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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박사의 교회론과 레이몬드 박사의 교회론 비교 분석
Ⅰ 서론
박형룡박사의 저작전집 6권에 있는 교회론을 타 신학자의 교회론과 비교 분석하는 과제를 받았다. 타 신학자의 교회론으로 박형룡 박사의 교회론과 비교를 하여야 하기에 누구의 것으로 비교할까? 고민을 한 끝에 작년 여름 방학 동안 내가 공부한 Robert Reymond 박사가 쓴 “최신 조직신학”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이 책에 나오는 제 4부 교회론이 잘 설명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여기에 적용하고 비교하기로 했다. 우선 박형룡 박사가 설명하고자 하는 교회론이 무엇인지 정리를 하고 여기서 로버트 레이몬드 박사가 설명한 교회론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아 보고 거기서 차이가 있다면 이를 비교하여 정리를 하려고 한다.
Ⅱ 본론
1. 성경적 명칭
1) 구약의 교회
① 카할 - ‘카할’의 본 뜻은 “부른다”이다. 이 말은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 “하나님의 계명을 듣기 위하여 모인 무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 부르신 선민 공동체다. 여호와의 총회 혹은 하나님의 총회를 의미한다. 시내산 기슭에서 모세가 전달해 준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 위하여 모인 그 모임이 곧 ‘카할’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회중’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처소에 모인 모임을 의미한다. 모임이 교회가 된다. 모이지 않는 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모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임을 강조할 수는 없으나 조건이 주어짐에도 모이지 않는 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카할’은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이 되었다.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는 주변의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명감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들은 민족의 번영과 국가의 부흥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지만 선민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② 에다 - ‘에다’는 처음에는 ‘카할’과 함께 쓰여졌으나 ‘카할’보다 더 오래된 말로써 ‘택한다’란 뜻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택함을 받은 집단의 모임’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더 제한된 말로 사용이 되었으며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에서는 ‘쉬나고게’로 번역이 되었고 나중에 전적으로 유대인이 모이는 회당(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카할’은 이스라엘의 모임(공동체)를 , ‘쉬나고게’는 모이는 장소를 더 강조하는 말로 바뀌었다.
2) 신약의 교회
① 쉬나고게 - 쉬나고게는 구약의 ‘에다’를 번역한 말로 문자적으로 「함께 온다」는 뜻을 지닌 말로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언젠가는 다시 모여서 타민족의 빛이 되어 나타날 것을 원하는 공동체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 안에서는 파벌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적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회당이란 말로 번역이 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 이후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그들은 앗수르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의 포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쉬나고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쉬나고게는 성전이 아니라 모여서 율법의 교훈을 배우며, 교제하며, 간단한 예식과 더불어 민족끼리 신앙 안에서 서로 단합을 이룬 장소다. 유대인들은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안식일 모임을 가졌다. 이것은 회당 교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바울도 회당에서 가르쳤다. 초대 교회는 회당 교회와 같은 형식을 취하였다.
② 에클레시아 - 이 말은 ‘안으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에크」라는 말과 ‘빼내어 부르심을 입어 모인 무리’라는 뜻을 지닌 「카레오」라는 말이 모여진 말이다. 이 말은 ‘만남’ 혹은 ‘모임’인데 백성들이 함께 모인다든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소집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무인 무리를 의미한다. 교회는 죄악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빼내어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을 불신하는 ‘불신앙의 모임’과는 달리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을 인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모임’이다. 장소를 의미하는 쉬나고게와는 다르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다.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다. 그 속에 모인 무리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 레이몬드 박사의 책에 의하면
교회의 본질과 기초에서 다루고 있는데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를 구분하여 박형룡 박사가 사용한 카할과 에다와 에클레시아를 잘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레이몬드 박사는 에크라시아의 신학적 의미를 더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에클레시아의 신학적 의미는 첫째는 특수 목적을 위해 소집되어진 사람들의 모임(행 19:38)이나 특별히 기도회나 교육, 구원을 위해 모인 모임을 뜻한다. 둘째는 어떤 특정한 지역으로부터 모여진 신자의 집단을 뜻한다. 가령 고린도(고전1:2), 데살로니가(살전1:1), 에베소(계2:1), 마게도냐(고후8:1)등 한 그룹을 지어 모인 집단이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톨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여진 한 공동체의 뜻이다. 넷째는 하나님의 종말적 백성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살아 있는 기초요 이스라엘에서 약속된 ‘메시야’다. 그런고로 이 메시야는 자기 백성을 모아 교회를 이룩하며 ‘에클레시아’는 강력한 종말 신앙을 내포한다. 구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 경배하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구속된 공동체라는 것이고 신약적 관점에서는 교회 역시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으며 권위 있는 교리의 교사들로서 예수의 신앙을 고백하는 열두 사도들 위에 세워져 있다.
