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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분트(UBUNTU)
손 중 하
가뭄 속에 농장에 콩을 심었다.
한 구덩이에 콩 네 알을 넣었다. 한 알은 날짐승이 먹고, 한 알은 들짐승이 먹고, 두 알은 둘이 외롭지 않게 서로를 위로하며 잘 자라라고…….
누구나 외롭다. 누구나 힘들다. 다만, 다들 아닌 척하며 살아갈 뿐이다. 삶이 힘들고 외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데 왜 콩을 심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조식(曺植)의 7步詩가 떠올랐을까
煮豆燃豆箕(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울고 있네.
본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리도 급히 삶아대는가
형을 콩대에, 자신을 콩에 비유하여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읊은 시이다. 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렇게 자신을 들볶느냐는 뜻으로 조비는 이 시를 듣자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동생 조식을 살려 주었다고 한다.
어디 옛날의 먼 얘기로만 듯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나라 S그룹의 총수 형제도 재산 문제로 세간에 오르내리는 걸 보면 인간의 욕심은 채워도 채워도 허기진 빈 주머니만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 교과서에 ‘의 좋은 형제’라는 형제간의 우의를 기리는 내용의 글도 있는 걸 보면 꼭 모든 사람이 욕심 주머니만 찬 것만은 아닌가 싶다.
형제란 무엇인가? 권력, 재물은 또 무엇인가? 권력이나 재물 때문에 어떤 형제는 목숨을 내주기도 하고, 어떤 형제는 목숨을 가져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세상사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지 뒤돌아보게 한다.
얼마 전에는 아파트 아래 위층 소음관계로 다투다가 살인까지 불러오는 일이 벌어졌다. 좀 불편한 이웃이라도 그들이 없으면 우리는 외딴집에 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음보다 더 큰 외로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엊그제는 고향에 찾아 갔었다. 그런데 고향마을에 외지 사람이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는데 입구쪽 땅 문제로 소송을 하여 마을 전체의 인간관계를 들먹이게 하고 있었다. 그 인심 좋던 마을이 생긴 이래 이웃끼리 어찌 다툼이 없었겠는가마는, 소송까지 간 일은 없었기에 마을 인심도 세월을 따라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시문명이 찾아 들어 시골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차피 좋든 싫든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 되고, 어울려 살려면 사랑주머니 하나쯤은 옆구리에 차고 다닐 일이다.
요즘, 가뭄뿐 아니라 메르스 때문에 사회전체가 뒤숭숭하다. 이럴 때 메르스 아닌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될지 모를 일이다. 오늘 조간신문에는, 어떤 마을에서는 서울을 갈 경우에는 마을에 신고하고 가고, 올 때는 진단서를 떼 와야 한다는 마을 규약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근처의 k병원에서는 메르스 환자를 치료하다가 메르스에 감염되었다는 간호사의 기사도 며칠을 두고 조간신문에 오르내린다.
어떤 초등학교에서는 메르스로 입원한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나 간호사가 있는가를 조사하는 학교도 있다는 걸 보면 얼마나 메르스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안고 사는 지 짐작이 간다.
이렇게 어려움이 올 때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은 없는가. 어떤 사람은 메르스의 현장에 뛰어들어 본인의 건강보다는 사명감에 충실하고, 어떤 사람은 본인이 메르스에 감염된 줄 알고 미리 관계기관에 연락하여 메르스 차단에 대비하고, 어떤 사람은 메르스에 감염된 것을 인지하고서도 지하철이나 공공장소를 활보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내 자신이 어떤 처신을 하며 살아야할 지 물음표를 던져본다.
‘내가 너를 위하면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고, 너 때문에 나는 두 배로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말이 살며시 떠오른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서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 놓고서 게임 하나를 제안했다.
나무 옆에다가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인류학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과일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서 입 안 가득 과일을 베어 물고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나누어 먹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누구든 1등으로 간 사람에게 모든 과일을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달렸느냐?”라고 묻자 아이들의 입에서 ‘UBUNTU(우분트)’라는 단어가 합창하듯 쏟아졌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였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가 있는 거죠?”
‘UBUNT’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우분트’, 어디를 가나 일 등이 아니면 최고를 따지는 세상이지만 ‘우분트’ 당신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있다.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모두가 함께 했을 때에 더 커지는 달콤한 행복을 느껴 볼 수 있다면…….
당신이 행복하면 당신 주위에 있는 5명이 행복해 한다는 통계가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하는 세상, 가뭄 속에서, 또 메르스 때문에 혼란한 사회에서도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는 상생의 원리를 배워보면 어떨까?
앨빈 토플러는 ‘21세기는 삭힌 맛의 시대’라 했다. 음식이든 정이든 우리 정서는 발효되고 또 발효되어 삭힌 맛에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이어온 민족이 아니던가.
모두가 어렵다. 이 어려운 시기에 잘 발효되어 숙성된 우리의 삶이 우리 모두를 덮어 주었으면 좋겠다.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반짇고리
김 순 길
나는 반짇고리 하나를 가지고 있다. 옛날 처녀들이 결혼할 때 가지고 가던 왕골이나 대나무로 된 번듯한 반짇고리가 아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쓰시던 종이상자로 가로 30cm, 세로 20cm 가량 되는 허름한 바느질 상자이다. 그 안에는 바느질 하는데 필요한 실이며, 바늘, 골무, 가위 등이 들어 있다. 실은 옥양목 이불 호청을 갈아 끼우는데 쓰는 굵은 무명실을 비롯하여 구멍 난 양말이나 내의를 꿰매는데 쓰는 보통 굵기의 실, 명주옷을 꿰매는 비단실도 있다. 검은 옷에 단추를 달 때에 쓰는 검정색 실도 있다. 바늘 굵기도 천에 맞추어 쓰도록 이불 호청을 끼울 때 쓰는 크고 굵은 바늘을 비롯해서, 중간 크기의 바늘, 아주 가늘고 귀가 작은 실 바늘도 있다. 이불 호청을 시치다가 바늘이 잘 안 들어가 검지 끝이 패일까 염려되어 먼저 검지에 끼우고 바느질 하는 골무도 있다. 골무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도 본 적이 있는데 내게 있는 것은 어머님이 손수 천을 두 겹 세 겹으로 겹쳐서 만든 천으로 된 골무이다.
내 나이 팔십이 되고 보니 돋보기를 쓰고도 바늘귀 끼우기가 쉽지 않다. 실 끝을 가다듬어 바늘귀에 넣어 보지만 실은 바늘귀 옆으로 삐진다. 실 끝을 손으로 비비고 또 훑어서 다시 시도하기를 두세 번 반복하다 가까스로 성공한다.
어머니는 장수하여 백수를 사셨다. 어려운 가난에 돋보기도 없이 구순이 넘도록 바늘귀를 꿰어 식구들의 양말을 깁고 헌 옷가지를 꿰매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폭폭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 속 밑바닥부터 아려온다. 그러기에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이십 년이 훌쩍 지났건만 허름한 종이상자 반짇고리는 나에게 어머니의 체취가 베인 소중한 유품으로 남아 있다. 바느질 실은 수수깡 같은 기다란 원목 모양의 패에 감긴 것도 있고 도로래 모양의 패에 감긴 것도 있다. 원래는 실이 타래로 된 것을 양팔을 벌려 두 손에 실을 끼우고 돌리면서 실패에 감아낸다.
오늘은 아들이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자신의 감정처리를 못하고 마구 투덜거린다. 밖에서 사람들과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그 사람은 원래 기본이 안 되어 있어, 한번 골탕을 먹어 봐야 해!”
왕성한 혈기에 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잣대로 재고 상대를 못된 사람으로 단정해버린다. 상대의 잘못을 보고 비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상대의 허물을 보듬는다면 스스로 마음의 평안을 찾지 않을까?
사노라면 참기 어려운 일, 고통스러운 일, 분하고 억울한 일이 수없이 나를 엄습하지만, 결코 내면에 잠재된 착한 마음을 앞세워 묵묵히 참고 대처하다보면 마음의 평안이 내 안으로 찾아들지 않을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할 일이다. 씨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반짇고리를 남기고 떠나셨다. 살아가면서 부끄러운 속살이 보이면 꿰매서 가리고 살고, 바지 길이가 너무 길어 걷는데 철떡 거리면 몸에 맞게 줄여 입어야 하듯이 내 생에 맞는 올바른 길을 찾아 살아야하지 않을까?
어머니는 생전에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혹독한 추위에도 새벽잠을 설치고 일터로 나가셨다. 집으로 돌아 올 때면 치맛자락이 추위에 바싹 얼어붙어 접으면 금방 두 조각으로 찢어질 것 같았다. 철없던 막내딸은 이제야 어머니의 헤진 치맛자락을 손수 꿰매 드려야겠는데 어머니는 안계시고 옆에 반짇고리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행여 내 감정에 혈기를 못 이겨, 나만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실타래가 또 엉키고 풀기 어려운 단단한 매듭이 맺힐까 염려되어, 오늘도 조심조심 살아가라고 실타래를 통해 마음을 전하신다.
삶이란 늘 문제의 연속인 것을......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문제는 쉼 없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뜻하지 않은 병마가 닥치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재난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정한 내일에 대비해서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삶일는지......
어머님이 남겨주신 반짇고리를 부둥켜안고 어머니의 교훈을 되새겨본다.
수국을 심다
유월의 신록은 검푸른 색소를 풍기며 하늘에 닿을 듯 마냥 솟구쳐 오른다. 꽃들도 덩달아 향연에 맞추어 예쁜 얼굴을 내밀고 활짝 웃고 있다. 그중에도 수국은 꽃가게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만개한 모습이다.
꽃을 싫어하는 이가 누가 있으랴마는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나는 13년 전, 아파트 입주와 동시에 출입구 옆 화단에 수국 몇 개비를 심었다. 뿌리가 제대로 난 온전한 꽃묘가 아니었고, 수국나무 원체에서 덧가지 몇 개를 잘라 모래밭에 삽목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현관을 드나들 때나 외출하고 돌아올 때는 으레 맨 먼저 심어 놓은 수국 상태가 궁금하여 들여다보게 된다. 어느 날은 무더운 여름 더위에 수국이 지쳐 잎이 축축 늘어져 있다. 워낙 물을 좋아하는 수국인지라 갈증을 많이 느낀다. 곧장 물을 흠뻑 흡족히 주면 잎은 다시 생기를 찾는다. 때로는 양분이 모자라 모가 비실거리면 비료를 주어 잘 자라게 했다. 마치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가꾸었다. 수국은 정성들여 가꾼 만큼 뿌리를 내리고 튼실하게 잘 자랐다. 삼 년쯤 지났을 무렵 드디어 수국은 진홍색 빛을 띤 청아한 모습으로 꽃이 곱게 피었다.
수국은 칸나나 장미처럼 사치스럽거나 향기가 짙은 것도 아니요, 호박꽃처럼 무디거나 투박하지도 않다. 마치 장미는 사랑의 끈을 놓칠세라 강렬한 향기로 매혹하는 삼십 대 여성이라면, 칸나는 유행에 민감한 사십 대 여성과 흡사하고, 수국은 세련된 지성미 넘치는 오십 대 여성이라고나 할까? 마치 넉넉한 부잣집 맏며느리 인상처럼 청초하면서 고고한 모습이다. 꽃잎들이 옹기종기 다복이 핀 모습은 마치 옛날 대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며, 서로 감싸고 부둥켜안고 사는 화목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꽃을 보면서 이곳을 드나드는 새댁들은 꽃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감탄을 연발한다. “어쩌면 꽃이 이렇게 예쁘데요?”, “이처럼 예쁜 꽃을 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진정어린 찬사를 한다. 나만의 아름다움을 혼자 즐기는 것보다 이곳을 드나드는 많은 주민들이 같이 보고 공유하니 기쁨이 배가 되어 돌아온다.
지난겨울, 나는 13년간 정들었던 집을 옮겼다. 내가 살았던 집은 동화 속에 그려진 예쁜 집처럼 환상적이었다. 인심 좋은 이웃이며 조경도 좋으려니와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안방 덧문을 열면 한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구름이 유유히 떠가고 앞이 확 트인 정경은 넓은 광야를 보는 듯 시원했다. 큰 평수에서 혼자 여섯 해를 살고 있으려니 작은 공간에서 많은 식구들이 북적대며 사는 이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다소 들었다. 더더욱 찬바람이 세게 휘몰아치는 겨울이면 매서운 냉기는 몸과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어 꽁꽁 얼어붙게 했다. 평수를 줄여 혼자 살기에 알맞은 작은 집을 택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날, 옛날 살던 집 정원에 남기고 온 수국이 생각나 찾았다. 한 나무에 가지를 쳐서 삼십 송이 넘는 진분홍빛 수국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온 동네가 꽃으로 뒤덮인 풍경이다. 수국을 뒤로한 채 홀로 빠져나온 내가 옛 두고 온 식구를 상면하듯 반갑고 고맙다. 자연은 정직해서 심는 데로 거둔다는 진리 앞에 새삼 숙연해진다. 사람은 머물다가 떠난 자리가 깨끗해야 한다고 한다. 먼 데 있는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이는 이웃 간에 끈끈한 정으로 오래 남는가 하면, 상대에게 함부로 뱉은 말로 상처가 되어 곪아 터지기도 한다.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볼 일 보고 난 뒤 밑을 덜 닦은 양 구린내 나는 사람도 있다. 옛 속담에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곳에 13년을 사는 동안 수국 네 그루를 남기고 떠났으니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곳을 떠난 아쉬움을 달래면서 작은 위로로 자족해 본다.
무성한 수국 나무에서 덧가지 몇 개를 잘라왔다. 이사한 이곳에 또 수국 묘를 심어 전에 피웠던 수국보다 더 탐스러운 수국 밭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앞선다. 집에 오는 길에 모퉁이 상가에 들려 평소 꽃을 정성껏 가꾸는 언니를 찾았다. 수국 묘를 하나 키워 보라고 주었다. 그 언니는 기쁨이 상기된 모습으로 잘 키워 내년에 꽃을 피워 사진으로 보여 준단다. 그 언니의 하얀 웃음 띤 얼굴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 보인다. 가져온 꽃 묘를 정원에 분홍, 보라, 재래종, 개량종, 꽃 색깔과 꽃 모양 종류별로 섞어서 심었다. 얼마 지나면 수국이 만개하여 이 동네가 황홀한 꽃동네 동산이 되리라는 꿈을 안고 오늘의 지루한 삶에 조그마한 기쁨을 충전해 본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2012) 신인문학상, kimsk3527@hanmail.net
고향의 의미
민 점 영
고향을 생각한다면, 언뜻 머나먼 오지 산골이나 어촌 마을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여기, 내가 아는 작은 다른 이야기가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여러 동호회가 있다. 그 중, 내가 가입한 단체는 테니스 동호회이다. 주말을 중심으로 모이는 그 모임에는 다양한 직종의 다양한 연령층이 활동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 동호인들의 만남이라 부담 없이 동참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끈끈한 인간애가 맺어지고 있다. 여러 사람 가운데 혜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있다. 깔끔한 서울내기답게 매사에 적극적이며 여성스러움을 항상 간직하고 있어 인기가 있다. 그러기에 그녀는 현대적인 감각의 유머를 많이 쓰는 테니스 모임의 귀염둥이이며 멋쟁이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본가는 연희동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그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근처의 E 대학 정치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아보기를 원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두환 대통령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여서 기자들과 시위자의 검문검색 때문에 생활하기가 오히려 불편했노라고 했다.
그는 결혼 전, 대전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고 했다. 다만, 자기 과에 대전에서 온 친구의 아버지가 유성에서 온천을 경영한다기에 막연히 “목욕 한 번 원 없이 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대전에 관한 추억의 전부였다. 그녀는 대전에 와 본적도 없었으며, 더욱이 여기서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조금도 해 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 운명이란 것이 본인의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학창 시절에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앞으로 졸업하면 대덕연구소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냉정하게 고향을 떠나기 싫다며 교제를 끊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늦어버렸다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남편 정 박사는 유성의 원자력 연구소에 주요한 부서의 팀장이란다. 그녀는 가끔, 신문에 실린 남편의 기사를 카카오 톡에 올리기도 한다. 그녀는 명절이나 동창 모임이 있을 때, 더러 서울로 가곤 하나 보다. 하지만 그녀의 생활 터전은 서울이 아닌 대전이 된 것이다.
