(靜)함을 사용(用)하면 길(吉)할 것이고 동작(作)함을 사용(用)하면 흉(兇)할 것입니다.
여덟 번째(八)는 서징(庶徵)입니다. 비가 온다(雨)고 이르고, 햇볕 난다(暘)고 이르고, 따뜻하다(燠)고 이르고, 춥다(寒)고 이르고, 바람 분다(風)고 이르고, 때가 되었다(時)고 이르며, 다섯(五) 가지라는 것(五者)이 갖추(備)어져 오고(來), 각자(各) 그것(其)으로 여러 풀(庶草)이 우거져(蕃) 무성(廡)할 것입니다. 한 사람(一)이 황극(極)을 갖추(備)어도 흉(兇)하고, 한 사람(一)도 황극(極)을 갖춤이 없어(無)도 흉(兇)할 것입니다. 이르기를, 휴징(休徵)은, 엄숙(肅)함이라 이르는 것은 때(時)에 비(雨)가 내리는 것과 같고(若), 재예(乂)라고 이르는 것은 때(時)에 햇볕(旸)이 나는 것과 같고, 지혜(晢)라고 이르는 것은 때(時)에 따뜻(燠)해지는 것과 같고, 계책(謀)이라고 이르는 것은 때(時)에 추워(寒)지는 것과 같고, 성인(聖)이라고 이르는 것은 때(時)에 바람(風)이 부는 것과 같고, 이르기를, 구징(咎徵)은, 미치광이(狂)라고 이르는 것은 항상(恒) 비(雨)가 내리는 것과 같고, 참람(僣)함이라고 이르는 것은 항상(恒) 햇볕(旸)이 나는 것과 같고, 유예(豫)라는 것은 항상(恒) 따뜻(燠)한 것과 같고, 급(急)함이라고 이르는 것은 항상(恒) 추운(寒) 것과 같고, 몽매(蒙)함이라고 이르는 것은 항상(恒) 바람(風)이 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르기를, 왕(王)이 성찰(省)하는 것은 오로지(惟) 해(歲)에 있고, 경(卿)과 사(士)가 성찰하는 것은 오로지 달(月)에 있고, 군사(師)와 윤관(尹)이 성찰하는 것은 오로지 날(日)에 있습니다. 해(歲)와 달(月)과 날(日)로 때(時)가 바뀌(易)지 않으면, 여러 곡식(百穀)의 사용(用)이 이루어(成)지고, 재예(乂)의 사용(用)이 명백(明)해지고, 걸출(俊)한 백성(民)들의 사용(用)이 드러(章)나고, 가문(家)의 사용(用)이 고르(平)게 되어 편안(康)할 것입니다. 날(日)과 달(月)과 해(歲)가 때(時)에 이미(既) 바뀌(易)면, 여러 곡식(百穀)의 사용(用)이 이루어(成)지지 않고(不), 재예(乂)의 사용(用)이 혼미(昏)하여 명백(明)하지 아니(不)하고, 걸출(俊)한 백성(民)들의 사용(用)이 미미(微)하고, 가문(家)의 사용(用)도 안녕(寧)하지 아니(不)합니다. 서민(庶民)들에게는 오직 별(星)이 있는데, 별(星)에는 바람(風)을 좋아(好)하는 것이 있고, 별(星)에는 비(雨)를 좋아(好)하는 것이 있습니다. 해(日)와 달(月)이 운행(行)하면 곧 겨울(冬)이 있고 여름(夏)이 있고, 달(月)이 별(星)을 따르(從)면 곧 바람(風)이 불고 비(雨)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九)는 오복(五福)이니, 첫째(一)는 장수(壽)함이라 이르고, 둘째(二)는 부유(富)함이라 이르고, 셋째(三)는 강녕(康寧)함이라 이르고, 넷째(四)는 오랫(攸)동안 덕(德)을 좋아(好)하였음을 이르고, 다섯째(五)는 명(命)을 마쳤음(終)을 상고(考)하는 것을 이릅니다. 육극(六極)이니, 첫째(一)는 단명(短)과 요절(折)의 흉(兇)함을 이른 것이고, 둘째(二)는 질병(疾)의 흉함을 이른 것이고, 셋째(三)는 근심(憂)의 흉함을 이른 것이고, 넷째(四)는 가난(貧)의 흉함을 이른 것이고, 다섯째(五)는 악(惡)함의 흉함을 이른 것이고, 여섯째(六)는 약(弱)함의 흉함을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2. 논어(論語)
논어는 대표적인 유교 경전으로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이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챆이다. 그 편찬자와 편찬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현전하는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里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로 되어 있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子)께서는 괴력(怪力)과 난신(亂神)에 관해서는 말씀(語)하지 않으셨다. 계로(季路)가 귀신(鬼神)을 섬기는(事) 일을 묻자, 공자(子)께서 말씀(曰)하셨다. “아직(未) 사람(人)을 섬기(事)는데 능(能)하지 못한데 어찌 귀신(鬼)을 섬기(事)는데 능(能)하겠는가?” (계로가) “감히(敢) 죽음(死)에 관해서 질문(問) 합니다.” 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생(生)하는 것을 알지(知) 못하는데 어찌 죽는(死) 것을 알겠는가?”
