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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근박사 스크랩 갈라디아 강해 - 구 원 / 박혜근 교수
한아름 추천 0 조회 32 12.09.03 2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박혜근 교수 / 갈라디아 강해 - 구 원
 
 
갈라디아서 강해
 
본 내용은 박혜근 교수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녹취한 것입니다.
 
 
제1 강 : 구 원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서 구원론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성경 중의 하나이다. 갈라디아서의 강의를 들어가기 전에 구원에 관한 강의를 두 가지를 먼저 하기로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하는 자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이 구원의 계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즉, 구원에 관해서 묻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 구원에 관해서 계시하지 않고 자신을 계시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라는 지식은 언제나 구원론 적이다.

“신명기 20장 4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신명기에도 모세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개할 때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다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그 이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자’라고 하는 구원 행위, 또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정체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 구원에 관하여서는 완전하고도 충분한 계시를 담고 있다 했다. 즉, 이 성경은 언제나 구원하시는 하님께 관한 계시이다. 구원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동시에 같이 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에 관해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이 구원을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에게 관한 것, 즉 구원의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언제나 ‘구원론적이다.’ 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이렇게 미리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다. 그리고 계시되지 않고 우리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숨겨진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하나님께 관한 가장 깊은 지식은 구원의 하나님이다.”라는 말과 같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에게 아직 계시되지 아니한 하나님 자기 본질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했고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고 또 그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말이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알려주지 아니한 하나님 자기의 본질이나 성품, 자신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다 계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계시되지 아니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고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두 하나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게 된다. 왜냐하면 오늘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리 구원에 관한 모든 지식,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지식에 달려있다. 쉬운 말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기 모습이 자기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잘못된 지식에 우리 구원의 소망을 그윽히 있게 되고 그러면 구원의 확신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계시할 때 그 구원의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가장 깊은 지식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자기 계시이다.

그리고 그 외에 숨겨진 또 다른 하나님의 모습이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구원의 하나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계시된 구원의 하나님 모습, 그 구원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의 가장 깊은 자기의 지식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계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관능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되는 것을 막는 위해서이다. 추상적으로 사변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관능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을 막고 금지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시작하고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이 구원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그 타락한 성품을 예수그리스도 통해서 속죄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하나님께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생각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로 흘러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께 관한 우리 지식이 실제적이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고 우리 운명에 관해서도 그렇고 역사에 관해서도 실제적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자기 계시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하나님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자기를 계시하신다.

우리의 진리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한 것이 진리이다. 우리가 좀 받기 힘들고 또 그 말씀대로 살기 힘들고 그 말씀대로 살다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그것이 진리라고 고백해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준 하나님의 모습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한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여기 먼저라는 말은 (프로토스)란 말인데 이 프로토스란 말이 두 가지로 번역된다. 첫째는 시간적으로 ‘먼저’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시간으로 말하면 3시가 4시보다 먼저이고 2시가 3시보다 먼저인 것처럼 이렇게 시간적인 순서에 있어서 먼저란 말이 사용 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는 그런 시간적인 순서에 꼭 매이지 않고 어떤 의미, 질서, 중요성 이런 의미에서 먼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뜻이 같은 단어로 이 두 가지 뜻을 각각 다르게 쓰는 구절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토스란 말을 똑같이 써도 어떤 곳에서는 시간적인 순서가 먼저다 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같은 단어 프로토스를 써도 의미나 중요성에 있어서 으뜸이다, 먼저다 그런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 먼저라는 프로토스란 말은 본문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교적으로 사용되었다. 프로토스란 두 가지 의미를 비교적으로 대조시킨 것이다. 첫 번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있는데 그 두 종류의 사랑을 비교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먼저이다. 라고 프로토스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말 뜻은 그 문맥을 통해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의 피조물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지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있고, 부부간의 사랑이 있고 친구에 대한 우정이 있고 우리 속에 사랑이 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이 심어진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 그 사랑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은 우리 속에 원래 자연적으로 있던 사랑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사랑은 전적으로 먼저 하나님께 있던 사랑이 우리 속에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사랑의 피조물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이 사랑의 능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나중에 성경공부 할 때 이 사실이 계속해서 되는데,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할 때 사도들이 바로 이 개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래서 오늘 읽었던 그 본분 말씀을 특별히 먼저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해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시간적인 순서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시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먼저이다. 그런데 그 시간적인 순서라는 의미를 더 뛰어넘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시간적인 전후 관계 이상의 의미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우리의 사랑이 기원한다고 하는 좀 더 깊은 뜻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보다 시간적으로 먼저이다.