옛말에 “여자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도 있다. 여자 팔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 비유가 된 듯하다.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꼭 그렇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성은 결혼하면 거의가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가곤 한다. 이에 따라 혜경 씨도 이제 대전 사람이 다 된 것이다. 어느덧 아들이 벌써 군에 갈 정도로 살았으니 제2의 고향이 된 셈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 아들들은 서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더구나 큰 녀석은 지방에서만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서울에 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서울에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 직장 때문에 서울 사람이 된 것이다. 손자들도 덩달아 서울 시민이 되었고,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니 서울 토박이들인 셈이다. 며느리조차도 종로 구청의 터주 대감이 된 지 오래이다.
이즈음에 고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고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내 아이들의 고향은 아라비아의 남부지방 카미스 뮤샤이트가 제2의 고향이 될 것이다. 손자는 독일의 함부르크가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장 배치에 따라 손자의 고향은 또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게 될지 8월이 기다려진다. 아들의 이야기로는 후랑크후르트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몇 번 해외로 돌고나면 퇴직할 때가 된다며 씁쓸하게 말하던 아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무역 진흥공사의 태생적 분위기가 그러할진데 이를 어쩌겠는가.
사람에게 직업은 매우 중요하다. 젊은 날의 순간의 선택이 누군가를 고향에 머물게도 하고 나의 아들처럼 해외를 떠돌게도 한다. 그만큼 2세 3세로 내려갈수록 고향의 의미는 유동적이다. 나에게도 작업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1974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순위고사에 합격하여 정식 발령을 받기 전에 유성중고등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해외취업 통지서를 받고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공군에서 제대하기 전에 사우디아라비아 국방항공성 기상청 레이다 근무자 파견선발시험에 응시하여 시험을 치렀는데 합격통지서가 온 것이었다. 나는 결국, 고향에서 교직의 길을 걷는 대신, 75년 늦가을, 중동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먼 이역 땅에서 생활하다 198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고향이 삶의 터전이 아니라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과 꿈의 실현을 위해 떠나는 이들을 이제 고향은 굳이 잡아두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현대는 글로벌 시대이다. 우리 동포가 해외에 700만 명이 나가 있고 외국인이 금년 1월 기준으로 벌써 177만 명이 넘는 수치로 국내에 거주하고 있으니. 지구촌 시대에 더 이상 좁은 의미의 고향 땅을 고집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향의 봄에 감동하고 고향의 가을을 돌아보려 한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에 얽힌 고향에서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고향은 무채색이다. 어느 한 색깔이 떠오르면 바로 추억의 여울을 따라 다른 색깔로 채워진다. 색의 바뀜에 넋을 놓는 동안 사람들의 가슴에는 그리움의 언어들로 가득 차게 된다. 고향은 편안히 앉아 숨 쉴 수 있는 어머니의 품속이다.
* 경남 산청 출생, 대전고, 한남대 영문학과 졸업. minaziz@naver.com
나의 나무사랑
김 남 신
얼마 전 충남대학교 ‘정심화홀’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 다녀왔다. 음악회의 1부가 끝나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화장실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여러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휴지를 밖에 걸어놓고 미리 필요한 만큼 잘라서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는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장실 앞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손이나 팔에 한참이나 휴지를 둘둘 감아 들고 서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데 저토록 많은 양의 휴지가 필요한 걸까? 누가 더 많은 양의 휴지를 손이나 팔에 감을 수 있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 그게 아니라면 앞 사람에게서 전염이라도 된 듯한 모습들이다. 내 차례가 되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휴지통엔 더 이상 버릴 수 없이 위에까지 꽉 차 있었고 휴지통 뒤 벽 쪽으로도 휴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물이 새는 곳이 있는지 바닥도 흥건해서 발을 디디기조차 거북스러웠다. 이런 휴지통을 볼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휴지통 속에 비스듬히 발을 집어넣어 꾹 밟았다. 이제 우리나라도 전국의 어느 공공시설에 가더라도 각자 휴지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휴지가 잘 비치되어 있다. 가끔, 아주 가끔 작은 휴게소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돈을 주고 휴지를 사서 써야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더 낯설게 느껴질 만큼 우리의 휴지문화는 꽤나 인심이 후하다. 60년 전 쯤에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기리가미(きりかみ)를 쓰는 집은 흔하지 않았던 듯하다. 절취선이 있는 종이 휴지를 그때는 기리가미라 불렀고 지금의 ‘휴지’라는 말은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이렇게 휴지는 귀하신 몸(?)으로 보통은 신문지나 헌 공책 종이를 여러 번 구겨서 뒷일을 볼 때 썼던 것 같다. 또 시골에서는 그것도 귀해서 호박잎 등의 잎이 넓은 채소나 지푸라기로 대부분 볼 일을 처리했었다.
내가 방학이면 시골 외가에 다니러 갔을 때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까? 외가에 갈 때면 부모님은 무거운 신문지, 설탕, 빨래비누 같은 것들을 들려 보냈고, 이런 것들을 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셨던지 증조부모님들은 큰 선물이라도 받으시는 양 좋아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작은 볼 일을 볼 땐 두 칸, 큰 볼일을 볼 땐 세 칸, 뭐 이런 식으로 우리 사 남매에게 휴지 아껴 쓰기를 강요(?) 했다. 어쩌다 이 무언의 불문율을 지키지 않은 것이 들통 나기라도 할라치면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 것은 내 것이니까 아껴야 하고 남의 것이나 공공물건은 내 것 아닌 남의 것이니 내 것보다 더 아껴야 한다.”
지금도 어머니의 말씀은 아버지가 옆에서 해주시는 듯 생생하다. 어디 휴지뿐이랴?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무엇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껴서 썼었다.
물론 60년도 더 지난 일이기에 격세지감이 크다. 그래도 나는 요즈음 쓸데없는(?) 걱정이 생겼다. 나의 지나친 기우일까? 내가 어릴 때처럼, 머지않아 우리나라의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되면 어쩌지? 누군가가 말했다지, 중국 사람들이 휴지를 쓰기 시작하면 전 세계의 산에 있는 나무가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 서울 출생, 《상상의 힘》(2012) 신인문학상, wisemam@hanmail.net.
책으로 마음을 전한다
김 기 태
‘그려’
살아오며 ‘그려’라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66년이 걸린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려’ 라는 말보다는 ‘왜’ 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만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살아가다 보니 직장을 다닐 때 보이지 않던 모습과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려’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고 긍정적인 생각이 앞서는 것은 내 나이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을 해 본다.
주위를 살펴보면 아직도 “아니 니가 나에게?” 하고 서운해 하며 토라지는 모습도 보인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니’가 문제라고 자기중심의 소설을 쓰는 경우다. 이것도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화려했던 지난 날,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나이가 드니 자꾸 허물어져 가는 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두 갈림길에서 내가 자식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전해 주는 방법이 책을 내서 전하는 것이 아버지의 임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물러나야 할 즈음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살아오며 겪은 경험들을 내 자식들에게 전하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인생에서 젊음이 지날 때 밤을 새우며 문학서적을 읽어 본 적도 없고, 가슴을 졸이며 관심을 가져 본 적도 기억이 없다. 직장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의 처세에 관련된 조직 관련 책만 읽었던 것 같다. 그것은 감성적인 우뇌보다는 논리적인 좌뇌를 많이 사용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내 직업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범한 것이 아니고 항상 위험과 만나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쉼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국경일도 일요일도 없었다. 일 년에 명절을 제외한 단 한 번도 휴식 없이 근무해야 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예, 아니오. 하라, 하지 마라.’였다. 이 단어만 사용해도 월급을 받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환경이었다. 전달 방법도 단답형으로 이루어진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을 해도 의사 전달이 잘못되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불필요한 미사여구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5%의 지시와 95%의 확인을 해야 하는 업무가 생활화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내가 살아온 길은 글을 쓸 수 없는 환경을 지닌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퇴직 후 글을 썼다. 용감하게도 지금까지 네 권의 산문집을 냈다. 네 권의 책을 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은 글맛도 알 것 같지만 아직도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다.
세상을 보니 글 보다는 포장된 작가의 이력이 중요하고, 경험을 통해 얻은 올곧은 가치관으로 쓰는 수필은 글쓰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말을 하지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실속보다는 허세에 빠져 구름을 타고 방황하며, 끼리끼리 모여 자기 잘난 맛에 글을 쓰고 있었다. 특히 외계인이 쓰는 말 같은 젊은이들의 언어가 2〜30년 후에는 우리말로 정착할 터인데 우리는 지금 ‘데’와 ‘대’를 가지고 논쟁하며 도토리 키 재기로 우열을 가리고 있었다.
글 쓰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에 빠져 들기도 한다. 남자가 64세를 지나 과년(瓜年)을 넘기면서 나는 세속의 흐름에 따라 문단에 등단할 의사도 없고, 서점에 내 책을 내 놓을 생각도 없다. 스스로 글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쑥스러웠다. 글에 대한 자신감도 부족하고 족보 있는 글 한편 구하려고 노력하는 문학도도 아니었다. 다만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전해 주는 방법이 말로 하는 것 보다는 책으로 엮어 보여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글을 썼다.
이번에 낸 산문집 '그려' 도, 아들이 직장에 들어가서 6년이 지나고, 그 중 3년 6개월이라는 긴 해외근무를 마치고 돌아오기에 이 시기에 맞춰 아들의 위치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처한 방법에 대하여 써본 것이다. 그동안 아들의 성장과정에 맞춰 글로 써 본 것이 이제 4번째이다.
사실 직장인의 최대 고민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이 다를 때 겪는 마음고생이다. 이것을 잘 극복해야 직장 생활이 무덤이 안 된다. 시키는 일을 잘 한다고 좋은 평가를 받을 때는 대개 직장 초년병 시절이다. 과장부터는 시키는 일을 잘 한다고 인정받는 직책이 아니었다. 과장 직급에서 일을 잘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시킨 일을 하고 나면 결과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한다. 결과가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하며, 신속한 처리 과정도 있어야 업무를 추진하면서 제 몫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자기 나름의 노하우도 있어야 하고 색깔도 있어야 좋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봄에 세상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일어 난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물 밑에서 조용하게 이루어지던 일들이 세상 밖으로 튀어 나온 것이다. 지금쯤 로비라는 문제를 가지고 그동안 스스로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내용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수 천 년을 이어 온 관행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타난 한 기업인의 철없는 행동으로 세상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기에 그런 점도 포함시켰다. 기업가는 장사꾼과 다른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기업가 정신이다.
"나는 보장된 삶보다는 도전을 선택할 것이며 생기 없는 고요함보다 성취의 전율을 원하고 위험과 권력자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자랑스럽고 두려움 없이 꿋꿋하게 서리라"
-미국의 기업가 신조
정도를 걸어가려는 이런 마음다짐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아들에게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아들은 이제 자신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며 살아가야 한다. 그 길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살아 온 삶이 아들이 보기에는 구시대라 생각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혹시 칼빈 소총을 가지고 싸웠던 경험으로 현대전에 임하는 군인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내가 50년 전 대학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추천해 준 영국의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였던 클라우드 브리스톨이 쓴 『신념의 마력 The Magic Of Beliveving』이란 책이 살아오며 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오늘의 나를 지탱하게 해 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려』 라는 책도 나폴레옹이 베개 삼아 애지중지 하던 손자병법처럼 아들이 가까이 두고 읽었으면 한다.
내 삶의 56년은 일에 쫒기며 살았지만 퇴직 후 10년은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덤으로 아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다.
절강성의 여명
중국에서는 지인을 찾아가는데 두 시간의 거리면 이웃집에 마실 가는 거리라고 한다. 청주공항에서 1시간 40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눈앞에 다가 왔다.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중에 산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절강성의 중심지인 항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부터 타워 클레인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도시가 살아 있다는 징후이다. 차창가로 보이는 것은 숲과 호수, 넓은 강, 그리고 잘 정리된 도시환경이었다. 길거리를 운행하는 차도 고급스럽다. 우리나라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한 소나타가 이곳에서 시내 택시로 운영되고 있었다. 시내를 주행하고 있는 차들 중에는 억대 이상의 고가 브랜드 차도 보인다. 가로수도 조경이 잘 되어 있고 건물도 환경 친화적이다. 길거리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여유가 있고 옷 입은 모습도 세련되어 보인다..
한국 사람이면 한번쯤은 중국을 다녀 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중국을 찾아간 것은 퇴직을 하고나서 백두산에 간 것이 처음이었다. 10년 전 일인데 당시 그곳은 우리나라의 70년대 초 풍경이었다. 도로도 그렇고 도로 휴게소에 설치된 공중화장실도 수준 이하였다. 특히 백두산 입구에 있는 공중 화장실의 분위기는 교실 같은 큰 곳에 구멍을 여러 개 뚫어 놓고 빈 구멍에 앉아 앞 사람의 궁둥이를 바라보며 볼 일을 봐야 하는 풍경이었다. 마치 제주도에 흑돼지우리에 들어가 볼 일 보는 그런 풍경이었다.
관광객에게 호객하는 현지인을 보면서 우리는 우쭐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돈 천원이면 대단한 금액이었다. 사람에 따라 상품을 구매해 오는 것도 다양했다. 이름은 잊었지만 천원을 주고 배갈 한 병을 샀는데, 마시다 보니 부족하여 다른 사람이 가더니 이번에는 세 병을 사 가지고 왔다. 등산모도 생수 한 병도 천원이었다.
호텔 정문에는 관광객들에게 판매할 깨와 농산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 깨 한 가마만 사오면 여행 경비가 떨어진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중국하면 못 사는 나라, 저가 상품, 짝퉁, 보이스피싱, 매연, 황사 등 이런 안 좋은 모습들을 떠오르게 했다. 이런 이미지가 중국의 모습으로 각인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절강성은 다르다.
절강성은 제주도에서도 한참 아래로 내려가 열대성 몬슨 기후대다. 겨울이라도 20도를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일 년에 200일은 비가 온다고 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많으니 물이 풍부하다. 물이 풍부하니 농사짓기에 편리한 곳이다. 이곳은 쌀을 이모작 한다고 한다. 6월 초인데도 아직 논에는 모를 심고 있지 않았다. 중국은 크게 나누어 양자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진다. 강남에 중국인구의 60%가 살고 있으면서 경제의 중심이고 현대화의 발원이 이곳에서부터 이루어 졌다고 한다.
중국에는 지방정부와 특별시가 30여 개 되는데 절강성은 그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지방정부로 보인다. 면적은 남북한을 합한 면적과 같고 인구는 5천만 명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 있지만 이곳은 80%가 평야지대라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 여유가 있는 곳이다.
경지정리가 잘 된 들판과 개인별 소유하고 있는 큰 집, 풍족한 물과 비옥한 땅이 있으니 농사지을 조건이 잘 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놀라게 하는 것은 들판에 들어 서 있는 농가 주택들이다. 과거에 살았던 찌든 가옥은 어디가고 2층과 3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외형으로 보니 절강성의 농촌 표준주택 같다. 그동안 보아 온 중국의 모습이 아니다.
도심의 발전은 이야기를 안 해도 이해가 가지만. 농촌 풍경은 충격적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절강성 주민의 1인당 평균 소득이 3만 5천불이라고 한다. 우리와 비교해 보면 이해가 가리라 생각한다. 우리보다 한참 소득이 많으면서 부의 형평성도 우리보다 잘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에게도 그늘진 곳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이렇게 살게 해 준 지도자인 등소평을 자기들 조상보다 더 존경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참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고마움을 모르는 민족인지 모른다. 개인적 견해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처럼 위대한 인물이 없었다. 적지인 일본에서도 군신으로 추앙을 하고 세계 해전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알랙산더보다 더 유명한 장군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조용하다. 이순신을 연구하는 사람도 드물고 학회도 일본보다 적다. 만약 우리가 일본 장수를 연구하고 추앙한다면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잘 잘못이야 있겠지만 오늘의 우리나라로 만들어준 분이다. 그 분을 재조명하는 일에 소홀히 한다는 것은 속 좁은 우리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할일 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먹고 살만하니 모두 자기가 잘 났다고 떠드는 꼴이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전형적인 우리민족의 모습이다.