번지(樊遲)가 아는 것(知)에 관하여 물으니(問), 공자(子)께서 말씀(曰)하셨다. “백성(民)들의 의로움(義)에 힘쓰고(務) 귀신(鬼神)을 공경(敬)하지만 멀리(遠) 하면 아는 것(知)이라고 말(謂)할 수 있는 것이다.”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물으니(問), 공자(子)께서 말씀(曰)하셨다. “인(仁)이라는 것은 앞서(先) 난해(難)하고 이후(後)에 획득(獲)하면 가히(可) 인(仁)이라고 이를(謂) 수 있는 것이다.”
공자(子)께서 질병(疾病)이 있으니, 자로(子路)가 기도(禱)를 청하였다. 공자(子)께서 말씀하기를, “그러한(諸) 것이 있는가?” 하였다. 자로(子路)가 대답(對曰)하기를, “있습니다. 뇌문(誄)에 이르기를, ‘너(爾)를 위해 상하신기(上下神祗)에 기도(禱)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자(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丘)가 기도(禱)한 것은 오래(久) 되었다.” 라고 하셨다.
(공자께서) 제사(祭) 하실 때에는 존재(在)하는 것 같이(如) 하셨고, 신(神)께 제사(祭) 하실 때에는 신(神)이 존재(在)하는 것 같이(如) 하셨다. 공자(子)께서 말씀(曰) 하시기를, “내(吾)가 제사(祭)에 참여(與)하지 않는 것은 제사(祭) 하지 아니(不)한 것과 같다.” 라고 하셨다.
3. 맹자(孟子)
맹자는 전국시대의 유학자인 맹가(孟軻)가 당시의 제후, 제자 및 기타 사람들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함과 동시에 더욱 심화된 형태로 발전시켰는데 이는 후대의 종교 및 정치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맹자는 40여 세 전후에 학문을 이룬 이후에,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여러 국가의 제후들을 방문하여 유가의 이념을 설파하였다.
맹자는 그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사후에 제자인 만장(萬章), 공손추(公孫丑) 등이 편찬하였다는 설이 있다. 맹자는 양혜왕, 공손추, 등문공, 이루, 만장, 진심, 고자 등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맹자는 특히 심성론, 정치론 그리고 경제론에서 뛰어난데, 심성론에서 맹자는 성선설(性善說), 사단(四端) 등을 주장하였고, 정치론에서 공자의 덕치(德治)에 이어 왕도정치(王道政治) 등을 주장하였고, 경제론에서 정전제(井田制) 등을 주장하였다.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曰)하셨다. “패자(霸者)의 백성(民)들은 즐겁지(驩)만 우려(虞)하는 것 같이(如) 하고, 왕자(王者)의 백성(民)들은 밝고(皥) 화평(皥)한 것 같이(如) 한다. 죽여도(殺) 원망(怨)하지 않고, 이롭게(利) 해도 고용(庸)되지 않으므로, 백성(民)들은 날로(日) 선(善)한 데로 옮겨(遷)가면서도 그렇게 하는(爲) 자(者)를 알지(知) 못한다. 무릇 군자(君子)에게 지나(過) 가는 바(所)이라는 것은 교화(化) 하는 것이고, 존재(存)하는 바(所)이라는 것은 신(神)이 있는 것이다. 상하와 더불어 천지(天地)가 같이 흐르니, 어찌 작은 보충(小補)이라고 말하겠는가?”
