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웨슬리의 삶과 사상

 

한영태

 

웨슬리의 생애

 

요한 웨슬리(1703.6.17-1791.3.2)의생애에 대하여는 교파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느 정도 상식적인 지식은 이미 가지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20세기 중반부터 그의 삶과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사상의 위대성이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는 단지 설교자, 부흥사, 감리교회의 창시자 정도로만 이해되었지만, 지금에는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요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그의 생애에 대한 연대기적인 기록보다는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신앙적 혈통

 

웨슬리 자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만일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의 조상들이 그의 인격과 신앙에 끼친 영항이 매우 컸음을 뜻한다. 웨슬리에게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청교도적인 요소와 성공회적인 요소가 조화되어 있었다. 그의 증조부 바돌로매 웨슬리와 조부 요한 웨슬리는 열렬한 청교도 목회자였으며 그의 외조부 사무엘 앤슬리 역시 청교도 목사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성공회로 개종하였으며, 아버지는 성공회 사제(신부)가 되었다. 따라서 웨슬리도 자연히 성공회교인이 되었고 사제가 되였다. 이리하여 웨슬리는 청교도적인 것과 성공회적인 것, 어떤 면에서는 서로 대립적인 두 요소를 신앙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었다.
먼저 청교도의 특징은 한마디로 개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성공회가 개혁을 다하지 않았다고 보았으며, 보다 철저한 종교개혁을 요구하면서 성공회와 충돌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 종교적 열정, 적극적 헌신, 그리고 복음전파에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성공회의 특징은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교리와 전통, 의식에 철저한 고교회(High Church)였다. 이 양면은 서로 대립적이며 조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양면이 잘 조화된 신앙과 실천을 이루었다. 그의 바탕은 성공회적 이었지만, 그에 더하여 청교도석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수적이면서 개혁적이었으며, 개혁적인가 하면 동시에 보수적이였다. 그는 개혁과 보수, 전통과 창조가 조화된 신앙인이었다.
그의 신학에도 이 양면은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의 교회관은 기본적으로 성공회적이지만. 그는 성공회의 전통이 성경적으로 문계가 있을 때는 과감히 이를 깨트려버린다. 예를 들면 야외설교, 평신도 및 여성 설교자의 활용 등이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조화는 그의 조상들 즉 청교도 교역자와 성공회 교역자들을 통해 그에게 전해진 신앙적 혈통의 유산이라 생각된다.

 

웨슬리의 성직 호칭 문제

 

그는 22세에 성공회의 부사제(Deacon)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그의 안수받은 성직 명칭에 관하여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출판된 책에서는 ‘Deacon'을 집사 또는 집사목사 아니면 그냥 목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Elder'를 장로 또는 장로목사로 번역하고 있다. 집사면 집사, 장로면 장로지 거기에 목사 명칭을 붙이니까 웨슬리는 평신도인지 성직자인지가 분명치 않게 된다. 이런 혼동은 감리교회와 성공회의 성직 제도를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성공회의 성직제도는 부사제→ (Deacon)→ 사제(Elder)→주교, 감독(Bishop)→대주교(Arch Bishop)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웨슬리는 부사제 안수 후에 사제안수를 받았다. 그 이후 직분은 안수가 아니라 피선되는 직분이다. 감리교회도 이러한 성직 제도를 가진다. 다만 대주교직은 가지지 많고 있다. 한국의 감리교는 한국적 상황에서 목사라고 호칭하고 안수도 한번만 받지만, 정회원 목사가 되기까지는 준회원 목사이며 승급심사를 거쳐서 정회원 목사가 된다.

 

링컨대학의 연구원

 

옥스퍼드 대학교의 그리스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링컨대학의 연구원(또는 조교)으로 임명되었다. 정식 명칭은 Fellow였다. 여기서도 이 말을 번역할 때 조교, 조교수 연구원 심지어는 교수로도 번역하고 있다. 이것도 옥스퍼드의 교직제도를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옥스퍼드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Fellow라는 직분을 두었다. Fellow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문적 재능이 인정된 자가 교수의 지도 하에 학생 몇 명을 맡아서 지도하는 직분이다. 우리말로는 연구원 또는 조교가 적당하다. 그러나 조교라는 용어는 학생 조교를 연상하기 쉬우므로 연구원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웨슬리가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석사학위 (MA.)를 가졌는데, 이는 연구원 생활을 2년 이상 하면 저절로 주어지는 학위였다.