중국의 정강정책 12개 중에서 1순위가 나라의 부강이었다. 국가의 목적은 국민을 잘 살게 하는데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중국의 정책이 고스란히 잘 적용되어 시행된 곳이 이곳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느 곳이든 국가 정책이 고르게 적용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해서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그곳에도 성질이 급하고 고약하다고 믿는 지도자도 있었다. 고약한 지도자의 자식들이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며 그 기업을 공개하지 않고 살아도 그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었다.
항주시의 아파트 가격은 토지는 국유지면서 건물 값으로 거래되는데 강남 시세의 몇 배나 된다는 것에는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이번 여행에서 바라 본 절강성의 발전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세 시간 마실 가는 거리에서,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가면서 바라본 저 넓은 들판과 농촌주택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무릉도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숨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항주의 타워 크레인을 보면서,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항주의 여명은 밝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항주의 시내 택시도 중국차로 바뀔 날이 올 것이다. 그동안 유럽 차에서 일본차로 바뀌더니 지금은 한국 차로 바뀌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 바뀌게 될 것이다. 이런 흐름은 현대자동차만의 고민거리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고민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 다른 중국의 모습을 보기 위해 또 다른 곳을 찾아가 봐야겠다.
로비로 흥한 회사는 로비로 망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업을 운영하지 못한 사람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경영의 도는 인생의 도’라고 했는데, 세상의 이치도 모르면서 기업을 하고, 그 기업을 더 크게 키우려는 욕심으로 인맥을 형성하기 위해 정치인과 만나고,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행동하면서 로비의 달인이라 착각했던 그가 눈앞에 다가 온 큰 장벽 때문에 자살이란 방법을 택하면서, 그가 놓고 간 흔적들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세상에 많은 기업들이 다 그 사람처럼 회사를 운영한 것은 아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다 해서 모두가 그 길을 택한 것도 아니다. 기업을 일군 사람들 중에는 일에 미쳐 살다, 하나씩 성취해 가는 과정을 통해 단단한 회사로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는 ‘왕소금’, '구두쇠' 아니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지독한 사람’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만 믿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융통성이 없고 배려하는 면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성실하고 신용을 중시하고 믿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기업을 쉽게 일군 사람들도 있다. 정권이 교체 될 때 혜성 같이 나타나 급성장하는 회사들이 간혹 보인다. 가지고 있는 기업이 위험하다 하는데 더 큰 회사를 사들이는 회사도 봤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데 회사는 더 몸집이 커져 가는 경우인 것이다. 이런 회사들이 얼마 안 가서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껍데기만 남은 회사는 국가에서 책임지라 하고 자기는 알맹이만 빼 먹고 뱃속을 채운다. 이런 수법들이 성공하면서 전형적인 로비로 운영되던 회사들이 걸어가는 수순이 되었다. 로비를 등에 업고 회사를 알거지로 만들고, 돈만 챙겨 달아난 자가 세상의 도마 위에 오르지 않게 얼굴을 바꿔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보게 된다. 그 매력 때문에 로비의 마력에 빠져 드는가 보다.
오래 전에 로비의 달인이라는 고수를 만난 적이 있다. 처세부터가 남달랐다. 그 분은 사장으로 있으면서 월급이 없었다는 풍문이었다. 사무실과 차량은 지원 받았지만 그 분에게는 월급이 없었다. 그는 공사를 수주하여 회사에 가져오면서 공사금액의 일정 비율을 성공불로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 돈으로 로비하고 자신의 수입으로 취득한 것이다. 그분은 손님을 만날 때부터 남달랐다. 손님을 만나러 갈 때 목욕을 하고, 내복과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까지 갖춰 정갈하게 차려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용모에 자신이 있을 때 상대를 만나러 갔다. 손님을 만나고 돌아오면 다시 목욕을 하고, 모든 옷을 새 것으로 갈아입고 구두까지 바꿔 신고 거울 앞에서 점검하고 나서 두 번째 손님을 만나러 갔다. 하루에 만나는 사람 수에 따라 의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운영하던 회사도 오래가지 못했다.
또 한 예는, 기업을 운영할 때 가장 큰 무기는 고급 정보를 가지는 것이다. 지방의 관리 책임자도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돈을 주지 않고도 로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고급 정보를 보유하기 위해서 힘 있는 곳에 계속 줄을 이어 활용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로비의 다양성을 말해 주는 예이지만 능력에 따라 그 방법을 찾아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런 길이 로비스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번에 일어난 S회장의 로비문건을 보면 이해 못할 부분이 많다. 기업가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는 공짜가 없다는 것이고,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는 싸움도 하지 않는다.
S 회장이 사용한 로비 금액은 이미 그 때 뇌물을 주고받은 시점에서 정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는 싸움을 거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지는 싸움이 아니라 패가망신하는 싸움을 건 것이다. 이번 행동으로 그에게 돌아갈 이익은 한 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억울해서 이익도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한 한풀이었을까? 그렇다면 정말 우둔한 기업가이다. 가족도 살려야 하고 회사도 살려야 했는데 말이다.
기업가들이 화사를 운영하면서 비자금 내지 뇌물에 관련된 서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보편적으로 문제가 해결이 되면 사장이 보는 데서 문건을 회수하여 파쇄기에 넣어 분쇄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회사 내 감사실을 통해 임원들의 노트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있는 지 없는 지 확인하는 것이 정상적인 업무 스타일인 것이다. 그런데 비밀 장부를 보면 언제 어느 때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서류를 아주 오래 전부터 신주단지 모시듯 가지고 있었다는데 의구심이 든다. 그 서류가 자신을 방어해 줄 무기로 생각했다면 '기업가 신조'의 첫 째 줄도 못 읽어본 사람이다.
사실, 그가 가지고 있던 회사는 온전한 회사가 없었다고 본다. 내가 살고 있는 인근에서 고향에서 부터 키운 건설회사로 지은 아파트가 있었다. 그 아파트가 분양이 안 되어 직원들에게 팔았다. 이런 경우는 건설회사에서 부도가 나기 일보 직전에 나타나는 말기 현상이다. 그런 회사가 자기 회사보다 더 큰 회사를 인수하였다. 덩치는 컸지만 그 회사도 부도났던 회사였으니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회사였을 것이다.
이번 사고가 터지니 하노이에 있는 랜드마크 72 깽남 건물이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매각하면 1조원을 받을 수 있고 그 중 5천억 정도는 본사에 입금 되어 회사 회생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 하는데 그 말마저 믿기지가 않는다.
이 건물의 준공이 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나고 1년이 지나서 준공이 되었다. 만약 준공이 1년 일찍 되었더라면 아마 하노이에서 제일 높은 랜드마크 72는 대박이 났을 것이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공실률이 50%나 된다는데 건물을 유지하는데도 문제점이 많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회사들은 항상 위태위태하여 불안했다. 로비로 회사를 운영하지 못하면 쓰러지는 그런 허약한 재무구조를 가진 회사들이었다. 그가 마지막 회견을 할 때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이 ‘억울하다’고 했다. 자신이 살아온 길을 반성도 안하고 이 일이 터지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지 예측도 못하고, 가는 날까지 남을 탓하다 갔다. 그 눈물과 자살을 믿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를 마치 ‘투사’ 대하듯 소설을 쓰고 있다. 자신들도 경험 해 봄직한 어투로 “그랬다더라. 그랬을 것이다”라는 추측으로 세상을 흔들고 있다. 거기에 덩달아 국민들도 널을 뛴다.
이번 기회에 S회장과 같은 스타일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으면 한다. 이런 경우를 보면서 행여나 로비로 회사를 키울 생각을 접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로비로 흥한 회사는 로비로 망한다.” 라는 말은 진리이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밥로스, 달림이, 토목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마을 촌장,
저서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등, blog.daum.net/ondong
다세대 주택
권 예 자
이번 시의 주제는 빈집이다. 그냥 시를 한 편 쓰라고 하면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것 중에서 깊 이 생각하고 다듬어 시를 쓰는데, 주제를 미리 받아서 쓰는 건 나처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동안 내가 본 폐가와 사진 속 이미지들을 비교해도 신통한 생각은 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표현한 빈집이나 폐가는 몸에서 정신이 빠져나간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 되었거나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추억이 들어 있다.
치매환자, 임종을 앞둔 노인, 정신이상자, 그곳을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 등이다. 어쩌면 그렇게 좋은 시들을 썼는지 감탄을 하며 그 솜씨가 정말 부러웠다. 그런데 그분들이 쓴 시를 피해 다른 시를 쓰려하니 능력도 없는 나로선 영 답답하기만 했다.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히게 답답할 때면 나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탄다. 오늘은 정류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마을과 산 그리고 마을 오른쪽 언덕바지에 골조만 완성한 채 여러 해 방치된 듯한 커다란 빌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 시의 배경으로 잡기엔 너무 큰 느낌이었다.
산을 향해 걸어가니 낡은 기와집이 대문을 열어젖히고 나를 부른다. 장마 끝에 웃자란 풀이 마당에 가득한 것이 빈집임을 알려준다. 생각 한 줄기가 번쩍 스쳐간다. 그렇다. 나는 폐가를 어째서 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을까? 사람에게는 버려진 폐가이지만, 다른 곤충이나 식물에게는 ‘버려짐’ 그 자체만으로 낙원도 될 수 있는 것을….
그래서 첫 연을 적었다.
언덕 아래 버려진 폐가
버림받은 순간부터 낙원이 되었다
아무도 등기이전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무주택자는 아니다
안으로 들어서니 거미줄이 금줄처럼 늘어져 통행을 방해했다. 방에도 부엌에도 나뭇가지에도 휘장처럼 걸려있다. 마루에 앉아 고개를 숙이니 댓돌 아래로 개미들이 쉴 새 없이 오고간다. 마루와 벽, 방바닥, 석가래 등 보이는 곳마다 다른 곤충과 벌레들로 소리 없이 부산했다. 다리가 많은 돈벌레도 있고 지네도 보인다. 부엌문을 열자 바퀴벌레가 와르르 흩어진다.
거미가 분양받은 곳은
벽과 천장 사이 바람이 잘 통하는 곳
비밀을 좋아하는 개미는
지하실을 개조하여 미궁을 지었다
발 빠른 바퀴벌레는
부엌 나무찬장 아래 새살림을 차렸다
어느 폐가나 그렇듯 마당은 풀들의 천국이다. 작은 꽃들도 지천이다. 찌그러진 기와지붕을 반 넘어 덮은 담쟁이는 촘촘했다, 느슨했다 제멋대로 선을 그으며 너울거린다. 그 모습도 옮겨 적었다.
바람에 날려 온 풀씨도
잔디를 제치고 영역을 넓혔다
담쟁이도 질세라 낡은 기와지붕을
끌어안고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여럿이 어울려 사는데도 집은 한 없이 적막하다. 날씨가 좋으면 햇빛과 어울리고 비가 오면 스스럼없이 없이 비를 맞거나 피하며 불평 없이 사는 그들의 생태가 문득 부러워졌다. 이 집은 버려져 있지만 버려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로움 속에서 각자가 반듯한 질서를 지키는 중이다.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에 슬쩍 인격을 부여해 본다.
적막은 이 집의 터줏대감
안으로 주민들의 소란을 잠재우고
밖으로 해와 달 구름과 계약을 맺고
별에도 친선 사절을 파견한 지 오래다
거래 품목은 향기와 질서 그리고 추억
방송국은 소통채널로 단일화되었다
휘익, 죽은 듯한 고요 속을 바람이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오더니, 안방 문을 열어젖힌다. 먼지가 바람의 꽁무니를 잡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풀잎이 간드러지게 흔들리자 감나무 잎이 후드득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생각해보니 바람은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근황을 살피고 소식을 주고받는 전령사다. 바람이 중간역할을 잘만 해준다면 당분간 이 마을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세로 날고 가로 구르며
이집 저집을 기웃거린 속기사 바람은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단독주택이던 이 집은
이제 다세대 주택이 되었다
분쟁 없는 다문화 마을이 되었다
그래, 이 다세대 주택에도 홈페이지 하나는 만들어줘야지. 지금이 인터넷시대인데. 그래야 기록도 남기고 더 긴밀하게 소통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렇게 간신히 마무리를 해놓고 제목을 곰곰이 생각했다.
다세대주택으로 할까? 다가구주택으로 할까? 한 건물에 여럿이 어울려 사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각 세대가 분양을 받고 주인이 되는 공동주택 개념인 다세대 주택과 소유주가 하나인 단독주택으로 여러 가구가 사는 다가구 주택은 독립적인 면에서 좀 다른 것 같아서 ‘다세대 주택’으로 정했다.
마지막 한 행은 나의 소망이다. 분쟁 없는 마을, 나라, 세상이 지구상에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인간은 곤충이나 식물보다 우월하니 하자고하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언덕아래 낙원을 떠났다. 시 한 편을 가슴에 끌어안고.
* 대전 출생. 수필《창작수필》, 시《문학저널》등단, 수필집『내안의 피에타』,『봄비, 꽃잠 깨다』, 시집『숲이 나를 보고』등,
예술문화상(문학부문), 창작수필 동인문학상, 옥로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bombi42@hanmail.net
룸바의 나라, 쿠바의 봄은 오는가
강 명 수
카리브 해에 위치한 중남미의 섬나라 쿠바(Cuba), 이념도 다르지만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먼 나라였다. 미국의 남부 댈러스(Dallas)에서 환승하여 멕시코 유카탄 반도 캔쿤(Cancun)에 도착하니 저녁을 넘어 어느덧 밤 시간이었다.
다음 날 오후, 쿠바나 항공으로 다시 옮겨 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쿠바가 중미국가 중에서 그래도 가장 귀에 익은 나라인 것은 과거 어린 시절 익히 들었던 냉전의 아이콘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쿠바의 빛나는 수많은 아이콘인 시가(Tobacco), 럼주(Rum), 카리브해(Caribbean Sea), 쿠바의 음악, 미술보다도 사회주의 국가라는 정치적인 것이 더 사로잡은 것은 안타깝게도 기억의 습작이었다.
당시, “정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국민이 무언가를 먼저 해보자.”는 정치적 수사로 등장한 젊은 대통령 케네디에게 맞장을 뜨려했던 국가가 바로 쿠바였다. 미사일을 미국 남부 플로리다의 코앞에 갖다 대고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당시, 케네디가 소련서기장 흐루시초프를 굴복시키지 않았다면 쿠바의 작지만 단단한 행동대장 역할은 오래 갔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저런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종주국의 원조나 지원 명맥이 끊어지니 쿠바의 마르크스이념에 의한 평등한 유토피아 건설 실험(?)은 사뭇 어려워졌다는 것을 직접 가보니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이 1959년 무장혁명을 한 사회주의자 카스트로와 아르헨티나 의대생 출신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조직에 의해 붕괴되었고, 카스트로 1인 정치로 지금까지 55년간 공산주의 국가로 유지되고 있지만, 공산국가들의 공통사인 경제 산업화 실패와 미국의 테러후원국에 대한 제재 등으로 인한 어려운 경제상황 때문에, 2006년부터 형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로부터 정권을 승계한 라울 카스트로(Raûl Castro)가 미국과 국교 정상화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입국심사는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순조롭고 친절한 여성 심사관들의 미소 속에 이루어졌고, 공항 밖에는 관광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광수입으로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작가 헤밍웨이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명저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는 꼬히마르(Cojimar) 해변과 그의 집필실이 있는 저택이 아마도 서구여행자들에게는 아바나 관광의 0순위로 꼽히지 않을까 싶었다.
아프리카에서의 사냥, 스페인의 투우 그리고 쿠바에서의 낚시와 여성편력 등 이러한 마초적 행동생활과 버무리며 허무주의가 가미된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세계인들을 사로잡았던 그의 문학의 원천이 바로 쿠바였다는 것은 익히 일려졌지만, 실제 그 해변을 가보니 별관심이 없는 듯한 쓸쓸하고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어선의 스크루를 녹여 만든 그의 흉상이 가난한 어촌어귀에 세워져 있고, 그가 자주 들렀다는 20여석의 작은 라 떼레사(La Terraza) 레스토랑은 그런대로 성황이었다. 카리브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구상을 한 것으로 보이는 좌석은 관광용으로 설치해놓았고, 벽면에는 카스트로와 마주하며 웃는 작가 사진과 ‘노인과 바다’의 실제 모델이 되는 어부의 사진 등이 흑백의 빛으로 5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여 소설을 다시 한 번 음미케 했다.