2. 교회의 속성
교회의 속성이나 특성을 말할 때는 유형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무형교회에 속한 것이다. 외형교회는 무형교회의 속성들을 반영하는 교회일 뿐이다. 반면에 로마 캐톨릭에서는 교회의 속성을 그들의 교직적 조직체(敎職的 組織體)에 두고 있다. 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에서는 세 가지 속성을 말한다.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는 영어로 “an(one) holy catholic”인데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통일성(unity), 성성(holiness), 공동성(catholicity or universality)이다.
1). 통일성(one)
통일성은 단일성이라고도 한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어느 민족으로 구성되었든지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 모양은 다양하다고 할찌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조직된 신체이기 때문이며, 교회에 내주하는 성령도 하나이며, 신앙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통일의 배경에 세상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롬12:5, 고전12:12,13, 엡1:22,23). 초창기의 교회는 분열의 위험성을 내포하고는 있었으나 지금과 같이 다양하게 나누어지지는 않았다. 교리적 불일치 속에서 나오는 갈등 속에서도, 국가의 분열에 따르는 교회의 갈등 속에서도 교회는 나누어지지 않았다. 교회의 단일성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교회가 분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단일성은 지켜지지 못했다.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거듭되면서 분리되어졌다. 로마교회는 분리되지 않았으나 프로테스탄트는 수 없이 많은 분열을 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2). 성성(聖性, holy)
거룩은 교회의 중요하고도 가장 특징적인 덕성이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돗’이다. 이 말은 ‘벤다’는 뜻이 있다. 칼로 무엇을 베면 둘로 갈라지듯이 세상의 것과 갈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은 구별되는 것이다. 구별된 것은 거룩하다. 하나님께만 사용하던 거룩을 교회에 사용한 것은 교회의 입장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부터 구별되어진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서 특별히 소집되어지고 짜여지고 살게 되고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현존하고 그의 말씀과 예전이 의탁되고 그의 뜻에 따라 모든 프로그램이 짜여지고 삶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계와 충돌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통으로서 다른 모든 자연적 교제들과 판이하게 다르며 그것들을 초월하여 뚫고 지나가며 높이 서야 한다. 이 영적 덕성 때문에 교회는 또한 세상과 충돌하여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성성에 대한 견해도 각기 다르다.
3). 공동성(catholic)
공동성은 보편성이라고도 한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가는 도중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한 말인 “카톨리카”(catholica)란 말은 어떤 권위나 정통성이나 배타성을 가진 말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이름으로모이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의 통일성이 한 그리스도에 뿌리를 박은 것 같이 교회의 공동성 역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스도는 엄밀히 공동적(catholic)이시다. 성경적 근거로는 로마서 10장 12,13절에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주님은 지상 만민에게 구원으로 풍성하신 분이시다. 갈라디아 3장 28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공동적이시며 보편적이시어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다”(골 1:19,20). 공동적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 안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공동성을 아는 것은 교파를 극복하여 하나로 나갈 수 있게 해주며 인종, 문화, 언어, 신분을 초월해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준다.
4). 사도성(APOSTOLICITY, APOSTOLIC SUCCESSION)
교회가 사도성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보고 들은 목격자로서의 증거를 간직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을 토대로 해서 시작된 종교이며 그 객관적 사건을 증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다. 이런 것을 기초로 해서 381년 콘스탄티노플에 모였던 교회 대표들은 교회의 사도성을 주장하였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사도성을 설명하였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것이 이레니우스가 직무와 은사에 대한 논쟁을 할 때에 감독들을 사도들의 참 계승자로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변형되어서 사도성은 복음의 계승이 아닌 사도직의 계승이 되고 말았다. 사도직을 사도권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사도성 혹은 사도적 계승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기원이 사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교황과 감독들에게 합법적으로 물려졌다고 생각한다. 이 계승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교리의 사도적 계승이요, 다른 하나는 조직의 사도적 계승이다.
