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작가 되기 ...
나의 꿈이든 현실이든 나의 소원은 단 하나 "작가"라는 이름 하나 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난 중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 처럼 나에게 좋게 글 코치도 해 주시면서 칭찬도 해 주실 수 있는 때론 지적도 해 줄 수 있는 그런 국어 선생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곳 곳의 교무실에 돌아 다니면서 국어 선생님으로 하여금으로 양의를 구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식으로 난 국어 선생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담당 선생님이신 국어 선생님께 좋다라는 사인을 받고 글이라는 관심에 있어 더 긴밀하게 파고 들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글 쓴 걸 갖고 가고 어떤 소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바빠서 못 읽었다라는 식으로 계속 더해 가셔서 난 선생님하고의 글로의 친밀감을 그만 두었었는데 그러다 교무실에서 본 신문으로 인터넷 무료 편지 라는 광고를 보고 난 그 속이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는데 그 속에는 작가 되기라는 배너와 편지 쓰기 배너 이멜 교환 배너로 남자 여자로의 교재하는 배너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작가 되기 배너에다 내 이름하고 스캔사진을 내 걸고 내가 마음 한 자리로서 너무 답답할 때 아름다움으로의 생각으로 작가가 되어 보기도 했었습니다.
때론 내가 올린 글을 본 그 사이트로의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으로 기분 좋은 메시지도 받고 또 내가 그 걸 좋은 마음으로 표현하기도 했었고 난 참 많이 행복 했었습니다.
좋은(이건 내가 생각한 말) 작가 되기 라는 배너로 나의 이름 최미희 라는 이름으로서 그리고 작아서 보일 듯 말듯한 나의 작은 스캔 사진 속의 작가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난 참 많이 행복 했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나의 종칭으로 여기고 싶었던 진짜는 아니지만 가장으로의 작가라는 이름으로의 종칭으로 나는 내내 행복해 했었습니다.
나의 글을 보고 격려 또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글이라는 자체를 칭찬해 주는 내 글 주위의 사람들의 자그마한 메시지를 보고도 난 나를 행복한 나로 만들었습니다.
나의 현실 속을 내 생각으로의 글 속과 빛댄다면 너무 너무나로의 삭막함의 그 자체 속이지만 그래도 글 하나로의 작가라는 종칭 하나로의 그리고 내 글 주위를 맴 돌면서 칭찬과 격려의 말이자 메시지를 아끼지 않는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사람 한 사람으로의 격려와 칭찬으로 난 겸손한 작가가 되려고 생각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눈으로 알지 못하는 작가라는 이름 아래이지만 또는 목소리로도 알지 못하는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작가라는 이름 속이자 아래이지만 그래도 난 겸손으로의 작가가 되어 보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가 되기란 마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있는 거라고) ...
7. 내 사랑 작은 아이
난 라디오 같은 걸 듣는 걸로는 취미를 두지 않았던 "나"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브라운 관 속에서 개국한다라는 라디오의 진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게 되면서 난 홍경인 오빠께서 하신다는 "홍경인의 라디오가 좋아요" 에 대해 아주 큰 듣고 싶은 욕망이 들었습니다.
개국은 시작 됐다라고 하지만 나는 홍경인 오빠께서 하신다는 그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지 못해 한 한달 동안인가 찾아 해매다가 어떻게 찾아서 기분 좋은 맘으로 들었을 때 그 곳 프로그램에서 그 프로그램을 지적하면서 감시까지 해 줄 수 있는 그런 살벌한 모니터 요원으로서의 살모단을 뽑는다는 얘기를 접해 듣고 난 나의 글 솜씨를 탄탄히 할 수 있는 기회 라고 그 프로그램 라디오 한 번 듣고 모니터 요원 신청서의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듣지도 않았던 라디오 그 결과 발표 날 때까지만 해서 정말 정말로 열심히 듣고 또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 프로그램의 100회 특집으로 살모단이라는 이름으로 학격자 명단으로 호명하게 됐는데 그때 내 이름이 경인이 오빠 목소리로 첫 번째의 이름으로 호명이 됐었습니다.
