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역사문화재단 산하 부천탐사회
제73차 정기탐사
【소백산철쭉제로 떠나는 단양탐사】
▣ 일시: 2004년 5월 11일(화) 07:30~
▣ 코스: 소백산철쭉제(2,184m)→ 단양8경중 도담삼봉→ 신라적성비
▣ 강사: 최현수(부천역사문화재단 소장,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단양군은?
충청북도, 경상북도, 강원도의 3도 접경인 단양군은 남한강이 26㎞를 동에서 남서쪽으로 관유하고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남한강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소백산 국립공원과 월악산 국립공원 2개의 지역으로서 해발 1,000m 이상 되는 산이 500여 개소이며 1,500여개의 크고 작은 계곡이 있다.
丹陽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의 가취(佳趣)에서 시작되었으며『연단조양』의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며 조양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란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정감록>에 나오는 兩白(태백, 소백)지간으로 인간이 무소유로서 가장 살기 좋았기에 70만년 전부터 단양에 사람이 살았다는 선사유적지가 5개소나 현존하며 83%가 산인 단양은 한강과 수많은 골짜기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려 글자 그대로 명산대천 山高水麗한 천혜의 청정관광지역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영토확장 분쟁지역이었기에 온달산성, 적성산성, 독락산성, 가은암산성, 소백산성 외 20여개소의 산성이 있어 삼국의 문화가 골고루 꽃핀 지역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람들이 온순하고 순박하고 토지는 척박하다고 했으며 토산품인 竹, 대추, 丹山烏玉은 고려 때 중국인들이 특히 좋아했고 인삼, 눌어, 안식향, 白花蛇, 청석, 송심은 진상품이었고 최근에는 담배, 고추, 마늘이 농업 특산물이다. 옛날 영남과 서울을 연결하던 죽령과 한강 뱃길을 이용하던 뗏목과 소금뱃길이 충주댐으로 사라지고 5번국도와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새로운 문화와 관광을 겸비한 도시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단양8경은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은 일컫는데 특히 도담삼봉은 조선조 정도전과 관련이 있다. 정도전은 단양읍 도전리에서 태어나서 단양소재지의 지명이 도전리이며 정도전이 어린 시절을 단양의 수려한 산수를 벗삼아 살았기에 정도전의 호가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을 따라 三峰이다. 정도전은 어린 시절 도담삼봉과 도전리를 오고가며 단양산천에 많은 영향, 특히 고수에 있는 종지봉에 심취하여 字를 종지라 하였다. 단양에는 정도전의 출생에 관한 많은 전설과 어머니에 대한 일화도 있지만 정도전의 어릴 때 총명하고 재치있는 전설이 많이 전해온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는 본래 고구려 赤山縣, 혹은 赤城縣이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현재의 제천시)의 영현이 되었다. 551년(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진흥왕이 순시할 때 세운 적성비가 남아 있다.
940년에는 丹山縣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원주에 속했다가 뒤에 충주로 이속되었고, 고종 때 고을 사람들이 합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1318년(충숙왕 5) 단양으로 이름을 바꾸고 知郡事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단양군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충주부가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통폐합에 따라 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영춘군은 고구려의 을아단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子春이라 개칭하여 내성군(현재의 제천시)의 영현이었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쳐서 원주에 속하였으며, 1399년(정종 1) 충청도에 이관하여 감무를 두었고,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춘군이 되어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북도에 속했다. 1976년 영춘면 서부지역 5개리에 별방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9년 단양면, 1980년 매포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2년 1월 구 단양출장소가 단성면으로 승격하였다. 1979년 단양면이, 그리고 1980년 매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5년 충주 댐 건설로 단양군의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신단양이 새로 건설되어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다. 1992년 단양읍 구단양출장소를 단성면으로 승격하여 1군 2읍 6면이 되었다.
■ 도담삼봉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 한가운데 높이 6m의 늠름한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북쪽 봉우리를 처봉이라 하고 남쪽 봉우리를 첩봉이라 하며 세 봉우리가 물위에 솟아있다.
이곳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청유하였다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본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살펴볼수록 그 생김새와 이름이 잘 어울려 선조들의 지혜와 상상력에 새삼 감탄스러움을 느낀다.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소년 정도전이「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장군봉에는 ‘삼도정’(일명 능영정: 도담삼봉 가운데 봉우리에 있는 정자. 군수 조정세가 세웠는데 안협이 민폐가 된다하여 헐었으나 군수 이준홍이 다시 세웠음)이라는 육각정자가 있는데 나룻배를 타고 이곳에 올라 시 한 수 읊으면 누구라도 신선이 된듯하다. 일찌기 퇴계 이황 선생은 다음과 같은 주옥같은 시 한수를 남겼다.