5). 무오성
로마 교회에 의하면 교회는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모든 사건에서 절대적으로 무오하며 하나님이 임명하신 신앙의 법칙의 보관자와 해석자라고 한다. 교회의 직무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이 오는 계시를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된 본래적 계시를 전파함에 있어서나 해석하는데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위에 있다. 교회가 성경을 풀고 결정한다. 권위 부여도 교회가 한다. 이 권위는 교황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한다. 첫째로 사도들과 그들의 공직적 후계자에게 그들의 무고와 그것의 결과인 권위를 보증하는 그리스도의 약속들(마16:18, 18:18-20, 눅24:47-49), 둘째로 교회에게 세계의 선생으로서의 사명이 수여된 것(마28:19,20, 눅10:16),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선언되었으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한 것, 넷째로 교회에게 매며 푸는 권세가 부여되었고 교회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한 것(마16:19, 18:15-18), 다섯째는 교회에게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것과 그렇게 할 자격을 가질 것이 명령된 것(살후 3:6, 롬 16:17, 요이 1:10), 여섯째는 보편적 유추에 의하면 인간 집단마다 성문율법과 함께 산 재판관을 가지는 바 재판관이 없으면 성문율법이 무가치하다는 것, 일곱째는 이 권세는 모든 사람들이 참 교회의 근본적 속성들로 인정하는 통일과 보편을 획득함이 필요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약속들은 그의 교회의 멸절과 오류로부터 보전하기 위한 것이지 이것의 무오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의 약속들은 교회의 직원에게 한 것이 아니라 참 신자들의 단체에게 한 것이다(요20:23, 눅24:33, 47-49, 요일2:20,27비교). 또한 성경의 약속들이 보증한 교회는 영구히 계승하는 사도들의 손에 권위가 위임되어 있는 외면적 유형적 교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무오한 인물이 아니다. 베드로는 교리상 오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바울에게도 꾸중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영감된 사도와 성경 저자로서 특권을 가질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지금까지 제시한 것들로는 베드로의 무오류를 증명할 것들이 못된다. 로마교회는 성경무오의 곁에 교황과 감독회의의 무오류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의 충족성을 부정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을 산출하였다고 말하며 교회를 성경 이상에 두는 그들의 논법의 본색을 드러낼 뿐이다.
※ 레이몬드 박사의 책에 의하면
21장 교회의 속성과 표지에서 참된 교회의 속성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속성을 통일성(하나됨), 성성(거룩성), 공통성(보편성), 사도성, 무오성 이렇게 5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레이몬드는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으로 4가지로 분류한 것에 차이가 있다.
레이몬드 박사는 4가지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루피누스가 390년경 만든 옛 로마신경은 사도신경의 전신인데 단순히 “거룩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700년 경에 채택된 사도신경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말하고 있다.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첫 번째 공의회에서 작성된 신조는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381년에 작성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에서 참된 교회를 표시하기 위하여 점점 더 사용되게 되었던 4가지 속성(하나됨,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이 처음으로 모두 신조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공의회의 재가를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이 4가지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묘사하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교회의 권세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서 권징을 시행하도록 하시고 이를 위해서 권세를 부여하셨다. 교회는 이 권세를 바로 사용하여 참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가. 권세의 원천
교회 권세의 유일한 원천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마16:18). 예수님은 유기적 행정의 머리이시기에 교회는 그의 권세 하에 복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세를 가지고 임하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다. 사람의 집단에 의해서 이 권위가 잠식되어지면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교회에 부여하셨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부여하셨다(마16:18). 베드로에게 천국 열쇄를 주셨다(마16:19). 그러므로 여기서 결정되어진 것은 하나님의 재가를 얻을 수 있다. 예를들면 술과 담배를 금지하도록 한 것은 땅에서 묶은 것으로 하나님의 재가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준 권세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요 20:23의 말씀은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행15:23-29, 16:4, 고전 5:7, 13, 6:2-4, 12:28, 엡 4:11-16).