그리고는 기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수동적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능동적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원정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분명한 것은 시간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나중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먼저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 다른 곳으로 가 봐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 계획 속에 나타난다. 성경에 보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보다도 먼저 있었고, 만물이 있기 전보다도 먼저 있었다. 이쪽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보다 먼저 있고 만물보다도 먼저 있었던 훨씬 오래된 사랑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하나님의 그 구원 계획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었다.

사도행전 2장 23절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사도행전 4장 28절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서부터 기인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시는 대로 내어준바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결과라고 말씀한다. 그 십자가가 있는 역사적인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이 땅에 허락하실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인 원인 말고 더 높은 차원에서의 십자가에 관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이다.

다시 말해 우리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 연류 된 수많은 역사적인 상황들이 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로마의 집정관과 뜻을 맞추어가지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고 하는 이 모든 정황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정황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고자 하는 (영흔)전에 계획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계획에는 아주 포괄적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계획안에는 예수님이 어떤 모양으로 죽으실 것인가 만을 예정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 관계된 사람의 각자의 역할까지도 하나님이 다 예정하신 것이다.

성경을 잘 보면 가롯 유다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것도 이미 예정하셨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예정하셨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제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는 것도 예정하셨다. 죽으신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도 예정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죽음과 부활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도 예정하셨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몰랐던 일이 생긴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기 나오실 줄 이미 아신 대로, 그가 이미 아셨던 대로 일어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신 대로 일어났던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20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이 창세 전부터라는 말은 (프로카타볼레스) 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성경에 잘 보면 창세전부터라는 말씀이 (그 말세에스캅토)란 말과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전부터 이미 이 말씀은 말세라는 말과 대조과 되고 알리신 이란 말은 (프로기노스코)란 말인데 미리 알았다는 말인데 (프로)라는 말은 먼저 있다라는 말입니다. (프로토스)란 먼저라는 말에서 온 말입니다. 프로기노스코 하나님께서 사건이 있기 전에 미리 알았지요. 그 알리신 말하고 나타내신 할 때 그 나타내신은 반대로 (루벤토스)란 말하고 대조 됩니다. 대조라는 말이 두 쌍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전부터 그다음에 그 말에 대조되는 말은 말세 알리신 바 된다 할 때 그 알리신이란 말이 나타나셨다는 말과 대조가 됩니다. 대조되는 말이 두 쌍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이 능동적인 주어가 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전부다 이 알리신바 되었다, 나타나셨다, 그 창세전부터, 말세 이런 말의 능동적인 주어가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께서 주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우리의 구세주가 되게 하시겠다고 예정하셨다는 말이다. 그 시점은 창세전이다. 그런데 이렇 예정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창세전에 그렇게 예정하셨던 예수님이 말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나타난 것은 나타난 것에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 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그 시작이 창세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혼자 계실 때 만물도 없고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구주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하면 오늘 이 우주 만물이 있기 전에 있었다. 해와 달과 별이 있기도 전이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존재도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주로 예수님을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정하신 영원하신 경륜에 따라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예정하신 대로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점은 창세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된 사랑이다. 특별히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라고 하는 말씀은 이 작정의 목적이 바로 우리 자신들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영혼 전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예정하셨을 때 그 목적이 누구에게 있느냐,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된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니다. 내가 믿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내가 믿기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양자로 받아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믿은 자로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혼 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결과로 믿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 이 기도는 예수님의 중보자로서의 기도가 나타난 기도이다. 우리가 보통 중보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만 하실 수 있고 우리들은 중보기도를 할 수 없다. 우리 형제를 위해서 똑같이 신앙 생활하는 교우를 위해서 협력해서 기도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고 중보해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보자는 예수님 한분만이 중보자가 되실 수 있다. 그 중보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피로 그 백성들의 죄를 사하신 자만이 중보자가 되실 수 있다.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속죄의 피를 바칠 수 있어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중보자의 위치에까지 올린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죄 사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하게 중보자, 말하자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간에 서실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참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중보자가 되는 것이다. 또 중보자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원전의 작정을 입어야 된다.