난 그때 내 이름 맞나 하면서 궁금해 하다가 그 프로그램 홍라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학격자 명단을 보면서 내 아이디까지 보는 순간 "나"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난 매일 매일 적으로 그 살모단이라는 란에다가 모니터를 매일 적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걸 올리는 내내 동안은 마술의 요정이라도 된 것 처럼 행복해 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난 매일 매일 적으로 한결 같은 맘으로 모니터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코너 하나 중의 이멜 홈페이지 광고 해 주는 코너로서 그 곳에서 루푸스 걸린 아이 송은진이라는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게 되었고 그리고 따뜻한 느낌의 방명록 올리면서 은진이하고 나하고는 가까이에 있는 언니 동생 처럼 멜 교환 까지 하던 나 작은아이 그리고 은진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작은아이란 내가 은진이 홈페이지 방명록에 글을 올렸을 때 썻던 종칭으로의 이름으로서 따뜻함으로의 이름이자 종칭 이였어요.)
사실은 내가 은진이하고 멜 교환 한다라는 말에 방송으로 사랑의 전화 연결자로 방송 탄 적이 있기도 해서 난 작은아이라는 말로 나는 따뜻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난 작은아이라는 이름을 내 사랑으로 여기고 싶어 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난 그 곳에선 홍라조에선 작은 아이라 하면 누구라고 통할 만큼으로 나의 이름은 작은 아이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따뜻함으로 승부할 줄도 알면서 따뜻함이 어떤 것이다 하면서 알려줄 수 있는 따뜻함으로의 작은 아이였는데 그런데 이 살모단 최미희(작은아이)도 영원으론 지속 되진 못했습니다.
처음으로의 살모단 의견 읽어 주셨던 경인 오빠께서 내 모니터 링을 영원한 살모단 최미희(작은아이) 예요 라고 했는데 그 것도 그 일도 오래도록 영원토록 지속되진 않았습니다.
살모단이라고 뽑은 건 30명이였는데 모니터 링을 별로 올리지를 않아서 더 쉽게 말하면 나밖에 올리는 살모단 다시 말해 모니터 요원이라는 이름 밖에 없어 그 살모단이라는 이름은 연기 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난 한 가지라는 추억 그리고 한 가지라는기억을 만들었다고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기억하고 싶습니다.
끝까지 라는 정상이라는 느낌으로의 살모단 즉 살벌한 모니터 단으로의 요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그 순간 그 순간들 동안엔 무척이나 행복해 했었습니다.(행복 했을 꺼예요.)
내가 쓰고 싶어했던 마음으로의 글과 그리고 작은아이라는 이름이자 종칭까지로 난 행복해 했습니다. (행복해 졌습니다.)
8.슬픔 속의 ... 희망
사람들의 대 부분은 다 기쁨 속의 희망을 찾는다고 하지만 난 슬픔 속의 희망을 찾아야 했던 만들어야 했던 나 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나도 대학이라는 하나라는 걱정도 하면서 또는 내가 하고 싶은 배우고 싶은 글 쪽으로의 문예 창작과로 좋게 생각하면서 더 좋게 생각하고 싶었던 문예 창작과를 지망하고 싶었던 나 최미희 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로의 걱정으로 수능 점수의 낮음을 생각 하면서 정말 내가 가고 싶어하는 문예 창작과 갈 수 있을까?" 라는 걱정에 걱정 많이 했었는데 어느 날 내 멜 통에 백제 예술 대학 문예 영상 창작과라 하면서 원서 내 보라는 멜 통이 들어 왔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오라고 손짓 하면서 불러주는 대학이 있구나" 그것도 "내가 원하는 과로의 대학이 있구나" 하면서 난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눈치를 피해 그 곳에 원서를 내면서 면접이라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난 학격자 발표 날만 손 꼽아 기다렸습니다.