나. 권세의 성질
(1) 신령성
이는 영적 권세로서 성령에 의해 부여된다(행20:28). 그러나 이것이 신령한 것이라 하여 내면적이고 무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항상 신체를 가진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신령적이라 할 때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부여하신 바 되고(마 16:19, 행 20:28), 그리스도의 명의와 성령의 능력으로만 능히 행사되고(요 20:22,23, 고전 5:4), 성도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관계를 가지고(고전 5:12), 도덕적 영적 방식으로만 능히 실시되는 때문이다(고후 10:4).
이것은 국가 권세와는 다르다. 국가적 권세는 외면적이고 현세적인 것이기에 외면적이고 세속적 권리들의 소유와 누림을 보장하지만 교회는 사람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에 하나님의 정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악령에 반대하여 사람 안에 진리의 지식을 부여하며 영적 미덕을 양성하며 신적 교훈에 순종하는 생활을 일으킬 목적으로 수립된 것이다. 교회는 인생의 마음과 그 태도 특히 믿음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해 영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폭력적이다. 종교가 폭력을 사용하여 싸움을 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교회의 치리권은 육신의 사건에 대하여 치리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법과 사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관계되는 일만 관여해야 한다. 도덕적이고 신령한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
(2) 사역성
이는 목회적 권세로서 성경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롬 10:14, 고전 5:4). 교회의 권세는 독립적이고 주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온 것이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주어진 권세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권세는 대신이나 사신 혹은 하인과 같은 권세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사역을 허락하실 때에 최종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직 교회의 건덕과 확립을 위하여 그의 율법을 시행시키는 보좌관이나 선전관일 뿐이다. 모든 일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겸임하여 계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명의로 행해져야 한다.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법전이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경이 제시하는대로 선포하며 시행하며 강행해야 한다. 금지된 것을 시행해도 안되고 지시하신 것을 금지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권세는 조건적이다.
다. 권세의 종류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관련하여 교회에도 삼중직이 있다. 교리권, 치리권, 사역권이다.
(1) 교리권(교훈권)
교리권은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반영으로 진리의 수호와 전달을 목표로 주어진 것이다. 교회는 어떤 악의 세력에 의해서 침몰되지 않도록 진리의 보고인 성경이 순전히, 완전히 보존되도록 신실히 수호해야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진리가 세상에서 멸절되는 대신에 손상 없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실한 수호자로 가지신 때문이니 교회의 조력과 사역에 의하여 진리가 유지된다”고 했다.
또한 교회는 진리를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말씀을 전파하여 성도의 회심과 건덕을 도모하도록 해야 한다. 딤전 4:13에 보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다. 말씀을 바로 전파하기 위해서 신경과 신도게요를 작성하는 일도 필요하다.
(2) 치리권(입법권과 사법권)
치리권은 그리스도의 왕권의 반영으로 입법권과 사법권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
1) 질서 유지를 위해
하나님은 교회 일의 적정한 정리를 위하여 규율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적정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기를 원하신다(고전 14:40). 질서를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완전한 율법으로 통치하신다. 교회는 율법을 새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규정을 정하여서 교회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하다가 신령한 것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2) 순결 유지를 위해
교회는 교리적 도덕적으로 순결을 유지하여야 되므로 이단자와 범죄자를 거절 또는 배제하는 권세를 행세한다. 이 권세는 상당한 시험에 합격한 자들을 교회의 회원과 직원으로 받아들이고 그 중에 진리를 떠나거나 불명예의 생활을 하는 자들을 배제하여 교회의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성경적 근거로는 출 30:33, 스 10:8, 눅 6:22, 요 9:22, 12:42, 16:2등이다. 순결 유지는 권징의 목적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적으로 되지 않는다. 회원들의 협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권징을 실시할 때는 온화한 정신을 가지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
(3) 봉사권(사역권)
이것은 긍휼권이라고도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반영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여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까지 최대의 긍휼을 행하신 일에 유추를 가진 일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도와서 교인들에게 행하는 사역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1) 병자 위문과 신유를 위해
말씀과 기도로 위안해야 한다. 평상시에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도 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교회는 심령의 병부터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병 낫기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병고침의 사역이었다.