지금도 당시의 모델이었던 어부가 지금 90대 중반으로 생존하여, 가끔 레스토랑에 나온다기에, 오늘 오후에 혹 오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당신의 운수에 달렸다고 하며, 대신 기타 연주에 감미로운 쿠바 노래를 들려주며, CD구입을 은근히 요구하였다.
아바나 시내 관광의 진미는 여러 박물관 못지않게 쿠바음악을 길거리에서 듣는 것이었다.
다큐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 본 주름 잡힌 쿠바의 노 연주자들은 사람이 낼 수 있는 향기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음악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라틴재즈와 함께 또 하나의 쿠바음악의 대표적 장르인 룸바소리꾼((Giganteria)이 아바나 (Havana) 도심인 아르멜 거리를 무려 3시간여 누비며 말레꼰 해안가에 일렁이고 있었다. 아프리카 의식용 음악을 쿠바식 룸바장르로 단순하게 변형시켜 특정한 멜로디 없이, 빠른 드럼비트를 그 유명한 쿠바 타악기와, 때론 희열에 고무되는 듯한 열기와 흐느끼는 듯한 멜로디를 구슬픈 트럼펫으로 연주되는 동안, 장대 다리로 분장한 4m 장신의 다섯 명의 춤꾼들이 보이는 동작은 너무나 황홀했다.
구도심에 있는 필자 숙소근처의 낡은 건물과 무너져 버린 음습하고 거의 빈민굴 같은 골목길도 쿠바의 또 하나의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로 쿠바음악과 소리꾼, 그리고 춤꾼들은 이방인을 사로잡았다. 이후, 이륙전날까지 들었던 라틴재즈 콤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 후예들의 신들린 연주들 여전히 떠남을 아쉽게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바나에서의 여정으로는 느끼기에 부족한 쿠바의 매력은 7일 동안을 머물며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유네스코 지정소인 피나델리오(Pinar del Rio)의 한적한 시골풍광, 카리브해의 코발트 해안선을 가로지르는 하얀 요트, 영원한 최고의 백사장으로 기억될 바라데로(Varadero) 해변, 쿠바인의 영원한 친구라는 체게바라의 유해가 있는 산타글라라(Santa Clara), 살사의 본고장이자 화려한 중남미 화풍의 진수를 보여주는 쿠바 미술의 그 유명한 원색으로 무장한 동화 같은 골목길로 꾸며진 트리니다드(Trinidad)를 지나치며 쿠바의 속살 깊이 들어가 보았다.
21세기의 교통수단 중,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고, 낡고, 더운 기차라 할 수 있는 차 창가에 앉아, 판자 집에서 빨래를 걸다말고 손을 흔드는 다정한 쿠바인들의 검은 손들을 보았다. 나는 그 검은 손에서 쿠바의 어두운 그늘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군 선진 한국의 새로운 도약은 과학 숭배정책 때문이었다. 항공우주학의 최순달 박사, 유전공학자 서정선, 과거 천재 소녀라 불리던 윤송이 같은 과학자들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풍토가 일어나며 한국사회는 이 만큼 온 것이다. 그러나 이념에 의해 이러한 과학 창의력이 말살되고 기업가 정신을 해체시킨 쿠바는 지금, 트리니다드 사탕수수밭을 가로지르는 시속 10km의 증기기관차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영원한 친구라며 쿠바인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체게바라의 인본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도, 쿠바는 지구상에서 실패한 마르크스의 이념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한국사회처럼 과학과 실용을 받아들이는 국가로 새롭게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차창너머로 울라 올라(안녕, 안녕), 원쿡 원쿡(1달러급 쿠바 화폐)을 외치며 바나나를 팔려는 쿠바청년의 애절한 검은 손을 잡았다.
과거 요한 바오로 2세교황이 쿠바에서 신의 존재를 느꼈다는 바람결이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철로 위로 스쳐가기를 간절하게 품어보는 것은 이 섬을 경유하는 여행자 모두의 마음이리라.
* 대전 출생, <충청신문> 논설위원, 예촌문화벤처 대표, 기행수필집 고마코의 설국에서 블랑세의 뉴올리언즈까지(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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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교훈
이 명 년
얼마만인가,
참으로 오래 간만에 기일을 맞아 할아버지 산소에 왔다. 어느덧 나 자신이 할아버지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예전 할아버지의 모습이 역력히 떠오른다.
“얘야 이리와 앉아 보아라!”하시는 무게 있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귓전을 울린다. 과수원 안에 지어진 정자 양각정에 오르시는 모습도 보인다. 그곳은 할아버지의 일상의 공간이기도 했으며 동네 선비들의 사랑방 같은 장소이기도 했다.
글 읽으시는 소리, 또 친구 분들과 담소하시며 흐뭇한 표정으로 “허허”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도 보인다. 학문을 중히 여기시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이후에도 여전히 손에 책을 들고 계시다.
친구 분들이 돌아간 한가한 시간이면 과일나무 하나하나를 자식같이 돌보신다. 나무가 혹여 바람에 꺾여 질까 받혀 주고, 묶어 주며, 부지런히 일하신다.
파란 잎 붉은 열매들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모시옷은 백로가 살짝 내려앉은 모습이다.
여름날 오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만 되면 잘 익은 복숭아를 골라 따신다. 터럭을 깨끗이 씻어서 바구니에 담아 과수원 앞길에 내다놓으신다. 그 앞을 지나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시려는 뜻이시다.
“할아버지 주지 마셔요.” 하며 아까워하는 나를 보고, “너 먹을 것은 나무에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며 웃고 계신다. 만일 “내가 아이들에게 복숭아를 나누어 주지 않으면 어린마음에 복숭아가 먹고 싶어서 무심코 밭에 들어가지 않겠니? 어린 마음에다 도둑마음을 심기우면 안되겠지, 그러면 죄인은 바로 복숭아를 주지 않은 이 할애비가 된단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귓전을 울린다.
할아버지는 지나가는 걸인도 부르시어 “시장할 터인데 이것 좀 먹고 가시오!” 하시며 당신이 잡수실 새참까지 다 내어 놓으신다. 가끔은 집에서 곡식도 들고 나오셔서 “움막에 어린 것들 죽이라도 쑤어 먹이라.”며 건네기도 하신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걸인에게 “어서가, 어린것들 배고파!”하시면서 등을 밀치신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쯤이면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하신다. 사내아이 같이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과수원에 붙어있는 나를 앞세워 발길을 재촉하신다. 그리고는 “계집아이는 혼자 어두운 길 다니는 것이 아니다.”라며 조용히 타이르신다.
길에서 노는 동내 아이들을 보면 집으로 데려와 사랑에 들게 하신다. 때로는 엄한 말씀으로, 때로는 부드러움으로, 옛 성인들의 이야기 들려주시며, 다독이고, 천자문을 일깨워 주신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귀히 여기셨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대소가 스물 네 명의 식구가 어울려 한 가족처럼 살았다. 여산면 교동길 한가운데 집터였다. 여름날, 담장을 감싸고 오른 능수화가 대문 위를 덮고도 남았다. 넓은 타작마당을 지나면 아름다운 정원이 연못 주위로 펼쳐졌고, 처마를 가린 포도, 다래, 으름나무는 누울 자리를 넓혀가며 열매를 주렁주렁 내려놓았다. 그리고 과일 나무 사이로 다양한 꽃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피어 정원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초가지붕이면서도 풍취가 있었던 건물의 안채, 사랑채, 행랑채, 광채의 모양새는 집에 놀러왔던 동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부족함이 없는 남다른 환경에서 자라면서 나는 부러움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야말로 어린 시절을 천방지축으로 보냈던 것이다.
선머슴아처럼 극성스러웠던 나, 연못가에 심겨진 각시복숭아꽃을 꺾으려고 나무에 올랐다가 가지가 찢어지는 바람에 연못에 빠져서 죽을 번한 일도 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무 오르는 것을 즐겼든 나의 관심은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마다 참견하며 질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끝없는 나의 질문이 성가실 텐데도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얼굴에 노기를 나타내지 않으셨다. 사소한 질문에도 일일이 답하시거나, 침묵으로 대신했든 할아버지의 인자하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을에는 담장을 대신하고 있는 탱자나무에 노란 열매가 달린다. 열매는 향기가 있을뿐더러 구슬처럼 굴리며 놀 수 있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기에 탱자를 따기 위해 가시에 수없이 찔렸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사금파리를 모아 영애랑, 청자랑 엄마, 아빠, 소꿉놀이 하던 일, 감나무에 있는 그네를 타고 놀던 일, 마당 한쪽에서 널을 뛰며 놀던 일......
이 모든 것이 엊그제 일인 것 같은데 멈출 줄 모르는 시간의 수레바퀴는 아득한 길을 달려와 버렸다.
삶의 노정 중에 어렵고 힘든 일들이 앞을 가로 막을 때 마다, 나를 붙들어 일으키던 할아버지의 교훈이 있다. 첫째는 ‘정직함이다’. 둘째는 “1원도 소중히 아끼되 인색함은 버려라.”, 셋째로 ‘참을 인(忍))’이다.
교훈 중의 하나인 ‘참을 인’은 나를 지탱해주는 값진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내가 열한 살 무렵이던 6.25 남침과 9.28 수복의 와중이었다. 우리 가족은 밤마다 공비의 출현으로 커다란 감나무 아래 파놓은 방공호에서 밤을 보냈다. 두려워하는 나에게 할아버지께서도 열한 살에 전란을 겪었다고 하시며 옛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 주셨다. 그 이야기는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값진 유산으로 내 삶의 깊은 뿌리가 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참을 인자 다섯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옛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옛날에 두메산골에 선비 부부와 장성한 딸, 이렇게 세 식구가 가난하지만 오순도순 살았단다. 어느 날 먼 친척집에 일이 생겨 선비가 하룻밤을 묵어 오겠다며 집을 비우게 되었다.
외딴집에 남아있던 모녀는 어둠이 내리자 장성한 딸이 “엄마,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내가 아빠 노릇할게!”라고 한다. 딸은 아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리고 상투도 틀어 올렸다. 혹여 남자 없는 집에 도둑이 들까 무섭다면서, 아버지의 커다란 신발도 댓돌에 올려놓고, 엄마 옆에 바짝 누어 잠을 잤단다.
출타했던 선비는 외딴집에 두고 온 가족들이 염려되었다. 일을 서둘러 마치고 걸음을 재촉해서 늦은 밤에 집에 도착했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댓돌 위에 놓인 커다란 사내의 짚신이 보였다.
“이게 웬일이냐!”하며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다. 웬 상투 튼 사내가 자기마누라 옆에 누어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부엌에 내려가 커다란 식칼을 들고 들어와 단칼에 죽이려고 할 때이다. 창 사이로 스며든 달빛에 사방 벽에 커다랗게 써 붙인 ‘참을 인’이 보인다.
“참자, 아니다, 참자, 아니다!” 하며 반복하는 동안 보이는 것이 ‘참을 인’이다, 선비가 “참자, 아니다, 참자, 아니다!” 하는 중얼거림에 그의 아내가 잠을 깨었단다.
상투를 튼 사내가 외간 남자가 아닌 딸임을 본 선비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벽에 붙인 ‘참을 인’이 아니었으면 외동딸을 죽이지 않았겠느냐. 그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참는 다는 것은 생명도 살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동, 서, 남, 북, 벽과 마음 이렇게 다섯 곳에 새겨두어라” 라고 말씀하셨다.
철없던 나의 마음에 오래 간직하라고, 옛이야기로 들려주신 할아버지의 말씀은 나에게 천만금 같은 유산이다. 수만금의 재물보다도 더 값진 양식이 되어, 지난 내 칠십 수년의 삶에 빛으로, 버팀목으로 이어져왔다.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분노도, 화해와 용서로 바꾸는 힘이 되어 내 삶의 중심을 세울 수 있었다. 한편으론 세상을 헤쳐 나가는 잠언이 되었다.
이젠 할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내가 이곳에 서 있다. 할아버지가 가신 그 길을 이제는 내가 가야할 차례이다. 어느덧 생의 마지막 언덕에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늦게나마, 조금이나마 할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보려고, 흉내도 내보고, 안간힘을 써본다. 마지막 생의 언덕을 넘어간 훗날, 여섯 명의 손자 손녀의 초롱초롱한 맑은 눈망울에 담겨질 할미의 모습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까?
산소를 돌아보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로 답하고 계신다.
일흔 여섯 살 학생의 졸업여행
졸업여행이라는 단어가 입에 오르내릴 때부터 마음이 들떴다. 이미 나는 푸른 꿈을 가득 품었던 소녀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린 시간이 바로 오늘이다. 전날, 잠을 설친 나는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서야 눈을 붙였다.
얼마만인가, 제주에 다녀온 지가 십 여 년 전이다. 중학교 동창 여덟 명이 추운 겨울 눈 꽃을 보려고 한라산을 찾았었다. 눈부신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온산을 덮은 백설의 꽃송이 모습이 다이아몬드를 펼쳐 놓은 듯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 황홀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동행했던 두 친구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천국행 열차를 타고 먼저 떠나버렸다. 그 여행이 친구들과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어느 날 부터인지, 내가 즐기던 여행이 시들해졌다. 그저 집 부근에서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 마음의 중심에 자리했던 삶의 즐거움이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긴 시간들, 하룻밤의 꿈으로만 긴 생을 이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고정된 일상의 틀을 깨고 나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나를 일으키고자 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에 진학을 했다. 그렇게 찾은 대학캠퍼스는 벌써 4년이 흘렀다. 이제 스터디 모임의 학우들과 제주로 늦깎이 졸업 여행을 떠난다.
누구도 이해 못할 벅찬 감격이 밀려온다. 비행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본다, 바둑판같이 그려진 논밭, 높푸른 산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 삼년 반 동안 제주에 머물 때 수없이 오고가며 무심히 보았던 풍경들이다. 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일행은 첫코스로 조천읍의 ‘에코랜드’에 갔다. 에코랜드 테마파크는 1800년대 증기기관차인 볼드윈 기종을 모델화하여 영국에서 수제품으로 제작된 링컨 기차로 30만평의 곶자왈 원시림을 기차로 체험하는 테마공원이었다.
입장료가 12,000원이다. 비싼 입장료를 보니 꽤 호기심이 일었다. 양 옆이 시원하게 트여져 있는 볼드윈기관차에 탑승하고 곶자왈을 누빈다. 메인역에서 한 정거장 가면 에코브리지역이다. 기차가 우리를 내려주면 우리는 다음역인 레이크 사이드역까지는 수상데크를 따라서 숲길을 걸었다. 안내자가 약 10분 거리라고 전한다. 앞에 걷는 학우의 잔잔한 노래 가락에 가벼워진 발걸음은 온종일이라도 걷고 싶은 심정이다.
살랑바람을 타고 숨 쉴 때마다 풍기는 산더덕 향기는 무릉도원이다. 맨발로 걷는 에코로드 화산송이 길은 발바닥을 따끔 따끔하게 하여 재미를 더해준다. 레이크사이드역은 예전부터 2만 여 평의 넓은 초지에 말을 길렀다고 한다. 아름다운 호수위에는 수상카페, 물을 이동시키는 풍차, 제주를 표현한 삼다정원의 비경이 더하여 자연원시림의 신비로움이 새롭다. 함께한 모든 이의 입에서 환성이 터진다.
두 번 째 코스로 간 곳은 추억의 테마공원인 ‘선녀와 나무꾼’ 이었다. 공원 이름을 듣는 순간, 옛 설화를 재현해 놓은 공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뜻밖이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실내 상설로 이루어진 제주의 새로운 테마관광지로 오픈한 곳이었다. 1950년에서1980년대까지, 내가 십대일 때 실제로 살았던 우리 삶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재현하고 있었다.
장터, 주막, 군 막사, 달동네마을, 가요콩쿨 무대장 등,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잊혀져가는 옛 모습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만지며, 관찰할 수 있어서 좋다. 더욱이 어릴 적 즐기며 놀았던 팽이치기, 딱지치기, 그네타기, 윷놀이, 널뛰기의 모습에 옛날 동네에서 같이 놀았던 동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둘째 날, 8시에 집합하여 아침식사로 선지해장국을 먹었다. 출발 몇 분 후에 조학우가 핸드폰을 식당에 놓고 오는 해프닝이 일어나 차안이 들썩이기도 했다. 우리는 구좌읍 평대리에 하차하여 ‘비자림’ 걷기를 시작했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된 단일 수종 숲으로 세계최대 규모라고 했다. 천년의 숲이라 불리는 비자나무 군락지엔 오백년에서 팔백년을 넘나드는 비자나무가 2.8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한 아름이 넘는 나무의 장엄한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푸른 나뭇잎이 하늘을 가려 비가 올 때 걸으면 더욱 정취가 새롭다고 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숲길을 한 발 한 발 내 딛을 때마다 숲이 내품는 피톤치드 향기에 피로가 말끔히 가셨다.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가까운 코스가 아닌 먼 코스로 2시간을 넘게 걸을 수 있었다. 비자나무숲은 제주의 보배로 보였다.