시간이라는 건 흘러서 학격자 발표 날짜가 가까워 지면서 난 백제 예술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학격자 명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홈피 쪽에 아니 학격자 명단 배너 쪽에 자꾸적으로 오류가 나는 바람에 난 그 학교 쪽으로 전화를 걸어 나의 이름이 학격자 명단에 속하는지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그 전화를 받는 상대방이 잠깐만요 하면서 ... 기다릴 때 어찌나 떨리던지 그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이 나의 심장을 콩알만하게 만들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전화를 받고 학격 여부로 알려 주었을 때 난 하늘을 나는 기분 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학교로 내가 원하는 과로 학격이 됐다라는 여부의 말에서 난 하늘을 나는 기분 처럼 나를 표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늘을 나는 기분도 잠시 난 슬픔 속의 희망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로 난 내가 원하는 과로의 학교로 갈 수가 없었던 상황이였기 때문에 난 시간은 조금 있다 하면서 슬픔 속의 희망을 걸어 보아야 했습니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아니 관심을 많이 기울이던 과가 아니었던 생활 보육과로 학격 여부가 통지 되고 나서 난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그런 로봇 같은 내가 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나도 아이들이라는 거 좋아하면서 또 그 걸 내 직업처럼 삼고 싶다라는 생각 한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일이 로봇 처럼 변해 버리니까 너무 안타까우면서도 슬퍼지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도 흘러서 대학 입학식 하던 날 해서 그리고 정식으로 생활 보육과에 적응 이라는 강의 듣던 날 까지 해서 난 슬픔에 겨워 목 메이기 까지 했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엄마,아빠께서 나한테 "학교 졸업하면 그 다음으로 너가 하고 싶은 문예창작과 편입이라고 시켜 줄 테니까 열심히 생활해 봐" 라고 했지만 난 속이자 속으로 경험 해 보는 것들이 노동과 같음 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교통사고 때문에 손도 불편한데 만들기 같은 걸 주로 하는 생활 보육과로서 그 걸로 학점을 따 내야 된다는 것이 참 노동 처럼 힘들었습니다.
남들이 얘기 하기에는 생각 하기에는 대학이란 곧 여행이다 라면서 이런 성격의 사람 또는 저런 성격의 사람은 만날 수 있는 게 여행과 같은 느낌이여서 대학이란 곧 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걸 직접적으로 들었었지만 난 정말 대학이란 노동이었다(그렇게 느꼈다.).
슬픔 속으로 희망이라는 작은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걸 수밖에 없는 그런 노동 같음을 난 느낀다.
모든 것을 나로의 기준으로 슬기롭게 해쳐 나가야 되는 부분에서도 그렇고 또는 힘들어도 이건 누구도 같이 도와 줄 사람이 없다 하면서 나 혼자 그 일을 맞서야 되는 부분에서 그렇고 나에겐 대학이란 아직도 노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거울 처럼 여기고 싶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곧 글의 표현이라면 난 아직도 내가 쓰고 있는 글 하나 하나라는 속에서 속으로 느끼는 것 중에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면서 난 거울의 창과 같은 거울의 마음을 이젠 아름답게 거울 처럼 비쳐 보고 싶습니다.
슬픔을 느끼는 마음으로의 느낌에서 희망이라는 밝은 창의 거울과 같은 느낌으로 난 슬픔 속의 희망을 걸어 보고 싶습니다.
좋은 창의 거울이 비쳐지길 바라면서 ...
9. 섬기며 ... 이겨 내며 ...
내가 가장 힘들 때 나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던 말 중의 하나로 "섬기며 ... 이겨 내며..." 가 있었습니다.
모든 걸 다 좋게 섬기면서 또는 모든 걸 다 좋게 이겨 내자라는 나의 목표 속이기도 했었습니다.