(말씀하시기를), “옛날(昔)에 요(堯)임금께서 순(舜)을 하늘(天)에 천거(薦)하시자 하늘(天)이 받아(受)들였고, 그를 백성(民)들에게 세차게(暴) 드러내자 백성(民)들이 받아(受)들였다. 연고로 이르기를, ‘하늘(天)은 말(言) 하지 아니하고, 행동(行)과 사업(事)으로 제시(示)하는 것이 이미이다.’ 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감히 물으니, 하늘(天)에 천거(薦)하시자 하늘(天)이 받아(受)들였고, 백성(民)들에게 세차게(暴) 드러내자 백성(民)들이 받아(受)들였다는 것은 무엇(何)과 같은 것입니까?” 말씀하시기를, “그로 하여금(使) 제사(祭)를 주관(主)하게 하시자 백신(百神)이 흠향(享)하였으니, 이것은 하늘(天)이 받아(受)들인 것이고, 그로 하여금(使) 사업(事)을 주관(主)하게 하시자 사업(事)이 다스려져(治) 백성(百姓)들이 편안(安)하니, 이것은 백성(民)들이 받아(受)들인 것이다. 하늘(天)이 그것을 부여(與)하고, 사람(人)들이 그것을 부여(與)하는 연고로 이르기를, ‘천자(天子)는 천하(天下)를 타인(人)에게 부여(與)하게 되기가 불가능(不能)하다.’ 하고 한 것이다.
호생불해(浩生不害)가 물어(問) 말하기를, “악정자(樂正子)는 어떤 사람(人)입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인(善人)이며, 신인(信人)이다.” 라고 하셨다. “무엇을 선(善)이라고 이르며(謂), 무엇을 신(信)이라고 이르는(謂) 것입니까?” 말씀하시기를, “가히 하고자(欲) 하는 것이 선(善)이라고 이르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자기(己)에게 소유(有)하는 것이 신(信)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충실(充實)하는 것이 미인(美)이라고 이르는 것이고, 충실해서 빛나는(光輝) 것이 대인(大)라고 이르는 것이고, 대인이며 그것을 화(化)하는 것이 성인(聖)이라고 이르는 것이고, 성인이며 그것을 알기 불가(不可)한 것이 신인(神)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악정자(樂正子)는 두(二) 단계의 중간(中)이며, 네(四) 단계의 아래(下)이다.”
4. 대학(大學)
대학(大學)이란 큰 사람이 되기 위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하는 도(道)를 기술하고 있다. 대학은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저작이라는 설과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라는 설이 있다.
원래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는데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처음으로 분리하여 대학광의(大學廣義)를 편찬하였고, 이정자(二程子)가 대학정본(大學定本)을 편찬하였다.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구분하고, 주석을 붙여서 대학장구(大學章句)를 편찬하면서 세상에 유행하였다.
대학은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강령이라는 것은 명덕을 밝히는 일(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新民) 그리고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일(止於至善)을 말하고, 8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5. 중용(中庸)
중용도 원래 예기 제31편에 속해 있던 부분을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인데, 한(漢)나라,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서 독립된 저술들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송(宋)나라의 주희(朱熹)가 사서집주(四書集注)를 편찬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용의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전해지던 도학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중용의 저자를 자사(子思)라고 하였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아니하고 기울지 아니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아니하는 것이 없음의 이름이다. 용이란 항상 고른 것이다. 천명은 성(性)을 일컫는 것이고, 성을 거느리는 것을 도(道)라고 일컫는 것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일컫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반드시 잠시라도 분리되기 불가한 것이니 분리 가능하면 도가 아니다.