이어 성산 일출봉을 돌아 점심은 성산포 ‘바당’이라는 식당에서 갈치조림과 오분자기 뚝배기로 마쳤다. 역시 고등어와 갈치조림, 오분자기 요리는 제주도에서 맛을 봐야 그 싱싱함을 느낄 수 있다는 믿음을 더 해 주었다.
표선과 상선의 중간에 위치한 일출랜드 ‘미천굴’은 시원함으로 일행의 생기를 돋우었다. 천 가지 아름다움을 간직한 동굴이라는 미천굴은 지하의 신비를 가진 학술적 가치가 있는 보고라 한다. ‘런닝 맨’ 촬영지로 더 유명한 오밀조밀한 구성으로 잘 가꾸어진 일출랜드는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절대 자연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제주의 현무암덩어리와 폭포분수로 꾸며진 수변공원, 돌하르방, 맷돌, 연자방아, 절구 등의 제주토속인의 삶에 사용된 도구 전시장은 옛 향토의 호흡이 느껴지는 값진 볼거리였다. 따가운 햇살에 시원한 아이스 케익을 빤다. 길에 걸어놓은 북, 장구를 두드려도 본다. 나이를 잊고, 웃고 떠드는 광경은 새로운 호기심에 빠져 활짝 마음을 연 철없는 어린애들의 모습이다.
성읍 ‘민속마을’로 향했다. 해설사 ‘냉바리’의 입김이 구수하다. 여자가 많아 ‘냉바리’요 남자는 귀해서 ‘왕바리’란다. 남자가 귀한 덕에 한 남자가 여섯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사람도 예전엔 있었단다. 그 마을에는 허리가 아프거나 굽은 사람이 없단다. 그것은 ‘말뼈와 말의 새끼태반’을 여자들이 먹어서라고 한다.
‘허브동산’ ‘족욕 체험’은 피곤한 다리를 쉬게 했고, 쉴 틈 없이 무거운 몸을 지탱해온 발에게 서비스를 하는 시간이었다. 제주 맛 집 ‘포도원’에서 흑돼지구이 저녁 식사 후에는 노래방에도 갔다. 옛 가요의 멋진 가락, 그 흥겨움 속에 하루가 푹 빠져들었다.
셋째 날, 아침 출발시간은 항상 늦어지는 법이다. 7시 30분 집합 예정이었으나 남학우들의 과음 탓에 8시에나 집합했다. 소문난 뛰어난 맛의 ‘성게 미역해장국’으로 아침을 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한림읍에 있는 협재 해수욕장을 찾았다. 옥색 해수와 흰 모래와 조가비가 섞여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백사장, 저 앞에 놓여 있는 비양도가 그림같이 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의 힘으로 하늘을 향해 뛰어 올랐다. 카메라 셔터소리와 함께 색다른 웃음꽃이 해변을 덮었다.
마지막 코스로 찾아 간 곳은 한경면 저지리에 있는 ‘유리의 성’이었다. 입구에는 거대한 와인글라스가 세워져 있었다. 미의 극치를 이루어 바라보는 작품마다 눈이 부시다. 특히 만화경속으로 들어온 듯 착각을 주는 ‘다면경’ 체험관과 ‘거울 방 체험실’은 어떤 미로를 헤매듯 신기하고 즐거웠다. 유리 꽃밭의 노루가족은 장인이 생명을 불어 넣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기념품 매장에 들러 밀감으로 만든 초콜릿 한 상자를 손주 선물로 구입했다. 출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점심은 공항 근처에서 전복죽으로 먹었다.
공항 안, 담배 가게 앞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면세 담배를 사기 위한 사람들이 긴 줄을 잇고 있었다. 흡연자와 금연자가 따로 없었다.
일흔여섯 살 할머니 학생의 졸업여행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짧은 일정으로 섬을 못다 돌아본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일행의 손에 밀려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눈을 붙이자마자 나는 잠시 잠에 빠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소녀가 환한 미소로 역마차를 타고 달린다. 마차에는 공주 옷을 입은 내가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많은 추억을 남긴 제주도로의 젊은 학우들과의 졸업여행은 내 생애 최고의 기쁨이었다. 서둘러 급행열차를 타고 떠난 두 친구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 충남 여산 출생, 한밭대 문학창작과정 수료,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4, echlmn@hanmail.net
유산상속 발표를 듣고
조 영 숙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세가 87세. 할머니의 추도 예배를 마치고 아버지가 유산에 대한 말씀을 처음으로 형제들을 모아놓고 하셨다. 아버지가 생각하기로는 이때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셨나보다. 아버지의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하시고, 해외에 나가 있던 셋째와 넷째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태국에서 해외 건설 일로, 넷째는 필리핀 선교사로 있어 4형제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게다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충영이 아저씨도 함께 했다. 충영이 아저씨는 아버지를 형님처럼, 아버지는 그를 우리 형제 앞에 칭찬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유산 상속에 대해 아저씨가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 며느리들은 배석하지 않고 아들들 앞에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재산은 크게 둘로 분류된다고 하셨다. 첫째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고, 둘째는 자신이 이룬 재산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장남인 형에게 전부 상속한다. 자신이 이룬 재산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포함해 모두 사분지 일로 나눈다. 이 뜻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유산 상속은 없다고 비장한 심정으로 자녀들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제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산은 주는 자의 권리이지 받는 자의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 자리에서 모두 동의를 표했다. 당시 나의 심정은, 자신의 것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서운하다였다. 그런데 형은 동생들이 어머니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화를 내며 책망을 했다. 형 부부는 위층에, 부모님은 아래층에 살면서 형과 형수가 빈 시간에 부모님의 식사를 준비하는 등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형님 부부의 수고에 감사하고, 나름대로 형이 힘들어 할 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하기도 한다. 형의 책망을 듣는 순간, 나의 삶을 반성하는 마음보다 왜 이 순간에 동생들에게 책망을 하나였다. 아버지의 발표에 내가 섭섭했던 것처럼 형도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형은 전화를 걸어 어제 밤 화를 내고 책망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형과 동생의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고 했다.
나는 강릉 고향 집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할머니와 생활하고 4학년 때 서울로 부모님, 형제들과 합류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집들이 새로 지어지고, 길이 넓혀지고, 논이 밭이 되고,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은 없어지고, 살던 사람들이 바뀌었지만 산천은 그대로여서 나는 늘 감사하다.
다른 형제보다도 강릉 고향에 대한 추억은 내가 가장 선명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보자기를 메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하던 등하굣길, 어린 나이에 동네 아이들과 소에게 풀을 먹이던 일. 논 물꼬에서 천렵을 하던 일, 겨울 철 밤에 전등을 들고 사다리를 타면서 참새를 잡던 일, 논 빙판에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던 일, 산등등성이를 오르내리며 토끼몰이를 하던 일, 산비탈에 비료부대 또는 쌀가마니를 타고 눈썰매를 타던 일, 여름에 동네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고 수영하던 일 등은 아름다운 기억이다.
고향이라고 해도 벌초나 성묘를 이유로 급하게 다녀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결혼 30주년을 기념하고 나의 회갑을 기념하여 2012년 봄, 고향집에서 40일 체류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추억을 새롭게 하고 고향을 가까이 알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곳에 머물면서 소금강, 경포호수, 선교장, 허난설헌 생가, 대관령 옛길, 선자령, 울릉도 등 주변 관광지도 방문하고 전어, 가자미, 꽁치 등 해산물과 신선한 채소를 현지에서 구해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집 뒤 샌드파인 골프장 옆길로 난 경포대로 이어진 바우길은 우리 부부의 일상의 산책 코스가 되었다. 더불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4.35km의 경포호수 둘레를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에 자신을 맡기곤 했다. 호숫가로 시비(詩碑)가 있고, 조각품이 있고, 야생화도 있어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주변 친척들을 찾아뵙고, 길거리의 현수막을 보고 도서관 모루에서 이문재 시인의 ‘시, 공감능력, 공적 장소’란 문학 강의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60대 후반 지금에 이르기까지 농사를 짓는 걸환 아저씨 부부와 가까이 하며 이곳이 너무 좋다는 아내의 말에 이곳에 와서 함께 살자는 제안도 받았다. 이곳에 집터도 몇 개 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땅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어디인지도 자세히 모른다. 단지 어렸을 때, 이곳저곳이 우리 땅이란 말을 들은 것 정도다. 동생들은 이곳에서 산 경험이 없으니 거의 모를 것이다.
예전에 우리 부부가 강릉에서 살아볼까 생각할 때에 본 집은 장손의 것이라 안 되고, 강릉에 다른 집터도 있다는 말씀과 원하면 줄 수 있다는 말씀도 아버지와 형에게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우리는 양평을 선택하여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 아내는 나와 관련된 것 중에 강릉이 가장 좋다고 농담 삼아 말하곤 했다. 나로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을 좋아하니 고맙다. 나는 변할 수 있으니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버지의 뜻을 아내에게 전하자 아내도 섭섭해 한다. 자신의 고향보다 강릉을 더 좋아했고 남편이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곳에서 태어났는지 감탄까지 했다. 그런데 강릉에 자신에게 주어진 분깃은 집터 하나도 없다니 이럴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다. 나는 그동안 조상의 추도식에, 벌초와 성묘에 힘닿는 데까지 섬겨왔는데 조상으로부터 받을 나의 몫이 하나도 없다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상한 마음을 아버지나 형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기보다는 유산 문제로 싸움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이 싫었다. 나중에 강릉에서 살라고 격려하던 강릉 걸환 아저씨나 순현이 아버지인 아저씨에게 통화를 하거나 만나 하소연해볼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의 문제를 밖으로 나가 해결할 힘도 없는 그들에게 말한다면 위로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우리 집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그만 두었다. 장손인 형과 동생들이 동일하게 분배받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고향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대지 하나라도 있으면 고향을 생각하고,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동일하겠는가. 고향에 나의 몫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고향 친척도 왠지 멀어지는 것만 같다.
지난 5월 우리 집의 숙원이던 조상들의 산소 이장(移葬)이 있었다. 숲실 산소와 묵박 고개 산소를 파묘하고 묵박 고개 산소 자리에 두 개의 봉분으로 가족 산소를 새롭게 꾸몄다. 이곳에는 조상들의 산소와 앞으로 후손들의 쉴 곳도 준비된 아름다운 가족 공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이 일을 성사했다. 노인의 몸으로 숲실 산소를 오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다하여 산소를 세우는데 열성을 다하셨다. 부모의 산소가 준비되어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하다. 그곳에서 나는 형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소나무에 오른 담쟁이를 제거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수십 년을 자란 소나무가 담쟁이의 공격을 받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들어갈 무덤도 미리 보았다. 그런데 고향에 내 몫이 아무것도 없는 것 때문일까. 죽은 후에 들어갈 자리가 내게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집터라도 있다면 그곳에 집을 짓든, 짓지 아니하든 집을 지을 상상을 하고,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노후를 그곳에서 살든지 아니면 작은 집을 짓고, 1년에 한 두 차례 그곳에 장기간 머물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농촌의 전원생활을 좋아하는 아내는 지금도 그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피부가 벌레나 풀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지만 현재 내가 관여하고 있는 생명의 전화 상담원들, 극동방송 상담위원들, 교회 친밀한 사람들, 그 밖의 친구들도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면 의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좋은 이야기는 말하기 쉽다. 섭섭하거나 속상한 이야기는 언제 하는가가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다. 모처럼 떨어져 지내다가 아버지와 형을 만나는 자리에서 불쑥 유산 상속 문제를 화제로 삼아 섭섭하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지내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제는 할아버지 추도식이 있어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침 셋째도 3년 3개월의 태국 생활을 마치고 함께 자리를 했다. 어제 아버지와 어린이 대공원을 거닐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 이제 아버지는 농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농민으로 인해 받았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당장 의료보험이 8만 원쯤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이미 농지 등이 형 이름으로 명의가 변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말씀 속에 약간의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 때에 나의 섭섭함을 말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고 접었다. 아버지의 청력이 약하고, 추도식도 드리기 전에 근심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나는 상속 문제로 섭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로 인해 형을 미워하거나 부모를 원망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다만 조상을 섬기는 일에 형과 협조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아내의 힘을 빌려야 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다. 강릉을 사랑했던 만큼, 나름대로 조상을 섬기는 일에 성실했던 만큼 아내의 섭섭함을 나는 이해할 수 있고 그에게 무엇이라고 설득할 자신이 없다.
혹시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집터 하나씩이라도 줄 걸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아들에 책망하는 마음이 들까? 전자의 마음이라도 실제로 내게, 그리고 셋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아버지의 손을 떠난 일이며, 이제는 형과 형수의 동생을 배려하는 마음과 자신의 소유를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이미 내 것을 다시 내놓으려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버지가 작은 아들들이 유산 상속 발표를 듣고 힘들어 했던 부분을 이해하고, 형과 형수의 동생 사랑하는 마음과 향후 형제우애와 조상을 섬기고 고향에 애착을 가지는 일에 보탬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막내는 평소에 아버지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므로 형에게 막내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막내가 이런 나의 생각을 알고 섭섭해 할까. 셋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다만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욕심을 부리는 걸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이런 문제로 형제와 불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글샘회> 동인, 양평문협회원, ysc1951@naver.com
한국인과 백주
김 택 중
한국에서 술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천재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의 이야기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는 유화부인을 만날 때 술을 먹이고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게 된다. 고대의 제천행사에서도 음주가무가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술에 대한 기원 역시 그 시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통의식은 엉뚱하게 젊은 시절 여자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실 때 어떻게 하면 한잔 먹여볼까 하고 궁리하였던 것도 알고 보면 오래 동안 내 몸에 흐르는 혈통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구나! 하고 깜작 놀랐다.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때 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적인 발효과정에서 생성된 누룩과 그것을 인위적으로 채취할 수 있기까지 술의 발전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곡주가 대부분이었고 증류주인 소주로 일반화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전 일이다. 따라서 옛날 시인 묵객들이 즐겨 마시던 술은 현재의 백주와 같은 증류주가 아닌 곡주인 양조주이다. 이러한 내용은 『배갈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에서 최학 교수는 중국의 최고의 시인 두보나 이백은 현재 우리가 마시는 중국의 최고급 백주는 맛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한국의 증류주 소주(燒酒)는 원나라 때 몽고의 칭기즈칸의 원정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증류방법이 전래된 것으로 본다. 아랍에서 ‘아’와 터키의 술인 ‘라크’의 합성어로 ‘아라키주’에서 소주의 또 다른 이름 아랭이, 아래기, 아랑주, 알랑주 등으로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증류주의 기원은 고려 중기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발효 곡주보다 더 독한 소주는 양조기술의 발달로 얻어진 결과이니 만큼 그 양도 적어서 우리에게 아주 귀한 약술이었다.