집을 떠나 나 혼자 속초라는 낮선 곳에 있으면서 힘듬이라는 거 그리고 어려움이라는 거 느끼면서 체험도 해 보면서 난 더 깊숙히 "섬기며 ... 이겨 내며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걸 하나로의 맘 하나 자체로 섬기면서 ... 또는 반대로 그 걸 좋게 이겨 낸다라는 맘 처럼 이겨 내보기도 하면서 나의 "섬기며 ... 이겨 내며 ..." 는 더 깊숙한 사랑 그리고 우정으로 싹을 티워 가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속초 라는 곳으로 또는 낮섬으로의 혼자임을 느꼈을 때 그리고 기숙사라는 곳에서 낮선 얼굴들 3명 포함으로 더 깊숙한 낮섬을 느꼈을 때 난 너무 많이 힘든 경험이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라는 자체도 정확하게 모른데 말 다툼이라는 티격 태격이 있었듯이 난 너무 힘든 경험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나" 라는 자체를 알고서는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술 먹고 콜라를 엎지렀다는 데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치우지도 않다가 그 콜라를 흘린 사람이 와서 닦고 나는 모든 게 다 원래대로 돌아왔는지 알았는데 그런데 내 자리 쪽 청소 하다가 내 책상 뒤에 콜라 병 깨진 것이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난 그 일과 연관된 기숙사 친구들에게 화를 내니 그 친구는 "나 보고 너도 술 먹는 법 배우면 그런 거 이해할 탠데 왜 이해 못하냐고" 나에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난 그러면서 그 속이 너무나도 힘 겨웠습니다.
그래도 친구라는 이름이자 의미는 만들어야겠다고 기숙사 친구들 없으면 기숙사 방 청소에다가 빨래까지 개 놓기 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 개는 자체 부터를 신경질과 화로 바꿔 버렸던 기숙사 친구들을 보며 난 더 큰 힘 겨움의 시작 점이자 점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난 동아리 방에 문을 두 드리기로 했습니다.
나의 맘을 더 많이 잘 이해하면서 사랑으로 교재와 사랑으로의 우정까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동아리 CCC로 난 문을 두드렸습니다.
내가 마음이 늘 힘들 때 마다 그늘 같은 시원한 느낌 처럼 마음 편안함으로 가질 수 있었던 예술이자 하나님이자 아버지의 의미를 생각하며 난 문을 두드렸던 거 같습니다.
처음으로 접해 보았던 CCC라는 간판과 그리고 동아리 방까지도 난 너무 많은 변화 속을 꿈 꾸워 보았던 거 같습니다.
이 속에서 나를 좋음으로 바꿔 주기를 간절히 바래 보면서 ...
그 속에 들어 갔을 때 순장이라는 낮선 이름으로 시작해서 난 너무 낮설어 했었습니다.
부름은 순장님인데도 계속 언니라는 종칭으로 적응이 안 되어도 너무 안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로서 혼남이라는 것도 났었고 난 너무 많이 CCC라는 간판에 낮설어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난 채플이라는 걸 알게 됐고 또 그 곳에서 만난 관동대 경동대 CCC맨들과 좋은 교재라는 시간도 가지면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순장님에게 부름의 대화가 너무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 같아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선 낮섬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다가가기 시작 했었습니다.
종칭이라는 무거움 속이라는 어려움이 나를 아름다움이라는 글자 앞으로 다가오게 했었던 거 같기도 헀습니다.
그래서 난 지금 이 순간으로 이렇게 느끼고 싶습니다.
어려움 속이라는 낮설음이라는 끝 부분이라는 속이라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글자 속으로 "섬기며 ... 이겨내며" 라고 난 지금 이 순간으로 이렇게 느끼고 싶습니다.
10.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이 세상 속에서 나에게 비쳐 졌던 모든 이름 모름으로의 소리들이 다 싫다고 해도 난 이 소리 만은 사모하고 싶습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라는 소리 처럼 나는 사모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로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는 자신의 소리이다라고 내는 소리가 한결 같음을 알기에 자신을 보다 더 사모할 것을 느끼기에 난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를 닯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사모하고 싶습니다.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 보다도 기억 속에서 기억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기억들을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로 담아 두려는 물레방아를 기억하며 나는 사모하고 싶습니다.