희로애악이 아직 발하지 아니한 것을 일컬어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중절(中節)에 오르는 것을 일컬어 화(和)라고 하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통달 도이니 중화(中和)에 이르면 하늘과 땅이 자리하는 것이고 만물이 육성하는 것이다.
충(忠)과 용서(恕)가 도를 위반하는 것이 여러 가지를 베푸는 것과 멀지 아니하니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역시 남에게 베풀지 말라. 군자는 그 위치(位)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외에는 원하지 아니한다.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행동하고 빈천하면 빈천한 대로 행동한다. 윗자리(位)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얕보지 아니하고 아랫자리(位)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끌어당기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바유하자면 멀리 갈 때에 반드시 가까이서 가는 것과 같고 비유하자면 높이 오를 때에 반드시 아래에서 오르는 것과 같다.
천하의 통달 도(道)는 다섯으로 그것을 행하게 되는 바라는 것은 셋이다. 이르기를,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사귐(交)이다. 다섯가지는 천하의 통달 도이고 앎(知), 어짐(仁), 용기(勇)의 셋은 천하의 통달 덕(德)이니 그것을 행하게 되는 바라는 것은 일이다. 혹은 나면서(生) 알고 혹은 배워서(學) 알고 혹은 곤란해서(困) 아니 그 아는데 미치는 것은 일이다. 혹은 편안히 행하고 혹은 이롭게 행하고 혹은 강하게 힘써 행하니 그 성공에 미치는 것은 일이다.
성(誠)이라는 것은 천하의 도이고 성을 다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 있는 자는 힘써 하지 아니하여도 가운데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모양을 쫒아 도 가운데 있으니 성인(聖人)이다. 성을 다하는 자는 선을 택하여 견고(固)하게 잡는(執)하는 사람이다. 성(誠)으로부터 밝아지는(明) 것을 일컬어 성(性)이라 하고 밝음으로부터 성(誠)이 되는 것을 일컬어 교(敎)라고 하니 성은 곧 명이로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하고, 능히 그 성(性)을 다하면 곧 능히 사람의 성을 다하고, 능히 사람의 성을 다하면 곧 능히 물체(物)의 성을 다하고, 능히 물체의 성을 다하면 곧 가히 이로써 하늘과 땅의 화육(化育)을 조력하게 되고, 가히 이로써 하늘과 땅의 화육을 조력하면 곧 가히 이로써 하늘과 땅과 더불어 참여(參)하는 것이로다.
성(誠)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스스로 도이다. 성이라는 것은 물체(物)의 종시(終始)이니 성을 다하지 아니하면 물체가 없게 되는 연고로 군자는 성이 귀하게 되는 것이다. 연고로 군자는 덕(德)과 성(性)을 존중하고 도(道)를 물어 배우고 광대함(廣大)에 이르러 정미함(精微)을 다하고 높고 밝음을 극하고 도 가운데 항상하며(中庸)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알고(溫故而知新) 돈후(敦厚)하여 이로써 예(禮)를 숭상하게 되니 연고로 위(上)에 거하여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래(下)가 되어도 배반하지 아니하니 국가에 도가 있으면 그 말(言)이 족하여 이로서 흥(興)하게 되고 국가에 도가 없으면 그 침묵(默)이 족하여 이로써 용인(容)되게 된다.
6. 시경(詩經)
시경(詩經)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으로 유교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 혹은 십삼경(十三經)의 하나가 되었다. 주(周)나라 초기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의 시 305편을 수록하였는데, 국풍(國風), 소아(小雅), 대아(大雅), 송(頌)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국풍은 여러 나라의 민요, 아(雅)는 공식 연회에서 사용한 의식가(儀式歌),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던 악시(樂詩)이다.
7. 주역(周易)
주역(周易)은 주(周)나라의 역(易)이란 말이다. 주역이 나오기 전에도 하(夏)나라 때의 연산역(連山易)와 은(殷)나라의 귀장역(歸藏易)이라는 서책이 있었다고 한다. 주역은 천지자연의 원리뿐만 아니라 인간세상의 인문도 밝히고 있다.
