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프로야구계 최대 이슈는 제8구단의 창설이었다. 1986년 빙그레가 창단되면서 프로야구팀이 7개 팀으로 운영되다 보니 하루에 한 팀씩은 경기를 치룰 수 없는 경기 일정이 문제가 되어 제8구단 창설이 현안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제8구단을 창단을 위한 기본원칙을 세웠다. 기본원칙은 제8구단 창단 기업은 기업 전체의 연간 매출액이 5천억원 이상이어야 하고, 프랜차이즈 안에 현대식 구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50억원 이상의 가입금을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1989년 4월 10일 쌍방울과 미원이 연합기업형식(쌍방울 70%, 미원 30%)으로 전북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창단신청서를 제출하고, 7월 8일 임시구단주 총회에서 창설권을 획득했다. 이렇게 창단된 쌍방울레이더스는 1990년 2군 무대에서 우승을 거둔 뒤, 1991년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합류함으로써 전주를 연고지로 삼은 최초의 프로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쌍방울구단의 태생적 한계
쌍방울레이더스의 태생 배경이 불순했었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았다. 프로야구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 가운데 하나인데, 정치적인 논리로 탄생된 팀이었다는 것이다. 즉 호남지역의 단결력을 줄이기 위해 전북지역에 야구단을 만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정치적 힘’이 작용했다는 루머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이러한 루머가 설득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도 제시되었다. 연합기업으로 창단신청서를 제출했던 미원이 레이더스가 해체되던 순간까지 단 한 차례도 야구단 운영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쌍방울은 내의 전문업체로 출발해 무주리조트를 개발하는 등 레저산업계의 총아로 발전하면서 내실이 단단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제8구단 창단 기본원칙으로 제시한 조건에는 미달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단들은 쌍방울의 손을 들어줬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프로야구 출범이후 4차례 연속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던 해태 타이거즈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호남을 전남과 전북으로 쪼개야 한다는 계산아래 쌍방울레이더스의 창단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창단배경이야 어쨌든 전북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이 창단되자 우리고장 야구팬들은 아낌없는 환영의 박수를 쳤다. 김봉연 김준환 김성한 김용남 조계현 등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우리고장 출신 선수들이 해태타이거스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우승을 견인해내는 것을 더부살이의 심정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던 아쉬움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해태타이거스에 있는 전북출신 유명 선수들만 데려오면 당장이라도 쌍방울레이더스가 우승이라도 넘볼 수 있다는 순진한 착각도 해보면서 흐뭇한 미소도 지었다. 그러나 선발 7개 구단은 자기구단이 꼭 필요한 22명의 선수를 내주지 않을 안전장치를 해두었기 때문에 쌍방울레이더스는 창단 첫해부터 선수 수급에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덕분에 SK와이번스로 넘어가기 전까지 9년 동안 쌍방울레이더스가 보여준 성적은 통산 1140경기를 치렀는데 455승 655패 30무로 승률 0.410을 기록해 그리 빼어나지 않았지만, 1996년과 1997년에는 연이어 3위의 성적을 거두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도 했다.
대부분 하위권인 6~8위를 맴돌았지만 쌍방울레이더스를 소속 선수들은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나름대로의 명성을 쌓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최고 좌타자 김기태, 특급마무리 조규제, 97시즌 다승 및 방어율과 승률왕에 빛나는 김현욱, 최고의 포수이자 홈런왕 박경완, 어린왕자 김원형 등은 쌍방울레이더스 돌풍의 주역들이었다.
1997년 모기업인 쌍방울개발의 최종부도를 시작으로 쌍방울레이더스도 부도를 면치 못하게 되자 구단은 김기태 조규제를 비롯한 간판선수들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근근히 명맥을 유지했지만, 2000년 초 결국 쌍방울레이더스는 퇴출되고 SK가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면서 인수가 아닌 새로운 팀의 창단으로 레이더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쌍방울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로 공시됐지만, SK는 자유계약선수 영입의 형태로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을 새로운 창단팀으로 영입했다.
제2의 레이더스를 기대
이로써 전라북도를 연고로 한 프로야구팀의 역사는 일단 종지부를 찍었다. 1980년대의 만년 꼴찌구단 삼미슈퍼스타스는 감사용투수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지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도 쓰여졌지만, 1990년대의 공포의 외인구단 쌍방울레이더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점차 추억 속으로 사라져만 가고 있다.
프로야구 시즌이 개막되었지만, 더 이상 전주사람들은 야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4강을 이룩했던 세계야구클래식(WBC) 기간 중 반짝했던 야구 열기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시들해졌다. 바다 건너 이승엽선수의 맹활약에 성원을 보내기는 하지만,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프로야구는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 2000년 쌍방울레이더스가 해체되고 응원할 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언젠가 전북을 연고하는 제2의 쌍방울 구단이 다시 태동하고, 언젠가 WBC대회 한국 우승의 주역이 바로 전북 연고구단의 선수들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