나의 어린 기억들로는 교통사고라는 것도 친구들의 장난끼의 발동으로 일어났었던 기억하며 ... 또는 교통 사고 후에도 배우고 싶어했던 피아노 라는 것도 하루 만에 짤리는 정도로의 기억들 하며 그리고 학원을 다니되 아픔으로 남들보다 두배라는 돈을 소리없이 엄마가 냈으면서도( 그 사실은 내가 학원에 관한 좋음으로의 느낌을 버렸을 때) 내가 정말 정말로 다니고 싶어 헀던 논술 학원 어떻게 지나 다니던 학원 차 보고 참 좋아했었는데) 그 쪽의 원장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 뭐 안 되는 일만 있으면 나를 마주 하면서 화풀이를 하셨습니다.
난 정말 정말로 좋은 맘 예쁜 맘으로 다니고 싶었던 학원이였는데 거기서 내가 여지끈 다니다 짤리긴 했었던 학원 한 군데 한 군데가 다 두배라는 학원비를 요구 했었던 학원이였다는 사실로 나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에 필요한 물의 양 만큼으로 난 눈물로서 슬퍼지려 헀습니다.
내가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 걸 알았다면서 가르치기 힘들다면서 학원비의 두배를 원했던 학원들 그러면서 구박이란 구박은 많이 했었던 학원들을 생각하며 기억하며 난 물레방아 돌아가는 데 필요한 물의 양 만큼으로 슬퍼지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만큼으론 나의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데 필요한 물의 양 만큼의 물을 이젠 좋게 소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기분이 좋은 기분이 새로운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로 나는 돌아가려고 합니다.
지난 기억이다 또는 지난 추억이다 라고 느낀 기억으로서 추억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기억들 하며 또는 추억 하기 싫은 추억들의 기억들 하며를 나는 이제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처럼 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친구라는 존재가 또는 친구라는 의미가 너무나 소중했었던 떄에 친구들하고 스타 집으로 놀러 가기로 했었는데 그때는 정말 너무나도 스타집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참 신기했었고 또는 신비롭기 까지 하면서 친구들을 기분좋은 맘으로 돈 만원을 쥐고 나섰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은 다 돈 천원 이 천원을 갖고 왔다는 사실을 뒤 늦게 알았습니다.
그 곳까지 가는 차비 만큼은 그 친구들이 기분좋게 내 차비까지 대 주었었는데 점심이라는 밥은 내가 사는 수밖에 없는 상황 속이였으며 또는 스타를 못 만났다라는 서운함에 여의도 광장 쪽에 가서 자전거 탄 다고 해서 갔는데 그것도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그 친구들의 자전거 빌리는 값을 지불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내 주머니 속엔 30원이라는 돈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 속으로는 너무나도 친구라는 의미 속 으로면 내 목숨과도 바 꿀 수 있을 만큼 나랑 얘기 하면서 ... 또는 같이 가자라는 말을 해 줄 수 있었던 친구라는 속이 너무 소중했기에 그때 내가 바보여도 너무 바보 였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래도 지금 만큼으론 이런 기억 하나 만으로도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처럼 아름다우면서 순서 있으면서도 의미가 깊은 그런 느낌 속으로 의미 속으로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를 느끼려고 합니다.
지난 기억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생각하며 난 좋음으로의 물레방아 속의 의미 속으로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를 느껴 보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과 그리고 좋은 기억만을 하면서 ...
나에게 있어 힘들 때 친구라는 존재가 너무나 소중해서 친구들에게 돈이라는 것도 마구 잡이로 내 돈 많이 쓰게 됐었던 기억 하나 하나를 기억하며 난 그 걸 기억이니 추억으로 남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