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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선운사가 있는 고창, 십승지지 생거부안 | ||||||||||||||||||||||||||||||||||||||||||||||||||||||||||||||||||||||||||||||||||||
제2회 富川市中等校長團 연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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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수 기자 bicfun2000@yahoo.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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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타임즈 : 최현수 기자
(사)부천역사문화재단과 드림씨티방송, (주)경인여행사는 지난 5월 21일(금) ~ 22일(토) 1박 2일간 제2회 富川市中等校長團 연수【세계문화유산 고인돌과 천년 고찰이 있는 고창․부안을 찾아서】를 다녀왔다. 전날까지도 비가 오락가락하였는데 이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5월의 화창한 날에 다녀온 것이다. 부천시 관내 중등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최현수(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소장의 안내로 고창의 선운사, 고인돌, 고창읍성(일명 모양성), 동리 신재효 고택, 부안 이매창 묘, 내소사, 반계 유형원 유적지 등을 답사하였다. 이번 연수는 경기도 부천교육청, 부천상공회의소, (주)경인여행사가 후원하였다. 4월이면 동백꽃이 흐느러지게 피어있는 천년 고찰 선운사를 보유하고 있는 고창은 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는 부천의 1/10에 못 미치나 면적은 11배나 된다.
고창은 천혜의 관광자원이 산재해 있어 관광의 보고로 꼽히는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고인돌군을 비롯하여 기암괴석과 울창한 밀림이 가히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빼어난 선운사, 전국 유일의 답성놀이를 자랑하는 고창읍성 등 발길 닿는 데마다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또한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申在孝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동리 고택과 동리국악당, 전국에서 유일한 판소리 박물관은 우리나라 판소리사를 되돌아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고, 미당 서정주의 시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미당 시문학관은 해마다 문학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있다. 고창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갯벌에서 잡아 올린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을 최고로 꼽고 있는데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풍천에서 잡은 장어의 쫄깃하고 구수한 맛과 복분자술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맛의 묘미 때문일 것이다. 선운사 입구에는 부도전이 있다. 이 부도전에 있는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는 추사가 친히 짓고 썼는데, 추사 글씨 중에서 백미로 꼽힌다. 이 비석은 조선 철종 6년(1855)에 조선시대의 대명필가인 추사가 썼다가 추사 사후 2면 후에 건립하였다. 백파율사는 조선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오랜 정체기를 헤치며 조선 후기 불교의 참신한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이다. 이와 같은 백파율사의 업적을 추사가 찬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백나무숲은 선운사 입구 오른쪽 비탈에서부터 절 뒤쪽까지 약 30m 너비로 연속되었고 5,000여평에 3,000여 그루의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나무의 크기는 6m 정도이다. 이 동백나무들은 언제 누구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선운사가 창건된 백제 위덕왕 24년(577) 이후에 심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 동백나무숲은 거의 순림에 가까우며 숲 밑에도 별로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고 있다. 동백나무숲을 보면서 송창식의 선운사가 생각났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선운사 대웅전, 영산전과 뒤편의 팔상전을 병풍처럼 두르고 감싸듯 자생하는 동백은 자생지로는 최북단에 위치하며 수령이 500년가량 되는데 4월에 꽃을 피우고 질 때는 눈송이처럼 후두둑 떨어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고창은 고인돌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2,000여기에 이르는 고인돌 무리가 全郡에 분포되어 있는 가운데 매산리 일대에는 약 450기가 밀집되어 있어 2000년 전남 화순, 강화도 고인돌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인돌을 구경하고 나서 우리 일행은 읍성으로는 원형 그대로 보존된 모양성을 다녀왔다. 고창읍성이라고도 불리는 모양성은 원형보존이 잘된 석축 성곽으로서 유명하거니와 이 성에는 전국 유일하게 답성 민속을 전승 보존해 오고 있어 차원 높은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성은 더욱 전국에서 손꼽혀 왔다. 그래서 고창읍성을 답성하면 무병장수하고 저승길에 극락승천을 누린다는 속설 때문에 지금도 그 효험도가 높다는 윤달에 그리고 윤달 중에서도 저승문이 열리는 날인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소복단장한 여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돌을 머리에 이고 자기소원을 빌면서 각 곡성소리마다 저승 가는 노자돈(자기가 가꾼 오곡)을 놓아가며 성 둘레를 세 바퀴씩 돌고 난 후에는 차가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질탕하게 노는 풍습이 있다. 고창읍성에서 답성놀이를 한 후 기생 시인인 매창를 만나기 위해 부안으로 넘어 갔다.