주역은 공자(孔子)와 그의 학파인 유학자(儒學者)들이 괘(卦)를 보고 토론한 내용을 편찬한 책이다. 괘는 태호 복희시대에 나와서 전해진 것으로 8괘와 64괘가 대표적이다. 8괘와 64괘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복희가 천지간의 모든 사물을 각각 건(健)과 순(順), 강(剛)과 유(柔), 기(奇)와 우(偶), 대(大)와 소(小), 장(長)과 단(短) 등 대립되는 성질을 둘로 나누어 음()과 양(━)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주역 계사전에서,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으니, 팔괘가 길흉을 정하고 길흉이 큰 사업을 낳는다. 양의란 음()과 양(━)을 의미하며, 사상이란 태양(太陽)(), 소음(少陰)(), 소양(少陽)(), 태음(太陰)()을 가리키며, 팔괘는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으로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다.
즉 건은 하늘(天), 부친(父), 강건함(健)을 뜻하며, 태는 못(澤), 소녀(少女), 기쁨(說)이며, 리는 불(火), 중녀(中女), 붙음(麗)이며, 진은 우레(雷), 장남(長男), 움직임(動)이며, 손은 바람(風), 장녀(長女), 들어감(入), 감은 물(水), 중남(中男), 짐(陷), 간은 산(山), 소남(少男), 그침(止), 곤은 땅(地), 모친(母), 순종함(順)을 뜻한다.
그러나 팔괘는 천지의 만물과 인간의 모든 감정을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지만, 이 팔괘가 포괄할 수 있는 상징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므로, 이 팔괘를 중복하여 64괘를 만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천지의 현상과 인간의 일을 64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주(周)나라에서 이러한 괘를 사(辭)로 편찬하여 주역이 된 것으로 본다. 주역은 64괘인 경(經)과 이를 설명한 전(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와 유학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보는 십익(十翼)은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그리고 잡괘전(雜卦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나라 유학자인 공영달(孔潁達)이 편찬한 주역정의(周易正義)는 주역 상하경에 계사전 상하와 설괘전이 부기되어 있고, 송나라 유학자인 주자(朱子)가 편찬한 주역본의(周易本義)에는 주역 상하경에 계사전 상하와 설괘전 이외에 서괘전과 잡괘전이 부기되어 있다.
유학자들은 천지의 변역의 중심에 있는 인(仁)을 체득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고, 사회와 국가에서 이러한 인을 행하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주역에 의하면 성인과 군자는 역의 순서를 체득하고 그 상을 살펴 고하는 사람으로 하늘이 그를 도와 길하고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이란 천지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기(精氣)가 만물(物)이 되고(爲), 유행(遊)하는 혼(魂)이 변화(變)가 되는(爲) 것이다. 이런 연고(故)로 귀신(鬼神)의 정상(情狀)이 천지(天地)와 더불어(與) 서로(相) 유사(似)함을 아는(知) 연고로 위배(違)하지 아니하고, 만물(萬物)을 주유(周)하여 도(道)가 천하(天下)를 구제(濟)하는 것을 아는(知) 연고로 과오(過)를 짓지 아니하고, 두루(旁) 행(行)하며 흐르지(流) 아니(不)하여 하늘(天)을 즐거워(樂)하고 명(命)을 아는(知) 연고로 근심(憂)하지 아니하고, 토지(土)를 편안(安)히 하고 인(仁)을 돈후(敦)하게 하는 연고로 능히(能) 사랑(能愛)할 수 있고, 천지(天地) 화(化)함을 범위(範圍)로 하여 과오(過)를 짓지 아니하고, 만물(萬物)을 굽게(曲) 이루어(成) 유전(遺)하지 아니하고, 주야(晝夜)의 도(道)를 통달(通)하여 아는(知) 연고로 신(神)은 모(方)가 없고 역(易)은 일정한 형체(體)가 없는 것이다.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이 도(道)라고 이르는 것이니, 계승(繼)하는 것이 선(善)이요, 이루는(成) 것이 성(性)이다. 인자(仁者)가 보면 그것을 인(仁)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보면 그것을 지(知)라고 이르고, 백성(百姓)들은 날(日)마다 사용(用)하면서도 알지(知) 못하는 연고로 군자(君子)의 도(道)가 드문(鮮) 것이다.