 

신성 클럽(Holy Club)

 

감리교회의 모체는 신성 클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신앙 단체는 웨슬리 형제와 그의 동료들에게 철저한 신앙적 규율과 훈련, 그리고 실천을 이루게 하였다. 뒷날 웨슬리의 신도회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은 신성 클럽의 정신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이 단체가 웨슬리 자신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화이트필드가 1727년에 조직한 신앙 단체였다. 형 요한은 2년 뒤인 1729년에 이 단체에 지도자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안수받은 사제이면서 옥스포드의 연구원(조교)이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신앙적 자세가 이 단체의 성격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웨슬리가 이 단체의 지도자가 된 후로부터 신성 클럽 회원들에게는 규clr쟁이(Methodist)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감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처음에 비난과 조롱의 단어가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이 단체가 당시에 유일무이한 단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작은 신앙단체들이 많이 있었다. 성공회의 도덕주의와 의식주의적인 신앙에 만족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소그룹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 성장시켰던 것이다. 신성 클럽도 이러한 소집단 신앙운동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신성 클럽이 웨슬리에 의하여 유명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웨슬리의 회심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경에 웨슬리의 신앙에 일대 전환적인 체험이 있었다. 그는 그의 가슴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짐"을 느꼈으며, 그날 이후부터 “과거와 현재의 상태가 서로 다름”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웨슬리의 회심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학자들 사이데 견해 차이가 있다. 전통적이며 가장 일반적으로는 이 사건이 그의 회심(거듭남) 사건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것이 회심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처음으로 확신을 얻는 체험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 웨슬리가 그날 저녁에 가슴이 뜨거워진 것은 확신케 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웨슬리 자신도 회심 전인 1738년 1월 29일 일기에는 '나는 회심하지 못하였다(I was never myself converted God). 나는 진노의 자식이다(a child of wrath)"라고 하였으나, 1777년 출판된 자신의 전집 (Works)에서는 이를 수정하였다. 즉 회심하지 못하였다"라는 말에 대하여는 '나는 이에 대하여 확실히 모르겠다"고 주를 달았으며. '진노의 자식이다"라는 말에는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주를 달았다 올더스게이트 체험 직후에는 그 체험이 생애 최초의 영적체험인지라 너무 감격적인 표현을 했으리라고 보며, 또 그 당시에 그에게는 아직 확신의 도리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그 체험은 웨슬리의 회심 사건이며. 회심과 동시에 확신이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구원의 확신은 구원과 시간적으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기 때문이다. 구원(회심)과 구원의 확신을 분리한 데서 견해의 차이가 생겼지만, 이 둘을 동시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웨슬리의 회심 사건임과 동시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은 사건이다. 이를 통해 종의 신앙이 아들의 신앙으로 성장한 전환점이었다.

 

웨슬리의 목희 사역 구분

 

올더스게이트에서 가쳤던 그의 복음적인 신앙체험은 그에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체험이 그의 신학 형성과 사역에 끼친 영향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배우고 따르는 웨슬리는 그날 이후부터의 웨슬리이다. 그날 이전의 웨슬리는 “너희는 이렇게 믿으면 안된다”고 가르쳐 주는 선생일 뿐이었다. 웨슬리 자신도 이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4기로 구분하였으며, 4기부터 즉 1738년 5월 24일의 체험 이후부터 자신의 사역이 대성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 1기 1725년-1729년
이 기간은 두 번의 안수를 받고서 열심으로 사역했으나 대실패였다. 왜냐하면 회개와 신앙을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2기 1729년-1734년
이 기간은 그가 신성 클럽의 지도자로 일하던 때이다. 이때 그는 회개만 설교했지 믿음은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실패한 사역이었다.

제 3기 1734년-1738년
이 기간은 그가 미국에 선교사로 사역하던 때이다. 모라비안 지도자들을 통하여 신앙에 의한 칭의의 도리를 듣고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회의하던 기간이다.