우리가 방금 읽었던 말씀 베드로전서 1장 19~20절처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이미 작정하신 그 분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지난해에 합동적인 교단에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고 공식적으로 폐지를 결정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중보기도 이 말은 안 하는 것이 좋고 ‘협력기도’ 라는 말이 참 좋다.

어쨌든 이 중보기도가 담겨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 무엇인지 나온다. “아버지여 이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때가 왔다 했다. 이때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때를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때, 이 경륜의 시간을 말한다. 이때는 물리학적인 시간이 아니다. 우리 손에 차고 있는 이 손목시계가 가르치고 있는 물리학적인 시간 4시 5시 6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이미 작정하신 때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작정하신 영원전의 시간,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그 시간이 이제 다가왔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것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예정하신 그 때를 따라 오셨다. ‘때가 차매’ 라고 성경에서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예정하신 바로 그 때에 오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시간표가 있다. 창조의 시간이 있고, 구원의 시간이 있고, 그 구원을 완료하는 성취하는 종말의 시간이 있다. 그 역사를 운행하는 시간표가 있는데, 그 시간표는 이미 이 세상 만물을 짓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과 사건의 때를 정하셨다. 그리고 그 때에 따라서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 우리가 이 땅 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에 세워놓으셨던 그 작정의 틀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급하다. 빨리 응답이 되어야 하고, 빨리 하나님의 반응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되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해나가시는 과정에는 이미 영원 전에 작정 해놓으셨던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아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의 일생을 하나님께서 자기가 영혼 전에 작정해놓았던 시간의 순서와 작정된 때와 장소와 목적에 따라서 이루어져 간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곧 우리를 영혼 전에 예정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생의 주인임을 믿는다.

특별히 요한복음 17장 8절, 21절, 23절, 25절 이 네 구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이루어 갈 때 그 구속 사역은 자기 뜻대로 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백성들의 죄를 감당하고 그 죄를 자기의 몸에 감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볼 때에 안 믿는 사람처럼 비극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 죽으심은 아버지의 뜻대로 된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실연이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24절에 보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창세전에, 벌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물이 있기 전 창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자기의 사람들을 주셨다고 말씀한다. 즉, 구원받을 사람들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고 하나님이 아신바 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이미 영혼 전에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격을 바로 그 사람들만을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으신 것이다.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이성을 초월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위에 보내실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작정한 그 사람들만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가 영원 전에 작정하신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심으로써 대 제사장이 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예수님의 영광은 우리들을 구속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방법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돌아가시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는 그 사건을 통해서 아들을 통해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이 영화는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다. 그 하나님께서 왜 기쁘게 생각하셨느냐 하면 그것이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미 영원 전에 작정해놓았던 사람들을 구속하시는 이 구속의 사건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는 아들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으로 대 제사장이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있을 때 벌써 그가 받을 영광을 이미 받았다고 고백한다. 십자가 위에 올라가신 사건이 높아지는 사건이다.