주역은 우주와 자연의 변화의 주재자를 역(易)으로 보고 있다. 즉 천지가 변화하며 조화하는 것을 역이라고 하는데 역에는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고, 팔괘가 길흉(吉凶)을 정하고, 길흉이 대업(大業)을 낳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괘를 사용하여 우주, 자연, 인간뿐만 아니라 국가의 흥망을 점칠 수도 있다고 보므로 역은 우주 자연의 질서 속에 인간을 포함시켜 이해하고 다시 이를 국가의 운영에 적용하는 변화의 원리인 것이다.
역을 처음 설명한 것은 복희의 팔괘 차서도와 팔괘 방위도에 나타나고 있다. 복희는 천지인의 원리를 태극, 양의, 사상 그리고 팔괘 및 64괘로 보았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주역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양의는 하늘과 땅인 건과 곤을 지칭한 것이고, 사람의 양과 음을 지칭한 것이다. 주역이 설명하는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다.
8. 예기(禮記)
공자(孔子)는 하(夏), 은(殷), 주(周) 이래의 문물제도와 의례(儀禮)를 집대성하였는데,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예(禮)에 대한 기록이 200여 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현(鄭玄)은 그의 육예론(六藝論)에서, 대덕(戴德)은 기(記) 85편을 전하였으니 곧 대대례(大戴禮)이고, 대성(戴聖)은 예(禮) 49편을 전하였으니 곧 소대례(小戴禮)로, 이것이 예기(禮記)이다고 하였다.
예기에 대한 주석서로는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이 편찬한 예기정의(禮記正義)가 대표적이다. 예기의 판본은 경문(經文)만을 수록한 것, 경문과 주석을 합록한 것(20본), 정의만 수록한 것(70권본) 그리고 경문과 주소를 모두 합록한 것(63권본) 등이 있다. 예기의 내용은 통론(通論), 제도(制度), 명당음양기(明堂陰陽記), 상복(喪服), 세자법(世子法), 제사(祭祀), 길례(吉禮), 길사(吉事), 악기(樂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는 초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시대에는 교화를 중시하는 학파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송(宋)의 주희(朱熹)에 이르러서는 우주론과 제사하는 의례가 중시되었다. 제사의 대상은 천신지기(天神地祇), 상하신기(上下神祇), 상제(上帝) 그리고 역대 왕조의 제왕들이었다.
유교의 우주관은 천지와 자연만물이 태극, 양의, 사상, 오행, 팔괘 등에서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儒敎)의 내세관(來世觀)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되는 것으로, 예기(禮記)에 의하면 혼기(魂氣)는 하늘(天)로 되돌아(歸) 가고 형백(形魄)은 땅(地)으로 되돌아(歸)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은 신장(伸)하고 귀는 되돌아(歸)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교는 천지신기(天地神祇), 상하신기(上下神祇) 그리고 상제(上帝)와 같은 신명(神明)을 모시고, 비록 멀리해야 할 대상이지만 귀암(鬼暗)도 공경한다. 논어에서 공자께서는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기에서 오로지 이단만을 공부하면 해가 된다고도 하였다. 본래 신(神)와 도(道)가 분리되는 것처럼, 귀(鬼)와 신(神)은 분리되는데 신은 신명(神明)이고, 귀는 귀암(鬼暗)이자 지기(地祇)로 사람이 죽은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유교에서 중시하는 제사의 대상은 천지신기, 상하신기, 상제와 제왕과 유계의 혼백이 된다.
지성(至誠)의 도(道)는 가히 사전(前)에 알게(知) 되는 것이니, 국가(國家)가 장차(將) 흥(興)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必) 경사(禎)스럽고 상서(祥)로움이 있고, 국가(國家)가 장차(將) 망(亡)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必) 요사(妖)스러운 우환(孽)이 있어서 시초(蓍)점과 거북(龜)점에 나타(見)나며, 사지(四體)에 동작(動)하기도 한다. 화(禍)와 복(福) 장차(將) 도달(至)하려고 할 때에 선(善)한 것을 반드시 먼저(先) 알며(知), 선(善)하지 아니(不)한 것도 반드시 먼저(先) 아는(知) 하는 연고로 지성(至誠)은 신(神)과 같은(如) 것이다.