2) 자선 사역을 위해
구제는 교회의 사역 중에 꼭 필요한 사역이다. 선교도 구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했다. 초대 교회는 빈민을 구제하였다. 일곱 집사를 뽑은 것도 결국은 구제를 위한 것이다. 교회는 금전을 분배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단 구제는 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먼저 신앙의 가정을 돌아보도록 해야 한다. 교인의 구제를 세속적 단체에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레이몬드 박사의 책에 의하면
제 22장 교회의 권세와 기능에서 교회의 권세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권세의 원천, 성질, 종류 이렇게 3가지로 구분하고 또 여기서 2-3 가지의 항목을 정리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으나 레이몬드 박사는 권세의 근원과 본질로 구분하여 설명하고만 있다. 더 자세한 항목은 보이지 않는다.
레이몬드는 이 책에서 교회 권세의 근원은 구속언약이라고 칭하는 구속의 영원한 경륜안에서 성부께서는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의 메시아직 수여의 한 측면으로서 그리고 그의 순종적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 권세를 맡기셨다고 한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는 오직 “신적 수여의 행동”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교회 권세의 본질은 인간의 폭력과 무질서에 대항하여 물리적으로 강압하는 국가의 시민적 입법적인 권세에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전적으로 영적이고 도덕적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권세는 사역적이며 선포적인 것이지 군주적이거나 고압적이거나 입법적이 아니다.
4. 교회 정치
가. 총론
역사상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 체제는 감독정체, 장로정체, 회중정체라는 3개의 정치 체제가 있다. 감독정체는 교직자에 치중되는 정치이고, 장로정체는 모든 교직자들이 동일한 수준에 있고 권위는 성도들의 선거를 받은 대표자들에게 있는 정치체제이고, 회중정체는 교직자들의 단일 서열을 인정하는 면에 있어서는 장로정체와 같으나 권위가 피선된 대표자에게 있지 않고 성도들의 직접 결의에 있다. 이러한 3대 정치체제가 여러가지로 변형되었다.
1). 감독정치
이 정치는 감독이 교회를 주관하는 정치인바 감독교회와 감리교회에서 쓰고 있는 정치이다.
2). 교황정치
이 정치는 주로 로마 카톨릭교와 희랍정교의 정치인바 교황 전제로 산하 전 교회를 관리하는 정치다.
3). 장로회 정치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 3심제의 치리회가 있다. 처음은 당회로 치리장로와 목사인 강도 장로의 두 반으로 조직되어 지교회를 주관하고 그 상회로 노회및 총회가 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초한 것이다.
4). 자유 정치
이 정치는 다른 회의 관할과 치리를 받지 아니하고 각개 교회가 자유로 행정하는 정치다.
5). 조합정치(회중정치)
독립성의 정치라고도 한다. 이 정치는 권위를 선택된 대표자들에게 있지 않고 성도들의 직접적 결의에 있다. 이 정치는 자유 정치와 방불하나 다만 각 지교회의 대표로서 조직된 연합회가 있어 피차 유익한 문제를 의논하나 산하 교회에 명령하거나 주관하는 권한은 없고 모든 치리하는 일과 권징과 예식과 도리 해석을 각 교회가 자유로 하는 정치다.
6). 에레스티안 정치
교회를 국가의 한 국면으로 보는 정치다. 국가는 신적 조직체로서 사람들의 현세적 신령적 모든 궁핍을 채워주기로 의장된 것이므로 순순한 교리의 전파와 성례와 권징의 상당한 시행을 위한 의무를 갖고 있으므로 교회의 재정을 후원하며 이것의 직원을 임명하며 법규를 정하며 행정을 감당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한다.
7). 전국교회 정치
이들은 개별적 교회들은 한 개 전국적 교회의 작은 부분들이라는 주장한다. 기원적 권력은 전국적 조직체에 있는 바 그 조직체는 지교회들 위에 치리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기원적 권력이 지교회의 당회에 있다고 하는 장로교회 정치와 반대가 된다.
8). 무교회주의
유형교회를 부인하는 정치다. 이 견해에 의하면 교회는 외적 결속으로 논하면 격리한 개인들의 총합 뿐이다. 특수한 처소에 회집하게 되거나 특수한 시간에 생활하게 된 신자들이 그 처소와 시간의 교회를 구성한다. 이들이 교회의 조직을 싫어함은 그것이 기계가 될까 두려워함이요, 목사를 싫어함은 그들이 감독화할까 두려워함이다. 윌리엄 리드같은 사람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가 오순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둘째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동일하다. 셋째는 유일한 하나님의 총회다. 넷째는 성령의 총재직 때문이다. 다섯째는 한 사람 또는 인조의 성직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교회는 정치 없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 장로회주의의 근원과 발전
(1). 성경적 근원
1) 명칭
장로회란 장로란 말을 어근으로 하였다. 장로란 말은 신약에 약 60회, 구약에 약 100회 나타난다. 장로는 προσβυτεροσ이고 장로회는 προσβυτεριον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장로에 의하여 정치하는 교회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민선장로들에 의하는 대의형(代議形)의 정치를 하는 교회다.