제 4기 1738년 이후
이 기간은 그가 가슴이 뜨거워진 체험 이후부터 죽기까지이다. 그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산 설교를 자신의 뜨거워진 신앙으로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덤불 속의 불처럼 역사하였다. 오순절적인 반응이 그의 청중들로부터 일어났다.

 

온 세계가 나의 교구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부터 그는 불타는 전도자가 되었다. 교회의 담을 넘어 복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는 또한 훌륭한 조직가로서 자신의 신도들을 신도회(30명 정도), 속회 (12-15정 정도), 조 또는 반(5-6명 정도)으로 조적하여 관리, 육성하였다. 그의 노년에는 영국민 30영 중의 한명은 그의 신도회 회원이었을 정도로 그의 사역은 왕성하게 뻗어나갔다. 많은 박해도 받았다. 부랑배와 그를 적대하는 자들로부터 돌맹이. 몽둥이로 수없이 맞았으며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끝까지 걸어갔으며. 마침내 승리의 왕관을 쓰게 되었다 노년에 그는 영국의 성자로 존경을 받는 몸이 되었다. 그는 전도자일 뿐 아니라 교육자, 사회사업가, 성경주석가, 조직가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웨슬리의 주요사상

 

구원론 중심의 신학

 

웨슬리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며, 구원론의 핵심은 성결(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일찌기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은 가톨릭과 구원의 방법에 관하여 투쟁하였다. 가톨릭의 선행과 공로에 의한 구원교리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과 은총으로서만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결국 종교개혁에 승리하였으며. 오늘의 개신교회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도적으로는 증교개혁에 성공하였을지라도 신학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구원의 방법을 가지고 투쟁하다가 보니 구원의 내용과 질에 관해서는 깊이 있는 신학적 작업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교리 즉 침의(Justification)가 그의 신학의 중심이다. 칼빈은 예정론과 함께 예정의 증거로서 중생을 강조하였다. 칭의와 중생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칭의와 중생은 동시적 사건이며 관점만 달리한 초기 구원 사건이다 그 후에 성결이 있어야만 한다. 성결은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현세에서의 정점이요 완성이다. 물론 루터나 칼빈도 성화를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루터에게 성화는 칭의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칭의가 곧 성화이다. 그에게서는 칭의와 성화는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회심동시설이라 한다. 칼빈도 성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성화는 칭의나 중생과 동의어에 지나지 않으며, 특히 중생한 자의 신앙적인 삶의 과정으로서의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즉 점진적 성화만이 강조되고 있다. 웨슬리의 신학은 성결을 핵심으로 하는 구원론이 그 중심이다. 죄인이 칭의되고, 거듭날 뿐 아니라 성결한 신앙의 단계까지 성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칭의와 중생이 제 1차적 변화라면 성결은 제2차적 은총의 체험이요 변화이다. 성결은 현세 구원의 완성이요 궁극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장과 약속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성결의 도리를 간과하였다. 웨슬리는 이것을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방법에 관심을 두었으나 웨슬리는 구원의 내용 즉 깊이와 질에 판심을 두었다. 이점이 개혁자들과 웨슬리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선행은총과 복음적 신인협동설

 

선행은총(Preventing, Prevenient, Preliminary Grace)이란 "~보다 먼저.~에 앞서' 작용하는 은총이다. 그러므로 선행은총이란 ‘보다 먼저 오는 은총’ 즉 우리의 회심 이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은총이다. 성경적 표현으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롬5:8)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싹트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 등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나 선행은총은 어디까지나 넓은 의미의 구원의 시작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구원사건을 일으키는 은총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에 충분한 은총은 되지 못할지라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은총' 이다.
인간이 선행은총에 응답하고 이 은혜를 활용하면 그는 더 높은 은혜의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즉 회개와 칭의(중생)의 은총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이 은혜를 거부하거나 말살해버리면 여전히 자연적 상태에 속한 인간으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 속에 있는 은혜의 불꽃을 돋우어라. 그리하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이 선행은총의 개념은 인간이 구원 얻기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 누구나 선행은총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므로 인간의 멸망의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된다. 은총에 응답하면 구원이요. 은총을 거절하면 멸망이다. 이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자이다 은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협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 조화를 이룩한 것이 바로 복음적 신인협동설(Evangelical Synregism)이다.