전(云)하기를, 귀신(鬼神)은 천지(天地)를 따르는(從)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고로 군자(君子)의 도(道)는 모두(諸) 신체(身)에 근본(本)하여 모두 서민(庶民)에게 징험(徵)되며, 모두 세 왕조(三王)에 상고(考)하여도 위배(繆)되지 않으며, 모두 천지(天地)에 세워(建)보아도 어긋나지(悖) 않으며, 모두 귀신(鬼神)에게 물어도(質) 의심(疑)스럽지 않으며, 백세(百世) 뒤의 성인(聖人)을 기다리게(俟) 되어도 의혹(惑)스럽지 아니하다. 모두 귀신(鬼神)에게 물어도(質) 의문(疑)이 없는 것은 천도(天)를 아는(知) 것이고, 백세(百世) 뒤의 성인(聖人)을 기다리게(俟) 되어도 의혹(惑)스럽지 않은 것은 인도(人)를 아는(知) 것이다. 이런 연고로 군자(君子)가 활동(動)하면 대대(世)로 천하(天下)의 도(道)가 되고, 행동(行)하면 대대(世)로 천하(天下)의 법(法)이 되고, 말하면(言) 대대(世)로 천하(天下)의 준칙(則)이 된다. 멀리(遠)하면 곧 바라봄(望)이 있고, 가까이(近) 해도 곧 싫증(厭)나지 아니한다.
공자(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鬼神)이 덕(德)이 되게(爲) 하는 그것(其)이 성대(盛)한 것이런가? 보려고(視) 해도 보이지(見) 않으며(弗), 들으려고(聽) 해도 들리지(聞) 않으며(弗), 만물(物)을 체득(體)하여 유전(遺)하기도 불가(不可)하다. 천하(天下)의 사람(人)들로 하여금 밝게(明) 재계(齊)하고 복식(服)을 갖추어(盛) 제사(祭祀)를 계승(承)하게 한다. 양양(洋洋)하도다. 그것이 위(上)에 존재(在)하는 것 같고, 그것이 좌우(左右)에 존재(在)하는 것 같다.” 라고 하셨다.
시경(詩)에서 이르기를, ‘신(神)의 위격(格)을 생각(思)하더라도 척도(度)를 생각(思)하기 불가(不可)한데 하물며(矧) 가히(可) 비춤(射)을 생각(思)할 수 있겠는가? 무릇 미세(微)함이 현저(顯)한 것이나 정성(誠)이 가리기(揜)가 불가(不可)하여 이와(此) 같은 것이로구나.” 하였다. 제의(祭義)에, ‘혼기(氣)라는 것은 신(神)이 성(盛)하는 것이고, 백(魄)이라는 것은 귀신(鬼)이 성(盛)하는 것이다. 신(神)과 더불어 귀신(鬼)을 합하는 것이 가르침(敎)의 이름(至)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것은 음악(音樂)과 제례(祭禮)이다. 옛날에 음악에 관해 저술한 악기(樂記)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상고시대의 음악과 제레에 관한 내용은 예기에 기술되어 있다. 유교의 대표적인 이념은 인(仁)과 예(禮)인데 인은 우주 자연과 세상 속에서의 자기의 근본이고 예는 천지의 순서로 음악과 달리 밖의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이는 세상의 모든 일을 화평하고 질서있게 하는 것이다.
9. 서경(書經)과 춘추(春秋)
서경은 상서(尙書)라고도 하는데 태호 복희씨, 여와씨, 염재 신농씨, 황제 공손씨를 이어서 세운 요, 순 그리고 하나라와 은나라와 주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춘추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 은공(隱公)부터 애공(哀公)에 이르는 역사를 편찬한 책이다. 서경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기존의 사서를 편찬한 것이고, 춘추는 노나라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궁정연대기(宮廷年代記)를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