山明楓葉水明沙(산명풍엽수명사)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三島斜陽帶晩霞(삼도사양대만하) ⇒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爲泊仙사(떼사)橫翠壁(위박선사횡취벽) ⇒ 신선의 땟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待看星月湧金波(대간성월용금파) ⇒ 별빛 달빛아래 금빛 파도 너울지더라
■ 소백산철쭉제
연분홍 철쭉이 온 산야를 뒤덮어 천자만홍을 이루는 매년 5월말경 소백산과 시내일원에서 철쭉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축제한마당이 펼쳐진다. 오색찬연한 불꽃놀이를 시작으로 소백산에서는 산신제와 철쭉여왕선발, 꽃길걷기대회 등이 열리며 철쭉요정 선발대회와 민속장터, 충주호 뗏목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연일 곳곳에서 성대하게 펼쳐지며 자연의 신비와 고귀한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철쭉의 아름다움과 함께 소중한 추억의 장을 엮어준다.
소백산철쭉제는 단양문화원이 1983년부터 관광단양을 외부로 홍보하고 지역경기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소백산 철쭉제를 개최하고 있다. 소백산 연화봉을 비롯한 비로봉, 국망봉 일대가 철쭉의 군락지로 유명하며 행사기간 중 철쭉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또한 단양군에서는 등산객들에게 좀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철쭉 3만여 그루를 소백산 일대에 식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소백산철쭉제기간에는 철쭉여왕 선발대회, 철쭉노래자랑, 통일기원제 등을 경험할 수 있으며 특히 철쭉여왕 선발대회는 소백산 연화봉 정상의 철쭉군락지에서 지역 및 전국 등산객 미혼여성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미인선발대회로 소백산을 찾은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으며 소백산의 철쭉을 외부로 홍보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 한강을 둘러싼 단양의 삼국시대 유적 - 단양 신라적성비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 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 <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석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 6~11년(545~550)경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1978년 1월 6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으며, 규모는 높이 93㎝ 상폭 107㎝ 하폭 53㎝ 두께 25㎝로 석질은 자연석 화강암으로 창녕진흥왕 순수비보다 10년 전에 만든 국내 최고의 금석문이다.
■ 최현수 소장 약력
인하대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논문: 신라왕실의 제사)를 전공한 후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부천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쓴 <부천시사> 발간을 총괄한 상임위원으로서 집필과 편집을 담당하였습니다.
1991년 부천역사연구소를 개설하여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그 동안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박진의 기념비를 건립할 수 있도록 자료를 발굴하였으며, 한국정신 문화연구원의 명예 향토문화 연구위원으로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부천관련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향토예비군.민방위 정신교육강사,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가사.민사조정위원, 부천의 의인 박기서석방운동본부 본부장, 문화유산의 해 부천시추진위원회 상임위원, 기전향토문화연구회 연구위원, 부천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위원, 부천시민신문 편집자문위원, 중동신문 논설위원, 부천육영재단 자문위원, 부천시 어머니합창단 운영위원, 부천역사문화학당 훈장, 부천 청소년 교향악단 단장, 부천 여성스트리트오케스트라 단장, 부천도로명 및 건물번호 부여사업 자문위원, 수주 문화의 거리 심의위원, 부천지역사회교육협의회 부회장, 경기도박물관대학 초대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겸 경기서부지역 간사, 경기도 향토사연구협의회 출판이사, 경기기사학회 회원, 부천시 지명유래 위원(3회 연속), 초등학교 3학년 사회교과서 <우리가 사는 부천시> 감수위원, 부천교육청 중등교과 심의위원, 부천교육청 교명선정위원, 부천교육청 중등 사회교재 자문위원, <부천을 움직이는 사람들>편찬위원회 상임위원, 부천역사연구소출판사 태백 대표, 부천역사문화재단 소장, 도원초등학교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토박이의 범주를 붙박이형. 정착형. 미래형 등으로 한층 넓힌 <신 토박이론>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부천사 연구> 1집, <부천인물.인명사전>, <부천향토사-돌팡구지에서 부천까지>, <고강동 밀양변씨의 숨결>, <재미있는 부천이야기> 1.2.증보판, <부천역사기행 자료집> 1.2.3.4, <사진으로 보는 부천의 어제 그리고 오늘>, <부천택리지> 1.2.3판, <기서지방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부천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경기도 중부지방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경기도 남부지방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등이 있고, 영상물 <부천영상실록-문화유적편>, <부천영상실록-역사편>, <부천영상실록-신토박이편> 등을 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