소주을 얻기 위해서는 밑술에 해당하는 발효 양조주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양조주를 얻기 위해서는 곡식을 사용해야 하고, 그것이 발효과정을 거쳐 분량이 3분의 1로 줄어 곡주가 생산된다. 양곡주을 증류해서 소주로 만드는데 또 4분의 1정도 분량의 생산에 줄어든다. 따라서 한국에서 과거 금주령이 내려진 것은 과한 음주로 인한 피해도 있지만 궁극적으론 곡물의 낭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뒤의 피해에 대해서 기록을 보면, 고려말기에는 소주가 여염에 먼저 있었던 것 같다. 고려 말께 무신 김 진(金縝)이 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는다고 경상도에 와 있었는데, 왜적 막을 생각은 않고 매일 같이 명기(名妓)들을 갈아가며 참모들과 소주를 마시고 밤낮으로 취해 지내는 바람에, 부하나 백성들이 '소주도(燒酒徒)'라고 비꼬았다는데 때마침 합포에 왜적이 들어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자 병사들이 “'소주도'를 시켜 칠 일이지 우리 야......” 하고 방관하는 바람에 소주도들이 앞서서 달아났다 한다고 『고려사(高麗史)』열전에 기록되어 있다.(이규태,『한국인의 밥상문화1』, 신원문화사, 2000)
조선시대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금주령이 여러 차례 내려진 기록이 있다. 근신과 절제를 위해 금주령이 내려진 것은 백성을 위한 애민사상에 의한 결과이다.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국가의 재정 절약의 목적으로 “1392년 조선개국 금주령을 내린 것을 비롯하여 여러 대에 걸쳐 빈번하게 시행되었다. 특히, 태종 때는 거의 매년 내려졌고, 성종과 연산군 때도 자주 행하여졌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금주령은 거의 없게 되었으나, 1758년(영조 34)에는 큰 흉작으로 궁중의 제사에도 술 대신 차를 쓰는 등 엄격한 금주령이 발표되었고, 왕이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에게 금주윤음(禁酒綸音)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금주 법령은 주로 가뭄이 심한 봄·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보통은 서울을 중심으로 결정되어 발표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1년 기록을 보면 “소주는 비록 낭비한다고 하나 가난한 자는 스스로 할 수 없고”에서 소주를 즐기는 대상은 일반 서민들이 아닌 양반이나 사대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금주령이 발표된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허용된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국가의 제향, 사신 접대, 그리고 서민들의 결혼과 노인이나 환자의 약으로 쓰이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빈민들의 생계용 양조행위도 묵인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이후 정부의 주세 정책인 ‘양곡관리법’ 등에 의해 유명 전통소주와 지역마다 존재하던 토속주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국가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법으로 금지하면서 마을마다 획일화된 일본식 양조장들이 생겨나면서 전통적으로 전해 오던 집안의 명주들은 그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또 증류주인 소주 같은 경우는 각도마다 하나 씩 제조업체를 선정하여 소주를 만들게 하면서부터 그 다양성은 사라지게 된다. 이때부터 생겨난 소주회사들은 경제성으로 인해 회사마다 주정을 만들고, 그 주정에 물을 석어 희석하는 희석식 소주가 확산되면서 그 맛과 향은 거의 비슷한 최근에 즐겨 마시는 소주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회사에서는 희석 방법을 달리하여 조금씩 그들만의 특징이 있는 희석식 소주가 등장하게 되었다.
국가 주도의 정책상 우리의 전통주가 증류주가 점차 사라져 가는 동안 서양의 증류주인 위스키가 최고급 술로 인정을 받아 현재까지도 고급술이며 비싼 술은 모두 서양의 위스키라고 인식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지에서도 한국의 전통소주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몇몇 집안에서 가전비법을 전수 받아 비밀스럽게 증류주를 제조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밀주로만 취급되던 명주들이 1982년에 이르러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인식의 변화로 전통주 발굴이 이루어지고 제조자가 무형문화제로 지정되면서 각 지역에 있는 전통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그 맥을 잇게 되었다. ‘안동소주’, ‘문배주’, ‘홍주’, ‘초화주’, ‘불로주’ ‘소곡주’, 등이 그것이다. 이들 술은 대부분 쌀을 주원료로 발효하여 그것을 증류한 술이다.
‘안동소주’는 막걸리로 증류한 것이 아니라 청주를 증류하여 빚은 술로 깊은 맛과 향을 간직하고 있다. 제조 방식을 기존에 불로 가열하여 증류하던 방식이 아닌 중탕방식을 이용하여 화근 내와 누룩 냄새 등을 없애 많은 애주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술이다. 최근 영국의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동소주를 선물하면서 더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알코올 함량은 45%이며 요즘에 대중들을 겨냥한 도수가 낮은 술도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 연속해서 세계 3대 주류품평회에서 안동소주가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류박람회에서 대상인 더블골드메달을 받았고, 올해는 벨기에 몽드셀렉션에서 그랜드골드메달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더욱이 제조자 박 명인의 자랑은 같이 출품된 세계 유수의 경쟁 주들이 거의 10년 또는 그 이상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명인 안동소주는 증류까지 한 달간의 1, 2차 발효기간과 증류 후 100일간의 숙성기간을 거치기만 하면 완성되면서도 그 맛과 향은 어느 위스키류에 못지않다는 데 있다.(문화일보 2014년 9월)
‘문배주’는 1986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리의 증류주 대부분이 쌀이 주원료인데 비해 4-5월에 밀, 누룩, 물을 좁쌀 밥에 섞어서 밑술을 담그고 이후 수수밥으로 덧술을 하여 발효 시킨 것을 증류하여 1년간 숙성시켜 저장한다. 알코올 함량이 40%인 술이다.
‘홍주’는 쌀과 보리를 7대 3정도 섞어서 밥을 지어 그 밥을 누룩과 섞어서 항아리에 넣고 온돌에서 숙성시킨다. 숙성된 밑술을 소주 고리로 증류하고 난 뒤 지초를 넣으면 선홍색의 홍주가 된다. 알코올 함량은 40% 정도이다. 이 외 많은 지역에 지방문화재로 진정된 술들이 다수 존재한다.
전통소주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맥을 이어가는 8∼90년대 들어 저가의 중국 백주들이 중화음식점에서 한국 서민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서민들의 경제 사정을 반영한 백주들이 ‘독고리’라는 통칭으로 사랑을 받았는데 그 대부분이 알코올이 40도가 넘는 값싼 술들이었다. 그 중에 ‘이과두주’는 중화음식점에서 탕수육을 시키면 공짜로 가져다 준 술이기도 하다. 아직도 독고리(독한소주) 작은 파란유리병에 빨간 플라스틱 뚜껑 속에 속 마개가 어릴 때 본 농약병 마개와 너무 닮은 술이다. 알코올은 너무도 강해 코가 뻥 뚫릴 정도이며 감자가 발효된 냄새가 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는, 젊음 하나로 배달해준 탕수육과 함께 그 술을 먹고 기분 좋게 술에 취해 끊임없이 각자의 주장을 하던 기억이 난다.
중국과의 국교가 이루어지고 난 뒤, 중국의 술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은 최근 10여년 전 부터이다. 특히 한국의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았던 산동지방의 특산물인 ‘공부가주(孔府家酒)’ 같은 술이 한국인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술이다.
산동은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한국과 가깝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자님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을 터이고 공자님 고향에서 공자님의 후손들이 만든 술이 ‘공부가주’라고 생각하면 아주 특별한 술로 당연히 한국인들이 좋아 할 수밖에 없다. 공자님께서도 가끔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기록도 나오니 공자님이 마시던 술이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손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관심이 있어서 여러 자료를 찾아 본 결과 공자님과 공부가주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공자님과 관련된 것은 고향이 같다는 것뿐이고 이름만 공부가주이다. 한국의 관광객들이 공부가주를 찾으니 그 비슷하게 이름을 붙인 가짜 ‘공보가주’도 요즘 한국에 수입되어 마트에 버젓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공자님을 존경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요즘 최고를 지향하는 중국의 백주들이 한국에 소개되고, 일부이지만 중국음식점에서 고가의 백주 소비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수정방(水井坊)’, ‘국교(國窖)1573’, ‘우량예(五粮液)’ 등이 그것이다. 과거 백주의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디자인에서 요즘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걸맞게 최고급 위스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세련된 모습이다.
‘수정방’은 2000년에 들어서 출시된 백주로 단시간 내 광고가 잘 된 술 중 하나이다. 특히 전흥대곡주에서 수정방으로 그 명칭을 바꿔 전격적으로 발표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디자인에서 붓글씨로 된 ‘수정방’이라는 이름을 빼고는 중국의 전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확 바뀐 디자인이다. 이런 고가의 술이 서울에 강남의 최고급 중국음식점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변화에 성공한 백주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백주 중 ‘국교1573’은 수정방이나 우량예보다 중국 현지에서는 술꾼이라면 모른 사람이 없다지만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백주이다. ‘국교1573’이 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백주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이름이 국교라는 것이 국이 주는 묘한 뉘앙스와 숫자가 주는 의미로 국가와의 교류, 국가를 세운 년도 등 잘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의 백주이다. 그 덕분인지 내가 알고 있는 한국에서 유명한 이 원장님이 술자리에서 몇 번이나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분의 직업이 한의사라서 건강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술, 특히 최고급 술이면서 저녁에 마음껏 마신 뒤에도 아침에 숙취가 없는 깨끗한 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애주가이다. 한국의 술 문화는 1차에 그치지 않고 3차까지 계속 된다. 모임을 한 후 1차, 2차를 거쳐 술인지 물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3차에 그 술을 지인에게 마시라고 줘버리고 난 후, 중국 백주에 관심을 가지면서 ‘국교1573’이 어떤 술인지를 알게 되었다. 석 달 열흘 간 배 아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교1573’은 1573년 발견된 중국 최고의 ‘술구덩이’라는 의미로 고급 백주 중에서 가장 낯선 이름의 술이 바로 ‘국교1573’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 소개된 중국 백주 중 ‘우량예’는 보다 편안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술이다. 다섯 가지의 곡물로 만들었다는 우량예, 중국 사람들이나 한국 사람들 모두 이름에서 아주 친근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친근하다고 하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술은 아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렵고 까다로운 술이 우량예 일 것이다. 이름만큼 친하고 가볍게 그 좋은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거의 한 달 용돈을 쏟아 부어야 맛볼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술 중의 하나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좋은 술을 구하면 우리는 파티를 한다. 물론 한·중백문화교류협회에 참여하고 관심이 있는 분들이 모인다. 그런데 술꾼들 중에 백주를 잘 마시고 그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전국적으로 백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는 한·중백중문화교류협회는 학계는 물론 애주가를 포함한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고 있다. 서로 소통하는 좋은 분들이 만나면 모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음식점에는 술을 가지고 갈 수 없고, 그곳에서 술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 회장님이신 최 교수님과 몇몇이서 20여 년 전부터 단골로 다니는 ‘태화장’으로 간다. 필자 역시 약혼식을 태화장에서 한 인연으로 그동안 꾸준히 찾고 있는 단골집 중의 하나이다. 아마 그곳에서 중국의 17대 명주 중 대부분을 마신 곳이기도 하다. 만일 그곳에서 판매하는 술을 마시려면 아무리 가격을 싸게 해도 한 병당 2∼30만원은 족히 넘을 것이고, 요리 값을 포함하면 100만원이 넘게 나올 것이 뻔한 일이다. 어찌되었든 그만한 장소가 있다는 것 또한 크나큰 행운일 것이다.
회장님 이하 회원님들 대부분은 중국백주 중 17대 명주는 대부분 다 맛을 보셨을 것이고, 그 외에 중국전역에 있는 셀 수없는 많은 술 또한 보통의 중국 사람들보다 더 많이 마셔보았을 것이라고 나름 생각한다.
그래서 백주가 좋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좋은 점을 하나하나 열거한다면 백주는 동양인의 체질에 맞는 술이다. 마시면 빨리 취하고 빨리 깬다. 술이 깰 때 머리가 덜 아프다. 마지막으로 백주가 생산되는 대부분의 고장에 중국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마셨던 지역의 술이다. 또 문학작품 속에서도 그곳의 술을 이야기 하고 즐긴다는데 우리에게 더 흥미를 더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백주가 대중화 되는 것에는 물론 다소의 약점도 있다. “백주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 가짜일지도 모른다, 향이 너무 진하다, 너무 독하다.” 등이 있다. 앞서 열거한 것 중에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중국의 백주를 좋아 하는 사람에게 들은 농담이지만 중국 최고의 술 “마오타이 회사의 사장님도 자신이 마시는 술이 가짜마오타이 술인지 모르고 마신다. 그래서 공장장을 불러 물어보면 그도 역시 모른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백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하는 농담 중의 농담이다.
한국의 백주는 수십 년 간 희석식 소주가 대중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중국 백주의 대중화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을 통해 앞으로 미래를 전망을 해보면 백주의 한국진출은 날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시장을 겨냥한 중·고가 중국 백주회사들의 맞춤형 생산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여 거두절미하고 한국과 중국 술꾼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좋은 술들을 양국에서 만들고, 이를 소개하고, 연구하는데 우리 한·중백주문화교류협회에서 그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 충남 논산 출생. ≪다층≫(2007) 시 등단. 저서 현대소설의 문학지형과 공간성 연구, 현대시의 논리와 그 해석,
문학의 창조적 대화 등, 우송대학교 한국언어문화전공 교수
달구지길
오 월 석
고향집으로 가는 길은 비스듬한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몸이 가볍다.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자동차 엔진소리까지도 부드럽게 느껴진다. 동네 입구에서 자가용의 속도를 줄였다. 차창을 여니 고향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밭둑에는 봄기운을 받은 파릇파릇한 봄나물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부메랑처럼 휘어진 모양에 이십여 채의 집이 줄줄이 늘어선 형태를 하고 있다. 마을 앞쪽에는 사시사철 맑은 시냇물이 졸졸졸 흐른다. 차를 대문에 바짝 붙여 주차하고 짐을 내렸다. 거실에서는 어머니께서 작년에 수확한 마늘을 손질하고 계셨다. 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마늘껍질은 바깥 부엌 시렁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서인지 손쉽게 잘 벗겨졌다. 어머니께서는 오늘 동갑네 모임에 가신 아버지께서 좀 늦으실 것 같다고 나보고 개죽을 끓이라고 하셨다. 나는 창칼을 마늘 무덤에 던져 놓고 사랑방 부엌으로 나갔다. 아궁이 두 곳에 솥이 하나씩 걸쳐 있었다. 왼쪽은 큰 무쇠솥이고 오른쪽은 작은 양은솥이었다. 왼쪽의 무쇠솥은 큰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쓰인다. 고추장이나 된장을 담글 때나 두부를 만들 때 사용한다. 오른쪽 양은솥은 평소에 가축에게 줄 음식을 끓이는데 쓰여 매일 사용한다. 양은솥에 물을 두 양동이 붓고 뚜껑을 닫았다. 물이 끓으면 멸치대가리와 싸라기를 넣고 저어준 뒤 20분정도 지나면 개죽이 완성된다. 아궁이에 부드러운 솔가지를 밑에 깔고 위에 좀 두꺼운 나뭇가지들을 얹었다. 마른나무는 불을 지피자마자 활활 타올랐다. 나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서 툭탁툭탁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서 양은솥 뚜껑이 들썩거리며 하얀 김이 부엌 천장으로 피어올랐다. 부엌 천장은 연기에 그을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이 검었다.
30년 전에는 동생과 둘이서 아궁이를 하나씩 차지하고 불을 지폈다. 학교에 갔다 돌아와서 마을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어머니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어머니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대부분 아궁이에 불을 때라는 것이었다. 어머니 혼자서 여러 아궁이의 불을 감당하시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부엌 세 곳에 아궁이가 다섯 개나 있었다. 솥에다 밥을 하고, 솥에다 물을 데우고, 솥에다 소에게 줄 여물을 끓였다. 솥은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땔나무를 준비할 때면 동생과 나는 중국의 무술배우 흉내를 내며 이상한 폼을 잡곤 했다. 좀 두껍고 긴 나무토막을 벽에 비스듬히 걸쳐놓고 날아 차기로 부러뜨리거나 나무를 두 손에 잡고 무릎을 향해 내리치기도 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은 우리에게 매일하는 학교숙제 같은 것이었다. 동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저녁때면 아궁이로 달려가곤 가곤 했다.