2) 상고적 기원
장로주의의 기원은 성경 역사의 上古代로 돌아간다. 아브라함 때에 있었고(창50:7), 모세 때에 있었고(출18:21-25), 그 후 유대 역사에도 있었다(마5:22, 26:3). 신약시대에도 있었다(행14:23, 20:17, 딛1:5). 장로의 자격을 묘사해 놓기도 하였다(딤전 3:1-7).
3) 다른 이름들
신약에 감독이란 말로 5회가 사용되었다(행20:17,28, 딛1:5,7).
4) 민선과 대의(代議)
신약의 장로들은 민선을 받아 취임되었다. 맛디아의 선택에 회중이 참관하였고(행1:23-26), 7집사의 선택에 회중이 주동하였다(행6:3,5). 행14:23에는 “각 교회 장로들을 택하여”라고 하였다. 성경 뿐 아니고 초기 기독교 문서에도 전교인이 승락하여 그들이 직임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이 민선에 의하여 선택된 후에는 대의정치를 하였다. 할례의 문제로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준 행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는 그것을 보여준다.
(2). 역사적 발전
1) 장로정치의 매몰기
사도 요한의 별세로부터 죤 칼빈의 종교개혁까지 14세기 동안은 성경적인 장로 정치의 매몰기였다. 여러 장로 중에 유능한 사람이 선택되어 감독이라는 명칭을 독점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교황권이 자라서 그레고리 7세(힐레브란트)에 이르러서는 최고의 권한을 갖기도 하였다.
2) 독립적 항의적 개혁적 운동
교회의 정치, 교리, 예배, 생활이 신약적 표준을 떠나서 미로를 헤메고 있을 때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들이 일어났다. 3세기의 몬테니스트파, 5세기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켈틱 기독교도들, 8세기에 시작한 스코틀랜드의 컬디스, 이태리의 왈덴시교도들이다. 이런 운동들은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야의 허스를 불렀으며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루터에 의해서 95개 조항과 함께 종교개혁의 성공에 이르게 되었다.
3) 칼빈의 공적
죤 칼빈은 이 모든 역사적 변천을 조사하고 장로회적인 교리들과 원리들을 부활시켜 근대 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칼빈은 파렐과 함께 신도게요와 要理問答을 준비했다. 칼빈의 정치조직의 우수한 대의적 체제는 세속적 민주정치에도 큰 감화를 주었다.
※ 레이몬드 박사의 책에 의하면
박형룡 박사는 교회 정치 형태에 대하여 상기 8가지로 나누고 있지만 레이몬드는 그 형태를 장로정치, 감독정치, 회중정치, 국가교회정치 이 4가지로만 분류하고 여기에 대한 설멍만 하고 끝났다. 그리고 장로교회 정치의 중요성을 간단하게 강조하였다. 레이몬드 박사는 장로정치가 성경적으로 가장 건전한 교회정치일 뿐 아니라 교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가장 정의롭고 평화로운 방법을 제공하여준다고 했다.
이 책에서는 장로회 정치의 근원과 발전에 대하여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장로회 정치를 박형룡 박사만큼 강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5. 은혜의 수단
은혜의 수단(방편)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령의 초자연적인 감화를 주시는 통상적인 경로가 되는 제도들이다. 이 말은 광의적으로는 신자들의 영적 안녕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경우 교회, 말씀의 선포, 성례, 공중기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협의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만 여기에 해당된다.
가.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1) 인격적 말씀 즉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로고스를 뜻함도 아니요 2)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권능의 말씀도 아니요 3) 선지자들이 받은 직접 계시의 말씀도 아니고 4) 오직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 즉 성경의 말씀을 뜻한다.
은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발견되는 요소들이다. 1) 율법 : 성경에서 명령이나 금령의 형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인 모든 것이다. 2) 복음 : 성경에서 화목의 서역에 관계되는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을 선포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나.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례
성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한 예식으로서 감지할 수 있는 표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 언약의 혜택들이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인쳐지며 적용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충성을 표현하게 된다.