38세의 나이로 죽자 거문고와 함께 부안의 봉덕리(매창이 뜸)에 묻혔으며, 평생 수 백편의 시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외어 전하던 58편을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을 엮어냈다. 매창을 만난 후 숙소가 있는 변산면 격포항으로 떠났다. 이곳은 변산반도의 최서단으로서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시대 때 전라우수영 관하의 격포진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바닷물의 침식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의 백사장과 맑은 물이 함께 어울려 빼어난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비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부안군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호남평야의 남서부, 변산반도, 서해상의 섬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평야의 부안’, ‘산의 부안’, ‘바다의 부안’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산과 골짜기가 빼어나고, 땅과 바다가 기름져 인심이 너그럽고 생활이 윤택하니,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는 부안을 일컬어 ‘속여단자(俗如蛋子)하고 현봉수신자잠총(縣封誰信自蠶叢)’이라 하여 풍속의 순후함과 뿌리가 일찍부터 깊었음을 높이 찬양한 바 있듯이 살기 좋은 생거부안(生居扶安)으로 지칭되어 온 곳이다. 예로부터 전국에서 기근과 병란의 염려가 없어 피난하기에 좋은 땅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다. 아침을 먹고 나서 천년 고찰 내소사에 들렸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 사찰의 중심에 위치하는 예불 공간이다. 불탔던 것을 1633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는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건실한 구조와 화려한 장식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특히 연꽃과 국화꽃 등 각기 다른 꽃살무늬를 조각한 전면의 창호는 정교한 공예품이며, 길게 뻗어 나온 쇠서(나무를 소의 혀 모양으로 다듬어 기둥 위를 장식함)들의 겹쳐진 모습과 추녀 밑을 장식하는 용머리는 겉모양의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화 경향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즉 대웅보전의 문살은 초화문을 투각한 정교한 공법이며, 내부는 모두 연꽃 봉오리와 구름을 조각하여 운궁이라는 장식적인 형태가 특이한 건물이다. 대웅전의 기품만 봐도 오래된 절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빛바랜 단청으로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그리 높지 않는 석축 위에서 고요히 여러 전각을 굽어보고 있다. 대웅전 3칸의 여덟 문짝마다 꽃을 새겨 놓았다. 지금은 빛이 바래 쉽게 보이지 않지만 처음 단청했을 무렵에는 연꽃, 국화꽃을 문살마다 피워 대웅전을 꽃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처님 공양 중 가장 으뜸이 등(燈) 공양이고 둘째가 꽃 공양이라 했는데 이제 그 빛이 다 바래져 무채색의 꽃문양만 남았다. 오랜 풍상에 나뭇결이 다 드러난다.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문살에서 조상들의 체온이 전해진다.
내소사는 변산반도의 남단 바닷가에 위치하여 해중 사찰적 성격이 짙으며 부처님이 좌정하고 있는 궁전식의 대웅보전은 해발 424m의 큰 바위 산인 취봉 또는 관음봉을 등에 업고 자리하였다. 내소사를 나와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 유적지를 들려 보았다. 서당이 있는 곳은 최근에 불이 나 폐허가 되었지만 서당만은 피해를 입지 않아 신통하였다. 이곳은 반계가 20여 년간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했던 장소로, 우리나라 실학의 태동지라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곳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서울에서 출생한 선생은 병자호란 이 후 여러 곳에 옮겨 살다가 32세 되던 1653년(효종 4)에 그의 9대조인 유관의 사패지(임금이 공이 있는 신하에게 하사한 땅)가 있던 이곳 우반동에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 우공기주편을 읽고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반계수록>에는 그의 사상과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개혁하고 부국․부민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국가 건설 방안이 주된 내용으로 담겨 있다. 반계 선생의 개혁사상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이재 황윤석 등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그는 하(昰)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타계한 뒤 부안을 떠났다. 그러므로 부안에는 그의 후손은 살고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에 그가 살았던 집터에 다시 집을 복원하였고 또한 유적비를 세워 그가 살았던 흔적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힘들었지만 의미 있는 연수에 교장선생님들의 얼굴에 희열이 감돌았다. 최현수 최현수 소장님은 부천의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부천역사기행과 풍물기행을 연중 실시하고 있습니다. 전화:032-657-64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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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6월 01일 ![]() |