집 대문 앞에는 실개천이 흘렀는데 물의 양도 꽤 많았다. 송사리들도 떼를 지어 노닐고 개구리도 간혹 돌 틈에 숨어서 먹이를 기다렸다. 실개천은 동네를 관통하여 흘렀고 동네사람들은 물길을 막고, 야채도 씻고, 세수도하고, 빨래도 하였다. 어린이들이 목욕을 할 정도로 물은 풍부했고 또 깨끗했다. 식수는 집집마다 있는 샘에서 물을 퍼 올려서 해결하였다. 빈 작두 물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기술적으로 펌프질을 해야 물이 지하에서 올라왔다. 작두펌프가 어린이나 도시에서 온 초보는 알아보는지 모르겠지만 마중물을 넣고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마중물만 먹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집에 샘이 없는 사람들은 동네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우물은 아랫마을에 한 곳, 윗마을에 한 곳이 있었다. 우물은 아이들이 놀기에 위험하기도 하고 더럽히면 안 된다는 교육을 수도 없이 받아서 감히 우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릴 적 기억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일을 굳이 고르라 하면 소달구지를 탔던 기억이다. 아버지께서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실 때면 우리 형제를 태우고 가셨다. 소에 달구지를 매달아야 짐을 실을 수 있었는데 준비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달구지와 소가 한 몸이 되어야 하는 작업은 적어도 두 사람이 협조해야 가능했다. 나는 소를 달구지까지 끌고 가서 소를 후진시켜 달구지 틀에 소를 밀어 넣는 것을 담당했다. 아버지께서는 소의 목에 멍에를 걸치고 소 등에 등태를 얹고서 달구지 고리를 들어 등태 고리에 걸었다. 등태 양쪽 끝의 끈을 소 배 밑으로 가로질러 묶으면 연결 작업이 끝난다. 우리가 달구지에 타면 아버지는 코뚜레를 쥐시고 앞서 걸으셨다. 소는 울퉁불퉁한 길을 터벅터벅 우직하게 걸어갔다. 흙길에서 돌부리를 만나면 수레가 덜컹거렸는데 우리는 그 순간의 스릴을 즐겼다. 소 발걸음에 맞춰 끄떡끄떡 움직였던 나는 그 리듬을 좋아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고 사람의 몸짓에서 나올 수 없는 소의 몸짓이었던 것이다. 달구지 바닥에 난 구멍에 한 쪽 눈을 대고 보면 땅 바닥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돌도 나타났다가 풀도 보였다가 어떤 때에는 소의 배설물도 철퍼덕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소달구지 타고 가는 것을 좋아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걸어왔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소달구지에 가득 실린 나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의 소들은 먹고, 자고, 쉬고를 반복하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중송아지 때부터 고된 일을 해야 했다. 천방지축 송아지가 중송아지가 되면 물푸레나무 송곳에 된장을 바르고 두 콧구멍 사이를 뚫었다. 그리고 뚫린 구멍에 유연한 물푸레나무 코뚜레를 넣어서 동그랗게 모양을 만든 뒤 끈으로 묶었다. 코뚜레에 서너 발쯤 되는 줄을 묶어 소 목줄로 통과시켜 소의 행동을 조정하였다. 소에게 코뚜레를 다는 이유는 사람이 힘세고 덩치가 큰 소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가 논밭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네 길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이 세상에 아무런 훈련 없이 달구지나 쟁기를 달고 일할 수 있는 소는 없을 것이다. 먼저 통나무 두 개에 넓적한 돌을 얹어 묶고 나서 소가 그것을 끌게 하였다. 소는 통나무가 땅바닥에 두 줄을 그리며 동네 길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해야 어느 정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다. 소가 짐을 끄는 것에 익숙해 질 때 쯤,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통나무 위의 넓적한 돌 위에 앉게 하셨다. 우리는 돌에 걸터앉아 소가 끄는 땅 스키를 즐겼다. 우리는 소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재미있기만 하였다. 소가 끄는 땅 스키가 우리에게는 즐거운 놀이었지만 소의 끄는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이었다. 소는 이러한 훈련과정을 거쳐야 실제 농사일에 투입될 수 있었다.
소는 인간의 언어 세 가지만 익히면 되었다. ‘이랴’하면 가고, ‘워~’하면 멈추고, ‘쩌쩌쩌’하면 방향을 바꾸면 되었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는 사람이 코뚜레에 연결된 두 줄을 당겨서 알려주었다. ‘쩌쩌쩌’하면서 오른쪽 줄을 당기면 소가 오른쪽으로 돌았다. 오랫동안 일을 한 소는 주인의 소리를 듣고 주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았다. 그 당시에는 논이든 밭이든 소가 있어야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되었다. 예전에는 소를 서로 빌려주는 풍습이 있었다. 소는 한 사람 몫 이상의 일을 거뜬히 해냈는데 소를 빌려주는 비용은 한 사람의 임금과 같았다. 동네 길에서 소달구지 두 대가 만나면 서로 길을 비켜주던 모습도 기억에 선하다.
어머니께서 저녁식사를 하라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앉은뱅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불에 홀려 딴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해는 벌써 지고 날이 어둑어둑했다. 서둘러 소 여섯 마리가 기다리는 외양간으로 가서 소구유에 사료를 주고 물을 한 양동이씩 부어주었다. 소는 배가 고팠는지 달려들어 ‘우거적우거적’ 소리를 내며 먹었다. 그 모습을 보니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소가 사람을 도와서 일하며 오랫동안 살았고 수년간 새끼도 여러 마리 낳았었다. 그리고 일소는 우시장에서 희소가치를 인정받아 더 큰 돈에 거래되었다. 장사꾼들은 소의 목 뒤를 만져보고 금세 일소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였다. 일소는 목에 멍에를 쓰고 일하므로 목 뒤를 만져보면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혀있었다. 그래서 영리한 일소는 주인과 정을 주고받으며 십 수 년을 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요즘의 소들은 채 4년을 살지 못한다. 암송아지가 성장하여 두 번 새끼를 낳으면 살이 찌워져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그 정도 성장했을 때가 소의 육질이 제일 좋다고 한다. 농부가 소를 팔 때를 놓치게 되면 장사꾼들이 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격이 떨어져 손해를 보게 된다. 농부는 비싼 사료비와 소 생육기간을 잘 계산해야 조금이나마 이익을 볼 수 있다. 나도 인간이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정도를 넘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 같다. 명절 즈음에는 묶어서 키운 소만을 찾는 서울 장사꾼들이 시골을 돌아다니며 소를 사가기도 한다. 많이 움직이지 않은 소가 육질이 부드럽다는 이유다. 내가 채식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그들을 욕한들 누워서 침 뱉기일 것이다. 시골에서 살아가려면 가축을 키워야 생활에 도움이 되니 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난 그저 좀 떨어진 곳에서 방관자 역할을 하며 시대의 흐름에 편승할 뿐이다.
지금도 우리 집 대문 앞의 시냇물은 땅속 하수도관을 통해서 흘러간다. 그래서 지금은 손을 씻을 수 없다.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자 어둠보다 더 검은 아스팔트길이 드러났다. 단단하고 반질반질한 길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완벽을 추구하면 인간미가 없듯이 동네 길도 마찬가지다. 딱딱하고 빈틈없는 모양이 도통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가 끄는 땅 스키를 타며 달렸던 달구지길, 그 길에 작은 통나무로 긋던 길고 긴 선들, 이제는 모두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져 내 가슴 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먼 미래에 오늘을 그리워할 수도 있기에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고 싶다.
밤하늘을 보니 별들이 하나 둘 씩 반짝이며 얼굴을 내민다. 올 여름에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누워 아이들과 별자리를 찾아봐야겠다.
두 번의 봄
새벽 5시에 깜짝 놀라서 깼다. 수 십 번 해외출장을 다녔어도 매번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어젯밤에 챙겨 놓았던 짐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며 화장실 전등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3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3박 4일 동안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화장실의 전등도 3박 4일 동안 밝은 모습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고 가스불이 아닌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사전에 두 번 실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매번 출장을 갈 때 화장실 전등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콜택시를 타고 대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한밭대로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도로 가운데에 심어진 가로수는 구간별로 삼나무, 은행나무, 이팝나무, 둥구나무 등 모두 추위에 떨며 앙상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계절은 3월 중순을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3청사 터미널에서 20분을 기다려 07시 55분 인천공항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경부고속도로 창밖의 넓은 들판은 지난해 추수가 끝난 뒤의 공허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행히 썰렁한 논에는 드문드문 흰 짚단 덩어리들이 흰 꽃처럼 옹기종기 피어서 쓸쓸함을 덜고 있었다.
나는 인천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2시간 10분 정도 중국의 남쪽으로 날아갔다. 내가 도착한 곳은 중국의 옛 수도 ‘남경’이었다. 출장의 공식일정을 마치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한 총통부에 들렀다. 정원의 고풍스러운 옛 건물은 웅장했고 무엇보다도 건물 내부의 천장이 시원하게 높았다. 보슬비가 기왓장에 내려 앉아 모인 물방울이 추녀 끝으로 또르르 또르르 흘러내리는 풍경이 마치, 우리나라 산사의 풍경을 보는 듯 운치 있었다.
정원 뜰 안에 들어서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뜰 안 이곳저곳에 이미 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목련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고, 벚꽃은 분홍 미소를 뽐내고 있었다. 쭉쭉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는 초록옷을 입고 연못을 살짝살짝 간지럽히고 있었다. 비행기로 불과 2시간의 거리를 날아온 것으로 한 계절을 미리 경험할 수 있음에 놀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봄을 맘껏 누리며 행복했다. 사실 지난겨울, 내게는 영영 봄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겨울만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절망감에 휩싸여 살았다.
매일 출근길에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중앙도로 한 가운데에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을 맞으며 피켓을 들고 서있는 동료들을 보았다. 그들은 추위를 이겨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동료들은 장갑, 목도리, 귀마개 등으로 무장한 채 한겨울 속에서 말뚝이 되어 있었다. 일찍 출근할 수 없는 나의 처지를 배려해 준 동료들에게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동시에 교육부의 국립대학교 기성회직원에 대한 허술하고 무능한 대책에 1인 시위로 맞설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한탄스러웠다. 나 또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교육부의 수당삭감 저지투쟁과 포괄적 고용승계를 위하여 말뚝이 되곤 하였다. 우리들은 중앙 광장에서 그렇게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우리에게 혹독한 추위가 계속될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대학교라는 같은 울타리에서 근무하고 있는 다른 구성원들과 다른 신분인 우리들은 겨울의 한 복판에서 외로웠다. 말뚝이 된 나는 학교투어를 온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구경꺼리가 되기도 하고, 외부에서 은행이나 우체국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웃음의 대상이 되는 안내원이기도 했다. 외국인유학생들은 선생님이 왜 그곳에 서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나도 눈으로 답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고...... 간혹 일면식이 있는 학생들과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또 존경하는 부모님의 아들로서 순간의 창피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치도 물러날 수 없는 처지가 나를 꼬~옥 잡아주고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1인 시위를 하며 나의 입은 음식물만을 섭취하는 용도로 계속 퇴화되고 있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강물에 사는 물고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의 모습은 물속에서 입만 뻐끔거렸지 소리를 내지 못하는 물고기였다. 나는 대학교라는 울타리의 안의 구성원을 물고기에 비유해 보았다. 품위 있고 덩치가 있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물고기인 잉어는 교수이고, 고위 공무원은 메기나 쏘가리쯤 될 것 같다. 하위 직원들은 피라미나 미꾸라지 정도 되지 않을까? 언제 잡혀 먹힐지 몰라 눈치를 봐야 살 수 있는 ‘피라미’ 말이다.
말뚝으로 서있던 어느 날, 솔잎이 유난이도 푸른 도덕봉을 배경으로 눈이 내렸다. 눈은 왼쪽 하늘에서 사선을 그으며 오른쪽 아스팔트로 곤두박질 쳤다. 추위로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녹색병풍에 내리는 눈은 황홀하게 느껴졌다. 나는 학창시절 감명 깊었던 한시(漢詩)를 붓글씨로 쓴 적이 있다. 그 시는 17년이 지난 지금도 매형 집 거실에 걸려있다. 시 속의 노인의 모습이 지금의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 새는 날지 않고,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모든 길에는 사람 발길 끊어졌네.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에 삿갓에 도롱이 쓴 노인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서 홀로 낚시질하네.
- 유종원(柳宗元 773〜819),「강설(江雪)」
한시 속, 강에 눈 내리는 풍경은 정말 고요하고 운치 있었다. 시 속의 노인은 아무도 없는 겨울 강에서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은 채 나룻배에서 혼자 낚시를 하고 있다. 마침 겨울 함박눈이 사뿐사뿐 강물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나는 나룻배만 타지 않았을 뿐 노인처럼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강추위 때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산설(山雪)만 바람에 실려와 내 앞에서 고꾸라지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식구들을 위해 얼어붙은 손으로 물고기를 낚아 보려는 노인의 고된 삶에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질까? 어찌되었든 우리들은 서로 교대해가며 때로는 말 못하는 물고기처럼, 때로는 말뚝처럼 우두커니 서서 한겨울을 서럽게 불안하게 보냈다.
4월 중순의 덕명골 캠퍼스는 활기차다. 온갖 화려한 꽃들의 향연에 머리가 어지럽기까지 하다. 노란 병아리 같은 산수유꽃을 시작으로 우윳빛깔 백목련, 형형색색의 울긋불긋 연산홍, 야들야들 바람에 흩날리는 분홍빛 벚꽃과 꽃사과꽃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질투가 많은 꽃들은 파도가 되어 다른 꽃들을 밀어내기에 바빴다. 나는 올 것 같지 않았던 봄이 수놓은 아름다운 양탄자 위에서 행복했다.
나는 올해 두 번의 봄을 맞이했다. 3월 중순 중국에서 한 번, 그리고 4월 중순 한국에서 한 번 봄을 만났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번의 봄을 경험했다. 내 나이를 연(年) 단위로 계산하면 불혹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해당하지만 월(月) 단위로 계산하면 1,277개월, 일(日) 단위로 계산하면 15,330일 정도 살았다. 특히, 일(日) 단위로 계산한 나의 살아온 세월은 잘 가늠할 수 없어 재미있다.
법정스님께서는 일찍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기에 봄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울 것인지 각자 한 번 살펴보십시오. 나 자신이 어떤 꽃과 잎을 펼칠 수 있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꽃으로 피어날 씨앗을 일찍이 뿌린 적이 있었는가?” 라고 하셨다. 스님의 말씀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삶의 나침반 또는 지도와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올해 두 번의 봄을 맞았지만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한 해에도 수 십 번의 온화한 봄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을 아름답게 꽃피울 씨앗들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찾아봐야겠다.
다시 사는 인생
“상기 환자는 2015년 6월 19일 횡문근 융해증 및 급성신부전, 장염 진단 하에 본원 신장내과에 입원하여 수액 및 항생제 치료중입니다. 향후 3주 간 치료 및 추적관찰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하여백.
신장내과 의사선생님께서 내게 처방하신 진단서 내용 전문이다. 몇 줄 밖에 안 되는 진단서 내용으로 나의 투병생활을 기억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나의 아픔이 너무도 컸다. 그리고 짧은 시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불혹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내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튼튼한 몸 밖에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에 응급실에 실려 온 사건은 나와 식구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입원을 하고도 며칠 동안은 내가 왜 여기에 누워서 주사를 맞고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2015년 6월 16일 중국 출장 3일째 되던 날, 밤 11시, 저녁에 먹은 음식을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제어할 수 없는 구토로 입과 턱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고 배근육은 극도로 수축되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더 이상 토할 것이 없어진 다음날부터는 설사만 계속했다. 아침에 먹은 수박 한 조각과 물 몇 모금을 마신 채 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먹어보려 시도했으나 냄새가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6월 17일은 하루가 3년처럼 느껴졌다. 설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호텔에서 바지주머니에 최대한 많은 휴지를 확보했다. 중국의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정을 취소하고 싶었으나 책임감에 동행했다. 혹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억지로 차에 올랐다. 나는 온종일 차안에 있으면서 화장실만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화장실은 너무 멀었고 다리에는 힘이 빠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설상가상으로 렌터카 바퀴가 펑크가 난 것이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갈 길은 멀고 배에서는 간헐적으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악의 날을 맞이한 나는 그냥 울고 싶었다. 호텔에 서둘러 가도 힘겨운 상황에서 펑크가 웬 말이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꽤 늦은 밤에 숙소에 도착했고 나는 이제 걷기조차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저녁식사를 거른 채 방에 도착한 나는 어젯밤의 설사를 재생했다.