성례의 의의는 성례의 외면적 사물들로는 물, 떡, 포도즙뿐만 아니라 거룩한 례식도 포함된다. 어거스틴은 성례를 “유형한 말씀” 또는 “내면적이며 영적인 은혜의 외면적인 유형한 표지”라고 하였다.
성례의 필요성에 대하여서는 1) 개신교의 견해는 성례가 구원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여 시행되는 의무적인 것으로 동시에 믿음으로 받는 자에게 유익과 믿음을 강화한다고 한다. 2) 로마교회의 견해는 성례가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성례의 수에 대하여서는 1) 개신교는 그리스도가 직접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뿐이다. 2) 로마교회는 성례에 7 성례가 있다고 한다. 즉 영세, 성찬,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를 말한다. 개신교에서는 세례와 성찬 외에 다섯은 그리스도가 친히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 기독교 세례
세례의 정의는 1) 물로 씻는 것이다. 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것이다. 3)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며 은혜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하여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서약하는 것을 표시하며 인치기 위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다.
세례의 합법적인 시행자는 목사이다.
합법적인 수세자는 1) 성인의 경우 본인의 신앙고백이 필수적이다. 성인의 경우 세례는 신앙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신앙을 강화한다. 2) 유아의 경우는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직접적인 명령이나 언급이 없다. 그렇다고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라. 성찬
주의 성찬은 곧 성례이니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즙을 주께 받는 것으로 그 죽으심을 나타냄이다.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와 정욕으로 참여함이 아니요 믿음으로써 그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자기의 신령하게 받은 양육과 은헤혜중에서 장성함으로 그의 모든 효험을 받음이다. (소요리문답 96)
성찬의 의도에는 표와 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성찬의 표(signs)에는 1) 주의 죽으심 2)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함 3) 영적 양육과 성장 4) 신자들의 연합을 나타내고 성찬의 인(seals)에는 1) 구속적 사랑 2) 구속에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특권 3) 그 은혜의 현실적인 소유 4) 신앙의 순종과 봉사의 공언으로 의미할 수가 있다.
성찬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는 견해가 다음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 로마교회의 견해 : 화체설 2) 루터파의 견해 : 공제설 3) 쯔빙글리의 견해 : 상징설 4) 개혁교회의 견해 : 영적 임재설
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기도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가지는 담화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고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여 죄를 자복하고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은 구약 시대에는 유일신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었다. 신약 시대에는 넓은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또는 각 위격이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대상이시다. 좁은 의미에서는 성부 하나님만을 의미한다.
기도의 종류에는 1) 묵상기도 2) 은밀기도 3) 사교적 가족적 기도 4) 공 기도로 구분한다.
합당한 기도의 요건에는 1) 믿음 2) 진실 3) 경건 4) 겸손 5) 간절 6) 복종 7) 그리스도의 이름 을 갖추어야 한다.
※ 레이몬드 박사의 책에 의하면
레이몬드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나야 마땅하다고 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섭취하듯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사기 위해서는 신령한 음식이 필요하다고 하며 하나님이 제공하신 신령한 음식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정의했다.
레이몬드는 은혜의 방편(감사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로 구분했다. 그리고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은혜의 방편에 대하여 그의 책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설명하고 강조를 한 반면 레이몬드 박사는 24장에서 한 장의 분량으로만 설명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덜 강조했다고 생각된다.
Ⅲ 결론
프리스턴 신학파의 대부라고 불리는 박형룡 박사의 교회론을 다른 신학자의 견해와 차이점을 찾아 비교하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특히 프리스턴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바빙크와 벌코프의 신학에서는 그들의 뿌리가 같을 것이기에 이들에게서 찾지 않고 파가 다르다고 일컬어지는 로버트 레이놀드를 파트너로 찾아서 박형룡 박사와의 교회론에 대한 이론적 차이를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본론에서 검토하였듯이 큰 차이는 발견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 들어가서는 몇 가지의 차이점을 본론에서 발견하여 제시할 수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 과제를 통하여 교회론의 정수를 읽을 수 있었고 두 분의 비교를 통하여 교회론의 중심 사상을 더욱 깊이 연구한 기회를 갖게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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