 

은총 안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인간이 창조될 때 부여받았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칼빈은 자연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으로 나누어 이해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거기다가 정치적 형상을 하나 더 추가하여 해석하였다. 정치적 형상이란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소유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였기에 당신의 소유인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의 청지기로 부름받았다. 여기에서 분명히 할 점은 아담이 가진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위임받은 통치권을 위임해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만 하는 책임을 자유와 함께 부여받았다.
창조시에 주어진 자유와 잭임은 타락 이후에도 여전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선행은총의 작용 때문이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타락 전후의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연속성이 가능하다. 만약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이 은총에 의해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인간은 타락 전과는 전혀 다른 별종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절대권과 인간의 자유는 마치 상호 대립적인 두 주제인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웨슬리 신학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본주의 신학으로 매도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웨슬리 신학에 대한 전적인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절대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위임이라는 사상으로 조화를 이룩하고 있다. 웨슬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은총에 의해 주어진 자유이며, 위임에 대한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이다 이는 믿음만으로를 강조하다가 신앙지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개신교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다가 공로사상에 빠질 가톨릭의 위험성을 복음적으로 잘 조화시킨 사상이다.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의 은총만이라는 사상에서 종교개혁자와 일치하지만 인간의 책임성 즉 위임에 대한 응답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가톨적적인 요소를 지닌다. 이 둘이 웨슬리에게서 조화되었다.

 

복음적 신앙체험의 강조

 

한때 웨슬리의 신학이 단순한 경험주의 신학이라고만 이해되기도 하였듯이 웨슬리 신학은 경험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경험주의만은 아니다. 웨슬리의 체험강조는 그 자신의 영적 체험으로부터 기인한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자신의 가슴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짐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긴 신앙적 갈등에서 해방되었다. 이리하여 경험에 대한 강조는 그의 신학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영국성공회의 의식주의, 형식주의 신학에 대하여 웨슬리는 '성령에 의한 경험'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성경을 전통과 이성으로 해석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진리임이 경험으로 확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가 발견한 진리를 증명하지만 경험 자체가 진리의 근원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경험은 반드시 성령에 의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웨슬리가 강조하는 경험은 슐라이에르마허나 존 로크의 경험론과는 구분해야한다. 술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기초를 경험에 두고서 감각적 경험을 중요시했으나 웨슬리는 성령에 의한 초월적 경험을 강조했다. 또한 웨슬리의 경험이해는 로크의 인식론적 경험주의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구속적 은총에 호응하는 것으로서의 경험이다. 이것은 인격적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맺는 생명적 경험을 의미한다.

 

은총 안에서 낙관주의

 

타락 이후의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 웨슬리는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 되고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인간은 ‘자연인(Natural Man)'이라 한다. 자연인 개념은 웨슬리의 인간론에서 특이한 사상이다. 자연인은 완전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영적으로 수면상태에 있으며, 선악에 대한 분별력도 없다. 그의 의지는 악을 선택하는 의지이며, 그는 사망의 죄책을 지니고 있으며, 진노의 자식이요 죄의 종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자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모든 죄인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은혜가 죄인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웨슬리가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안에서의 희망이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인간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에 기초한 낙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웨슬리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인간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지금은 비록 죄인이지만 그에게도 구원의 은총은 역사하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단순히 죄를 용서하고(칭의), 거듭나게 하며(중생),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실 뿐만(양자)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거룩(성결)한 백성까지 이르게 한다. 이처럼 은총 안에서는 죄인에게도 희망이 있다. 이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죄와 악, 마귀의 세력을 생각하면 비관적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 안에서는 이 세상도 변화될 수 있으며,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주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은총의 역사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낙관주의적인 신앙이 웨슬리 신학의 한 특징이다.