에배소서 1장 4절~5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제 오늘 성경공부의 요절이다. 이 말씀을 외워야 한다. 이 말씀을 하루에 꼭 한 번씩 묵상하고 이 말씀 속에서 위로받고 기쁨을 회복하고 사망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오늘 읽었던 이 본문 말씀에 보면 아주 인상적이고 강렬한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을 받았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 특별히 이 에베소서 교회에 신앙생활 하고 있던 사람들이 보낸 서신인데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 말한다. 다시 더 넓게 확대하면 모든 믿는 자들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믿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 그 말이다. 그 사람들은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을 받았으므로 말할 수 없이 복되고 작정 된 대로 구원받았으니 또한 더욱 복된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그리스도 안에서 (in hang out to)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이 말은 특정한 의미가 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을 하면 언제나 하나님이 영원하신 사랑을 강조한 말이다. 그냥 기능적으로 예수 안에서 뵌 것이 아니다. 혹은 아무 의미 없는 반복되는 혈륜적 사고가 아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지금 보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지극히 작고 내가 원치 않는 그런 일들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는 말이다. 이 범사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삶의 조건 가운데서 라는 말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의 자리에 내가 거느릴 때가 있다. 정말 내가 생각지 못했던 사고를 당하게 되기도 하고, 정말 꿈에도 원치 않는 일을 내가 당하게 된다. 그런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삶의 자리에 내가 있던지 간에, 내가 원했던 간에 또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간에 그런 삶의 자리에 내가 있게 됐을 때 감사하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는 다른 것이 없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영원 전에 우리를 예정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영원하신 구속의 사랑을 생각하고 우리의 영혼 전에 작정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 자리에 있던지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이 감사의 조건은 행실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지 않고 더 높은 곳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감사의 출발이 우리를 작정해 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있다. 그리고 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말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로서는 감사할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창세전에 선택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본문에 있는 것처럼 다시 돌아가서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단정 짓는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을 강조한 말이다. 창세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며 성경에도 계시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는 유일하게 우리를 택하신 이유를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라고 했다. 우리를 택하신 것이 왜 하나님에게는 기쁨이 되는지 우리로서는 알지 못한다. 나쁜 사람을 왜 택하시고 기뻐하셨는지는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마지못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다. 우연히 우리가 그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그 예정명단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초청을 통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영혼 전에 우리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기 전에 이 만물도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셨다. 기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작정해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실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우리의 머리에 담을 수 없고 우리의 가슴으로 품어 안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랑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속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평생을 두고 우리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도 깨달을 수 없는 사랑이다. 사도바울은 일평생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다.’ 라고 했다. 이것을 외우기 힘들지만 간단하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면 우주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우주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높은가를 깨달아 보려고 이제 측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좌우를 보면 넓이이고 이 좌우로도 끝이 없다. 오른쪽으로도 끝이 없고 왼쪽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이 끝이 없다.

그래서 앞뒤로 어떤가 싶어서 앞뒤를 보니까 자기 앞을 봐도 끝이 없고 뒤로 봐도 끝이 없다. 이것이 길이다. 그리고 높이는 높이 봐도 끝을 알 수 없고 그 깊이를 봐도 그 밑바닥을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우주에 서서 하나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이 높이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에 감격하여 붙잡힌 자가 되어야 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어떻게 그 기쁘신 뜻대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셨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구원받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 머리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그림자가 먹구름이 가득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중생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사망에 이르는 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선물로 받고 양자에 이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우리 위에는 하나님의 뜻과 기쁨이 충만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노함 때문에 그 사람 사는 가정이 불행하고 그 사람이 속해있는 단체가 어지러워지고 가는 곳 마다 슬픔과 좌절이 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다.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은 우리들을 비추는 모형이다. 요셉이 가는 곳 마다 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구덩이에 던져진 자가 되었지만 그가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형통하였다. 왜냐하면 요셉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수 천배, 수 만배, 수 백만배 기뻐하심이 오늘 예수를 통해 믿은 우리들을 위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오늘 믿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영혼 전에 우리를 기뻐하신 하나님의 그 뜻대로 된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예정의 사실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영원한 우리의 구원받은 운명, 우리의 구원받은 앞으로의 생이 영원토록 계속 될 것이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성경말씀에서 영원한 구원이라 말할 때 이 영원한 구원은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과거에 이미 예정 되었다는 말이다. 즉, 이 영원한 구원이란 구원의 영원한 과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미 영원한 과거에 이미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작정된 결과이다.