6월 18일 귀국 날 아침이 되자 다리가 후들거려서 몇 발짝을 걷기도 힘겨웠다. 되도록 빨리 한국에 가야한다는 일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숙소에서 짐 가방을 챙기는 것이며, 체크아웃과 공항수속은 동행한 박 선생님이 척척 알아서 해주었다. 비행기에 타자 오한이 나서 승무원들이 담요를 다섯 개나 덮어 주었고 자리를 최대한 좋은 위치로 배정해 주었다. 다행히 비행기에서는 내 뱃속이 잔잔해서 화장실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고 나는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비행기는 순항을 하여 인천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출입국심사장까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나의 몸은 이제 이 과장님의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나의 하체에 급격히 힘이 빠지고 있었다. 간신히 자동출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와 전광판에서 짐 나오는 구역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글씨가 허공에서 빙빙 돌 뿐, 아무리 째려보아도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내 몸의 신진대사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짐차는 박 선생님이 몰고 이 과장님은 나를 부축했다. 내 몸은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균형을 자꾸만 잃고 있었다. 다행히 대전행 공항버스 시간이 맞아서 서둘러 내려올 수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박 선생님이 황 팀장님과 미리 연락을 해 놓았는지 대전 대덕문화센터에 내리니 황 팀장님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었다. 황 팀장님의 부축을 받고서야 쓰러지듯 차의 뒷자리에 탔다. 그리고 바로 선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선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열이 많다는 이유로 밖에서 30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환자인지 의심된다고 응급실에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세상은 내 생각과 달리 거꾸로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선병원 응급실로 들어가고 다시 충남대학교 응급실로 간다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나가 얼굴에 눈물범벅을 하고 응급실로 향하는 나의 침대를 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매형이 보였고, 또 감았다 뜨니 형석이와 달석이가 번갈아 보였다가 사라졌다. 의사선생님이 주사바늘을 꽂으며 많이 아플 것이라고 이야기 했으나 아프지는 않았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하여 마취제 역할을 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의사선생님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6월 19일 새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 혈관으로 수액과 항생제가 투여되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소변줄도 끼워져 있었다. 형석이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나의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대변도 기저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오는 설사를 어찌할까 몰라서 달석이 동생에게 물으니 그냥 싸라고 한다. 나는 그래도 의식이 있어 침대에 그냥 쌀 수 없어 참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기저귀를 차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새벽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형석이에게 기저귀를 갈아 줄 것을 요청했다. 형석이가 밤을 새워가며 다섯 번 정도 갈아주고 나서 6월 19일 아침에 누나에게 간병인 바통을 넘겨주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상황은 계속되었고 설사는 멎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누나에게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하는 것이 낯 뜨거웠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염치불구하고 갈아달라고 하였다. 처음에 누나는 조금 한가한 남자 인턴선생님을 불러 기저귀를 갈아주는 센스를 발휘하였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계속 부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후부터는 누나가 혼자서 기저귀를 처리해 주었다. 정신이 좀 돌아온 나는 물과 포카리스웨이트를 마시고 싶어졌다. 하지만 병실에 올라가야 마실 수 있다고 하였다. 응급실에서 스무 시간을 기다린 오후 3시에 41병동 425호실에 둥지를 틀었다.
물을 마시니 살 것 같았지만 설사가 잦았고 구역질이 났다. 누나는 하루에 15번 이상 다 큰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었고 인상 한 번 쓰지 않았다. 나는 멎지 않는 설사가 원망스러웠다. 응급실에 실려 오는 나를 보고 누나는 자기 신장을 한 개 떼어 줘야할까를 생각했단다. 누나는 아마도 13년 전 막내 동생을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동생을 또 잃으면 앞으로의 삶이 지옥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배수진을 치고 싸우는 장수처럼 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해주었다. 나는 침대에 있었으나 망망대해의 출렁이는 돛단배에 있는 것처럼 뱃멀미가 났다. 48시간 동안 멀미는 멎지 않았고 속이 울렁거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게다가 병실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6인실의 중간에 끼인 나의 침대는 양 옆의 중증환자들이 토해내는 신음소리, 괴성과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실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두 번째 날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2인실로 옮기려 했으나 병실이 없었다. 이 작은 병실에서도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누나가 연결시켜 준 영상통화로 어머니를 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리셨고 나도 어머니를 뵙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어머니도 우시고 나도 울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살아 있음이 고마워서 우시는 것 같았고, 난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에 고마웠다.
큰 아기가 된 나는 4일쯤 지나자 서서히 움직일 수 있었다.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되자 누나에 대한 미안함이 덜해졌다. 죽을 먹은 지 3일정도 지났지만 온 몸에 힘이 없었다. 7일쯤 지나자 담당 의사선생님께서 신장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투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소식을 전하셨다. 하지만 내 몸의 감각기관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여서 핸드폰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말도 어눌하게 흘러나왔으며, 어지러워서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었다. 안과검사를 하고 신경외과에서는 나의 말이 어눌한 원인을 찾으려고 힘썼다.
7일째 되는 날, 나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나는 아픈 기억이지만 새로운 경험을 잊지 않으려고 병원생활을 기록해 보려고 일기장을 꺼내 글씨를 써 보았다. 하지만 초점을 잃은 나의 시력과 손가락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이 없고 어지러워서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어쩌나? 설마 나아지겠지 스스로 위안해 보았다. 나의 체력은 밑바닥을 찍고 서서히 올라오고 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회복하자고 마음먹었다. 하드웨어는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으나 소프트웨어가 아직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8일이 지나자 동병상련에 처해있는 같은 호실 환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오른쪽 병상에는 84세 할아버지가 계셨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출신이셔서 남을 배려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 간병인은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맡으셨는데 나와 누나는 그 분을 ‘떴다 오 여사’라고 불렀다. 오 여사께서 처음에는 너무 소리를 지르셔서 할아버지께 너무 하시는 게 아닌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할아버지께서는 귀가 잘 들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오 여사는 간병 초보인 누나에게 슬리퍼, 기저귀, 물티슈 등을 싸고 좋은 것으로 사다주시는데 귀찮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오 여사는 1년 내내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다 보니 답답할 때면 환자가 잠든 틈을 타 외출을 하곤 하셨다. 워낙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해서 우리는 그 분에게 ‘떴다 오 여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떴다 오 여사’는 간병인 10년차에 빛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채워주었다. 병원에서의 소소한 일은 ‘떴다 오 여사’의 손을 거치면 대부분 뚝딱 해결되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시고 병원에서 온갖 어려움을 경험한 탓에 어떠한 어려운 일에도 의연히 대처하셨다. 한 번은 누나가 외출하여 나의 기저귀가 불룩하게 차 오른 것을 본 오 여사께서 선뜻 나의 침대로 와서 본인이 갈아주시겠다고 하였다. 나는 찝찝한 몸을 누나가 올 때 까지 기다릴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오 여사에게 몸을 맡겼다. 오 여사는 머뭇거리는 나에게 “괜찮어 같은 오씨에 항렬이 같고 한참 누나인데 어뗘?”라고 말씀하시며 기저귀를 새 것으로 갈아주셨다.
오 여사께서 재활병동으로 옮기는 날 우리는 너무너무 아쉬웠다. 내 침대 건너편에서 간병을 하시는 홍 여사님은 경력이 17년 되셨다고 한다. 환자를 간병하는 기술과 보호자를 대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래서 간병인 초보들은 그분의 행동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셔서 본인이 직접 걸레를 뜨거운 물에 빨아서 병실 구석구석을 닦으셨다. 간병인을 하면서 만난 수많은 환자, 간호사, 의사를 겪으며 꽤 높은 경지의 전문가가 된 듯하였다.
간병인을 하시는 분들을 2주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는 그 분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인생이 순탄치 않으셨고 과거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자긍심을 갖고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시는 것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간호사들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예쁘게 생기고 목소리도 좋은 간호사가 근무하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날카로운 주사바늘로 사정없이 내 혈관을 찌를 때 나의 환상은 현실이 되었다. 나를 담당하는 간호사를 신경이 날카로워진 보호자가 막말을 하자 서러움을 참지 못해 우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간호사들은 주치의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결혼한 후,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적은 것 같다. 누나가 간호사들에게 자두를 한 상자 사서 선물해 줘 너무 고마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내심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었다.
2주 동안 425호실에서 동침했던 환자들과의 만남도 의미 있었다. 무주에서 오신 할아버지는 성격이 급하셨지만 인생사는 법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해주셨고, 서구 도마동에서 오신 월남다녀오신 아저씨는 레지던트선생님의 말은 듣지도 않으시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링거액도 맞지 않으셨다. 31살의 목사님 아들은 잘 생기기도 하고 성격도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 받고 5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식한 신장에 문제가 생겨 다시 입원했단다. 이틀에 한 번 투석을 해야 하는 것도 힘들겠지만 더 큰 문제는 평생 동안 계속해야 한단다. 황간에서 오신 할아버지께서는 나와 1주일 정도 생활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한 원인이 할아버지의 신음이 큰 이유였지만 워낙 인상도 좋으시고 바르게 살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같이 하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심장마비로 운명하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아침을 먹던 환자들은 맨붕 상태가 되고 말았다. 친손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한동안 가슴이 쓰려왔다. 제일 먼저 도착한 큰 딸의 서러운 울음은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17년차 간병인 홍 여사님은 할아버지께서 동네사람을 많이 도와주시고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고생 안하시고 편히 가신 거라고 한다. 공주시 사곡에서 오신 이상인 형님은 메르스가 걱정되어 병원에 안가고 집에서 1주일 설사한 뒤 응급실에 실려 왔다고 한다. 부인과 알콩달콩 병원생활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아서인지 생각이 잘 통하여 많은 시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형수님은 내가 퇴원하기 전날 자신이 빵을 사주고 싶다고 빵집까지 따라와서 선뜻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중에 꼭 다시 만나기로 하고 전화번호도 주고 받았다.
메르스의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병문안을 와 주셨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일기장에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나를 찾아오겠다는 동생들과 친구들이 혹시라도 메르스에 감염될까 두려워 병문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걱정되어 못 오시게 하였다. 병문안이 통제되니 환자들은 오히려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셈이었다. 전화나 문자로 빠른 쾌유를 바라는 메시지도 많이 받았다. 지인님들의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5년 6월 18일 저녁 응급실에서 의식을 잃은 나는 다시 태어나 기저귀를 떼고 소변줄을 빼고 목에 깊이 박힌 주사바늘을 빼고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분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인생을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내려 선병원 응급실과 충남대학교 응급실로 후송해준 황 팀장님과 박 선생님에게 너무 고맙다. 100% 역할을 해야 할 신장이 겨우 9% 기능밖에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담당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나도 놀랐다. 두 시간만 늦었어도 더 심각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응급실에서 나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시던 매형과 한 달음에 달려와 준 동생들과 제수씨들, 나의 소식을 듣고 매일 밤 잠을 못 이루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어머니, 집안의 기둥이 쓰러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시던 아버지, 나의 소식을 듣고 속이 상해서 술을 자주 마셨다는 친구, 내가 요양하고 있는 공주까지 찾아와 준 친구와 동생들에게 고맙다. 메르스의 위험을 뚫고 친히 병문안을 와주신 지인님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또 젊은 사람이 뇌경색이 온 것이 걱정된다며 세심하게 검사를 해 주신 신장내과 정사라 의사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도 병원의 최전선에서 동생의 대소변을 받아내 준 사랑하는 누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내가 퇴원하던 날 공주 고향 동네 길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나를 와락 끌어 안아주신 아버지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집안에서 나오신 어머니는 한 맺힌 울음과 눈물로 나를 안고 한참동안 놓아주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품은 예나 지금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는 이번에 횡문근 융해증, 급성신부전증 및 장염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았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나쁘게 볼 일도 아니었다. 머리를 MRI로 찍어 보니 나에게 뇌경색이 한 번 왔다 갔던 기록이 있단다. 혈액에 혈전이 잘 생긴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미래에 있을 더 큰 사건을 미연에 방지한 모양이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겠다. 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은 셈이다. 앞으로 나는 다시 사는 인생을 즐겁고, 아름답고, 또 현명하게 살아보고자 한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신인문학상, 농촌문학상 수상, moon5865@hanbat.ac.kr
달콤한 사랑보다 더 사랑스러운 우정
지미가(CHI MEI JIA)
낮잠을 자는 동안 짧은 꿈을 꾸었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사이에서 몇몇 사람들이 노닐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제, 바다로 떠나 여름휴가를 즐기는 계절이 되었다. 한국에 유학을 와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 2013년에 3명, 2014년에 3명이 귀국을 했다. 나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2013년에 서해 대천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석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파김치가 된 내 곁에 이 친구들이 남아 있었다면 한결 위안이 되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7년 동안 친구들은 늘 바쁘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간이 나는 틈틈이 서로 연락을 취했다. 올해 2월에는 그들 중 한 명이 결혼을 했다. 그 친구가 결혼하기 전 날,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임에도 우리는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서로가 금방 익숙했다. 제비처럼 수다를 떨던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한 후 사우나를 갔다. 우리는 사심 없이, 서로 하고 싶은 말들과 알고 싶은 것들을 수없이 늘어놓았다. 모두가 여덟 살 여자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같이 놀고, 농담도 하고, 즐겁게 친구의 결혼 전야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이제, 한 명이 내년 3월에 결혼할 예정이다. 그 때는 나도 석사학위증을 가지고 중국에 가 있을 것이다. 친구 중 한 명은 한국에 있지만 늘 바빠서 약속 시간을 잡기가 어렵다. 그래도 시간을 내어 가금씩 같이 밥을 먹고 연락을 취한다. 사실은 내가 언니인데, 일찍 결혼해야 되는데 아직 못해서 너무 민망하고, 약간은 걱정도 하고 있다. 그래도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하다. 이것이 바로 우정이고 내 소중한 재산이다.
친구들의 우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먼 훗날,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에 이런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서로 싸우고 놀아도 곁에 있는 친구가 최고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고, 곁에 있을 때 친구들에게 더 잘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정을 설명하기란 어렵지만, 우정이란 소중하다는 것,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무엇, 무엇보다 행복을 주는 선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는 서로가 자기의 인생을 살고 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서로가 만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늘 붙어 다녔던 친구들과의 우정은 내 기억 속에 곱게 갈무리되어 오래오래 이어질 것이다.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항상 그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노래가사를 하나 떠올린다.
“몇 년 동안 혼자서 비와 바람을 이겨냈고, 눈물도 흘리고 잘못도 했다. 무엇을 고집했는지도 기억하고 있고, 정말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외로웠지만 돌이켜보면, 내 마음 속에는 항상 꿈과 네가 있었고, 친구야 평생을 함께 가자!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한마디 말, 한 평생, 평생의 우정, 한 잔의 술, 친구야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친구란 말로 너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상처도 있고 아플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면 내가 있는 걸 기억해”
앞으로도 우리는 이 가사처럼 평생을 함께 갔으면 좋겠다.
* 中國 吉林省 长春市 出生, 한밭大學校 大學院 經濟學科 碩士課程 2, kaixin-chimeijia@live.cn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들
백음부(BAIYINFU)
어제는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오늘 부터는 무더위가 이어지는 듯하다. 이제 나의 유학생활도 끝나가고 있다. 2008년 3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바라고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갑자기 허무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익숙해진 시간과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이별을 앞두고 오는 아픔이리라 생각한다.
이 땅에서, 나는 인생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중국 대학생들이 나누는 말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대학교를 다니는 도시가 자기의 두 번째 고향이다.”라는. 내가 7년 반 동안 대학생활을 한 곳이 이곳, 아름다운 대전이다. 나는 이곳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튼 나에게 있어 대전은 다른 어느 도시에도 비교할 수 없는 애정 어린 장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젊음과 노력과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의 교육이력을 뒤돌아보면, 초등학교에서 예의를 배웠다, 중등학교에서는 생활과 관련된 과학지식을 배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사회적 책임과 남자의 역할을 배웠다. 그리고 한국에 유학을 와 대학교에서 분석력과 리더십을 배웠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전공분야를 연구했다. 지금은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석사 수료증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얻은 제일 큰 소득은 크게 견문을 넓혔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중국과는 다른 사회제도와 사회구조를 봤다. 그래서 석사과정을 통해 한국사회를 연구했다.
나는 연구를 통해, 한국사회와 중국사회는 15∼20년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중국 유학생으로서, 유학을 통해 미래 중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식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과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에서 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나는 무신론 교육을 받았다. 우주의 만물은 누가 창조했을까?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유학생활 동안 나는 한국에 있는 고향의 목사님을 만났다. 그 분은 그 해답을『성경』에서 찾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이 목사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나는 기독교의 교리실천을 통해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국에서 얻은 값진 자산 중에, 착한 한국 선생님과 친구들 만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나의 일생에서 매우 가치 있고 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오래도록 함께할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 들 때문에 어려운 유학생활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무궁할 것이다.
중국에 돌아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아름다운 한국을 힘껏 다시 포옹하고 싶다.
* 中國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한밭大學校 創業經營大學院 金融不動産學科 碩士課程 2, mspelloon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