 

선교지향적 신학

 

웨슬리의 신학을 ‘산 신학(Living Theology)'이라고 할 때 그 뜻은 선교현장의 신학, 구령의 신학, 삶을 변화시키는 신학이다. 이는 서재의 신학 또는 학문을 위한 신학과 대비되는 용어이다. 기독교회는 오순절 때부터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설교에 진력해오고 있다. 기독교 선교역사 가운데 웨슬리의 선교적 가세와 활동은 우뚝 솟아 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온 세계는 내 교구이다'라는 말은 그의 선교의 비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웨슬리는 가슴에 불을 품은 전도자요. 동시에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은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에 직결된'산 신학' 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는 칼빈주의의 제한적 속죄설과 예정른과는 대조된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와는 달리 무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믿는 모든 자의 구원을 주장했다. 이러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그의 구령열과 선교에 추진력이 되었다.

 

확신의 교리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는 웨슬리가 선교 초기부터 강조한 것 증의 하나였으며, 많은 신학자들은 웨슬리 신학이 기독교에 크게 공헌한 것 중의 하나로서 성화론과 확신의 교리를 들고 있다.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는 웨슬리 자신의 신앙체험에 의해 분명해졌다. '내가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로마 천주교회는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이 구원을 확증한다고 가르쳤다. 즉 성례를 받은 자는 성례 자체가 가진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또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례의 효력은 성례받는 자의 신앙유무에 관계없이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확신의 도리와 연결시켰다. 즉 나의 구원은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또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다(성도의 견인의 교리).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비한 신앙체험에서 구원의 확증을 구하였다. 가톨릭은 확신을 객관화시켰으며, 신비주의자들은 주관화시켰고 칼빈주의는 예정론이라는 철학적 논리에 귀결시켰다.
웨슬리는 이것을 성경에 있는 영의 증거 즉 성령의 직접 증거와 우리 자신의 영의 간접 증거에 기초하여 확신의 도리를 주장하였다. 즉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이러한 증거는 웨슬리 자신의 체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도 체험된 것이다.
웨슬리는 이 증거를 중생할 때 단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결할 때와 그 후에도 일생 동안 지속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성도는 일생 동안 성령에 의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사회적 성결의 강조

 

1744년 옥스포드의 성 매리 교회에서 행한 '성경적 기독교란 설교에서 웨슬리는 기독교를 세 가지 각도로 구분하였다. 즉 먼저는 개인 안에 존재하는 기독교요 다음은 이웃에게 퍼져가는 기독교요 그 다음은 온 세계에 퍼지는 기독교이다. 즉 기독교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성을 가진 종교이다. 기독교의 사회성의 내용과 중요성을 말할 때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다. 기독교를 단지 중교적인 것으로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신학의 핵심인 성결사상도 개인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기독자의 성결을 강조할 때에 늘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변화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 은총에 의하여 기독자는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하며, 이 사회 또한 거룩해지도록 힘써야한다. 웨슬리는 실제로 이를 실천하였다. 그는 그 당시의 제반 사회문제 즉 인구문제, 도시의 팽창과 이농현상, 실직자문제, 세금문제, 부의 축적과 분배, 빈민문제, 노예제도의 철폐, 전쟁포로의 대우문제 등에 대하여 신앙적인 대응을 하였고, 개선과 해결에 관해 노력하였다.
사회윤리에 대한 웨슬리의 사상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보편적 원칙은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잭임 증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증교적인 견해와 사회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양자는 참된 기독교 안에서 하나이다. 그리고 성결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종교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의 최종단계요 목표이다. 그의 성결론은 언제나 마음과 생활의 성결, 개인적, 사회적 성결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그의 응답적 행동의 주된 동기는 종교적이지 사회적이 아니었다. 그는 박애주의자였지만 먼저는 전도자요, 그 다음이 박애주의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오늘날 사회복음주장자들처럼 사회적 구원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개인의 구원과 교회의 정화와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이룩한 전도자였다. 이상이 18세기에 영국을 변화시키고 세계 기독교회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요한 웨슬리의 주요 사상들이다. 그 외에도 그의 사상에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창의적 종합의 자세, 신학의 실용성, 관용정신과 에큐메니칼 정신, 목회의 조직성, 복음과 율법의 조화, 이성과 계시의 관계 등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지면 관계로 다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