여기에 믿는 자들이 구원의 확신과 안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된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내 생애를 마감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곳에서 어떤 모양으로 우리 생애를 마감하게 되든지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보장되어 있음을 믿으면 된다.

그래서 에배소서 3장 19절 말씀처럼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다. 보통 이 성전 문 앞에 가면 우리나라는 그런 것이 없지만 미국 성전 문 앞에 가면 애완동물 찾는 광고가 많이 있다. 개나 고양이를 찾는 광고가 있다. 이런 광고에 걸린 그 상금을 보면 굉장히 높다.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높은 상금은 2천불을 준다는 상금이 있었다. 그 개한마리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을 보니 개도 제가 보기에는 별로 작고 볼품이 없는데 그 주인이 그 개를 찾아주면 2천불을 주겠다는 것다.

생각하기엔 그 강아지를 아마 2천불의 1/10, 200불만 줘도 살 거 같은데 2천불씩이나 주고 찾는 것이다. 그래서 애완동물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2천불을 주고 왜 찾습니까 라고 생각할 것이다. 개의 수명이 8~9년 밖에 안 되고 얼마 안 있으면 죽을텐데 또 개가 나이가 들면 성인병에 걸린다. 내가 있던 교회의 교인 중 한분은 개를 9년째 키우는데 개가 관절염도 하고 당뇨도 하고 별것 다한다. 마치 사람들처럼 정기적으로 출입한다.

아파도 그 때 맞춰서 잘 못가는데 그 주인이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그 주인 차에 타면 시트가 가죽이 아니라 천이어서 개털이 너무 많이 붙어 있다. 그래서 목사님 타세요하고 문 열어 주면 너무 지저분하고 양복에 다 붙을거 같아서 안 타고 싶은데 타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타고나면 이 개털 때문에 아주 혼이 난다.

그런데 그 개를 키우는 사람은 하여튼 그 개를 사람처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한다. 그런데 그렇게 성인병이 걸리는 개를 왜 찾는가? 차라리 돈 주고 새것을 사오면 병원도 덜 가고 돈도 더 적게 들고 좋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찾는 것이다. 그래서 2천불씩이나 내 걸고 개를 찾는데 그 집을 나간 개는 자기를 찾는 주인의 인격적인 사랑의 차원을 모른다. 개는 자기를 향한 인격의 사랑은 개가 받을 사랑이 아니다.

사실 그 사랑은 사람에게 쏟아질 사랑이다. 그것이 인격적 사랑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영혼이 담겨 있는 선물이다. 그런데 그것을 짐승이 받는다. 그런데 그 짐승은 그 인격적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절대로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람과 개의 차이 때문이다. 존재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개가 알고 있는 주인의 사랑은 그저 때에 따라 먹이를 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주고 재워주고 안아주는 그것 정도로만 이해할 뿐이지 정말 자기에게 주어지는 그 인간의 영혼 속에 담겨있는 그 사랑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마치 그 미물인 짐승과 사람사이에 있는 존재의 차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존재의 차이는 훨씬 더 크다. 그는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이다. 그는 위에 있고 우리는 아래에 있다. 그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런데 이 피조물인 우리가 영원히 살아계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예수그리스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그 사랑의 깊이, 그 사랑의 과거, 그 사랑의 진실 됨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만 알고 있다.

오늘 여기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래된 사랑으로 계시 되었다. 우리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오늘 이 세상 만물도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가 하시는 데로 우리가 그의 뜻을 따라 구원을 받았다.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평생의 감사의 제목으로 기도해야 된다. 

 
제공 : 리폼드 뉴스(http://www.reforme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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